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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 이승열사무총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야곱, 이삭, 위대한 지도자 모세, 다윗, 그리고 예수의 조상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된 여인 중 하나인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 등이 난민의 생활을 했었고 예수님은 친히 어린 아기 시절에 베들레헴의 학살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살았던 분이셨다. 즉 하나님이 친히 난민으로서의 경험도 하시고 그들의 입장을 옹호지지 돕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는 본류가 아닌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라는 여종도 죽어가던 중 도와주시고 살려주신 구호의 역사가 있다. 여기서 하갈은 나를 살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독일개신교회는 지난 2017년에 교회대회의 주제성구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정하였고 시리아 난민 120만 명을 받아들인 독일의 교회적 입장과 역할을 논한 바가 있다. 우리나라 또한 난민의 역사를 간과할 수 없으며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난민들의 임시정부로 시작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전쟁난민들이 국제적인 도움으로 연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 한 후 난민법이 2013년에 발효되었고 그동안 누적된 난민신청자는 모두 2017년 당시 40,470명이며,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4.1% 그리고 인도적 체류를 허락받은 자들은 7.6% 모두 합해서 11.7%인데 전 세계의 통계(난민 인정이 24.1%, 보충적 보호 12.3% 합 36.4%)에 비해 매우 저조한 통계라 할 수 있다.    현재 제주도에 무사증으로 입국하여 난민신청을 한 외국인들은 금년에 모두 1,055명인데 예멘 549명, 중국 353명, 인도86명 그 외 소수의 몽골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유독 예멘인들은 더 이상 무사증으로 입국하지 못하도록 법무부가 지난 6월 1일자로 조치를 했으며 대부분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을 보장해주었는데 예멘인들은 제주도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출도제한 조치를 감행하여 제주도에 갇혀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들이 무슬림, 가짜난민, 이슬람선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등등의 잘못된 오해와 가짜뉴스와 더불어 제주도민들이나 교회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혐오적 배타적 포비아(공포, 두려움) 현상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먹고, 자고, 일하는 생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사회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주도의 기독교의 반응도 대부분 도민들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난민들에 대한 기독교와 교회의 입장은 어떠한 차별 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과 과제임을 깨닫고 그들을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먹이고 재우고 일자리를 제공하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문화를 익히게 하고 섬기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모금에도 동참하고 있는 자들도 기독교인들이다. 특히 (사)제주외국인평화공동체 부설 제주외국인이주민센터(공동대표=홍성직)는 현재 64명의 예멘난민신청자들을 수용하여 돌보고 있다.    현재적 난민에 대한 오해와 배타적 혐오적 자세를 바른 성경적 이해로 극복하고 전향적 자세로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즉 그들은 작은 자이고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믿음의 열매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선교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고 찾아가서 선교하느라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이치와 전략상 맞지 않은 것 같다.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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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8-02
  • 올 여름 전기는 안전한가?
    ▲ 유만석목사   요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연일 기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22일 서울의 기온이 섭씨 38도를 기록하였다. 이런 더위는 수십 년 만의 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백여 년만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런 푹푹 찌는 무더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겪는 일이라고 하니, 자연 재해가 우려되고, 그 재앙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력수요도 지난 20일, 8,808kw로 역대 최대 전력 수요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2016년 8월에 8,518만kw를 기록한 것을 다시 경신한 것으로, 올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 갈아 치우는 기록적인 전기 수요량이다.   이제 8월 달에는 더 많은 전기량을 사용하게 될 터인데, 냉방과 가전제품에 주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서민들이 전력난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현재 정부가 확보한 예비 전력량은 10% 남짓으로 그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럴 경우 가정에도 문제가 되지만, 전기를 통해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과 기업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정부에서는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가, 급한 나머지 그 원전 가동을 지난 21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로써 전체 원전 24기 가운데 14기만을 가동하던 것을 현재는 17기로 늘려 가동하고 있으며, 앞으로 19기까지 늘릴 계획이란 언론 보도가 있다.   현 정권에서는 대통령 공약으로 탈원전 정책을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신규 원전 전면 중단 및 건설계획 백지화,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 및 월성 1호기 폐쇄, 탈원전 로드맵을 수립하는 공약을 발표하였었다.   그리고 지난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탈원전 에너지 전환 정책을 구체화하면서, 원자력계와 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19일 대통령이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원자력발전소 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천명했었다.   이에 따라, 원자력발전소인 신고리 5/6호기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공론화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지난 해 10월 20일 공론화위원회는 찬성 59.5% 대 반대 40.5%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을 재개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원자력에 대한 안전의 우려와 친환경적인 재생에너지에 대한 정책은 필요하겠으나, 아직 뚜렷한 대책과 대비가 없는 가운데, 성급하게 ‘탈원전 정책’으로 가는 것은, 이번의 경우처럼 폭염이 계속되고, 전력수요의 급증으로 인하여, 전기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지 않을까 염려하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기 발전을 함에 있어, 여러 가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에너지관리공단의 통계에 의하면, 석유가 40.1%, 석탄이 27.8%, LNG가 15.4%, 원자력이 11.6%, 신재생이 4.6%, 수력이 0.5%이다. 그러나 전기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은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이 kwh당 250원인데 비해, 원자력은 68원 정도에 불과하다.   원전이 중단된 가운데 전기량이 급증하면, 당장 석탄과 LNG 연료를 사용하여 발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료는 미세먼지와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단점이 있다.   탈원전 정책을 펴는 정부로서도 중장기적인 계획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2030년이 되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20%로 늘린다고 한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생산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들어간다.   올 여름 날씨는 기록적인 맹위를 떨치고, 전력 수급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우리나라 전기는 안전한가를 묻고 싶다. /한국교회언론회 대표·수원명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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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7-26
  • 성숙한 신앙, 건강한 교회
    ▲ 이정구  신앙의 척도 기준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연령 별로 신앙양태를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대 이후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2000년 대 신앙생활을 시작한 젊은 층의 신앙양태가 다름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천당과 지옥’을 강한 어조로 가르쳤고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다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성경구절에서 특정 부분을 따오거나 응용하여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에는 ‘교인군사 같이 구주 지휘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매우 전투적이며 극단적인 문장들이 많다. ‘주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군대, 전투와 같은 이미지와는 퍽 다르게 느껴지지만 정작 교회는 박해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인들에게 순교에 가까운 무조건적 신앙과 전도하기를 요구하고 가르쳐왔다. 급기야 어느 신자는 불상을 훼손하고 심지어 사찰을 정복이라도 한 듯이 절터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지신밟기와 유사한 상징행위를 했다.   최근 제주도에 예멘 인들이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것을 비롯하여 이주노동자로 입국하여 국내에서 3D 직종에서 노동하며 생활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증가를 일부 한국인들은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최근 몇 소수 대학에서는 이슬람과 관련된 센터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이 기구의 기능은 대체로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거나 이들이 기독교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앞으로 국내에 무슬림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많은 교회들은 그 긴장도를 더 높여 갈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마찰은 주로 기독교 측에서 문제를 야기해 왔는데 최근 마찰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땅 끝까지 교인군사’로서 기독교복음를 전파해야 하는데 다른 종교들이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 왔던 탓이다. 지상에서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들을 모조리 말살하고 나면 정말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필자의 엷은 신앙 탓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상에 오직 기독교만 있다면 인간들 사이에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평화가 올까? 아마 가톨릭과 개신교사이, 개신교 안의 수많은 교단 분쟁이 더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유일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우상이요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죄목은 국내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십여 년 전 ‘신의 역사’를 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부의 가톨릭 수녀 카렌 암스트롱이 느닷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비난이 크게 일자 카렌은 “내가 어느 종교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대응을 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 글에 격노할 분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시대는 급변하는데도 주입식 교육으로 무장시키고 타 종교를 말살하도록 경주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기독교가 적대시 하고 있는 불교, 이슬람과 이런 이단 종파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물리쳐야 할 진정한 적이 어느 쪽인지 분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고는 하지만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감성적 확신 안에도 이성은 있는 것이다. 이성이란 계산한다는 의미인데 내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신앙이 혹 이웃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화는커녕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산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앙을 굳건히 지키겠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착각이며 우상이다. 4차 산업, 다문화 사회에서 타 문화, 타 종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평화를 위해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면 하나님께서 격노하실까? 성숙한 신앙이 교회를 건강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성공회대 총장·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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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7-18
  • 교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자
    ▲ 지왕철목사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실태를 조사한 결과 기독교는 타 종교에 비해 종교적 헌신도는 높지만 호감도는 가장 낮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실태를 반영하듯 현재 기독교는 일년에 3천 곳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으며, 이 숫자는 한국교회의 1/20에 해당한다. 매년 교회가 새로 개척되고 있어서 당장 교회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교회 숫자가 감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10년 전 20대는 45%가 종교를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30대가 된 현재 38%만 종교를 믿고 있다. 또 20대도 31%만이 종교를 갖고 있다. 젊은층들을 중심으로 한 탈종교 현상은 종교인구의 고령화와 맞물려 향후 장기적으로 종교인구가 감소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한국교회는 머지않아 유럽교회처럼 생명력을 잃고 쇠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생명력 있게 시작된 성령운동으로 말미암아 세계최대의 부흥기를 지나온 한국교회가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은 고질적인 분열과 물질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교회들이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하기 위해 찾아오던 한국교회가 점차 물질주의 영향으로 질적향상보다는 양적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했고, 이는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를 불러왔다.   참된 진리를 전하기 위한 설교가 잘못된 사상의 영향으로 더 많은 군중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세워진 성전이 카페와 은행, 편의점 등 최신시설을 갖춘 복합쇼핑몰과 다를 바 없이 변질되었다. 교회가 물량화 된 것이다. 규모의 개념이 생기고, 외적인 크기를 따지게 되고, 급기야 비자금 등 ‘목양’이 아닌 ‘경영’의 행태가 교회 곳곳에 자리잡게 됐다.   교회에 침투한 유럽의 철학은 인간의 삶과 행복, 번영과 즐거움을 추구하게 하여 복음의 생명을 사람들의 육체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는 기복적 신앙으로 변하게 했다. 또 능력 있고 위대한 종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멀쩡한 건물, 심지어는 건축한지 몇 년도 안 된 건물을 헐고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 건축에 사활을 걸게 했다. 교회(에클레시아)의 본질을 바꿔 믿는 이들이 주의 몸된 교회를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참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건물이 교회라는 무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진리, 헌신, 봉사가 자리잡던 자리에 교회의 성장, 명예와 권력 지향적인 태도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효율성을 앞세운 비즈니스화 된 목회, 지나친 외적성장의 집착 등 물량주의가 만연해졌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은 교인들의 숫자만 늘어난다면 그 결과를 발생시킨 수단은 그것이 아무리 악할 지라도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그릇된 인식에 있다.    이제 우리는 회개하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께서 전했던 회개하라는 말씀을 윤리나 도덕적인 회개가 아닌  종교적 유대교에서 돌아서서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뜻임을 깨달아야 한다. 복음의 본질은 율법과 철학, 윤리와 도덕이 아닌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부어주심, 다시오심 등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생명의 복음이다. 교회의 본질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치장한 건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거듭난 생명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가 교회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한국교회 지도자로 나서며 봉사, 헌신, 무릎꿇는 기도와 이웃사랑 실천 등 보이지 않는 참된가치를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새 생명을 불어넣자. /성경원형회복운동본부 대표·예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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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7-11
  • 동성애 축제를 앞두고
    ▲ 이용희교수   오는 7월 14일 토요일 서울시청광장에서 동성애 축제가 열린다.   2000년부터 시작된 서울 동성애 축제가 2015년 부터는 우리나라 가장 대표적인 공공장소인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대낮에 어린 아이들도 함께하는 시청광장에서 퇴폐적인 음란공연은 물론이고, 성인상품 판매, 남녀성기모양의 쿠키판매, 거의 알몸으로 도심 퍼레이드를 하는 등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내용들 때문에 기독교계와 보수시민단체들은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서울시청은 서울광장 사용이 신고제이므로 미리 신고하면 사용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국교회는 2015년부터 서울시청광장에서 진행되는 동성애축제에 반대하는 한국교회 연합기도회를 개최했고 이어서 국민대회를 가졌다. 올해도 동성애축제가 시작되는 7월 14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한국교회는 연합기도회를 갖고 이어서 동성애 축제가 끝나는 저녁 7시까지 ‘생명·가정·행복 페스티발’을 국민대회로 개최한다.   이에 앞서 7월 8일 주일을 가정성결주일로 정했다. 7월 8일에는 초교파적으로 모든 한국교회가 주일예배에서 동성애의 문제점과 함께 하나님이 정하신 1남 1녀의 결혼과 가정, 생명의 소중함을 설교할 것이다.   왜 동성애 반대 국민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까? 위정자들에게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표결로 결정된다. 침묵하는 다수는 카운트되지 않는다.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이 전체를 이끌고 갈 때가 많이 있다. 내게 직접적인 손해가 없다고 방관하거나 올바른 의견을 수고해서 표현하지 않는다면 훗날 우리 모두는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영국교회는 동성애 물결 앞에서 교회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차별금지법(평등법)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형사처벌을 받았다.   19세기에는 전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냈던 영국이 지금은 주일 출석교인이 전 국민의 2% 밖에 안 되는 나라로 전락했다.   “유능하고 충성된 일꾼들은 선교사로 내보내지 말고 한국교회에 남아서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꼭 막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영국교회처럼 몰락할 것이고 한국교회에서 전 세계로 파송했던 이만 칠 천명의 선교사들이 다 한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서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변호사 안드레아 윌리엄스의 절규를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었던 미국과 유럽 교회가 동성애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전 세계는 동성애의 합법화의 물결 앞에 흔들리고 있다. 전 세계교회가 지금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서구에서 몰려오는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거룩한 방파제가 되고, 전 세계에 ‘성결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를지라도 성경의 진리를 말하고 글로 쓰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앞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순교 정신은 하나님과 한국교회의 자존심을 지켰다. 21세기 동성애 물결을 막는 한국교회의 순교적 결단과 헌신은 우리 주님의 자존심을 세우는 거룩한 제사가 될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5-6) /에스더기도운동 대표·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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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7
  • 참된 성도의 삶, 디아코니아
    ▲ 진영석목사   성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연결시키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요10:10-16)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하나님이 최초의 아담에게 내리셨던 문화 명령(장경철교수의 문화읽기 79p,2002)과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던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파함이 마땅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교회 안에서 조차 세속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는 않는가?   개신교회가 시작된 1517년 10월 13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속적 분위기에 젖은 천주교회의 부패상에 대하여 저항한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교황들이 세속적인 통치 권력을 추구하고 르네상스의 후원자임을 자처하며 세속적 가치를 극대화 하려는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 이후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주님의 말씀에 기초한 변화가 교육과 문화와 정치 등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신앙의 유산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   종교개혁자이며 교육개혁가이기도 한 루터가 중세 시대에 교회에서 공동기금을 모아 사회의 빈민 구제를 위한 자활비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성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필요한 곳에 사용해야 한다. 인력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전인적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을 믿는 바,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다시 그리스도만으로」라는 주제로 종교개혁500주년을 지냈던 기독교한국루터회는 올해로 선교 6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를 준비하며 ‘디아코니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디아코니아란, 개신교회에서 실천하는 사회적 ‘봉사’와 ‘섬김’을 말한다. 약자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일, 즉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성도의 모든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디아코니아의 개념은 원래 식탁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발전하여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로날드 사이더는 교회의 네 가지 사역을 이렇게 소개했다. 첫째, 아픈 사람에게 찾아가 약품을 제공하는 구호사역, 둘째, 상처치료와 재활치료를 통해 온전히 활동하도록 개인을 발전시키는 사역, 셋째, 아픈 사람이 다시 병들지 않도록 주변여건을 개선시키는 사역, 넷째, 법이나 사회제도 또는 구조를 개선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의와 공도의 히브리 단어는 ‘체데카’와 ‘미쉬파트’로 정의와 공의로 해석 할 수 있으며, 아모스 5장19절에 같은 단어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디아코니아는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이며 실천 자체가 복음선포이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사명을 수행하는 일.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일을 다 이루셨다.   은혜로 인해 구원 얻은 우리가 교회공동체 안 세속적 가치들을 몰아내고, 성도들과 더불어 진정 풍성한 삶을 누리며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아 선한목자이신 예수님께로 연결시켜야 한다.   평화통일을 논하고 있는 지금 참된 성도의 삶은 디아코니아를 깊이 생각하며 실천할 때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임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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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0
  • 원수를 용서한 이인재목사
    ▲ 김헌곤목사   이인재목사의 선친 순교자 이판일장로는 1930년에 문준경전도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판일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곧 바로 담뱃대와 제사도구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 버렸으며 전 식구들과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문준경전도사가 1932년 임자도에 교회를 세울 때 서양 귀신을 몰고 온 여자라고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지만 이판일·이판성 형제가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이판일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목포경찰서에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였다. 경찰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석방하였다. 이판일은 “나같이 비천하고 못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그 모진 핍박을 당하셨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주님 사랑을 만분지일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후 충직한 이판일은 이후 장로가 되었고 교회의 기둥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지역 좌경세력들은 이판일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동생 이판성 집사와 함께 목포 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국군이 들어옴으로 풀려나 임자도로 돌아온다. 이 장로는 “설사 내가 화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교를 각오했고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10월 4일 수요일 저녁, 이판일은 집에서 가족과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런 전시상황 속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예배는 좌경세력에 발각되어 중단되었다. 그들은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 바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판일장로는 무릎을 꿇고 스데반집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장로는 “아버지여,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판일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으며, 흥분한 좌경세력들은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채 죽지 않고 울부짖는 생명들까지 모래구덩이에 쓸어 넣듯 생매장을 했으니 그 시간은 자정이 지나 10월 5일 새벽 2시경이었다.   이판일장로가 살해당한지 얼마 후 결혼하여 목포에 살던 큰 아들 이인재집사가 해군함정이 임자도에 상륙하던 날 동행하였다. 이인재는 군인들과 함께 지역 좌경세력들을 다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그는 이봉성담임전도사와 교회의 싸늘한 마루에서 밤새도록 통곡하며 기도를 하였다. 새벽녘에 두 분의 음성이 들렸다. 문준경전도사님의 평소 설교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나님 기뻐하신다” 또 아버지의 음성이 있었다. “아들아, 나는 저들을 용서했단다. 그러니 너도 용서하여라” 다음날 가해자들이 모두 즉결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군 지휘관은 이인재에게 총을 주어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이인재는 “지휘관님, 이 사람들은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지만 이제부터 공산사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시기 바랍니다”고 요청했다. 지휘관이 허락했다. 이때에 가해자들이 모두가 살아나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다.   이러한 이인재의 용서는 임자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쳐, 수복 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보복이 임자도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6.25동란 직전에 임자도의 인구가 1만3천 명이었는데 동란 중 21%인 2천7백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임자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이인재의 핵폭탄 같은 용서와 사랑의 영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인재집사는 6.25직후 논을 팔아, 좌경세력과 가해자들이 가장 많았던 지역에 교회를 직접 건축하고 1954년에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06-12
  • 투표 참여만이 ‘갑질’이다
    ▲ 신평식목사    “짧지만 ‘갑질’ 할 수 있을 때가 왔습니다. 메뚜기도 유월이 한 철이라고 선거 때만 우리가 ‘갑’이 됩니다.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을’이죠. 지들이 ‘갑’이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어떤 분의 하소연이다. 말인즉 6·13 지방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고, 잘 부탁한다고 전화를 걸어오는 후보자들 덕에 모처럼 목에 힘을 주고 산단다. 확실히 선거철이면 후보들은 일단 고개부터 숙인다. 특히 선거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이고 보면 확실한 ‘갑’이다. 그런데 짧은 선거운동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당선자가 ‘갑’중의 ‘갑’인 ‘슈퍼 갑’이 된다.   6·13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지방의원들은 작게는 5천만 원에서 6천만 원의 대의 연봉을 받는다. 연봉으로만 보면 그렇게 고생하고 선거를 치러, 겨우 그 정도만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연봉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지역살림의 모든 재정을 주무르고, 지역의 장래를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   지방자치법 제3절 권한을 보면 “조례의 제정·개정 및 폐지, 예산의 심의·확정, 결산의 승인, 법령에 규정된 것을 제외한 사용료·수수료·분담금·지방세 또는 가입금의 부과와 징수, 기금의 설치·운용,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재산의 취득·처분과 공공시설의 설치·처분, 법령과 조례에 규정된 것을 제외한 예산 외의 의무부담이나 권리의 포기, 청원의 수리와 처리, 외국 지방자치단체와의 교류협력에 관한 사항과 그 밖에 법령에 따라 그 권한에 속하는 사항” 등이다. 이밖에도 지방단체장에서 의안과 관련된 서류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자치단체의 조사와 감사권이 있다.   이렇게 주어지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권한은 지방차치라는 본래의 의도에 맞게 계속 확대 강화되는 추세다. 이러한 권한은 결국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권력이다. 이 때문에 설령 이들이 잘못된 결정을 했다하더라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왜냐하면 권한을 가진 자들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민들의 권익과 보다 살기 좋은 지역을 위해 순수하게 헌신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수많은 이해의 충돌 가운데, 명확하지 않은 수많은 선택 앞에 맞닥뜨린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고, 그 선택은 곧 법이다. 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인가.   당선이 결정되면 이들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민원인들이 들끓고, 고개를 조아리며 읍소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어느새 뻣뻣한 목을 가진 판단자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우리 위에 군림할(?) 권력자를 뽑고 있다. 내가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을 의심하며, 내가 반대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쥐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투표라는 ‘갑질’을 통해 그들 가운데 좋은 사람을 선택해야하는 이유다. 어떤 이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의사표현이라고 한다. 맞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너무 소극적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권리를 위임할 만한 후보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중에서 괜찮은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내가 원치 않는다하더라도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일을 결정하며,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선출된 이들이 풀어내야 하는 문제가 과거의 일이라면 좀 더 쉬울 것을 이들 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항상 새롭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을 가야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사막에서 보석을 찾는 심정으로 찬찬히 살펴보자.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투표하자. 그것이 메뚜기 한철에 할 수 있는 ‘갑질’이 될 테니까. /한국교회총연합 사무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06-07
  • 어리둥절할 때
    ▲ 지형은목사   이제 30년이 다 되어간다. 19 89년 9월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중부의 루어 지역 보훔(Bochum)대학교에서 독일어 과정부터 시작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하루는 라디오를 듣는데 (당시 아직 텔레비전을 마련하지 못했다.) ‘무슨 난리’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던 것은 내 독일어 듣기 실력 때문이었다. 애를 써가며 집중해서 듣다보니, 이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었다!   전 독일이 기쁨으로 전율했다. 유럽이 흥분했다. 세계가 떠들썩했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보훔 중앙역 길 하나 건넌 마우리티우스 21번지 3층에서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뉴스를 들었다. 밖에서 이런저런 함성이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중앙역 쪽에 사람들이 많았다. 온통 감격과 흥분의 물결이었다. 왜 안 그랬겠는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까지도 심지어는 독일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 년 뒤 동서독은 법률적으로 통합됐다. 독일 통일은 그렇게 어리둥절하게 찾아왔다.   한반도의 상황이 어리둥절하다. 설마 했는데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는 날짜가 잡혔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지독한 수사를 쏟아내던 트럼프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돌변했다. 서로를 추켜세우며 덕담을 연발했다. 이럴 수도 있는가. 그러다 트럼프의 공개편지로 회담이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아직도 살아있는 냉전의 유물 그 현실적 힘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살아온 한반도에서는 회담 무산이 당연했다. 그런데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어리둥절하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참 좋다! 이리 좋을 수가 없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감격적인 사건이 또 있으랴. 2002월드컵이 오천년 역사 초유의 일이라고 했는데 그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사실은 지금도 불확실성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 지금은 희망이 불확실성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전환들 중 우연히 발생한 것이 적지 않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부정적인 일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대격변이 쓰나미처럼 덮쳤고, 행복한 일이라면 하늘의 선물처럼 내렸다. 지금 한반도의 대전환은 그야말로 하늘의 선물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히 갑자기 찾아온 듯 보이는 일들은 사실은 배후에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독일 통일의 경우에는 정파를 초월하여 지속적이고 일관된 동방정책이 터를 닦았고,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1927~2016)가 서유럽 각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소련 등으로 수도 없이 다니면서 공을 들였다.    헬무트 콜(1930-2017)이 통일 과정을 잘 관리했지만 이전의 수많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의 이 상황도 배후에서 진행된 각고의 노력이 있었음은 상당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상황의 배후에 숨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팩트가 있다. 역사에서 우연 또는 역사의 큰 손이라고도 부르는 일에 대한 신앙적 표현인데,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손길이 어떤 때는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우리 일상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그렇다. 주전 8세기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세계에서 떠오르는 강국의 지도자 고레스를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사람으로 보았다. 21세기의 한반도 상황에서 트럼프든 김정은이든 또는 시진핑이나 푸틴이든 누가 고레스여도 좋다. 그건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늘의 섭리다.   사회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할 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한다. 흔히들 말하는 기도할 때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킨다. 한국 교회와 이 땅의 신앙인들이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할 때다.  /성락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8-05-30
  • ‘속죄’가 기가 막혀, 속죄합니다!
    ▲ 추태화교수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 그렇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 잘 하면 천냥 빚을 갚고, 절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을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 유발에 큰 공헌을 했다.    ‘말 한 마디’는 말재간이나 화려한 수사(修辭)가 본질은 아니다. 말 한 마디는 양면성이 있다. 때로 말 한 마디는 수많은 사람을 미혹에, 사기사건에,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몰아넣기도 하는 힘이 있지만, 그 반대로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치유하고, 진실을 알게 하고, 절망에 이르는 한계상황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있다. 가히 말 한 마디의 무게는 본심과 진심에 달려있다 하겠다.    지난 4월 중순, 북한발 외신이 전한 ‘말 한 마디’가 세간을 의아하게 했다. 중국 관광객이 북한 여행을 하다 버스 사고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이에 김정은 위원장이 주저없이 사과했다. 그가 한 말이 어떠하기에 파장을 남기고 있는가. ‘속죄합니다’    ‘속죄’란 단어는 어떤 행동에 대해 잘못을 통감하며 보상을 치루겠다는 각오로 윤리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회개의 차원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종교적 부분에서 속죄는 절대자 앞에서,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양 자세라 하겠다. 최대한의 죄값을 치루겠다는 결의가 내포되어 있다.    ‘지엄하신 북한 최고지도자’는 어찌하여 이 단어를 선택했단 말인가. 중국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려는 작전이었는지, 책임을 통감한다는 진심이었는지. 그 본심은 본인만 알 일이지만, 표면상 의구심을 감출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최고지도자는 정권 장악 과정에서 숙청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한 권력을 휘둘렀는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인이 속죄라는 단어를 쓰다니. 이것은 치밀한 전략인가 아니면 교묘한 위장술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건을 무마하려는 임시변통 사탕발림인가. 문제는 속죄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정서이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선택한 속죄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진의는 차치하고라도, 한 때는 로켓맨으로 불리던 정치인도 속죄라는 단어를 채택하는데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불어대는 이 땅에서 어찌 ‘속죄’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속죄라는 단어가 북한에서 흘러나오는 경우를 겪게된단 말인가, 어찌하여 속죄를 말함으로 우리 오정육부를 뒤집어 놓는단 말인가. 어찌하여 조용히 속 삭히고 있는 남녘 동포들의 심기를 이리도 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속죄라는 단어는 정작 남한에서 들었어야 하는 말이 아니던가.   속죄라는 말에 오장육부가 다시 끓어오르는 이유는 재판 보도들 때문이다. 수많은 재판이 열려졌지만, 어떤 피의자도 속죄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의 기억에는 그렇다. 정치인들, 재계 거물들, 고위직 관리들, 명망있는 사업가들… 피의 사실 앞에서 한 말은 유감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합니다 정도, 사죄라는 표현이 그래도 속죄에 가깝다 할 것이다. 아니면 기소 내용에 대해 나는 무관하다, 잘 모르는 일이다, 시켜서 한 일이다, 변명으로 일관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도 들려왔다.    국민의 초관심사였던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사건에서도 수많은 관련 인물들이 포토라인에 섰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투 운동으로 법정에 소환된 이들, 한번도 ‘속죄합니다’라고 말한 이는 없었다. 더욱 기막힌 경우는 피의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이들이 다수 있었는데, ‘속죄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계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삭제된 것일까, 아니면 속죄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일까?    독일은 과거 나치의 만행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속죄합니다’고 말해왔다. 속죄라는 말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있을 때 갈등과 전쟁도 막을 수 있다. 독일은 이 단어를 선택했기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일본은 아직도 과거 만행에 대해 속죄라는 표현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속죄할 부분에서 자유로울까. 혹 베트남에 대해서 속죄할 일은 없는가. 속죄할 것은 속죄해야 역사도 용서의 기회를 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진정한 속죄를 고백하자.  /문화평론가·안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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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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