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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된 성도의 삶, 디아코니아
    ▲ 진영석목사   성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연결시키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요10:10-16)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하나님이 최초의 아담에게 내리셨던 문화 명령(장경철교수의 문화읽기 79p,2002)과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던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파함이 마땅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교회 안에서 조차 세속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는 않는가?   개신교회가 시작된 1517년 10월 13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속적 분위기에 젖은 천주교회의 부패상에 대하여 저항한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교황들이 세속적인 통치 권력을 추구하고 르네상스의 후원자임을 자처하며 세속적 가치를 극대화 하려는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 이후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주님의 말씀에 기초한 변화가 교육과 문화와 정치 등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신앙의 유산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   종교개혁자이며 교육개혁가이기도 한 루터가 중세 시대에 교회에서 공동기금을 모아 사회의 빈민 구제를 위한 자활비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성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필요한 곳에 사용해야 한다. 인력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전인적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을 믿는 바,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다시 그리스도만으로」라는 주제로 종교개혁500주년을 지냈던 기독교한국루터회는 올해로 선교 6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를 준비하며 ‘디아코니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디아코니아란, 개신교회에서 실천하는 사회적 ‘봉사’와 ‘섬김’을 말한다. 약자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일, 즉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성도의 모든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디아코니아의 개념은 원래 식탁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발전하여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로날드 사이더는 교회의 네 가지 사역을 이렇게 소개했다. 첫째, 아픈 사람에게 찾아가 약품을 제공하는 구호사역, 둘째, 상처치료와 재활치료를 통해 온전히 활동하도록 개인을 발전시키는 사역, 셋째, 아픈 사람이 다시 병들지 않도록 주변여건을 개선시키는 사역, 넷째, 법이나 사회제도 또는 구조를 개선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의와 공도의 히브리 단어는 ‘체데카’와 ‘미쉬파트’로 정의와 공의로 해석 할 수 있으며, 아모스 5장19절에 같은 단어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디아코니아는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이며 실천 자체가 복음선포이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사명을 수행하는 일.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일을 다 이루셨다.   은혜로 인해 구원 얻은 우리가 교회공동체 안 세속적 가치들을 몰아내고, 성도들과 더불어 진정 풍성한 삶을 누리며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아 선한목자이신 예수님께로 연결시켜야 한다.   평화통일을 논하고 있는 지금 참된 성도의 삶은 디아코니아를 깊이 생각하며 실천할 때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임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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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6-20
  • 원수를 용서한 이인재목사
    ▲ 김헌곤목사   이인재목사의 선친 순교자 이판일장로는 1930년에 문준경전도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판일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곧 바로 담뱃대와 제사도구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 버렸으며 전 식구들과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문준경전도사가 1932년 임자도에 교회를 세울 때 서양 귀신을 몰고 온 여자라고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지만 이판일·이판성 형제가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이판일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목포경찰서에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였다. 경찰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석방하였다. 이판일은 “나같이 비천하고 못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그 모진 핍박을 당하셨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주님 사랑을 만분지일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후 충직한 이판일은 이후 장로가 되었고 교회의 기둥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지역 좌경세력들은 이판일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동생 이판성 집사와 함께 목포 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국군이 들어옴으로 풀려나 임자도로 돌아온다. 이 장로는 “설사 내가 화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교를 각오했고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10월 4일 수요일 저녁, 이판일은 집에서 가족과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런 전시상황 속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예배는 좌경세력에 발각되어 중단되었다. 그들은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 바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판일장로는 무릎을 꿇고 스데반집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장로는 “아버지여,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판일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으며, 흥분한 좌경세력들은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채 죽지 않고 울부짖는 생명들까지 모래구덩이에 쓸어 넣듯 생매장을 했으니 그 시간은 자정이 지나 10월 5일 새벽 2시경이었다.   이판일장로가 살해당한지 얼마 후 결혼하여 목포에 살던 큰 아들 이인재집사가 해군함정이 임자도에 상륙하던 날 동행하였다. 이인재는 군인들과 함께 지역 좌경세력들을 다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그는 이봉성담임전도사와 교회의 싸늘한 마루에서 밤새도록 통곡하며 기도를 하였다. 새벽녘에 두 분의 음성이 들렸다. 문준경전도사님의 평소 설교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나님 기뻐하신다” 또 아버지의 음성이 있었다. “아들아, 나는 저들을 용서했단다. 그러니 너도 용서하여라” 다음날 가해자들이 모두 즉결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군 지휘관은 이인재에게 총을 주어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이인재는 “지휘관님, 이 사람들은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지만 이제부터 공산사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시기 바랍니다”고 요청했다. 지휘관이 허락했다. 이때에 가해자들이 모두가 살아나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다.   이러한 이인재의 용서는 임자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쳐, 수복 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보복이 임자도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6.25동란 직전에 임자도의 인구가 1만3천 명이었는데 동란 중 21%인 2천7백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임자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이인재의 핵폭탄 같은 용서와 사랑의 영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인재집사는 6.25직후 논을 팔아, 좌경세력과 가해자들이 가장 많았던 지역에 교회를 직접 건축하고 1954년에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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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6-12
  • 투표 참여만이 ‘갑질’이다
    ▲ 신평식목사    “짧지만 ‘갑질’ 할 수 있을 때가 왔습니다. 메뚜기도 유월이 한 철이라고 선거 때만 우리가 ‘갑’이 됩니다.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을’이죠. 지들이 ‘갑’이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어떤 분의 하소연이다. 말인즉 6·13 지방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고, 잘 부탁한다고 전화를 걸어오는 후보자들 덕에 모처럼 목에 힘을 주고 산단다. 확실히 선거철이면 후보들은 일단 고개부터 숙인다. 특히 선거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이고 보면 확실한 ‘갑’이다. 그런데 짧은 선거운동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당선자가 ‘갑’중의 ‘갑’인 ‘슈퍼 갑’이 된다.   6·13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지방의원들은 작게는 5천만 원에서 6천만 원의 대의 연봉을 받는다. 연봉으로만 보면 그렇게 고생하고 선거를 치러, 겨우 그 정도만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연봉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지역살림의 모든 재정을 주무르고, 지역의 장래를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   지방자치법 제3절 권한을 보면 “조례의 제정·개정 및 폐지, 예산의 심의·확정, 결산의 승인, 법령에 규정된 것을 제외한 사용료·수수료·분담금·지방세 또는 가입금의 부과와 징수, 기금의 설치·운용,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재산의 취득·처분과 공공시설의 설치·처분, 법령과 조례에 규정된 것을 제외한 예산 외의 의무부담이나 권리의 포기, 청원의 수리와 처리, 외국 지방자치단체와의 교류협력에 관한 사항과 그 밖에 법령에 따라 그 권한에 속하는 사항” 등이다. 이밖에도 지방단체장에서 의안과 관련된 서류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자치단체의 조사와 감사권이 있다.   이렇게 주어지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권한은 지방차치라는 본래의 의도에 맞게 계속 확대 강화되는 추세다. 이러한 권한은 결국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권력이다. 이 때문에 설령 이들이 잘못된 결정을 했다하더라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왜냐하면 권한을 가진 자들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민들의 권익과 보다 살기 좋은 지역을 위해 순수하게 헌신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수많은 이해의 충돌 가운데, 명확하지 않은 수많은 선택 앞에 맞닥뜨린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고, 그 선택은 곧 법이다. 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인가.   당선이 결정되면 이들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민원인들이 들끓고, 고개를 조아리며 읍소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어느새 뻣뻣한 목을 가진 판단자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우리 위에 군림할(?) 권력자를 뽑고 있다. 내가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을 의심하며, 내가 반대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쥐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투표라는 ‘갑질’을 통해 그들 가운데 좋은 사람을 선택해야하는 이유다. 어떤 이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의사표현이라고 한다. 맞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너무 소극적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권리를 위임할 만한 후보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중에서 괜찮은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내가 원치 않는다하더라도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일을 결정하며,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선출된 이들이 풀어내야 하는 문제가 과거의 일이라면 좀 더 쉬울 것을 이들 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항상 새롭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을 가야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사막에서 보석을 찾는 심정으로 찬찬히 살펴보자.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투표하자. 그것이 메뚜기 한철에 할 수 있는 ‘갑질’이 될 테니까. /한국교회총연합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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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6-07
  • 어리둥절할 때
    ▲ 지형은목사   이제 30년이 다 되어간다. 19 89년 9월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중부의 루어 지역 보훔(Bochum)대학교에서 독일어 과정부터 시작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하루는 라디오를 듣는데 (당시 아직 텔레비전을 마련하지 못했다.) ‘무슨 난리’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던 것은 내 독일어 듣기 실력 때문이었다. 애를 써가며 집중해서 듣다보니, 이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었다!   전 독일이 기쁨으로 전율했다. 유럽이 흥분했다. 세계가 떠들썩했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보훔 중앙역 길 하나 건넌 마우리티우스 21번지 3층에서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뉴스를 들었다. 밖에서 이런저런 함성이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중앙역 쪽에 사람들이 많았다. 온통 감격과 흥분의 물결이었다. 왜 안 그랬겠는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까지도 심지어는 독일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 년 뒤 동서독은 법률적으로 통합됐다. 독일 통일은 그렇게 어리둥절하게 찾아왔다.   한반도의 상황이 어리둥절하다. 설마 했는데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는 날짜가 잡혔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지독한 수사를 쏟아내던 트럼프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돌변했다. 서로를 추켜세우며 덕담을 연발했다. 이럴 수도 있는가. 그러다 트럼프의 공개편지로 회담이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아직도 살아있는 냉전의 유물 그 현실적 힘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살아온 한반도에서는 회담 무산이 당연했다. 그런데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어리둥절하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참 좋다! 이리 좋을 수가 없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감격적인 사건이 또 있으랴. 2002월드컵이 오천년 역사 초유의 일이라고 했는데 그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사실은 지금도 불확실성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 지금은 희망이 불확실성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전환들 중 우연히 발생한 것이 적지 않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부정적인 일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대격변이 쓰나미처럼 덮쳤고, 행복한 일이라면 하늘의 선물처럼 내렸다. 지금 한반도의 대전환은 그야말로 하늘의 선물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히 갑자기 찾아온 듯 보이는 일들은 사실은 배후에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독일 통일의 경우에는 정파를 초월하여 지속적이고 일관된 동방정책이 터를 닦았고,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1927~2016)가 서유럽 각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소련 등으로 수도 없이 다니면서 공을 들였다.    헬무트 콜(1930-2017)이 통일 과정을 잘 관리했지만 이전의 수많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의 이 상황도 배후에서 진행된 각고의 노력이 있었음은 상당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상황의 배후에 숨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팩트가 있다. 역사에서 우연 또는 역사의 큰 손이라고도 부르는 일에 대한 신앙적 표현인데,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손길이 어떤 때는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우리 일상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그렇다. 주전 8세기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세계에서 떠오르는 강국의 지도자 고레스를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사람으로 보았다. 21세기의 한반도 상황에서 트럼프든 김정은이든 또는 시진핑이나 푸틴이든 누가 고레스여도 좋다. 그건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늘의 섭리다.   사회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할 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한다. 흔히들 말하는 기도할 때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킨다. 한국 교회와 이 땅의 신앙인들이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할 때다.  /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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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5-30
  • ‘속죄’가 기가 막혀, 속죄합니다!
    ▲ 추태화교수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 그렇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 잘 하면 천냥 빚을 갚고, 절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을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 유발에 큰 공헌을 했다.    ‘말 한 마디’는 말재간이나 화려한 수사(修辭)가 본질은 아니다. 말 한 마디는 양면성이 있다. 때로 말 한 마디는 수많은 사람을 미혹에, 사기사건에,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몰아넣기도 하는 힘이 있지만, 그 반대로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치유하고, 진실을 알게 하고, 절망에 이르는 한계상황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있다. 가히 말 한 마디의 무게는 본심과 진심에 달려있다 하겠다.    지난 4월 중순, 북한발 외신이 전한 ‘말 한 마디’가 세간을 의아하게 했다. 중국 관광객이 북한 여행을 하다 버스 사고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이에 김정은 위원장이 주저없이 사과했다. 그가 한 말이 어떠하기에 파장을 남기고 있는가. ‘속죄합니다’    ‘속죄’란 단어는 어떤 행동에 대해 잘못을 통감하며 보상을 치루겠다는 각오로 윤리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회개의 차원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종교적 부분에서 속죄는 절대자 앞에서,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양 자세라 하겠다. 최대한의 죄값을 치루겠다는 결의가 내포되어 있다.    ‘지엄하신 북한 최고지도자’는 어찌하여 이 단어를 선택했단 말인가. 중국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려는 작전이었는지, 책임을 통감한다는 진심이었는지. 그 본심은 본인만 알 일이지만, 표면상 의구심을 감출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최고지도자는 정권 장악 과정에서 숙청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한 권력을 휘둘렀는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인이 속죄라는 단어를 쓰다니. 이것은 치밀한 전략인가 아니면 교묘한 위장술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건을 무마하려는 임시변통 사탕발림인가. 문제는 속죄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정서이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선택한 속죄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진의는 차치하고라도, 한 때는 로켓맨으로 불리던 정치인도 속죄라는 단어를 채택하는데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불어대는 이 땅에서 어찌 ‘속죄’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속죄라는 단어가 북한에서 흘러나오는 경우를 겪게된단 말인가, 어찌하여 속죄를 말함으로 우리 오정육부를 뒤집어 놓는단 말인가. 어찌하여 조용히 속 삭히고 있는 남녘 동포들의 심기를 이리도 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속죄라는 단어는 정작 남한에서 들었어야 하는 말이 아니던가.   속죄라는 말에 오장육부가 다시 끓어오르는 이유는 재판 보도들 때문이다. 수많은 재판이 열려졌지만, 어떤 피의자도 속죄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의 기억에는 그렇다. 정치인들, 재계 거물들, 고위직 관리들, 명망있는 사업가들… 피의 사실 앞에서 한 말은 유감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합니다 정도, 사죄라는 표현이 그래도 속죄에 가깝다 할 것이다. 아니면 기소 내용에 대해 나는 무관하다, 잘 모르는 일이다, 시켜서 한 일이다, 변명으로 일관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도 들려왔다.    국민의 초관심사였던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사건에서도 수많은 관련 인물들이 포토라인에 섰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투 운동으로 법정에 소환된 이들, 한번도 ‘속죄합니다’라고 말한 이는 없었다. 더욱 기막힌 경우는 피의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이들이 다수 있었는데, ‘속죄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계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삭제된 것일까, 아니면 속죄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일까?    독일은 과거 나치의 만행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속죄합니다’고 말해왔다. 속죄라는 말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있을 때 갈등과 전쟁도 막을 수 있다. 독일은 이 단어를 선택했기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일본은 아직도 과거 만행에 대해 속죄라는 표현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속죄할 부분에서 자유로울까. 혹 베트남에 대해서 속죄할 일은 없는가. 속죄할 것은 속죄해야 역사도 용서의 기회를 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진정한 속죄를 고백하자.  /문화평론가·안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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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5-23
  • 그리스도를 전파하라!
    ▲ 김필수  2018년도 어느새 절반 가까이 흘러갔다. 2018년을 보내며 여러분들은 어떤 소망들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구세군의 2018년 표어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선한목자이고(요 10:11), 참 포도나무이며(요 15:1), 세상의 빛이고(요 8:12), 생명의 떡이며(요 6:35),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저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요 14:6), 우리 삶의 근본이고 빛이고 희망이고 생명의 원천이고 교회의 머리이며 신앙과 실천의 표준이다.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 많다. 구원 받았고, 의롭다함 받고, 구속 곧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아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사단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죄 있다 고발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도록 보장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1-39).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아가 그분을 마음껏 자랑하고, 간증하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복음의 의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Mission Statement)이다.   왜 베드로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20)고 했는가? 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는가?(행7:60)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음에도 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가?(행8:1-5)    구원 받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었고, 가장 큰 사명이었고, 가장 큰 미션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임무였고, 목표였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이방인) 모두에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있으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하는 축복이 복음 속에 담겨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백했다.   남은 한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이 돼야한다. 아무리 한국교회 성장이 정체되고, 교회 위기가 오고, 청소년 사역이 약화되고, 저출산, 초 고령화, 경제위기가 닥쳐와도 죽어가는 세상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너무 바쁘다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세상이라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 때 일수록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동원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길 축원한다.  /한국구세군 사령관
    • 오피니언
    • 정론
    2018-05-16
  • 남북통일의 바람이 불어온다
    ▲ 박종근목사   한반도에 바람이 불고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핵실험과 미사일을 쏘아 미국과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던 북한이 하루아침에 급변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전격 참가를 선언하고 북한의 고위층과 선수들 그리고 응원단이 참가하여 금년 초부터 남과 북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급기야 남북정상회담, 그것도 분단의 상징적 장소이며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판문점에서 두 지도자들이 만나 아주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대화를 했다. 그리고 곧 이어 북미정상 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다.   이 즈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통일감상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마치 통일이 다 된 것처럼 착각하고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남북의 정상들이 만난 것만으로도 뉴스거리이며 한동안 언론과 세계는 한반도에 과도할 만큼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아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남북화해와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운을 뗐고 물길이 열려지기 시작했을 뿐이고 얼굴을 맞대었을 뿐이다. 이제부터 더 연구하고 더 확인하고 작은 것이라도 섣불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70여 년 간 우리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상처를 두 지도자가 만났다고 해서 그냥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지에서 수고하고 땀 흘린 이들이 있다. 그러기에 남과 북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독선이나 독단적인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여태껏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통일문제를 다루었듯이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고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피차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제는 독과점 시대는 지나갔다. 어느 누구라도 통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일어나는 통일은 국민적 혁명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농촌이나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통일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남북평화통일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느 누구라도 절대적인 자는 없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하더라도 결코 정부독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상이나 이념을 아우르고 참여시키는 통전적인 통일운동을 펼쳐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 나라와 각계각층이 남북문제에 고심하며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과거로부터 한국교회는 북한선교, 북한지원, 북한 살리기 등등 엄청난 구호를 외치며 섬겨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남모르게 북한동포들을 위한 헌신이 작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에 대한 한국교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 보다는 남북문제에 대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말하자면 표준을 높여야 한다. 교단마다 새로운 통일전략을 세우고 적어도 금년 가을 교단총회에서는 모든 교단들이 남북통일에 대한 하나 된 입장이 발표되고 적어도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정부와 국민 앞에 대안을 구체적으로 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남북통일문제에 대해서만은 일치된 마음으로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반성이다. 반성은 하나다. 교회가 탐욕을 버려야 한다. 탐심은 우상숭배다. 돈과 물질이 우상이 되면 쫄딱 망해도 내려놓지 않는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쥐꼬리만큼 내놓으면서 큰소리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말없이 힘껏 섬겨야 한다. 남북통일의 출발점은 회개다. 한국교회가 탐욕과 자기중심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   /서울모자이크교회 목사·북한지원단체 (사)모두함께 이사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05-02
  • 교회는 성소의 침탈을 용인할 것인가?
    ▲ 김경호목사  부활절을 준비하던 강남향린교회에 느닷없이 집달관들이 들이닥쳤다. 성금요일에 성소는 침탈되었고 예배당에서 십자가는 내려졌다. 교회는 철제담장으로 폐쇄되었다. 이런 신성 모독의 사건이 최소한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예고조차 없이 집행되었다.  교회에 보상금은 터무니없게 낮게 책정되었다. 그 금액으로는 근처에 땅 조차도 마련할 수 없어 소송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교회는 소송과는 별도로 이사할 곳도 마련했다. 4월에 잔금을 치르고 곧 이사할 것이라는 것을 조합도 알고 있었다. 종교 시설의 경우엔 강제집행 시점이 임박하더도 지역 내 역할 및 사회적 의미 등을 고려해 가장 후순위로 집행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런 폭거를 왜 감행했을까? 조합장이 동부지청 집행관실에 보낸 탄원서는 “재개발 사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강남향린교회가 우선 명도가 되어야 후속임무를 진행할 수 있으므로, 강제집행을 예고하게 되면 교회 신도들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에 예고를 하지 않고 신속하게 집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미 이주자들에게도 집행이 임박했음을 알 릴 수 있고… ”라고 한다.  교인들이 밖에 나와 예배를 하고 시끄럽게 하면 미 철거자들이 서두를 것이라는 꾀를 냈다는 것이 충격적이고 이를 법원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통상 강제집행이 결정될 시 법원은 계고장을 발송해 집행 사실을 예고한다. 1~2주 간 자진 철거 기간을 두고 있음에도 이런 절차를 모두 무시했다.  시행사는 대개 재벌이다. 거여지구는 롯데건설이다. 시행사인 재벌은 법원, 구청, 경찰등과 단단하게 연대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예배가 계속되어야 하고 거룩한 것들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서울시는 2009년 ‘서울시 뉴타운 지구 등 종교시설 처리방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처리방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이전계획 수립시 관련 종교단체와 협의 △기존 부지와 이전 예정부지는 ‘대토 원칙 △현 종교시설 실제 건물 연면적에 상당하는 건축비용 조합 부담(성물 등 가치가 큰 종교물품에 대한 제작설치비 고려) △사업기간 동안 종교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임시장소 마련·이전비용 등을 고려하여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대개 지켜지지 않고 작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마련한 교회당을 빼앗기고 교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떠나 보다 싼 건물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들이 재개발 지구 내에 있는 교회들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신앙의 신성함이 한낮 조롱거리가 되는 일을 교회는 그냥 당하고 있어야만 하나? 작은 교회들이 거대 재벌과 맞서서 싸우다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 부담을 고스란히 해당 교회 교인들만 져야하는가? 교회가 폐쇄되고 성소가 침탈되는 것에 대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교계전체가 연대된 힘으로 막아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나갈 수 있다. 이런 사례가 전체 교계에는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인데 교계는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십년 전 용산참사 때도 그랬듯이 정권은 바뀌었어도 건설사와 조합, 법원, 경찰의 부당한 연대는 계속되고 적폐세력들이 도처에서 결탁하여 가난한 서민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다. 적폐청산이 이제는 민생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이들의 부당한 유착관계를 들추어 내 일벌백계해야 한다. 더우기 교회가 하나 둘씩 거대자본에 밀려 폐쇄되는 것에 대해 교계의 연대된 힘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더 이상 성소가 침탈되고 조롱거리가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원치 않으실 것이다.  /들꽃향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8-04-18
  • 용서·화해·일치
    ▲ 최희범목사   유쾌 상쾌 통쾌! 오래전 TV에서 종종 듣던 모상품의 광고카피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는 것을 확 뚫어준다는 의미로서 이보다 확실한 메시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광고가 전하는 메시지처럼 꽉 막힌 것도 같고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리고 불안하기만 한 오늘의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해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여인을 끌고 온 군중들이 율법을 인용하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할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며 땅 위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셨다. 그 말을 듣고 글씨 쓰는 모습을 본 군중들은 말없이 성전을 빠져 나간다. 그 후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여인은 돌아갔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사건 속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번에는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겼다고 기뻐하고 있었을 법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는 말씀 한마디로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그 여인을 용서하시며 이후의 바른 삶을 제시하신 예수님을 보며 통쾌함과 감동의 전율을 느끼게 된다.  작금의 우리 사회의 화두는 적폐청산이다. 나라의 광명함과 정의로움을 위해서는 어두운 역사를 털고 가야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북분단에서부터 산업화·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입게 된 상처들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다투고 갈라지고 미워하며 돌이킬 수 없는데 까지 이른 아픔들도 있다. 지난날의 그런 것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폐청산작업이 성공하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그 과정의 정당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기준설정이 일방적이거나 진행과정이 과격하면 그 목적이 선할지라도 결과는 상당부분 훼손 될 수도 있다. 국민들로부터 긍정적 평가와 박수를 받을 수 있을 때 적폐청산 작업은 성공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단결과 단합보다는 다툼과 분열로 점철된 파당적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정권이 새롭게 정부를 운용할 때 마다 국민들은 모두를 품어 안고 단합된 나라를 세워 주길 바라게 된다. 우리는 적폐 청산 작업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그러므로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의 조성이 아니라 사회통합과 일치를 이루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과 성경적 가르침을 따르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적폐청산은 용서와 화해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죄를 위한 적폐청산 보다 잘못을 회개하고 내일을 지향하는 가치창출을 위해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위급한 안보문제와 경제문제를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을 위하여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자리매김을 분명하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와 사명을 위하여 우리는 용서와 화해와 일치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1-2)  /전 서울신대 총장, 전 기성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18-04-11
  • 부활절이 부활절되게
    ▲ 이정익목사   이제 봄이 되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곤충들이 기지개를 편다.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절기가 부활절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시기나 부활의 시기를 참 잘 선택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물이 소생되고 새싹이 돋고 겨우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독인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면 먼저 부딪히는 난제가 셋이 있다. 하나는 동정녀 탄생이다.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동정녀 탄생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시험이다. 두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십자가 죽음은 믿겠는데 예수 한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은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시험이다. 세 번째는 부활이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사건이 부활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시험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성경은 믿지 못할 이야기들만 기록해 놓았다고 폄하한다. 그래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다 이해가 된다면 그것이 무슨 성경이란 말인가.  교회력을 보면 연중 중요한 절기가 두 가지가 있다.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둘 다 기독교를 지탱해 주는 근간이고 뼈대이며 중심신학이다. 이 두 절기 중, 오늘 사람들은 성탄절을 떠들썩하게 지내고 부활절을 아주 간단하게 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탄절이 기독교의 중심인줄로 착각한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네 복음서 공히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28%를, 마가복음은 34%를, 누가복음은 25%를, 요한복음은 무려 49%를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두 장씩 간단히 다루고 있을 뿐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 기독교는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갈수록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대부분 신학자들은 아예 부활은 예외로 둔다고 말하기도 한다. 신학자 벌코프가 지적하였듯이 오늘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도난설, 환상설, 기절설, 신화설 등으로 교묘히 치부하기도 한다. 모두 상식신앙의 길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이론들에 휩쓸리게 된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거나 안 믿거나 예수는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봄이 되면 땅을 갈아엎어도, 불태워도, 짓이겨도 그곳에서 새싹이 돋아 나오듯이 사람들이 예수를 죽여 무덤에 넣고 돌로 입구를 틀어막았어도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부활생명은 죽여도, 불태워도, 짓이겨도, 돌로 틀어막아도 살아나는 것이 부활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상식신앙의 틀을 벗어나야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비로소 다가오게 된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주시는 떡을 받아먹는 순간 눈이 뜨여서 앞에 있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인 것을 알아보았듯이 오늘 우리는 이 형식의 신앙의 길에서 주님이 주시는 떡을 받아먹고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더 분명하고 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이 시대는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한 증인들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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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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