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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은 순교신앙 실천으로
      김 헌 곤  마틴 루터로부터 비롯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정의, 사랑, 용서, 성결, 통합을 중요한 이슈로 내 세운다. 아쉬운 점은 순교신앙을 그 바탕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정신이 없으면 진정한 개혁에 닿을 수 없다. 개혁은 반드시 저항에 맞닥뜨린다.  그 저항을 이겨내는 것이 순교신앙이다. 구태여 터툴리안의 말을 빌 것도 없이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피 위에 서 있다.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다.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문준경 등 숭고한 순교자들의 피를 터전으로 세워져왔다.  필자의 할머니, 윤임례집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6,25동란 때, 정읍 두암교회 예배당을 지키다가 공산당들에게 칼질 당하고 불에 태워 순교 당했다. 이때 우리 가족들은 일가친척 도합 22명이 거룩한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전남 신안군의 여러 외롭고 가난한 섬들에 복음을 전하시던 문준경전도사님의 순교사도 우리의 귀감이다.  이 분은 배고픈 자에게 밥이 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이 되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는 영적 어머니셨다. 6.25가 끝날 무렵에 사역지 증도에 들이닥친 인민군에 붙들리셨다. 풍선에 태워 목포에 재판받으러 보내졌는데 마침 국군이 목포를 점령했고 자연 자유의 몸이 되셨다.  그러나 증도에 교인이 공산당들에게 붙들려 학대당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망설임 없이 되 돌아와 두 분의 전도사님, 한 분의 장로님을 구해 내고 대신 순교의 자리에 드신다. 당시 전도사님이 죄목은 인민군에 의해 급조되었다. “예수 새끼를 많이 깐 반동의 씨암탉” 이었다.  그런 죄목으로 수많은 죽창으로 찔리고 목에 총을 놓아 마지막 숨을 거두신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들도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아 천국에 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죄인의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고백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셨다.  문준경의 순교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2천명 증도면민 중 90%가 복음화 되었고, 그 영향으로 159명의 목회자, 81명의 장로가 배출되었다. 전도사님의 사역지인 신안군은 지금도 35%에 달하는 전국 최고의 복음화 비율을 지키고 있다. 1,400여 명의 목회자, 장로를 배출시켰다. 그 중 성서공회 이봉성목사, CCC의 김준곤목사, 부흥운동가 이만신목사, 치유상담대학원 정태기총장 등등 우리 교계에 익숙한 분들이다.  6.25 동란 때 임자도 주민의 23%인 2,700여 명이 죽임 당한다. 그 중 교인들은 장장 3km 끌려가 순교 당한다. 그러나 동란 후 기적적으로 보복이 없었던 것은 순전히 이인재집사의 결단 까닭이었다. 이 집사는 당시 13명의 가족과 35명의 교인들을 죽인 십수명의 가해자들에게 마땅히 죗값을 치르게 할 기회가 왔을 때, 단 한 가지, 예수 믿는 조건만으로 모두를 살려줄 뿐 아니라 스스로 보호자가 되어 준 인물이다. 그 결과 피비린내 나는 섬에 평화가 깃들게 된다.  그 이집사가 바로 문 전도사님의 용서와 화해의 복음으로 변화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후에 이집사는 가해자가 많았던 지역에서 목회자로 헌신하여 17명의 목회자와 장로를 길러낸다.  사도바울이 쓴 빌레몬서에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사회정의와 인권을 외치지 않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개혁을 이루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개혁신앙은 고전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 고전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순교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이 순교신앙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무장할 때, 교회가 교회답고, 사회가 정의로우며, 북한과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를 감당할 능력 있는 교회들로 쓰임 받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되새길 의미는 구호제창이 아니다. 순교신앙 실천뿐이다.  /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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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9-20
  • 두려움 없는 리더십
     지 승 룡   서울의 동서남북의 한 중심을 찍으면 장충단이 된다. 장충단과 얽힌 이야기는 참 많다. 재미있는 단어가 탄생된다. 바로 깡패란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자유당시절 선거를 할 때 야당지도자 조병옥이 워낙 연설을 잘하자 이에 겁을 먹을 자유당이 어깨들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 어깨들은 깡통을 들고 와서 연설할 때 막 두들겨서 연설을 방해했다.   즉 깡패란 말은 깡통을 든 패거리들이란 말이 이때 나오게 된 것이다. 며칠 전 용인문화유적전시시관에서 열린 용인의 독립운동전을 보았다. 지역을 중심으로 이렇게 독립운동전을 보는 것은 지역단위로 독립운동이 실제 활발했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인맥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들어가서 보았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이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서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라.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슬프다!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한다 한들 욕됨만이 더 할 따름이라. 이 어찌 죽어짐보다 나으리요. 뜻을 매듭지은 이 자리에 다시 이를 말 없노라”  이 결기 있는 유서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유서를 쓴 분은 1905년 31살 나이로 순국 자살한 이한응 열사다. 1874년 용인에서 태어난 이한응은 조선시대 양반집 자제들이 수학했던 것과 같이 다섯 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15살 되던 해인 1889년 서울로 올라와 관립 육영공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한응이 왜 ‘육영공원’이라는 근대학교에 입학하였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그의 사형 이한풍이 쓴 초혼사에 보면, “군이 본래 외국 유람에 뜻을 두어 구주의 문명정치를 배워 우리나라의 몽매한 상속을 열어 나라의 힘을 북돋우고 문합의 빛을 나타내려 함”이라고하였다. 이를 보아, 이한응은 어려서부터 서구문명을 배워 근대국가로 만들어 보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16세에 1889년에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읽히고 1894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901년 외교관으로 임명되어 영국런던에 참사관으로 부임한다. 당시 최대강국이 영국이었기에 영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늘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던 그에게 영국은 세계의 큰 흐름에 일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영일조약을 맺고 일본이 조선 침략을 정당화 시키고 영국은 오히려 우리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이에 세계 최대 강대국에게 조선의 영혼을 전하고 세계역사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위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하게 된다.  이한응 열사의 유해는 주영명예총영사 모건에 의해 국내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유해를 국내에 보낸 이후 모건이 보낸 1905년 5월 24일자 편지에 의하면, “불쌍한 친구. 그는 매우 극동에서 진행의 결과에 대해 매우 상심하고 있었고, 그의 외교관 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라고 마지막에 적고 있다.  이한응이 영국 런던에서 자결 순국하였다는 소식은 국내에도 전해지고, 그의 순국에 대한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추도회는 상동청년회에서 주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 7월 31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한응씨 추도회 처소는 돈화문외 전의전부 조방으로 이정함”이라고 하고, 추도회 주최는 “의법회 고백”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이한응의 추도회는 상동교회의 엡워스청년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한응의 유해는 고종황제의 특별지시로 당시 런던주재 한국명예총영사 모건의 노력으로 그해 7월 고국에 반장되어 고향인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금현에 모셔졌다.  그리고 장충단에 가면 이한응의 순국기념비가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아내를 잃었고 명성황후를 지킨 조선군인과 문인들을 위해 장충단을 세워 제사를 드렸다. 항일정신이 있는 장충단을 곱게 보지 못한 조선총독부는 신아치라는 공창을 만들고 또 놀이시설로 활용한다. 장충단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딴 博文寺(박문사)란 절을 짓는다. 후일 이 절이 헐리고 들어선 것이 신라호텔이다.  두려움 없는 리더십, 젊은 외교관 이한응은 우리의 영혼이다.   /목사·귀납법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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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6-14
  •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김 창 기   6월은 국가적으로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다. 호국보훈이란, 국가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숭고한 분들의 공로를 기억하고 기린다는 뜻이다. 국가적 호국보훈 사업과 행사는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미래 세대들을 위한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그분들의 숭고한 죽음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들의 삶과 현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서울현충원(동작동) 현충문 옆에는 ‘육탄십용사현충비(肉彈十勇士顯忠碑)’가 늠름히 서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해방이후 삼팔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 중 단기 4282년에 이르러서는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괴뢰군이 불법 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5월4일 제1사단 제11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9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사 상에 이룬 공과 그 용명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 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열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전쟁으로 인하여 국가의 안위가 절체절명의 순간이 이르매, 우리들의 선인 용사들은 이를 분쇄하고자 자신들의 몸을 던져 기꺼이 산화하였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국가에서는 개성의 무명 독지가와 여러 분들이 힘을 모아 이 현충비를 세웠던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며, 옛일에 대한 사건을 표지로 삼아 뚜렷하게 그 의미를 깨달아 교훈을 삼고자 하였다. 그것은 세상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삶에 투영된 하나님의 섭리와 깊은 뜻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이해와 통찰이다. 성서의 기록은 세상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역사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사(救援史)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나온 과거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함께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성서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길갈에 세운 열두 돌’사건(여호수아 4장)에서 한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웠던 지도자 모세의 죽음 이후, 그 뒤를 이어 받은 여호수아는 요단강 물에 가로막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된 열두 사람에게 돌 한 개씩을 어깨에 메게 하였다. 그리고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열두 돌을 세울 때에 요단물이 멈춰 서게 하여, 모든 백성들은 안전하게 건너가도록 하였다.   이일 후에 여호수아는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이정표를 세워 후세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삼게 하였다: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너희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하심이라 하라.”(수 4:20-24)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선인 호국영령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더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말씀에 기초하여 우리들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뼈아픈 아픔의 사건들을 기억해야 할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깊은 뜻을 성찰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역사를 주관하시고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NCG예수제자훈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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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6-01
  • 저택보다 가정을
      황 의 봉  집을 뜻하는 한자로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집 가(家)이고 다른 하나는 ‘주택’ 할 때의 택(宅)이다. 집 ‘가’자를 살펴보면 돼지를 의미하는 ‘시’(豕)자가 지붕을 뜻하는 ‘면’(宀)자 밑에 있는데, 돼지를 한 지붕 밑에서 키우는 오막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집 ‘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저의 환경(돼지우리 같은 초가 집)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반면에 택(宅)자는 지붕을 뜻하는 ‘면’(宀)자와 맡길 ‘탁’(乇)이 합쳐진 글자인데 ‘묘지’라는 뜻도 갖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저택이라는 말은 곧 큰 무덤이라는 뜻도 된다는 말이다. 결국 가정의 ‘가’자는 집의 크기나 돈의 많고 적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몇 평짜리 아파트냐는 가정의 구성 요소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택은 가까운 이웃 일본보다 훨씬 크고 넓다고 한다. 특히 아파트의 경우 우리나라의 국민주택에 해당하는 25평짜리면 일본에서는 대형 아파트에 속한다는 말을 들었다. 더 재미있는 일은 우리나라 주택은 외국에 비해 대문이 크고, 내부보다는 외형이 더 크고 아름답다. 그 이유는 넓고 살기 편한 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택을 자신의 부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하셨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 창조의 실패인가? 모든 동물들은 암수 한 쌍씩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사람만은 남자 한 사람만 만드셨을까? 아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은 줄을 하나님도 처음에는 몰랐다는 말인가?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계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짐승과 동물들을 다스리던 아담은 모든 짐승들이 짝이 있어 서로 사랑을 하는데 유독 자기에게만 짝이 없음을 알았다. 이렇게 아담 스스로 사랑의 짝을 찾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함께 살도록 해 주면 혼자 사는 불편을 알지 못하고, 자연히 함께 사는 고마움도 못 느낄 것이다. 오히려 혼자 살면서 불편하고 어려움을 느낄 때 하와가 왔으니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아담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은 하와를 이끌어 오셨다. 이 때 아담은 감탄을 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 장면을 악트마이어는 재미있게 표현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결국 하나님은 아담 스스로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 원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갓 태어나서부터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면 어때서 혼자 이삼십 년을 살다가 결혼을 하여 함께 사는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부부가 서로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 것이다. 그러나 혼자 살면서 고생도 하고 외로움도 느끼고, 사는 재미가 없을 때 남녀가 만나 결혼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사랑을 하며 살기 원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문제는 사랑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둘 이상 여럿이 하는 것이며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유는 누릴 때까지 자유가 아니고,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또는 상대가 느낄 때까지는 사랑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실 사랑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랑은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라고 말했다.     /예장대신 총회교육부장·평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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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5-17
  • 위기에 미래를 생각한다
    황 인 찬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은 북대서양 북동부, 영국 서쪽에 있는 나라이다. 국토의 크기는 8만5천여㎢이고 인구는 5백만 명이 조금 못되는 작은 나라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즐겨 불렀던 가곡 「아, 목동아(Danny boy)」 는 아일랜드 가곡으로 감자가 주식인 북아일랜드에 1845년 감자병이 발생하여 든 흉년으로 100만 여명이 굶어죽자 남자들이 살길을 찾아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나는 그 슬픔을 여인들이 노래한 애환의 노래이다.   「한 떨기 장미꽃」은 아일랜드의 시인이며 음악가였던 토마스 무어(1770-1852)가 작시 작곡한 아일랜드 민요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800년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아일랜드 국민들의 애달픈 사연과 이별을 아쉬워하는 이 「한 떨기 장미꽃」의 원제목은 「여름의 마지막 장미(The Last rose summer)」이다. 멘델스존은 피아노 환상곡 E-장조에 삽입했고, 베토벤 역시 아일랜드를 찬양하는 가곡 제6번에 이 「한 떨기 장미꽃」을 넣어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가 되어 우리들도 즐겨 부르는 가곡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아일랜드는 유럽의 쓰레기통”이라고 불릴 만큼 오랜 세월 동안 가난과 분열, 반목과 다툼에 찌든 나라다. 그런 아일랜드에 1990년 이후 새로운 지도력이 등장한다.   존 브루톤(John Bruton) 총리와 버티 아헌(Bertie Ahern)총리 등은 참신한 개혁정책으로 오랜 가난과 좌절에서 벗어나겠다는 비전과 추진력을 지닌 지도자들이 연이어 집권에 성공했다. 이후 불과 25여년 만에 아일랜드는 지난날에서 완전히 탈바꿈하여 이제는 국민소득이 무려 2016년 현재로 5만5천불에 이르는 유럽에서도 모범적인 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글자 그대로 국가개혁에 성공한 성공사례 국가이다.   아일랜드 국가경영의 성공을 살펴보면 의외로 단순하다. 침체된 국가와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으면서 개혁을 성공하게 한 것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국민의 세금을 과감히 낮추는 것이었다. 서민의 세금을 올려 재정을 마련하려는 우리와 다른 점이다.   둘째는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규제를 철폐하되 적당히 하지 않고, 국민과 세계가 놀랄 만큼 과감한 철폐였다. 지난 정부마다 규제개혁을 말하면서도 늘여 온, 우리와 크게 다르다.   셋째는 민족어인 아일랜드어(Gaeilge)를 지키면서 영어를 온 국민들의 생활언어가 되도록 한 일이다. 25,6년이 지난 오늘에 국민의 80%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로울 정도이다.   이 세 가지 즉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풀고, 영어를 생활언어가 되게 함으로 세계 각 국의 기업들이 몰러와 뼈 시린 지난 역사를 딛고, 국민소득 6만 불을 바라보는 부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지난 동안 개혁을 말로만 하고, 실제는 개혁을 후퇴시켜 온 우리로서는 깊이 반성하면서 눈여겨볼 국가성공사례다.   아일랜드는 1995년부터 2006년의 지난 10년 간 평균 6%의 경제 성장률을 보여 현대화된 대외무역 위주의 경제로 도약하였다.   과거 근대공업이 발전한 서유럽 제국과 비교하면 불리한 지리적 조건과 다년간의 영국지배, 전통산업인 농업의 척박한 토지 및 부재지주 제도 등으로 인한 후진적 상황이 당연시되었지만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냈다.   유럽에서 룩셈부르크 다음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아일랜드는 지난 십여 년간 물가와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정부지출을 줄이며 노동력을 숙련시키는 한편 외국투자를 유치한 결과이다.   국민소득도 1996년에 영국을 추월하고, 재정수지도 1997년에 흑자로 전환된 이후, 2000년 현재로 EU(유럽연합) 평균치의 115%에 달하고 있는 아일랜드를 정치 혼란기를 겪으며 경제가 위축되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한교연 바른신앙수호위원장·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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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5-10
  • 고난주간의 참된 경건
      최 대 해  고난주간의 참된 경건  고난주간이 시작됐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경건의 모습을 갖추고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고난주간에 평소의 신앙을 돌아보며 금식과 함께 회개의 기도를 집중적으로 하며 경건하게 한 주를 보내려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주간은 매우 중요한 절기이다. 우리들에게 고난주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삯을 대신 지신 것이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들의 죄를 대신 받은 대속제물이 되셨다. 그렇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에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과연 이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보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대신해 죽으신 그 이유와 그 은혜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셨다’고 할 때 대속이란 ‘우리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당하여 속죄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미 죄로 인해 심판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심판을 대신 받아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떠난 죄’이다.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들을, 영영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다시 살리시고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대신 죽게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이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 고난주간에 한 가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이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다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으나, 이후 신자로서의 삶은 우리들이 이루어내야 할 우리들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기 전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다 씻겨주셨다. 발을 씻겨주는 것은 종들이 하던 일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종들이 하는 일을 손수 하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바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섬김은 곧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이를 통해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야 한다는, 구원받은 우리들의 삶의 목적을 보여주셨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던진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그 수모와 고통, 고난은 결국 우리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들은 이 고난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우리도 섬김의 자세로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주간의 행적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참된 경건의 모습일 것일 것이다. /대신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7-04-11
  • 3·1절과 한국교회
         조일래    며칠 후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기미년 3·1독립운동 제98주년이 되는 3·1절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은 지 5년 후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이 침탈 되었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18년에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의 영향으로 다음 해인 1919년 2월 동경에서 먼저 대한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3월 1일에 민족대표 33인 중 지방에 체재 중이던 4명읠 제외한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오후 2시에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들은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에 들어간 것이 바로 3·1독립운동이다. 이 독립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순식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으며, 그 후 4월에 상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대한민국독립까지 영향을 끼친 민족 독립운동인 것이다.    이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는 여러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우선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을 제외한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계획, 진행, 행동강령 등을 기독교인들에 의해 진행 되었고, 교회는 태극기를 제작하고, 전달하고, 모이는 중요 거점이었다. 애당초 예정된 독립운동 거사일은 3월 2일이었지만 그날이 주일이라 기독교인들이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거사일이 3월 1일로 변경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3·1독립운동의 가장 큰 기여자도 기독교인이요, 가장 큰 피해자도 교회와 기독교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교회가 불태워졌으며, 수많은 목사·장로·교인들이 순교 당했으며,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성결교회는 일제치하에서 교단이 폐쇄 당하는 아픔도 겪었던 것이다.    3·1독립운동 당시의 한국 기독교 역사는 겨우 약 35년 정도였으며, 교인 수도 미미했다만 교회가 이런 큰일을 앞장서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이요, 연합했기 때문이요, 희생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98년 전 우리나라는 침략자 일본 때문에 나라를 잃고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만 지금은 적화통일을 노리는 북한 등 외부적 위협뿐만 아니라 이념과 계층과 지역 간의 내부적인 갈등으로 폭발 직전의 큰 위험에 처해 있다. 이때에 우리 한국교회는 기독 애국선열들을 본받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심, 내 생각만 옳다는 아집과 독선, 그리고 오만과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연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영광과 나라를 위하여 헌신과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위한 일이요, 동시에 한국교회를 위한 일이요, 3·1절에 걸 맞는 한국교회의 새 다짐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1,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독일은 기회 있는 대로 과거의 침략을 사죄하면서 이웃나라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만, 일본은 아직도 침략 당했던 이웃나라와의 관계가 냉랭한 상황이다.    3·1독립운동의 원인 제공자요, 지금까지도 독도나 위안부 문제 등으로 우리를 분노케 하는 일본을 참으로 이기는 길은 무엇일까? 과거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나라의 힘을 키우고 모아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관료의 아들로 한국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중의원 7선 의원이요,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을 역임했으며, 기회 있을 때 일제의 만행에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며, 한일 간의 화해를 위한 일생을 살다가 지난해 1월에 하늘나라로 가신 도이 류이치목사같은 양심세력이 일본 안에서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더 나아가 일본은 한국보다 국토가 약 3.8배, 인구가 약 2.5배, GNP는 약 3.5배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수는 한국이 일본의 약 12배, 신자화율은 약 30배이다.    즉 한국이 세상적 방법과 기준으로 일본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선교와 복음화를 위한 기도와 노력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일본을 참으로 이기는 더 중요한 길인 것이다. 이 3·1절에 일본 선교를 위해서 기도함으로 3·1절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기독교인 16인의 뜻과 믿음을 아름답게 이어가자. /직전한교연대표회장·수정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7-02-22
  • 정 론
    서 진 한 목사    기다림의 상실   11월 27일 주일, 대림절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Advent의 번역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다린다, 곧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교회절기의 두 기둥은 부활절과 성탄절이다. 부활절은 사순절의 끝에 있다. 수난의 끝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탄절은 대림절의 끝에 있다. 기다림의 끝에 아기 예수의 탄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성탄의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절기라고 할 수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 탄생을 목말라 기다린 사람에게 참 기쁨이 된다. 기다림이 크면 클수록 아기 예수를 맞는 기쁨도 커질 것이다.  본래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해방을 기다리고, 메시아 출현을 기다렸다. 교회는 아기로 태어나신 그분께서 다시 오시길, 계시록의 말씀처럼 새하늘과 새땅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기다림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다림’이란 말은,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 대상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전제한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 만족하거나 안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이 평안하고 만족스러운데, 무엇을 더 간절히 기다리겠는가? 현실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지려고 온힘을 다하고 있는데, 무엇을 기다릴 여지가 있겠는가? 과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 아래서, 교회는 그분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들에게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는 로마제국은 쉴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막대한 부와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교회는 ‘기다림’을 잃어버렸다. 기다림의 예전은 매주 반복했지만, 실제로는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기다림의 모양은 남겨놓되, 그 능력은 제거해버린 것이다. 기다림의 거세(去勢)이다. ‘지금 여기’에 그토록 부와 권력을 쌓아놓았으니, 기다림은커녕, 도리어 지금 현실을 뒤흔들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꺼려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기다림의 상실은 교회를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들었다.  한국교회도 이 대림절기에, 혹시나 기다림을 상실하지나 않았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새 한국교회는 현실에서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이제 그분의 날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대미문의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광화문에 100만 명이 모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자, 이 연합기구, 저 교단이 나서서 시국선언을 하고 선언문을 언론에 게재한다. 그리고 나라를 위한 기도를 호소한다. 하지만 이 사회에 감동을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 기구들이나 거기 속한 분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엊그제까지도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결정에 절대적 지지를 보낸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 가운데 교회만큼 정권에 대한 지지성명을 많이 낸 데는 없을 것이다. 교계 지도자들이 얼마나 정치권력에 가까이 가기를 원했으면, ‘청와대 초청’을 내걸고 회원을 모집한다며 사기를 치는 일까지 생겨났겠는가? 진정으로 만왕의 왕이신 그분을 기다린다면, 교회는 세상 권력을 기웃거릴 까닭이 없을 것이다. 교회가 만약 세상의 부와 명예, 권력에 탐닉한다면, 그것은 기다림의 신앙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이것이 바로 지난 2천년 교회 역사의 교훈이다.  교회가 잃어버린 ‘기다림의 신앙’은 이단 사이비 집단을 통해, 기형적이고 왜곡된 형태의 종말론으로 나타난다. 각종 시한부 종말론 역시 교회가 상실한 ‘기다림’을 내걸고 교인들을 현혹한다. 그 현혹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본래 기독교가 기다림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을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처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말하지만, 종교개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 신앙, 본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2016년 대림절기가 모쪼록 우리 각자에게는 잃어버린 기다림을 회복하여 신앙을 회복하는 시간, 한국교회에는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한다. /대한기독교서회 사장·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6-11-23
  • 위기 속 신앙회복과 행동실천
      권 오 륜 목사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고, 영원한 권세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한 사람의 태블릿PC가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국정농단’이 화두다. 관련자들이 연이어 검찰에 소환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도 대안을 찾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일관하는 관련자들의 태도는 국민들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고,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군중의 목소리는 연일 하늘을 찌르고 있다. 비선실세의 풍문이 실존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미르재단 서열다툼에서 밀려난 관계자의 보복성 언론 제보는 결국 뇌관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로 두 차례나 머리를 숙였다. 결과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점점 개혁의 요구가 거세지고 분노의 표출이 과격해지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변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국민의 염원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외침도 시간이 흐르면 허공에 흩어질 공산이 크다. 구심점을 찾지 못한다면 말이다. 정치권에서도, 시민단체도, 종교계도 적절할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현 시국이 장기화된다면 자칫 우리는 분노의 대가로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 중에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은 신뢰의 상실이다. 누구도 믿지 못한다면,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해도 대립과 반목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미래는 힘과 권력, 자본으로 재편될 수도 있다. 정의사회보다는 공포정치와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은 위기의 절벽에 내몰려있다.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민통합의 목표를 향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이런 시국에 신앙공동체의 관심은 어디로 행해야 하는가? 선(先)은 신앙회복이요, 후(後)는 행동실천이다. 소리만 높이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분노한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다. 결국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우선해야 한다. 신앙인들은 현 시국을 비판하기에 앞서 기도하기 시작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세상은 불의와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신뢰와 믿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언제나 새 시대는 찾아왔다. 신앙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회개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  관련자들은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책임은 부인 할 것이다. 이 엄중한 시간에 그리스도인이 서야 할 자리는 지난날 비겁했던 것을 회개하는 기도의 자리요, 약자의 피난처요 사회정의를 외치는 행동하는 교회의 자리이다. 교회는 지난날 사회개혁, 민주화, 인권, 민중생존권에 기여해 왔다. 4.19, 5.18, 6.29와 같은 역사적 변곡점마다 성도는 삶으로 신앙을 증언해 왔다. 다시 한 번 교회가 역사의 향도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자로서 책임의식을 갖자. 이번 사태를 정죄의 수단으로만 삼지 말자. 모두의 책임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변화와 개혁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이 위기를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아 정치뿐 아니라 사회 곳곳이 새롭게 세워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자.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며 기도하자. 입술로만 기도하지 말고, 행동으로 기도하자. 그래서 교회를 치유하시고, 나라를 고쳐주시고, 역사를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자. 주여,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기장 총회장·발음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6-11-15
  • ‘그리스도인 다움’을 회복하는 길
    이 상 대 목사   목회자나 신학자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일반 사회학자들도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유럽교회는 중세라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오자마자 곧바로 쇠퇴의 길을 걸었고, 미국교회는 200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면, 한국교회는 고작 100여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위기를 맞은 셈이다. 특별히 더 안타까운 것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때는 세계 교회의 모델이자, 희망이었던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큰 위기에 처한 것일까?  수많은 기독학자들과 관련 연구단체,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관들이 이 위기에 대한 원인을 연구해 왔고, 그에 따른 해결방법들과 길도 제시해 왔다. 그 중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연구와 결과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지 못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해서 나타나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즉 이 문제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다움’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크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 모든 교인이 교인다운가?”, “목회자가 목회자다운가?”, “나아가서 교회가 교회다운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할 필요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현재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민족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며 믿음의 자세로 아픔을 극복해 나가는데 앞장섰던 한국교회,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사랑의 실천을 이루어 왔던 한국교회는 이미 그 교회다운 모습을 잃어버렸고, 환경적 어려움에도 새벽을 깨웠고, 철야기도로 밤을 지새워가며 예배에 힘썼던 성도들도 ‘그리스도인다움’, ‘성도다움’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다움’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다움’의 본질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사랑함에 바탕을 둔다. 나보다는 그리스도를 먼저 드러내는 삶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율법에서 찾으려했고, 그래서 자신들처럼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무시하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야기하신다. 그런 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인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각 교인이 교인다워짐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잘 깨닫고, 스스로가 진리의 맛을 내고,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이 거룩해야 결국 교회가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한 때 한국교회는 짧은 기독교역사 속에서도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다. 그 부흥의 원동력은 좋은 건물과 새로운 환경에 있지 않았고, 성장위주의 목회철학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영적 굶주림이었고, 회개운동에 있었으며, 영적 대각성의 결과였다. 교인이 교인다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목회자가 목회자다워지기 위해 늘 스스로를 단련하고 헌신하며,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들어냄과 동시에 세계선교의 중추역할을 하는 복음의 척추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미래목회포럼 대표·서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6-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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