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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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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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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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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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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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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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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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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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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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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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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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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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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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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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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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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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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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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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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은 어떻게 오는가? 윤현기교수(아신대학교 북한연구원, 평화나눔재단 대표)
- 윤석열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는 국민의 품에 안기고 드디어 용산시대가 열렸다. 탈북민 정착교육기관 교육 중 용산 전쟁기념관 탐방이 있다. 전쟁기념관 탐방시 문화 해설사님의 해설을 듣던 탈북민이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다. 북한에서 6·25는 북침으로 교육받은 탈북민이 문화 해설사님의 ‘6·25는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임을 상기할때 혼란스러워하던 기억이다. 역사왜곡으로 혼란을 겪던 탈북민은 6·25전쟁 발발 진실이 해소되어지는 듯 하지만 역사의 진실앞에 괴로움은 분명하다. 왜곡된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일은 혼란을 초래하지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자료로 가능하다. 생생하게 기록된 전쟁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용산전쟁기념관은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 배양을 목적으로, 선열들의 호국 위훈추모를 목적으로 1994년 6월 개관하였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평화를 다짐하는 평화광장 좌우로 625전쟁 참전국 기념비와 국기들, 21개국 참전국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글들이 보인다. 호국의 별이 되신 호국영령들이 한반도 대한민국을 지켜주고 있는 불빛들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6·25전쟁은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 38선 전역을 불법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국방부는 남침이라는 표현보다 ‘북한의 남침’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기로 하여 혼란과 왜곡을 차단한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분단의 아픔과 긴장관계는 지속되고 이산가족 문제 등 전쟁의 아픔과 상처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안에서의 일이다. 정원초과 되었으니 ‘나중에 타신분은 내려주십시오’라는 멘트가 정확히 나왔지만 나중에 탑승하신 노인은 내리지 않는다. 젊은 청년 한분이 아무 말없이 내렸다. 여전히 멘트가 나온다. ‘나중에 타신 분은 내려주십시오’ 여전히 노인은 내리지 않고 또 다른 젊은 청년이 내린다. 그때야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내려갔다. 언젠가 ‘나중에 타신 분은 빨리 내리십시오’ 소리치던 젊은 청년이 있었다. 오늘은 아무 말없이 젊은 청년 두 분이 내린 다음 작동하였다. 같은 상황에서 젊은 청년들의 태도가 상이하게 나타난 경우이다. 젊은 청년들의 태도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젊은 청년들의 태도가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 사례로 올바른 의식과 교육은 젊은 세대에게 긍정적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향한 통일교육 강좌에서 2021년도 00대학교 통일교육 강좌 이전, 이후의 설문 응답내용이다. 젊은 대학생들의 ‘통일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정적인 응답은 통일비용인듯하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통일이후 안정적 발전보다는 불안과 빈곤으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염려이다. 막연한 두려움이다. 부정적 통일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대학생 통일교육 강좌 이전에는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통일교육 강좌 이후 통일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변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도 00대학교 통일교육 강좌이후 ‘귀하의 남북통일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에 ‘여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려 점진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좋다’라고 75%가 응답하고 있다. ‘귀하는 북한을 어떠한 대상으로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한민족으로 통일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87%가 응답하고 있다. 부정적 인식의 통일관이 긍정적 인식으로 변화됨을 확인하며 통일교육 강좌로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십 수차례 반복하고 있으며 남북한 평화통일의 길을 멀게 느껴지게 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비용에 대해 2022년 6월9일자 조선일보는 “올 8000억어치 미사일 쏜 북” 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북한의 전 주민 백신비용과 맞먹는 수치로 북한 전 주민 2500여만명에게 화이자 백신을 접종하거나 올해 부족한 식량을 거의 모두 충당할 수 있는 금액으로 밝히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북한의 적대적 감정이 깊어지게 하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덤덤하게 느껴지기까지한다. 2022년 6월6일자 조선일보에서 국민대교수인 안드레이 란코프교수는 한국청년들의 통일과 북한에 대한 시각에 대해 “한국청년들은 점점 더 북한에 무관심하고 통일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통일에 대한 가장 큰 장애요인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독일처럼 갑자기 예기치 않게 다가올 수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625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기억한다. 6·25전쟁으로 10만 여명이 넘는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고 가족과 헤어져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이산가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만날 수 없고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령의 많은 사람들은 한 많은 세월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지고 있다. 625전쟁으로 국토는 80%기 피괴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부서지고 사라졌다. 6·25전쟁으로 인한 남과 북의 불신의 벽은 높아지고 적대감으로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엄청나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 속에 화해의 길은 더욱 멀어져가고 있다. 화해란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풀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는 화해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샬롬의 왕으로 죄인된 인간에게 생명을 바쳐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은 남북이 서로 상처와 아픔을 달래며 화해하는 사역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 화해사역은 남과 북의 화해로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에 성큼 다가갈 수 있다.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의 길은 화해 사역의 첫걸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적인 엄청난 어려움으로 식량난 원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까지 세계의 경제상황을 재편하는 경제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아무리 명분있는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보다 못함을 실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반도에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한반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쟁과 평화의 양면을 체득하며 6·25를 상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아 어찌 우리 잊으랴 그날을’ 잊을 수 없는 6·25의 역사를 기억하며 상기한다. 역사의 히스토리아(historia)어원은 탐구 구명으로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헤로도토스의 책이름이다. 역사란 진실을 찾아내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역사는 사실과 기록이 부합함을 탐구하며 구명한다. 625의 역사탐구와 구명은 시대적 요청이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북한에 백신지원과 방역물품 지원 사역은 북한의 인도적지원의 길로 화해사역으로 다가갈 수 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화해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사 역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기독인들의 몫이다.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절대주권을 의지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그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아신대학교 북한연구원, 평화나눔재단 대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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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은 어떻게 오는가? 윤현기교수(아신대학교 북한연구원, 평화나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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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의 민족정신과 이타주의의 필요성
- 이타주의는 프랑스의 철학자 꽁트(A. Comte)가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서 애타주의라고 하며 도덕의 기초는 인애, 동정심이라고 하여 타인의 행복이나 복리를 행위의 목적으로 한다는 사회적 공리설이다. 즉 그에 의하면 이타주의란 ‘사랑을 주의(ism)로 하고 질서를 기초로 하여 진보를 목적으로 하는 주의’라고 한다. 이타적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나 복지보다는 타인을 먼저 고려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며 자기 자신은 그러한 행동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기도 한다. ‘이타주의’사상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사회가 존속하는데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윤리적 입장에서 본 이타주의는 타인의 선(good)을 이루는데 그 목적을 둔다. 이는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상이다. 유관순열사는 하나님 안에서 훈련을 받아 이 나라에 독립을 위해서 순교한 한국의 에스더이다. 신사참배하는 미신의 나라인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상황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 믿고 목숨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을 보면, 그 어린 1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나오는 열정과 자신감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19년 3월1일 정오, 탑골 공원을 시작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열사는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덕수궁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유관순열사는 음력 3월 1일 아오내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 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유관순열사는 재판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없는 우리 동포를 수 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재판을 하겠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수작은 집어 치워라!" 하고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의 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어린 학생뿐만 아니라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만세 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여 수 만 명을 죽이고, 10여만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재판을 받은 사람도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시위 군중에 대한 학살뿐만 아니라 체포된 사람에 대한 고문 또한 잔인하기 그지 없었으며,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터졌던 민족운동의 거대한 흐름이었고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교인들과 학생들의 동원이 가능하여 전국 조직망을 통한 의사소통과 연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1운동은 기독교의 애국운동이며 신앙운동이었다. 유관순열사는 여자의 몸이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앞장서는 용맹함과 이타주의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쳤던 유관순의 애국심과 이타주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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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의 민족정신과 이타주의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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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건강한 가정
- 5월은 가정의 달이다. 1994년부터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해진 것은 그만큼 가정이 건강하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그 좋은 계절 5월이 가정의 달로 지켜지면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점차로 해체의 수준을 밟아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의 사전적인 의미는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공동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2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으로 가정이 형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현재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일인가구의 확대이다. 2021년 10월 행안부 조사에 따르면 주민등록상으로 일인가구가 40%가 넘었고 4인 가족은 20%이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두 명 이상이 함께 사는 가정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한국의 가정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가정을 지켜나가야할 가장 중요한 주체가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물결을 따르기보다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성경이 기독교 가정에 대해서 가르치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기독교 가정을 꿈꾸어야 하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지으셨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룩하게 하셨다. 이것은 결혼의 제도화를 말하지만, 동시에 가정의 설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신 목적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의 가정은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이 없이 가정이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에 세우신 가정의 목적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가정은 만드신 목적이 바로 가정이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예배하는 가정이 되는 것이다. 가정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셔서 가정에 필요한 복을 주실 것이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어울려 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향기를 나타내야 하겠다. 기독교 가정에서 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여 황혼에 더욱 행복해지는 부부가 되어야 하겠다.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오늘날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서,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자녀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알고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부모와 자녀, 형제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세상에서는 점차 단독 가구가 많아지고 있지만, 기독교가정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지켜지고 구원의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 가득한 가정이 많아져야 하겠다./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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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건강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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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성적 타락, 신학 및 신앙의식의 부족, 선거부정과 지도력의 부재, 목회자 생활의 불안정과 양극화, 교회와 성직의 세습 등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면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다. 이는 신앙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물신숭배 등 세상풍조를 따랐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사람의 기호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감리교회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정직한 감리회 지도력을 세우고자 2022년 감독회장 선거를 주목하여 동 선거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첫 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강화하여 진정한 기독교회를 세워야 한다. 영성훈련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 째, 웨슬리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공감하며 진정한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로 세상을 거룩하게 지어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셋 째, 목회자의 생활 안정, 평신도 위상 정립, 제도를 개선 보완하여 합리적이고 정직한 감리교회를 지어가야 한다. 아울러 실력을 갖춰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 째, 기후위기로 비상사태를 맞고 있는 지구생태계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신앙을 배우고 환경선교에 동참하는 등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나서야 한다. 다섯 째, 감리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학연을 넘어 연대, 세대를 넘어 통합, 성별을 넘어 평등한 감리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공적 교회이다.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감리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나 개혁을 요구할 것이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감리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지도력 부재 17년 동안 감리교도 35만 명이 감리교회를 떠났다. 깨끗한 이미지 갱신과 정직한 지도력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감리회 교인들의 이탈 현상은 급속도로 가속화될 것이다. 시급하게 위기를 돌파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개혁, 영성형성, 선교정책, 목회자 정책 등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차분히 만들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을 세우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감리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간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으로 인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교회다움을 회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그간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감리회목회자모임새물결 전국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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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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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 <역사의 연구>라는 명저를 저술한 세계적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6.25전쟁 직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3대가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효(孝)사상과 가족제도를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비록 한국이 지금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이 나라는 머지않아 선진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효행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차 한국이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가족제도와 효사상일 것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지구에서 꼭 가지고 가야할 제일의 문화는 한국의 효문화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2019년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 사회에 과연 효행(孝行)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진 5천년 역사의 찬란한 정신 유산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 사상에 기초한 효사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다.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에는 생활고와 가족부양의 부담 때문에 존속살인까지 벌어지는 데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각박해진 인심과 메마른 인성으로 인해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회에서는 지난 2014년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교육부가 인성교육종합계획을 5년마다 짜야하고, 교육청이 매년 인성교육시행계획을 추진해야 하며, 일선 교사들은 매년 4시간 이상의 인성교육 연수를 받을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려는 취지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 방향은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뿌리의식을 되살리는 데 있다고 본다. 부족하지만 나는 1995년부터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쳐왔다. 이 같은 나의 열정은 ‘효’는 성경에 있는 것이고(딤전5:4)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자로 길러내는 ‘효경’이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효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는 일부 여성과 젊은이들이 ‘효’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과 오해를 갖고 있는 부분이었다. 과거 왕조 시대에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효를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군주제의 효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며 가족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할 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의 권익이 철저히 소외되고 박탈되었었다. 이처럼 ‘효’라는 단어가 상당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부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효문화를 중흥시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다시 읽었고 시편 133편에서 ‘하모니’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개역한글에는 ‘연합’으로 번역되었지만 NLT 영어성경에는 시편 133편에 ‘harmony’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모니’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모니해야 하는 데 그 출발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하모니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효를 영어로 ‘Harmony of Young and Old’의 줄임말인 ‘HYO’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YO의 효는 과거의 효와 달리 자유로운 개인, 민주적 절차, 쌍방적, 관계적이며 평등한 인간관계, 이타주의와 애경(愛敬)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효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사상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현대적 효이다. 그러므로 ‘효(孝)’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설립자·총장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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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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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변화위한 비전이 필요한 세상
- 어려운 시기일수록 꿈과 비전을 품은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이다. 비전을 품은 지도자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비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다음세대가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창조된 우리가 모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가를 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장점은 더욱 계발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질이나 MBTI, 에니어그램과 같은 다양한 검사들을 통해서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뚜렷한 목표나 방향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뒤 더 이상 이대로 안 된다는 반성과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꿈과 비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셋째 비전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비전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삶과 사역에 사용되는 비전의 개념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단계이다 넷째 자신이 품은 비전을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꿈이나 비전을 품기는 하지만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한순간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을 본다. 또한 비전이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꿈과 비전도 점차 성장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발전시킨 비전을 세상에 전달하는 단계이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비전을 품고 따를 수 있도록 영감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퇴임 후에 아름다운 삶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조차도 재임 중에 자신의 비전을 백악관을 넘어 전달하는 데 실패해 재선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전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여섯 번째 비전을 성취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가진 리더들은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리더십 팀을 세우고 비전을 발전시키고 전달해 가는 데 있어서, 어렵고 힘든 것들을 인내하면서 신중히 초점을 맞추어 나가고 비전을 성취해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취한 비전을 보존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성취하는 것보다 그 비전을 보존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말이 있다. 커다란 비전일수록 그 비전을 무력화시키고 열기를 꺼뜨리는 장애물들이 많은데 이것을 비전 킬러나 비전 뱀파이어라고 부른다. 이처럼 비전을 성취한 다음에 그것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보존해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은 그것을 품은 사람보다 더욱 오래간다. 그만큼 한 민족이나 사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비전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전이 없는 백성들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므로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성경의 교훈을 미래의 지도자가 될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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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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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변화위한 비전이 필요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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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란 단어는 사네이이다.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뜻 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 /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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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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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미워하고’ 자녀를 ‘미워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네이곧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도 그 가족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았던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미움은 덜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식은 증거이다. 가족들이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증거이다. 형제들이 미워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증거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십자가형을 공공연하게 시행해왔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를 덜 사랑하고 예수를 더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내리고 따라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십자가에 못이 발목에 박힌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께서는 가정에서 먼저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또 부모는 자녀를 미워하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굉장한 도전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사를 정리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가정의 일로 십자가를 지는데 어떤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의 제자들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이제 이 길을 당신도 걸어가려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부모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녀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상을 미워할 준비가 되었는가? 세상을 덜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 준비가 되었는가?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나자라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 찾는다는 말씀이기에 예수의 제자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걸어가는 길이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우뢰의 아들’(히브리어로 베네이 레고쉬)이란 별명을 얻은 그들의 아비는 세베대 곧 히브리어로 자브다이로 요한은 예수의 제자 중에 최연소이고, 그의 형 야고보는 예수에게 회장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 곧 조선 시대로 말하자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곧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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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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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 역대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통계 수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초기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집권 마지막 분기에는 최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단순한 정치 영역의 지도자를 넘어선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 배경을 따져 보자. 우선 권력 집중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순한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자로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추천을 통하여 사법부 영역에도 간섭한다. 대통령은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코로나19 시대 교회 문을 닫고 열게 하고, 탈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북한 핵을 억제하고, 미·중 갈등에서 균형을 잡으며,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의 국가중심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열강의 침략, 일제강점기,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애국심이 국민의 심성에 내재되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 자부심(이른 바 ‘국뽕’)은 하늘을 찌른다. 더욱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가는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임이 확인되었고, 동시에 국가가 국민 개인을 통제할 정당성까지 확보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의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정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라는 인간 삶의 한 영역의 지도자일 뿐이다. 메시아는 고사하고 그 역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대통령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세금을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 감이 누구인지 깊이 숙고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자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역주권론은 성경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으로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주권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을 여러 영역들로 나누어 다스리신다. 국가, 교회, 가족, 학교, 기업, 학문, 예술 등이 그 영역들로서, 하나님은 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임무와 법과 통치자를 주셨다. 각각의 영역들은 내적 성격과 자체의 법체계에 따라서 그 권위를 행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 통치자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고유 영역에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영역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현하는 길이다. 어느 한 영역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사의 유일한 조직처럼 행사해서도 안 되고, 기업가 정신이 온 사회를 지배하여도 안 되며, 교회가 정치적 과제와 국가의 영광을 취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부패하였기에 한 사람, 한 영역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정치의 하부기관이 아니라, 정치가와 권력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기관이다. 우리의 교제는 분열과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아 통합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교제다. 신앙인은 하나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안목으로 그 이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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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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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공격했다. 전세계는 이를 러시아의 약소국 침공으로 보면서 규탄하고 있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세를 현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현실에서 본질문제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해야 이 상황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이후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감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나간다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차세계대전의 잘못된 해결이 2차 세계대전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나토와 미국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국가적 안전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부딪혀 나온 전쟁이다. 즉 제국과 대국의 이해관계 대립이 전쟁의 원인이다. 나토와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면서 독일 넘어서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문서로 약속됐지만 법적 조약은 맺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와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란드, 발트3국, 발칸국가 등 동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가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발길이 국경선까지 다가온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는 나토 가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간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Demilitalization)를 목표로 하고, 친서방 극우 정권을 통제하기 위해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세부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벌이는 휴전 협상의 본질이 이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않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거부하면 전체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오만한 제국의 쇠퇴이다. 제국의 오만과 쇠퇴, 그것이 이번 전쟁의 본질이다. 미국은 소련 해체 이후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유일 제국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고,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으로 미국의 부자는 이제 슈퍼리치가 됐다. 미국이 중심에 유럽-일본 부자는 주변에 섰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단적 수준이 됐고 그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고 있다. 유일 패권국 - 제국화된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만든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 헬리콥터 머니로 전세계에 풀린 달러는 세계 인플레-대공황을 예고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시리아에서 실패했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며, 이라크에서는 매일 미군 그린존에 민병대의 로켓이 날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완성한 북과 힘겨운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성장한 중국과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며 경제를 회복하고 현대화한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하고 있다. 그 대결의 반영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의 오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오만이 무너지고 진정한 평화의 체계가 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시2:1-3). 한국교회는 표면에 나오는 뉴스에 좌우되지 말고 현상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공포를 넘어서 그들의 오만 보며,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데서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의 교회 목사·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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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