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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 결정을 하면서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차기 대통령은 경제, 외교안보, 남북관계 등 총체적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1월 IMF국가경제부도사태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렸을 때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IMF사태를 조기에 극복하고 하락한 국가신용등급을 다시 끌어 올렸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지금 각 당은 대통령 예비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12.3비상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구속과 파면으로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의 우두머리라는 혐의로 제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6.3대선은 IMF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탁월한 리더십과 역량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할까. 첫째는 경청(敬聽))하는 지도자여야 한다.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의 의견 제시는 물론 각계 각 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60분 중 55분을 혼자 떠들어대는 사람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는 부적합하다. 마음과 귀를 크게 열어 쓴소리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고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국정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헌법 제1조는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순간 독재자가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은 국민이 부여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겸손하게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는 극보수와 갈등하고 있다. 노사,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된 초갈등사회다. 이를 극복할 역량과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통일 이전에 남남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들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도 퇴행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 국민이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희망을 갖고 국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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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올해 2025년도는 기독교적으로 선교 140주년(1885년 기점)이 되는 해이며, 정치적으로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나 뜻깊고 가슴 벅찬 해인가. 그리하여 전국에서 환희의 잔치를 벌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기류가 희안하다. 140주년, 80주년이라는 세월은 성숙을 넘어, 안정과 부흥의 역사에 접맥되어야 하리라 믿는데,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는데, 신앙, 정치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기독교 신앙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이며, 정치적으로 탄핵 연발, 계엄 발동, 대통령 파면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맞으며, 6월 3일 조기대선까지 숨가쁘게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대전환기라 아니할 수 없고, 위기라면 위기라 판단해야할 시점이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수는 없다”(이은상). “위기는 기회다.” 언제 들어도 위안과 희망이 되는 명제이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지혜와 실천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실천이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위기를 극복하는데 방해 요소는 무엇보다 양극화이다. 세대간, 남녀 성별간, 지역 간, 빈부 계층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간에 극명하게 갈리어 이념, 이데올로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 현상이 색깔론으로 포장되어 은근히 갈등을 조장한다. 가히 문화전쟁(Culture War)을 넘어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 정국에서 관찰되는 양극화는 또 있다. 예를 들면 진보와 보수가 공히 본회퍼(Bonhoeffer)를 인용한다. 나치 독재와 만행에 저항하다 순교한 목회자인 본회퍼를 진보와 보수가 서로 끌어다 시대적 대안으로 앞세운다. 본회퍼는 우리나라 현 혼란 정국에서 좌우로 쪼개지기 직전이다. 본회퍼 목사가 이곳에 오신다면 스스로도 당황할 것이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의이며 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극단적 대치 앞에서 본회퍼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위기는 기회다.” 이 명제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본회퍼 목사가 가르치는 <제자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해답을 얻는 길이다.(혹 “나를 따르라”로 번역). 본회퍼의 대안은 이미 종교개혁에서부터 출원한다. 루터, 칼뱅이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곧 십자가 신학, Theology of the Cross)에 시대적 혼란에 대한 해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사(빌 2:7,8), 모욕, 멸시, 상처, 고통, 고난을 마다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모방(holy imitation)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신의 한 수”이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기회의 파도를 타고 다시 비상하기를 기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양극화의 비인간적 세파를 극복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다./이레문화연구소 소장·전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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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예수의 부활, 민주주의의 부활
장헌일 지난 4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탄핵 찬반 세력으로 갈라져 한국전쟁 이후보다 그 갈등이 심화되었다. 세대, 성별, 지역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갈등이 생겼고 정치적 분열이 일상화되었다. 폭력, 막말, 그리고 선동이 난무하는 현 상황은 사실상 ‘심리적 내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은 결국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정치적 양극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제도 정치권에서 통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래야만 광장에서도 폭력과 혐오가 줄어들 수 있다. 해답은 결국 민주주의의 부활뿐이다. 헌재의 결정문에서는 '대화, 타협, 존중'을 강조하며, 국회 측과 대통령 측 모두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탄핵 결정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야 모두,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언행을 자제해야 할 때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경제와 안보의 복합적인 위기 속에 있다. 경제 성장률은 1%도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트럼프 2기 미국의 관세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또한 미 국방전략 지침에서는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이 예고되고, 리더십 부재로 국가의 총체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한국 교회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한다. 사랑과 생명,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사명을 충실히 다해야 한다. 교회가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사랑과 화해의 공동체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철저히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어둠을 이기는 부활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 정의, 평화를 이루는 일은 분열이 아닌 연대와 일치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다름을 넘어 인정으로 상처를 넘어 화해와 치유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며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파수꾼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이루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헌재의 파면 결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분열 정치로 인한 이념 내전이 격화될 상황 속에서 국가 정상화를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장미 대선’은 대한민국 미래의 새로운 싹을 움트게 하는 희망의 선거여야 한다. 기도로 시작한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의탁하자. 무너진 대한민국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국가적 위기마다 일어선 한국교회의 DNA 느헤미야 로드십 회복을 간절히 기도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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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시인 류시화가 무명시인들의 시를 모아 엮어낸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언이란 위대한 영혼의 순간적인 대각성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삶들 속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시행착오의 축적입니다 이 시집의 제목처럼 가정법의 삶을 자신이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읽히는 듯 하지만 이 후회의 반성은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로 거듭난다는 시인이신 이문재님의 이 십에 대한 논평에도 동의합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은 읽는 읽는 이에게 지혜를 주기 위하여 그리고 훈계하기 위한 내용들의 기록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스쳐버릴 수 없는 주옥같은 교훈입니다. 그러면서도 잠언서 전체의 요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했습니다. 결국에는 지혜를 구하고 명철을 터특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음입니다. 류시화가 엮어낸 무명시인들의 체험적 독백같은 시구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성경의 잠언서에서 가득찬 교훈들로부터 이 시대를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야 하는가의 답을 얻게 됩니다. 가치관을 상실한 개인의 삶과 지향점을 잃어버린 사회와 역사는 불행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창조질서가 파괴된 자연계로 인한 재앙의 발생이나 인류애 같은 것은 접어버린지 오래된 세계지형이나 극단적 자기 중심 사상에 빠져버린 우리나라의 현상들의 그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 가운데 떠밀리듯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류시화의 시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아무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한다고 나서는 치명적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잠언서의 구절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 15;13)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2:16) 2025년 고난주간에는 류시화의 시집과 잠언서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며 지내려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에게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종국에는 예수님이 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요 16:4) 이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우주의 섭리와 역사의 흐르는 방향을 점검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하며 이제라도 돌이켜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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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승패를 넘어서
사실상 무기없는 전쟁이다. 작금의 탄핵국면은 찬탄과 반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전개되는 양상은 속된 말로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만 하는 것일까? 역사이래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전쟁과 갈등 투쟁과 대립의 역사가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고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전쟁, 현대에는 북한과 남한의 전쟁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의 수많은 사화가 바로 그 죽기 살기 전쟁 혹은 정쟁의 산물이다. 근현대사는 어떤가? 해방후 찬탁과 반탁의 역사, 그리고 3명의 대통령이 직무정지 내지는 파면의 역사를 보자. 노사가 대립하면 쇠몽둥이와 최루탄이 등장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절대 승리만을 추구하는 갈등과 대립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기는 것만이 최고의 목표요 절대목표라고 좌표를 설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스포츠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물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모조리 재기불능 상태로 때려 눞혀야만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임의 룰을 지켜 승부를 겨룬 다음 깨끗하게 그 결과에 승복하고 그라운드를 떠난다. 나아가서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지도 않고 한번의 패배에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승패의 결론이 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난다고 해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스포츠 게임은 이기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절대목표는 아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게 할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음번 게임이 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겼어도 다음에는 질 수도 있으며 이번에는 졌어도 다음에는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한 번뿐이 아니라 계속되기 때문이다. 논어에 중용지도라는 말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타협주의라는 비판도 받지만 다시 새겨볼 만한 말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이라는 저서가 있다고 한다. 좌우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실용주의적 이념의 모델로 제시된 이론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제는 바로 이런 중용, 제3의 방법등을 생각해볼 만한 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기는 것만이 절대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회는 쇳소리와 쨍그랑거리는 소리만 들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는 좌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운데도 있다. 이 세상에는 이기고 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기는 것도 있다. 예수께서 적대자들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자 제자중의 한 사람이 적대세력인 대제사장 수하의 귀를 짤라 버린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잘한 일이고 속이 후련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신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니 칼을 집어 넣어라. 내가 이기려고 마음 먹으면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도 동원할 수 있다고.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신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기고 지는 세속의 대립적 갈등구조를 쫓아가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총과 칼로 대립하는 절대 승리를 추구하는 극단의 갈등을 넘어 부활의 새벽이라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꼭 이기고 지는 것만이 게임의 결과는 아니다. 비기는 방법도 있다. 끝장을 보겠다는 승부욕의 뒤에는 이겨도 져도 남는 것은 상처뿐일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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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나님 나라와 나라 사랑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교우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말씀 앞에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까지 하신 말씀 또한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그러므로 예수님의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였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성취가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성취(완성)하기 위하여 애쓰셨고 그 증거를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 날마다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 또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고 구할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질문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시며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이로써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임을 깨닫게 된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써 일하고 있다. 예수님의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 나라 였다는 것을 이해 한다면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6장 7~13절에는 예수님이 12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마을을 다니면서 한 일은 복음전파, 귀신축출, 병자치유 세가지였다. 또한 마태복음 4장 23절에는 예수님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병은 죄였고 약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구현, 즉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었고, 모든 소외와 차별, 배제와 혐오에서 벗어나게 해서 주변부에 있던 사람이 중심부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눈물과 탄식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태초에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라가 혼란할수록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원해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끝까지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 사랑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완성체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복지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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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 결정을 하면서 오는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차기 대통령은 경제, 외교안보, 남북관계 등 총체적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역량을 갖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1997년 11월 IMF국가경제부도사태로 대한민국이 휘청거렸을 때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IMF사태를 조기에 극복하고 하락한 국가신용등급을 다시 끌어 올렸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지금 각 당은 대통령 예비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12.3비상계엄선포와 탄핵 그리고 구속과 파면으로 이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의 우두머리라는 혐의로 제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6.3대선은 IMF를 극복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탁월한 리더십과 역량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할까. 첫째는 경청(敬聽))하는 지도자여야 한다.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의 의견 제시는 물론 각계 각 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60분 중 55분을 혼자 떠들어대는 사람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는 부적합하다. 마음과 귀를 크게 열어 쓴소리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고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국정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어야 한다. 헌법 제1조는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순간 독재자가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은 국민이 부여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겸손하게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셋째는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는 극보수와 갈등하고 있다. 노사, 계층,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된 초갈등사회다. 이를 극복할 역량과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통일 이전에 남남갈등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반대파들도 품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역사의 굴곡을 지나면서도 퇴행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인 것도 우리 국민이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희망을 갖고 국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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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차기 대통령,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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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 올해 2025년도는 기독교적으로 선교 140주년(1885년 기점)이 되는 해이며, 정치적으로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나 뜻깊고 가슴 벅찬 해인가. 그리하여 전국에서 환희의 잔치를 벌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기류가 희안하다. 140주년, 80주년이라는 세월은 성숙을 넘어, 안정과 부흥의 역사에 접맥되어야 하리라 믿는데,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는데, 신앙, 정치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기독교 신앙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이며, 정치적으로 탄핵 연발, 계엄 발동, 대통령 파면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맞으며, 6월 3일 조기대선까지 숨가쁘게 가야한다. 대한민국의 대전환기라 아니할 수 없고, 위기라면 위기라 판단해야할 시점이다. 그러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예서 말수는 없다”(이은상). “위기는 기회다.” 언제 들어도 위안과 희망이 되는 명제이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지혜와 실천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실천이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위기를 극복하는데 방해 요소는 무엇보다 양극화이다. 세대간, 남녀 성별간, 지역 간, 빈부 계층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간에 극명하게 갈리어 이념, 이데올로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 현상이 색깔론으로 포장되어 은근히 갈등을 조장한다. 가히 문화전쟁(Culture War)을 넘어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 정국에서 관찰되는 양극화는 또 있다. 예를 들면 진보와 보수가 공히 본회퍼(Bonhoeffer)를 인용한다. 나치 독재와 만행에 저항하다 순교한 목회자인 본회퍼를 진보와 보수가 서로 끌어다 시대적 대안으로 앞세운다. 본회퍼는 우리나라 현 혼란 정국에서 좌우로 쪼개지기 직전이다. 본회퍼 목사가 이곳에 오신다면 스스로도 당황할 것이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의이며 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극단적 대치 앞에서 본회퍼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위기는 기회다.” 이 명제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다. 본회퍼 목사가 가르치는 <제자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해답을 얻는 길이다.(혹 “나를 따르라”로 번역). 본회퍼의 대안은 이미 종교개혁에서부터 출원한다. 루터, 칼뱅이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곧 십자가 신학, Theology of the Cross)에 시대적 혼란에 대한 해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사(빌 2:7,8), 모욕, 멸시, 상처, 고통, 고난을 마다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신앙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모방(holy imitation)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신의 한 수”이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기회의 파도를 타고 다시 비상하기를 기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양극화의 비인간적 세파를 극복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다./이레문화연구소 소장·전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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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오직 십자가를 따르라! -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성대곡(放聲代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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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예수의 부활, 민주주의의 부활
- 장헌일 지난 4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탄핵 찬반 세력으로 갈라져 한국전쟁 이후보다 그 갈등이 심화되었다. 세대, 성별, 지역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갈등이 생겼고 정치적 분열이 일상화되었다. 폭력, 막말, 그리고 선동이 난무하는 현 상황은 사실상 ‘심리적 내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은 결국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정치적 양극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제도 정치권에서 통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래야만 광장에서도 폭력과 혐오가 줄어들 수 있다. 해답은 결국 민주주의의 부활뿐이다. 헌재의 결정문에서는 '대화, 타협, 존중'을 강조하며, 국회 측과 대통령 측 모두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탄핵 결정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야 모두,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언행을 자제해야 할 때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경제와 안보의 복합적인 위기 속에 있다. 경제 성장률은 1%도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트럼프 2기 미국의 관세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또한 미 국방전략 지침에서는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이 예고되고, 리더십 부재로 국가의 총체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한국 교회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한다. 사랑과 생명,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사명을 충실히 다해야 한다. 교회가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사랑과 화해의 공동체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철저히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어둠을 이기는 부활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 정의, 평화를 이루는 일은 분열이 아닌 연대와 일치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다름을 넘어 인정으로 상처를 넘어 화해와 치유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며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파수꾼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이루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헌재의 파면 결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분열 정치로 인한 이념 내전이 격화될 상황 속에서 국가 정상화를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장미 대선’은 대한민국 미래의 새로운 싹을 움트게 하는 희망의 선거여야 한다. 기도로 시작한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의탁하자. 무너진 대한민국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국가적 위기마다 일어선 한국교회의 DNA 느헤미야 로드십 회복을 간절히 기도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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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예수의 부활, 민주주의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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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 시인 류시화가 무명시인들의 시를 모아 엮어낸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언이란 위대한 영혼의 순간적인 대각성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삶들 속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시행착오의 축적입니다 이 시집의 제목처럼 가정법의 삶을 자신이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읽히는 듯 하지만 이 후회의 반성은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로 거듭난다는 시인이신 이문재님의 이 십에 대한 논평에도 동의합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은 읽는 읽는 이에게 지혜를 주기 위하여 그리고 훈계하기 위한 내용들의 기록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스쳐버릴 수 없는 주옥같은 교훈입니다. 그러면서도 잠언서 전체의 요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했습니다. 결국에는 지혜를 구하고 명철을 터특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음입니다. 류시화가 엮어낸 무명시인들의 체험적 독백같은 시구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성경의 잠언서에서 가득찬 교훈들로부터 이 시대를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야 하는가의 답을 얻게 됩니다. 가치관을 상실한 개인의 삶과 지향점을 잃어버린 사회와 역사는 불행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총체적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창조질서가 파괴된 자연계로 인한 재앙의 발생이나 인류애 같은 것은 접어버린지 오래된 세계지형이나 극단적 자기 중심 사상에 빠져버린 우리나라의 현상들의 그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 가운데 떠밀리듯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류시화의 시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아무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한다고 나서는 치명적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잠언서의 구절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 15;13)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2:16) 2025년 고난주간에는 류시화의 시집과 잠언서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며 지내려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에게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종국에는 예수님이 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요 16:4) 이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우주의 섭리와 역사의 흐르는 방향을 점검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하며 이제라도 돌이켜 본래적 가치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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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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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승패를 넘어서
- 사실상 무기없는 전쟁이다. 작금의 탄핵국면은 찬탄과 반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전개되는 양상은 속된 말로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만 하는 것일까? 역사이래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전쟁과 갈등 투쟁과 대립의 역사가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고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전쟁, 현대에는 북한과 남한의 전쟁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의 수많은 사화가 바로 그 죽기 살기 전쟁 혹은 정쟁의 산물이다. 근현대사는 어떤가? 해방후 찬탁과 반탁의 역사, 그리고 3명의 대통령이 직무정지 내지는 파면의 역사를 보자. 노사가 대립하면 쇠몽둥이와 최루탄이 등장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절대 승리만을 추구하는 갈등과 대립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기는 것만이 최고의 목표요 절대목표라고 좌표를 설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스포츠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물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모조리 재기불능 상태로 때려 눞혀야만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임의 룰을 지켜 승부를 겨룬 다음 깨끗하게 그 결과에 승복하고 그라운드를 떠난다. 나아가서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지도 않고 한번의 패배에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승패의 결론이 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난다고 해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스포츠 게임은 이기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절대목표는 아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게 할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음번 게임이 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겼어도 다음에는 질 수도 있으며 이번에는 졌어도 다음에는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한 번뿐이 아니라 계속되기 때문이다. 논어에 중용지도라는 말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타협주의라는 비판도 받지만 다시 새겨볼 만한 말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이라는 저서가 있다고 한다. 좌우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실용주의적 이념의 모델로 제시된 이론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제는 바로 이런 중용, 제3의 방법등을 생각해볼 만한 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기는 것만이 절대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회는 쇳소리와 쨍그랑거리는 소리만 들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는 좌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운데도 있다. 이 세상에는 이기고 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기는 것도 있다. 예수께서 적대자들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자 제자중의 한 사람이 적대세력인 대제사장 수하의 귀를 짤라 버린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잘한 일이고 속이 후련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신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니 칼을 집어 넣어라. 내가 이기려고 마음 먹으면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도 동원할 수 있다고.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신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기고 지는 세속의 대립적 갈등구조를 쫓아가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총과 칼로 대립하는 절대 승리를 추구하는 극단의 갈등을 넘어 부활의 새벽이라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꼭 이기고 지는 것만이 게임의 결과는 아니다. 비기는 방법도 있다. 끝장을 보겠다는 승부욕의 뒤에는 이겨도 져도 남는 것은 상처뿐일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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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승패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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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나님 나라와 나라 사랑
-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교우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말씀 앞에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까지 하신 말씀 또한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그러므로 예수님의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였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성취가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성취(완성)하기 위하여 애쓰셨고 그 증거를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 날마다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 또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고 구할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질문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시며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이로써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임을 깨닫게 된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써 일하고 있다. 예수님의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 나라 였다는 것을 이해 한다면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6장 7~13절에는 예수님이 12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마을을 다니면서 한 일은 복음전파, 귀신축출, 병자치유 세가지였다. 또한 마태복음 4장 23절에는 예수님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병은 죄였고 약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구현, 즉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었고, 모든 소외와 차별, 배제와 혐오에서 벗어나게 해서 주변부에 있던 사람이 중심부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눈물과 탄식과 고통에서 해방되고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태초에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라가 혼란할수록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원해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끝까지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 사랑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완성체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복지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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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나님 나라와 나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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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다음세대 위기와 극복 방향
- 한국교회는 지금 ‘다음세대 사역이 위기이다’,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원인으로는 인구감소, 다음세대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의 부재, 다음세대 전문사역자의 부재, 교회학교 예산삭감 등을 든다. 하지만, 진짜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주로 교회 ‘안’에서만 선포된다는 점이다. 교회 ‘밖’에 600만명의 다음세대가 있는데 교회들이 교회 밖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희귀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저절로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신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교회학교 생태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대안으로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모델’을 제안한다.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운동은 지역교회와 함께 지역학교에 예배를 개척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운동이다. 현재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은 매주 2,500여명의 청소년들과 예배하고 있으며, 구성원 90%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학생이다. 다함께 찬양을 부르며,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경험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없어서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는 이 상황에 교회 안에서만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있는 학교를 직접 찾아가 예수를 믿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교회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첫째,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교회 공동체에 공유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독 교사들을 발굴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통해 학원복음화 사역을 이어간다. 셋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중심으로 각 학교별 학부모기도회를 조직해 학교와 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민원 넣지 않기’ 운동을 펼쳐간다. 넷째, 교회 공동체에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후 교회학교에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여 학교마다 예배를 개척한다. 과거 교회 안에 다음세대가 많았을 때는 관리 및 목양에 집중하면 됐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교회에 없기 때문에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안타깝지만 타 종교와 이단들이 목숨을 걸고 포교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들이 도전받고, 과거 믿음의 선배들처럼 열심을 다해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구령의 열정을 다시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다음세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교회들이 교회 밖에 복음을 접해 본 적 없는 청소년들에게 좀더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면 교회학교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28:19).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목사·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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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다음세대 위기와 극복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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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교회사명 과제인 디아코니아의 이해
- 디아코니아라는 용어는 신구약 성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핵심적인 계명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즉 기독교사회봉사라는 단어로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아직 생소하고 개념과 의미가 정확히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못하는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책임이기도 한 디아코니아가 복음주의 내지 보수적 복음주의(근본주의)중심의 한국교회의 신학정체성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였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과정에서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디아코니아는 기독교와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이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제는 예배(leiturgia), 친교(koinonia), 봉사(diakonia)였다. 그 후 교육(didache)과 선교(missio)가 분리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공통적인 모든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제는 둘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경건: pietas)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caritas)로 나뉠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균형이 있는 두 개의 날개, 두 개의 바퀴, 두 개의 기둥과도 비유될 수 있다. 다분히 한국교회에는 복음주의적 요소가 우선적이고 강하게 강조되다보니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적 요소에 매진해 온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이웃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해석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인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첫째로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질문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 율법학자의 입을 통하여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으로 답한 것을 맞다고 인정해주셨다. 즉 하나님 사랑과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웃사랑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이웃사랑의 행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이웃사랑도 균형있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둘째로 디아코니아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최후의 심판의 유일한 기준은 바로 디아코니아적 삶을 살았는가 아닌가였다. 셋째로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도를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주시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행함으로 우리들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됨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요 향기로서 살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적 요소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디아코니아의 삶을 균형 있게 이루어 가야 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다고 진단되고 있다. 교회성장이 멈추고 감소현상이 심각하다. 저출산 고령사회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음세대의 문제가 심각하다. 일반사회의 불신자들에게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게 나오고 있는 통계는 분명하다. 세상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본질적 사명과 책임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목사·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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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교회사명 과제인 디아코니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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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잃어버린 3년에서 부흥하는 30년으로
-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가 2022까지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도 코로나 팬데믹을 피할 수 없었고 고스란히 겪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코로나를 겪은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3년의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먼저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첫째, 교회 성도들을 잃었다. 대면예배가 제한되면서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예배생활이 전반적으로 약화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예배의 경건성이 약화되었다. 현장에서 받은 성령의 감동이 약화되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약화된 것이다. 둘째, 신앙의 열정을 잃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예배를 드리다 보니 찬양의 소리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기도의 소리가 잦아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찬양의 소리, 기도의 소리가 약해지면서 예배의 열정이 약해졌다. 셋째, 전도와 선교를 잃었다. 코로나로 인해 반기독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교회의 전도와 선교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출입국이 제한되고 선교활동이 제한되므로 코로나 3년은 전도와 선교의 정체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교회에 남겨 놓으신 것들이 있다는 것에 다시 소망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나? 첫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공동체이다. 두려워하는 세상을 향해서 교회는 외쳐야 한다. “여기 불변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고 세상을 향해서 외쳐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다. 둘째, 세상에 남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성령은 지금도 교회와 함께 하면 교회를 인도하고 계시고 일하고 계신 줄 믿는다. 코로나를 겪은 교회가 지금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아갈 때에 전도와 선교의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아직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다. 모압땅에서 다 잃어버리고 남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셨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그 남아 있는 진실한 성도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는 줄 믿는다. 코로나로 3년동안 교회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들을 붙들고 불평하고 좌절해서는 안 될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남겨두신 것들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울산 명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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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잃어버린 3년에서 부흥하는 30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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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 사랑이란 대개 예배 다음에 추가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선한 행동으로 인식된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 이웃 사랑이든지 아니면 선교나 전도를 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실천하는 행동이 이웃 사랑인 경우도 있다. 이 말은 이웃 사랑이 고유한 자기영역을 확보하기보다 언제나 구원이나 전도와 관련해서 부수적으로 등장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이 구원과 관련되어 등장할 때는 이웃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되면 안된다는 이신칭의론의 교리 하에서 제한되어 등장하고, 전도와 관련될 때는 전도의 도구로 스스로 이웃 사랑을 제한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런 제한들이 어쩌면 개신교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조건을 달거나 스스로 제한시키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경의 많은 본문들 가운데 특별히 막12:28-34절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고려할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는 소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주제이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첫째를 하나님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답변을 끊지 않으시면서 이어서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답변하셨다. 서기관이 질문한 것은 첫째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둘째까지 다시 말하면 두 개의 계명으로 답변하셨다. 성도님들 가운데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혹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덤으로 주어지는 사은품 정도로 폄하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나님 사랑에 온갖 정성을 다하다 보니 이웃 사랑은 조금 쉬어도 되거나 포기해도 무방한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는 질문에 답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첫째와 둘째로 답변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의도는 첫째에 해당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동시에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마치 조직신학 기독론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다는 답변과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참 하나님이 51%이고 참 사람이 49%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 100% 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 또한 100% 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기독론 이해인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각각 100%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똑같이 소중한 계명임을 밝혀 주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점도 있다. 우선 사랑의 대상이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사람 사랑이 곧 우상숭배로 변질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예배라고 말한다면 이웃 사랑은 사랑의 실천, 곧 선행으로 말한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은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구분은 하지만 동시에 함께 강조하는 경우를 보여 준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로 중요한 계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담아서 소개해 주듯이, 우리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도 마치 주님께 하듯 하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골3,23)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씀한다(히13,15-16절).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인용해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과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찬송의 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제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드렸다고 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해도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위할 수 없다. 반대로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까지도 다 드렸다고 합리화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은 분명 다른 것이고 구별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도 없고 흡수할 수도 없다. 구별은 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되고 심지어 차별화되어서 그 둘 중 하나를 우선시하고 다른 하나를 뒤로 미루는 일은 막12,28-34절은 물론이고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왜곡하는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성도가 천국가는 날까지 쉬지 않고 실천해야 할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이어지는 동안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같은 무게로 성도가 이어나가야 할 예배하는 삶의 두 가지 상호보완적 모습인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예배와 같은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예배드리는 삶의 온전한 모습이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단지 훌륭한 도덕이나 윤리일 뿐이지 예배는 아닌 것처럼,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참된 예배가 아니라 거짓으로 위장된 예배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상보적 관계 속에 있다. 끝으로 칼 바르트의 탁월한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기도와 실천을 하나로 엮어내는 멋진 표현이다. “기도는 두 손을 모아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은 두 손을 펴서 기도하는 것이다!”/아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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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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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 각자 자기 의미가 있고 주장이 있는 개체가 모여 이룬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같은 정치적 비전으로 모인 정당도 그 안에서 의견이 분분하며, 같은 교육적 목적을 가진 학교도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교육관이 달라 서로 갈등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님으로 모시는 공동체이지만, 그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신앙고백하고 같은 방식으로 선교적 비전을 나누는 일은 드물다. 더구나 오늘 한국교회가 특정 주제나 사안에 관하여 양분돼 거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듯한 국면에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과제이다. 하지만 우선 뜻부터 톺아보자. 보통 ‘연합’이나 ‘일치’라는 단어의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복수의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상황을 전제하는 이 단어가 마치 하나의 의견, 하나의 정책, 하나의 선택을 따라 모두 ‘단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만약 구성원 중 반은 동으로 가자 하고, 다른 반은 서로 가자고 하면 그것은 연합과 일치에 실패한 것일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 사역에 집중하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회심에 집중했던 것은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에 위배되는 것일까? 연합이나 일치는 반드시 모두 같은 의견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뜻’의 같음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뜻을 품어야 하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으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셨듯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뜻은 언제나 ‘이웃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다만 누구를 살리는 일에 집중할까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상이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를 헤치는 행동이 아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 전도에 매진할까, 구조적인 악과 싸우며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할까, 이것이야말로 부름받은 소명과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의 다양성 안에서 신자의 자유, 개교회의 선택이 작동하는 부분이다. 행여 교회 안에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한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대상, 하나의 상황만을 우선시하며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일대 사업임을 천명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헤치는 것이 아닐지 조심해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서 신앙 양심과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예언자적 삶을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도들이란 언제나 예수 안에서의 사귐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지, 그 사귐 안에서 자기만의 비전과 꿈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다른 구성원들의 의미를 말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적 사귐 자체보다, 그리스도교적 사귐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교적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일치는 생각의 같음, 행동의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직의 견고함, 활동의 효율성과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근본적인 방향성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살리는 방향’ 말이다. 우리와는 다른 대상을 향해 움직인다 해도 성도 개인이나 개교회가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는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롬 8:28)이고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것’(엡2:22)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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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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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현안과 방향
-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현안이 넘쳐 나는데 나아갈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일반 문화, 세상이 기독교를, 교회를 고루하고 초라하게 보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이토록 비참하게 보일 때가 없었다. 교회는 배타적인 기관이 되어 사회 속에 소금이 되지 못하고 소금을 뿌리고 있고, 빛을 밝힐 수 없는 촉 나간 전등이 되어 사람들의 시각을 밝혀주지 못한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 못하고 멋도 없고,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고, 지적으로도 빈곤하여 자기들끼리도 소통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통으로, 인간이 만든 법으로, 그리고 교회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제정한 신조와 교리에 매장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미6:8)”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장들에게 절기의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르신다(말2:3)”고 하였다. 지금도 우리들, 만인 제사장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희생과 헌신, 봉사를 구약의 희생제사의 똥처럼 얼굴에 바르고 계신다. 우리들에게 있는 현안의 문제들을 보면 더욱더 실감이 난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현안을 풀어갈 시간도, 능력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 생각도 없다. 모두 다 ‘나 몰라’, ‘나는 상관이 없어’ 하고 살고 있다. 사실상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하고 살기보다는 믿음의 시각만 유지하고 살았다. 그래서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이론은 있었으나, 실천하는 실행의 자세는 가지지 못했다. 자연히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았다. 그래서 ‘세상보다 못한 기독교’가 되었는데 여전히 ‘세상보다 나은 기독교’라고 여기고 반성도 없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야 할 자족을, 세상의 만족으로 둔갑시켜 자족의 삶은 교회 안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사장되어 버렸다. 그래서 ‘자족의 행복’이 아닌 ‘만족의 행복’, 그 탐욕의 삶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추구가 준 잉여가치 속에 있는 가장 신앙적이고, 신학적이어야 할 영적체험도 문화적이고 미적체험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결국 신앙의 가치는 디자인에 귀속되었다. 그래서 내용보다는 형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결국은 신학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은 분리되었다. 삶의 현장에서 신학은 논쟁으로만 드러나고, 신앙은 다름이 아닌 낯섦과 어설픔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안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방향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 속에 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신조, 그리고 문화적 신앙진술을 선포하지 아니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하나님 나라를 그들의 관계 속에서 삶으로 선포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신조도 아니었고, 교회의 강령도 아니었고, 더욱이 신학도 아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며, 삶 속에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살았다. 이 복음의 본질, 관계됨으로 맺어지고 선포되는 삶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나아갈 방향이 없다. 교회의 미래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그 방향이 있다. 그 당시 세상의 문화에 동화된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엡2:5).”/전주효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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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현안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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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앙의 구조변동을 주목하라
-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가장 흔한 설명은 교회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교회진단은 교회의 신뢰지수가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으며,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의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그 원인이며, 교회의 이기주의적인 태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주된 원인을 도덕적 문제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방향과 돌파구는 목회자들이 윤리적으로 각성하여 청렴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교회를 진단하는 또 다른 관점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서 설명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과제는 사회속에서 교회의 공적 기능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과제는 교회의 공공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이런 진단에 일면 동감하지만, 대부분 이런 진단은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일반론에 그치는 설명이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DNA, 즉 개신교 신앙의 형질변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교회 전반에 개신교 신앙의 구조변동이 왔으며, 교회가 그 변화에 적실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개신교 신앙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탈전통의 기독교로 이동하고 있다. 오늘의 신자들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교회 직분과 같은 전통적 방식의 신앙 패턴에서 탈피하여 개인화된 자유 선택적 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물론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탈전통 기독교인들 가운데 기성교회의 틀에서 완전히 도망쳐 나온 해체적 기독교인이 있는가 하면, 전통신앙을 일부분 유지하면서 일정한 범위에서 자유로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유형이 있다. 한국교회는 제도종교,제도교회로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신앙 패턴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둘째, 주술적 기독교에서 계몽적 기독교로 변동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은 샤머니즘과 기복종교 성격이 강했으며 목사의 역할이 마치 주술사처럼 개인과 가정을 향해 물권(物權)과 영권(靈權), 복과 저주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일종의 영매(靈媒)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제 오늘의 교회에서는 요술 방망이를 휘두르며 주술적 발언이나 엄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마법에 걸린 신앙에서 깨어났으며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신앙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금의 평신도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기독교방송이나 유투브 채널을 찾아다니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신앙의 자양분을 채워가는 자율적 신앙이 증가하고 있다. 셋째, 세속화가 기독교 신앙 의식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속화는 세계안에 깃든 신성한 힘의 작동이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 성스러움과 초월적 세계가 추방되며, 이것은 결국 개신교 신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기도 체험과 하나님을 향한 예배 행위, 더 나아가 초자연과 신비적 신앙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물질 욕망에 사로잡힌 현세 신앙 일변도에서 초자연을 향한 상승하는 신앙으로 양육해 가야 하며, 일상의 삶을 살지만, 초월성을 지향하는 성례전적 존재론의 신앙이 구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쇄신과 미래 방향을 모색하려면 교회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외형적인 변화만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탈교회 현상이라든가, 교회의 숫적 감소, 그리고 목회자 이중직과 같은 교회현상에만 주목하는 것은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그 현상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교회의 신앙 의식 내부의 변화들을 관찰하면서, 이를 신학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동춘/기독연구원 느헤미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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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앙의 구조변동을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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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 선 교회
- 신약 성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분투는 눈물겹다. 바울은 세상의 끝에 서서 한 치도 물러섬 없이 십자가 고난과 부활하신 예수를 유일한 푯대로 삼아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부활에 이르는 순교의 길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후 사도 바울의 삶을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편협한 종족주의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주의에도 부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나라 시민권을 가진 차별 없는 존재임을 확신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가 여러 그리스도들 중 한 분이 아니라 2천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유일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호칭이다. 그래서 바울은 역사적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묵상과 선교활동의 중심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교회의 토대를 세운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 교회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도 적용된다. 우리도 바울과 더불어 교회는 메시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과 우리도 메시아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고백을 우리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 이것이 교회가 성서로부터 받은 준엄한 명령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는 진리의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하며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신(神), 죽임을 이기신 '신'이 크리스천 공동체가 고백하는 하나님이심을 온몸으로 증언하며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였다.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기독교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세상의 질서, 세상의 평화와 화해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 신 자신의 희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고백한다. 사도신경에는 세 명의 고유명사가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기독교 공동체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며 예배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와 로마법에 의해 살해 되셨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율법도 로마법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다. 메시야 예수는 법의 이름으로 살해 되었다. 하나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화해하지 못함을 성경은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땅의 삶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해 갈 수 없을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이 무시무시한 진실 앞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증언했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는 교회로 거듭나기를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한다./한국YMCA연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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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 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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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관용의 정치
- 70년 전만 해도 가난의 대명사로 중국을 말하곤 했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등소평(登小平)이었다. 그는 세가지 정책으로 가난한 나라를 잘 사는 중국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1) 흑묘백묘론(黑猫 白描論)이다. 검은 고양이든지 흰고양이든지 쥐만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2) 선부 공부론(先富 共富論)이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를 선별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공칠과삼(功七過三論)이다. 즉 관용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전치 못하므로 결국 실수 할 수 밖에 없다. 과(過)가 3이고, 공(功)이 7이면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정책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을 키워 미국과 대결하도록 한 바탕이 된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정치는 절망적이다. 보수와 진보가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서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얼마 전 좌파정권의 전위대와 같은 성공회 신부가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람의 내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기도 했다는 것이다. 같은 종교인으로서 그 같은 행태가 부끄러웠고, 이해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희망의 종교인데 성공회 신부의 그런 표현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제 정당 정치는 변해야 한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하나 되었던 나라를 소개하고 싶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넬슨 만델라가 출옥후에 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백인 세력의 대표자로 흑인탄압에 앞장섰던 드 클레로크에게 부통령이 되어 달라고 제안을 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그가 정치적인 적임에도 그와 화합하여 부통령 자리를 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통합된 정치를 통해서 인종탄압을 타파하고 자유 민주주의로 정착하여 그 공으로 1993년에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피해를 입으면 복수와 용서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대개가 복수를 택한다. 복수하고 나면 공허가 온다. 리고 복수의 에너지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 상대를 살리고 나를 살린다. 즉 나라를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어떤 언론인은 한국인이 모르는 3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지금 한국인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인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세째로는 우리의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이 무서운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변을 보라.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잘먹고 잘살게 된 기초는 이승만 박사가 어렵사리 채택한 자유민주주와 시장경제 체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동물의 왕국에서 두 마리의 사슴이 생사를 걸고 싸우다가 사자밥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정은이 자기의 정권유지를 위해 남한을 적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김정은이 최근에도 수십발의 미사일을 쏘아 대고 있지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같은 때 우리 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아웅다웅 당파 싸움만 일삼고 있는 이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은 우리가 깨어나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 정치인들이여! 그리고 한국 교회여! 장래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시대정신을 바르게 읽고 관용과 통합의 지도자가 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도 돌이켜 회개하고 시대의 선지자로서 더 큰 기도의 사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기하성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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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관용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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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
-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시4:1). 너그러운 마음은 곤란한 일을 통해 마음의 연단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얻을 수 있는 옥토 밭이다. 난관에 부딪쳐보지 않고는 모든 것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의기양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곤란한 일을 겪은 후에 범사에 모든 것에 때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정한 시간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를 보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된다. 구원과 회개와 은혜의 시간과 성숙의 때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소유하게 될 때 진정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한 사람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간과 법칙 아래 놓이게 됐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이 돼줬다. 비로소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감사와 진정한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법칙 아래에 놓이기 전에도 이미 넘치는 의욕과 소망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삶은 모든 가능성으로 인해 그의 삶에 기쁨과 환희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행히도 영원히 변함없는 시간을 알게 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성숙한 내면을 소유하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돌아온 탕자이야기이다. 자신의 능력과 그 유능함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신에게 감사했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던 물질과 명예와 자신감들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였고, 하나님께로 가는 자세를 배우게 됐다. 비로소 아버지 집에 있는 자비와 부요함과 너그러움에 대해 찬미하게 된다. 아버지집에 있는 종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와 자비가 넘쳐나는 삶인가를 알게 된다. 이런 아버지의 너그러움을 알게 되자 그는 집을 향해 돌아가고자 마음을 정한다. 어떠한 마음으로 돌아가는가?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돼 그 은혜를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이 탕자는 비로소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알게 된다. 모든 길이 차단 된 후에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감사란 내게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감사가 얼마나 위험하며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경험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도 여전히 원망하고 실패의 원인들을 주변에 돌리기 일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생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런 경험에 담대해지길 바란다. 아버지의 집에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얼마나 충만한가를 노래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성숙한 시간이다. 나의 능력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감사하게 된다. 나의 기쁨을 빼앗기고 나서야 주님이 주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의 길에서 실패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되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한 그리스도인이며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이길 수 있는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의 감사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두고 있다. 이런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자신의 실패와 헐벗음이 보이지 않는 진정한 감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감사는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그가 당한 슬픔과 실패의 문제도 그의 기쁨을 제거할 수 없게 된다. 이 승리와 기쁨은 자신에게 나오지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왔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감사생활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무엇인가? 자신이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해도 잘못됐다는 패배의식보다는 하나님은 옳으시다는 것을 찬미하는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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