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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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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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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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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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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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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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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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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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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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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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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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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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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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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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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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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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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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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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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 건강한 교회
- ▲ 이정구 신앙의 척도 기준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연령 별로 신앙양태를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대 이후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2000년 대 신앙생활을 시작한 젊은 층의 신앙양태가 다름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천당과 지옥’을 강한 어조로 가르쳤고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다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성경구절에서 특정 부분을 따오거나 응용하여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에는 ‘교인군사 같이 구주 지휘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매우 전투적이며 극단적인 문장들이 많다. ‘주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군대, 전투와 같은 이미지와는 퍽 다르게 느껴지지만 정작 교회는 박해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인들에게 순교에 가까운 무조건적 신앙과 전도하기를 요구하고 가르쳐왔다. 급기야 어느 신자는 불상을 훼손하고 심지어 사찰을 정복이라도 한 듯이 절터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지신밟기와 유사한 상징행위를 했다. 최근 제주도에 예멘 인들이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것을 비롯하여 이주노동자로 입국하여 국내에서 3D 직종에서 노동하며 생활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증가를 일부 한국인들은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최근 몇 소수 대학에서는 이슬람과 관련된 센터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이 기구의 기능은 대체로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거나 이들이 기독교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앞으로 국내에 무슬림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많은 교회들은 그 긴장도를 더 높여 갈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마찰은 주로 기독교 측에서 문제를 야기해 왔는데 최근 마찰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땅 끝까지 교인군사’로서 기독교복음를 전파해야 하는데 다른 종교들이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 왔던 탓이다. 지상에서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들을 모조리 말살하고 나면 정말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필자의 엷은 신앙 탓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상에 오직 기독교만 있다면 인간들 사이에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평화가 올까? 아마 가톨릭과 개신교사이, 개신교 안의 수많은 교단 분쟁이 더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유일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우상이요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죄목은 국내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십여 년 전 ‘신의 역사’를 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부의 가톨릭 수녀 카렌 암스트롱이 느닷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비난이 크게 일자 카렌은 “내가 어느 종교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대응을 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 글에 격노할 분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시대는 급변하는데도 주입식 교육으로 무장시키고 타 종교를 말살하도록 경주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기독교가 적대시 하고 있는 불교, 이슬람과 이런 이단 종파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물리쳐야 할 진정한 적이 어느 쪽인지 분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고는 하지만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감성적 확신 안에도 이성은 있는 것이다. 이성이란 계산한다는 의미인데 내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신앙이 혹 이웃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화는커녕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산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앙을 굳건히 지키겠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착각이며 우상이다. 4차 산업, 다문화 사회에서 타 문화, 타 종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평화를 위해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면 하나님께서 격노하실까? 성숙한 신앙이 교회를 건강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성공회대 총장·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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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 건강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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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자
- ▲ 지왕철목사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실태를 조사한 결과 기독교는 타 종교에 비해 종교적 헌신도는 높지만 호감도는 가장 낮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실태를 반영하듯 현재 기독교는 일년에 3천 곳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으며, 이 숫자는 한국교회의 1/20에 해당한다. 매년 교회가 새로 개척되고 있어서 당장 교회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교회 숫자가 감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10년 전 20대는 45%가 종교를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30대가 된 현재 38%만 종교를 믿고 있다. 또 20대도 31%만이 종교를 갖고 있다. 젊은층들을 중심으로 한 탈종교 현상은 종교인구의 고령화와 맞물려 향후 장기적으로 종교인구가 감소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한국교회는 머지않아 유럽교회처럼 생명력을 잃고 쇠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생명력 있게 시작된 성령운동으로 말미암아 세계최대의 부흥기를 지나온 한국교회가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은 고질적인 분열과 물질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교회들이 성령의 역사를 직접 목도하기 위해 찾아오던 한국교회가 점차 물질주의 영향으로 질적향상보다는 양적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했고, 이는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를 불러왔다. 참된 진리를 전하기 위한 설교가 잘못된 사상의 영향으로 더 많은 군중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세워진 성전이 카페와 은행, 편의점 등 최신시설을 갖춘 복합쇼핑몰과 다를 바 없이 변질되었다. 교회가 물량화 된 것이다. 규모의 개념이 생기고, 외적인 크기를 따지게 되고, 급기야 비자금 등 ‘목양’이 아닌 ‘경영’의 행태가 교회 곳곳에 자리잡게 됐다. 교회에 침투한 유럽의 철학은 인간의 삶과 행복, 번영과 즐거움을 추구하게 하여 복음의 생명을 사람들의 육체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는 기복적 신앙으로 변하게 했다. 또 능력 있고 위대한 종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멀쩡한 건물, 심지어는 건축한지 몇 년도 안 된 건물을 헐고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 건축에 사활을 걸게 했다. 교회(에클레시아)의 본질을 바꿔 믿는 이들이 주의 몸된 교회를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참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건물이 교회라는 무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진리, 헌신, 봉사가 자리잡던 자리에 교회의 성장, 명예와 권력 지향적인 태도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 효율성을 앞세운 비즈니스화 된 목회, 지나친 외적성장의 집착 등 물량주의가 만연해졌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은 교인들의 숫자만 늘어난다면 그 결과를 발생시킨 수단은 그것이 아무리 악할 지라도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그릇된 인식에 있다. 이제 우리는 회개하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께서 전했던 회개하라는 말씀을 윤리나 도덕적인 회개가 아닌 종교적 유대교에서 돌아서서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뜻임을 깨달아야 한다. 복음의 본질은 율법과 철학, 윤리와 도덕이 아닌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부어주심, 다시오심 등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생명의 복음이다. 교회의 본질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치장한 건물이 아니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거듭난 생명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가 교회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한국교회 지도자로 나서며 봉사, 헌신, 무릎꿇는 기도와 이웃사랑 실천 등 보이지 않는 참된가치를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새 생명을 불어넣자. /성경원형회복운동본부 대표·예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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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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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축제를 앞두고
- ▲ 이용희교수 오는 7월 14일 토요일 서울시청광장에서 동성애 축제가 열린다. 2000년부터 시작된 서울 동성애 축제가 2015년 부터는 우리나라 가장 대표적인 공공장소인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대낮에 어린 아이들도 함께하는 시청광장에서 퇴폐적인 음란공연은 물론이고, 성인상품 판매, 남녀성기모양의 쿠키판매, 거의 알몸으로 도심 퍼레이드를 하는 등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내용들 때문에 기독교계와 보수시민단체들은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서울시청은 서울광장 사용이 신고제이므로 미리 신고하면 사용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국교회는 2015년부터 서울시청광장에서 진행되는 동성애축제에 반대하는 한국교회 연합기도회를 개최했고 이어서 국민대회를 가졌다. 올해도 동성애축제가 시작되는 7월 14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한국교회는 연합기도회를 갖고 이어서 동성애 축제가 끝나는 저녁 7시까지 ‘생명·가정·행복 페스티발’을 국민대회로 개최한다. 이에 앞서 7월 8일 주일을 가정성결주일로 정했다. 7월 8일에는 초교파적으로 모든 한국교회가 주일예배에서 동성애의 문제점과 함께 하나님이 정하신 1남 1녀의 결혼과 가정, 생명의 소중함을 설교할 것이다. 왜 동성애 반대 국민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까? 위정자들에게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표결로 결정된다. 침묵하는 다수는 카운트되지 않는다. 소리치는 소수의 의견이 전체를 이끌고 갈 때가 많이 있다. 내게 직접적인 손해가 없다고 방관하거나 올바른 의견을 수고해서 표현하지 않는다면 훗날 우리 모두는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영국교회는 동성애 물결 앞에서 교회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차별금지법(평등법)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형사처벌을 받았다. 19세기에는 전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냈던 영국이 지금은 주일 출석교인이 전 국민의 2% 밖에 안 되는 나라로 전락했다. “유능하고 충성된 일꾼들은 선교사로 내보내지 말고 한국교회에 남아서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꼭 막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영국교회처럼 몰락할 것이고 한국교회에서 전 세계로 파송했던 이만 칠 천명의 선교사들이 다 한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서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변호사 안드레아 윌리엄스의 절규를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었던 미국과 유럽 교회가 동성애 앞에 무릎을 꿇었고 전 세계는 동성애의 합법화의 물결 앞에 흔들리고 있다. 전 세계교회가 지금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서구에서 몰려오는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거룩한 방파제가 되고, 전 세계에 ‘성결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를지라도 성경의 진리를 말하고 글로 쓰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앞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순교 정신은 하나님과 한국교회의 자존심을 지켰다. 21세기 동성애 물결을 막는 한국교회의 순교적 결단과 헌신은 우리 주님의 자존심을 세우는 거룩한 제사가 될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5-6) /에스더기도운동 대표·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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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축제를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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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성도의 삶, 디아코니아
- ▲ 진영석목사 성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연결시키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요10:10-16)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하나님이 최초의 아담에게 내리셨던 문화 명령(장경철교수의 문화읽기 79p,2002)과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던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파함이 마땅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교회 안에서 조차 세속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는 않는가? 개신교회가 시작된 1517년 10월 13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속적 분위기에 젖은 천주교회의 부패상에 대하여 저항한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교황들이 세속적인 통치 권력을 추구하고 르네상스의 후원자임을 자처하며 세속적 가치를 극대화 하려는 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 이후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주님의 말씀에 기초한 변화가 교육과 문화와 정치 등 사회전반에 걸쳐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신앙의 유산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 종교개혁자이며 교육개혁가이기도 한 루터가 중세 시대에 교회에서 공동기금을 모아 사회의 빈민 구제를 위한 자활비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성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필요한 곳에 사용해야 한다. 인력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전인적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을 믿는 바,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다시 그리스도만으로」라는 주제로 종교개혁500주년을 지냈던 기독교한국루터회는 올해로 선교 6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를 준비하며 ‘디아코니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디아코니아란, 개신교회에서 실천하는 사회적 ‘봉사’와 ‘섬김’을 말한다. 약자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일, 즉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성도의 모든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디아코니아의 개념은 원래 식탁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발전하여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로날드 사이더는 교회의 네 가지 사역을 이렇게 소개했다. 첫째, 아픈 사람에게 찾아가 약품을 제공하는 구호사역, 둘째, 상처치료와 재활치료를 통해 온전히 활동하도록 개인을 발전시키는 사역, 셋째, 아픈 사람이 다시 병들지 않도록 주변여건을 개선시키는 사역, 넷째, 법이나 사회제도 또는 구조를 개선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의와 공도의 히브리 단어는 ‘체데카’와 ‘미쉬파트’로 정의와 공의로 해석 할 수 있으며, 아모스 5장19절에 같은 단어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디아코니아는 공의와 정의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이며 실천 자체가 복음선포이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사명을 수행하는 일.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일을 다 이루셨다. 은혜로 인해 구원 얻은 우리가 교회공동체 안 세속적 가치들을 몰아내고, 성도들과 더불어 진정 풍성한 삶을 누리며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아 선한목자이신 예수님께로 연결시켜야 한다. 평화통일을 논하고 있는 지금 참된 성도의 삶은 디아코니아를 깊이 생각하며 실천할 때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임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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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성도의 삶, 디아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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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용서한 이인재목사
- ▲ 김헌곤목사 이인재목사의 선친 순교자 이판일장로는 1930년에 문준경전도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판일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곧 바로 담뱃대와 제사도구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 버렸으며 전 식구들과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문준경전도사가 1932년 임자도에 교회를 세울 때 서양 귀신을 몰고 온 여자라고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지만 이판일·이판성 형제가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이판일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목포경찰서에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였다. 경찰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석방하였다. 이판일은 “나같이 비천하고 못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그 모진 핍박을 당하셨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주님 사랑을 만분지일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후 충직한 이판일은 이후 장로가 되었고 교회의 기둥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지역 좌경세력들은 이판일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동생 이판성 집사와 함께 목포 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국군이 들어옴으로 풀려나 임자도로 돌아온다. 이 장로는 “설사 내가 화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교를 각오했고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10월 4일 수요일 저녁, 이판일은 집에서 가족과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런 전시상황 속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예배는 좌경세력에 발각되어 중단되었다. 그들은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 바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판일장로는 무릎을 꿇고 스데반집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장로는 “아버지여,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판일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으며, 흥분한 좌경세력들은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채 죽지 않고 울부짖는 생명들까지 모래구덩이에 쓸어 넣듯 생매장을 했으니 그 시간은 자정이 지나 10월 5일 새벽 2시경이었다. 이판일장로가 살해당한지 얼마 후 결혼하여 목포에 살던 큰 아들 이인재집사가 해군함정이 임자도에 상륙하던 날 동행하였다. 이인재는 군인들과 함께 지역 좌경세력들을 다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그는 이봉성담임전도사와 교회의 싸늘한 마루에서 밤새도록 통곡하며 기도를 하였다. 새벽녘에 두 분의 음성이 들렸다. 문준경전도사님의 평소 설교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나님 기뻐하신다” 또 아버지의 음성이 있었다. “아들아, 나는 저들을 용서했단다. 그러니 너도 용서하여라” 다음날 가해자들이 모두 즉결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군 지휘관은 이인재에게 총을 주어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이인재는 “지휘관님, 이 사람들은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지만 이제부터 공산사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시기 바랍니다”고 요청했다. 지휘관이 허락했다. 이때에 가해자들이 모두가 살아나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다. 이러한 이인재의 용서는 임자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쳐, 수복 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보복이 임자도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6.25동란 직전에 임자도의 인구가 1만3천 명이었는데 동란 중 21%인 2천7백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임자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이인재의 핵폭탄 같은 용서와 사랑의 영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인재집사는 6.25직후 논을 팔아, 좌경세력과 가해자들이 가장 많았던 지역에 교회를 직접 건축하고 1954년에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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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용서한 이인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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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참여만이 ‘갑질’이다
- ▲ 신평식목사 “짧지만 ‘갑질’ 할 수 있을 때가 왔습니다. 메뚜기도 유월이 한 철이라고 선거 때만 우리가 ‘갑’이 됩니다.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을’이죠. 지들이 ‘갑’이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어떤 분의 하소연이다. 말인즉 6·13 지방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고, 잘 부탁한다고 전화를 걸어오는 후보자들 덕에 모처럼 목에 힘을 주고 산단다. 확실히 선거철이면 후보들은 일단 고개부터 숙인다. 특히 선거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이고 보면 확실한 ‘갑’이다. 그런데 짧은 선거운동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당선자가 ‘갑’중의 ‘갑’인 ‘슈퍼 갑’이 된다. 6·13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지방의원들은 작게는 5천만 원에서 6천만 원의 대의 연봉을 받는다. 연봉으로만 보면 그렇게 고생하고 선거를 치러, 겨우 그 정도만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연봉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지역살림의 모든 재정을 주무르고, 지역의 장래를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 지방자치법 제3절 권한을 보면 “조례의 제정·개정 및 폐지, 예산의 심의·확정, 결산의 승인, 법령에 규정된 것을 제외한 사용료·수수료·분담금·지방세 또는 가입금의 부과와 징수, 기금의 설치·운용,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재산의 취득·처분과 공공시설의 설치·처분, 법령과 조례에 규정된 것을 제외한 예산 외의 의무부담이나 권리의 포기, 청원의 수리와 처리, 외국 지방자치단체와의 교류협력에 관한 사항과 그 밖에 법령에 따라 그 권한에 속하는 사항” 등이다. 이밖에도 지방단체장에서 의안과 관련된 서류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자치단체의 조사와 감사권이 있다. 이렇게 주어지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권한은 지방차치라는 본래의 의도에 맞게 계속 확대 강화되는 추세다. 이러한 권한은 결국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권력이다. 이 때문에 설령 이들이 잘못된 결정을 했다하더라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왜냐하면 권한을 가진 자들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민들의 권익과 보다 살기 좋은 지역을 위해 순수하게 헌신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수많은 이해의 충돌 가운데, 명확하지 않은 수많은 선택 앞에 맞닥뜨린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고, 그 선택은 곧 법이다. 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인가. 당선이 결정되면 이들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민원인들이 들끓고, 고개를 조아리며 읍소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어느새 뻣뻣한 목을 가진 판단자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우리 위에 군림할(?) 권력자를 뽑고 있다. 내가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을 의심하며, 내가 반대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쥐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투표라는 ‘갑질’을 통해 그들 가운데 좋은 사람을 선택해야하는 이유다. 어떤 이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의사표현이라고 한다. 맞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너무 소극적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 권리를 위임할 만한 후보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중에서 괜찮은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내가 원치 않는다하더라도 그들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일을 결정하며,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선출된 이들이 풀어내야 하는 문제가 과거의 일이라면 좀 더 쉬울 것을 이들 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항상 새롭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을 가야하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사막에서 보석을 찾는 심정으로 찬찬히 살펴보자.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투표하자. 그것이 메뚜기 한철에 할 수 있는 ‘갑질’이 될 테니까. /한국교회총연합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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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참여만이 ‘갑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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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할 때
- ▲ 지형은목사 이제 30년이 다 되어간다. 19 89년 9월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중부의 루어 지역 보훔(Bochum)대학교에서 독일어 과정부터 시작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하루는 라디오를 듣는데 (당시 아직 텔레비전을 마련하지 못했다.) ‘무슨 난리’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던 것은 내 독일어 듣기 실력 때문이었다. 애를 써가며 집중해서 듣다보니, 이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이었다! 전 독일이 기쁨으로 전율했다. 유럽이 흥분했다. 세계가 떠들썩했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보훔 중앙역 길 하나 건넌 마우리티우스 21번지 3층에서 벅찬 가슴을 끌어안고 뉴스를 들었다. 밖에서 이런저런 함성이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중앙역 쪽에 사람들이 많았다. 온통 감격과 흥분의 물결이었다. 왜 안 그랬겠는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까지도 심지어는 독일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 년 뒤 동서독은 법률적으로 통합됐다. 독일 통일은 그렇게 어리둥절하게 찾아왔다. 한반도의 상황이 어리둥절하다. 설마 했는데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는 날짜가 잡혔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지독한 수사를 쏟아내던 트럼프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돌변했다. 서로를 추켜세우며 덕담을 연발했다. 이럴 수도 있는가. 그러다 트럼프의 공개편지로 회담이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지. 아직도 살아있는 냉전의 유물 그 현실적 힘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살아온 한반도에서는 회담 무산이 당연했다. 그런데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어리둥절하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참 좋다! 이리 좋을 수가 없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감격적인 사건이 또 있으랴. 2002월드컵이 오천년 역사 초유의 일이라고 했는데 그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사실은 지금도 불확실성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 지금은 희망이 불확실성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전환들 중 우연히 발생한 것이 적지 않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부정적인 일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대격변이 쓰나미처럼 덮쳤고, 행복한 일이라면 하늘의 선물처럼 내렸다. 지금 한반도의 대전환은 그야말로 하늘의 선물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히 갑자기 찾아온 듯 보이는 일들은 사실은 배후에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독일 통일의 경우에는 정파를 초월하여 지속적이고 일관된 동방정책이 터를 닦았고,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1927~2016)가 서유럽 각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소련 등으로 수도 없이 다니면서 공을 들였다. 헬무트 콜(1930-2017)이 통일 과정을 잘 관리했지만 이전의 수많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의 이 상황도 배후에서 진행된 각고의 노력이 있었음은 상당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상황의 배후에 숨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팩트가 있다. 역사에서 우연 또는 역사의 큰 손이라고도 부르는 일에 대한 신앙적 표현인데,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손길이 어떤 때는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우리 일상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그렇다. 주전 8세기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세계에서 떠오르는 강국의 지도자 고레스를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사람으로 보았다. 21세기의 한반도 상황에서 트럼프든 김정은이든 또는 시진핑이나 푸틴이든 누가 고레스여도 좋다. 그건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늘의 섭리다. 사회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할 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한다. 흔히들 말하는 기도할 때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킨다. 한국 교회와 이 땅의 신앙인들이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할 때다. /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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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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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가 기가 막혀, 속죄합니다!
- ▲ 추태화교수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 그렇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 잘 하면 천냥 빚을 갚고, 절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을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 유발에 큰 공헌을 했다. ‘말 한 마디’는 말재간이나 화려한 수사(修辭)가 본질은 아니다. 말 한 마디는 양면성이 있다. 때로 말 한 마디는 수많은 사람을 미혹에, 사기사건에,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몰아넣기도 하는 힘이 있지만, 그 반대로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치유하고, 진실을 알게 하고, 절망에 이르는 한계상황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있다. 가히 말 한 마디의 무게는 본심과 진심에 달려있다 하겠다. 지난 4월 중순, 북한발 외신이 전한 ‘말 한 마디’가 세간을 의아하게 했다. 중국 관광객이 북한 여행을 하다 버스 사고로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이에 김정은 위원장이 주저없이 사과했다. 그가 한 말이 어떠하기에 파장을 남기고 있는가. ‘속죄합니다’ ‘속죄’란 단어는 어떤 행동에 대해 잘못을 통감하며 보상을 치루겠다는 각오로 윤리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회개의 차원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종교적 부분에서 속죄는 절대자 앞에서,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양 자세라 하겠다. 최대한의 죄값을 치루겠다는 결의가 내포되어 있다. ‘지엄하신 북한 최고지도자’는 어찌하여 이 단어를 선택했단 말인가. 중국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려는 작전이었는지, 책임을 통감한다는 진심이었는지. 그 본심은 본인만 알 일이지만, 표면상 의구심을 감출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최고지도자는 정권 장악 과정에서 숙청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한 권력을 휘둘렀는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인이 속죄라는 단어를 쓰다니. 이것은 치밀한 전략인가 아니면 교묘한 위장술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건을 무마하려는 임시변통 사탕발림인가. 문제는 속죄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정서이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선택한 속죄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진의는 차치하고라도, 한 때는 로켓맨으로 불리던 정치인도 속죄라는 단어를 채택하는데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불어대는 이 땅에서 어찌 ‘속죄’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속죄라는 단어가 북한에서 흘러나오는 경우를 겪게된단 말인가, 어찌하여 속죄를 말함으로 우리 오정육부를 뒤집어 놓는단 말인가. 어찌하여 조용히 속 삭히고 있는 남녘 동포들의 심기를 이리도 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속죄라는 단어는 정작 남한에서 들었어야 하는 말이 아니던가. 속죄라는 말에 오장육부가 다시 끓어오르는 이유는 재판 보도들 때문이다. 수많은 재판이 열려졌지만, 어떤 피의자도 속죄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의 기억에는 그렇다. 정치인들, 재계 거물들, 고위직 관리들, 명망있는 사업가들… 피의 사실 앞에서 한 말은 유감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합니다 정도, 사죄라는 표현이 그래도 속죄에 가깝다 할 것이다. 아니면 기소 내용에 대해 나는 무관하다, 잘 모르는 일이다, 시켜서 한 일이다, 변명으로 일관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도 들려왔다. 국민의 초관심사였던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사건에서도 수많은 관련 인물들이 포토라인에 섰지만 어느 누구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투 운동으로 법정에 소환된 이들, 한번도 ‘속죄합니다’라고 말한 이는 없었다. 더욱 기막힌 경우는 피의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이들이 다수 있었는데, ‘속죄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계에서 속죄라는 단어가 삭제된 것일까, 아니면 속죄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일까? 독일은 과거 나치의 만행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속죄합니다’고 말해왔다. 속죄라는 말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있을 때 갈등과 전쟁도 막을 수 있다. 독일은 이 단어를 선택했기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일본은 아직도 과거 만행에 대해 속죄라는 표현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속죄할 부분에서 자유로울까. 혹 베트남에 대해서 속죄할 일은 없는가. 속죄할 것은 속죄해야 역사도 용서의 기회를 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진정한 속죄를 고백하자. /문화평론가·안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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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가 기가 막혀, 속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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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전파하라!
- ▲ 김필수 2018년도 어느새 절반 가까이 흘러갔다. 2018년을 보내며 여러분들은 어떤 소망들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구세군의 2018년 표어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선한목자이고(요 10:11), 참 포도나무이며(요 15:1), 세상의 빛이고(요 8:12), 생명의 떡이며(요 6:35),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저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요 14:6), 우리 삶의 근본이고 빛이고 희망이고 생명의 원천이고 교회의 머리이며 신앙과 실천의 표준이다.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 많다. 구원 받았고, 의롭다함 받고, 구속 곧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아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사단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죄 있다 고발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도록 보장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1-39).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아가 그분을 마음껏 자랑하고, 간증하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복음의 의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Mission Statement)이다. 왜 베드로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20)고 했는가? 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는가?(행7:60)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음에도 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가?(행8:1-5) 구원 받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었고, 가장 큰 사명이었고, 가장 큰 미션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임무였고, 목표였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이방인) 모두에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있으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하는 축복이 복음 속에 담겨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백했다. 남은 한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이 돼야한다. 아무리 한국교회 성장이 정체되고, 교회 위기가 오고, 청소년 사역이 약화되고, 저출산, 초 고령화, 경제위기가 닥쳐와도 죽어가는 세상을 회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너무 바쁘다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세상이라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 때 일수록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동원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길 축원한다. /한국구세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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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전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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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의 바람이 불어온다
- ▲ 박종근목사 한반도에 바람이 불고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핵실험과 미사일을 쏘아 미국과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던 북한이 하루아침에 급변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전격 참가를 선언하고 북한의 고위층과 선수들 그리고 응원단이 참가하여 금년 초부터 남과 북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급기야 남북정상회담, 그것도 분단의 상징적 장소이며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판문점에서 두 지도자들이 만나 아주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대화를 했다. 그리고 곧 이어 북미정상 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다. 이 즈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통일감상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마치 통일이 다 된 것처럼 착각하고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남북의 정상들이 만난 것만으로도 뉴스거리이며 한동안 언론과 세계는 한반도에 과도할 만큼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아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남북화해와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운을 뗐고 물길이 열려지기 시작했을 뿐이고 얼굴을 맞대었을 뿐이다. 이제부터 더 연구하고 더 확인하고 작은 것이라도 섣불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70여 년 간 우리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상처를 두 지도자가 만났다고 해서 그냥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지에서 수고하고 땀 흘린 이들이 있다. 그러기에 남과 북의 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독선이나 독단적인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여태껏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통일문제를 다루었듯이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고 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피차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제는 독과점 시대는 지나갔다. 어느 누구라도 통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일어나는 통일은 국민적 혁명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농촌이나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통일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남북평화통일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느 누구라도 절대적인 자는 없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하더라도 결코 정부독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상이나 이념을 아우르고 참여시키는 통전적인 통일운동을 펼쳐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 나라와 각계각층이 남북문제에 고심하며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과거로부터 한국교회는 북한선교, 북한지원, 북한 살리기 등등 엄청난 구호를 외치며 섬겨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남모르게 북한동포들을 위한 헌신이 작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에 대한 한국교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 보다는 남북문제에 대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말하자면 표준을 높여야 한다. 교단마다 새로운 통일전략을 세우고 적어도 금년 가을 교단총회에서는 모든 교단들이 남북통일에 대한 하나 된 입장이 발표되고 적어도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정부와 국민 앞에 대안을 구체적으로 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남북통일문제에 대해서만은 일치된 마음으로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반성이다. 반성은 하나다. 교회가 탐욕을 버려야 한다. 탐심은 우상숭배다. 돈과 물질이 우상이 되면 쫄딱 망해도 내려놓지 않는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쥐꼬리만큼 내놓으면서 큰소리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말없이 힘껏 섬겨야 한다. 남북통일의 출발점은 회개다. 한국교회가 탐욕과 자기중심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 /서울모자이크교회 목사·북한지원단체 (사)모두함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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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의 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