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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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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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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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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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 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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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14
  • [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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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6
  • [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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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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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회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용서운동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용서운동을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회개용서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밝힌다. 참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딛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강하게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 백석대학교 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2-08
  • 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라는 위기의 시대에 선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교회들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잘 대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제 한국사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코로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올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방향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중심/교제중심의 목회를 해 온 것 같다. 교회에 자주 나와 얼굴이 보이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고,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의 문은 닫아야만 했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믿음(?) 좋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의 부흥이 곧 개인 영성의 부흥으로 연결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과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홀로서기 영성훈련을 해야 한다. 말씀묵상(QT)이나 성경읽기, 성경쓰기 등이 좋은 예일 것이다. 필자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성경읽기(10독 이상 15명)와 온라인 성경공부(80여명)가 더 활성화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개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 방향은 숫자로 평가하는 교회 부흥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 영성 훈련을 통해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 교회는 매달 첫 주는 어른들과 교회학교(다음세대) 어린이들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더 이상 세대통합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세대통합 목회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목회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은 사라졌다. 자녀를 교회학교에 맡기고, 교사들에게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 역시 교회에서 다음 세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이들의 신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일하게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가정 중심의 세대통합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담임목사의 메시지로 부모들은 설교를 듣고, 교회학교에서는 이 메시지로 공과를 만들어 현장과 온라인으로 교육을 한다. 주중에서는 이 메시지로 부모님과 자녀들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축복 안수기도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기본이 충실한 목회여야 한다. 교인 숫자 늘리기 목회가 아닌 성도 개개인이 험한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개인 영성을 강화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 되도록 목회해야 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목회에 “위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기감 중부연회 감독·효성중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2-02-03
  • 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코로나 19가 한창이지만, 우리나라는 2021년에 선진국 지위로 올라섰고, 여러 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덕분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반대로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는 비 영어권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은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특별히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활동하는 가상 세계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다. 컴퓨터 상에서 활약하는 가상의 인물인 인공 인간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상공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메타버스의 세계 속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인 가상 자산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고, 디지털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는 기후 위기라고 하는 매우 심각한 위협 앞에 놓여 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와 과제 앞에서 우리의 중장기 계획은 어떠해야 하며, 또 2022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시편에 있다.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 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급작스런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당황하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삶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불려갈 우리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까? 준비 없이 당하고야 마는 죽음, 삶의 끝일까? 아니면 충실한 일상을 살았기에 도달하는 삶의 완성일까?   우리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한다. 가슴 설레며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계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설렘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나눠야 할 것 같다. 산맥을 뚫고 나오는 뜨겁고 뭉클한 더 빨간 햇덩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만,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폭설과 깊은 울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에 더하여, 우리의 삶 한구석에서 늘 우리를 떨게 만드는 불안에 대해서도 속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새해를 여는 날들이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걱정스런 말들도 나누어야 한다.   이 모두가 생명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지고, 믿음이 굳세지고, 사랑이 깊어지며, 주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믿는다. 2022년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북한다./생명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2-01-26
  • 한국교회여, 평화통일의 ‘마중물’ 역할을 하라
      지금의 시대를 구약으로 말하면 메대가 쇠하고 파사가 흥하는 시대와 같다. 그래서 이스라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벨론 유수가 끝난 것은 시대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전환기인가? 무엇보다 ‘제국’이 쇠하는 시대이다. 1980년 대 후반 냉전이 무너지고 미국의 일국패권이 지속됐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은 쇠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서도 철수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대선에서도 ‘핑크 타이드’의 바람이 불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은 내부의 분열로 사실상 ‘내전상태’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위상이 그전만 못하다. 이 모든 변화들이 그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미국이라는 제국의 쇠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평화통일의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그 첩경은 종전선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종전선언에 미온적인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여전히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무력 강화로 나가고 있다. 그나마 종전선언에 북한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전선언과 평화의 불씨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두 갈래로 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조야를 설득하고, 미국교회와 시민단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미국교회는 대단히 평화지향적이다. 또 미국의 시민사회를 움직여 집권자들이 평화의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관계에서 남한의 교회들은 북한의 교회들과 관계개선과 교류에 힘써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북미관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   그러나 교류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한국교회는 평화와 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의 힘이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신앙은 거기에 희망과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통일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연합기구이건 개인이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운동을 전개해야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분명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협은 그동안 한국교회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그만큼의 역사적 데이터가 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한교총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연합기구로 성장했다. 과거 한기총이 보여줬던 극단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짧기에 한계는 분명 있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교회협과 실천력이 있는 한교총이 서로 함께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   또한 현장운동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동안 노력에 비해 특별한 성과가 없었기에 허무감과 회의감이 팽배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다시 현장이 살아나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며 희망을 놓지 말자.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이 세대는 평화통일운동에 관심이 없고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져있는데,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자기전통을 전수해줘야 한다. /목사·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1-13
  •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목양실을 둘러보면 벽에 걸어 놓은 교회 달력 외에는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해가 도착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새는 하늘을 날았고, 말은 들판을 달렸고, 하다못해 굼벵이도 열심히 구르다가 도착한 새해를 만났다. 저쪽에서 꿈쩍 않고 묵묵히 한쪽 자리를 지키며 풍상을 이겨온 바위에게도 이미 새해이다. 그렇게 새해가 온 세상에 도착했다. 2022년 새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궁금하다. 희망과 기대, 아니면 희망 실종과 기대 무산. 2년 동안 같이 살아온 지겨운(?) 코로나는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 이름을 붙이고, 다시 파도처럼 한 해를 점령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르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두려움과 신뢰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인간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노르웨이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는 어렸을 때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저녁노을 붉게 물든 하늘과 거무스런 대지, 두 자연의 색깔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치는 한 인간의 두려움. 그의 절규(The Scream)라는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뢰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은 좋은 길만 따라가는 자동항법 장치에 따라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기가 아니며, 도로 위를 알아서 가는 자율주행 차량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임의 변수가 많은 바다 위에서 항해를 한다. 갈릴리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름의 배다. 일이 일어난 그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마 8:18)하셨다. 풍랑이 일지 모르는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 것은, 제자들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제안한 일도 아니었다. 여지없이 풍랑이 일어났다. 그 여정을 계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띄우는 한 해의 인생의 배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다시스로 내빼다가 풍랑을 만난 요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는 거친 풍랑의 한 가운데서 배 밑창까지 내려가 숨었으나 그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날 제자들이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은 다시스로 가는 바다 풍랑하고는 달랐다. 갈릴리 풍랑은 불순종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순종의 결과였다. 그래도 풍랑 치는 바다는 두려운 것이다. 풍랑 치는 세상은 정돈된 삶과 희망의 항로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탄 배의 어촌계 등록 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한 주인은 그 안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그 분이 온 세상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바다가 그렇듯 우리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신뢰가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한평생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어딘가에 위치해서 살아간다. 신뢰는 의지하는 힘이다. 가는 길에 수북하게 쌓인 의심을 거둬내고 낙심에 기죽지 않으며 힘이다. 신뢰가 커지면 두려움이 작아지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최종 두려움마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배는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이다. 평상시에는 우리에게 있는 신뢰의 정도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바다에 풍랑이 일면 비로소 신뢰가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뢰와 믿음은 면적이 아니라 체적이다. 도화지 펴놓고 색칠 예쁘게 한 평면 그림이 아니라 거칠지만, 삶 속에서 만들어진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있는 그릇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9
  • 다사다난한 한해를 보내며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공동화(空同化) 현상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또다시 계절은 바뀌어 눈발이 흩날리는 나목(裸木)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는 시그널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온통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역사를 움직이려는 군불은 계속 지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 어떤 다크호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지, 아니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터져 역사의 판도를 바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예장 한신측 부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6
  • 한 해를 보내며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예향교회 담임목사•예장 합동한신 부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1
  • 성탄의 현대적 의미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런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12월 25일에 태어나셨을까?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하늘의 별이 인도했고, 동방박사가 경배하러 온 이야기 등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바울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도, 초대 교회에서도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른 절기는 정확히 날짜를 알려주는 반면 성탄절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에 수많은 저작을 남긴 이레니우스와 오리겐도 성탄절의 날짜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사역, 수난,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2세기 후반이 되면서 성탄절의 날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 성탄절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당시에 성탄절로 언급된 날짜들 8월 28일, 5월 20일, 4월 20일, 21일을 말하고 있지만, 모두 12월 25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양을 치던 목동들이 예수께 경배하러 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양을 치는 시기는 보통 3~9월이라 12월과는 거리가 멀다. 성탄절이 현재의 12월 25일로 굳어진 데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일이 12월 25일로 성탄절과 일치한다. 그래서 일부 이단에서는 성탄절을 지키는 기성 교회를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단이라고 말하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이해는 유대인들의 문화를 잘 몰라서 나온 주장이다.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사고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 즉 잉태된 날과 십자가에 죽으신 날짜가 서로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 보좌에서 세상에 오신 날과 같은 날에 다시 하늘 보좌로 올라가셨다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니산월 14일이 태양력으로 계산하면 3월 25일이다. 즉 하늘의 천사로부터 예수의 수태의 사실을 3월 25일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을 기준으로 해산날을 계산해보면 12월 25일이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동방교회에서는 성탄절을 1월 6일에 지키는 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히브리달력 니산월 14일을 그리스달력을 따라서 계산하면, 그 날짜가 3월 25일이 아닌 4월 6일이 된다. 4월 6일을 기준으로 해산날을 계산하면, 1월 6일이 된다.   즉, 성탄절의 날짜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 정한 날짜의 기준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로 정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려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에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기록하면서 유대인 중심의 마태 공동체는 예수를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출생하신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모세와 같이 위대한 분으로 구약에서 예언한 예언의 성취로 묘사했다.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에 천체의 별의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공동체가 경험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늘 병자, 약자, 과부, 어린이와 함께하신 분이다. 이들이 고백하는 예수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평화를 선포하신 분이다. 마구간에서 나시고, 밤늦도록 퇴근하지 못한 목동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고백에 있다. 마태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답게 유대인 중의 유대인, 왕 중의 왕으로 예수를 고백했고, 누가 공동체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낮고 천하게 오신 분으로 고백했다. 요한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초월적인 분으로 묘사했고, 바울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춘 분으로 묘사했다.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을 세상에 잉태되신 날로 여기며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면 어떻게 고백하시겠는가? 이 대답은 스스로 해야 한다. 성탄절이 12월 25일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태복음의 기록이 사실인지, 누가복음의 기록이 사실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논쟁에 빠지면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놓칠뿐더러, 훨씬 더 중요한 것 성탄절이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놓치게 된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성탄절이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감리교신학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12-17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주일은 성경연구와 보급을 위해 매년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절기이다. 1804년 영국에서 성서공회가 처음으로 조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서주일 예배를 드린 것은 1899년이었다. 그 해 5월 성령강림주일에 ‘성서공회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성서주일을 지켰다.   당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총무인 켄뮤어가 처음으로 성서주일을 주창하여, 모금을 통해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1900년 「신약젼셔」가 발간되면서 ‘성서공회주일’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고, 1954년부터는 세계 교회와 함께 ‘성서주일’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오고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성경의 종교’이다.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전승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기록하게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지켜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성경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 중의 으뜸이다. 특히 한국의 성서공회는 지금도 꾸준하게 세계 곳곳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던 나라에서 이제 성경을 세계에 보급하는 자랑스러운 국가가 된 것이다.    성경보급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19세기 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한글성경은 복음전파와 부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남녀노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기록에 보면 선교사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무엇보다 종이인쇄출판의 쇠퇴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스마트기기를 통해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인가?   편리함 때문에 예배 시간에 화면을 사용한다. 찬송과 성경이 화면으로 나오다보니 이제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성경과 찬송을 보지 않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경은 점점 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이런 편리함에 익숙해져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는 이 말씀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성서주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 기간에 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반포되어 읽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쇠퇴기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한국교회에 쇠퇴기가 온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신앙의 편의주의가 쇠락을 앞당긴 것이 아닌가?   대강절과 성서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성경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부터 먼저 회개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 사랑의 길로 다시 나가자. /전 총신대총장. 코메니우스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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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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