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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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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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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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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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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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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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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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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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한국교회, ‘지구 열대화’ 고민해야
       낯설지 않은 시사용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는 이제 기후 위기(Climate Crisis)로 전환 되었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이상 기후 현상이 나타나 지구촌 인류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자연 재해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위기감이 감지되고 있다. 북극과 남극이 지금 상태로 계속 녹아내리면 언젠가 서울까지 물에 잠기는 상황이 온다는 가상 지도까지 등장했다. 물의 도시로 한 해 수천만 명 관광객이 찾는 베니스, 도시 중앙의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이 물에 잠기는 사태가 수시로 발생한다. 바야흐로 지구 온난화를 넘어서는 기후 위기가 심각해진다.    그렇게 수십 년 세월이 흘러갔다. 지구촌 국제사회는 탄소중립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자국 이기주의에 몰입되어 ‘너 죽고 나 살자’는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산업은 발전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타 멈추지 못하고, 이익에 눈 먼 세계는 자연과 환경을 착취 수준으로 이용한다. 드디어 2023년 7월 UN 사무총장이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를 선언했다. 온난화를 지나 열대화, 즉 지구가 끓고 있다고 폭탄 선언한 셈이다. 그 원인제공자는 누구일까? 학자는 지목한다. 바로 인류라는 것이다. 지구는 인류의 등장, 즉 '인류세'(Anthropocene)로 인해 더 이상 자체 정화, 자체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경고다.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 생명과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독교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지구 열대화라는 비극에 기독교가 혹 어떤 부정적 역할을 한 면은 없는가? 돌이켜 봐야할 시점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옷을 찢고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구 열대화에 이른 이 상황을 돌이켜 봐야한다. 우리가 누리는 자연은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이며, 선물이다. 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숨 쉬며 은혜에 기대어 살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자연 파괴, 환경 파괴로 다가왔다면 우리의 죄악은 사회적으로도 선을 넘어섰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크리스찬들은 가정, 교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환경문제를 고려해야 하며, 나아가 지구 열대화를 막기위한 적극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자연은 하나님의 고귀하신 창조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청지기(Stewardship) 책임을 다해야 한다. 소극적으로 생활 측면에서 절제해야 하지만 교회 차원에서 적극적 대응을 해야한다. 최근 기업, 산업이 도입하고 있는 ESG가 그것이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 차원에서 기후 위기에 대안적 행동을 해야한다.   교회가 구원에 관한 특별은총만 강조하게 된다면, 교회의 공공성은 더욱 사회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교회가 스스로 게토화 되는 위기를 자초할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들은 역사가 지금도 재현되어야 한다. 지구 열대화의 시대에 들어선 현재 ESG 도입을 교회가 고려하고 실행해야 한다. 탄소제로, 기후 위기, 환경 회복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며 곧 믿음의 선한 행동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경 파괴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레문화연구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9-25
  • [정론] 한국교회위한 책임을 다하는 총회
       올해는 9월 18일부터 22일 사이에 통합, 합동, 고신, 백석측 장로교단의 정기총회가 줄줄이 개최된다. 한국교계에서 장로교단은 최대의 주류교단이다. 여타의 교단에서 들으면 섭섭하게 생각하지 모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단례로 예장통합측만 보더라도 111년의 역사와 9,500여개의 교회, 2만 2천여명의 목사와 230만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교단이 서너 개 더 있으니 사실상 한국교회는 장로교단과 장로교단이 아닌 교회로 분류된다고 보아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역사와 최대의 교세를 가진 장로교단이라는 사실이 결코 교단의 크기를 자랑하거나 교세의 힘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계에서 절대적 위상과 교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울림이 크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장로교단은 그 체급에 맞는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할 필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계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에 주류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그 위상에 걸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 해주기를 바라면서 올해 장로교단 총회에 기대하고 싶은 점 한 두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한국교계 위상의 제고와 대 사회적, 대 정부적 메시지의 볼륨을 높이는 일이다. 한국교회 위상의 제고는 연합과 일치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일반 성도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교계 연합단체로 나뉘어져 있다. 이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기대가 아니고 당위이다. 물론 연합은 어렵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주류교단 장로교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나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금년 총회를 통해서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으로서의 위상을 재인식하고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공학적 과제를 넘어 시대를 향한 장로교단의 신앙적 사명으로 인식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요 기도이다. 장로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보다 공고히 하고 그 힘으로 한국사회 전반을 향한 대사회적, 대정부적, 대국민적 메시지를 낸다면 그 목소리는 더욱 큰 울림이 될 것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던 당시 교회의 목소리는 국민들의 기대를 담아냈다. 교회의 목소리는 어느 한 시대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시대 모든 대상을 상대로 끊임없는 깨달음을 자초하게 하는 죽비로서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장로교단은 교회연합을 통해 한국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한다. 최대의 교세와 능력을 가진 장로교단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제 한국의 장로교는 자신의 교단내에서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품고 리드하는 장자의 리더쉽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나아가서 올해 장로교단 총회에 바라는 것은 교단내 정치적 목회적 약자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사고를 가지는 일이다. 단적인 예가 교회내 여성에 대한 정책적 제도적 문제이다. 여전히 여성안수는 미래의 과제로 넘겨지고 있으며 여전히 여성 총대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다행히도 예장합동 총회는 여성사역자 지위 향상을 위한 안건을 다루고 예장통합은 제도적으로 여성총대 확대방안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아직도 소극적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대가 무르있었다. 조금 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어떨까? 장로교단은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요 한국교회의 최대의 리더교단이 아닌가. 왜냐하면 아직도 목회적 약자에 대하여 소극적 단계조차도 이르지 못한 필자가 소속된 작은 교단이 그런 장로교단을 따라가고 싶기 때문이다. 장로교단 성총회에 하나님의 은총을 빈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9-12
  • [2023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갱신해야 교회가 산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은 교단들을 중심으로 매년 9월은 교단 총회의 계절이다. 성결교단과 순복음 등 몇 교단 총회가 5월에 있고, 대부분의 교단 총회가 9월에 열린다. 총회는 해당 교단의 최고 의결 회의체다. 교단의 헌법에 규정된 내용에 따라 총회가 열리고 안건들을 결의하고 그에 따라 교단의 일 년 살림살이가 진행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교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나 국가의 법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교회법을 거룩한 법이라고 한다. ‘교회법이 사회법보다 우선’이라는 대원칙이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불변하는 신앙적 입장인 까닭도 이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어느 교단이나 그 소속 국가의 사법 판결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은 사회법보다 앞선다. 교단 총회 앞에 거룩하다는 단어를 넣어서 성총회(聖總會)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장로교 교단들에 이른바 ‘장자 교단’의식이 강하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서 두 가지가 중심일 테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장로교의 신학과 교리가 가장 올바르다는 자의식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교인 수와 재정을 중심한 물량적인 교세로 보아서 장로교가 가장 크다는 점이다. 신학적인 점에서야 다른 교단들의 신학적인 전통들도 나름으로 주장하는 바가 있을 테고, 장로교 교단들 안에서도 서로 입장 차이가 나기도 하니 그렇다고 치자. 교세 문제는 한국 교계 전체가 작동하는 데서 현실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장로교가 아닌 교단의 목사로서 장로교 교단들의 장자 의식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장자 의식에서 진짜로 중요한 점이 따로 있다. 장자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의 장남이라면 집안이 어려울 때 자신을 던져서 집을 지켜야 한다. 집안이 어지럽고 기울어져 가는데 나 몰라라 한다면 장자답지 못하다. 옛날의 우리네 삶의 관습으로 한다면 장자에게는 특권도 많고 책임도 무겁다. 이제는 법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부모의 유산 상속에서 장자의 몫이 컸다. 종가집 전통이 내려오는 가문의 재산에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장손이 종가를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책임이 막중했다. 연중 이어지는 제사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형제 친족들 대소사도 꼼꼼히 살피며 가문 전체를 이끌어야 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장자 의식이 절실하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죄에서 돌이켜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누가 먼저든 나서서,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예장통합의 명성교회 세습 논란은 교회 내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의 단면일 뿐이다. 교회의 병폐를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의 상황도 폭발할 정도다. 윤석열정부가 이끄는 우리 사회 안의 심각한 분열과 최근의 일본 오염수 방출 상황,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갈등, 미중의 대결 양상에서 우리나라의 생존 방향, 오늘날 세계의 전쟁과 기후 위기와 빈곤의 문제 등 인류의 삶이 위기다.    장로교 교단들에 바라며 부탁을 드린다. 장자 교단, 현실적으로 맞다. 한국 교회의 중심 흐름을 장로교 교단들이 이끌어 왔다. 그만큼 한국 교회 역사의 영욕(榮辱) 양면 모두에 장로교가 연관되어 있다. 2023년은 어쩌면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회복할 마지막 몇 년의 시작일지 모른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올해 장로교 교단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이후 한국 교회의 상황이 상당 부분 걸려 있다. 9월 총회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08-29
  • [정론] 한국교회와 복음의 본질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과의 해석을 통해 복음을 살아내며 세상에 참여하는 성육신적 공동체이다. 복음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느슨해진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교회이며, 그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마다, 끊임없이 교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항상 기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의 삶에 투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로 그 존재의미를 확증하며, 하나님의 선교는 기독론으로 인해 그 의미가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음과 단절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우리가 길을 잃은 지점은 어디며,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가 사회문화의 지배적 가치관과 타협하고 세상 한복판에 내던져진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이 제도화와 세속화의 덫에 갇힐 때, 복음을 살아낼 능력을 상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잃어버리며, 회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상실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급진적 회심은 교회의 삶에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핵심 요소이다. “과연 서구가 회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레슬리 뉴비긴이 37년간 인도 선교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조국의 상황을 직시하며 던진 질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회심”에 관해 심각한 도전적 질문이 필요하고, 그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와 계기와 필요하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글로벌 사회문화의 변화에 맞물려 한국 사회문화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몰락을 촉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이다. 구약 예언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에 대해 비탄에 젖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굴복과 회개를 통해 돌아오라는 부르짖음을 외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실재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출발점은 교회가 다시 재발견해야 할 핵심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롭게 갱신된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가 일으킨 개인과 사회와 세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좌표를 새롭게 한 '선교운동'이며 '복음 운동'이었다. 이제 복음은 우리의 실상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허물과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하라는 요구한다.    2023년 2월 8일, 미국의 변방인 미국 켄터키주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상처, 두려움, 절망, 소외감, 박탈감,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Z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날, 수요 채플 후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하는 학생들은 남아서 기도하자”라는 설교자의 도전에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교수나 목사 혹은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이 강단 앞에 모여 기도를 시작했고, 작은 기도 모임이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부흥 운동으로 점화되었으며, 미디어를 통해 세계로 퍼지고 있다. 16일 동안 이어진 에즈베리 대학교 부흥 집회는 단순히 내부로 집중된 내향적 운동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와 주변의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이 하나님을 열망하게 하시고 복음에 겸손히 순종하게 하셨다. 에즈베리 부흥 운동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예언자적 비탄과 슬픔, 애통함을 보며, 죄의 용서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리고 기쁨과 감사를 발견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부흥 운동은 사회문화와 세대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각성 운동이며 갱신 운동이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의 변혁을 가져오는 운동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참된 부흥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부흥과 갱신은 인간 편에서 급진적 겸손과 전적인 굴복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2024년 9월 로잔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는 고백과 회개 운동으로서 복음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의 영적 활력과 사회문화적 변혁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서울신대교수·한국로잔위원회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3-08-03
  • [정론]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어둡고 공허한 미지의 땅 조선에 생명을 걸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선교사들이 있다. 이 분들의 신앙과 연합정신,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출발했다. 그러나 광복 후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진보와 보수의 극한 대립으로 정체성이 실종된 채 정쟁에 몰두하게 됐다. 사회는 물량주의와 한탕주의,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이웃을 향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랑의 문화가 사라져버렸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가 1959년 이후 신사참배의 회개문제와 교회재건을 이유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교세의 확장을 목적으로 정치권과 결탁하며 ‘지성주의’와 ‘성장주의’ 패러다임에 빠지게 됐다. 신학은 사변화되어 교회존재의 본질을 상실한 채 사분오열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교회마저도 각양의 불미스러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한국교회와 연합기관들도 자신들의 이권과 교권다툼에 휘둘려 여럿으로 갈렸다.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고 교회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선교의 문이 더욱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회복의 마중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자기희생을 사명으로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땅에 한국교회 선교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복음 촛대의 본질을 회복하며,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서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제언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순교의 피로 이룩한 140년 동안 박해의 연단 속에서도 오뚝이와 같이 다시 일어서는 숨겨진 저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육·보건·복지·정치·사회·문화 등으로 사회계몽을 이끌어왔고, 우리 사회의 급속한 성장기 저변에는 한국교회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중심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어 왔다.   그러나 성장의 정점에서 풍요 가운데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대 사회적인 사명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갈등의 시대에 세상과 소통에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화평케 하지 못해 마치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이 돼버렸다.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기에, 이제 세상의 힘없는 자들의 신음 소리에(사1: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혼의 절규소리에 반응하는 ‘코람데오’의 심장으로 서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현실에 통탄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먼저, 근본적인 복음의 가치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혀서 교회 간 양극화를 초래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두번째로 교권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목회자다워야 한다. 목회자는 언행불일치적 삶이 아닌, 거룩한 부담감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 거룩한 일이 시작되는 데에 마중물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예장 백석총회 사무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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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7-17
  • [정론]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필요한 시대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 ‘코끼리는 긴튜브’라고 생각하고, 굵은 다리를 만지면,‘코끼리는 통나무와 같다’고 말하며, 몸통을 만지면 ‘코끼리는 넓은 벽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또한, 표류하던 배에 있던 사람이 작은 무인도를 보 면육지로 갈수 있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무인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이 멀리서 표류하다가 흘러오는 배를 보면, 저 배는 나를 구조해 주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각자 보는 관점과 경험에 따라 다른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임마누엘칸트는 바로 이와같이 서로 다르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두고‘세계관’이라고 했다. 최근 시리즈로 나오는 몇 영화들이나 소설들, 그리고 최근 회사들의 마케팅에 도자기들 나름의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홍보와 판매를 한다. 최근 한국의 편의점들은 각 브랜드마다 자기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가면서, 각 브랜드에 맞는 세계관을은 연중 소비자들에게 심고 있다. 그래서 어느 소비자는 C편의점의 도시락과 빵을 좋아하고, 다른 소비자는 G편의점에서 만맥주와 안주를 구입해서 먹는다. 세계관은 단순히 학문적 분석을 위한 도구를 넘어서 일상에서도 쉽게 접하고 인식할수 있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 세계관의 출발은 구한말 유교문화의 역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조선말기, 철통같은 쇄국정책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의 부정적 문제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 과도한 문치주의로 인한 당파성과 계급적 차별주의, 여성과 어린이의 차별을 제도화하는 가부장적 구조, 맹목적 명령과 복종이 난무하는 효사랑의 강요, 실용적 지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과학적 합리성 부재의 가치관 등이 구한말시대에 600년을 지배해 온 유교문화의 몰락을 이끌었다. 그 빈틈에 개신교 회의 외국선교사들이 자리를 차지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관적인 현실을 우리나라에 맛보게 하였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의 땅을 위해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이를 위해서는 다른 종교인들과도 손을 잡고 하나된 민족의 독립을 찾고자 했다. (당파성타파)    또한, 남녀노소의 수백년 고착화된 차별적 구조를 깨기 위해 많은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여성운동의 장을 마련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힘썼다. (차별주의철폐) 봉건적 사회문화 속에서 경직된 학문에 대해서 성경과 외국의 다양한 지식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하고 꿈꾸게 하는 역할(농촌계몽운동, 여성인권운 동, 의료기술의 발달 등)을 하면서, 교회는 그 중심의 자리에서 대한민국을 완전히 변화된 나라로 이끌었다. 그럴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세계관이 유교적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관점, 특히 세상을 바꾸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큰 역사적 변화를 이뤄냈다.   그때 그 부흥의 힘으로 한국교회는 100년도 채 되지않고 세계선교 2위의 나라까지 성장했고,국가의경제도선진국반열에오르게하는중요한역할을했다. 600년동안 땅바닥만을 쳐다보며 살도록 만든 세계관을 하늘과 하나님을 바라보게하는 변혁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한 것은 바로 한국교회이다. 그런데 막 꽃을 피운 한국교회는 100여년 전 멸망했던 유교의 세계관을 좇아가고 있다.   정치에 저급한 훈수를 두는 정교유착된 종교가 되고 있고 기복주의 및 물질만능주의에 빠져교회를 기업처럼 세습하는 것에 윤리적 민감성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성적 타락과 재정사고의 만연된 모습은 도덕적 타락에 빠져있던 중세교회와 다를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나만 옳다고 맹신하는 배타주의와 나만, 내 교회만, 내 직장만, 내 구원만 이루면된다는 이기주의에 매몰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이끌 세계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최근 영화 ‘수리남’, ‘더글로리’, ‘오징어게임’ 등에서 비춰진 추하고 불편한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수 있다. 따라서 이제 진흙탕 속에 빠진 기독교세계관을 다시 끄집어 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한국교회는 희망의 빛이 될수 없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변화를 넘어 또 다시 개혁을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배는 반드시 침몰할 것이고, 다시는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그동안 잘못된 길로 가던 발걸음을 옮겨 다시 제대로된 올바른 세계관을 세우는 생명과 영원의 길을 제시하는 곳이 돼야 한다.   먼저는 혐오와 대결이 아닌 환대와 대화를 이끌고 경쟁과 다툼이 아닌 협력과 화해를 선도하며 개별과 지배가 아닌 공동체와 사귐의 본이 되고 방관과 묵인이 아닌 참여와 책임을, 그리고 인간중심이 아닌 생태와 창조세계중심의 세계관을 내세워 다시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와 기독교가 될 때, 한국교회는 지금의 난관을 이겨낼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4차 혁명의 AI와 Chat GPT시대 속에서 교회가 이제 더욱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곳이 되어 교회의 개혁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새로운 관점의 부흥을 이루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연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07-14
  • 교회연합의 실천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는 장로교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장로교 간판을 달지 않으면 목회가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장로교는 한국사람들에게 마치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말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동시에 장로교 하면 교회분열의 역사가 떠오르게 된다.    수도 셀 수 없는 장로교단들은 교회가 얼마나 분열되었는지 그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분열의 역사 속에서도 연합을 지향하고 실천하려 했던 피나는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사 안에서 펼쳐진 자랑스런 연합의 발자취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개신교는 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선교되었다. 본격적이라 함은 개신교의 선교(전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교를 두고 네비우스정책에 따라 감리교, 미국북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이 지역을 분할해서 한반도의 선교에 힘썼다. 같은 지역을 두고 경쟁하듯 하는 선교 대신 각자의 영역을 보장해 주는 선에서 상호협력을 기대한 현명한 선교정책이었다.   그러다 1907년 조선에 장로교 첫 노회가 설립되었다. 독노회로 설립된 장로교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미국북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이 모두 참여한 연합된 기구로서 한국에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설립된 것이다. 각각의 장로교단들이 자신들의 교단을 이식한 것이 아니라 피선교지인 한국에 하나의 연합한 장로교를 설립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개신교사에 자랑스런 연합의 정신 그리고 연합의 첫 사례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교회연합의 자랑스런 흔적은 장로교의 교단명칭에서 드러난다. 장로교단들의 공식적인 명칭들을 살펴보면 모두 “대한 예수교 장로회”로 사용하고 그 후에 통합 혹은 합동, 개혁 등의 교단별 명칭이 뒤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명칭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란 이름 안에 장로교단이 지향하는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모든 교회는 사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는 예수교이며 그다음 교단의 특징을 규정하는 교회정치제도가 장로정치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장로회라는 말이 뒤따른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장로교가 아니라 장로회라는 이름이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장로교가 아니라 장로회라는 이름 안에 담긴 뜻은 우리는 모두 장로교 안의 하나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장로회란 이름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교회연합의 정신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교단을 절대화하지 않고 모두 예수를 믿는 예수교 안에서 장로교회의 성격을 지닌 장로교인들의 모임으로서의 장로회란 명칭은 자기 교단도 장로교 안에 속한 하나의 모임으로 겸손하게 규정하는 연합의 정신을 표현하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국개신교사의 또 하나의 자랑스런 연합의 열매를 소개하고자 한다면, 필자가 봉직하는 아신대학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님들이 아신대학교란 이름보다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익숙하게 들어보셨을 줄 안다. 최근에 아신대로 학교명을 바꾸었는데 원래의 교명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였다. 학교이름에 연합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학교이름에 연합이란 이름이 들어갔을까?   아신대는 1974년에 개교한 49년된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신학대학 이름에 연합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매우 특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신대는 한국교회의 각 교단의 대표적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신학대학교이다.    아신대가 설립된 1974년 그리고 설립과정 중에 있었던 1960년대는 한국장로교에서 가장 뼈아픈 분열의 시기였다. 합동과 통합이 분열된 시기였고 그 상처를 결국 싸매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열의 시기에 통합과 합동 그리고 고신의 지도자들이 성결교 지도자와 함께 연합해서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신학대학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선교를 통해 성장한 한국교회가 다시 세계선교를 위해 아시아 교계지도자들을 초청해서 대학원 수준의 신학교육을 통해 다시 각자의 출신지역으로 파송하기 위해 세워진 선교지향적 신학교육기관이다. 선교의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개신교가 연합해서 세운 신학교육기관인 것이다.    설립 당시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통합의 한철하, 합동의 김의환, 고신의 오병세, 서울신학대의 조종남 박사 등 기라성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빌리 그래함과 사무엘 마펫 등의 미국교회 지도자들과 연합해서 선교 중심의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런 자랑스런 교회연합의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열의 상처 이면에 교회연합의 열매도 자랑스럽게 맺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라기는 통일된 대한민국에서는 분열된 개신교들이 각각의 교단과 신학대학교를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합하는 마음으로 연합신학대학교를 세우고 그로부터 북한을 선교하고 목회를 감당할 교계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신대가 그런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다.   교회연합은 교회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생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교회분열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나누는 죄이다. 그러나 교회연합은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싸매고 치유하는 행동이다. 성령의 역사는 나누어진 마음들을 하나로 사랑으로 싸매주는 사역인 반면, 사탄의 역사는 성령에 거슬러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하나의 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분열로 치닫게 한다.   무엇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올바른 성도들은 마땅히 분별해야 하며 교회의 연합을 위해 그리고 공동체의 건강한 하나됨을 위해 깨어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연합의 역사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통일한국의 연합된 한국교회를 꿈꾸어 본다./아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6-26
  • [정론]호국의 달에 생각하는 진정한 호국
    6월은 호국의 달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기 위해 우리 모두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6월이 왜 호국의 달이 되었는가?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남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침략을 받았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남한을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전쟁이었지만 남한 입장에서 보면 겨레의 인권을 파괴한 무력 침공일 뿐이었다. 전쟁의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지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쟁 목적은 성취되지 않았다. 100보를 양보해서 해방전쟁(적화통일)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참담한 비극을 지불하고 이 나라가 통일된다 한들, 그 통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전쟁도 합리화될 수 없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이 땅에서 피 흘린 경험을 가진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증언해야 한다. 전쟁은 무익한 것이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은 예방해야 한다고!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이 공산화가 되더라도 전쟁을 포기하라는 말이냐? 아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휼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역사가 그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1950. 6. 25 – 6.25 발발 1953. 7. 27 – 휴전협정 1972. 7. 4 – 7.4 공동성명 1991. 12. 13 - 남북기본합의서 2000. 6. 15 – 6.15 선언 2007. 10. 4 – 10.4 남북정상선언 2028. 4. 27 – 판문점선언 2018. 9. 19 – 평양공동선언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남과 북은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적인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면서 달려왔다. 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남한의 통일정책은 북진통일이었고 그러다가 1974년에 남북 최고 지도자들은 전혀 새로운 3대 통일정책에 합의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그 이후 남북 정상들의 통일 회담은 7·4 성명에서 합의한 3대 통일 원칙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었다. 7·4 공동성명은 남과 북 모두 자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비판받아 왔다.   그렇다. 그게 일정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단으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흡수한다는 불멸의 통일 원칙이 자주적, 민족적 역량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이룬 것은 과소 평가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열어놓은 평화의 기초가 16년 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었다.   1990. 12월 남북 당국자들은 통일의 과정까지 대략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 1단계– 교류협력, 2단계– 남북연합, 3단계- 남북의 평화통일! 이렇게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는 10년 후 드디어 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김대중/김정일)들이 만나 통일의 방식과 통일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하게 되었다.   6·15 공동선언 1항은 자주적 통일원칙을 확인하였고 통일 방안으로서 교류 협력, 남북 연합, 평화적 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구체화 시켰다. 남북대화의 역사에서 최초로 물꼬를 튼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이론적으로 거의 완전한 설계도를 완성하는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었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제적 실천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남북이 상호 국가적 존엄을 인정하고 통일의 기운을 최고조로 이끈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6·25의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려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그렇다. 이것이 전쟁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의 보편적 정서였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였다. 1991년에는 남과 북이 서로 묵인하는 가운데 U.N에 동시 가입했고 1990년과 1992년에는 한국전쟁의 실제적 당사자였던 러시아,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혈맹이었던 미국도 한국전쟁에서 적으로 만났던 중국과 일찍이 수교했다. 6·15 정신은 6·25 정신 쇠퇴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환경 변화와 대한민국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 알맞게 발전적 성숙을 이룬 것이다.   6·25를 잊지 말자는 호국이 여전히 북한에 대한 증오나 적대감으로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대한 이해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상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평화의 기운을 진작시켜 가는 것이 진정한 호국이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하면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힘이 없어서, 의미 있는 저항 한 번 못 하고 강대국에 의해 분단을 겪어야 했고 그 결과 참혹한 한국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그때는 힘이 없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이야 무슨 변명이 용납되겠는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협(가능성)은 핵을 보유한 북한에 있지 않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요, 세계가 인정한 선진국 대한민국이 전쟁 예방 노력을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는 준엄한 역사적 단죄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달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이 샘솟듯 솟아나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평화만이 살길이다.   평화의 사도인 한국교회여, 평화만이 진정한 호국의 길임을 잊지 말자.
    • 오피니언
    • 정론
    2023-06-20
  • [정론]일반은총에 덜 저항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내려주신다. 그런 은총을 신학자들은 '일반은총'이라고 불러 왔다.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하시는 은총인 특별은총에 비해서, 일반은총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미쳐지는 은총이다. 그렇기에 일반은총은 구원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세상이 그래도 유지되며 존속해 갈 수 있도록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다. 햇빛과 비를 주시어 만물의 생장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이 세상에 지속하도록 하시는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한다. 일반은총의 손길이 없으면 이 세상은 그저 멸망하고 만다.  믿지 않는 분들은 이 세상이 은혜로 유지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일반은총에 저항한다. 그래서 일반은총을 우리들은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항하는 은총'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구원하는 은총인 특별은총이 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인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이 세상은 일반 은총에 항상 저항한다.     그러나 그 저항이 일정한 한도를 넘을 때, 한 사회가 유지되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노아홍수 때나 바벨탑 사건에서나 소돔과 고모라 등등 여러 곳에서 무수히 보아 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간접적 활동의 하나는 이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저항하지는 않도록 기도하고, 이 세상이 상대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 갈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예를 들어서, 푸틴 같은 사람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1년 이상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푸틴의 활동이 일반은총에 지나치게 저항하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면서 이 전쟁이 빨리 마쳐지도록 기도하고 이 전쟁의 종식을 위해 애써야 한다. 마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의 6.25전쟁에 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했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전쟁 초기에만 관심을 표현했지, 전쟁이 오래가자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사느라고 이 전쟁에 대해서 잘 의식하지 않고 사는 일이 많았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반은총 가운데서 이 전쟁이 빨리 끝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힘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 세상에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또한 우리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잘못된 문화의 움직임 같은 것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여 가는 것임을 깊이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너무 지나치게 저항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런 잘못된 문화적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물론 그렇게 온 세상에서 전쟁이 그쳐서 상대적 평화가 오고, 동성애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세상은 마땅히 있어야 할 세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우리들은 사람들이 특별은총과 접촉하여 진정한 사람의 길로, 진정한 사회로, 진정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천국복음 운동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님의 구속사역에 의해서 수립하신 그 하나님 나라에로 중생하여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런 천국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이끌어 들이는 천국복음운동을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은총에 덜 저항하여 가도록 하는 일도 힘써야 한다. 이런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우리의 본래적 사역인 천국복음운동의 산물이요 열매이다. 그리하면 간접적으로 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힘쓰는 일이 직접적으로는 천국 복음운동이고, 간접적으로는 일반은총에 조금 덜 저항하게 하는 일이다./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3-06-13
  • [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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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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