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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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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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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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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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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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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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 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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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종교는 공동체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문화라는 그릇을 통해 드러내며, 복음의 씨는 문화라는 토양을 전제로 성장한다. 그러기에 선교에서 문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한국 전통문화 속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안에서 성장일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대부분 기독교 교단들은 <대한예수교>나 <한국기독교>로 지칭하면서 ‘기독교’ 앞에 ‘대한’이나 ‘한국’을 넣었다. 이제 기독교는 한민족의 얼과 삶의 자리로 신앙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명절은 조상들의 얼을 신나는 멋으로 그리고 살맛 나는 삶을 찾기 위해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한국교회는 토착화했으면 한다. 그러한 축제 문화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것은 결코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민속명절을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잘 지켜왔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아이들은 꼬까옷을 입고, 어른들은 한복차림에 선물을 마련해서 서로 나누었고, 아침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하느님과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차례(추도예배)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다. 한가위 추석에는 새로 수확한 햅쌀과 햇곡식들로 밥을 지을 뿐만 아니라, 쌀가루로 빚어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가족을 비롯해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놀이가 있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토착화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위기 23:5-14에 무교절 또는 유월절은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이다. 성경주석가에 의하면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의 절기로 보리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추수한 처음 이삭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의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 명절을 받아들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보리 추수감사제사를 드렸다. 단순히 추수감사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 절기를 받아들였다. 땅의 소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보리의 열매로 누룩을 넣지 않고 떡을 빚어 출애굽 사건을 상기케 하였다. 또한 그들 조상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고난의 떡을 먹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왔다.    이와 같이 그 땅의 추수감사제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을 지어서 민족사적 의미를 가지고 유월절로 지키며 그들과 함께 보리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로 만들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그 나라를 건국하게 된 민족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침내 자기네 종교와 문화가 융합되어진 것이다. 자기네 축제 문화에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민속 축제에 신앙고백을 담을 수 있을 만한 교인 수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도 우리 민족과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한국교회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숙은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문화 속에 기독교 선교가 파고 들어가는 ‘문화 선교’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민속명절은 농경사회에서 일어난 문화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변화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했다. 그저 이름뿐이지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뀌어 요식행위로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는 사라지고 있다. 한 조상으로 살아온 민족의 혼과 얼을 엮을 수 있는 문화가 거의 쇠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축제는 열린 마당이다. 이러한 축제에 담기는 의미와 놀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명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누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선도해가는 사회적 책임의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강남대 명예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9-13
  • 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1885년 당시, 문명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개화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어렵고도 힘든 신문 발행을 결심한다.   언더우드는 신문이 조선의 인민을 개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즉 기독교인들이 이 신문을 열독하여 각지역의 의견선도자가 됨으로써 신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함께 전달하게 되면 조선의 인민과 사회가 개화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호 사설은 “누가 와서 우리에게 묻기를 조선이 이 때를 당하여 그중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들이 첫째로 말할 것은 지식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창간호 사설의 제목에서 그 정도로 그는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열망하였다.   그래서 신문 발행을 위해 관련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언문(諺文, 한글)과 양반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두 배웠고, 또 그들의 일상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문에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의 전파뿐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민을 깨우는 수고를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신문 발행뿐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지방에까지 여러 주간 여러 달을 고생하는 전도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 번역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수고를 집중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 역시 수도 없이 시도하였다.   그런 와중에 풍토병이 들었다. 〈그리스도신문〉 1897.8.6.일자에서 “월전부터 원목사께서 열병이 들어 만만 위중한 상태였다 (중략) 목사의 아들 한경이도 병이 들었다. 더욱 황황(遑遑)한 것은 조선 사람도 열병을 두려워하는 병인데, 외국 사람은 수토(水土)가 다른 고로 열병이 들면 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걸렸다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풍토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또 같은 기사에서 “원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구주의 도를 펴라 하시는 명령을 받들고 (중략) 한 때도 한가한 틈이 없이 몸이 매우 곤할지라도 자기 몸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항상 열심을 내어 주를 위하는 일만 하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주의 일을 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역자들의 믿음과 기도와 수고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되었고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신자의 수가 많지 않은 미미한 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를 선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은 무뎌졌고, 오늘날 교회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개독교’로 목사는 ‘먹사’로 교회는 ‘사업장’으로 불리고 있다. 복음과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과 시스템을 우선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 과정에 돈이 ‘억’ 소리 나게 뿌려지고 있다고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믿음을 강조하고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목사는 오히려 홀대를 당할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담보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정신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진 순교자들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예수를 따르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갱신되며 다시금 사회를 선도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론학박사, 전 김포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9-1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총회 기대
    한국교회가 어느덧 총회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언컨텍트 상황에서 맞는 두 번째 총회이다. 삶의 모든 것에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준 코로나19 상황에서 각 교단의 총회는 개최 여부를 놓고 고심하며 분주했던 지난해와는 다른 총회가 준비될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집단이든지 총회는 그 집단의 수준과 역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리이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들끼리 동일한 신앙을 확인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교제하는 기회가 되는 자리가 총회이다. 정체성을 위협하는 도전들에 대한 공동 대처의 장이 되는 것도 총회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전국적 총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임이 될 능력과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자문하며 전국의 모든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며 이제는 ‘위드 코로나(with-corona)’라는 말이 들려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드 코로나’라는 포스트 코비드(Post-Covid,코로나19 이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목회적 과제를 주는 상황인지 목회적 환경의 변화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대면예배가 전면 허용이 되어도 온라인예배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라는 공간과 주일이라는 시간은 가정과 일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주일예배가 가지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응집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올해 장로교 총회는 무엇보다 교회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예배’ 중심의 공동체보다 ‘신앙’ 중심의 공동체가 중요해지고 있다. 온라인예배는 예배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전통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일상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선교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선교의 길이 막혔다. 선교 회복이 절실하다. 다음 세대 회복도 절실한 과제이다. 25년 안에 ‘종교에 대한 경외심 증발’이 미래세대의 특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인터넷의 발달과 휴대전화를 통한 정보의 확산은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과 편견을 갖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회복, 선교 회복, 다음세대 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총회가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복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총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경험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기독교인을 시대와 동떨어진 채 살아가며 상대방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해대는 매우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않아서 생긴 오해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은 삶 속에서의 ‘행함’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행함’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는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에서 진정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루터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장로교회는 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 언제나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장로교회를 경험하고 확인하고 선포하는 이번 총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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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9-05
  • 장로교 총회들에 바란다
      한국 교계에서 장로교의 비중은 아주 크다. 지역으로는 몰라도 나라의 단위로 본다면 전 세계에서 장로교가 이렇게 주도적인 경우가 드물다. 구한말 선교 상황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헌신하며 애썼고 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본다.    2021년은 특별한 해다. 어느 해든지 그럴 것이지만 코로나19를 두 해째 겪으면서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이 지금의 시간을 유별나게 만들었다. 현재의 우리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땅의 기독교에 관한 진단과 처방과 결단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텐데, 위기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설 방법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에서 가장 비중이 큰 장로교 교단들이 가진 책무는 무엇인가?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서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주제를 놓고도 해석과 판단이 영 딴판일 수 있다.    2020년 1월에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현장 교회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 전체에서 교회 갱신이 주요 관심사였다. 교단과 교계 단체들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 교회의 병과 타락을 진단하면서 나름대로 논의하며 변화의 행동도 시도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갱신에 관한 주제는 옆으로 밀렸고 코로나19 감염 및 방역에 관련한 상황이 교계의 중심 주제가 됐다.    코로나 초기의 신천지 관련 사태와 기독교 극우 집단의 행동이 이 주제를 교계와 사회의 중심에 놓은 주요 원인이었다. 이른바 ‘대면예배와 비대면예배’에 관한 논의와 논쟁에서 정부의 방역 조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일부 교회의 행동도 교계와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차별 금지에 관한 법안과 평등에 관한 법안에 관한 주제도 현재 한국 교계의 중심 사안이다.    여기에 건강가정기본법안도 흐름으로 보아 한 묶음이다. 위 법안들의 내용 자체에 입법의 상식에 벗어나는 과잉입법의 논란도 있지만 교회로서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하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법안들을 반대하는 절박한 이유다. 최근 교계 단체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코로나 방역과 동성애 관련 법안들에 관한 논란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교회는 그 본질상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며 세상을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 현상에 관한 교회의 대응적 행동은 기독교 윤리에서 참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동이 교회의 자기 성찰과 갱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관한 분석과 판단, 입장 표명과 행동은 그 집단이 가진 가치관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66권 성경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 성서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존재다.   코로나를 20개월이나 겪고 있는 지금 한국 교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교세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단들이 교단 총회를 앞두고 있다. 장로교단들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장로교회를 신학 전통을 따라 말할 때 ‘개혁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정신에서 저 유명한 말이 나왔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바로 지금 교회가 약해지고 병들고 타락하는 것을 돌이키는 개혁이 시급하다. 지금 장로교단들이 그 멋진 별명, 그 이름값을 할 때다.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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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8-26
  • 백신접종과 교회 방역매뉴얼 문제점
      섬기는 성안교회에서 지난 주일까지 전체 교역자와 성도 70%가 백신 접종 완료 되었다.    젊은 교역자 중에는 백신 접종 후 잠시 통증의 시간을 지나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교역자들이 백신을 맞은 이유는 단순하다. 예배의 온전한 회복과 당당한 예배 인도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주의 종의 되는 이유는 예수만 보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에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고 위험 군이다. 실제 어느 교인은 “목사님 제 옆에 오지 마세요.” 라고 농담도 한다. 성안교회의 백신 접종률은 경기도 지역 백신 접종율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1차 접종만 해도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교회만 해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워지며, 교회 여러 활동도 편해진다.   백신 접종자들끼리 만나는 모든 소그룹 모임도 정상화 될 듯하다. 외적으로는 확진자와 접촉 하더라도 자가 격리가 면제되며, 해외여행 후 격리도 면제가 된다. 식당을 이용할 때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우며, 외부 활동 시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다. 이전에 비하면 완전 해방되는 느낌일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 위험한 것을 왜 맞아요? 그런 분들은 반대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위험한 코로나19는 왜 안 무서워할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고, 사람과의 만남에 긴장을 했으며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리 두기 단계의 공포심을 체감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주변은 초토화가 되고 마녀 사냥을 당하였다.   사람은 3개월 이상 자유를 잃어버리면 프레임에 걸리고 감각도 마비가 되어 길들여진 짐승처럼 순응을 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이제는 자유를 찾을 때이고 그 기회가 백신이라면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몸이 약하니 백신을 맞으면 안돼요!”라는 말과 “몸이 약하니 코로나19 위험이 크므로 꼭 백신을 맞아야 해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처럼 성안교회는 방역당국 준칙 잘 따르고, 백신 접종도 앞장서서하고 있으므로 할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4단계서 19명으로 제한한다는 교회 방역 매뉴얼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교회는 유급 직원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직장이다. 모든 직장은 열려 있고 출근을 막지 못한다. 모든 종업원은 인원 계수가 안 된다. 유급 직원과 관계없는 인원 적용은 노동법에 저촉된다. 그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책임을 질것인가?   둘째, 모든 기관은 기본적으로 열려 있다. 단 두 군데, 술집과 교회만 타킷 방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평등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셋째, 예배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청하는 것이 아닌 드림공동체다. 그래서 모든 예배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 예배의 매뉴얼을 국가가 정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심각하게 무너뜨린 것이 된다.   넷째, 백신 인센티브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70%면 국가적인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교인 중 백신 접종 완료자로만 예배를 드리게 한다면 집단 면역의 테스트가 되기도 하며 모든 경제도 살아난다.   다섯째, 이제 교회들은 예배 사수와 교회 존폐의 문제의 막다른 길에 있다. 곧 생존을 위한 거룩한 반격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전야가 지금의 시간이다.   다행히도 방역당국에서 지난 7월 30일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서 일반교인도 참석할 수 있는 대면 예배로 전환하고, 동일 시설 내 종교활동 공간이 여러 개일 경우, 동시간대에 공간별 수용인원의 10% 범위 내로 모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방안이다.단, 방역수칙 위반 시설은 제외키로 했기에 교회들이 솔선수범해서 방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 더 힘을 내자 /성안교회 목사, SAM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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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8-08
  • 성인된 자녀와 함께 살기
      아는 분이 그런 말을 했다.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속에서 불화통이 터진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성인이 된 자녀를 집에 둔 부모들은 위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원하는 직업과 부모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등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 자녀가 부모의 기준에 맞추어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할 때 부모들은 자녀들의 모습을 답답해하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과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데 부모님의 따가운 시선과 불편한 잔소리는 성인 자녀로 하여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로 여기며 통제하려 고 하는 부모님의 의도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간섭과 부정적 편견이라고 여기며 부모님에게 원망을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 일부 자녀들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기 보다는 가정에서 부모님이 제공하는 많은 물질적인 제공은 잘 받으면서 부모님의 간섭이나 통제는 전혀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강한 부모님 밑에서 함께 살면서 무기력한 모습마저 보이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렇듯 성인이 된 자녀와 부모가 함께 살아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생활비가 많이 들고 집값이 많이 오른 현재를 살아가는 자녀들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부모님과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인의 자녀들과 부모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각 가정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동안의 가정의 고유한 역사와 현재의 발생하는 이야기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설명함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된 아이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계선(Boundaries)을 잘 설정하는 것이다. 경계선을 설정할 때는 물론, 아이들과 함께 회의를 해서 서로가 합의를 하면서 어느 정도 현실 가능하고 동의한 것을 중심으로 규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칙을 세워 놓으면 함께 의논할 때는 ‘예스’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규칙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지켜지지 않았을 때마다 모니터링을 하고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지켜지지 않을 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키기로 한 규칙이 느슨해질 때는 다시 가족회의를 통해서 지켜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왜 그것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두 번째로 성인 아이들과 잘 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직 독립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나의 통제에 들어있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그들이 성인으로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자녀에 대해서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비폭력 대화’의 형태로 존중하는 의사소통 방식으로 상대를 공감으로 이해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서로를 편안하게 만든다. 비폭력 대화는 마음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듯이 표현하면서 나의 감정과 필요를 상대방에게 알게 하여 부탁으로 끝맺음을 하는 대화법이다. 성인이 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런 대화법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훨씬 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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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8-06
  • 포스트팬데믹 처치의 전략 및 실례
      지난 1년 4개월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기독교 예배에 직격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의료목회상담’이다. ‘의료’란 육신적·과학적·이성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육신적 원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목회’는 영적·신학적·신앙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영적 원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상담’은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와 이것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목회상담’이란 이 세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의료’ 또는 ‘의학’이라고 하는 일반은총의 부분과, ‘목회’ 또는 ‘목양’이라고 하는 실천신학적인 부분, ‘상담’ 또는 ‘은혜’를 뜻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부분이 그것이다.   ‘메디컬처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목회의 본질 중 하나인 ‘의료목회상담’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시적인 사역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메디컬처치의 개념은 소강석 목사님의 아이디어에서 첫출발을 했다.   전염병과 교회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이어져 왔다. 교회가 이 전염병, 즉 팬데믹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교회의 명암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곤 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메디컬처치의 정신은 이미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교회에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를 보자. 로마제국 시대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이웃 곁에 있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때 그들을 보면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ανοι)인데, 이는 ‘함께 옆에 있는 자’, ‘곁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의 위급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자기희생적 사랑을 주님의 이름으로 실천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사랑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었고 마침내 기독교 공인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한 큰 재앙, 즉 중세교회의 과오, 유대인 학살 등이 있었다.   특별히 중세교회의 일부 사제들은 전염병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막아보자고 하면서 무조건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심판이라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팽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미신적 종교 행위와 치료법들이 난무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현명한 판단을 하였다.   칼빈은 병든 자들을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한 의료 서비스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시에서 의사들의 급료를 담당하게 하고, 교회와 국가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만이 아닌 교회도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성 바깥쪽에 구빈원을 따로 운영하여 치료하기도 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하였다.   구한말 한국 초대교회 당시, 1895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언더우드 등 서울의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새문안 교인들, 제중원의 에비슨 원장 등이 서울 근교의 큰 막사를 콜레라 병원으로 정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부는 사대문에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 하는가?’라는 벽보를 붙였다고 한다. 이로써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고, 후원금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한국 초대교회는 전염병에 맞서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이는 2-3세기 로마 시대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파라볼라노이’라고 불리며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서 로마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 관리해야 한다. 이는 많은 노력과 동참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메디컬처치는 각 교단마다 교리적 차이를 뛰어넘는 객관적 사실(과학적·의학적 팩트)에 기초하기에 한국교회가 연합하기에 수월하다. 한국교회가 하나의 리더십, 하나의 메시지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 대 사회적·대 정부적·대 언론적 대응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자 교회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사역이다. / 다건연세내과 대표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7-12
  • 성과 결혼의 기독교적 의미와 평등법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죄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처벌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그동안 끈질긴 입법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를 중심한 많은 시민들의 반대로 지금까지는 잘 저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이상민 의원을 대표발의자로 하여 차별금지법은 평등법이란 이름표로 바꾸어 달고 이전보다 더 거세게 다시 한 번 시도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법적 문제점들은 차지하고, 기독교인이 이 법을 반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영혼의 구원”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생(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요 5:39). 이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으로 신적 영원한 생명이다. 성부의 뜻은 성자를 믿는 자에게는 성자 안에 있는 성자의 생명을 그들에게도 주어 그들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가지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얻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참여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요 6:40; 요일 1:1-3).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에게도 이 생명을 주어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 구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인간에게 다시금 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을 회복해 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항상 영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인간에게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도 칼빈은 영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칼빈에게 영생은 인간 창조와 구속의 목적으로서,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지고한 복락이고 영원불멸의 목표로 이해되고 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 이렇게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창1:26-28).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곧 서로 구별되는 삼위가 관계적 방식으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사랑의 사귐을 사귐으로 하나가 되고 있는 것처럼, 서로 구별되는 남자와 여자가 상호관계 속에서 사랑의 사귐을 사귐으로 생명의 연합을 이루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한 남자에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말 2:15). 그러므로 성경은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됨과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에 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아닌 동성간의 결합이나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성들을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평등법이 말하는 것처럼 인권이 아니라 기실 가장 반인권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과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바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저버리게 하는 반기독교적이고 반신앙적인 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신앙의 본질에 위협을 당할 때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을 지켜왔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평등법 또한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로 기독교는 순교의 정신으로 이를 막아내야 할 것이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7-09
  • 만연한 거짓 바이러스, 정직 백신으로 치료해야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인 코로나19에 의해 우리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한국 기독교 역사 처음으로 교회 스스로 모이는 예배를 폐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있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도 변종 감기 바이러스 하나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사회 전체가 감염 공포에 떨며 예배를 위한 모임조차 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과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겠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이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필자는 이번 사태를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의 바이러스를 정직의 백신으로 치료하여 다시 정한 마음과 성결함을 통해 정직의 영을 회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한 경고라고 믿는다.   코로나19 자체도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거짓)이고 한국 사회에 이를 본격 퍼뜨리게 된 것도 거짓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였다. 거짓은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악으로 미혹하기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다. 아담을 유혹한 사탄의 간교한 거짓으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거짓말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반대로 정직한 사함은 기뻐하시고 후손까지 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시편 112:2)   필자가 흥사단 투명본부 윤리연구센터장으로서 총괄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직지수 2019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성인 정직지수가 60.2 로 청소년 정직지수 77.3 보다 모든 영역에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의 거울이라는 어른이 정직 윤리적인 측면에서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결과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 는 항목에 청소년의 50% 정도가 그렇다고 응답하고 있다.   정직지수 응답자 중엔 기독교인도 다수 있고 2020년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10명중 7명이 ‘목사와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응답의 이유는 ‘목사와 기독교인이 말따로 행동을 따로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에서 조차 정직과 윤리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짓과 위선이 팽배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경배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실까? ‘악을 행하면서 성회를 여는 것을 참을 수 없다’(이사야 1:13)   교회와 기독교인이 정직할 때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시편112:4) 지금 정직함으로써 사회에서 당장은 손해를 감당해야 하고 때론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거짓 바이러스가 만연해 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정직이란 백신으로 치료하여 건강한 사회로 발전케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경고 메시지를 깨달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 (Coram deo)’ 의 정신으로 정직 회복 운동과 정직 실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때이다. /국제미래학회 회장·한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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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한국교회의 회복은 근대 역사를 이룬 ‘영향력’의 회복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찬송가사의 한 대목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예배라는 초유의 경험을 하는 교회의 현실을 보며 탄식하듯 나오는 외침 같아서 자꾸만 입가에 맴돈다.    주변에서는 코로나 팬데믹과 언컨택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라고 한다. 그 변화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고 한다. 위기와 불안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교회는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처럼 인식되어 더욱 큰 지탄을 받고 있어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다.    역사학자 케네스 라투레트는 “영향력 면에서 본다면,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만큼 큰 영향을 끼친 단일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했고, 아놀드 토인비도 “우리 서양문명은 기독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역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배재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등 근대교육, 세브란스병원, 이화여대병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등 근대의료, 사회복지의 시작인 태화복지재단 등 기독교의 영향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경을 통한 한글보급으로 문명개혁을, 여성들의 교회를 기초로 한 사회활동으로 평등구현을, 근대교육으로 교육혁신을, 근대의료의 시작으로 의료혁신을, 최초의 한글점자개발로 언어혁신을, 민족과 독립운동으로 나라사랑을 이룬 것이 한국교회이다. 교회는 변화의 아이콘이었고, 개혁과 혁신의 주역이었다.    한국교회의 회복은 복음으로 근대역사를 이룬 그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더 힘들어진 교회의 상황은 기회가 된다. 이 기회를 살려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에클레시아’로 표현했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의 총회인 민회를 가리키는 말로써 어떤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부름 받음 시민의 모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사도 바울 당시 교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 ‘오이코스’(성도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나 ‘회당’(유대교인들의 예배와 교육장소)이 있었는데 굳이 ‘에클레시아’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교회는 건물과 조직을 뛰어넘는 공동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신분과 인종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평등한 민주적 모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동안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질서(New normal)’이다. 사도 바울은 그 ‘새로운 질서’를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서 찾았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것에서 찾았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도서1:9)이라는 말씀이 틀리지 않다.   ‘새로운 질서’를 요구받는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본질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면 된다. 방법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회복은 본래의 것을 되찾는 것이다. 영어로는 ‘다시 덮는다(Re-covery)’는 것이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덮을까?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좋지 않을까?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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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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