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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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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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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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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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 성서와 생활[11] 그리스도인의 영성-기도의 영성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로 이 땅 위에 세워진 주님의 새로운 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지체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부름 받은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자라게 함으로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된다.골2:12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며 주님의 표현이기에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곧 교회는 주님이 계시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바로 온전히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사역은 무엇일까? 죄사함의 구원선포와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에도 밤새워 기도한 후에 12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눅6:12-13 수시로 사람들을 피해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주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교회가 주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세워져 있다면 바로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곧 기도에 있다는 진리를 세우는 일이다, 부흥과 기사와 헌신과 선교보다 앞서야 하는 일은 기도하는 사역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한 기도가 계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교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성도가 기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교회의 가장 높은 일임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뛰어난 영적인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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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19
  • [정론] 하나 됨과 평화의 길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눅19:42)   한 때 교회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나였다. 하지만 보편교회는 이미 해체되었고, 다양한 종교와 인종, 민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가 약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교회는 소수자들 모임이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 교회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로 출발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적은 무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한마디로 교회가 힘이 빠지는 현상은 ‘정체성 회복의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하고(고후11:30),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이다(고후12:9).   그동안 교회는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가진 권력과 부를 통해 발생한 현상이었고, 가난한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여성과 이방인 등은 교회의 소외 계층으로서 말할 기회를 상실했다. 신약성서는 여성을 포함해 이방인도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고, 만일 언어 문제로 소통이 어려울 때는 그들을 대표하는 집사를 임명해 그들이 소외되는 일을 방지했었다. 하지만 교회가 강해지면서 교회 안에는 장벽들이 출현했다.   교회는 약한 자들을 환대할 때 존재의 이유가 명징해진다. 교회는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힘을 빼앗긴 자들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배척 당하는 자들이다(눅6:20-22). 이제 그들은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이 땅에서 자신의 처지에 있는 자, 또는 있었던 자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기뻐한다.   뉴비긴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기에 좋든 싫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회중은 하나님이 몸소 기꺼이 불러 그 아들과 교제하도록 모으신 사람들이다. 그 교인들은 그분이 직접 택하신 것이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므로, 좋든 싫든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 격리된 모임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모임이며, 그것을 조성한 힘은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까지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치시는 그 사랑이다”.   한국 교회가 이 땅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되기 위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길은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품을 때 평화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이 일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받는 길이다(마5:9).   갑진년 새해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약한 자들을 위한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면 여전히 희망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소명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나?“ /성서대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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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18
  • [정론] 기독교 ‘사랑의 실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사랑의 종교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담겨 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시점에 ‘기독교가 사랑을 실천하는가?’ 그리고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은 ‘글로 쓰여진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사랑’을 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글로 쓰여진 사랑’과 ‘삶으로 쓰는 사랑’이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보여준 소설이 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인 <올리버 트위스트>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1834년에 제정된 ‘신빈민 구제법’에 저항하기 위해 썼다. 영국의 ‘신빈민 구제법’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구빈원 같은 수용시설에 집어넣어서, 아주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잠잘 공간,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가혹한 일을 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법이다.   사랑을 삶으로 써야 하는 기독교는 약자를 함부로 대하였고, 더 혹독하게 다뤘다.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구빈원 위원들은 구빈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잠자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강요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올리버다. 약자를 대표하는 그는 아침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 노동 강도에 비해 식사량은 턱 없었다. 아이들이 먹는 식사량은 세 숟가락의 수프뿐이다. 배가 고파 아이들이 얼마나 숟가락으로 긁어먹었는지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구빈원’이란 자유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도 없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이 있다. 미국 성공 신화로 유명한 팀 하스다. 회장은 하형록 회장으로, 사훈은 책 처럼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는 잠언 31장 20절 말씀이다. 잠언 31장 20절은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다. 팀 하스는 하형록 회장의 잠언 31장 20절 말씀에 근거해 회사를 경영하자 미국 동부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100대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글로 쓰여진 헛된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여진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한다. 김하중 대사는 <하나님의 대사:사랑의 중보자>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따라 배울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으로 하는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두드러진 특징이어야 한다. 이 사랑의 실천, 인간의 힘으로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기 위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된다.     기독교 영성가인 달라스 윌라드는 영성 훈련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영성 훈련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절제의 훈련이다. 다른 하나는 참여의 훈련이다. 사랑의 실천은 참여의 훈련에 속한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한 구빈위원들은 올리버가 배가 고파 구빈원 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주세요.” 결과는 참혹했다. 올리버는 국자로 맞기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프를 조금만 더 달라’는 말 한 마디로 위원회가 회집되었다. 글로 쓰여 진 사랑의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2023년 말이 다가온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기독교는 삶으로 쓰여진 사랑을 했는가?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많은 이웃이 나보다 힘들다면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해야 한다. 기독교가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 실현이다.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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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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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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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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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8
  • 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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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11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회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용서운동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용서운동을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회개용서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밝힌다. 참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딛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강하게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 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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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08
  • 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라는 위기의 시대에 선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교회들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잘 대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제 한국사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코로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올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방향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중심/교제중심의 목회를 해 온 것 같다. 교회에 자주 나와 얼굴이 보이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고,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의 문은 닫아야만 했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믿음(?) 좋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의 부흥이 곧 개인 영성의 부흥으로 연결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과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홀로서기 영성훈련을 해야 한다. 말씀묵상(QT)이나 성경읽기, 성경쓰기 등이 좋은 예일 것이다. 필자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성경읽기(10독 이상 15명)와 온라인 성경공부(80여명)가 더 활성화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개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 방향은 숫자로 평가하는 교회 부흥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 영성 훈련을 통해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 교회는 매달 첫 주는 어른들과 교회학교(다음세대) 어린이들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더 이상 세대통합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세대통합 목회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목회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은 사라졌다. 자녀를 교회학교에 맡기고, 교사들에게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 역시 교회에서 다음 세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이들의 신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일하게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가정 중심의 세대통합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담임목사의 메시지로 부모들은 설교를 듣고, 교회학교에서는 이 메시지로 공과를 만들어 현장과 온라인으로 교육을 한다. 주중에서는 이 메시지로 부모님과 자녀들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축복 안수기도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기본이 충실한 목회여야 한다. 교인 숫자 늘리기 목회가 아닌 성도 개개인이 험한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개인 영성을 강화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 되도록 목회해야 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목회에 “위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기감 중부연회 감독·효성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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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3
  • 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코로나 19가 한창이지만, 우리나라는 2021년에 선진국 지위로 올라섰고, 여러 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덕분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반대로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는 비 영어권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은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특별히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활동하는 가상 세계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다. 컴퓨터 상에서 활약하는 가상의 인물인 인공 인간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상공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메타버스의 세계 속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인 가상 자산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고, 디지털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는 기후 위기라고 하는 매우 심각한 위협 앞에 놓여 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와 과제 앞에서 우리의 중장기 계획은 어떠해야 하며, 또 2022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시편에 있다.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 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급작스런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당황하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삶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불려갈 우리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까? 준비 없이 당하고야 마는 죽음, 삶의 끝일까? 아니면 충실한 일상을 살았기에 도달하는 삶의 완성일까?   우리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한다. 가슴 설레며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계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설렘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나눠야 할 것 같다. 산맥을 뚫고 나오는 뜨겁고 뭉클한 더 빨간 햇덩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만,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폭설과 깊은 울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에 더하여, 우리의 삶 한구석에서 늘 우리를 떨게 만드는 불안에 대해서도 속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새해를 여는 날들이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걱정스런 말들도 나누어야 한다.   이 모두가 생명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지고, 믿음이 굳세지고, 사랑이 깊어지며, 주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믿는다. 2022년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북한다./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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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6
  • 한국교회여, 평화통일의 ‘마중물’ 역할을 하라
      지금의 시대를 구약으로 말하면 메대가 쇠하고 파사가 흥하는 시대와 같다. 그래서 이스라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벨론 유수가 끝난 것은 시대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전환기인가? 무엇보다 ‘제국’이 쇠하는 시대이다. 1980년 대 후반 냉전이 무너지고 미국의 일국패권이 지속됐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은 쇠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서도 철수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대선에서도 ‘핑크 타이드’의 바람이 불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은 내부의 분열로 사실상 ‘내전상태’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위상이 그전만 못하다. 이 모든 변화들이 그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미국이라는 제국의 쇠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평화통일의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그 첩경은 종전선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종전선언에 미온적인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여전히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무력 강화로 나가고 있다. 그나마 종전선언에 북한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전선언과 평화의 불씨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두 갈래로 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조야를 설득하고, 미국교회와 시민단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미국교회는 대단히 평화지향적이다. 또 미국의 시민사회를 움직여 집권자들이 평화의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관계에서 남한의 교회들은 북한의 교회들과 관계개선과 교류에 힘써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북미관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   그러나 교류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한국교회는 평화와 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의 힘이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신앙은 거기에 희망과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통일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연합기구이건 개인이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운동을 전개해야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분명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협은 그동안 한국교회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그만큼의 역사적 데이터가 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한교총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연합기구로 성장했다. 과거 한기총이 보여줬던 극단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짧기에 한계는 분명 있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교회협과 실천력이 있는 한교총이 서로 함께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   또한 현장운동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동안 노력에 비해 특별한 성과가 없었기에 허무감과 회의감이 팽배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다시 현장이 살아나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며 희망을 놓지 말자.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이 세대는 평화통일운동에 관심이 없고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져있는데,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자기전통을 전수해줘야 한다. /목사·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1-13
  •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목양실을 둘러보면 벽에 걸어 놓은 교회 달력 외에는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해가 도착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새는 하늘을 날았고, 말은 들판을 달렸고, 하다못해 굼벵이도 열심히 구르다가 도착한 새해를 만났다. 저쪽에서 꿈쩍 않고 묵묵히 한쪽 자리를 지키며 풍상을 이겨온 바위에게도 이미 새해이다. 그렇게 새해가 온 세상에 도착했다. 2022년 새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궁금하다. 희망과 기대, 아니면 희망 실종과 기대 무산. 2년 동안 같이 살아온 지겨운(?) 코로나는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 이름을 붙이고, 다시 파도처럼 한 해를 점령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르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두려움과 신뢰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인간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노르웨이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는 어렸을 때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저녁노을 붉게 물든 하늘과 거무스런 대지, 두 자연의 색깔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치는 한 인간의 두려움. 그의 절규(The Scream)라는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뢰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은 좋은 길만 따라가는 자동항법 장치에 따라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기가 아니며, 도로 위를 알아서 가는 자율주행 차량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임의 변수가 많은 바다 위에서 항해를 한다. 갈릴리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름의 배다. 일이 일어난 그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마 8:18)하셨다. 풍랑이 일지 모르는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 것은, 제자들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제안한 일도 아니었다. 여지없이 풍랑이 일어났다. 그 여정을 계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띄우는 한 해의 인생의 배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다시스로 내빼다가 풍랑을 만난 요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는 거친 풍랑의 한 가운데서 배 밑창까지 내려가 숨었으나 그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날 제자들이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은 다시스로 가는 바다 풍랑하고는 달랐다. 갈릴리 풍랑은 불순종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순종의 결과였다. 그래도 풍랑 치는 바다는 두려운 것이다. 풍랑 치는 세상은 정돈된 삶과 희망의 항로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탄 배의 어촌계 등록 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한 주인은 그 안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그 분이 온 세상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바다가 그렇듯 우리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신뢰가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한평생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어딘가에 위치해서 살아간다. 신뢰는 의지하는 힘이다. 가는 길에 수북하게 쌓인 의심을 거둬내고 낙심에 기죽지 않으며 힘이다. 신뢰가 커지면 두려움이 작아지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최종 두려움마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배는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이다. 평상시에는 우리에게 있는 신뢰의 정도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바다에 풍랑이 일면 비로소 신뢰가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뢰와 믿음은 면적이 아니라 체적이다. 도화지 펴놓고 색칠 예쁘게 한 평면 그림이 아니라 거칠지만, 삶 속에서 만들어진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있는 그릇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9
  • 다사다난한 한해를 보내며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공동화(空同化) 현상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또다시 계절은 바뀌어 눈발이 흩날리는 나목(裸木)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는 시그널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온통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역사를 움직이려는 군불은 계속 지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 어떤 다크호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지, 아니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터져 역사의 판도를 바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예장 한신측 부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6
  • 한 해를 보내며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예향교회 담임목사•예장 합동한신 부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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