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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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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30
  • ‘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 주도흥목사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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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7
  • 크리스마스 - 예수가 우리를 찾아 나선 첫 날
    ▲ 정인교목사  “어머니 난 지금… 참호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몹시 추운 날씨지만 참호속은 지푸라기가 넉넉해 꽤 아늑해요. 오늘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적없는 기적같은 광경을 보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페이스북에서 ‘1914년 기적의 크리스마스’라는 영상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영상이었지만 보는 내내 가슴을 잔잔히 적셔왔다. 앨프레드 두건 차트 소위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로 지역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온종일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리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멀리서 간간히 포성이 들리는 사이로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노래 소리가 들여왔다. 스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영국군이 그 찬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같은 찬송을 부르다니….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영국군 병사 하나가 비무장인 채로 참호에서 나왔다. 그것을 보고 양국 병사들이 하나둘씩 참호에서 나온다. 주님이 오신 성탄절 아침 그들은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눈다. 어제 부른 찬송 이야기를 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양 팀으로 나눠 축구경기를 하고 서로 상대편의 머리를 깎아 준다. 다시금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고 이들은 서로 별일 없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자신들이 소중히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성탄의 기적은 그렇게 전쟁터에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 나선 첫날인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기적 아닌가?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가해자인 인간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신 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에게 생명의 손을 내미신 날…. 서로를 겨누던 총부리를 내려놓는 기적은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닌가? 영상을 보니 영국군은 메리, 즐거운 크리스마스로 인사하고 독일군은 ‘프로헤 바이나흐텐’ 즉 경건한 성탄으로 인사한다.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전장의 병사들이 호응한 감동의 날은 당연히 즐거운 날면서 경건한 날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누우실 구유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백화점 세일과 만원이 된 모텔, 일년 대목 보는 술집이 들어서고 술집 매상이 들어서서 즐겁다고 한다. 성탄이라는 명칭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자리에 Season’s Greeting을 새겨 넣은 채 말이다. 이렇게라도 즐거워야 할 만큼 우리 인생사가 각박하다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저녁에 귀가하는데 아파트 입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통장님, 너무 수고 많으세요. 올해 제가 처음 본 성탄 트리네요” 모든 아파트 통장 중에서 역사상 가장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통장님이 방긋 웃으셨다. “다들 예전 같지 않아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지 얼궁에 웃음도 사라지고 성탄절이 코앞인데도 아무 생각들이 없는 것 같아요. 제발 성탄절만이라도 서로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어요” 나는 안다. 우리 통장님이 예수 믿는 권사님이라는 사실을…. 성탄트리를 장식하면서 권사님의 기도가 내 기도와 같았으면 좋겠다. ‘주님 이 땅에 평화를 주세요.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살게 해 주세요.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예수 믿어 행복하게 해 주세요!’ 1914년의 기적이 올해 다시 이 땅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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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8
  • 변질에서 희망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서라
    ▲ 황인찬목사 언제부턴가 한국의 기독신자로서 자부심을 잃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정통 교회와 이단을 일반 사회가 구분하지 못하므로 이단 사이비들의 준동과 비윤리와 반사회적인 작태가 오롯이 교회의 몫이 될 때 아픔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단과 사이비들의 행태여서 우리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아니 더 치를 떨며 비판하고, 암 덩어리 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거품을 물며 그들의 해악을 말하고, 우리 교회가 진정 그렇지 않음에 자위를 했다. 하지만 정통교회와 그 목사들의 일탈과 비윤리, 비도덕의 현장이 고발될 때면,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 한, 때로는 자랑스러워하던 인사나 교회의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 된다. 너무나도 만연한 목사들의 잘못과 부정부패, 역사의식이 실종된 망언 등을 접할 때 한국교회에 정말 희망이 있는가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처럼 심해에 좌초된 것 같은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여기의 성은 환란으로 멸망에 이른 오늘의 한국교회다. 열국의 부러움을 사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열방의 수치와 모욕거리가 되었다. 선지자는 ‘슬프다’는 말로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위로 받고자 해도 위로 자가 사라져 위로 받을 수가 없다. 상황의 악화로 그 비참함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선지자는 고백한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소망이 끊어진 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강제로 옷 벗김을 당한 사람처럼 참담한 모습으로 손가락질 받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을 마땅히 의지하고 경외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맘몬을 믿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안중에 하나님 없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 처절한 형편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피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절망에 찢긴 나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는 한 희망은 있다. 우리 교회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깨어지고, 망한 자처럼 되었어도,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기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주님의 위로가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겨두신다. 그 남겨진 그루터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신다. 한국교회 심장의 박동을 멎게 하지 않으시고, 의의 사람 10사람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찾으시고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게 하신다. 시편의 기자는 말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희망, 나의 소망은 주님께만 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회개의 무릎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변질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서 희망이 되자.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하지만 고난이 인생의 큰 유익이 된다.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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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04
  • 중심과 변혁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선수의 한국 여자탁구가 여자단체전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8전 8승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 손기정 선수 이후에 한국의 어떤 스포츠가 세계를 제패한 일이 처음이었다.   이 열기로 탁구장이 많이 생겼다. 내가 중학교 때 탁구를 배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탁구를 가르친 코치는 늘 자신이 이에리사 선수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처음에 기본 동작을 배웠다. 붉은 벽돌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탁구장에서 동네 뒷산까지 뛰어 올라가는 일이 훈련의 시작이었다. 뒷산에서 벽돌을 들고 기본 서식을 연습했다. 한 달 동안은 탁구채를 잡지도 못하게 했다. 벽돌을 탁구채 삼아 포핸드와 백핸드 동작을 팔이 아파서 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했다.   탁구장에 돌아와서도 탁구채는 잡지 못했다. 선수급 되는 사람들이 치는 것을 관찰하게 했다. 그들의 동작을 보면서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한 달 정도 후에 처음으로 탁구채를 잡았는데, 신기하게 탁구가 되었다.   모든 운동에는 기본기가 있다. 그 운동에서 얼마만큼 발전하느냐는 기본기가 얼마나 잘 잡혀있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이 중심이다. 중심이 확고하면 경기를 할 때 벌어지는 다양한 변화의 상황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중심이 깊고 확실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삶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신앙의 중심이 든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의 중핵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계시를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나누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를 가장 실제적으로 말하면 66권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여기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다.   중심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중심에서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 또는 변혁의 탄력성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너무도 뚜렷한 현상이 변화다. 기술의 발전과 변화의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변화의 흐름에서 밀려나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필수 항목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기대어 오늘날의 인간 생존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나는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이와 연관된 굳건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요 뿌리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자칫 잘못하면 교조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해명 없이 기존의 생각을 무조건 고수하는 고정관념 말이다. 성서에 대한 깊은 믿음이 교조주의의 곁길로 빠지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변화의 탄력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변화의 흐름에 문을 걸어 잠그면 교조주의로 빠진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근간으로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변혁의 역동성이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해야 한다. 성경은 원래 그런 책이다.   남북, 북미 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큰 틀이 변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중심이 분명한가, 그리고 변화의 탄력성이 충분한가?  /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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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7
  •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가 되라
    ▲ 김영한원장   한국교회는 외적으로는 시대적인 세속주의, 젠더주의, 이슬람의 공격으로 도전을 받고 있으며 내적으로는 연합기관의 분열, 대형교회 세습 관행, 신천지, 안상홍 하나님 교회 침투 등 각종 이단들의 내부공격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첫째, 세속주의라는 세상의 풍습과 타협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이 잠식되고 있다.  교회 기관의 직분은 섬기는 자리인데 여기에 물질과 권력추구가 중심이 되고 있다. 성경적 헌신에서 떠나서 세상적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젠더주의가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질서로 간주하여 교회를 미혹하고 있다. 젠더주의는 남녀로 태어나는 생물학적 성질서를 부정하고 성이란 사회가 지정한다는 사회적 성을 주장한다.    셋째, 이슬람이 세계적인 대두로 지구촌의 세력이 되어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슬람은 한국을 세계의 이슬람화의 전초기지로 보고 각종 선교사 파송과 이슬람 노동자들을 파송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외부적 도전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속주의의 도전은 초대교회부터 있어왔다. 오늘날에는 물질주의와 권력추구는 기독교를 변질시키고자 한다. 젠더주의는 양성질서인 성경적 창조질서를 인간이 조작한 성평등질서로 변질시키고자 한다. 성경은 창세기 19장 사사기 19장의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회적으로 타락한 사건에 대한 폭로기사를 통하여 분명이 동성애가 가증한 짓(토예바), 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은 알라라는 중동지역의 부족신을 유일신으로 믿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믿는 야웨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종교다.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의 교주이나, 예수는 기독교를 만든 자가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이 만든 신앙고백 공동체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서 단일신을 믿는 이슬람과는 전혀 다른 종교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외부적으로 도전받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내적으로 단합해야 한다. 첫째, 보수교회 연합기관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금 보수기관은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세 기관으로 분열되어 각기 권력을 추구하고 있어 비난을 받고 있다. 오늘날 연합기관은 교회 연합을 추구하지 못하고 권력다툼, 교권 비리, 사회 집권 등의 현장이 됐다. 특히 대표회장 선출을 두고 일어나는 다툼이 문제가 있으며 또 희생, 연합 정신이 결여돼 있다. 명예나 개인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을 각오를 해야하는데 구호만 외친다. NCCK는 별도로 진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난맥상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대형교회가 담임목사직을 세습케 함으로써 사회에 대하여 바른 윤리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형교회당 담임목사직 승계는 목회승계라는 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으나 대형교회당 담임목사직 세습은 막대한 재정과 인사 등 권력이 대물림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비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셋째, 신천지, 안상홍 하나님 교회 등이 정권교체기의 느슨해진 틈을 타 한국주류교회에 추수꾼의 명목으로 침투하여 각종 교회분열과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신천지는 이만희를 재림주로 세우면서, 하나님교회는 죽은 안상홍을 하나님으로 장길자를 영적 어머니로 믿고 각종 종교적 미혹으로 신자들을 공교회에서 이탈하게 하고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있다. 공교회는 하나가 되어 이에 대해 바른 대처를 해야 한다. /전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원장·기독교학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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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0
  •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성경이다
    ▲ 이상원교수   추수감사절은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염원하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 온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첫 해의 살인적인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맞이한 이듬 해 첫 수확을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마련한 절기였다. 주로 미국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여 형성된 교회가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미국교회의 관행들이 한국교회에도 도입되었고, 그 관행들 가운데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미국교회로부터의 기원과 관련하여만 생각한다면 현대 한국교회에서 그 의미가 약화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현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도시에 세워져 있고 대다수의 성도들이 농사가 아닌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실 때문에 일 년 단위로 추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추수감사절은 피부에 와 닿는 절기가 되기 어렵다. 농사를 짓지 않는 성도들의 경우에는 이들이 행한 수고에 대한 보답이 반드시 11월에 한 번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석이라는 한국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절기가 이미 국가적인 명절로 크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한층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국가 최대의 명절 가운데 하나로 지켜지고 있는 미국과는 달리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 교회 내의 절기로서만 지켜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추수감사절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다르다.   현대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의미 있게 지키기를 원한다면, 추수감사절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어야한다.   추수감사절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는 성경 상의 절기로는 수장절을 들 수가 있는데, 사실상 수장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절기는 아니다. 수장절은 구약성경에서 유월절 - 맥추절 - 수장절로 이어지는 ‘삼대 절기’의 하나로서 한해 농사를 마무리 짓는 절기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장자를 죽이실 때 어린 양의 피가 문지방에 묻어 있는 집의 장자를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시기적으로는 씨앗을 뿌리는 시점에 거행하는 절기다. 이 절기는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 맥추절은 보리의 첫 열매를 거두는 시점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강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뿌리신 구원의 씨앗의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을 기념한다. 그러면 수장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절기인가? 수장절은 완전히 익은 모든 열매를 다 거두어 곳간에 들이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며 모든 믿는 자들을 천국으로 모아들이는 사건을 예기적으로 기념하는 절기가 된다.   현대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에 구약 수장절의 의미를 부여하여 준수한다면 추수감사절은 영구적인 의미를 가진 교회의 절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님이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를 묵상하고,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여보내듯이 신자들을 모아 천국에 들여보내시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또 쭉정이를 모아 불에 태우듯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지옥에 넣으시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복음전도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렇게 된다면 추수감사절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의미를 가진 절기로서 유지되며 지금 한국교회에게 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총신대 부총장·신학대학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11-14
  • 바른 감사생활의 길
      그분이 내게 믿음을 주셨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생각과 이론은 쉬우나 실체(진리)가 된다는 면에서는 많은 장애와 어려움이 있다. 감사생활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을 거치고 나서 숨을 고르며 감사의 평안을 맛보게 된다. 그래도 그 고마운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감사할 마음의 조건이 구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면, 우리 앞에 축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이러한 기사이적을 감사의 생활이 가져다가준다. 우리에게 그 분이 계시다면 그를 향한 믿음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되어 준다. 가령 나에게 그 분이 없다면 나의 삶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은 생명의 길로 나아가나,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는 죽음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바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귀신들린 딸의 질병으로 이미도 가장 큰 고통과 아픔과 수치심과 절망 속에서 수많은 갈등과 복잡한 감정의 탄식들은 인생의 큰 장애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으로 주님께 신앙고백을 한다.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고 자신의 수치스러운 문제를 숨김없이 다 털어 놓았으나 돌아온 것은 냉대와 무시였다. 이 중복된 장애가 믿음을 없이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더욱 감사함으로 절을 하며 주님께 나아간다. 참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오직 수치심의 상처에 머물지 않고 주님만을 공경하며 나아간다. 이 때 너그러운 은혜가 아닌 더욱 좌절감 속에 내동댕이 쳐진다. 돌아온 답변은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에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여인은 이러한 낮아짐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주여 옳소이다”라고 찬미함에 있다. 주님은 이러한 믿음을 크다고 하셨고, 즉시 질병에서 자유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은 모든 장애를 이기고 사망에서 나와 생명 길을 가게 한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옳소이다”에 있다. 어떤 고통과 좌절과 낮아짐 속에서도 이러한 환경이 내게 합당치 않다고 불평하지 않고 이것은 내가 당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좋은 환경을 찾지 않음은 이미 믿음이 가장 좋은 환경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나오는 감사를 깊은 감사라고 한다. 주께 날마다 감사함으로 기사와 이적을 이끌어 올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입으로만 하는 감사가 아니다. 자기 의존의 끈이 끊어진 낮아짐 속에 있는 믿음에서 나온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장애를 이긴 믿음의 힘으로만이 가능하다. 주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거칠 때 나오는 맘이 감사의 마음이다. 가장 낮아진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주의 종 앞에서 성도 앞에서 자신을 더욱 낮출 수 있을 때 비로서 감사생활이 가능해 진다. 생명 길로 인도하는 믿음에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장애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겼기 때문에 감사하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은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믿음을 가졌음에 감사하는 자는 가장 겸손한 자요, 가장 낮아짐을 맛본 자에게만 있는 감사생활이다. 모든 장애를 이기고 축복의 문으로 안내하는 감사는 이처럼 깊은 데서 나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8-11-06
  •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 안준배목사   은퇴한 광고 에이전시 보스 해리엇(셜리 맥클레인)은 어느 날 신문의 부고 기사를 읽다가 어처구니 없어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의 사망기사인데 터무니 없이 미화된 기사를 읽고는 신문사의 CEO에게 항의 방문 하였다. 그런 후에 부고 작성 전문기자 앤(아만다 사이프리드)을찾아가 따지기 까지 하였다.   이렇게 알게 된 사망기사 전문기자 앤에게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달라고 한다. 앤은 해리엇에 대한 부고기사를 생전에 쓰기 위해 ‘해리엇 인생 꾸미기’에 나섰다. 앤은 해리엇이 뽑아준 300명의 지인 명단을 갖고 인터뷰를 하였다. 그녀의 남편과는 오래전에 이혼하였고 의사인 딸은 엄마 해리엇과는 전화조차 하지 않는 단절된 사이이다. 앤은 해리엇이 나가고 있는 교회의 사제를 만났으나 교구 사제마저도 해리엇에 대한 평가가 바닥이었다.   앤은 이런 상태에서 해리엇이 죽기 전에 도저히 부고기사를 쓸래야 쓸 수 없게 되었다. 앤과 해리엇은 이제라도 해리엇의 완벽한 엔딩을 위한 4가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 프로젝트를 세운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친구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 ‘아주 우연히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는 나만의 와일드카드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들은 공개된 유언장을 통하여 해리엇의 전재산을 교회와 사회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리엇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자신들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마천 사기열전에 나오는 진나라 여불위는 투자의 달인이다. 여불위의 투자원칙은 희소성의 원칙이다. 현재 처한 상황이 어려워서 상품가치가 없지만 미래가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여불위는 왕위 계승 서열이 뒤쳐진 자초왕자에게 전 재산을 투자하여 마침내 진나라 영자초 장양왕이 되게 하였다. 여불위와의 사이에서 임신된 절세미인 애첩 초희를 자초에게 주어서 황후가 되게 하였다. 그 소생 영정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집권 10년에 여불위를 파면하였다. 그래도 여불위에게 하남 땅을 봉읍으로 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각 나라의 수 많은 선비가 여불위를 찾아오자 시황제는 여불위에게 최후통첩의 서신을 보냈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에게 하남을 봉읍하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는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라고 중부라고 불리었는가? 그대는 당장 가족과 함께 촉땅으로 옮겨 살아라”   여불위는 참수당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거두었다. 상국이라 함은 재상중의 으뜸으로서 왕과 비등한 지위이다. 중부는 왕의 부친이라는 호칭이다. 사실상 여불위의 권세는 황제 이상이었다.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에서 여불위의 인생을 유문무실로 기재하였다. ‘그의 인생은 화려하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이다’는 평가이다.   교비횡령으로 4년 9개월의 형을 받았고 이어서 연금재단 배임 선고공판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된 박아무개는 총회장 6년, 총무 8년을 합하여 14년 동안 교단을 전횡하였다. 그가 지명하면 줄줄이 교단 총회장이 되고 총무가 되고 신학교 총장, 이사장, 헌법위원장, 재판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이 되었다. 교단 내에 아무도 그를 견제할 수 없었다. 무소불위의 교단 실세였다. 교단의 절대권력 박 아무개의 판결서에는 교단내에 그 어떤 제동장치도 전무하였다고 기재되었다.   아직도 그런 이를 롤 모델로 삼는 교단과 교계의 실세들이 여전히 출몰하고 있다. 그런 이들은 여전히 추종자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줄을 세우고 위세 한다. 그렇지만 그가 죽고 나서 마지막 들어야 할 말은 ‘화려하다고 소문만 무성했지 별 것 아닌 인생이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이사장·문화평론가
    • 오피니언
    • 정론
    2018-10-30
  • 새로움과 희망을 전하는 교회의 소망
    ▲ 이상대목사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선택한다면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로 대표되는 이교 사상과 대립하는 한편, 펠라기우스주의와 도나투스주의 등 이단 사설을 논박하며 기독교 신앙을 굳건히 지켜낸 인물이다.   무너져가는 고대 로마의 끝자락에서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섰던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을”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신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교회는 죄와 악이 없는 깨끗한 ‘성소’가 아니라 그것에 고통을 받는 이들이 모여 치료를 받는 ‘병원’이었다. 당대 어떤 이보다도 열정적으로 이단을 적대시했지만, 이단에 몸담았던 이가 올바른 교회로 돌아온다면 이전까지 지녔던 신앙과 성례는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무한한 일치와 관용을 우선시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과연 아름다운 모습일까. 수없이 난립하는 교회연합기관들은 수년 동안 통합을 약속했지만, 그 끝은 공허하기만 했다. 각 교단 총회가 끝나고 현재는 각 교단마다 노회가 열리고 있지만 사회에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화합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정치 이슈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퀴어 단체와 반동성애 단체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는 NAP를, 교육부는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친 동성애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1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남북·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 질서에 어마어마한 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제주도 난민 문제와 미투운동은 또 어떠한가.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에서 신속히 논의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이 시기에 교회에 일치와 관용을 필두로 하는 연합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자리만을 지켜내고자 하는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이제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아 이 땅에 굳건히 서서 새로움을 전해주어야 한다. 이 암울하고 슬픈 세계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반석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반석으로 삼음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했던 반석이 무엇인지 숙고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하는 반석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개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가 자칫 무색해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개혁하는 교회,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한국은 물론 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로 한 다짐을 힘씀으로 이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이룩하고자 하루빨리 연합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소모적인 분쟁과 논란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끝내고, 한국교회가 진리의 깃발 아래 모여 다 함께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 되어 세상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이다. 현실이 지금 이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와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미래목회포럼 전 대표회장·서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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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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