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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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헌절– 말씀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7월17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된 뜻깊은 날을 맞이합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근본과 질서를 세우는 토대이며,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최상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법보다 더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기초한 교회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존재하게 한 생명의 뿌리요, 교회법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가 정의롭고 질서 있게 세워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두 가지 기준을 존중히 여기며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안팎의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권위의 상실, 무분별한 다툼과 분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오해가 깊은 상처로 번지고, 사소한 이익다툼이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기일수록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이를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법의 질서입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과 교회법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편에 서거나, 세상법을 교회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뜻을 구하며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르치며, 교회법은 공의와 은혜가 조화를 이루도록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다툼과 분쟁 앞에서 화해와 중재의 은혜로운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내 뜻을 내려놓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우뚝 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린도전서14장 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위와 질서는 결코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법을 경외함으로 지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떳떳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헌법을 존중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법을 가장 높은 권위로 세우는 교회가 될 때, 우리 가운데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이 결단 위에 은혜를 더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리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 평화! 세상에 빛을! 아멘”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증경대표회장, 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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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7-08
  • [정론] 수련회를 사경회로
       신학교에서 한 학기 마지막 시험을 보는 시간이었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 준 후에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한 학기 동안 성경해석학을 잘 배웠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이번 학기에 배운 것을 가지고 삶에 시험이 올 때 능히 이기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날 공부한 것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공부한 것보다 앞으로 시험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고 깨달았다. 그 후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에서 시험을이기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진다” 는 말은 꼭 하게 되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완전한 확신과 확고한 진리임을 믿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순수하고,영원한 지혜이며, 그것이 양심에 확신을 주고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립한다”고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을 쓴 윌리암 퍼킨스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삶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다.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래도 모든 사람은 갈증을 안고 살고 있다. 갈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고 하고 있다.     기원전 765~755년 사이의 아모스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씀으로 성경 암8:11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들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삶의 목이 마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정녕 마음에 깨달음은 없고,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얻지만 마음에 깨달음이 없는 지식을 쌓고 있다면 여전히 삶은 목마를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되 마음을 기울이고 들었으면 실천을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교회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다.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성도는 저조하다. 대부분 관심과 시간이 없고 생활이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면 분명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어렸을 때 교회 (현 용산 중앙교회)는 여름에 사경회를 열었다. 오전 10시에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기억나는 것은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이 오셔서 일주일간 말씀을 전하셨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였지만 교회 창문을 열고 성도들은 마루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배웠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전도에 대하여 쉽게 가르쳐 주셨다. 특히 기도에 대하여 배울 때는 회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여름사경회 후에 성도들은 저녁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의 열기가 있어 매 주일 새신자가 등록하였다.     교회는 매년 여름이 되면 각 기관별로 수련회를 하게 된다. 수련회에 형편상 참석을 못하는 성도가 있고 교회 형편이 어려워 수련회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수련회를 사경회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성도들에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서 같은 주제로 같은 내용을 새벽, 오전, 저녁에 한다면 성도들은 형편에 따라 참석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무디사역문화연구소 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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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30
  • [정론] 나라사랑의 힘은 역사의 기억이다
      2020년(10월) 방탄소년단 BTS가 한국과 미국의 우호증진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처음에 BTS가 이 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올해로 75년이 되는 6.25한국전쟁에 미군 최고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만든 상이었는데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도 공군요원으로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작전비행 중에, 그만 북한군의 의해 요격된 비행기가 추락이 되었다.     행방이 불분명한 그를 수색하자는 부하들의 조언을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을 찾겠다고 많은 군인들을 더 희생시킬 수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22세의 그의 아들 주니어 밴 플리트가 그때 죽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죽지 않고 북한 군의 포로가 되어서 중국에 인계되었고 나중에 소련군에까지 최종 넘겨져서 시베리아의 군락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2020년 방탄소년단이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기 한달 전 그의 조카뻘 되는 조셉 맥 크리스천(미국LA 거주)발표가 되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밴 플리트 장군은 1996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평양인근 산야에 묻혀있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고, 그 아들이 묻혀있는 땅 한국이 어서 통일 되어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밴 플리트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가 이 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소감을 발표하자 중국의 방탄소년단 팬들이 그 방탄소년단을 비방하고 탈퇴화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범한 미군을 물리치고자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식의 역사왜곡으로 중국 젊은이들 착각 속에 빠뜨렸다. 사상의 자유가 없고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반대적인 사상을 가진 중국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망각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는 참교육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3만 4천명의 젊은 미국 청년들이 한국의 지금의 번영과 자유를 지켜주었다는 75년전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만 하는데,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망각한 채로 살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베푼 이 역사적인 기적과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고 기억하라’ 했다. 젊은이들은 특별히 어린 세대와 다음세대들은 부모로부터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실천할 때 힘이 생기고 가족사랑과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근본적으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생긴다.    역사의 정확한 기억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인도하셨느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또 분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힘이다. 그 역사를 아는 자들을 미래가 기억할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고 성경은 “너희가 옛날 애굽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신15;15) 고 신신당부 했다. 역사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현재의 역사도 잊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기드온동족선교회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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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24
  • [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13
  • [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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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5-23
  • [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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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변화위한 비전이 필요한 세상
      어려운 시기일수록 꿈과 비전을 품은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이다. 비전을 품은 지도자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비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다음세대가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창조된 우리가 모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가를 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장점은 더욱 계발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질이나 MBTI, 에니어그램과 같은 다양한 검사들을 통해서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뚜렷한 목표나 방향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뒤 더 이상 이대로 안 된다는 반성과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꿈과 비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셋째 비전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비전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삶과 사역에 사용되는 비전의 개념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단계이다   넷째 자신이 품은 비전을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꿈이나 비전을 품기는 하지만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한순간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을 본다. 또한 비전이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꿈과 비전도 점차 성장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발전시킨 비전을 세상에 전달하는 단계이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비전을 품고 따를 수 있도록 영감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퇴임 후에 아름다운 삶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조차도 재임 중에 자신의 비전을 백악관을 넘어 전달하는 데 실패해 재선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전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여섯 번째 비전을 성취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가진 리더들은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리더십 팀을 세우고 비전을 발전시키고 전달해 가는 데 있어서, 어렵고 힘든 것들을 인내하면서 신중히 초점을 맞추어 나가고 비전을 성취해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취한 비전을 보존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성취하는 것보다 그 비전을 보존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말이 있다. 커다란 비전일수록 그 비전을 무력화시키고 열기를 꺼뜨리는 장애물들이 많은데 이것을 비전 킬러나 비전 뱀파이어라고 부른다. 이처럼 비전을 성취한 다음에 그것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보존해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은 그것을 품은 사람보다 더욱 오래간다. 그만큼 한 민족이나 사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비전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전이 없는 백성들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므로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성경의 교훈을 미래의 지도자가 될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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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4-19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란 단어는 사네이이다.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뜻 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 /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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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30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미워하고’ 자녀를 ‘미워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네이곧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도 그 가족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았던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미움은 덜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식은 증거이다. 가족들이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증거이다. 형제들이 미워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증거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십자가형을 공공연하게 시행해왔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를 덜 사랑하고 예수를 더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내리고 따라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십자가에 못이 발목에 박힌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께서는 가정에서 먼저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또 부모는 자녀를 미워하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굉장한 도전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사를 정리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가정의 일로 십자가를 지는데 어떤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의 제자들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이제 이 길을 당신도 걸어가려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부모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녀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상을 미워할 준비가 되었는가? 세상을 덜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 준비가 되었는가?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나자라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 찾는다는 말씀이기에 예수의 제자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걸어가는 길이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우뢰의 아들’(히브리어로 베네이 레고쉬)이란 별명을 얻은 그들의 아비는 세베대 곧 히브리어로 자브다이로 요한은 예수의 제자 중에 최연소이고, 그의 형 야고보는 예수에게 회장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 곧 조선 시대로 말하자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곧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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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29
  •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역대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통계 수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초기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집권 마지막 분기에는 최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단순한 정치 영역의 지도자를 넘어선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 배경을 따져 보자. 우선 권력 집중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순한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자로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추천을 통하여 사법부 영역에도 간섭한다. 대통령은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코로나19 시대 교회 문을 닫고 열게 하고, 탈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북한 핵을 억제하고, 미·중 갈등에서 균형을 잡으며,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의 국가중심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열강의 침략, 일제강점기,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애국심이 국민의 심성에 내재되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 자부심(이른 바 ‘국뽕’)은 하늘을 찌른다. 더욱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가는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임이 확인되었고, 동시에 국가가 국민 개인을 통제할 정당성까지 확보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의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정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라는 인간 삶의 한 영역의 지도자일 뿐이다. 메시아는 고사하고 그 역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대통령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세금을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 감이 누구인지 깊이 숙고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자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역주권론은 성경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으로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주권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을 여러 영역들로 나누어 다스리신다. 국가, 교회, 가족, 학교, 기업, 학문, 예술 등이 그 영역들로서, 하나님은 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임무와 법과 통치자를 주셨다. 각각의 영역들은 내적 성격과 자체의 법체계에 따라서 그 권위를 행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 통치자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고유 영역에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영역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현하는 길이다.   어느 한 영역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사의 유일한 조직처럼 행사해서도 안 되고, 기업가 정신이 온 사회를 지배하여도 안 되며, 교회가 정치적 과제와 국가의 영광을 취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부패하였기에 한 사람, 한 영역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정치의 하부기관이 아니라, 정치가와 권력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기관이다. 우리의 교제는 분열과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아 통합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교제다. 신앙인은 하나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안목으로 그 이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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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7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공격했다. 전세계는 이를 러시아의 약소국 침공으로 보면서 규탄하고 있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세를 현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현실에서 본질문제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해야 이 상황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이후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감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나간다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차세계대전의 잘못된 해결이 2차 세계대전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나토와 미국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국가적 안전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부딪혀 나온 전쟁이다. 즉 제국과 대국의 이해관계 대립이 전쟁의 원인이다. 나토와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면서 독일 넘어서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문서로 약속됐지만 법적 조약은 맺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와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란드, 발트3국, 발칸국가 등 동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가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발길이 국경선까지 다가온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는 나토 가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간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Demilitalization)를 목표로 하고, 친서방 극우 정권을 통제하기 위해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세부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벌이는 휴전 협상의 본질이 이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않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거부하면 전체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오만한 제국의 쇠퇴이다. 제국의 오만과 쇠퇴, 그것이 이번 전쟁의 본질이다. 미국은 소련 해체 이후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유일 제국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고,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으로 미국의 부자는 이제 슈퍼리치가 됐다. 미국이 중심에 유럽-일본 부자는 주변에 섰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단적 수준이 됐고 그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고 있다. 유일 패권국 - 제국화된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만든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 헬리콥터 머니로 전세계에 풀린 달러는 세계 인플레-대공황을 예고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시리아에서 실패했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며, 이라크에서는 매일 미군 그린존에 민병대의 로켓이 날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완성한 북과 힘겨운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성장한 중국과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며 경제를 회복하고 현대화한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하고 있다. 그 대결의 반영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의 오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오만이 무너지고 진정한 평화의 체계가 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시2:1-3). 한국교회는 표면에 나오는 뉴스에 좌우되지 말고 현상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공포를 넘어서 그들의 오만 보며,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데서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의 교회 목사·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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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10
  •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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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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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8
  • 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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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11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회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용서운동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용서운동을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회개용서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밝힌다. 참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딛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강하게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 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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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라는 위기의 시대에 선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교회들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잘 대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제 한국사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코로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올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방향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중심/교제중심의 목회를 해 온 것 같다. 교회에 자주 나와 얼굴이 보이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고,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의 문은 닫아야만 했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믿음(?) 좋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의 부흥이 곧 개인 영성의 부흥으로 연결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과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홀로서기 영성훈련을 해야 한다. 말씀묵상(QT)이나 성경읽기, 성경쓰기 등이 좋은 예일 것이다. 필자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성경읽기(10독 이상 15명)와 온라인 성경공부(80여명)가 더 활성화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개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 방향은 숫자로 평가하는 교회 부흥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 영성 훈련을 통해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 교회는 매달 첫 주는 어른들과 교회학교(다음세대) 어린이들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더 이상 세대통합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세대통합 목회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목회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은 사라졌다. 자녀를 교회학교에 맡기고, 교사들에게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 역시 교회에서 다음 세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이들의 신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일하게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가정 중심의 세대통합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담임목사의 메시지로 부모들은 설교를 듣고, 교회학교에서는 이 메시지로 공과를 만들어 현장과 온라인으로 교육을 한다. 주중에서는 이 메시지로 부모님과 자녀들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축복 안수기도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기본이 충실한 목회여야 한다. 교인 숫자 늘리기 목회가 아닌 성도 개개인이 험한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개인 영성을 강화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 되도록 목회해야 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목회에 “위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기감 중부연회 감독·효성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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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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