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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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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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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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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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 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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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14
  • [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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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6
  • [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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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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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성적 타락, 신학 및 신앙의식의 부족, 선거부정과 지도력의 부재, 목회자 생활의 불안정과 양극화, 교회와 성직의 세습 등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면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다. 이는 신앙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물신숭배 등 세상풍조를 따랐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사람의 기호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감리교회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정직한 감리회 지도력을 세우고자 2022년 감독회장 선거를 주목하여 동 선거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첫 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강화하여 진정한 기독교회를 세워야 한다. 영성훈련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 째, 웨슬리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공감하며 진정한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로 세상을 거룩하게 지어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셋 째, 목회자의 생활 안정, 평신도 위상 정립, 제도를 개선 보완하여 합리적이고 정직한 감리교회를 지어가야 한다. 아울러 실력을 갖춰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 째, 기후위기로 비상사태를 맞고 있는 지구생태계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신앙을 배우고 환경선교에 동참하는 등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나서야 한다.   다섯 째, 감리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학연을 넘어 연대, 세대를 넘어 통합, 성별을 넘어 평등한 감리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공적 교회이다.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감리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나 개혁을 요구할 것이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감리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지도력 부재 17년 동안 감리교도 35만 명이 감리교회를 떠났다. 깨끗한 이미지 갱신과 정직한 지도력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감리회 교인들의 이탈 현상은 급속도로 가속화될 것이다.   시급하게 위기를 돌파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개혁, 영성형성, 선교정책, 목회자 정책 등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차분히 만들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을 세우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감리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간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으로 인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교회다움을 회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그간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감리회목회자모임새물결 전국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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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1
  • 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역사의 연구>라는 명저를 저술한 세계적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6.25전쟁 직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3대가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효(孝)사상과 가족제도를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비록 한국이 지금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이 나라는 머지않아 선진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효행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차 한국이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가족제도와 효사상일 것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지구에서 꼭 가지고 가야할 제일의 문화는 한국의 효문화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2019년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 사회에 과연 효행(孝行)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진 5천년 역사의 찬란한 정신 유산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 사상에 기초한 효사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다.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에는 생활고와 가족부양의 부담 때문에 존속살인까지 벌어지는 데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각박해진 인심과 메마른 인성으로 인해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회에서는 지난 2014년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교육부가 인성교육종합계획을 5년마다 짜야하고, 교육청이 매년 인성교육시행계획을 추진해야 하며, 일선 교사들은 매년 4시간 이상의 인성교육 연수를 받을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려는 취지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 방향은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뿌리의식을 되살리는 데 있다고 본다.  부족하지만 나는 1995년부터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쳐왔다. 이 같은 나의 열정은 ‘효’는 성경에 있는 것이고(딤전5:4)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자로 길러내는 ‘효경’이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효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는 일부 여성과 젊은이들이 ‘효’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과 오해를 갖고 있는 부분이었다.  과거 왕조 시대에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효를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군주제의 효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며 가족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할 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의 권익이 철저히 소외되고 박탈되었었다.  이처럼 ‘효’라는 단어가 상당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부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 효문화를 중흥시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다시 읽었고 시편 133편에서 ‘하모니’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개역한글에는 ‘연합’으로 번역되었지만 NLT 영어성경에는 시편 133편에 ‘harmony’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모니’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모니해야 하는 데 그 출발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하모니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효를 영어로 ‘Harmony of Young and Old’의 줄임말인 ‘HYO’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YO의 효는 과거의 효와 달리 자유로운 개인, 민주적 절차, 쌍방적, 관계적이며 평등한 인간관계, 이타주의와 애경(愛敬)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효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사상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현대적 효이다. 그러므로 ‘효(孝)’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설립자·총장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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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4
  • 진정한 변화위한 비전이 필요한 세상
      어려운 시기일수록 꿈과 비전을 품은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이다. 비전을 품은 지도자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비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다음세대가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창조된 우리가 모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가를 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장점은 더욱 계발하고 단점은 극복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질이나 MBTI, 에니어그램과 같은 다양한 검사들을 통해서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뚜렷한 목표나 방향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뒤 더 이상 이대로 안 된다는 반성과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꿈과 비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셋째 비전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비전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삶과 사역에 사용되는 비전의 개념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단계이다   넷째 자신이 품은 비전을 발전시키는 단계이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꿈이나 비전을 품기는 하지만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한순간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을 본다. 또한 비전이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꿈과 비전도 점차 성장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발전시킨 비전을 세상에 전달하는 단계이다.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비전을 품고 따를 수 있도록 영감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퇴임 후에 아름다운 삶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조차도 재임 중에 자신의 비전을 백악관을 넘어 전달하는 데 실패해 재선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전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여섯 번째 비전을 성취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가진 리더들은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리더십 팀을 세우고 비전을 발전시키고 전달해 가는 데 있어서, 어렵고 힘든 것들을 인내하면서 신중히 초점을 맞추어 나가고 비전을 성취해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취한 비전을 보존하는 단계이다. 비전을 성취하는 것보다 그 비전을 보존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말이 있다. 커다란 비전일수록 그 비전을 무력화시키고 열기를 꺼뜨리는 장애물들이 많은데 이것을 비전 킬러나 비전 뱀파이어라고 부른다. 이처럼 비전을 성취한 다음에 그것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보존해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은 그것을 품은 사람보다 더욱 오래간다. 그만큼 한 민족이나 사회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비전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전이 없는 백성들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므로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성경의 교훈을 미래의 지도자가 될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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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9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란 단어는 사네이이다.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뜻 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 /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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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30
  • 사순절에 마음속에 새기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한다.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 고난의 길이다. 많은 순례자가 성지를 갈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과연 예수를 믿고 축복을 받으려는 일에는 앞을 다투면서도, 정작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등한시하는 것이 성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새로운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으로 부모들에게 ‘아들과 딸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를 ‘미워하고’ 자녀를 ‘미워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네이곧 미움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덜 주는 것으로 예수를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한 가정의 구성원 전체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예수도 그 가족들로부터 미움받지 않았던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기에 당연히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미움은 덜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이 식은 증거이다. 가족들이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증거이다. 형제들이 미워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증거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면서 십자가형을 공공연하게 시행해왔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부모와 자녀를 덜 사랑하고 예수를 더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기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내리고 따라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십자가에 못이 발목에 박힌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대표적인 표상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수께서는 가정에서 먼저 자녀가 부모를 미워하고, 또 부모는 자녀를 미워하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제자가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사이다.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선행되어야 할 것이 부모가 십자가이고 자녀가 십자가이다. 굉장한 도전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사를 정리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는 가정의 일로 십자가를 지는데 어떤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의 제자들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박해와 순교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이제 이 길을 당신도 걸어가려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부모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녀를 덜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상을 미워할 준비가 되었는가? 세상을 덜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 준비가 되었는가?   생명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나자라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 찾는다는 말씀이기에 예수의 제자는 이 땅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죽음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걸어가는 길이다.   생명은 히브리어에서 바 레하임이란 단어이다. 이 세상보다는 장차 오는 세상인 저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은 개념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생명은 결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는 세상에서 얻게 되는 생명과는 반대로, 같은 보상이지만 악인에게도 주어지는 보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레크는 악인에게 내려지는 저세상의 심판이란 의미가 강하다. 오는 세상에서 선인에게는 바 레하임인 생명이 주어지지만, 악인에게는 헤레크라는 심판이 반드시 뒤 따른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형제가 있는데, 요한과 야고보이다. ‘우뢰의 아들’(히브리어로 베네이 레고쉬)이란 별명을 얻은 그들의 아비는 세베대 곧 히브리어로 자브다이로 요한은 예수의 제자 중에 최연소이고, 그의 형 야고보는 예수에게 회장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 놀랍게도 이 형제들에게 닥친 위기는 예수께서 변모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어미가 예수에게 두 아들을 위해 최고의 두 자리, 곧 조선 시대로 말하자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곧 정3품 이상의 당상관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은 마시려니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미 그리고 모든 제자에게 주시는 핵심내용이다. ‘대속물’은 헬라어로 뤼트론인데, 영어 단어 lutron으로 음차 되거나 ransom이란 의미로 몸값을 대신 내는 속전이나 보석금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몸값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곧 순교의 길이다./장신대 교수·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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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29
  •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역대 대통령의 직무수행평가를 조사한 통계 수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권초기 지지율은 매우 높지만 집권 마지막 분기에는 최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단순한 정치 영역의 지도자를 넘어선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 배경을 따져 보자. 우선 권력 집중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순한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정당의 지도자로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추천을 통하여 사법부 영역에도 간섭한다. 대통령은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코로나19 시대 교회 문을 닫고 열게 하고, 탈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북한 핵을 억제하고, 미·중 갈등에서 균형을 잡으며,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의 국가중심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열강의 침략, 일제강점기,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애국심이 국민의 심성에 내재되었다.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 자부심(이른 바 ‘국뽕’)은 하늘을 찌른다. 더욱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국가는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임이 확인되었고, 동시에 국가가 국민 개인을 통제할 정당성까지 확보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의당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정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은 정치라는 인간 삶의 한 영역의 지도자일 뿐이다. 메시아는 고사하고 그 역시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대통령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법에 복종하며 세금을 바치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땅한 도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 감이 누구인지 깊이 숙고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성숙한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자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역주권론은 성경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으로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 주권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릴 때 세상을 여러 영역들로 나누어 다스리신다. 국가, 교회, 가족, 학교, 기업, 학문, 예술 등이 그 영역들로서, 하나님은 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임무와 법과 통치자를 주셨다. 각각의 영역들은 내적 성격과 자체의 법체계에 따라서 그 권위를 행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 통치자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은 가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고유 영역에 주어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영역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현하는 길이다.   어느 한 영역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그 사회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 인간사의 유일한 조직처럼 행사해서도 안 되고, 기업가 정신이 온 사회를 지배하여도 안 되며, 교회가 정치적 과제와 국가의 영광을 취하여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부패하였기에 한 사람, 한 영역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는 진보/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되는 정치의 하부기관이 아니라, 정치가와 권력자, 그리고 국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기관이다. 우리의 교제는 분열과 차별과 혐오의 세상을 십자가 안에서 끌어안아 통합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교제다. 신앙인은 하나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안목으로 그 이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백석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2-03-17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공격했다. 전세계는 이를 러시아의 약소국 침공으로 보면서 규탄하고 있으며, 전쟁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세를 현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 현실, 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현실에서 본질문제를 따지는 것은 한가한 노릇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해야 이 상황을 올바로 볼 수 있고, 이후 올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감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지나간다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1차세계대전의 잘못된 해결이 2차 세계대전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반러시아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나토와 미국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국가적 안전 확보라는 이해관계가 부딪혀 나온 전쟁이다. 즉 제국과 대국의 이해관계 대립이 전쟁의 원인이다. 나토와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면서 독일 넘어서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문서로 약속됐지만 법적 조약은 맺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와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폴란드, 발트3국, 발칸국가 등 동유럽 거의 모든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가가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의 발길이 국경선까지 다가온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는 나토 가입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중간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Demilitalization)를 목표로 하고, 친서방 극우 정권을 통제하기 위해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세부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벌이는 휴전 협상의 본질이 이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않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크라이나 정권이 거부하면 전체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오만한 제국의 쇠퇴이다. 제국의 오만과 쇠퇴, 그것이 이번 전쟁의 본질이다. 미국은 소련 해체 이후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유일 제국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고,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쫓아내고,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으로 미국의 부자는 이제 슈퍼리치가 됐다. 미국이 중심에 유럽-일본 부자는 주변에 섰다. 빈익빈 부익부는 극단적 수준이 됐고 그 현실은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고 있다. 유일 패권국 - 제국화된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만든 세상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의 지위가 흔들린다. 헬리콥터 머니로 전세계에 풀린 달러는 세계 인플레-대공황을 예고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은 시리아에서 실패했고, 아프카니스탄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하며, 이라크에서는 매일 미군 그린존에 민병대의 로켓이 날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완성한 북과 힘겨운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그사이 성장한 중국과 천연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며 경제를 회복하고 현대화한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미국과 대결하고 있다. 그 대결의 반영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나토의 동진을 저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제국의 오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오만이 무너지고 진정한 평화의 체계가 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시2:1-3). 한국교회는 표면에 나오는 뉴스에 좌우되지 말고 현상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제국의 공포를 넘어서 그들의 오만 보며,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데서 다가오는 것이다./ 평화의 교회 목사·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3-10
  •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2-28
  • ‘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2-18
  • 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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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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