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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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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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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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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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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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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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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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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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6-07
  • 나라사랑과 교회의 역할
      해마다 6월이 오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생각한다. 이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보다, 배워서 '생각하는' 세대가 더 많아졌고, '생각하지 않는' 세대도 적지 않다는 뉴스를 접하며 염려하게 된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멈춘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무너지고 찢긴 강산을 회복하고 재건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재건의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은 개인의 소소한 소망에 앞서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었고, 국가경제라는 명분으로 특정 기업에 막대한 지원과 이윤을 몰아주었다. 2023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 군사력 세계 6위의 순위는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행사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동한다.   지난 70년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기록될만한 성장과 부흥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땅의 가난한 민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이 땅에서의 축복을 선포하며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성장의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조정하고 인도하는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다양한 이해에 편승하여 신앙과 신학의 차이를 내세우며 분열과 반목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예배드리는 이들을 향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삼일절 기념주일과 광복절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며 강단에 세워진 태극기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뭉클해졌던 마음과는 사뭇 다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고백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육신의 골육과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통하여 민족교회와 국가교회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교회 앞에 국가 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 등의 명칭이 그렇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된다. 일제하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무장독립운동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제국주의에 맞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분들의 믿음과 나라사랑이 오늘의 자유로운 민주국가의 초석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된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70년을 맞으며 안타까운 이유이다. 본래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이다. 여기에 '거룩하고 사도적인' 본질을 추가하여 교회의 표지, 즉 증거라고 부른다.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의 근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보편적인 교회보다 앞서는 가치로 주장할 수 없다. 로마서에서 민족교회의 근거를 제시한 바울은 작은 로마서라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완결된 가르침을 선언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한민국의 오늘은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기도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인류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것이 성숙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무릎을 꿇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 오피니언
    • 정론
    2023-05-31
  • [정론] 위기가정을 품는 그리스도인들
      ‘가정’의 의미는 단순히 혈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친구, 직장동료, 이웃, 그리고 지역사회를 포함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이웃의 애환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 지역사회와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위기가정, 취약가정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뉴스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을 마주하는 일이 지금보다 줄어들지 않을까?   선진국에서는 위기가정을 지원하는 통합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국가가 주거정책, 교육정책, 돌봄정책을 통해서 아동의 양육을 책임진다고 한다. 그러기에 아동이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라고 말한다.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또한 국가와 마을공동체가 위기가정과 소외된 가정을 함께 책임지고 힘쓰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교회와 성당, 복지센터들부터 세심한 관심으로 이웃들을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나 부속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남아있는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도 자녀 살해 후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종속된 관계 속에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최근 인천에서 남편이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완도에서 극단적 사건도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고립을 대처하기 위한 해결책을 논의하지 못했다. 앞으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희생자’를 위해, 그들의 고립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끔찍한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까지 국가는 무엇을 했을까.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몇 년 사이 일어난 가슴 아픈 사건들을 보며 이제는 좀더 안전한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형식적인 ‘사회안전망 구축’, ‘복지 사각지대 제로’ 등의 선언적인 단어들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외침들이다. 우리 사회가 방치했던 그들의 고립을 뉘우치며 함께 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분배의 불평등이 더욱 공고해지며, 이로 인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야말로 ‘마을공동체’ 개념이 간절히 요구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이는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종속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생명 가운데 하나이며, 독립된 존재이다. 지구별을 떠나 하늘 어딘가에서 별이 된 우리의 아이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목사, 가정협·새가정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3-05-09
  • [정론] 다음세대 위기와 극복 방향
      한국교회는 지금 ‘다음세대 사역이 위기이다’,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원인으로는 인구감소, 다음세대를 만날 수 있는 접점의 부재, 다음세대 전문사역자의 부재, 교회학교 예산삭감 등을 든다.   하지만, 진짜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주로 교회 ‘안’에서만 선포된다는 점이다. 교회 ‘밖’에 600만명의 다음세대가 있는데 교회들이 교회 밖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희귀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저절로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신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교회학교 생태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대안으로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모델’을 제안한다.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운동은 지역교회와 함께 지역학교에 예배를 개척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운동이다.    현재 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은 매주 2,500여명의 청소년들과 예배하고 있으며, 구성원 90%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학생이다. 다함께 찬양을 부르며,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경험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없어서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있는 이 상황에 교회 안에서만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있는 학교를 직접 찾아가 예수를 믿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교회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첫째,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교회 공동체에 공유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독 교사들을 발굴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통해 학원복음화 사역을 이어간다. 셋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중심으로 각 학교별 학부모기도회를 조직해 학교와 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민원 넣지 않기’ 운동을 펼쳐간다. 넷째, 교회 공동체에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후 교회학교에 학원복음화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여 학교마다 예배를 개척한다.   과거 교회 안에 다음세대가 많았을 때는 관리 및 목양에 집중하면 됐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교회에 없기 때문에 전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안타깝지만 타 종교와 이단들이 목숨을 걸고 포교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들이 도전받고, 과거 믿음의 선배들처럼 열심을 다해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구령의 열정을 다시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다음세대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교회들이 교회 밖에 복음을 접해 본 적 없는 청소년들에게 좀더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면 교회학교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28:19).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목사·학원복음화 인큐베이팅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3-04-28
  • [정론] 교회사명 과제인 디아코니아의 이해
      디아코니아라는 용어는 신구약 성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핵심적인 계명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즉 기독교사회봉사라는 단어로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아직 생소하고 개념과 의미가 정확히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못하는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책임이기도 한 디아코니아가 복음주의 내지 보수적 복음주의(근본주의)중심의 한국교회의 신학정체성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였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과정에서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디아코니아는 기독교와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이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제는 예배(leiturgia), 친교(koinonia), 봉사(diakonia)였다. 그 후 교육(didache)과 선교(missio)가 분리 추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공통적인 모든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제는 둘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경건: pietas)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caritas)로 나뉠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균형이 있는 두 개의 날개, 두 개의 바퀴, 두 개의 기둥과도 비유될 수 있다. 다분히 한국교회에는 복음주의적 요소가 우선적이고 강하게 강조되다보니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적 요소에 매진해 온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이웃사랑의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해석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인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첫째로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질문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 율법학자의 입을 통하여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으로 답한 것을 맞다고 인정해주셨다. 즉 하나님 사랑과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웃사랑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이웃사랑의 행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이웃사랑도 균형있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둘째로 디아코니아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최후의 심판의 유일한 기준은 바로 디아코니아적 삶을 살았는가 아닌가였다. 셋째로 디아코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도를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주시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행함으로 우리들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됨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편지요 향기로서 살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적 요소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디아코니아의 삶을 균형 있게 이루어 가야 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다고 진단되고 있다. 교회성장이 멈추고 감소현상이 심각하다. 저출산 고령사회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음세대의 문제가 심각하다. 일반사회의 불신자들에게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게 나오고 있는 통계는 분명하다. 세상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본질적 사명과 책임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목사·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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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4-17
  • [정론] 잃어버린 3년에서 부흥하는 30년으로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가 2022까지 3년이라는 시간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될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도 코로나 팬데믹을 피할 수 없었고 고스란히 겪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코로나를 겪은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3년의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먼저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첫째, 교회 성도들을 잃었다. 대면예배가 제한되면서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예배생활이 전반적으로 약화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예배의 경건성이 약화되었다. 현장에서 받은 성령의 감동이 약화되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약화된 것이다. 둘째, 신앙의 열정을 잃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예배를 드리다 보니 찬양의 소리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기도의 소리가 잦아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찬양의 소리, 기도의 소리가 약해지면서 예배의 열정이 약해졌다. 셋째, 전도와 선교를 잃었다. 코로나로 인해 반기독교적인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교회의 전도와 선교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출입국이 제한되고 선교활동이 제한되므로 코로나 3년은 전도와 선교의 정체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교회에 남겨 놓으신 것들이 있다는 것에 다시 소망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나? 첫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공동체이다. 두려워하는 세상을 향해서 교회는 외쳐야 한다. “여기 불변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고 세상을 향해서 외쳐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다. 둘째, 세상에 남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성령은 지금도 교회와 함께 하면 교회를 인도하고 계시고 일하고 계신 줄 믿는다. 코로나를 겪은 교회가 지금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아갈 때에 전도와 선교의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아직도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다. 모압땅에서 다 잃어버리고 남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셨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그 남아 있는 진실한 성도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는 줄 믿는다.   코로나로 3년동안 교회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들을 붙들고 불평하고 좌절해서는 안 될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남겨두신 것들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울산 명성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03-21
  • 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 사랑이란 대개 예배 다음에 추가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선한 행동으로 인식된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 이웃 사랑이든지 아니면 선교나 전도를 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실천하는 행동이 이웃 사랑인 경우도 있다. 이 말은 이웃 사랑이 고유한 자기영역을 확보하기보다 언제나 구원이나 전도와 관련해서 부수적으로 등장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이 구원과 관련되어 등장할 때는 이웃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되면 안된다는 이신칭의론의 교리 하에서 제한되어 등장하고, 전도와 관련될 때는 전도의 도구로 스스로 이웃 사랑을 제한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런 제한들이 어쩌면 개신교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조건을 달거나 스스로 제한시키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경의 많은 본문들 가운데 특별히 막12:28-34절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고려할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는 소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주제이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첫째를 하나님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답변을 끊지 않으시면서 이어서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답변하셨다.    서기관이 질문한 것은 첫째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둘째까지  다시 말하면 두 개의 계명으로 답변하셨다. 성도님들 가운데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혹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덤으로 주어지는 사은품 정도로 폄하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나님 사랑에 온갖 정성을 다하다 보니 이웃 사랑은 조금 쉬어도 되거나 포기해도 무방한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는 질문에 답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첫째와 둘째로 답변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의도는 첫째에 해당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동시에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마치 조직신학 기독론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다는 답변과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참 하나님이 51%이고 참 사람이 49%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 100% 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 또한 100% 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기독론 이해인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각각 100%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똑같이 소중한 계명임을 밝혀 주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점도 있다. 우선 사랑의 대상이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사람 사랑이 곧 우상숭배로 변질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예배라고 말한다면 이웃 사랑은 사랑의 실천, 곧 선행으로 말한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은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구분은 하지만 동시에 함께 강조하는 경우를 보여 준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로 중요한 계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담아서 소개해 주듯이, 우리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도 마치 주님께 하듯 하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골3,23)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씀한다(히13,15-16절).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인용해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과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찬송의 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제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드렸다고 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해도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위할 수 없다. 반대로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까지도 다 드렸다고 합리화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은 분명 다른 것이고 구별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도 없고 흡수할 수도 없다. 구별은 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되고 심지어 차별화되어서 그 둘 중 하나를 우선시하고 다른 하나를 뒤로 미루는 일은 막12,28-34절은 물론이고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왜곡하는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성도가 천국가는 날까지 쉬지 않고 실천해야 할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이어지는 동안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같은 무게로 성도가 이어나가야 할 예배하는 삶의 두 가지 상호보완적 모습인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예배와 같은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예배드리는 삶의 온전한 모습이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단지 훌륭한 도덕이나 윤리일 뿐이지 예배는 아닌 것처럼,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참된 예배가 아니라 거짓으로 위장된 예배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상보적 관계 속에 있다. 끝으로 칼 바르트의 탁월한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기도와 실천을 하나로 엮어내는 멋진 표현이다. “기도는 두 손을 모아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은 두 손을 펴서 기도하는 것이다!”/아신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3-05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각자 자기 의미가 있고 주장이 있는 개체가 모여 이룬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같은 정치적 비전으로 모인 정당도 그 안에서 의견이 분분하며, 같은 교육적 목적을 가진 학교도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교육관이 달라 서로 갈등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님으로 모시는 공동체이지만, 그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신앙고백하고 같은 방식으로 선교적 비전을 나누는 일은 드물다. 더구나 오늘 한국교회가 특정 주제나 사안에 관하여 양분돼 거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듯한 국면에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과제이다.   하지만 우선 뜻부터 톺아보자. 보통 ‘연합’이나 ‘일치’라는 단어의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복수의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상황을 전제하는 이 단어가 마치 하나의 의견, 하나의 정책, 하나의 선택을 따라 모두 ‘단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만약 구성원 중 반은 동으로 가자 하고, 다른 반은 서로 가자고 하면 그것은 연합과 일치에 실패한 것일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 사역에 집중하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회심에 집중했던 것은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에 위배되는 것일까? 연합이나 일치는 반드시 모두 같은 의견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뜻’의 같음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뜻을 품어야 하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으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셨듯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뜻은 언제나 ‘이웃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다만 누구를 살리는 일에 집중할까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상이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연합이나 일치를 헤치는 행동이 아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 전도에 매진할까, 구조적인 악과 싸우며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할까, 이것이야말로 부름받은 소명과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의 다양성 안에서 신자의 자유, 개교회의 선택이 작동하는 부분이다.   행여 교회 안에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한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대상, 하나의 상황만을 우선시하며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일대 사업임을 천명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헤치는 것이 아닐지 조심해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서 신앙 양심과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예언자적 삶을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도들이란 언제나 예수 안에서의 사귐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지, 그 사귐 안에서 자기만의 비전과 꿈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다른 구성원들의 의미를 말살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적 사귐 자체보다, 그리스도교적 사귐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교적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됩니다.” 일치는 생각의 같음, 행동의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직의 견고함, 활동의 효율성과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근본적인 방향성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살리는 방향’ 말이다. 우리와는 다른 대상을 향해 움직인다 해도 성도 개인이나 개교회가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는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롬 8:28)이고 ‘함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것’(엡2:22)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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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3-03
  • 한국교회의 현안과 방향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현안이 넘쳐 나는데 나아갈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일반 문화, 세상이 기독교를, 교회를 고루하고 초라하게 보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이토록 비참하게 보일 때가 없었다. 교회는 배타적인 기관이 되어 사회 속에 소금이 되지 못하고 소금을 뿌리고 있고, 빛을 밝힐 수 없는 촉 나간 전등이 되어 사람들의 시각을 밝혀주지 못한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 못하고 멋도 없고,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고, 지적으로도 빈곤하여 자기들끼리도 소통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통으로, 인간이 만든 법으로, 그리고 교회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제정한 신조와 교리에 매장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미6:8)”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장들에게 절기의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르신다(말2:3)”고 하였다. 지금도 우리들, 만인 제사장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희생과 헌신, 봉사를 구약의 희생제사의 똥처럼 얼굴에 바르고 계신다. 우리들에게 있는 현안의 문제들을 보면 더욱더 실감이 난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현안을 풀어갈 시간도, 능력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 생각도 없다. 모두 다 ‘나 몰라’, ‘나는 상관이 없어’ 하고 살고 있다. 사실상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견지하고 살기보다는 믿음의 시각만 유지하고 살았다. 그래서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이론은 있었으나, 실천하는 실행의 자세는 가지지 못했다. 자연히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았다. 그래서 ‘세상보다 못한 기독교’가 되었는데 여전히 ‘세상보다 나은 기독교’라고 여기고 반성도 없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야 할 자족을, 세상의 만족으로 둔갑시켜 자족의 삶은 교회 안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사장되어 버렸다. 그래서 ‘자족의 행복’이 아닌 ‘만족의 행복’, 그 탐욕의 삶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추구가 준 잉여가치 속에 있는 가장 신앙적이고, 신학적이어야 할 영적체험도 문화적이고 미적체험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결국 신앙의 가치는 디자인에 귀속되었다. 그래서 내용보다는 형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결국은 신학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은 분리되었다. 삶의 현장에서 신학은 논쟁으로만 드러나고, 신앙은 다름이 아닌 낯섦과 어설픔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안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방향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 속에 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신조, 그리고 문화적 신앙진술을 선포하지 아니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하나님 나라를 그들의 관계 속에서 삶으로 선포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신조도 아니었고, 교회의 강령도 아니었고, 더욱이 신학도 아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며, 삶 속에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살았다. 이 복음의 본질, 관계됨으로 맺어지고 선포되는 삶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나아갈 방향이 없다.   교회의 미래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그 방향이 있다. 그 당시 세상의 문화에 동화된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엡2:5).”/전주효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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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2-03
  • 개신교신앙의 구조변동을 주목하라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가장 흔한 설명은 교회의 도덕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교회진단은 교회의 신뢰지수가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으며,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의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그 원인이며, 교회의 이기주의적인 태도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주된 원인을 도덕적 문제에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방향과 돌파구는 목회자들이 윤리적으로 각성하여 청렴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교회를 진단하는 또 다른 관점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서 설명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과제는 사회속에서 교회의 공적 기능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과제는 교회의 공공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이런 진단에 일면 동감하지만, 대부분 이런 진단은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일반론에 그치는 설명이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DNA, 즉 개신교 신앙의 형질변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즉, 한국교회 전반에 개신교 신앙의 구조변동이 왔으며, 교회가 그 변화에 적실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개신교 신앙은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탈전통의 기독교로 이동하고 있다. 오늘의 신자들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교회 직분과 같은 전통적 방식의 신앙 패턴에서 탈피하여 개인화된 자유 선택적 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물론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탈전통 기독교인들 가운데 기성교회의 틀에서 완전히 도망쳐 나온 해체적 기독교인이 있는가 하면, 전통신앙을 일부분 유지하면서 일정한 범위에서 자유로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유형이 있다. 한국교회는 제도종교,제도교회로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신앙 패턴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둘째, 주술적 기독교에서 계몽적 기독교로 변동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은 샤머니즘과 기복종교 성격이 강했으며 목사의 역할이 마치 주술사처럼 개인과 가정을 향해 물권(物權)과 영권(靈權), 복과 저주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일종의 영매(靈媒)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제 오늘의 교회에서는 요술 방망이를 휘두르며 주술적 발언이나 엄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마법에 걸린 신앙에서 깨어났으며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신앙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금의 평신도들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기독교방송이나 유투브 채널을 찾아다니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신앙의 자양분을 채워가는 자율적 신앙이 증가하고 있다. 셋째, 세속화가 기독교 신앙 의식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속화는 세계안에 깃든 신성한 힘의 작동이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 성스러움과 초월적 세계가 추방되며, 이것은 결국 개신교 신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기도 체험과 하나님을 향한 예배 행위, 더 나아가 초자연과 신비적 신앙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물질 욕망에 사로잡힌 현세 신앙 일변도에서 초자연을 향한 상승하는 신앙으로 양육해 가야 하며, 일상의 삶을 살지만, 초월성을 지향하는 성례전적 존재론의 신앙이 구비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쇄신과 미래 방향을 모색하려면 교회 생태계에서 나타나는 외형적인 변화만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탈교회 현상이라든가, 교회의 숫적 감소, 그리고 목회자 이중직과 같은 교회현상에만 주목하는 것은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그 현상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교회의 신앙 의식 내부의 변화들을 관찰하면서, 이를 신학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동춘/기독연구원 느헤미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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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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