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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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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11
  • [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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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04
  • [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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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7
  • [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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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1
  • 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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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4
  • [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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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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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서·화해·일치
    ▲ 최희범목사   유쾌 상쾌 통쾌! 오래전 TV에서 종종 듣던 모상품의 광고카피이다. 답답하게 막혀있는 것을 확 뚫어준다는 의미로서 이보다 확실한 메시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광고가 전하는 메시지처럼 꽉 막힌 것도 같고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리고 불안하기만 한 오늘의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해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여인을 끌고 온 군중들이 율법을 인용하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할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며 땅 위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셨다. 그 말을 듣고 글씨 쓰는 모습을 본 군중들은 말없이 성전을 빠져 나간다. 그 후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여인은 돌아갔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사건 속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번에는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겼다고 기뻐하고 있었을 법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는 말씀 한마디로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그 여인을 용서하시며 이후의 바른 삶을 제시하신 예수님을 보며 통쾌함과 감동의 전율을 느끼게 된다.  작금의 우리 사회의 화두는 적폐청산이다. 나라의 광명함과 정의로움을 위해서는 어두운 역사를 털고 가야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북분단에서부터 산업화·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입게 된 상처들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다투고 갈라지고 미워하며 돌이킬 수 없는데 까지 이른 아픔들도 있다. 지난날의 그런 것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폐청산작업이 성공하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그 과정의 정당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기준설정이 일방적이거나 진행과정이 과격하면 그 목적이 선할지라도 결과는 상당부분 훼손 될 수도 있다. 국민들로부터 긍정적 평가와 박수를 받을 수 있을 때 적폐청산 작업은 성공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단결과 단합보다는 다툼과 분열로 점철된 파당적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정권이 새롭게 정부를 운용할 때 마다 국민들은 모두를 품어 안고 단합된 나라를 세워 주길 바라게 된다. 우리는 적폐 청산 작업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그러므로 또 다른 갈등과 대립의 조성이 아니라 사회통합과 일치를 이루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과 성경적 가르침을 따르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적폐청산은 용서와 화해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죄를 위한 적폐청산 보다 잘못을 회개하고 내일을 지향하는 가치창출을 위해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위급한 안보문제와 경제문제를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을 위하여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자리매김을 분명하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와 사명을 위하여 우리는 용서와 화해와 일치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1-2)  /전 서울신대 총장, 전 기성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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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4-11
  • 부활절이 부활절되게
    ▲ 이정익목사   이제 봄이 되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곤충들이 기지개를 편다.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절기가 부활절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시기나 부활의 시기를 참 잘 선택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물이 소생되고 새싹이 돋고 겨우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독인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면 먼저 부딪히는 난제가 셋이 있다. 하나는 동정녀 탄생이다.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동정녀 탄생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시험이다. 두 번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십자가 죽음은 믿겠는데 예수 한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은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시험이다. 세 번째는 부활이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사건이 부활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시험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성경은 믿지 못할 이야기들만 기록해 놓았다고 폄하한다. 그래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다 이해가 된다면 그것이 무슨 성경이란 말인가.  교회력을 보면 연중 중요한 절기가 두 가지가 있다.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둘 다 기독교를 지탱해 주는 근간이고 뼈대이며 중심신학이다. 이 두 절기 중, 오늘 사람들은 성탄절을 떠들썩하게 지내고 부활절을 아주 간단하게 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탄절이 기독교의 중심인줄로 착각한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네 복음서 공히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28%를, 마가복음은 34%를, 누가복음은 25%를, 요한복음은 무려 49%를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두 장씩 간단히 다루고 있을 뿐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 기독교는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갈수록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대부분 신학자들은 아예 부활은 예외로 둔다고 말하기도 한다. 신학자 벌코프가 지적하였듯이 오늘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도난설, 환상설, 기절설, 신화설 등으로 교묘히 치부하기도 한다. 모두 상식신앙의 길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이론들에 휩쓸리게 된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거나 안 믿거나 예수는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봄이 되면 땅을 갈아엎어도, 불태워도, 짓이겨도 그곳에서 새싹이 돋아 나오듯이 사람들이 예수를 죽여 무덤에 넣고 돌로 입구를 틀어막았어도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왜냐하면 부활생명은 죽여도, 불태워도, 짓이겨도, 돌로 틀어막아도 살아나는 것이 부활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상식신앙의 틀을 벗어나야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비로소 다가오게 된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주시는 떡을 받아먹는 순간 눈이 뜨여서 앞에 있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인 것을 알아보았듯이 오늘 우리는 이 형식의 신앙의 길에서 주님이 주시는 떡을 받아먹고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더 분명하고 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이 시대는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한 증인들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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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3-28
  • 오늘의 화두 ‘미투’ 운동
    ▲ 황인찬목사   미투운동(Me Too movement)은 2017년 10월 하비 와인스타인(영화제작프로듀서, 영화감독)이 성폭력 및 성희롱 행위를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 Too)를 달면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이다.  이 해시태그 캠페인은 2006년 미국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창안, 익명으로 시작했으나 앨리사 밀라노(영화배우, 가수)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밀라노는 여성들이 트위터에 여성혐오, 성폭행 등의 경험을 공개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의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독려한 이후 이 운동은 곧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월 30일 JTBC에 출연하여 서지현검사(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전 법무부 국장 안태근씨의 성추행사실을 고발한 것을 기점으로 #MeToo 운동이 확대되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SNS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위력(威力)에 의한 성폭력’ 피해의 고발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이후 시인 고은 선생, 극작가 오태석씨, 배우 故 조민기씨, 조재현씨, 오달수씨 전 충남지사 안희정씨 등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은 20여 명으로 늘어났고 종교계로도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 왕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군대장관 요압으로 하여금 랍바성 전장(戰場)의 용사들이 있는 장소에 우리야를 배치하여 의도적으로 우리야를 죽게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다윗을 무섭게 책망하시면서 이 다윗의 범죄가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대노하신다. (삼하 12:10)  특이한 것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 중에 밧세바에 대한 책망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2)고 하시며 다윗이 감추고 싶어 하는 죄를 세상에 드러내시겠다고 하신다. 권력과 금력 그리고 완력을 가진 사람이 위력을 사용하여 여성에게 폭력 및 성폭력, 추행들을 행했을 때 성경은 그를 향해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성경은 성폭력에 대하여 철저히 피해자의 편에서 해석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가나안 남부 지방 그랄에 가서 살았을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리따운 아브라함의 처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가 갔다.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네가 데려온 이 여자 때문에 이제 너는 죽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남편 있는 여자”(창 20:3)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 말씀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누이로 알고 데려간 아비멜렉에 대하여 “…너는 죽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남편 있는 여자…”라고 경고하시고, 사라와 아브라함을 보호하신 것이다.  성경은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가해자를 질타하고, 피해자를 보호하시고 위로하신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그들을 그 사회, 그 환경에서의 안녕을 도모하신다.  한편으로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를 깔아 죽인 여인이 남의 아기를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는 일을 재판하는 솔로몬이 살아 있는 아기를 칼로 두 쪽을 내어 두 여인에게 주라고 판결했을 때 “어서 둘로 나누어서 저 여자의 아이도 안 되고, 내 아이도 안 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여인처럼 #Me Too 운동이 왜곡됨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부작용을 심히 염려하는 바이기도 하다.  /예장 개혁측 증경총회장, 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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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3-22
  • 대학가의 이단과 사이비 대처 방법
    ▲ 윤성원목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학생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막연하게 동경하던 대학 캠퍼스를 직접 걸어다니며 느끼는 설레임은 앞으로 펼쳐질 대학 생활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감 역시 존재한다. 어떤 교수님의 과목을 수강해야 할지, 또 어떤 선배와 친구들을 만나야 할지, 그리고 자신의 취미와 여가를 위한 동아리 선택은 어떤 곳을 택해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이런 어려움은 새롭게 시작하는 대학 생활의 즐거움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포교 활동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대학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겠다며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접근하여 함께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도와주는 등 자주 만나고 친분을 쌓아 자연스럽게 이단과 사이비 종교로 빠져 들게 한다. 이들은 학업을 위해 대학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포교를 위해 다니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설문조사와 성격유형검사, 미술심리치료, 도형그리기나 애니어그램, MBTI 검사 등을 통해 개인신상과 정보를 수집하여 신앙 상태와 주변 환경까지 파악한 후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수법이 있다. 또한 봉사활동이나 문화활동으로 교묘하게 위장하여 이단과 사이비로 포섭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건전한 기독교 동아리와 유사한 이름으로 현혹하는 일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기에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현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대학 생활이 되도록 대처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현대종교(www.hdjong kyo.co.kr)와 같은 전문기관을 통해 발표된 주요 이단의 공식명칭과 핵심 교리, 그리고 전략들을 파악하고 기억해두면 건전한 동아리와 불건전한 이단 동아리를 구별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처음 듣거나 불확실할 경우에는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단과 사이비 종교일 경우 단호하게 거절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설문 조사나 경품 이벤트에 개인 신상과 정보를 적는 것을 소홀이 생각하여 유출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각종 검사 및 프로그램은 전문적인 기관이나 공식적인 단체를 통해 진행하는 것이 좋다. 특히 무료로 진행하는 것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셋째, 교회 밖에서 검증되지 않은 성경공부를 하자고 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회자와 상담을 하고 참석하지 않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각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세미나와 교육을 통해 새학기가 시작되면 특히 기승을 부리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기브온 주민들이 꾀를 내어 여호수아를 속였던 사건(수 9:3~13)처럼 이단과 사이비는 계속해서 미혹하는 일을 일삼을 것이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혜를 구하는 삶이 되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되는 대학 생활이 되길 소망한다.  /기성 부총회장, 삼성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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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5
  • 희생이 없는 종교는 가짜다
    ▲ 연규홍 총장 올해의 봄은 수난절과 함께 시작된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고난이 없이 새 생명이 싹 틀수 없고 고난이 없이는 성장과 성숙이 없다. 생명의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는 결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고난 없이는 부활도 영광도 없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목회를 꿈꾸며 그리고 신학도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교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신학의 길은 곧 고난의 길이자 영광의 길로 이어질 것이고,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 역시 고난의 길을 위한 여정을 준비하는 고난의 학교가 될 것이다.. 새내기로 신학생이 되는 여러분들에게 고난의 학교에 입학 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얼마 전 시인 이해인수녀님의 병상일기를 읽었다. 수녀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언니 수녀님의 이야기가 제게 감동이었다. 암에 걸린 동생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투병 중에 힘들어하는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언니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갈멜수녀원에서 한 주일에 두 번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끊고 자기희생의 기도를 주님께 드린 다는 것이었다.  내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하지 않고는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없다. 많아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넘쳐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자라고 부족함에도 나보다 더 어려운 이를 위해 나누는 것. 그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랑이다.  희생이 없는 종교는 가짜 종교다. 특별히 기독교는 저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종의 형체로 오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그리고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종교다. 서로 잡아먹고자 경쟁하는 약육강식 세상 속에서 스스로 밥이 되어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교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학의 길에 들어선 여러분들에게 큰 기대와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하더라도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없어지지 않다. 죄인인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구원의 복음은 끊임없이 선포되어야 한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땅에 있는 교회의 형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특징은 융합과 창조이다. 기존의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전하는 실험정신과 영감이 필요한다. 성서는 구원의 책이며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다. 성서가 없이는 혁명을 이룩할 수 없다. 아니 성서를 바로 읽고 그 뜻을 안다면 성서를 가지고 혁명을 안 할 수 없다.  신학을 위한 모든 학문은 궁극적으로 성서를 성서되게 바로 읽고자 하는 준비이다. 성서에 집중하자. 성서는 나를 찾아주고 나를 읽어주는 유일한 책이다. 온 천하를 얻더라도 진실한 나를 찾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 만권의 책을 내가 읽을 수 있어도 나를 진실되게 읽어주는 위로와 소망의 책이 이 땅위에 어디 있는가? 나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읽어야 한다. 그 나는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를 읽을 수 있다.  아낌없이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 그것이 신학의 영광된 길이다. /한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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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8
  • 평창 동계 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오성택  평창 겨울 올림픽이 9일 오후 8시 개회식을 시작으로 17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경기는 이미 8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평창올림픽은 우리나라가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한 지 30년 만에 두 번째로 개최하는 올림픽이자, 첫 동계 올림픽 대회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삿포로와 나가노에 이어 세 번째 동계 올림픽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 중 두 번째로 동계 올림픽 개최국 타이틀을 얻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는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러시아에 이어 여덟 번째,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을 모두 개최한 기록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   30년전 우리나라는 6·25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눈부신 경제성장의 토대위에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바람이 불며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오랜 군사독재를 끝내고 세계의 문을 열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는 가장 빠른 성장을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문턱까지 달려왔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번 동계올림픽 개최로 대한민국은 하계·동계올림픽을 다 치루는 국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코리아를 글로벌 무대로 진입시키는데 도약대가 되었듯이 평창올림픽이 선진국 입성의 도약대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대를 가져본다. 대한민국은 여름·겨울올림픽, 월드컵축구(일본과 공동개최이기는 하지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세계 4대 스포츠 대회를 개최한 다섯 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 대회를 통해서 국가 브랜드 향상과 사회 전반의 업그레이드를 가져오고 이념·계층·세대간의 갈등을 넘어 화합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사실 평창동계올림픽은 3수를 하며 어렵게 유치했다. 개최 비용이 과다하다, 환경파괴가 심하다. 사후 관리가 용이치 않다는 등의 많은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동계올림픽 개최로 근대 올림픽의 기본정신인 화합과 평화를 가져오며 세계 젊은이들의 교류와 정상외고, 적대감의 해소와 배려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신년메세지에서 올림픽은 이 시대의 희망과 평화의 상징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남과 북이 스포츠를 통하여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여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반도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컨텐츠가 있다는 것 차체로 평창올림픽은 이미 쿠베르탱이 말한 화합과 평화라고 하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고 있고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가 한층 더 두터워졌음을 전 국민이 체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올림픽 시설의 지속적인 활용과 이를 통해 아직은 미흡한 동계스포츠의 저변 확대를 가져올 수 있도록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 기회야 말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진행과 마감을 위하여 뜨겁게 기도하자. 스포츠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선교의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 올림픽 성화가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에도 밝혀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북한을 향한 이 설국열차는 출발됐다.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는데 힘쓰라고 했는데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임원 귀빈들에게 복음의 메아리도 울려 퍼졌으면 하는 뜨거운 기도를 드려본다.  /전주시기독교연합회 회장·남전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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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2
  • 기독교인의 설 명절 보내기
    ▲ 김영한 박사 설날은 음력으로 새해의 첫 날을 기리는 명절이다. 명절을 통하여 가족들이 서로의 소속감을 확인하고 사회적으로는 구성원들이 민족 공동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이번 설날은 이러한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사랑으로 대화와 소통의 장이 이루어져 하나됨과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첫째. 오늘날의 번영을 주셔서 '30·50클럽'에 들게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올해 한국은 지구촌의 선진국인 국민소득 3만불 인구 5천만의 그룹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지난 60년전 지구상의 가장 빈국이었던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오늘날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고 1988년 하계 서울올림픽에 이어 2018년 동계 평창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은 우리민족의 노력에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설날은 대한민국이 평창올림픽을 개최하고 세계시민들을 초청하여 동계 스포츠 행사를 벌리는 지구촌 인류의 평화와 화합 축제를 거행하는 기간(2월 9일-25일)이기도 하다. 핵확산 금지조약 위반하여 핵무기 ICBM 개발 최종단계에 이르러 유엔의 제재를 받는 북한도 이에 참가하는 민족화합의 기간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여 설날 가족 예배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둘째. 명절 휴일 기간이 대화와 소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설날은 이러한 대화와 소통의 현장이 되기를 바란다. 후기산업시대 각자가 맡은 전문적 일로 생업에 바쁜 가족들과 친척들이 명절 휴일 기간을 통하여 다시 만나는 시간은 그동안 일상에 바빠서 끊어진 대화와 소통을 회복하는 귀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각종 모임에서 우리 민족 저변에 깔려 있는 민족 정서인 나라를 위한 단결과 협동과 이웃 사랑으로 사회갈등을 잘 극복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 가운데 들어와 살고 있는 다문화 가족들과 함께 공생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자. 우리 안에는 언어와 혈연과 종족이 다른 이주민 상당수가 함께 거주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들어온 이들을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이들이 가진 문화적 다름을 우리의 재산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지금, 다문화가족을 포용하는 설 명절이 되어야 한다. 폐쇄성을 떨쳐 버리고 상호 소속감과 상호 협력과 상호 나눔과 상호 섬김을 활성화하자. 서로 다름과 차이는 다양성으로서 서로 보완과 사귐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결코 차별이나 배척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서로 다름의 인정을 공존의 조건으로 수용하자.  넷째, 교회는 하나됨과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여 지역사회 화합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남다른 헌신과 충성을 통하여 세계 교회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큰 자랑이요 자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하나 됨과 나눔과 섬김의 본을 보이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많은 우려와 비판을 받게 되었다. 교회는 계속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설날을 계기로 교회의 초등부, 청소년들과 장년부는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찾아서 설 음식과 선물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들에게 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문과 만남은 지속적이며 정례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정의로운 인간 관계를 강조 실천하여 매마른 세상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회 화합의 역할을 해야 한다. 화합이란 소외와 따돌림이 없는 정의로운 인간관계에서 생긴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의 말씀이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사회 화합을 위한 교회의 책무는 정부와 사회기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안전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섬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유일한 소망입니다’는 문구가 교회 안에서 구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려와야 할 것이다.   /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02-06
  • 목회자 수급문제 대책이 필요하다
    ▲ 장창수 목사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새로운 2018년이 소망과 비전을 품고 달려가는 한 해이지만, 아직 사역지를 구하지 못한 목회자들에게는 불안과 초조함의 연속인 한 해일 것이다. 사역지를 구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대리운전, 택배 등의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필자가 알고 있는 경북의 한 시골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 공고를 낸 적이 있었다. 시골의 작은 교회였지만, 접수된 이력서가 80여 통에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왜 이 교회에 지원을 했냐고 물으니, 목사 안수 후에 사역지가 없어서 차선으로 유학의 길을 선택했는데, 돌아와보니 한국교회의 상황은 더 힘들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 교회에 목회자는 점점 늘어나는데 사역할 수 있는 여건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 4개 교단의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현재까지 교인의 수는 줄고 있는데 목회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예장고신),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주요 4개 교단의 교인 수는 약 658만 명에서 620만 명으로 6% 정도 감소한 반면, 목회자의 수는 약 4만 명에서 4만 7천 명으로 17% 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한국교계의 신학교에서는 매년 약 9천 명의 목회자 후보생들이 배출되고 있다.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정규 신학교 졸업자가 약 4천 명 그리고 무인가신학교들을 비롯한 각종 군소교단의 신학교들에서 배출되는 졸업자가 약 5천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현재 한국교계의 상황은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목회자의 수에 비해 안정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사역지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목회자 수급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이유로 개척을 시도하는 초년생 목회자들도 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준비하고서도 개척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개척을 시도하는 목회 초년생들이 성공적인 개척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목회를 포기하고 사업에 뛰어들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고 목회를 병행하는 목회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최근 커피숍이나 도서관, 목공방 등을 열고 평일에는 영업을, 주말에는 예배를 드리는 형태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임지를 찾지 못하고 소명없이 선교지로 나가는 목회자들도 나오고 있다.  반대로 일선 교회 현장에서는 준비된 목회자를 청빙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영성이 있고,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된 목회자가 드물다는 것이다. 청빙 공고를 내면 이력서는 많이 들어오지만, 목회자다운 목회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년 쏟아져나오는 목회자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목과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목회자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학교에서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며 인성과 영성에 대한 부분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목회자 수급에 관한 논의는 십 수년째 계속되어 왔다. 목회자의 과잉 공급으로 미자립교회와 무임목사가 양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전임목사의 은퇴금 대납을 조건으로 한 청빙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청빙을 받기위해 교회에서 마련해야 할 은퇴금을 후임자가 대신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인해, 은퇴금을 마련할 능력이 없는 목회자들은 청빙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부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목회자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거쳐서 영성이 있고, 훈련된 목회자를 배출해야 한다. 신학교는 목회를 함에 있어 가장 필요한 덕목인 인품과 영성을 고루 갖춘 목회자를 키워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내일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목회자 수급에 관한 체계적인 대책 마련을 함께 논의해봐야 할 시점이다. /대신대학교 재단이사장・대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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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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