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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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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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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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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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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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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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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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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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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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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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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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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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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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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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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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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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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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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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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쉴즈 간호선교사만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바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변함없이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우리는 당시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 개월치의 방세를 줌으로써 그들을 도와야 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회갑연에서 받은 선물을 세브란스 병원 안에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식 급수대 3개를 설치하는데 사용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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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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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 이슬람과 공산주의와 이단과 동성애는 지구촌 교회를 일시에 허무는 2백 마리의 여우와 같이 하나님의 포도원 담장을 허무는 사탄의 세력이다. 이미 이들의 공격으로 무너진 서구교회는 재건이 불가능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자취를 감춘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그루터기가 되어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을 신속하게 회복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인 일부 목사는 세상과 타협을 하기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장로들이 깨어서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굳게 지켜야 한다. 신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슬람 대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슬람화되면 교회는 더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7대 교회는 다 무너지고 주저앉고 돌무더기만 가득하다. 이것이 이슬람의 실체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원어를 들먹거리면서 이슬람을 샬롬이나 살렘과 같은 평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랍어 동사 아슬라마("복종시키다")의 동명사인 이슬람은 "복종하기"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아랍어 사전)이고, "알라와 그가 준 율법에 복종하는 것"(꾸란어휘사전)이고, "평화와 복종과 순종, 알라가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알라의 가르침과 인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한국이슬람교중앙회)이다. 곧 이슬람은 무함마드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종교이므로. 평화란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복종을 강요하는 이슬람은 무자비한 복종을 모토로 지하드(성전 聖戰)를 자행하는 폭탄테러의 주범이다. 기독교보다 600년 후에 나타난 이슬람은 신구약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은 호전적인 종교이다. 코란이 성경을 들먹거리고 다수 성경인물을 묘사하지만 면밀히 검토하면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이다. 이슬람이 성경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기독교인에게 포교하려고 의도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는 이단이다. 이단은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집요하게 정통교회를 뒤흔들고 나온 사이비 집단이다. 이단은 처음에는 정통교회의 전통에 편승하다가 점차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정통교회와 같은 것 같다가 마지막에 다른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한국교회는 절반 이상이 이단이다. 유라시아와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과 쿠바에 종교의 자유가 없지만, 이미 많은 이단이 활동하면서 공산당에 신물을 느낀 주민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전도도 금지되어 교회가 허물어지고 신앙의 대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에 편향된 영혼이 죽어가고 기독교문화마저 녹슬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생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신학생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자기들이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의 장로이다. 이 점에서 장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며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는 분이므로, 인사문제를 목회자에게만 일임하지 말고, 인선 위원회에 들어가서 신학후보생들을 검증할 수 있어야한다. 평생 동안 한 교회에서만 섬긴 장로의 영적 지도력은 현대 목회에서 아주 필요한 부분이다. 과거 장신대에 수도 없는 데모가 있을 때마다 장로들이 ‘저런 문제아를 교회에서 청빙하면 안 된다’라는 목소리를 높일 때, 신학생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중하던 일이 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한국교회 정론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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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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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적
-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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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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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적
-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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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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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선언한 후 18개월이 지났다.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듯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는 반복되는 비대면 예배와 참석 인원 제한에 부딪혀, 모여서 예배하던 당연한 것들이 오히려 지탄거리가 되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위드코로나’가 선포되어 일상으로의 회복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교회마다 터널 속에 갇혀 그냥 주저앉아버린 성도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일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일부의 성도들에게 예배의 회복만은 더딘 것 같다. 반면, 빠른 일상으로의 회복에 발맞추어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예배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기도할까?’, 하는 마음으로 늘 성전을 사모했던 성도들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소망의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왔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속 두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연 18개월 동안 그 긴 터널 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지내왔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좌절하고 낙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였는가, 아니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성도였는가 말이다. 1620년,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이미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중 51명이 목숨을 잃었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해서는 원주민들의 공격과 맹수의 위협,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남은 자의 절반이 죽어 49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땅을 일구어 작물을 심고 산으로 나가 짐승들을 사냥하며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삼으면서 처절한 생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첫 번째 맞이하는 늦은 가을, 수확한 작물을 들고 하나님께 드린 감사예배는 그들이 길 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와 죽음을 뛰어넘은 생존의 희망의 빛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단순히 추수만을 위한 감사가 아니라 먹을 양식을 지속적으로 수확함으로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였다. 추수는 한 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지켜 주실 것에 대한 예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공포 속에 좌절한 사람은 왜 없었겠는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며 원망, 불평했던 것처럼 그들은 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길고 긴 터널을 뚫고 한발 한발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감사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전진하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날마다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와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린 자에게 주는 따뜻한 밥 한 끼의 감사는 그 차원이 다르듯이, 고난과 어두움, 시련, 고통을 뚫고 나왔을 때의 진짜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생존의 위협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를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추수감사절이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 내고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 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있다.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더욱 감사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축원한다. /서산 이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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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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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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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 미래가 있다. 감사하는 생활에는 고난의 복병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역경과 거짓도 감사하는 사람을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할 감사를 배우며 문제를 지나친다. 근심과 염려에 붙잡히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 따위는 가벼운 두통쯤으로 여긴다. 이러한 삶의 주인은 바로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어떻게 의롭게 된 자들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바로 감사하지 않을 때 죄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훨씬 빛을 얻을 것이며 더 많은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영역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왜 믿는 자의 감사가 중요한가? 바로 감사의 영적인 일은 천국을 침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마다 감사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에 찌든 마음에는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귀신의 영이며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약3:15). 감사가 없는 마음은 오직 스올일 뿐이라고 했다(시6:5). 아무리 믿음이 크다고 해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스올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발현이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하는 행위는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감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통한 시인이며 고백이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선포할 때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에 아벨은 참된 예배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아벨은 실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감사로 예배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감사하며 양을 잡아 피로 희생의 예배를 드림으로 주의 일을 시인한다. 살아 있는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자의 한 사람인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예배의 속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자같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그의 믿음이 그를 증명하여 믿음으로 가인과 다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예배에 하나님의 완전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헛된 것이다. 완전한 감사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믿음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인은 현재를 감사했다. 자기의 농사지은 것으로 자기의 현실의 만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다. 거기에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연약함 때문에 감사의 행위에 희생이 따라오지 못하며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농사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드릴 감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미래가 없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아벨의 노선을 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한다. 베드로 같은 고백과 시인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감사는 천국을 침노한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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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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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치유’ 통해 사랑과 건강을 전합니다
- 나는 1967년 꽃 피는 춘삼월 장손이신 1925년생 아버지와 1924년생 어머니의 늦둥이로 경기도 남양주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출생을 말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치유 환경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장손 집안이었기에 전통의례와 생활풍습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누리며 성장했고, 또 농촌 생활 가운데 몸으로 배운 몸 공부가 풍부하였다. 24절기의 순환, 낮에 해와 밤하늘 별과 달과 은하수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살았고, 땅의 소중함,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가치를 남다르게 체감하면서 성장한 것이 자연치유의 큰 원동력이 됐다. 아마도 이 시절 경험한 것들이 장석종이 창안하여 펼치고 있는 “형상체질”과 “체질 푸드테라피” 그리고 “오감멀티테라피”의 시작이라 여긴다. 아버지하면 청년시절 만주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신 말씀, 한국 전쟁 당시 염병이든 고모를 지게에 지고 피난 가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키우셨던 우리 집 소는 말을 가르켜서 부리는 소였는데 송아지가 나면 코뚜레를 뚫고 말을 가르켜서 일반 소보다 비싼 가격에 우시장에 내셨던 일들도 기억된다. 겨울에 썰매를 타려면 논에 물을 대어야하는데, 벼를 베고 벼 포기의 밑 부분이 높아서 높은 벼를 낮으로 자르시고 물을 대어 겨우내 썰매를 탓던것도 기억된다. 어머니는 고향이 전라도 나주셨고 그래서인지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셨다. 지금도 나에게 소울 푸드인 들기름에 달달볶는 머위나물과 소금간이 잘 밴 오곡 찹쌀밥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먹을거리라 여긴다. 장손 집 맏며느리셨기에 명절 때 가장 먼저 약주술을 담그고, 그 다음에 엿을 고시고, 두부 만드시고, 묵을 쑤시고, 그리고 소당질 하시는 것을 옆에서 다 거들어야 했던 나는 지금도 묵의 달인으로 내가 쑥 묵은 차지고, 다른 묵에 비해 맛이 참 좋다. 어머니는 속병이 있으셨다. 속병은 소화 안 되는 위장병인데 그 원인은 미역국이었다. 옆집에서 생일이라 미역국을 같이 먹자고 하여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드시고 급체를 한 이후부터 평생을 속병으로 고생을 하셨다. 자연치유를 공부하면서 그 원인을 정확히 찾았는데 첫째는 어머니 체질이 수형인으로 미역국이 잘 맞지 않은 것, 둘째는 심장이 약한 분이셨기에 심장으로 인한 심하통 증상을 위장 증상으로 여긴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고생하신 심하통을 통해 나는 자연치유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국내최초, 최고를 지향하는 자연치유 인재의 숲”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번 개강 때 자연치유의 정의를 “문제를 알고 그 문제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나의 의지와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을 통해 회복되고 소생되는 것이 자연치유다”라고 설명하였다. 간략한 두 줄의 자연치유의 정의는 1987년 자연치유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자연치유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간증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헛수고 일 때가 참 많다, 또 훌륭한 자연치유사역자를 만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역시도 치유와 회복이 그리 크지 않다. 치유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자연치유는 이뤄질 수 없다. 또 의지가 없는 자연치유는 사상누각이라 여긴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가 있듯이 병을 낳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자연치유력은 발휘가 된다. 예를 들어 아토피로 고생하는 사람이 그 원인이 음식에 있는데 나는 맛있는 것 마음껏 먹고 피부 가려움은 감내하겠다면 아토피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 의지가 참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치유를 크게 자연적인 치유(Spontaneous Healing), 자연을 통한 치유(Natural Healing), 자연적인+자연을 이용한 치유(Naturopathy) 3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적인 치유는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불균형들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생명력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제때 배설되어야한다. 자연을 통한 치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치유하는 것으로 피부상처에 아로마 라벤더를 바르는 것, 구내염이 있을 때 프로폴리스를 바르는 것등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런 자연적인 그리고 자연을 이용한 치유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자연치유학이라고 본다. 장석종 박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오감을 통해 수용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오감멀티테라피”를 주장한다. 그래서 출간한 책 제목도 장석종 박사의 오감멀티테라피가 있다. 눈코귀입촉 오감을 활용, 눈과 관련된 칼라테라피, 눈의 홍채를 이용한 홍채영양학 코와 관련한 아로마테라피. 귀를 이용한 귀분석상담학, 사운드테라피, 입을 이용한 푸드테라피, 촉감을 이용한 경락치유학, 근신경치유학, 그리고 영성과 감정과 관련한 감정치유 배치 플라워에센스, 에너지테라피등을 정립하여 치유에 접목하고 있으며, 이 철학이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커리큘럼에 담겨져 자연치유학 석사, 박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장석종 박사는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 학회장이기도 하다. 자연치유 관련 논문을 투고하였지만 심사가 불가하다고 반려되는 경험을 하고는 자연치유학 이론 정립과 대중화를 위한 학회가 필요하고 여겨,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를 설립하여 자연치유 논문 발표와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매년 11월에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귀분석상담사 자격증, 홍채영양학 자격증을 등록하고 자격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자격을 학회에서 운영하므로 보다 전문가들이 교육하고, 또 교육생들은 전문화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여긴다. 또 학회에서는 자연치유 도구와 교육 교재 발행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로 기존의 이혈(이침)을 업그레이드 하여 포스에너지볼을 개발하였다. 회원들에게 우수한 제품을 비용적 부담을 줄여 공급하고 있으며, 귀(EAR)용, 바디(BODY)용, 그리고 선교사용을 개발 완료하여 상표등록을 마쳤고 현재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교육교재로 귀건강분석상담학 기본과정 교재를 출간하였고 홍채영양학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서울장신대 자연치유선교대학원장·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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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치유’ 통해 사랑과 건강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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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인생
- 기독교교육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교수님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가장 중요하게 일러주신 제일의 교훈이 무엇인가요?” 교수는 한 주간이 지나 수업시간에 “지난 1주일 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신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 살 것인가?’라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삶은 몇 미터 되지 않은 수족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시사철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외부 영향력이 있음에도 흔들림 없는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은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기적과 비유, 많은 말씀과 행동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뒤섞여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주님은 우리가 떡으로, 옷으로, 재물로, 얻은 명성으로, 자기 의로, 자기 성취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 되도록 만들려고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믿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가보지 못한 길로 부르셨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생각, 아버지 데라가 가르쳐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는 영적 경험이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광야를 건너게 하셨다. 모세는 그 당시 낙타와 함께 광야를 건너던 대상들처럼 광야를 한 번도 건너 못 적이 없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가게 만든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경험이 필요하고 또 그 경험이 소중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때로는 인간적인 조건을 한 걸음으로 능가하시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길을 막히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는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스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선교대회 주강사로 초청받은 이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그 가정에 첫 아이 데이비스가 태어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자 아기의 밤낮이 바뀌었다. 부부가 일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생활 리듬이 깨져서 신경도 많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오르티스 목사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밤 녀석을 좀 때려줘야겠어. 그래야 녀석이 밤에는 자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밤에 아빠는 울고 있는 아기 침대로 갔다. 그러나 아기가 아빠를 보자 옹알이를 하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이 녀석을 봐요. 이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 그때 오르티스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의 관계를 다시 깨달았다. 아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아기의 삶과 생명은 단 하나, 부모에게 붙어 있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이다. 믿음은 무슨 큰 업적을 세워서 받는 표창장이 아니고, 열심히 어디 다녀서 얻은 자격증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신뢰를 보내며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주님에게 붙어 있어 주님 방식 따르는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걷는 길이 기울어진 듯이 어렵지 아니한가?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사랑으로 긍휼로 대해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숨을 쉬며 살 수 있다. /고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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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 종교는 공동체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문화라는 그릇을 통해 드러내며, 복음의 씨는 문화라는 토양을 전제로 성장한다. 그러기에 선교에서 문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한국 전통문화 속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안에서 성장일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대부분 기독교 교단들은 <대한예수교>나 <한국기독교>로 지칭하면서 ‘기독교’ 앞에 ‘대한’이나 ‘한국’을 넣었다. 이제 기독교는 한민족의 얼과 삶의 자리로 신앙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명절은 조상들의 얼을 신나는 멋으로 그리고 살맛 나는 삶을 찾기 위해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한국교회는 토착화했으면 한다. 그러한 축제 문화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것은 결코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민속명절을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잘 지켜왔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아이들은 꼬까옷을 입고, 어른들은 한복차림에 선물을 마련해서 서로 나누었고, 아침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하느님과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차례(추도예배)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다. 한가위 추석에는 새로 수확한 햅쌀과 햇곡식들로 밥을 지을 뿐만 아니라, 쌀가루로 빚어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가족을 비롯해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놀이가 있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토착화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위기 23:5-14에 무교절 또는 유월절은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이다. 성경주석가에 의하면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의 절기로 보리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추수한 처음 이삭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의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 명절을 받아들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보리 추수감사제사를 드렸다. 단순히 추수감사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 절기를 받아들였다. 땅의 소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보리의 열매로 누룩을 넣지 않고 떡을 빚어 출애굽 사건을 상기케 하였다. 또한 그들 조상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고난의 떡을 먹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왔다. 이와 같이 그 땅의 추수감사제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을 지어서 민족사적 의미를 가지고 유월절로 지키며 그들과 함께 보리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로 만들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그 나라를 건국하게 된 민족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침내 자기네 종교와 문화가 융합되어진 것이다. 자기네 축제 문화에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민속 축제에 신앙고백을 담을 수 있을 만한 교인 수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도 우리 민족과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한국교회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숙은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문화 속에 기독교 선교가 파고 들어가는 ‘문화 선교’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민속명절은 농경사회에서 일어난 문화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변화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했다. 그저 이름뿐이지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뀌어 요식행위로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는 사라지고 있다. 한 조상으로 살아온 민족의 혼과 얼을 엮을 수 있는 문화가 거의 쇠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축제는 열린 마당이다. 이러한 축제에 담기는 의미와 놀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명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누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선도해가는 사회적 책임의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강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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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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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 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1885년 당시, 문명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개화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어렵고도 힘든 신문 발행을 결심한다. 언더우드는 신문이 조선의 인민을 개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즉 기독교인들이 이 신문을 열독하여 각지역의 의견선도자가 됨으로써 신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함께 전달하게 되면 조선의 인민과 사회가 개화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호 사설은 “누가 와서 우리에게 묻기를 조선이 이 때를 당하여 그중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들이 첫째로 말할 것은 지식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창간호 사설의 제목에서 그 정도로 그는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열망하였다. 그래서 신문 발행을 위해 관련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언문(諺文, 한글)과 양반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두 배웠고, 또 그들의 일상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문에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의 전파뿐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민을 깨우는 수고를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신문 발행뿐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지방에까지 여러 주간 여러 달을 고생하는 전도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 번역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수고를 집중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 역시 수도 없이 시도하였다. 그런 와중에 풍토병이 들었다. 〈그리스도신문〉 1897.8.6.일자에서 “월전부터 원목사께서 열병이 들어 만만 위중한 상태였다 (중략) 목사의 아들 한경이도 병이 들었다. 더욱 황황(遑遑)한 것은 조선 사람도 열병을 두려워하는 병인데, 외국 사람은 수토(水土)가 다른 고로 열병이 들면 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걸렸다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풍토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또 같은 기사에서 “원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구주의 도를 펴라 하시는 명령을 받들고 (중략) 한 때도 한가한 틈이 없이 몸이 매우 곤할지라도 자기 몸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항상 열심을 내어 주를 위하는 일만 하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주의 일을 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역자들의 믿음과 기도와 수고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되었고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신자의 수가 많지 않은 미미한 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를 선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은 무뎌졌고, 오늘날 교회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개독교’로 목사는 ‘먹사’로 교회는 ‘사업장’으로 불리고 있다. 복음과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과 시스템을 우선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 과정에 돈이 ‘억’ 소리 나게 뿌려지고 있다고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믿음을 강조하고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목사는 오히려 홀대를 당할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담보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정신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진 순교자들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예수를 따르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갱신되며 다시금 사회를 선도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론학박사, 전 김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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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