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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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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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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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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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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 결정을 하면서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차기 대통령은 경제, 외교안보, 남북관계 등 총체적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1월 IMF국가경제부도사태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렸을 때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IMF사태를 조기에 극복하고 하락한 국가신용등급을 다시 끌어 올렸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지금 각 당은 대통령 예비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12.3비상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구속과 파면으로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의 우두머리라는 혐의로 제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6.3대선은 IMF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탁월한 리더십과 역량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할까. 첫째는 경청(敬聽))하는 지도자여야 한다.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의 의견 제시는 물론 각계 각 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60분 중 55분을 혼자 떠들어대는 사람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는 부적합하다. 마음과 귀를 크게 열어 쓴소리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고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국정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헌법 제1조는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순간 독재자가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은 국민이 부여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겸손하게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는 극보수와 갈등하고 있다. 노사,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된 초갈등사회다. 이를 극복할 역량과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통일 이전에 남남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들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도 퇴행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 국민이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희망을 갖고 국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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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올해 2025년도는 기독교적으로 선교 140주년(1885년 기점)이 되는 해이며, 정치적으로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나 뜻깊고 가슴 벅찬 해인가. 그리하여 전국에서 환희의 잔치를 벌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기류가 희안하다. 140주년, 80주년이라는 세월은 성숙을 넘어, 안정과 부흥의 역사에 접맥되어야 하리라 믿는데,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는데, 신앙, 정치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기독교 신앙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이며, 정치적으로 탄핵 연발, 계엄 발동, 대통령 파면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맞으며, 6월 3일 조기대선까지 숨가쁘게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대전환기라 아니할 수 없고, 위기라면 위기라 판단해야할 시점이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수는 없다”(이은상). “위기는 기회다.” 언제 들어도 위안과 희망이 되는 명제이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지혜와 실천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실천이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위기를 극복하는데 방해 요소는 무엇보다 양극화이다. 세대간, 남녀 성별간, 지역 간, 빈부 계층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간에 극명하게 갈리어 이념, 이데올로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 현상이 색깔론으로 포장되어 은근히 갈등을 조장한다. 가히 문화전쟁(Culture War)을 넘어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 정국에서 관찰되는 양극화는 또 있다. 예를 들면 진보와 보수가 공히 본회퍼(Bonhoeffer)를 인용한다. 나치 독재와 만행에 저항하다 순교한 목회자인 본회퍼를 진보와 보수가 서로 끌어다 시대적 대안으로 앞세운다. 본회퍼는 우리나라 현 혼란 정국에서 좌우로 쪼개지기 직전이다. 본회퍼 목사가 이곳에 오신다면 스스로도 당황할 것이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의이며 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극단적 대치 앞에서 본회퍼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위기는 기회다.” 이 명제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본회퍼 목사가 가르치는 <제자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해답을 얻는 길이다.(혹 “나를 따르라”로 번역). 본회퍼의 대안은 이미 종교개혁에서부터 출원한다. 루터, 칼뱅이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곧 십자가 신학, Theology of the Cross)에 시대적 혼란에 대한 해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사(빌 2:7,8), 모욕, 멸시, 상처, 고통, 고난을 마다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모방(holy imitation)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신의 한 수”이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기회의 파도를 타고 다시 비상하기를 기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양극화의 비인간적 세파를 극복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다./이레문화연구소 소장·전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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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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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애국하는 길
-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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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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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애국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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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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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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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 /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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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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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 결정을 하면서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차기 대통령은 경제, 외교안보, 남북관계 등 총체적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1월 IMF국가경제부도사태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렸을 때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IMF사태를 조기에 극복하고 하락한 국가신용등급을 다시 끌어 올렸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지금 각 당은 대통령 예비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12.3비상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구속과 파면으로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의 우두머리라는 혐의로 제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6.3대선은 IMF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탁월한 리더십과 역량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할까. 첫째는 경청(敬聽))하는 지도자여야 한다.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의 의견 제시는 물론 각계 각 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60분 중 55분을 혼자 떠들어대는 사람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는 부적합하다. 마음과 귀를 크게 열어 쓴소리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고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국정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헌법 제1조는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순간 독재자가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은 국민이 부여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겸손하게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는 극보수와 갈등하고 있다. 노사,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된 초갈등사회다. 이를 극복할 역량과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통일 이전에 남남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들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도 퇴행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 국민이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희망을 갖고 국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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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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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 올해 2025년도는 기독교적으로 선교 140주년(1885년 기점)이 되는 해이며, 정치적으로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나 뜻깊고 가슴 벅찬 해인가. 그리하여 전국에서 환희의 잔치를 벌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기류가 희안하다. 140주년, 80주년이라는 세월은 성숙을 넘어, 안정과 부흥의 역사에 접맥되어야 하리라 믿는데,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는데, 신앙, 정치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기독교 신앙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이며, 정치적으로 탄핵 연발, 계엄 발동, 대통령 파면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맞으며, 6월 3일 조기대선까지 숨가쁘게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대전환기라 아니할 수 없고, 위기라면 위기라 판단해야할 시점이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수는 없다”(이은상). “위기는 기회다.” 언제 들어도 위안과 희망이 되는 명제이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지혜와 실천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실천이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위기를 극복하는데 방해 요소는 무엇보다 양극화이다. 세대간, 남녀 성별간, 지역 간, 빈부 계층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간에 극명하게 갈리어 이념, 이데올로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 현상이 색깔론으로 포장되어 은근히 갈등을 조장한다. 가히 문화전쟁(Culture War)을 넘어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 정국에서 관찰되는 양극화는 또 있다. 예를 들면 진보와 보수가 공히 본회퍼(Bonhoeffer)를 인용한다. 나치 독재와 만행에 저항하다 순교한 목회자인 본회퍼를 진보와 보수가 서로 끌어다 시대적 대안으로 앞세운다. 본회퍼는 우리나라 현 혼란 정국에서 좌우로 쪼개지기 직전이다. 본회퍼 목사가 이곳에 오신다면 스스로도 당황할 것이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의이며 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극단적 대치 앞에서 본회퍼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위기는 기회다.” 이 명제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본회퍼 목사가 가르치는 <제자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해답을 얻는 길이다.(혹 “나를 따르라”로 번역). 본회퍼의 대안은 이미 종교개혁에서부터 출원한다. 루터, 칼뱅이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곧 십자가 신학, Theology of the Cross)에 시대적 혼란에 대한 해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사(빌 2:7,8), 모욕, 멸시, 상처, 고통, 고난을 마다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모방(holy imitation)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신의 한 수”이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기회의 파도를 타고 다시 비상하기를 기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양극화의 비인간적 세파를 극복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다./이레문화연구소 소장·전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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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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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 역대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통계 수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초기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집권 마지막 분기에는 최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단순한 정치 영역의 지도자를 넘어선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 배경을 따져 보자. 우선 권력 집중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순한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자로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추천을 통하여 사법부 영역에도 간섭한다. 대통령은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코로나19 시대 교회 문을 닫고 열게 하고, 탈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북한 핵을 억제하고, 미·중 갈등에서 균형을 잡으며,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의 국가중심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열강의 침략, 일제강점기,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애국심이 국민의 심성에 내재되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 자부심(이른 바 ‘국뽕’)은 하늘을 찌른다. 더욱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가는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임이 확인되었고, 동시에 국가가 국민 개인을 통제할 정당성까지 확보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의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정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라는 인간 삶의 한 영역의 지도자일 뿐이다. 메시아는 고사하고 그 역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대통령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세금을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 감이 누구인지 깊이 숙고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자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역주권론은 성경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으로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주권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을 여러 영역들로 나누어 다스리신다. 국가, 교회, 가족, 학교, 기업, 학문, 예술 등이 그 영역들로서, 하나님은 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임무와 법과 통치자를 주셨다. 각각의 영역들은 내적 성격과 자체의 법체계에 따라서 그 권위를 행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 통치자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고유 영역에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영역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현하는 길이다. 어느 한 영역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사의 유일한 조직처럼 행사해서도 안 되고, 기업가 정신이 온 사회를 지배하여도 안 되며, 교회가 정치적 과제와 국가의 영광을 취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부패하였기에 한 사람, 한 영역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정치의 하부기관이 아니라, 정치가와 권력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기관이다. 우리의 교제는 분열과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아 통합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교제다. 신앙인은 하나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안목으로 그 이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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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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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공격했다. 전세계는 이를 러시아의 약소국 침공으로 보면서 규탄하고 있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세를 현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현실에서 본질문제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해야 이 상황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이후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감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나간다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차세계대전의 잘못된 해결이 2차 세계대전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나토와 미국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국가적 안전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부딪혀 나온 전쟁이다. 즉 제국과 대국의 이해관계 대립이 전쟁의 원인이다. 나토와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면서 독일 넘어서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문서로 약속됐지만 법적 조약은 맺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와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란드, 발트3국, 발칸국가 등 동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가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발길이 국경선까지 다가온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는 나토 가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간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Demilitalization)를 목표로 하고, 친서방 극우 정권을 통제하기 위해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세부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벌이는 휴전 협상의 본질이 이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않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거부하면 전체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오만한 제국의 쇠퇴이다. 제국의 오만과 쇠퇴, 그것이 이번 전쟁의 본질이다. 미국은 소련 해체 이후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유일 제국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고,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으로 미국의 부자는 이제 슈퍼리치가 됐다. 미국이 중심에 유럽-일본 부자는 주변에 섰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단적 수준이 됐고 그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고 있다. 유일 패권국 - 제국화된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만든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 헬리콥터 머니로 전세계에 풀린 달러는 세계 인플레-대공황을 예고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시리아에서 실패했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며, 이라크에서는 매일 미군 그린존에 민병대의 로켓이 날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완성한 북과 힘겨운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성장한 중국과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며 경제를 회복하고 현대화한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하고 있다. 그 대결의 반영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의 오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오만이 무너지고 진정한 평화의 체계가 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시2:1-3). 한국교회는 표면에 나오는 뉴스에 좌우되지 말고 현상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공포를 넘어서 그들의 오만 보며,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데서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의 교회 목사·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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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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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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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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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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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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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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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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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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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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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회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용서운동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용서운동을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회개용서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밝힌다. 참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딛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강하게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 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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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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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라는 위기의 시대에 선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교회들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잘 대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제 한국사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코로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올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방향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중심/교제중심의 목회를 해 온 것 같다. 교회에 자주 나와 얼굴이 보이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고,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의 문은 닫아야만 했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믿음(?) 좋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의 부흥이 곧 개인 영성의 부흥으로 연결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과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홀로서기 영성훈련을 해야 한다. 말씀묵상(QT)이나 성경읽기, 성경쓰기 등이 좋은 예일 것이다. 필자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성경읽기(10독 이상 15명)와 온라인 성경공부(80여명)가 더 활성화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개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 방향은 숫자로 평가하는 교회 부흥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 영성 훈련을 통해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 교회는 매달 첫 주는 어른들과 교회학교(다음세대) 어린이들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더 이상 세대통합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세대통합 목회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목회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은 사라졌다. 자녀를 교회학교에 맡기고, 교사들에게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 역시 교회에서 다음 세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이들의 신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일하게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가정 중심의 세대통합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담임목사의 메시지로 부모들은 설교를 듣고, 교회학교에서는 이 메시지로 공과를 만들어 현장과 온라인으로 교육을 한다. 주중에서는 이 메시지로 부모님과 자녀들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축복 안수기도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기본이 충실한 목회여야 한다. 교인 숫자 늘리기 목회가 아닌 성도 개개인이 험한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개인 영성을 강화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 되도록 목회해야 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목회에 “위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기감 중부연회 감독·효성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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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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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 코로나 19가 한창이지만, 우리나라는 2021년에 선진국 지위로 올라섰고, 여러 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덕분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반대로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는 비 영어권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은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특별히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활동하는 가상 세계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다. 컴퓨터 상에서 활약하는 가상의 인물인 인공 인간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상공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메타버스의 세계 속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인 가상 자산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고, 디지털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는 기후 위기라고 하는 매우 심각한 위협 앞에 놓여 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와 과제 앞에서 우리의 중장기 계획은 어떠해야 하며, 또 2022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시편에 있다.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 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급작스런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당황하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삶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불려갈 우리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까? 준비 없이 당하고야 마는 죽음, 삶의 끝일까? 아니면 충실한 일상을 살았기에 도달하는 삶의 완성일까? 우리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한다. 가슴 설레며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계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설렘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나눠야 할 것 같다. 산맥을 뚫고 나오는 뜨겁고 뭉클한 더 빨간 햇덩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만,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폭설과 깊은 울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에 더하여, 우리의 삶 한구석에서 늘 우리를 떨게 만드는 불안에 대해서도 속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새해를 여는 날들이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걱정스런 말들도 나누어야 한다. 이 모두가 생명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지고, 믿음이 굳세지고, 사랑이 깊어지며, 주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믿는다. 2022년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북한다./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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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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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평화통일의 ‘마중물’ 역할을 하라
- 지금의 시대를 구약으로 말하면 메대가 쇠하고 파사가 흥하는 시대와 같다. 그래서 이스라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벨론 유수가 끝난 것은 시대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전환기인가? 무엇보다 ‘제국’이 쇠하는 시대이다. 1980년 대 후반 냉전이 무너지고 미국의 일국패권이 지속됐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은 쇠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서도 철수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대선에서도 ‘핑크 타이드’의 바람이 불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은 내부의 분열로 사실상 ‘내전상태’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위상이 그전만 못하다. 이 모든 변화들이 그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미국이라는 제국의 쇠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평화통일의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그 첩경은 종전선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종전선언에 미온적인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여전히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무력 강화로 나가고 있다. 그나마 종전선언에 북한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전선언과 평화의 불씨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두 갈래로 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조야를 설득하고, 미국교회와 시민단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미국교회는 대단히 평화지향적이다. 또 미국의 시민사회를 움직여 집권자들이 평화의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관계에서 남한의 교회들은 북한의 교회들과 관계개선과 교류에 힘써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북미관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 그러나 교류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한국교회는 평화와 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의 힘이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신앙은 거기에 희망과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통일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연합기구이건 개인이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운동을 전개해야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분명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협은 그동안 한국교회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그만큼의 역사적 데이터가 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한교총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연합기구로 성장했다. 과거 한기총이 보여줬던 극단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짧기에 한계는 분명 있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교회협과 실천력이 있는 한교총이 서로 함께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 또한 현장운동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동안 노력에 비해 특별한 성과가 없었기에 허무감과 회의감이 팽배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다시 현장이 살아나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며 희망을 놓지 말자.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이 세대는 평화통일운동에 관심이 없고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져있는데,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자기전통을 전수해줘야 한다. /목사·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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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평화통일의 ‘마중물’ 역할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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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 목양실을 둘러보면 벽에 걸어 놓은 교회 달력 외에는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해가 도착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새는 하늘을 날았고, 말은 들판을 달렸고, 하다못해 굼벵이도 열심히 구르다가 도착한 새해를 만났다. 저쪽에서 꿈쩍 않고 묵묵히 한쪽 자리를 지키며 풍상을 이겨온 바위에게도 이미 새해이다. 그렇게 새해가 온 세상에 도착했다. 2022년 새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궁금하다. 희망과 기대, 아니면 희망 실종과 기대 무산. 2년 동안 같이 살아온 지겨운(?) 코로나는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 이름을 붙이고, 다시 파도처럼 한 해를 점령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르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두려움과 신뢰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인간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노르웨이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는 어렸을 때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저녁노을 붉게 물든 하늘과 거무스런 대지, 두 자연의 색깔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치는 한 인간의 두려움. 그의 절규(The Scream)라는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뢰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은 좋은 길만 따라가는 자동항법 장치에 따라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기가 아니며, 도로 위를 알아서 가는 자율주행 차량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임의 변수가 많은 바다 위에서 항해를 한다. 갈릴리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름의 배다. 일이 일어난 그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마 8:18)하셨다. 풍랑이 일지 모르는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 것은, 제자들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제안한 일도 아니었다. 여지없이 풍랑이 일어났다. 그 여정을 계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띄우는 한 해의 인생의 배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다시스로 내빼다가 풍랑을 만난 요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는 거친 풍랑의 한 가운데서 배 밑창까지 내려가 숨었으나 그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날 제자들이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은 다시스로 가는 바다 풍랑하고는 달랐다. 갈릴리 풍랑은 불순종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순종의 결과였다. 그래도 풍랑 치는 바다는 두려운 것이다. 풍랑 치는 세상은 정돈된 삶과 희망의 항로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탄 배의 어촌계 등록 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한 주인은 그 안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그 분이 온 세상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바다가 그렇듯 우리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신뢰가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한평생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어딘가에 위치해서 살아간다. 신뢰는 의지하는 힘이다. 가는 길에 수북하게 쌓인 의심을 거둬내고 낙심에 기죽지 않으며 힘이다. 신뢰가 커지면 두려움이 작아지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최종 두려움마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배는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이다. 평상시에는 우리에게 있는 신뢰의 정도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바다에 풍랑이 일면 비로소 신뢰가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뢰와 믿음은 면적이 아니라 체적이다. 도화지 펴놓고 색칠 예쁘게 한 평면 그림이 아니라 거칠지만, 삶 속에서 만들어진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있는 그릇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고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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