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9(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뉴스
  • [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13
  • [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3
  • [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 /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 [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 결정을 하면서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차기 대통령은 경제, 외교안보, 남북관계 등 총체적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1월 IMF국가경제부도사태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렸을 때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IMF사태를 조기에 극복하고 하락한 국가신용등급을 다시 끌어 올렸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지금 각 당은 대통령 예비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12.3비상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구속과 파면으로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의 우두머리라는 혐의로 제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6.3대선은 IMF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탁월한 리더십과 역량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할까. 첫째는 경청(敬聽))하는 지도자여야 한다.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의 의견 제시는 물론 각계 각 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60분 중 55분을 혼자 떠들어대는 사람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는 부적합하다. 마음과 귀를 크게 열어 쓴소리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고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국정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헌법 제1조는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순간 독재자가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은 국민이 부여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겸손하게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는 극보수와 갈등하고 있다. 노사,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된 초갈등사회다. 이를 극복할 역량과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통일 이전에 남남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들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도 퇴행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 국민이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희망을 갖고 국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5-04-29
  • [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올해 2025년도는 기독교적으로 선교 140주년(1885년 기점)이 되는 해이며, 정치적으로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나 뜻깊고 가슴 벅찬 해인가. 그리하여 전국에서 환희의 잔치를 벌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기류가 희안하다. 140주년, 80주년이라는 세월은 성숙을 넘어, 안정과 부흥의 역사에 접맥되어야 하리라 믿는데,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는데, 신앙, 정치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기독교 신앙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이며, 정치적으로 탄핵 연발, 계엄 발동, 대통령 파면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맞으며, 6월 3일 조기대선까지 숨가쁘게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대전환기라 아니할 수 없고, 위기라면 위기라 판단해야할 시점이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수는 없다”(이은상).        “위기는 기회다.” 언제 들어도 위안과 희망이 되는 명제이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지혜와 실천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실천이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위기를 극복하는데 방해 요소는 무엇보다 양극화이다. 세대간, 남녀 성별간, 지역 간, 빈부 계층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간에 극명하게 갈리어 이념, 이데올로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 현상이 색깔론으로 포장되어 은근히 갈등을 조장한다. 가히 문화전쟁(Culture War)을 넘어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 정국에서 관찰되는 양극화는 또 있다. 예를 들면 진보와 보수가 공히 본회퍼(Bonhoeffer)를 인용한다. 나치 독재와 만행에 저항하다 순교한 목회자인 본회퍼를 진보와 보수가 서로 끌어다 시대적 대안으로 앞세운다. 본회퍼는 우리나라 현 혼란 정국에서 좌우로 쪼개지기 직전이다. 본회퍼 목사가 이곳에 오신다면 스스로도 당황할 것이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의이며 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극단적 대치 앞에서 본회퍼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위기는 기회다.” 이 명제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본회퍼 목사가 가르치는 <제자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해답을 얻는 길이다.(혹 “나를 따르라”로 번역). 본회퍼의 대안은 이미 종교개혁에서부터 출원한다. 루터, 칼뱅이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곧 십자가 신학, Theology of the Cross)에 시대적 혼란에 대한 해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사(빌 2:7,8), 모욕, 멸시, 상처, 고통, 고난을 마다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모방(holy imitation)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신의 한 수”이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기회의 파도를 타고 다시 비상하기를 기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양극화의 비인간적 세파를 극복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다./이레문화연구소 소장·전 안양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4-21

실시간 정론 기사

  • 개신교신앙의 구조변동을 주목하라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가장 흔한 설명은 교회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교회진단은 교회의 신뢰지수가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으며,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의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그 원인이며, 교회의 이기주의적인 태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주된 원인을 도덕적 문제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방향과 돌파구는 목회자들이 윤리적으로 각성하여 청렴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교회를 진단하는 또 다른 관점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서 설명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과제는 사회속에서 교회의 공적 기능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과제는 교회의 공공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이런 진단에 일면 동감하지만, 대부분 이런 진단은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일반론에 그치는 설명이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DNA, 즉 개신교 신앙의 형질변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교회 전반에 개신교 신앙의 구조변동이 왔으며, 교회가 그 변화에 적실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개신교 신앙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탈전통의 기독교로 이동하고 있다. 오늘의 신자들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교회 직분과 같은 전통적 방식의 신앙 패턴에서 탈피하여 개인화된 자유 선택적 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물론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탈전통 기독교인들 가운데 기성교회의 틀에서 완전히 도망쳐 나온 해체적 기독교인이 있는가 하면, 전통신앙을 일부분 유지하면서 일정한 범위에서 자유로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유형이 있다. 한국교회는 제도종교,제도교회로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신앙 패턴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둘째, 주술적 기독교에서 계몽적 기독교로 변동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은 샤머니즘과 기복종교 성격이 강했으며 목사의 역할이 마치 주술사처럼 개인과 가정을 향해 물권(物權)과 영권(靈權), 복과 저주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일종의 영매(靈媒)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제 오늘의 교회에서는 요술 방망이를 휘두르며 주술적 발언이나 엄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마법에 걸린 신앙에서 깨어났으며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신앙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금의 평신도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기독교방송이나 유투브 채널을 찾아다니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신앙의 자양분을 채워가는 자율적 신앙이 증가하고 있다. 셋째, 세속화가 기독교 신앙 의식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속화는 세계안에 깃든 신성한 힘의 작동이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 성스러움과 초월적 세계가 추방되며, 이것은 결국 개신교 신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기도 체험과 하나님을 향한 예배 행위, 더 나아가 초자연과 신비적 신앙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물질 욕망에 사로잡힌 현세 신앙 일변도에서 초자연을 향한 상승하는 신앙으로 양육해 가야 하며, 일상의 삶을 살지만, 초월성을 지향하는 성례전적 존재론의 신앙이 구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쇄신과 미래 방향을 모색하려면 교회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외형적인 변화만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탈교회 현상이라든가, 교회의 숫적 감소, 그리고 목회자 이중직과 같은 교회현상에만 주목하는 것은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그 현상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교회의 신앙 의식 내부의 변화들을 관찰하면서, 이를 신학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동춘/기독연구원 느헤미아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1-10
  •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 선 교회
      신약 성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분투는 눈물겹다. 바울은 세상의 끝에 서서 한 치도 물러섬 없이 십자가 고난과 부활하신 예수를 유일한 푯대로 삼아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부활에 이르는 순교의 길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후 사도 바울의 삶을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편협한 종족주의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주의에도 부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나라 시민권을 가진 차별 없는 존재임을 확신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가 여러 그리스도들 중 한 분이 아니라 2천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유일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호칭이다. 그래서 바울은 역사적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묵상과 선교활동의 중심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교회의 토대를 세운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 교회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도 적용된다.   우리도 바울과 더불어 교회는 메시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과 우리도 메시아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고백을 우리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 이것이 교회가 성서로부터 받은 준엄한 명령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는 진리의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하며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신(神), 죽임을 이기신 '신'이 크리스천 공동체가 고백하는 하나님이심을 온몸으로 증언하며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였다.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기독교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세상의 질서, 세상의 평화와 화해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신 자신의 희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고백한다. 사도신경에는 세 명의 고유명사가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기독교 공동체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며 예배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와 로마법에 의해 살해 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율법도 로마법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다. 메시야 예수는 법의 이름으로 살해 되었다. 하나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화해하지 못함을 성경은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땅의 삶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해 갈 수 없을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이 무시무시한 진실 앞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증언했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는 교회로 거듭나기를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한다./한국YMCA연맹 사무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12-26
  • 용서와 관용의 정치
      70년 전만 해도 가난의 대명사로 중국을 말하곤 했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등소평(登小平)이었다. 그는 세가지 정책으로 가난한 나라를 잘 사는 중국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1) 흑묘백묘론(黑猫 白描論)이다. 검은 고양이든지 흰고양이든지 쥐만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2) 선부 공부론(先富 共富論)이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를 선별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공칠과삼(功七過三論)이다. 즉 관용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전치 못하므로 결국 실수 할 수 밖에 없다. 과(過)가 3이고, 공(功)이 7이면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정책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을 키워 미국과 대결하도록 한 바탕이 된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정치는 절망적이다. 보수와 진보가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서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얼마 전 좌파정권의 전위대와 같은 성공회 신부가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람의 내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기도 했다는 것이다. 같은 종교인으로서 그 같은 행태가 부끄러웠고, 이해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희망의 종교인데 성공회 신부의 그런 표현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제 정당 정치는 변해야 한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하나 되었던 나라를 소개하고 싶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넬슨 만델라가 출옥후에 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백인 세력의 대표자로 흑인탄압에 앞장섰던 드 클레로크에게 부통령이 되어 달라고 제안을 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그가 정치적인 적임에도 그와 화합하여 부통령 자리를 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통합된 정치를 통해서 인종탄압을 타파하고 자유 민주주의로 정착하여 그 공으로 1993년에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피해를 입으면 복수와 용서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대개가 복수를 택한다. 복수하고 나면 공허가 온다. 리고 복수의 에너지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 상대를 살리고 나를 살린다. 즉 나라를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어떤 언론인은 한국인이 모르는 3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지금 한국인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인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세째로는 우리의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이 무서운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변을 보라.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잘먹고 잘살게 된 기초는 이승만 박사가 어렵사리 채택한 자유민주주와 시장경제 체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동물의 왕국에서 두 마리의 사슴이 생사를 걸고 싸우다가 사자밥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정은이 자기의 정권유지를 위해 남한을 적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김정은이 최근에도 수십발의 미사일을 쏘아 대고 있지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같은 때 우리 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아웅다웅 당파 싸움만 일삼고 있는 이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은 우리가 깨어나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 정치인들이여! 그리고 한국 교회여! 장래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시대정신을 바르게 읽고 관용과 통합의 지도자가 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도 돌이켜 회개하고 시대의 선지자로서 더 큰 기도의 사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기하성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11-30
  • 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시4:1). 너그러운 마음은 곤란한 일을 통해 마음의 연단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얻을 수 있는 옥토 밭이다. 난관에 부딪쳐보지 않고는 모든 것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의기양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곤란한 일을 겪은 후에 범사에 모든 것에 때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정한 시간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를 보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된다. 구원과 회개와 은혜의 시간과 성숙의 때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소유하게 될 때 진정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한 사람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간과 법칙 아래 놓이게 됐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이 돼줬다. 비로소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감사와 진정한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법칙 아래에 놓이기 전에도 이미 넘치는 의욕과 소망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삶은 모든 가능성으로 인해 그의 삶에 기쁨과 환희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행히도 영원히 변함없는 시간을 알게 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성숙한 내면을 소유하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돌아온 탕자이야기이다. 자신의 능력과 그 유능함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신에게 감사했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던 물질과 명예와 자신감들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였고, 하나님께로 가는 자세를 배우게 됐다. 비로소 아버지 집에 있는 자비와 부요함과 너그러움에 대해 찬미하게 된다. 아버지집에 있는 종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와 자비가 넘쳐나는 삶인가를 알게 된다. 이런 아버지의 너그러움을 알게 되자 그는 집을 향해 돌아가고자 마음을 정한다.   어떠한 마음으로 돌아가는가?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돼 그 은혜를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이 탕자는 비로소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알게 된다. 모든 길이 차단 된 후에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감사란 내게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감사가 얼마나 위험하며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경험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도 여전히 원망하고 실패의 원인들을 주변에 돌리기 일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생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런 경험에 담대해지길 바란다. 아버지의 집에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얼마나 충만한가를 노래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성숙한 시간이다. 나의 능력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감사하게 된다. 나의 기쁨을 빼앗기고 나서야 주님이 주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의 길에서 실패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되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한 그리스도인이며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이길 수 있는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의 감사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두고 있다. 이런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자신의 실패와 헐벗음이 보이지 않는 진정한 감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감사는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그가 당한 슬픔과 실패의 문제도 그의 기쁨을 제거할 수 없게 된다. 이 승리와 기쁨은 자신에게 나오지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왔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감사생활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무엇인가? 자신이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해도 잘못됐다는 패배의식보다는 하나님은 옳으시다는 것을 찬미하는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2-11-08
  • 문화 없는 종교는 망한다
    문성모목사/ 강남제일교회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  종교에 있어서 문화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은 어떤 종교가 문화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귀하게 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문화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문화를 무시하고 홀대하는 종교는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양적 성장에 매달린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란 종교에 있어서 마치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이다. 비타민이란 당장 없다고 성장에 큰 표시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탄수화물이나 단백질같이 귀하게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이 없으면 그 성장은 곧 기형이 되고 부작용을 일으키고 나쁜 세균을 이기지 못하여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문화에 도무지 투자하지 않고 가치를 두지도 않고 정책이나 안목도 없이 그저 커지고 많아지고 일등이 되고 초특급이 되는데 만 혈안이 되어 비교의식과 경쟁의식 속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몸집은 커졌으나 기형적 현상이 나타났다. 도덕성에 구멍이 뚫려 한국 기독교 전체가 침몰하고 있는 느낌이다.   뻔한 선거 부정이 앞에 있는데도 무감각하다.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약육강식, 적자 생존의 논리를 목회에 그대로 반영하고도 너무나 뻔뻔스럽다.      문화는 삶이고 삶이 신앙이 되어야 한다. 지금 어느 교회가 몇백 명에서 몇만 명이 되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성장 과정에서 문화적 성장이 함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누가 총회장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문화적 도덕성이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모조리 파괴된 채 남아있는 명예와 감투와 자랑거리는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대단히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각 교단 총회와 개 교회에 문화부가 신설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문화부의 주목적이 음악회나 책을 발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멍 난 도덕성을 메워 침몰하는 한국 기독교를 구하는 도덕성 회복 운동, 삶의 갱신운동, 예배문화의 질적 성장운동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양적 성장을 주목적으로 하는 전도부나 선교부에는 엄청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질적 성장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문화부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문화 없는 종교는 결국 부도덕한 거대한 사이비 집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 신앙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가 곧 문화 행위에 속하며 삶 자체가 문화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회당의 역할은 예배드림, 성경 필사, 민족문화 보존의 세 가지였다. 한국교회에 부족한 것은 민족문화 보존이다. 교회의 문화가 삶의 문화이고 삶의 문화가 민족공동체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강남제일교회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10-04
  •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교회
        여러 해 전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붙었던 시구가 기억난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달팽이는 기어서 /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반칠환 시인의 시였다. 짧은 시의 전문을 다시 소개하면 이렇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거북이는 걸어서 / 굼벵이는 굴렀는데 /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이 시의 제목은 “새해 첫 기적”이다. 시인은 여러 동물들이 각자의 보폭으로 다다른 새해 첫 날의 장면을 기적이라고 명명했다.   2022년 8월 31일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소도시 카를스루에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필자에게는 기적이었다. 서너 달 전까지 정상 개최가 불확실했던 코로나 팬데믹의 와중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11차 총회 첫 날 4천 명의 참가자들이 도착했으니 말이다. 단순히 비행기와 기차와 자동차로 총회 장소에 도착했다는 뜻이 아니다. 총회의 정상 개최를 위하여 몇 달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한 대표들과 참가자들, 독일 정부와 협력하며 도시를 세계교회의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낸 주최측, 총회 프로그램마다 성실하게 참석하며 풍성한 논의를 만들어낸 참가자들 모두 다양한 전통과 장소와 역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믿는다.   두 주간 진행된 총회에서 세계교회 대표들과 참가자들을 전쟁과 질병, 기후위기의 위협 앞에 고통당하는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며 교회의 사명을 나누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는 주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기 전에 정해졌다. 십자가와 비둘기, 원을 조합하여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화해, 일치를 상징하고, 이 땅의 교회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을 형상화한 포스터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현대 교회의 비전을 담아냈다. 그리고 2022년 늦여름 총회가 열렸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교회는 네 회원교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번 총회의 주제와 의미를 알리는 사업을 진행하며, 교회일치를 통한 복음화를 알렸다. 각 교단이 공식적으로 모집한 120명의 참가자들과 취재진, 개인 참가자들을 포함하면 200명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어느 기사의 표현대로 이전에 열린 아홉 번의 해외 총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전체 인원보다 많은 규모였다. 참가자들이 보고, 듣고, 만나고, 경험한 세계교회와의 교감은 한국교회가 장차 걸어갈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는 주제로 열린 총회를 마치고 발표한 총회 메시지 “A Call to Act Together"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말씀을 근거로 세 가지 부르심을 담았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를 따르라”("Come, follow me")이다. 두 번째는, “공동의 여정에 참여하라”(”Our journey together")이다. 세 번째는, “온 세상으로 가라”(“Go into the whole world")는 부르심이다. 여기에서 부르심은 소명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로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이미 세상에 있는데, 새삼 세상으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명하신 분명한 사명을 공동의 사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지금 짙은 어둠 속에 있다. 전쟁으로 신음하고,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자연재해로 넘어지는 어두운 세상에서 교회는 사랑과 소망의 빛을 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총회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세계교회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 오피니언
    • 정론
    2022-09-26
  • 세상에 선한 손길 내미는 ‘예배자’ 되길
        장로교총회는 역사적으로 지난 100여년 이상 주로 9월에 열린다. 일제강점기간 중 총독부 요구와 일부 친일 목사들에 의해 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을 결의했다. 그 이후 1941년 경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총회가 열린 달은 11월, 10월, 4월, 5월로 유동적이다가 1956년 41회 이후부터는 9월로 확정된다. 그럼에도 총회는 일제의 핍박이 극심하던 1943년, 44년, 4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예장통합측은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란 주제로 총회를 개최했다. 올해 주제 표어가 나온 성경구절은 시편 50편 5절과 로마서 12장 1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지키기 힘들지만 꼭 지켜야 하는 믿음의 행동강령이 담긴 말씀이다. ‘내 몸을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삶,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을 실천하는 ‘예배자’로의 삶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 중, 아주 오랜 조상은 가인과 아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는 기본 조건은 ‘선을 행하면’(창4:7)이다.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단 말씀이고, 그가 드린 예배 혹은 제사는 ‘선을 행하지’ 않은 면에서 아벨이 드린 제사와 구별된다는 의미, 다시 말해,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 바로 죄에 빠졌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 아니었을까?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민낯을 아주 많이 드러냈다.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운 독립군의 얼굴도 아니고, 자식을 잃어가면서도 조선을 사랑해 떠나지 못한 선교사들의 얼굴도 아니며, 고아를 업어 키운 선교사이자 벽안의 간호사의 얼굴도 아니었다. 참 이기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책임한 얼굴을 사회에 드러냈다. 마스크를 써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사회는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예수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백신을 거부하고, 집회를 강행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권 세습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총회는 부단히 명예를 회복하려 애써 왔다. 이번 장로교총회 이후 그리스도인 모두가 힘을 합해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살기를 희망하며 선포한다.   올해 백주년을 맞은 한국 YWCA가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위해, 정의·평화·생명운동을 선포하며 1922년 창립되기 꼭 10년 전, 1912년 9월 1일은 장로교총회가 평양에서 조직된 날이다. 당연히 초대 총회장은 언더우드선교사(1859~1916)였다. 이듬해 1913년에는 남쪽인 경성 승동교회당에서 총회가 열렸으며, 총회장은 독일 출신의 엥겔선교사(1868~1939)였다.   이후, 장로교총회는 신의주, 원산, 함흥의 교회에서 열리고, 해방 후에는 남쪽에서만 열리고 있다. 속히 ‘복음’으로 통일이 돼 남북을 오가며 장로교총회를 하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그때까지, 진정 한국의 개신교회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진정한 ‘예배자’들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한다. 세상 지도자들에게 바른 정치를 하라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신교 지도자들이, 우리 총회원들이 먼저, 선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길 기도한다. 정의로운 총회 진행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받는 모두가 되길 바란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9-15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포기하지 말아야」
      기독교 교회가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교회는 아메리카로 건너가기 전에 1,300여 년 동안 유럽의 종교였다. 유럽의 문화와 삶 전체가 당연히 기독교적이었다. 교회가 사회 제도와 삶의 모든 면에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특히 황제나 왕 또는 제후가 주도하는 정치 제도와 교회의 교권 구조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유럽이란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은 공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로 건너가면서 기독교 신앙은 구조로 보면 사회적인 제도와 공적인 틀에서 벗어나 사적인 것이 되었다.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몽주의의 흐름이 이런 상황에 큰 역할을 했다. 신앙이란 것은 인간의 자유와 인격적인 존엄성에 근거한 개인의 선택 사항이 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져 이후의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미국이란 나라는 계몽주의 사상의 정치 이념에 따라 정교분리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흔히 말하는 청교도 신앙의 목표는 정교분리의 사회가 아니라 성경이 곧 국가의 법이 되는 사회였다.   한국교회는 미국식 교회구조를 기본 틀로 갖고 있다. 신앙을 사적인 것으로 보는 것 말이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 및 역사 흐름과 떨어질 수 없다는 자의식이 약한 것이 그래서다. 미국 교회는 그 신앙 구조가 사적이긴 해도 미국이란 국가 건립 때부터 사회제도와 기독교가 늘 서로 소통하고 조율했다.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구조이지만 나름으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틀이 있다. 유럽교회는 긴 역사 유산의 영향으로 구체적인 교회제도와 신앙의 틀이 아직 상당 부분 공적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사회적 공공선과 연관된 자의식이 강한 이유이다.   그럼 한국교회는 어떤가? 기독교 신앙이 없던 문화권에 기독교가 들어와 정착했다. 기본 구조가 미국식이다. 신앙 의식과 구조가 사적이다. 교세가 성장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기본 틀이 사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다. 감독제 정치 형태를 가진 일부를 빼면 한국교회의 교단들은 거의 모두 개교회주의 방식으로 사역한다. 이것이 개별 교회를 성장하게 한 동인이기도 했지만 현재는 아주 심각하게 부정적인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대형 교회의 세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장로교 총회들이 열리는 계절이다. 한국교회의 주도적 집단인 장로교 교단들의 총회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공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하는 사안들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끼친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많은 부분 여기에 걸려 있다. 위에서 살핀 유럽식과 미국식 기독교의 비교에서 보면 한국교회의 약점이 쉽게 보인다. 사회적 공공선을 위한 책임 의식이 약한 것이다.   이번 총회들에서 사회와 세계 역사 흐름의 공적인 책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얼른 생각해도 대여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관련 사안, 정치, 경제,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드러난 윤석열정부의 심각한 문제점들, 남북 분단과 동아시아의 상황 등이다. 교회 내적인 일이야 당연히 심도 있게 다뤄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목회 상황 변화에 대처하며 새로운 목회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대형 교회의 세습을 막고 교회의 제도와 치리가 바람직하게 작동하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갱신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에 기독교의 존립이 걸려 있음을 깨닫고 절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변화되도록 공적인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 요한복음 17장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사회와 역사 흐름의 책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장로교 총회를 위해 기도하며 그 사역을 응원한다./기성 증경총회장·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2-09-02
  • 코로나시대 신학교육의 나아갈 방향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각 분야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현상은 관계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교육현장에 당면한 문제들 역시 크다. 그런데 모든 문제들의 근본으로 가면 관계 단절이라고 하는 데 집중된다.   공동체로서 교회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또한 신학교육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교육을 위한 특별한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신학교육을 할 때, 다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교육과 관련한 증거는 확실하다. 즉 6·25사변 당시 전선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국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사립학교들도 피난지에서 임시로 학교를 열어서 가르쳤다. 전시하에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쉬지 않았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신학교육도 다르지 않았다. 피난지에서 당장 하루를 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천막을 치고 신학교육을 했고, 소명을 확인하는 이들이 천막교실을 찾아들었고, 그 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그들에게 하루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서 뒤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전국의 각 신학대학원의 지원율은 급격하게 저조해 지고 있다. 많은 신학교들이 현실을 감안하여 입학정원을 하향 조정했음에도 미달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당면한 이 사태를 단순히 신학교육의 방법론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지 교회들에서 소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안내와 가르침,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하는 것이 먼저 일 것이다.   그리고 신학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학생들 모두가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하고 경건하며 기꺼이 따르고 싶은 신앙인력이 준비된 선생님이다. 신학교육은 단지 방법론이 아니다. 신앙인격과 성경신앙에 대한 확신, 그리고 신학의 깊은 이해와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춘 선생님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선생님이 신학생들과의 신뢰와 존경을 전제한 사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단절된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비록 비대면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신학교육은 선생님의 신앙과 함께 신학이 전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생님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단순히 신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신뢰와 존경이 전제된 관계에서 자신의 신앙과 삶으로 담아내는 신학을 전수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학교육은 단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한 삶과 섬김, 신학에 임하는 신실함 등 선생님의 삶에 도반(道伴)하는 제자들에게 나눔으로써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에 감동하면서 그 선생님을 닮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을 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결코 신학생 됨을 포기하거나 소명에 대한 우선순위를 뒤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동행하고 싶은 선생님이 더 필요하고 절박하게 아쉬운 것은 필연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과 함께 많은 제안들이 있는 것을 접하게 된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진정 동행하고 싶은 선생님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사가 교훈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8-03
  • 말씀과 기도를 통한 다음세대 부흥
        한국사회는 다음세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령인구는 40만 명대 중반으로 12년간 유지되지만, 만5세 학령인구는 35만 명이며, 만2-5세 학령인구는 30만 명, 만0세 학령인구는 2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올해는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질렀다. 외국 이민자 수용 등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한국인구 전체가 급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저출산은 영적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다음세대 복음화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의 인구 자체가 적은데다 다음세대 내에서의 복음화율은 더욱 낮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한 예배와 교육을 충분히 행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가 하나님 앞에 나와 새로워지는 여름성경학교와 여름수련회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다음세대의 영적 교육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아 한국교회는 이번 여름을 다음세대 재교육에 힘쓰고자 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했던 프로그램을 반복하거나 확대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서3:16-17)고 말씀한다. 코로나19는 우리 신앙과 삶의 거품을 걷어내는 계기가 됐다. 무엇이 우리 신앙과 삶에 꼭 필요한 것인지를 확인케 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이 답이다!”고 외친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가 연구하거나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다음세대는 하나님께서 교장 되시는 ‘성경학교’를 통해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께선 우리의 어두워진 눈과 마음을 밝혀주신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깨달아 겸손히 엎드리게 만드신다.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고,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다.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들어 우리의 불순종을 정당화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쉬어선 안 된다. ‘성경이 답’이라 외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기도성령운동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 여름 한국교회는 말씀운동과 기도운동을 통해 다음세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영적 저출산을 극복하고 영적 후손을 많이 낳아야 한다. 성령충만하여 복음을 전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적용해선 안 된다. 예배·말씀·기도를 멀리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예배를 사모하여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올 여름엔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자. 그럴 때 영적으로 메마른 우리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영적 가뭄이 해소되고 영혼의 풍년을 맞이할 것이다. 오곡백과 만발한 추수를 기다리며 말씀과 기도의 씨를 뿌리자.  /백석대 부총장, 조직신학
    • 오피니언
    • 정론
    2022-07-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