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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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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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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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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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 장로교총회에 바란다 -한국사회를 이끄는 향도의 역할
     비록 2-3년 지난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의 주요 6개교단 (합동 통합 고신 기장 기감 기성)의 교인수는 704만 여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범 장로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 통합 고신 기장의 교인수의 합은 500여만명이다.(2021.10.28. 미주중앙일보 보도)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주류교단임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 교세만큼 막중한 책임과 의무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한국 교회를 아우르는 맏형님격인 장로교단이 9월 일제히 총회를 개회한다. 년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보다 전향적이고 알맹이 있는 내용과 결과를 도출하는 총회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 두가지 소망사항을 피력하려 한다. 한국교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단의 총회가 향도가 될 때 여타의 다른 교단도 많은 힌트를 얻어 함께 한국교회의 길을 걸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대하는 것은 대사회적 대국민적 대정부적 영향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총회이기를 기대한다.   그 위상을 미루어 볼 때 장로교는 얼마든지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의 혼란, 의료문제의 갈등, 교육계의 아픔, 북한과의 관계, 기후문제, 인구감소문제 등등 교계의 관점에서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장로교단의 총회후에 들어본 기억이 많지 않다. 작은 토끼 하나의 외침보다 사자나 호랑이의 포효가 산 전체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사회가 교계를 염려하는 모순을 넘어 다시 한번 교회가 한국 사회를 바르게 이끄는 향도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 선봉에 장로교단이 있다. 나아가서 이번 장로교 총회는 목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제고되는 총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교회 아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한국사회의 소외된 곳을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헌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장로교단을 통하여 사회에 끼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적 관심과 공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과업이다. 교육, 의료, 복지차원에서 그 어떤 종교집단보다도 큰 공헌을 한국교회가 해왔다. 이제 그런 대 사회적 복지차원을 넘어 교회안의 목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를 배증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하나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부목사나 전도사 강도사등의 교회 내의 지위나 위상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리라. 교회내의 목회적 약자들을 단순한 목회의 조력자를 넘어서는 협력자요 동반자로 보는 인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여울져 나가야 한다.  막중한 업무량에 비해 최저임금수준에도 미달하는 현실의 대우와 목회자로서의 예우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그런 목소리들이 나오면 그 당사자들이 얼마다 용기백배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줄어드는 교인수와 다음세대 교회구성원들에 대한 관심의 실제적 조직적 제고이다. 앞서 언급한 언론보도를 보면 5년전보다 통합은 14% 합동은 10% 정도의 교인수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세대 교회 구성원인 어린이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총회를 통해 제기되고 해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일어나고 조직적인 치유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는 단순한 여러 교단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바로 장로교단에게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안된다. 삼가 이번 9월의 총회가 성총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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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14
  • [정론] 광복 79주년, 평화를 찾는 좁은 길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으로 지난했던 태평양전쟁이 종식되면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올해로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의 광(光)은 빛을, 복(復)은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빛(나라)을 다시 찾은’ 것을 이른다.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자기 주권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남북한은 외적 강제로 인해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북한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세계 각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한반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깊은 상처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새겼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 이념의 모양으로 나타나 계층으로, 소득으로, 성향으로, 남녀로 우리를 가르고, 나누고 균열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79년의 분단은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도 분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해방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6.25 한국전쟁의 영향과 새로 들어선 이승만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 철저한 반공의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 여부를 놓고 갈등과 분열을 겪은 시기인데,1960년 3.15부정선거와4.19민주항쟁,1969년 삼선개헌 등 격동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교계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금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다. 그 긴 세월 동안 한반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는 분단의 역사를 통해서, 싸움보다는 화해를, 비난보다는 대화를, 적대보다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던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이롭다는 것을 안다. 현재 남북 그리고 북남은 ‘강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연일 한쪽은 핵·미사일 고도화로 다른 한쪽은 전쟁연습으로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보듯이, 전쟁은 예측할 수 없다. 서로의 오해와 작은 실수로 인해 국지전 더 나아가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 한반도는 이 군사적 긴장이 어느 때보다 높다.     남북의 연락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안전핀 역할을 했던 9·19군사합의 또한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도발과 심리전은 서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79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는데, 79년이 지난 2024년 오늘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비난의 소리가 가득한 광복을 맞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들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겠다. 힘으로 겨루는 전쟁은 안 된다. 시편의 시인은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 권면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을 만들고, 비난을 전파하고, 적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절대적 소명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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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6
  • [정론]크리스천의 바른 휴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자영업자는 휴가가 없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연평균보다 199시간이나 길다고 한다. 그러니 내게 휴가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자연의 품으로 떠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대자연이다. 휴가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떠날 일이다. 크리스천은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 5일간 시달리고 주일에는 또 교회에서 봉사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진 상태기 때문이다. 떠날 때 성경, 찬송은 필수라고 무거운 짐 속에 넣고 가도 되지만 불신자와 단체 행동을 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어 기도하고 앉아 있으면 역전도와 꼴불견이 된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농부가 너무 가물어서 소리를 내어 울면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들로 나가려고 했을 때 집에 있던 어린애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갖다 드렸다. “웬 우산이냐?” 이때 “아버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어요?”라고 아들은 말했다고 한다. “허 참, 그것은 그냥 기도지. 이 날씨가 어디 비가 오게 생겼냐?” 하고 아버지는 그냥 나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례적인 기도를 크리스천은 단체행동에서 삼가야 한다. 다만 크리스찬이 지나간 자리에는 버린 쓰레기가 없어야 하고 남이 버린 쓰레기까지 수거하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방법이었을 때 한 젊은이가 전보를 보내는 통신원 자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 핸드폰 등이 많아 전보를 모르는 젊은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1950년대에 신문의 광고에 적혀 있는 주소를 따라 젊은이는 한 사무실로 갔다. 건물에 들어서서 그는 크고 넓은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소음과 말소리와 전보치는 소리로 매우 소란한 곳이었다. 접수처 카운터에는 소정 원서에 필요한 내용을 다 기록해 제출한 후 안쪽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씌어 있었다. 젊은이는 원서를 다 쓴 뒤 대기소에서 일곱 사람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그 젊은이는 일어서더니 방을 가로질러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사장이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른 지원자들에게 말했다. “신사 여러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빈자리는 채워졌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은 서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이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맨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면접을 요청받은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다니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장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앉아 있는 동안 내내 전신기는 계속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송신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내용을 이해하면 안으로 들어오시오. 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무도 이 전신 부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이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이 젊은이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로 폭우가 쏟아져 집을 잃고 생활수단이 망가져 망연자실한 이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거기다 국내의 요란한 정치 소음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에 6위에 해당한다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백척간두에 세우고 있다. 그래서 과연 크리스천이 이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한가하게 휴가를 잘 즐길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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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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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한국교회와 복음의 본질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과의 해석을 통해 복음을 살아내며 세상에 참여하는 성육신적 공동체이다. 복음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느슨해진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교회이며, 그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마다, 끊임없이 교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항상 기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의 삶에 투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로 그 존재의미를 확증하며, 하나님의 선교는 기독론으로 인해 그 의미가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음과 단절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우리가 길을 잃은 지점은 어디며,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가 사회문화의 지배적 가치관과 타협하고 세상 한복판에 내던져진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이 제도화와 세속화의 덫에 갇힐 때, 복음을 살아낼 능력을 상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잃어버리며, 회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상실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급진적 회심은 교회의 삶에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핵심 요소이다. “과연 서구가 회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레슬리 뉴비긴이 37년간 인도 선교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조국의 상황을 직시하며 던진 질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회심”에 관해 심각한 도전적 질문이 필요하고, 그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와 계기와 필요하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글로벌 사회문화의 변화에 맞물려 한국 사회문화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몰락을 촉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이다. 구약 예언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에 대해 비탄에 젖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굴복과 회개를 통해 돌아오라는 부르짖음을 외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실재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출발점은 교회가 다시 재발견해야 할 핵심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롭게 갱신된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가 일으킨 개인과 사회와 세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좌표를 새롭게 한 '선교운동'이며 '복음 운동'이었다. 이제 복음은 우리의 실상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허물과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하라는 요구한다.    2023년 2월 8일, 미국의 변방인 미국 켄터키주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상처, 두려움, 절망, 소외감, 박탈감,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Z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날, 수요 채플 후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하는 학생들은 남아서 기도하자”라는 설교자의 도전에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교수나 목사 혹은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이 강단 앞에 모여 기도를 시작했고, 작은 기도 모임이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부흥 운동으로 점화되었으며, 미디어를 통해 세계로 퍼지고 있다. 16일 동안 이어진 에즈베리 대학교 부흥 집회는 단순히 내부로 집중된 내향적 운동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와 주변의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이 하나님을 열망하게 하시고 복음에 겸손히 순종하게 하셨다. 에즈베리 부흥 운동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예언자적 비탄과 슬픔, 애통함을 보며, 죄의 용서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리고 기쁨과 감사를 발견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부흥 운동은 사회문화와 세대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각성 운동이며 갱신 운동이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의 변혁을 가져오는 운동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참된 부흥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부흥과 갱신은 인간 편에서 급진적 겸손과 전적인 굴복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2024년 9월 로잔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는 고백과 회개 운동으로서 복음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의 영적 활력과 사회문화적 변혁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서울신대교수·한국로잔위원회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3-08-03
  • [정론]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어둡고 공허한 미지의 땅 조선에 생명을 걸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선교사들이 있다. 이 분들의 신앙과 연합정신,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출발했다. 그러나 광복 후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진보와 보수의 극한 대립으로 정체성이 실종된 채 정쟁에 몰두하게 됐다. 사회는 물량주의와 한탕주의,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이웃을 향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랑의 문화가 사라져버렸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가 1959년 이후 신사참배의 회개문제와 교회재건을 이유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교세의 확장을 목적으로 정치권과 결탁하며 ‘지성주의’와 ‘성장주의’ 패러다임에 빠지게 됐다. 신학은 사변화되어 교회존재의 본질을 상실한 채 사분오열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교회마저도 각양의 불미스러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한국교회와 연합기관들도 자신들의 이권과 교권다툼에 휘둘려 여럿으로 갈렸다.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고 교회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선교의 문이 더욱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회복의 마중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자기희생을 사명으로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땅에 한국교회 선교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복음 촛대의 본질을 회복하며,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서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제언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순교의 피로 이룩한 140년 동안 박해의 연단 속에서도 오뚝이와 같이 다시 일어서는 숨겨진 저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육·보건·복지·정치·사회·문화 등으로 사회계몽을 이끌어왔고, 우리 사회의 급속한 성장기 저변에는 한국교회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중심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어 왔다.   그러나 성장의 정점에서 풍요 가운데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대 사회적인 사명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갈등의 시대에 세상과 소통에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화평케 하지 못해 마치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이 돼버렸다.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기에, 이제 세상의 힘없는 자들의 신음 소리에(사1: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혼의 절규소리에 반응하는 ‘코람데오’의 심장으로 서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현실에 통탄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먼저, 근본적인 복음의 가치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혀서 교회 간 양극화를 초래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두번째로 교권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목회자다워야 한다. 목회자는 언행불일치적 삶이 아닌, 거룩한 부담감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 거룩한 일이 시작되는 데에 마중물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예장 백석총회 사무총장·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07-17
  • [정론]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필요한 시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 ‘코끼리는 긴튜브’라고 생각하고, 굵은 다리를 만지면,‘코끼리는 통나무와 같다’고 말하며, 몸통을 만지면 ‘코끼리는 넓은 벽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또한, 표류하던 배에 있던 사람이 작은 무인도를 보 면육지로 갈수 있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이 멀리서 표류하다가 흘러오는 배를 보면, 저 배는 나를 구조해 주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각자 보는 관점과 경험에 따라 다른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임마누엘칸트는 바로 이와같이 서로 다르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두고‘세계관’이라고 했다. 최근 시리즈로 나오는 몇 영화들이나 소설들, 그리고 최근 회사들의 마케팅에 도자기들 나름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홍보와 판매를 한다. 최근 한국의 편의점들은 각 브랜드마다 자기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가면서, 각 브랜드에 맞는 세계관을은 연중 소비자들에게 심고 있다. 그래서 어느 소비자는 C편의점의 도시락과 빵을 좋아하고, 다른 소비자는 G편의점에서 만맥주와 안주를 구입해서 먹는다. 세계관은 단순히 학문적 분석을 위한 도구를 넘어서 일상에서도 쉽게 접하고 인식할수 있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 세계관의 출발은 구한말 유교문화의 역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조선말기, 철통같은 쇄국정책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의 부정적 문제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 과도한 문치주의로 인한 당파성과 계급적 차별주의, 여성과 어린이의 차별을 제도화하는 가부장적 구조, 맹목적 명령과 복종이 난무하는 효사랑의 강요, 실용적 지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과학적 합리성 부재의 가치관 등이 구한말시대에 600년을 지배해 온 유교문화의 몰락을 이끌었다. 그 빈틈에 개신교 회의 외국선교사들이 자리를 차지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관적인 현실을 우리나라에 맛보게 하였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의 땅을 위해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이를 위해서는 다른 종교인들과도 손을 잡고 하나된 민족의 독립을 찾고자 했다. (당파성타파)    또한, 남녀노소의 수백년 고착화된 차별적 구조를 깨기 위해 많은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여성운동의 장을 마련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힘썼다. (차별주의철폐) 봉건적 사회문화 속에서 경직된 학문에 대해서 성경과 외국의 다양한 지식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하고 꿈꾸게 하는 역할(농촌계몽운동, 여성인권운 동, 의료기술의 발달 등)을 하면서, 교회는 그 중심의 자리에서 대한민국을 완전히 변화된 나라로 이끌었다. 그럴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세계관이 유교적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관점, 특히 세상을 바꾸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큰 역사적 변화를 이뤄냈다.   그때 그 부흥의 힘으로 한국교회는 100년도 채 되지않고 세계선교 2위의 나라까지 성장했고,국가의경제도선진국반열에오르게하는중요한역할을했다. 600년동안 땅바닥만을 쳐다보며 살도록 만든 세계관을 하늘과 하나님을 바라보게하는 변혁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한 것은 바로 한국교회이다. 그런데 막 꽃을 피운 한국교회는 100여년 전 멸망했던 유교의 세계관을 좇아가고 있다.   정치에 저급한 훈수를 두는 정교유착된 종교가 되고 있고 기복주의 및 물질만능주의에 빠져교회를 기업처럼 세습하는 것에 윤리적 민감성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성적 타락과 재정사고의 만연된 모습은 도덕적 타락에 빠져있던 중세교회와 다를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나만 옳다고 맹신하는 배타주의와 나만, 내 교회만, 내 직장만, 내 구원만 이루면된다는 이기주의에 매몰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이끌 세계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최근 영화 ‘수리남’, ‘더글로리’, ‘오징어게임’ 등에서 비춰진 추하고 불편한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수 있다. 따라서 이제 진흙탕 속에 빠진 기독교세계관을 다시 끄집어 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한국교회는 희망의 빛이 될수 없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변화를 넘어 또 다시 개혁을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배는 반드시 침몰할 것이고, 다시는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그동안 잘못된 길로 가던 발걸음을 옮겨 다시 제대로된 올바른 세계관을 세우는 생명과 영원의 길을 제시하는 곳이 돼야 한다.   먼저는 혐오와 대결이 아닌 환대와 대화를 이끌고 경쟁과 다툼이 아닌 협력과 화해를 선도하며 개별과 지배가 아닌 공동체와 사귐의 본이 되고 방관과 묵인이 아닌 참여와 책임을, 그리고 인간중심이 아닌 생태와 창조세계중심의 세계관을 내세워 다시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와 기독교가 될 때, 한국교회는 지금의 난관을 이겨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4차 혁명의 AI와 Chat GPT시대 속에서 교회가 이제 더욱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곳이 되어 교회의 개혁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새로운 관점의 부흥을 이루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연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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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7-14
  • 교회연합의 실천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는 장로교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장로교 간판을 달지 않으면 목회가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장로교는 한국사람들에게 마치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말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동시에 장로교 하면 교회분열의 역사가 떠오르게 된다.    수도 셀 수 없는 장로교단들은 교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그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분열의 역사 속에서도 연합을 지향하고 실천하려 했던 피나는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사 안에서 펼쳐진 자랑스런 연합의 발자취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개신교는 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선교되었다. 본격적이라 함은 개신교의 선교(전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교를 두고 네비우스정책에 따라 감리교, 미국북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이 지역을 분할해서 한반도의 선교에 힘썼다. 같은 지역을 두고 경쟁하듯 하는 선교 대신 각자의 영역을 보장해 주는 선에서 상호협력을 기대한 현명한 선교정책이었다.   그러다 1907년 조선에 장로교 첫 노회가 설립되었다. 독노회로 설립된 장로교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미국북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이 모두 참여한 연합된 기구로서 한국에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설립된 것이다. 각각의 장로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을 이식한 것이 아니라 피선교지인 한국에 하나의 연합한 장로교를 설립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개신교사에 자랑스런 연합의 정신 그리고 연합의 첫 사례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교회연합의 자랑스런 흔적은 장로교의 교단명칭에서 드러난다. 장로교단들의 공식적인 명칭들을 살펴보면 모두 “대한 예수교 장로회”로 사용하고 그 후에 통합 혹은 합동, 개혁 등의 교단별 명칭이 뒤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명칭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란 이름 안에 장로교단이 지향하는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모든 교회는 사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는 예수교이며 그다음 교단의 특징을 규정하는 교회정치제도가 장로정치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장로회라는 말이 뒤따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장로교가 아니라 장로회라는 이름이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장로교가 아니라 장로회라는 이름 안에 담긴 뜻은 우리는 모두 장로교 안의 하나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장로회란 이름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교회연합의 정신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교단을 절대화하지 않고 모두 예수를 믿는 예수교 안에서 장로교회의 성격을 지닌 장로교인들의 모임으로서의 장로회란 명칭은 자기 교단도 장로교 안에 속한 하나의 모임으로 겸손하게 규정하는 연합의 정신을 표현하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국개신교사의 또 하나의 자랑스런 연합의 열매를 소개하고자 한다면, 필자가 봉직하는 아신대학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님들이 아신대학교란 이름보다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익숙하게 들어보셨을 줄 안다. 최근에 아신대로 학교명을 바꾸었는데 원래의 교명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였다. 학교이름에 연합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학교이름에 연합이란 이름이 들어갔을까?   아신대는 1974년에 개교한 49년된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신학대학 이름에 연합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매우 특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신대는 한국교회의 각 교단의 대표적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신학대학교이다.    아신대가 설립된 1974년 그리고 설립과정 중에 있었던 1960년대는 한국장로교에서 가장 뼈아픈 분열의 시기였다. 합동과 통합이 분열된 시기였고 그 상처를 결국 싸매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열의 시기에 통합과 합동 그리고 고신의 지도자들이 성결교 지도자와 함께 연합해서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신학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선교를 통해 성장한 한국교회가 다시 세계선교를 위해 아시아 교계지도자들을 초청해서 대학원 수준의 신학교육을 통해 다시 각자의 출신지역으로 파송하기 위해 세워진 선교지향적 신학교육기관이다. 선교의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개신교가 연합해서 세운 신학교육기관인 것이다.    설립 당시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통합의 한철하, 합동의 김의환, 고신의 오병세, 서울신학대의 조종남 박사 등 기라성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빌리 그래함과 사무엘 마펫 등의 미국교회 지도자들과 연합해서 선교 중심의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런 자랑스런 교회연합의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열의 상처 이면에 교회연합의 열매도 자랑스럽게 맺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라기는 통일된 대한민국에서는 분열된 개신교들이 각각의 교단과 신학대학교를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합하는 마음으로 연합신학대학교를 세우고 그로부터 북한을 선교하고 목회를 감당할 교계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신대가 그런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다.   교회연합은 교회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생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교회분열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나누는 죄이다. 그러나 교회연합은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싸매고 치유하는 행동이다. 성령의 역사는 나누어진 마음들을 하나로 사랑으로 싸매주는 사역인 반면, 사탄의 역사는 성령에 거슬러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하나의 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분열로 치닫게 한다.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올바른 성도들은 마땅히 분별해야 하며 교회의 연합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의 건강한 하나됨을 위해 깨어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연합의 역사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통일한국의 연합된 한국교회를 꿈꾸어 본다./아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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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6-26
  • [정론]호국의 달에 생각하는 진정한 호국
    6월은 호국의 달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기 위해 우리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6월이 왜 호국의 달이 되었는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남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침략을 받았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남한을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전쟁이었지만 남한 입장에서 보면 겨레의 인권을 파괴한 무력 침공일 뿐이었다. 전쟁의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지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쟁 목적은 성취되지 않았다. 100보를 양보해서 해방전쟁(적화통일)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참담한 비극을 지불하고 이 나라가 통일된다 한들, 그 통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전쟁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이 땅에서 피 흘린 경험을 가진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증언해야 한다. 전쟁은 무익한 것이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은 예방해야 한다고!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이 공산화가 되더라도 전쟁을 포기하라는 말이냐? 아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휼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역사가 그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1950. 6. 25 – 6.25 발발 1953. 7. 27 – 휴전협정 1972. 7. 4 – 7.4 공동성명 1991. 12. 13 - 남북기본합의서 2000. 6. 15 – 6.15 선언 2007. 10. 4 – 10.4 남북정상선언 2028. 4. 27 – 판문점선언 2018. 9. 19 – 평양공동선언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남과 북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적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면서 달려왔다. 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남한의 통일정책은 북진통일이었고 그러다가 1974년에 남북 최고 지도자들은 전혀 새로운 3대 통일정책에 합의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그 이후 남북 정상들의 통일 회담은 7·4 성명에서 합의한 3대 통일 원칙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었다. 7·4 공동성명은 남과 북 모두 자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그렇다. 그게 일정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단으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흡수한다는 불멸의 통일 원칙이 자주적, 민족적 역량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이룬 것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열어놓은 평화의 기초가 16년 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었다.   1990. 12월 남북 당국자들은 통일의 과정까지 대략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 1단계– 교류협력, 2단계– 남북연합, 3단계- 남북의 평화통일! 이렇게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는 10년 후 드디어 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김대중/김정일)들이 만나 통일의 방식과 통일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하게 되었다.   6·15 공동선언 1항은 자주적 통일원칙을 확인하였고 통일 방안으로서 교류 협력, 남북 연합, 평화적 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구체화 시켰다. 남북대화의 역사에서 최초로 물꼬를 튼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이론적으로 거의 완전한 설계도를 완성하는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었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제적 실천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남북이 상호 국가적 존엄을 인정하고 통일의 기운을 최고조로 이끈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6·25의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려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그렇다. 이것이 전쟁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의 보편적 정서였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였다. 1991년에는 남과 북이 서로 묵인하는 가운데 U.N에 동시 가입했고 1990년과 1992년에는 한국전쟁의 실제적 당사자였던 러시아,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혈맹이었던 미국도 한국전쟁에서 적으로 만났던 중국과 일찍이 수교했다. 6·15 정신은 6·25 정신 쇠퇴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환경 변화와 대한민국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 알맞게 발전적 성숙을 이룬 것이다.   6·25를 잊지 말자는 호국이 여전히 북한에 대한 증오나 적대감으로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대한 이해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상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평화의 기운을 진작시켜 가는 것이 진정한 호국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하면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힘이 없어서, 의미 있는 저항 한 번 못 하고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겪어야 했고 그 결과 참혹한 한국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그때는 힘이 없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이야 무슨 변명이 용납되겠는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협(가능성)은 핵을 보유한 북한에 있지 않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요, 세계가 인정한 선진국 대한민국이 전쟁 예방 노력을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는 준엄한 역사적 단죄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달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이 샘솟듯 솟아나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평화만이 살길이다.   평화의 사도인 한국교회여, 평화만이 진정한 호국의 길임을 잊지 말자.
    • 오피니언
    • 정론
    2023-06-20
  • [정론]일반은총에 덜 저항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내려주신다. 그런 은총을 신학자들은 '일반은총'이라고 불러 왔다.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하시는 은총인 특별은총에 비해서, 일반은총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미쳐지는 은총이다. 그렇기에 일반은총은 구원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세상이 그래도 유지되며 존속해 갈 수 있도록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햇빛과 비를 주시어 만물의 생장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이 세상에 지속하도록 하시는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일반은총의 손길이 없으면 이 세상은 그저 멸망하고 만다.  믿지 않는 분들은 이 세상이 은혜로 유지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일반은총에 저항한다. 그래서 일반은총을 우리들은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항하는 은총'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구원하는 은총인 특별은총이 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인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이 세상은 일반 은총에 항상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이 일정한 한도를 넘을 때, 한 사회가 유지되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노아홍수 때나 바벨탑 사건에서나 소돔과 고모라 등등 여러 곳에서 무수히 보아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간접적 활동의 하나는 이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저항하지는 않도록 기도하고, 이 세상이 상대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 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푸틴 같은 사람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1년 이상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푸틴의 활동이 일반은총에 지나치게 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이 전쟁이 빨리 마쳐지도록 기도하고 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애써야 한다. 마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의 6.25전쟁에 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했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전쟁 초기에만 관심을 표현했지, 전쟁이 오래가자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사느라고 이 전쟁에 대해서 잘 의식하지 않고 사는 일이 많았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반은총 가운데서 이 전쟁이 빨리 끝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힘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 세상에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잘못된 문화의 움직임 같은 것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여 가는 것임을 깊이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런 잘못된 문화적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물론 그렇게 온 세상에서 전쟁이 그쳐서 상대적 평화가 오고, 동성애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세상은 마땅히 있어야 할 세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우리들은 사람들이 특별은총과 접촉하여 진정한 사람의 길로, 진정한 사회로, 진정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천국복음 운동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님의 구속사역에 의해서 수립하신 그 하나님 나라에로 중생하여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런 천국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이끌어 들이는 천국복음운동을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덜 저항하여 가도록 하는 일도 힘써야 한다. 이런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우리의 본래적 사역인 천국복음운동의 산물이요 열매이다. 그리하면 간접적으로 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힘쓰는 일이 직접적으로는 천국 복음운동이고, 간접적으로는 일반은총에 조금 덜 저항하게 하는 일이다./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3-06-13
  • [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6-07
  • 나라사랑과 교회의 역할
      해마다 6월이 오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생각한다. 이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보다, 배워서 '생각하는' 세대가 더 많아졌고, '생각하지 않는' 세대도 적지 않다는 뉴스를 접하며 염려하게 된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멈춘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무너지고 찢긴 강산을 회복하고 재건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재건의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은 개인의 소소한 소망에 앞서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었고, 국가경제라는 명분으로 특정 기업에 막대한 지원과 이윤을 몰아주었다. 2023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군사력 세계 6위의 순위는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행사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동한다.   지난 70년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기록될만한 성장과 부흥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이 땅에서의 축복을 선포하며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성장의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조정하고 인도하는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다양한 이해에 편승하여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내세우며 분열과 반목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예배드리는 이들을 향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삼일절 기념주일과 광복절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며 강단에 세워진 태극기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뭉클해졌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고백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육신의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통하여 민족교회와 국가교회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교회 앞에 국가 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 등의 명칭이 그렇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된다. 일제하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제국주의에 맞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분들의 믿음과 나라사랑이 오늘의 자유로운 민주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된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70년을 맞으며 안타까운 이유이다. 본래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이다. 여기에 '거룩하고 사도적인' 본질을 추가하여 교회의 표지, 즉 증거라고 부른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의 근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보편적인 교회보다 앞서는 가치로 주장할 수 없다. 로마서에서 민족교회의 근거를 제시한 바울은 작은 로마서라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완결된 가르침을 선언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한민국의 오늘은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기도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인류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것이 성숙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무릎을 꿇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 오피니언
    • 정론
    2023-05-31
  • [정론] 위기가정을 품는 그리스도인들
      ‘가정’의 의미는 단순히 혈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친구, 직장동료, 이웃, 그리고 지역사회를 포함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이웃의 애환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 지역사회와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위기가정, 취약가정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뉴스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을 마주하는 일이 지금보다 줄어들지 않을까?   선진국에서는 위기가정을 지원하는 통합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국가가 주거정책, 교육정책, 돌봄정책을 통해서 아동의 양육을 책임진다고 한다. 그러기에 아동이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라고 말한다.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또한 국가와 마을공동체가 위기가정과 소외된 가정을 함께 책임지고 힘쓰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교회와 성당, 복지센터들부터 세심한 관심으로 이웃들을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나 부속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남아있는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도 자녀 살해 후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종속된 관계 속에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최근 인천에서 남편이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완도에서 극단적 사건도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고립을 대처하기 위한 해결책을 논의하지 못했다. 앞으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희생자’를 위해, 그들의 고립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끔찍한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까지 국가는 무엇을 했을까.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몇 년 사이 일어난 가슴 아픈 사건들을 보며 이제는 좀더 안전한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형식적인 ‘사회안전망 구축’, ‘복지 사각지대 제로’ 등의 선언적인 단어들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외침들이다. 우리 사회가 방치했던 그들의 고립을 뉘우치며 함께 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분배의 불평등이 더욱 공고해지며, 이로 인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야말로 ‘마을공동체’ 개념이 간절히 요구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이는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종속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생명 가운데 하나이며, 독립된 존재이다. 지구별을 떠나 하늘 어딘가에서 별이 된 우리의 아이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목사, 가정협·새가정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3-05-09
  • [정론] 다음세대 위기와 극복 방향
      한국교회는 지금 ‘다음세대 사역이 위기이다’,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원인으로는 인구감소, 다음세대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의 부재, 다음세대 전문사역자의 부재, 교회학교 예산삭감 등을 든다.   하지만, 진짜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주로 교회 ‘안’에서만 선포된다는 점이다. 교회 ‘밖’에 600만명의 다음세대가 있는데 교회들이 교회 밖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희귀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저절로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신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교회학교 생태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대안으로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모델’을 제안한다.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운동은 지역교회와 함께 지역학교에 예배를 개척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운동이다.    현재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은 매주 2,500여명의 청소년들과 예배하고 있으며, 구성원 90%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학생이다. 다함께 찬양을 부르며,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경험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없어서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는 이 상황에 교회 안에서만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있는 학교를 직접 찾아가 예수를 믿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교회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첫째,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교회 공동체에 공유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독 교사들을 발굴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통해 학원복음화 사역을 이어간다. 셋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중심으로 각 학교별 학부모기도회를 조직해 학교와 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민원 넣지 않기’ 운동을 펼쳐간다. 넷째, 교회 공동체에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후 교회학교에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여 학교마다 예배를 개척한다.   과거 교회 안에 다음세대가 많았을 때는 관리 및 목양에 집중하면 됐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교회에 없기 때문에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안타깝지만 타 종교와 이단들이 목숨을 걸고 포교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들이 도전받고, 과거 믿음의 선배들처럼 열심을 다해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구령의 열정을 다시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다음세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교회들이 교회 밖에 복음을 접해 본 적 없는 청소년들에게 좀더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면 교회학교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28:19).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목사·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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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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