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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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다음세대와 먼저 연합하는 일에 힘써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는 한국교회는 4·10 총선 이후에 정치나 경제 상황과는 별개로 다음 세대와의 연합 문제로 혼란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점차 세속적인 문제에 함몰되어서 예수께서 희생과 헌신으로 모범을 보이신 섬기는 모습을 저버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보다는 어두운 죄악과 짝하여 성경적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기 일쑤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교회 구성원의 2/3가 이단에 노출된 충격적인 사실이다. 신천지, 구원파,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전능신교, 여호와증인 등 이단들의 공세가 잠잠할 만하면 고개를 들고 코로나 이후 폐쇄된 교회가 줄을 잇는 사이에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가 연합을 해야 하는데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상황에서 교회 연합의 상징인 부활절 예배까지 아직도 하나가 되어 드리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외부적인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교회 내적으로 세대 간의 연합을 저해하는 다양한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 있다. 부모와 자녀가 주일마다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일이 한국교회가 연합을 모색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출발점이다. 문제는 교회에 가서 자녀와 부모가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드리는 대예배와 자녀가 참여하는 부서 예배가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한다. 이미 세례의 선결 조건인 학습 제도를 없애고 곧바로 세례를 베풀 뿐만 아니라, 유아 세례를 받은 미성년 교인도 성만찬에 다세대가 참여하는 예배를 시행하는 교단이 늘고 있는데, 여전히 주일 예배에서 성인과 다음 세대가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미 미국교회는 교회 안에서 세대 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청교도 전통이 시작될 때부터 주일 예배를 전 세대가 드리고 있다.    한국교회 전체 구성원 비율에서 다음 세대가 3% 미만이고, 이미 어린이와 청소년이 사라진 교회도 태반이다. 교회가 억지로 집회 출석률을 높이려고 자녀 동반 프로그램과 특별 새벽기도회까지 주말을 이용하여 가족 단위 참석을 독려하지만, 이미 노인들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쓸쓸한 모습이다. 이 문제를 서서히 회복하려면 주일 예배에 자녀들과 부모가 함께 참여하다가 설교 전에 아이들을 강대상과 복도에 초청하여 자연스럽게 전 세대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대가 설 때 저학년 경우에 교육 부서로 이동하게 하는 일을 우선하여 시도하면 좋겠다.    한가지 실례로 예수말씀연구소에서 시행하는 예수학교가 다음 세대를 위한 현장 교육을 제안하면서 스토리텔링을 화두로 꺼냈다. 주입식이나 일방적 교사 주도의 교육이나 다음 세대가 성경 이야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배제한 귀와 눈으로만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입과 손발로 참여하면서 시연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방식이 창의성과 흥미를 유발하고 성경 속으로 몰입할 때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로 통합된다. 교사와 다음 세대가 함께 어우러진 교육은 한국교회가 초창기에 시작하면서 남녀와 세대를 구분한 전통적인 방식을 청산하고 진정한 연합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작점이다.    스토리텔링은 비단 설교의 문제만은 아니다. 담임 목사가 스토리텔링을 한다면서 주일 설교에서 자기 이야기만 실감 나게 자랑삼아 늘어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설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이 중심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신성 모독이다. 스토리텔링은 설교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로 충만한 설교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왜 교회로 가는가? 영혼을 살리려는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담임 목사가 설교 예화나 논지의 극적 요소와 심지어 개그와 유머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적거린다면 삯꾼이요 거짓 목사이다.    4대 절기를 위한 교회 활동을 준비하면서 대외적인 홍보를 위해 전단을 만들 때 다음 세대를 위한 고민으로 더욱 진지하게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그럴 때 다음 세대 친화적인 교회로 기존의 노년층 성도들과 연합하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사랑을 회복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를 집안의 가장으로 모실 때, 그 순간부터 한국교회는 달라질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한국교회는 초저출산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 수백억 조의 정부예산을 투입하고도 저출산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얼른 돌아가는 일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을 따라서 예수의 사랑으로 교회를 회복하고 교회 안에 젊은이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야 결혼하고 출산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 하나님께서 남녀가 이룬 가정을 축복하시고 창조의 섭리를 이어가시려는 계획이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한국교회가 다시 성경대로 회복하여야 한다. 돈을 주고 집을 지원하고 직장을 마련해 주어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할 것이라는 정책은 이미 실패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예배당이 연예당이라고 불리며 쌍쌍 파티도 하며 즐거운 웃음이 꽃피던 시절을 회복하여 다시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한국개혁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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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4-09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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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8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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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5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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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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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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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실시간 정론 기사

  • 이중직 목회, 일탈인가? 희망인가?
      코로나19는 1년이 넘도록 기세를 떨치며 세간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대면예배를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였고 대부분의 소모임들이 중단되면서 교회는 활력을 잃고 있다. 지금으로썬 코로나19가 지나가도 예전으로 다시 회복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심방과 봉사, 설교와 성경공부, 기도회와 철야예배, 장례 및 결혼식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기존 교회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 이제 교회의 기존 시스템으로 미래를 견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목회적 케어나 상담도 점점 빛을 잃고 있으며 전문가들에게 전이되고 있다.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 차원의 새로운 선교 전략이 요청되지만 녹록치 않다. 코로나19 이후 중대형교회에 비하여 소형교회와 미자립교회는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며 목회론도 재정립해야한다.   ‘이중직 목회’란 목회를 직업으로 분류한데서 파생한 말이다. 목회 외에 다른 직업을 더 가지면 이중직이 된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성서적이며 기독교전통적인 목회다. 전통적인 직업개념이 몰락하고 다중직, 다중역활 사회로 변화하는 것에 발맞추어 ‘이중직 목회’를 시대와 소통하는 선교, 목회적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실재 이중직 목회는 협소하게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중직 목회를 반대해 온 기존의 교회 구조는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가질 경우 기존 목회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미자립교회 목회자 생계 문제와 연동하여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다양성의 문제이고 선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할 과제이다.   이중직 목회란 말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목회를 광의의 의미로 담으면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을 목회로 보기도 한다. 지금 이중직이란 잣대로 보면 실재 감리회 초기 선교사는 모두 이중직이었다. 선교사들은 의사이며 목회자로 혹은 복지사와 사회선교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사회를 선도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의사였고 목회자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도 목회자이며 교육자였다. 지금 목회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이들은 미자립교회 목회자만이 아니다. 이중직 불가를 장정에 명시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이중직은 단순 잣대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코로나19 정국에서 이중직인 목회자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교단보다도 오히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중직 목회에 속한 직업군도 참 다양하다. 카페 운영자, 도서관 사서, 목수, 교회 리모델링 사업 지원, 대리 운전, 편의점 알바, 농사꾼도 있다. 택배기사, 건설 노동자나 청소부로 일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시간 강사, 사회선교사 등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식으로 선교 사역에 참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자립적 기반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19 정국에서 교회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신뢰도는 낮아졌고 교회에 대한 호감도 크게 실추됐다. 결국 교회는 미래 대안에서 밀려나고 있다.   한국 초대교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 초대교회는 주로 의료선교사와 학교 교육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지었고 오히려 교회가 부차적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목회가 등한시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영성적 토대가 되었고 깨우침을 얻는 교육의 장이었으며 기도의 산실이었고 사귐의 장이었다.   목회자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목회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를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목회를 교회 안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행하는 모든 일도 목회이다. 그러니 목회자의 일거수가 다 목회라는 새로운 목회관이 필요하다. 교회도 이제 교회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선교적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야 할 곳은 교회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다. 이중직 목회는 일탈이 아니고 대안이며 희망이다.   /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전국총무·가재울녹색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7
  • 한국교회정론-4
    전 헌법재판관 안창호 장로   주체사상은 김일성 일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상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론에서 나타난다. 북한이라는 사회적 생명체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은 뇌수(뇌)이고, 일반 주민은 수족이다. 뇌수인 김일성 일가의 명령에, 수족인 일반 주민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이런 주체사상에 대해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광장이나 길거리 등 공공의 장소에서, 학교에서 비판할 수 없다. 지금도 백두칭송위원회가 광화문 광장에서 ‘김정은 환영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지면서, 김정은을 위인으로 칭하고 찬양했음에도 어떤 제재가 없다. 김정은은 고모부와 이복형을 살해하고, 그의 독재체재를 위하여 2,700만 북한 동포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이다. 또 최근에는 물에 빠져 구조를 요청하던 대한민국 공무원을 죽이고 그 시체를 불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독재자로 표현하거나 주체사상의 모순을 지적하면 차별행위로 제재될 수 있다. 밝은 대낮에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비판할 수 없고, 찬양만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등 각종 학교에서 전체주의와 같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사상 등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제한되고, 성적지향 등의 보건·의료적 유해성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 통제된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 특히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와 학생들이 건전하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인격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고, 전체주의 세계관과 성적지향 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진리와 진실이 왜곡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훼손되며, 공공의 가치와 공동선이 침해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질서를 훼손하고, 공화적 가치를 지향하는 윤리를 해체하며, 도덕적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또, 공산주의자 그람시의 바람대로 가정, 교회 및 국가(문화) 공동체의 변질과 해체의 원인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긴 행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주역 안토니오 그람시는 ‘왜 이탈리아에서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를 지지하는가?’,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헤게모니에서 찾는다. 그는 ‘지배계급은 힘의 지배와 함께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지배를 유지한다. 지배계급은 헤게모니, 즉 문화적·도덕적·이데올로기적 지배를 통해,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본주의사회는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교·언론·종교를 통해 시민사회와 국가 등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토대로부터 생기는 압력을 통제하고 권력의 원천인 사회질서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그람시는 “문명세계는 무려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로 철저히 물들었다. 그러므로 유대-기독교 가치에 바탕을 둔 나라는 모두 그런 뿌리들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뒤집어질 수가 없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권력은 잘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손에 굴러 들어오게 될 것이다”고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6
  • 코로나19 이후 시대에 대한 대응과 전략
      2020년을 보내고 2021년 새해를 맞이하는 예배는 코로나19 감염병 거리두기 2.5단계 방역지침에 따라 방송 송출에 필요한 예배 위원 20명 미만의 인원으로 제한되어 하나님께 드려졌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며,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지난 세월 드려졌던 설렘으로 다가오는 희망의 축제의 예배보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해결되지 못한 큰 숙제를 안은 채 예배가 드려졌다.    앞으로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 시대 대비를 위해서 목회자는 교회의 목회 사역의 방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며 설정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한 달 한 달 버티기도 힘든 상황 속에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양 사역의 방향성은 어느 수준 어느 단계까지 진행하여야 하며, 웨슬리 부흥 운동 이후 교회의 노멀로 표준화되었던 주일찬양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소그룹제자훈련, 부흥회 등은 새로운 뉴노멀 비대면 혹은 소수 인원제한의 원칙이라는 작지만, 치명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 이후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것은 21세기 극도로 발전해 가고 있는 포스트모던과 세속화의 물결을 따라가는 진보·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성이다. 일본의 ‘신인류’ 혹은 ‘신진루이’라고 호칭되는 일본 젊은이들의 세속문화는 머리 염색, 문신, 계속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한국의 대중문화와 교회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은 이제 기독교 국가라는 과거의 명성에서 극도의 인본주의적 세속화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성경 읽기와 공공 기도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금지되었고, 변호사 사무실에 걸려진 십계명 등은 이웃 종교인들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코로나19 이후 더욱 강해져 가는 세속화와 자유주의 물결로 인하여 교계는 더욱 어려움에 처해가고 있다. 교계의 어려움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일부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중심’이라는 기본 신앙을 21세기 세속화의 시대에 배타적이고 아집에 가득차 자기 욕심만 부리는 이기주의의 온상처럼 오해하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간과한 사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진리의 유일성이다. 다양한 가치 체계가 공존하는 사회를 이상적 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이 관용적이지 못하다고 이야기한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중차대함에 아무런 악영향이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로 이를수록 구원을 향한 길이 좁아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코로나19 이후 극도로 강화된 포스트모던 세속화시대에 적합한 대응전략을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세속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근대 형이상학적 교리나 형식적인 규범 그리고 전통적인 예전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근대 후기에 조성되고 있는 일반 신자들의 현실적인 삶과 필요에 기독교의 본질적 영성인 ‘오직 예수의 영성’을 제공함으로써, 일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 영성’은 기독교의 본질인 ‘십자가 자기 죽음의 영성’이다. 이 본질적 영성을 한국 기독교는 모든 교회와 기관 그리고 예배와 교육, 선교와 봉사 영역에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한국교회가 ‘오직 예수 영성’을 일상에서 실천하지 아니하고 기존의 방식대로 고등 종교화하여 교리화하고 박제화 시켜버린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족하여” 세속화 시대에 매몰되어, 결국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성 부흥사회 대표회장, 주님앞에제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6
  • 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나?
    지형은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부총회장,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교회가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독교라는 현상에서 가장 구체적인 현장은 어쨌든 제도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사역하는 가시적인 교회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처럼 제도권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 바벨론으로 여겨지면 거기에서 탈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과격한 형태의 개혁 운동이 이런 유형입니다. 남보다 올곧고 강직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제도권 교회에 대하여 이미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계속해서 지나온 시대처럼 걸어간다면 앞으로 십여 년 후에 결정적인 파국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사회 현장의 한국 교회를 어떻게든 갱신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삶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한국 교회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적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윤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21세기 오분의 일을 지나는 이 시대의 한국 교회 현장은 짙은 안개 속에 있습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그랬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명백해졌습니다. 2007년의 평양대부흥 100주년, 2017년의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교회는 이 두 번의 기회도 놓쳤습니다. 한국 교회가 걸어갈 큰 방향과 구체적인 행보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통합된 의견이 없습니다. 제각각입니다. 이념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심하게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거의 고스란히 교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 그리고 대선이 이어지는 2021년과 2022년에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이 상황을 풀어가는 방법 또는 길이 무엇입니까?   드러난 문제점들을 개별적으로 풀어가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의 병이 깊고 어떤 영역에서는 타락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본질에 근거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생사를 걸고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짚는 것이 긴요합니다. 방향과 행보와는 다르게 문제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일치합니다. 삶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일상과 인격에서 나타나는 삶의 괴리가 지나치게 큽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적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윤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사회적 신뢰의 상실이 참으로 뼈아픈 현실입니다.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목사의 책임이요 다음으로는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사회적 신뢰’ 상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입니다. 이 현상을 만들어낸 원인은 ‘신앙적 신뢰’ 상실입니다. 사회적 신뢰라는 것이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인데 신앙적 신뢰는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윤리는 성경 말씀에 토대를 둔 신앙적 윤리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교회는 기독교적인 사회 윤리를 구성해가며 삶으로 실천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린 것은 그 이전에 신앙적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신앙적 신뢰의 상실’입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 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급하다면 당장 나타나는 증세를 가라앉혀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신앙적 신뢰의 상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구약 예언자들의 외침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직한 마음으로 다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관건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형태든 신앙의 인식과 실천에서 근본적인 지점이 여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신체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하는데 계시의 중심이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의 인격과 삶이 특별계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는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의 기록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서로 안에 계시며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은 계시와 관련하여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복음이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러나 신앙의 인식 과정을 엄밀하게 따지면 오늘날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이천 년의 시공간이 있습니다. 이 간격을 넘어야 하는데, 방법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이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복음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니 그렇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관한 기록 특히 마가복음에서 이 점이 아주 명백합니다. 마가복음 8장, 9장, 10장에 기록된 세 번의 수난 예고에서 복음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것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복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기록한 8장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표현으로써 자신과 복음을 동일시하십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본문인 9장 37절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복음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합니다. 마지막 수난 예고인 10장 29절에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표현이 결정적으로 강조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개역개정판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동일하게 번역한 8장 35절과 10장 29절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10장이 8장보다 복음과 예수님을 더 확실하게 동격으로 표현합니다. 8장 35절을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옮긴다면 10장 29절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판보다 개역성경이 낫습니다. 개역성경은 8장 35절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10장 29절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및’은 ‘그리고’, ‘또’의 뜻인데 같은 종류의 성분을 연결합니다. 표준새번역도 두 곳이 다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영어성경(KJV, NIV)이나 독일어성경(루터역, 취리히역)은 두 곳을 더 강조된 10장의 표현으로 번역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합시다.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신앙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 윤리로 보아도 삶이 엉망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한 현실이 뼈아픈데 이는 신앙적 신뢰를 상실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장인 신앙적 신뢰를 회복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복음을 듣고 살면서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기록한 것이 66권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적으로는 66권 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에 기독교의 정체성이 걸려 있습니다.   “교회가 길을 잃은 근본 원인은 말씀에서 멀어진 것, ‘말씀과 삶의 괴리’입니다”   한국 교회의 현상적인 문제는 삶이 망가진 것입니다. 교회가 길을 잃은 근본 원인은 말씀에서 멀어진 것, ‘말씀과 삶의 괴리’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큰 방향과 구체적인 행보는 66권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서신학이 강화된다는 얘기와 다릅니다. 성서신학을 비롯한 신학의 기능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의 일부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단순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성경이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깊이 깨달아 거기에 삶을 던져 순명(殉命)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 기록된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가장 치열하게 씨름한 때가 종교개혁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타락은 끝을 몰랐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기독교의 본질을 물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말씀입니다. 참된 교회는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작동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현장이 일차적으로 예배의 시공간이며 거기에 뗄 수 없이 연결된 것이 예배 후에 바로 이어지는 일상의 예배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삶이 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한국 교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사를 걸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66권 성경의 내용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깊게 공부하고 연구하며 동시에 더 없이 깊은 묵상과 기도를 감행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세계를 살피며 깨달은 말씀을 삶으로 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십여 년 가다 보면 갈수록 길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보수냐 진보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삶과 사회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일을 어떤 사람은 보수라고도 부르고 어떤 사람은 진보라고도 부릅니다. 교회가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 오피니언
    2021-01-25
  • 뉴노멀 시대 교회의 예배 논란 성찰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이스라엘의 예배 신학에 있어서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포로기 이전의 예배에서는 성전이란 공간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포로기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포로기 이전에는 제사와 의식, 그리고 거룩의 정도에 따른 성전의 세분화된 공간들이 예배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 생활이 시작되면서 물리적 공간인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는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하던 것에서 조금씩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은 메데와 페르시아의 점령하에서 유대백성들은 본국과 타국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성전이 없는 제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된 유대 백성들은 사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회당은 게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첫째 안식일에 모여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고, 둘째 유대인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이 지니고 있던 지성소, 성소, 그리고 이방인 뜰과 같은 그런 차별화된 공간이 없었다. 회당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거룩은 공간이라기 보다는 안식일 그 자체로서 그것은 일종의 구별된 시간이었다.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매일 정한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예배행위로 생각했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신앙 전통이 되었다. 다리오 왕 시절에 관원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30일 동안 왕 외에는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니엘은 죽음을 무릅쓰고 매일 정해진 기도 시간을 중단하지 않았던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단 6:10).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을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유대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란 일종의 “시간의 지성소”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공간인 성전을 잃어버린 백성들과시간이라는 지성소에서 만나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예배 신학에서 공간은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고 보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고래스 왕의 칙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즉 스룹바벨과 일차 귀환 세대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와 이차 귀환 세대를 보내셔서 성전 재건을 완성 시키셨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있어서 공간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예배에 있어서 비가시적 공간인 시간과 함께 가시적인 공간으로서의 물리적 공간도 여전히 중요했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균형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특별한 선물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만 예배하는 그의 백성에게 특별하게 응답한다.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제한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예배는 마치 우리가 차린 식탁에 하나님이 초대되어 대접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천지의 주재이시고 영원에 계신 하나님이 피조계와 역사라는 시공간에 자신을 꿰맞추셔서 인간이 앉는 자리에 내려 오시고 그 인간들을 만나주시고 함께 시공간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배란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황공한 환대와 다를 바 없다.   2020년 한해 동안 한국 교회는 정부의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행정명령 등으로 예배에 대해 큰 혼돈을 겪었다. 어쩌면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이 겪었던 혼란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혼란을 겪어왔다. 어떤 신학자는 코로나 19 이후의 교회의 예배와 예배 신학은 전과는 무척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사이버 교회의 탄생과 급속한 증가세를 예견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마치 디지털 시대에 들어오면서 물리적 공간은 약화되고 시간과 기술에 기반한 사이의 공간이 현대인의 삶을 상당 부분을 잠식한 것처럼, 교회와 성도의 예배 생활에 있어서도 사이버 예배가 새로운 예배 트렌드가 되고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것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이 흐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개혁과 연관시켜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주듯 예배는 시공간에 창조된 인간의 존재 양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물리적 공간과 비물리적 공간인 시간의 조합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존재 양식 속으로 앞으로도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시공간의 예배에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예배자에게 천상의 양식을 먹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떡을 공급받은 성도들은 서로서로 육신의 떡을 떼고 나누며 서로가 주안에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며 살아갈 것이고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19 둘째 해를 시작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대한 통전적인 인식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지난 한해를 지나면서 이렇게 가면 머잖아 전통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고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뉴 노멀의 예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주의를 기울이되, 과도한 일반화와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성도들은 시공간에서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자들이다. 물리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떡을 떼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생활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의 존재 양식의 본질에 더 부합한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시공간을 함께 하여 예배하는 생활에 더욱 가치를 두고 힘을 써 가야 할 것이다.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이 부자연스런 시기가 속히 끝나고 예배당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노래하고 성도들이 신령한 양식을 받아 먹고, 성도들끼리 나누는 그런 복된 예배를 회복하게 되는 날이 속히 오도록,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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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1-12
  • 예수님 중심의 제3의 길로 나아가자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초대 교회 당시 로마의 귀족이요, 관리였던 디오그네투스에게 기독교에 관하여 쓴 편지(Letter to Diognetus)가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 편지 내용 가운데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표현으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단어로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제1의 종교는 로마인들이 섬기는 종교이다. 여러 신들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바치며 각 가정마다 가정 신을 따로 모시고 살았다. 제2의 종교는 유대교였다. 로마는 유대교를 존중했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많은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 점령한 모든 땅에 퍼져 있었기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리고 제3의 길이었던 기독교가 있었다. 그런데 AD 40년경 기독교인의 숫자는 오천 명 정도였지만 AD 300년경에는 6만 5천 교회, 500만 명이 되었다. 약 250년 사이에 천 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때는 로마의 핍박과 탄압이 극심한 시기였지만,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계속 성장을 했던 것이다.   2021년을 마주하게 될 우리의 목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세는 여전할 것이다. 여러 가지 산적한 위기와 어려움들은 더해 갈 것이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우리는 로마 시대의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교회는 첫째 오직 예수님이 중심이었다. 힘이 있었고, 강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종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낮고 천한 곳에 친히 오셔서 섬김의 삶을 사셨다. 가난한 자의 편에서 함께 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최악의 죄인이 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수님만을 믿고 따랐다. 그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썼다.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며 닮아가려고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핍박 그리고 순교로 점철되었던 250년간의 초대 기독교의 고난과 박해사의 한 가운데서도 성장을 했다. AD 313년에는 기독교 공인을 이루어낼 정도로 로마를 변화시켰다. 그 원동력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로마의 기독교는 AD 313년 로마 내에서 공인되고, AD 379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면서 기독교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제1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그 위치가 변화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 역시 그 생명력의 핵심인 ‘초심’을 잃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고백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박해와 핍박은 사라지고 세상 권력에 가까이 가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 중심,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삶을 떠나 습관적이고 문화적인 기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가 멸망하듯 기독교 역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21년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다시 예수님 중심의 제3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제3의 길로 나아가며 초심을 되찾고,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예배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도 닮아가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다. 예수님께로, 예수님 중심으로 2021년을 다시 시작하자. 비록 우리가 맞닥뜨릴 2021년이 쉽지 않겠지만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 역시 풍성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제3의 길을 걸어간 것처럼 먼저 예수님을 알고 배우고 닮아가며 더욱 열심히 성경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어 신앙을 실천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현 상황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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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1
  • 2021년 국내 교계 전망
    2021년을 내다보는 일은 우리가 걸어온 2020년을 돌아봐야 가능하다. 역사는 가장 과격한 단절이라고 여기는 혁명에서조차 늘 이어져 흐르기 때문이다. 교계의 앞길을 전망하는 일은 사회의 흐름을 살펴야 가능하다. 교회는 사회속의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0년을 돌아보며   참 유난스러운 한해였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이 세계를 덮쳤다. 코로나19 말이다. 이 전염병이 인류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길게 보면 17세기 이래 지속해 온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삶의 방식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경고다. 짧게 보면 지난 30여 년 가속 페달을 밟아온 전 세계적인 시장 확대와 무제한의 소비 확산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다. 기후 환경 위기는 발등의 불이 되었다. 인류 생존의 마당인 지구행성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정신사의 흐름에서 인류의 존재 방식과 연관된 문명사적 전환이 다방면으로 논의되고 있다. 초-연결을 기반으로 삼는 기술의 발전에서 4차 산업혁명 또는 인더스트리4.0이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또는 온택트가 개인의 삶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면서 생활 방식과 구조뿐 아니라 이와 뗄 수 없이 연결된 삶의 태도와 사유 방식까지 변화되고 있다.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올 한해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소모적 싸움에 시달려왔다. 이른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에 대한 극심한 찬반으로 사회 여론이 추하게 반목했다. 전통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 매체의 보도를 다 보고도 사실 확인이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갈등의 와중에서 코로나19의 방역까지 정쟁과 싸움의 도구로 변질됐다. 남북이 갈린 휴전 상태에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교계를 보자. 코로나19 초기 상황에서 신천지 집단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터였다. 코로나 상황은 한국 교회에 더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얼마나 서투르고 미숙한지 그 민낯이 드러났다. 교계 안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사회의 판박이였다. 교회가 성경에 근거한 자체의 영역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과 교회의 갈등은 구분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로나19의 매서운 상황은 개인부터 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국가와 문화권까지를 막론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자기 성찰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자기 성찰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현재의 상황보다 더 혹독한 시대가 많았지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자기 성찰을 감행한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오늘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2021년, 내적인 상황과 연관된 교계 전망   섣달그믐과 정월 초하루의 시간적 흐름은 연중 여느 날이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의 인식에서는 한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의 흐름은 특별하다. 우리에게 곧 열릴 새해가 한국 교회에는 어떤 시간일까. 교회 내적인 과제가 무겁고 힘겨울 것이다. 코로나19가 2021년에도 국내에서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 분명한데, 공예배 출석 인원의 감소가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는 개 교회의 예산이 감소하는 것이 힘겨운 현안이다. 완전히 폐쇄할 정도로 재정 타격이 심한 교회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반면 많지는 않겠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오히려 재정이 증가한 교회도 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 교회들은 어떻게든 견디어내면서 2021년의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할 것이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보통은 고정비와 긴요하지 않은 간접 광고비부터 줄인다. 교회도 단체로서는 별 다를 바 없다. 교역자 수와 국내외를 포함한 외부 선교비를 줄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일 테다.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더 어려울 텐데 선교비만은 줄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교회들도 있겠다. 참 감사한 일이다. 국내 교계 단체들의 후원 및 모금이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이전에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는데 코로나로 더 어렵게 됐다. 현장 교회의 재정 감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정과 연관된 교계의 생태 구조에 연쇄적 타격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사역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여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의 신앙 인식과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조사에서 이미 확인된 터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신앙 인식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고 목회의 방향과 방법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 광범위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예배는 코로나19가 잠잠해져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 중에 온라인 예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단 온라인 시스템에 승차하고 보니까 여러 다른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쉽게 접근한다. 좋으나 싫으나 설교를 비롯하여 목회자들의 목회에 관한 전방위적 검증이 시작됐다. 예장 합동에서 추진을 발표했고 지난 12월 초의 한교총 총회에서도 채택된 안건 곧 한교총, 한교연, 한기총 세 연합기관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구상에는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한기총을 통합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문제다. 한교총 안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내년의 사회 정치 일정과 연관하여 교회가 또 사회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일까 심히 염려된다. 보수적인 영역의 대표성은 이미 한교총으로 교통정리가 끝났다. 다시 한기총을 끌어들이려는 인식이 걱정된다. 시급한 문제는 연합기관의 통합이 아니라 지도자들 인격의 변화다.   2021년, 외적인 상황과 연관된 교계 전망   교회 외적인 상황과 연결된 과제가 결코 만만치 않다.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그동안 교회가 사회속의 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의 어느 단체든 일을 해나가면서 언론이나 여론에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사회적인 관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그에 관한 적절한 판단이나 식견이 성숙하지 못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처럼 교회는 결코 사회속의 섬이 아니다. 교회의 사역이 그들만의 리그일 수 없다.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거룩한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과 빛이 교회다. 2021년에는 기후 환경 위기와 연관된 담론이 세계적으로 강하게 확산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두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의 차기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19로 인해서 현재 지구의 기후 환경 위기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다. 탄소 중립에 관한 논의는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복음주의적 교계에서 인식과 관심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와 김정은, 트럼프와 문재인과 김정은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만나면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인 의제가 되었다. 북한은 끊임없이 한반도 문제를 국제적인 의제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한다. 북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조금만 생각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장기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한반도 문제가 6자회담 국가들에게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안이 되는 게 당연히 유리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에서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사이에 견해 차이가 큰데 교계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넘는 평화와 통일의 구상을 가져야 한다. 2021년 4월에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있다. 2022년 3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내년의 일이다. 선거 때마다 교회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로 갈려 움직였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권이 가장 쉽게 이용하는 종교 집단이 기독교다. 현재 교계 안의 극우 세력이 시장 선거와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은 뻔하다. 기독교가 정치, 그것도 가장 통속적인 구조로 움직이는 선거에 단선적으로 뛰어들면 기독교에 독이다. 정교분리라는 이천 년 기독교의 정통 입장을 이리저리 오해들 한다.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명령에 따른 십자가의 방식 곧 사랑과 평화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한다는 것이 정교분리의 큰 틀이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길이다. 교회가 이 면에 기여한다면 참 감사한 일이다.   2021년, 갱신의 카이로스적 기회   한국 교회에 바라는 사회의 시각이나 교회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각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갱신돼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명제는 교회론의 부록이 아니다. 갱신과 개혁은 교회론의 본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결된 계시인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 기준이다. 거룩한 말씀의 심장인 십자가 사건의 가르침에 교회의 생사가 걸려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성서의 말씀에 자신의 삶과 세계를 비추어보며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자다.   외적으로는 허점이 많은 제도와 불완전한 인간의 모임인 교회에는 늘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며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거룩한 모임이 교회다. 한국 교회가 양적인 감소를 겪은 시간이 벌써 사반세기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갱신을 외치는 목소리와 노력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코로나19가 한국 교회에 주는 각성 중에서 갱신이 핵심이다. 코로나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한국 교회 갱신의 카이로스적 기회다. 코로나가 끝나기 전에 의미 있는 움직임들을 통해서 적어도 한국 교회 갱신의 발동은 걸려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새해 인사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사회와 21세기의 인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겸손과 회개와 경외의 마음을 맞이한다. 기독교 역사의 신앙 선배들과 인류 역사의 현자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믿음과 용기로 이겨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해를 열어주신다. 깊고 강한 믿음으로 인사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12-30
  • 한국교회정론-2
      안창호장로(전 헌법재판관)   2020년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 국회의원 10명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차별금지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도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안(「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을 만들어, 그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성별 및 사상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좋은 것 아니냐고 질문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차별금지법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되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며, 차별을 조장할 뿐 아니라, 선량한 미풍양속과 국가질서를 해칠 수 있는 아주 나쁜 법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 설교를 하면 처벌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가짜 뉴스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학교(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미션스쿨, 신학교)에서, 공공의 장소(길거리, 군대내 교회, 경찰 신우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하면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 최근 아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전인데도, 방통위에서는 극동방송과 CTS가 차별금지법 반대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주의를 경고했다.   그 제재는 단기 징역형, 벌금 수백만 원보다 무겁다.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이 부과될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가능하다. 손해의 2배 내지 5배의 배상, 최소 500만 원 이상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집단소송을 제기하면, 10명이면 5천만 원, 100명이면, 5억 원, 1만명이면 500억 원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와 단체는 파산되고 초토화될 수밖에 없다. 단순 징역형이나 벌금형보다 훨씬 무서운 제재이다. 차별금지법을 7,80%의 국민이 지지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 법에 대하여 아무런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고 질문 받으면, 많은 사람들은 차별을 금지하자는데 하면서 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게 되면 차별금지법이 그런 악법이냐면서 반대한다.   어떤 분들은 차별금지법이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등, 아주 나쁜 법이라면,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이를 추진하려고 하냐고 질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이념 때문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유럽계열의 민족, 독실한 기독교 신앙심, 농촌 거주자들,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과 미국적 정체성의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려 한다.”고 한다(프란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수경 역, 한국경제신문, 2020년, 196면). 반기독교적 이념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장애, 국적 등을 이유로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제3조). 차별금지법은 차별 대상인 ‘성별’이 남성, 여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고 한다(제2조 제1호). 성별에서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인정한 것은 성의 구별이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에 의하여 이뤄져야 한다는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 이외에 제3의 성을 인정하면, 인간이 인정하는, 인간이 만드는 제3의 성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계속)
    • 오피니언
    • 정론
    2020-12-15
  • 한국교회정론-1
    소기천(장신대 신약학교수/한국교회정론대표)   오바마가 미국에 남긴 공헌은 오바마 캐어인 전국민 의료보험체계와 동성애 인권 논리이다. 트럼프가 기적적으로 클린턴을 꺾고 45대 미국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이 두 가지를 폐기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에 가지고 갔지만, 판결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과연 더는 논란이 없는 문제일까?   오바마 8년 동안 미국이 정책적으로 동성애, 젠더 정체성, 사회적 성평등, 낙태 조장, 이슬람 난민 허용,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등을 실시하여 진보적인 소수 종교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침묵하는 다수인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많은 기독교인이 민주당의 기세에 눌려서 살던 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반전이 일어나면서 기독교가 숨을 쉴 수 있었다. 물론 지난 트럼프 재임 4년 동안 온두라스에서 시작된 이민자들이 무작정으로 걸어서 미국으로 향하는 대열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음으로써 꽉 막힌 상황에서 미국의 반이민 정서에 인권 문제까지 불을 붙임으로써 논쟁이 가중되었지만,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함으로써 어느 샌가 매스컴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국경을 봉쇄하여 미국인의 일자리를 사수해야 한다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어느 사이에 쿠바 난민들이 플로리다에 대거 몰려가서 터전을 마련한 이후의 상황에서 같은 히스패닉계이지만 쿠바 이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옹호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반이민 장벽을 쌓은 것을 지지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4년 전의 대선처럼 플로리다를 민주당에게 내주지 않은 보상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7천만표를 얻은 트럼프는 재임으로까지 이어지기 어렵게 되었고, 바이든이 미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7천5백만표 이상의 득표를 하고 대의원의 과반수를 얻은 상황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승복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법적으로 반발하기 때문에 바이든은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얻지 못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의 와중에 미국에서 국론 분열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기에, 누군가는 나서서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시급하다. 그동안 미국 대선은 정책 대결보다는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대방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일에 급급한 것이 선거가 끝난 상황에서도 트럼프가 좀처럼 백악관을 내줄 것 같지 않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일단 대선이 끝났고 개표가 말해주듯이 바이든이 대의원의 매직 넘버인 270표를 훌쩍 넘긴 상황이다.   바이든은 3수라는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었지만, 과거에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 않은 것처럼 앞으로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일이 전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바이든은 트럼프가 어려운 여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이전에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린 정책에 대해 인정하고, 미국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는 트럼프에 대해서 전염병을 핑계로 사사건건 마스크만을 물고 늘어지고 여론몰이를 통해서 트럼프를 조롱하고 깎아 내린 가벼움을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중시하여 주례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이든이 어떤 경우에서도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트럼프를 향해서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은 대선 유세를 마무리한 행보를 비난한 것이나 자신의 선거에 유리하게 거액의 광고를 통하여 계속해서 조롱한 것은 결코 세월이 지나간다고 쉽게 잊힐 일이 아니다. 그만큼 바이든은 절대다수의 언론 매체가 지지하는 기반을 바탕으로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그를 지지하면서도 침묵하는 샤이 트럼프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바이든이 대선에 이기고서도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쉽게 얻지 못하는 것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8년의 재임 기간에 교회는 양분되었다.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회가 동성애 합법화를 선언하고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락하게 되자, 2천여 개의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여 1/3로 교세가 줄어들었다. 프린스톤 출신이 한국 신학교에 대거 몰려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몇몇 교단은 동성애 인권 논리의 싸움터로 변질되었다. 이것을 거울로 삼은 미국감리교회는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용한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동성애 지지파와 동성애 반대파가 교단을 분립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파국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성경은 동성애를 죄악으로 말한다. 그런데 신학교가 동성애를 성경대로 죄악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시에 인권이라고 교묘하게 포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인권 선언문과 권리장전에 동성애가 인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가? 동성애를 인권으로 옹호하는 것은 상황 윤리를 근거로 하는 논리이며, 사회적 성과 젠더 정체성을 옹호하려는 반성경적인 주장이다. 트럼프가 승복하지 않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 발생한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기독교가 동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바이든은 깊이 생각하고, 오바마의 8년 재임 기간과는 다른 인권 정책으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여야 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죄악이다. 인권으로 옹호를 하므로 동성애자가 파국으로 치닫다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야 뒤늦게 뉘우치고 동성애로부터 돌이켜서 탈동성애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이후이다.   바이든은 다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인권 논리에 빠져서 동성애자 결혼식 주례를 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대로 굳게 믿고 나가는 샤이 트럼프, 곧 다수의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든은 4년 내내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이든은 성경의 진리를 존중하여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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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23
  • 코로나 이전부터 문제였다
        코로나19와 연관된 논의가 사회는 물론이고 교계에서도 한창이다.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가 시작된 올해 2월에 설문조사를 시작한 이래 내년 전반기까지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되는 ‘코로나19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교회의 사역은 거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대략 내년 말쯤이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방식으로 끝나든 독감 바이러스처럼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든, 코로나 이후 시대에 관한 예측과 대책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받는 타격을 추스르면서 내부적으로는 목회의 동력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방안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걸려 있다. 향후 5년에서 8년 어간이 한국 교회의 골든타임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골든타임, 자연재해를 비롯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매몰된 사람이 생존한 채로 구조될 수 있는 한계 시간을 말한다.   1885년을 한국 선교의 기점으로 본다면 선교 역사 110년만인 1995년부터 한국 교회의 교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벌써 25년 그러니까 사반세기가 지났다. 양적으로 성장을 구가해온 시간의 거의 사분의 일 동안 이미 쇠락해온 것이다. 1999년에 저 유명한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한국 교회의 하락과 연관해서 상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2020년의 코로나 상황에서 불거진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올해의 문제가 아니다. 사반세기 전부터 현상이 시작된 것인데 코로나 상황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표출됐을 뿐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볼썽사납게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들의 신학적이며 인격적인 소양 저하, 지도자들의 윤리적 해이, 신학교육 기관의 동력 상실, 연합기관의 분열과 대표성 약화, 교단 및 교계 정치의 비윤리성, 기복주의에 토대를 둔 번영신학과 물량주의적 성장 신학, 교회 직분 제도의 경직성, 그리스도인 개인의 자기정체성 약화와 사회적 영향력의 상실 …….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없는 영역이 어디인가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교육, 의료, 한글 교육, 생활 개선, 민족의 정체성, 국제적 연결 등 사회 전반에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였다. 우리 사회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지나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걸어오는 동안 교회의 부침이 많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회는 내부적으로만 아니라 사회 상황과 연관해서도 동력이 충만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친일과 신사참배를 놓고 교회의 분열과 부끄러운 자기정당화가 있었고 한국전쟁과 이후의 상황에서 좌우 대립의 극심한 반목이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굴곡 속에서도 복음 전도의 열정과 어려운 이들에 대한 구제가 한국 교회에 넉넉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교회가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시절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쇠락의 변곡점이 어디였나. 한국 교회가 신앙의 동력을 잃어온 시간이 이제는 꽤나 길어서 한두 가지 처방으로는 회복되기 힘들다. 기초 체력이 워낙 허약해져 있어서 근본적인 원인 진단과 중장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진부할지 모르지만 오래된 가르침을 듣는 것이 확실하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명제 말이다. 교회는 자신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순례하는 나그네 공동체다. 자신의 제도와 구조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교회는 병들고 허약해진다. 자신 스스로가 목적이 되면서 교회는 끝내 타락하고 복음에 대적하는 세속 집단이 된다.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문구까지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얼마나 건강하게 작동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힘차게 작동하는지 보면 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을 기록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일성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거룩한 이중 국적자다.   그러면 묻자.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릇 ‘나라’라고 할 때는 어떤 법이 구속력을 갖고 작동하는 일정한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 곧 성경 말씀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교회 역사에서 신앙이 병들고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쳤던 소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자’였다. 기독교 신앙의 시원(始原)이 성경이니까 이 외침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처음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는 주님 바라보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온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고 우러르는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 몸부림해야 한다. 성경을 끌어안고 십 년 정도는 외길을 걸어야 한다. 사회적 영향력 회복은 묻지 않아도 좋다. 성서의 말씀대로 살면 사회적 신뢰는 문제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 운운할 필요도 없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강력해진다. 코로나 한참 이전부터 문제였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풀려면 코로나 한참 이후까지 바라보는 긴 호흡을 갖고 다시금 온몸을 던져야 한다. 말씀 속으로.    /지형은목사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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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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