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0(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뉴스
  • 제헌절– 말씀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7월17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된 뜻깊은 날을 맞이합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근본과 질서를 세우는 토대이며,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최상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법보다 더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기초한 교회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존재하게 한 생명의 뿌리요, 교회법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가 정의롭고 질서 있게 세워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두 가지 기준을 존중히 여기며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안팎의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권위의 상실, 무분별한 다툼과 분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오해가 깊은 상처로 번지고, 사소한 이익다툼이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기일수록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이를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법의 질서입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과 교회법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편에 서거나, 세상법을 교회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뜻을 구하며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르치며, 교회법은 공의와 은혜가 조화를 이루도록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다툼과 분쟁 앞에서 화해와 중재의 은혜로운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내 뜻을 내려놓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우뚝 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린도전서14장 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위와 질서는 결코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법을 경외함으로 지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떳떳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헌법을 존중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법을 가장 높은 권위로 세우는 교회가 될 때, 우리 가운데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이 결단 위에 은혜를 더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리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 평화! 세상에 빛을! 아멘”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증경대표회장, 비전교회
    • 오피니언
    • 정론
    2025-07-08
  • [정론] 수련회를 사경회로
       신학교에서 한 학기 마지막 시험을 보는 시간이었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 준 후에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한 학기 동안 성경해석학을 잘 배웠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이번 학기에 배운 것을 가지고 삶에 시험이 올 때 능히 이기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날 공부한 것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공부한 것보다 앞으로 시험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고 깨달았다. 그 후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에서 시험을이기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진다” 는 말은 꼭 하게 되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완전한 확신과 확고한 진리임을 믿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순수하고,영원한 지혜이며, 그것이 양심에 확신을 주고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립한다”고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을 쓴 윌리암 퍼킨스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삶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다.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래도 모든 사람은 갈증을 안고 살고 있다. 갈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고 하고 있다.     기원전 765~755년 사이의 아모스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씀으로 성경 암8:11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들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삶의 목이 마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정녕 마음에 깨달음은 없고,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얻지만 마음에 깨달음이 없는 지식을 쌓고 있다면 여전히 삶은 목마를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되 마음을 기울이고 들었으면 실천을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교회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다.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성도는 저조하다. 대부분 관심과 시간이 없고 생활이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면 분명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어렸을 때 교회 (현 용산 중앙교회)는 여름에 사경회를 열었다. 오전 10시에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기억나는 것은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이 오셔서 일주일간 말씀을 전하셨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였지만 교회 창문을 열고 성도들은 마루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배웠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전도에 대하여 쉽게 가르쳐 주셨다. 특히 기도에 대하여 배울 때는 회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여름사경회 후에 성도들은 저녁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의 열기가 있어 매 주일 새신자가 등록하였다.     교회는 매년 여름이 되면 각 기관별로 수련회를 하게 된다. 수련회에 형편상 참석을 못하는 성도가 있고 교회 형편이 어려워 수련회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수련회를 사경회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성도들에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서 같은 주제로 같은 내용을 새벽, 오전, 저녁에 한다면 성도들은 형편에 따라 참석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무디사역문화연구소 소장·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30
  • [정론] 나라사랑의 힘은 역사의 기억이다
      2020년(10월) 방탄소년단 BTS가 한국과 미국의 우호증진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처음에 BTS가 이 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올해로 75년이 되는 6.25한국전쟁에 미군 최고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만든 상이었는데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도 공군요원으로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작전비행 중에, 그만 북한군의 의해 요격된 비행기가 추락이 되었다.     행방이 불분명한 그를 수색하자는 부하들의 조언을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을 찾겠다고 많은 군인들을 더 희생시킬 수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22세의 그의 아들 주니어 밴 플리트가 그때 죽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죽지 않고 북한 군의 포로가 되어서 중국에 인계되었고 나중에 소련군에까지 최종 넘겨져서 시베리아의 군락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2020년 방탄소년단이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기 한달 전 그의 조카뻘 되는 조셉 맥 크리스천(미국LA 거주)발표가 되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밴 플리트 장군은 1996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평양인근 산야에 묻혀있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고, 그 아들이 묻혀있는 땅 한국이 어서 통일 되어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밴 플리트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가 이 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소감을 발표하자 중국의 방탄소년단 팬들이 그 방탄소년단을 비방하고 탈퇴화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범한 미군을 물리치고자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식의 역사왜곡으로 중국 젊은이들 착각 속에 빠뜨렸다. 사상의 자유가 없고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반대적인 사상을 가진 중국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망각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는 참교육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3만 4천명의 젊은 미국 청년들이 한국의 지금의 번영과 자유를 지켜주었다는 75년전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만 하는데,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망각한 채로 살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베푼 이 역사적인 기적과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고 기억하라’ 했다. 젊은이들은 특별히 어린 세대와 다음세대들은 부모로부터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실천할 때 힘이 생기고 가족사랑과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근본적으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생긴다.    역사의 정확한 기억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인도하셨느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또 분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힘이다. 그 역사를 아는 자들을 미래가 기억할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고 성경은 “너희가 옛날 애굽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신15;15) 고 신신당부 했다. 역사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현재의 역사도 잊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기드온동족선교회 국제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6-24
  • [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13
  • [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3
  • [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실시간 정론 기사

  • 자기 비움과 상호의존성의 지도력
      한국교회의 성장둔화와 윤리적 타락과 사회적 신뢰의 약화 이면에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교회지도자들의 나르시스적 병리현상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나르시시즘’(자아도취적 자기애)는 인간의 부정성이 지니는 심리적 문제로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 자기 안에 완결구조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나르시스적 인간은 자신의 완벽한 자아상 표출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성찰 대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이를 극복하려 한다. 한국교회 안에 내재된 유교적 가부장적 문화는 수평적 소통과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제한하거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의존과 복종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통해 교회지도자들 안에 있는 나르시시즘은 병리적 현상으로 발전되어 간다. 가부장적, 나르시스적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명분으로 공적 영역에서 자기성취와 자기과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의 나르시시즘을 보호하기 위한 비본질적 안전장치들이 설치되고, 구성원들은 반 지성주의에 경도된 채 복종적 참여를 강요 받는다. 몇몇 자수성가형 교회지도자들의 경우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독점과 사유화의 욕구로 인해 왕왕 자신들을 교회와 기관의 소유주로 생각하고 주변에 유사 ‘친위대’를 배치하여 운영권을 독점하므로 집단적 지성의 창출과 지도력 이양에 어려움을 자초한다. 자기 의와 자기연민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성직자의 특권의식과 영적권위로 자신들을 포장한 채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욕구실현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신앙공동체 안에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세속화 현상을 가속화시키며 고뇌하는 신앙인들의 이탈을 방치한다. 나르시시즘을 양산하는 한국교회의 문화와 목회구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육신적 자기비움과 생태적 상호의존성의 영성이 개발되어야 한다. 내 안의 완결구조를 통해 모든 구성원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제왕적 대상화의 망상에서 깨어나 공동체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은사와 집단지혜를 발전시키는 유기적 목회 돌봄이 필요하다. 교회와 사회의 구성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가르치려는 태도와 신앙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미망에서 벗어나 더불어 소통하고 공감하며 상호비판적 성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영적 순례의 길동무 같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목회기술자가 아니라 인생 순례의 여정에 친구로 동행하며 낮은 자세의 경청과 수평적 대화를 통해 말씀의 지혜를 나누는 영적 현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자신이 세운 새로운 목표와 결정과 시간의 흐름에 추종할 것을 요구하는 대신에 구성원들의 삶과 사역의 자리에서 공존의 상관성을 만들어 나가는 섬김의 종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경력과 인맥과 덧칠한 무용담을 권위의 근거로 삼기보다는 언제나 수줍은 첫 만남을 준비하는 아마추어의 자세로 일상을 살아가는 나그네 같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보다 앞서서 문제 해결사로 자처하기보다는 성령의 역사에 공동의 탐구자로 참여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성급한 자기 판단을 앞세워 자기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처세로 대처하기보다는 침묵 가운데 사과와 용서로 낮아지며, 갈등의 사이에 서서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모색하므로 공동체의 진보를 이루는 포용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독무대를 차리고 나르시스적 원 맨 쇼를 연출하기보다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치학을 실천하며 협의회적 과정을 이끄는 섬김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공동체의 전 구성원이 하나님의 선교와 목회와 정치에 참여할 것을 요청 받는 이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의 존재양식이 될 때 에큐메니칼하게 지속 가능한 성장의 문은 열릴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19-05-15
  • 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 최성규목사 <역사의 연구>라는 명저를 저술한 세계적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6·25전쟁 직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3대가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효 사상과 가족제도를 관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비록 한국이 지금은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이 나라는 머지않아 선진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효행이라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차 한국이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 가족제도와 효 사상일 것이다. 만약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가 새로운 별로 이주해야 한다면 지구에서 꼭 가지고 가야 할 제일의 문화는 한국의 효 문화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2019년 현재 상황을 살펴볼 때, 우리 사회에 과연 효행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진 5천 년 역사의 찬란한 정신 유산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 사상에 기초한 효 사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다.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에는 생활고와 가족부양의 부담 때문에 존속살인까지 벌어지는 데에야 더는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각박해진 인심과 메마른 인성으로 인해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회에서는 지난 2014년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교육부가 인성교육종합계획을 5년마다 짜야 하고, 교육청이 매년 인성교육시행계획을 추진해야 하며, 일선 교사들은 매년 4시간 이상의 인성교육 연수를 받을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려는 취지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 방향은 우리 국민이 가지고 있는 뿌리 의식을 되살리는 데 있다고 본다. 부족하지만 나는 1995년부터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쳐왔다.  인천에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고, 같은 해 한국효학회를 창립하여 공청회와 방송토론 등을 거쳐 2007년 7월 2일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결실을 맺었다. 이 법률을 근거로 하여 한국효문화진흥원, 하모니효인성교육원 등이 세워졌다. 이 같은 나의 열정은 ‘효’는 성경에 있는 것이고(디모데전서 5장 4절)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자로 길러내는 ‘효경’이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효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는 일부 여성과 젊은이들이 ‘효’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과 오해를 갖는 부분이었다. 과거 왕조 시대에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효를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군주제의 효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며 가족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할 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의 권익이 철저히 소외되고 박탈되었었다. 이처럼 ‘효’라는 단어가 상당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 부정적으로 자리 잡는 한 효 문화를 중흥시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경을 다시 읽었고 시편 133편에서 ‘하모니’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개역한글에는 ‘연합’으로 번역되었지만 NLT 영어성경에는 시편 133편에 ‘harmony’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모니’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모니해야 하는 데 그 출발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하모니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효를 영어로 ‘Harmony of Young and Old’의 줄임말인 ‘HYO’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HYO의 효는 이타주의와 애경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효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사상인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을 구현하는 현대적 효이다. 그러므로 ‘효’를 넘어 ‘HYO’이어야 한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5-08
  • 어린이가 북적이는 교회는 항상 행복하다
     662만 대 765만. 올해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14세 이하의 유소년 인구와 65세 이상의 고령인구를 비교한 숫자다. 765만이라는 숫자가 유소년 인구라면 뉴스거리도 안 되겠지만, 그 반대라서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고령 인구가 유소년 인구보다 100만 명 이상의 격차로 앞서가고 있는 이 진귀한 현상은 당분간 뒤집어지기 힘들 것 같다. 올해 우리나라 평균 연령이 처음으로 42세를 넘어선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는 노아 홍수 이후 최고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국과 영국이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를 차지)에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이상 차지)로 진입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 그런데 조만간 우리나라는 그것을 26년으로 단축시킬 것이라는 달갑지 않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우리시대 교회에 이미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규모면에서 굴지의 한 교단에서는 28.9%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사라졌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지 1년이 지났고, 지금 현재 각 교단의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들의 수가 시골과 도시를 구분하지 않고 거의 50%를 육박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추세를 당장 막을 수 있는 묘안이 없기에 더 암울하기만 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한국교회의 절반이 문을 닫게 된다는 풍문이 정말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구 십육만 육천 명의 소도시에 출석교인 평균 나이가 29세의 교회가 있다면 다들 놀란다. 우리교회는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이다. 시골의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도시의 2,000명이 넘는 대형교회들을 통틀어 봐도 이렇게 젊은 교회는 없다. 누군가 비결을 묻는다면 “아이들이 행복한 교회로 만들어주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어른들 편의가 아닌 아이들 편의의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한다. 교회 건물의 모든 쓰임새가 교육을 목적으로 지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배와 교육의 비중이 아이들에게 집중적으로 편성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해놓은 형식과 절차에 절대복종하고 순응해야 하는 군대의 병사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을 거의 좋아하지 않는 전혀 다른 체계의 영성을 가진 존재다. 이들은 자신이 서툰 줄 알면서도 자신을 세워주는 것에 감사해 하고, 점점 자신의 잠재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실력 있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어간다. 교회에 아침부터 해가지기 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나가지 않으니, 자연스레 아이 가진 부모들은 이곳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는다. 아이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부모들이 따라간다. 교회가 성장하는 비결이 뭔지 연구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다가도 이 대목만큼은 한목소리를 낸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곳에 젊은 부부들은 몰려간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자연스레 초고령시대를 역행하여 점점 젊어진다. 이제 한국사회는 세계최고 저출산과 초고령사회라는 두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 교회는 뭘 해야 할까? 아이들이 행복해하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몰려올 수 있는 교회로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우리 한국교회의 미래는 그동안 일궈온 교육체계와는 다른 시대적 요구에 진중하면서도 신속하게 반응해야 할 큰 도전 앞에 서 있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정도(正道)는 있다. 아이들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신속히 제거하고, 아이들이 행복한 교회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이 정도다. /당진동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5-01
  • 다시 민족의 희망으로 부활하자
    4월은 교회력에 고난과 부활의 달이다. 그래서 4월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 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고난 없이 부활은 없다. 죽음 없이 생명은 없다. 낮아짐 없이 높아짐은 없다. 우리사회를 생각할 때도 4월에는 고난과 고뇌에 찬 일들이 여럿 있다.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이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타국에서 풍찬노숙하며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특히 임정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기독교인이었음을 오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4월 16일에 우리는 세월호사건을 기억한다. 꽃다운 나이의 많은 고등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죽어갔고 또 그들의 가족들은 지금도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4월 19은 불의에 항거해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4·19의거 기념일이다. 모두 하나같이 고난과 희생으로 가득한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4월은 교회적으로도 고난의 달이고, 사회적으로도 고난의 달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소식을 전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오직 기독교에만 나온다. 옛날 이집트 신화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그냥 오래된 신화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사건’이며, 오늘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역사’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부활의 사건을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증언해야한다. 4월 27일에 한국교회는 아주 뜻 깊은 행사를 했다. 지난 해 남과 북의 두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선언’을 기념해 휴전선에서 인간띠잇기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한국교회총연합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두 연합기관이 함께했다. 한교총은 예장합동과 통합을 비롯해 기감과 침례교 등 대다수의 건전한 교단이 가입해 있다. 교회협은 기독교장로회를 비롯해 성공회 등의 교단이 가입해 있다. 이렇게 두 연합기관, 흔히 말하는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가 함께 손을 잡고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 안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신학이나 교리, 정치와 전통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또 자기가 속한 교회의 전통과 신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주장하며 유지하는 것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 것보다는 같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함께 할 수 있는 것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보다 같은 것을 찾고 또 그것을 함께 나눌때 연합은 이뤄진다. 서로 다른 것만을 주장하다보면 결국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3·1절 100주년에 한교총과 교회협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다. 그리고 4월 27일에도 두 연합기관이 함께 휴전선 앞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했다. 앞으로도 이런 교류와 연합은 더 확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는 다시 민족의 희망으로 우뚝 설 수 있다. 한국교회는 우리민족이 근대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리고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때 우리민족은 교회에서 희망과 소망을 발견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시 그런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는 사명이 있다. ‘욕먹는 교회’가 아닌 ‘칭찬받는 교회’로 다시 부활해야 한다. 그 길로 가는 첩경은 연합에 있다. 그리고 연합은 서로의 ‘다름’이 아닌 우리의 ‘같음’을 찾는데서 시작된다.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19-04-25
  • 부활신앙으로 새롭게 되자
    ▲ 김근수목사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부활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죽음의 권세를 이긴 생명의 종교 기독교에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인하여 부활절이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부활신앙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아울러 강조하는 말씀이다. 첫째, 예수의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나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다. 성경은 ‘성경대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예언의 성취는 죄의 부패와 오염으로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죽음이 끝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허무한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하게하심으로 또 그를 믿는 자들을 부활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은폐시키려고 죽은 예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훔쳐가서 다시 살았다고 ‘조작설’을 퍼뜨렸다. 예수의 무덤을 지켰던 로마 군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 자신들이 받을 처벌이 두려워 예수는 사실은 기절했다가 돌무덤 속에 장사지냈을 때 다시 제정신이 들어 탈출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환상이었다고 역사적 사실을 부인했다. 오늘날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죽지 않은 그의 사랑의 사상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의 의미라고 실존적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비역사가 될 수 없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에 두려워 도망갔었지만 다시 사신 예수를 뵙게 될 때에 생명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다. 주님께서는 부활 후 세상에 40일을 더 계시면서 열한 차례나 오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활의 복음 위에 견고히 서 있다. 셋째, 현재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붙어있는 우리들의 부활을 현재적으로 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경적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그 역사성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 부활까지 믿는 신앙이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1919년 3월 1일의 만세 사건은 부활신앙의 산물 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의 잔인한 핍박과 고문,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것은 현재적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며, 생명의 미래가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넷째, 미래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성경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영화로운 부활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이다. 이 세상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한 부분임을 확신한다. 잠시 잠깐 후에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 실성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다시는 썩지 않는 산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천국 소망, 부활 소망, 영생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렇게나 막 살지 않는다. 세상이 어려워도 자학하거나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으로 겉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이다. /칼빈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4-18
  • 고난에서 영광으로 다시 비상하라
    ▲ 소강석목사   고난주간을 맞는다. 초대교회 신앙은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당연한 기쁨으로 여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사도 바울, 로마의 카타콤베와 갑바도기아에 살았던 사람들, 폴리갑, 이그나티우스 같은 교부들도 스스로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고난받는 것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겼다. 칼빈도 고난과 결부된 경건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현대교회와 성도들은 고난 자체를 싫어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이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관례적인 행사로 보내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고난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 지금 안티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교회를 향해 핍박보다 더 무서운 빈정거림과 조롱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첫째, 고난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고난을 다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신앙의 마인드로 볼 때 주님을 위한 고난과 수난은 최대의 영광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둘째,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요즘 경제불황으로 인하여 모두가 다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시대를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직장을 잃은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퇴직을 당하고 아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절망적 시대다. 또한 소상공인들은 목숨 걸고 장사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가 사회적 아픔을 공감하고 소통하며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나눠야 한다.  셋째,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선용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난을 잘 선용만 하면 더 큰 영광과 전화위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비록 교회는 교회대로 힘들고 성도들도 나름대로 힘들지만,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잘 선용하면 분명한 영광과 복이 있다.  넷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억하며 하나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골로새서 1장 24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서로 다투고 싸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서로 교권싸움을 하고 나눠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연합기관이 3개, 4개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고난과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가지 않으셨던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한다면 무조건 하나 되어야 한다. 분열된 연합기관도 반드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며 대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고난주간을 맞아 고난 앞에서 더 낮아지고 기도하며 우리도 남은 고난,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 그리하여 그 고난의 활주로에서 다시 영광으로 웅비하고 비상하자.  /새에덴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4-09
  • 인간의 죄악을 이기는 힘
    ▲ 김기석총장   부활절이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절기는 또한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마침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다.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은 점점 따스해지는 봄날 햇빛을 받아 새싹을 돋우고 가지를 활짝 펴 새로운 생명의 축제를 준비한다. 자연은 계절의 순환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여주는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해야 할 사명을 받은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위신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잊을만하면 언론에 터지는 목회자들의 도덕적 일탈과 일부 대형교회의 부자세습 문제, 게다가 신천지를 비롯한 신흥 사이비 교단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까지 더해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거꾸로 대중매체와 세속의 법정에 나와 판결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처해있는 것이다. 약 이천 년 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악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능력이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죄악성을 초월한다는 선언이다. 당시 인간의 죄악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권력을 통해 집약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들의 장악했던 종교적 권력, 정치적 권력, 그리고 군사적 권력은 인간의 불의한 죄와 탐욕의 집결체였다. 그 불의한 권력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고발하였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파괴했던 것이 곧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인간의 죄악을 이기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완결성(Integrity of Creation)을 위협하는 환경-생태계 파괴, 세계적이고 지역적 차원에서 점점 극심해져 가는 빈부격차, 인류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살상 무기를 생산하면서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반평화 세력, 그리고 돈과 물질적 풍요만으로 인간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세속 학문과 문화의 연합세력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세력들이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맞이하는 부활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부활을 통해 주님 안에서 그동안 지니지 못했던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길 원하셨기에 제자들에게 상처를 내어 보이셨다. 그리고 죽음의 상흔으로 가득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의 숨결을 이 세상에 불어 넣으시는 날이다.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폭력과 전쟁을 꿈꾸고 생명을 아끼지 않은 이들을 축복하는 날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무릇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생명의 숨을 마시고 위로받아 희망을 품고 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도모해야 할 교회연합의 방향과 내용은 매우 분명하다.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연대를 결성하여 거짓세력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백 주년의 해이다. 백 년 전 교회가 민족 지도자들과 손잡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분투했듯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세계 선교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오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손잡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펼쳐야 할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4-03
  •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세 개 있다.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이다. 앞의 두 개는 구체적으로 그 문구가 성경에 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십계명이고, 신약에서는 주기도문이다. 사도신경은 그 문구 자체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오랜 기간 형성된 신앙의 요체를 담은 글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의 내용은 이 세 가지를 해설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루터의 ≪대교리 문답≫의 기본구조는 이 세 가지에 관한설명이다. 사도신경에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중요한 문장이 있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사적인 집단이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적 기관이다. 공교회를 오랜 기독교 전통으로 말하면 구체적인 내용이 네 가지인데, “거룩하고, 사도적인, 하나의, 보편적 교회”다. 한국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전부 합쳐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지구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의 공교회다. 시간적으로 창세 이후로 존재했던, 하나님을 믿는 모든 교회가 하나의 공교회다. 거룩한 공교회를 종교개혁의 시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곳에 참된 교회가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교회가 교리와 역사 문화적 상황에 따라서 분파되었지만 오늘날의 교회들은 다시금 하나인 것을 확인하며 연대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 덕분인 점이 적지 않다. 시장말로 ‘각개약진’ 방식으로 저마다 자기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켜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다. 사도신경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하면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을 다시금 깊이 인식해야 한다. 거룩한 공교회가 교회 내적인 상황을 우선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 표현 안에 포함된 것이면서 교회 외적인 상황을 말하는 표현이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이다. 교회는 세상과 떨어져서 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에 이 점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모인 공동체이며, 하나님 품에서 새 사람으로 양육되는 공동체이며, 다시 세상으로 파송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철저하게 역사와 사회 속에 존재한다. 그곳이 교회가 존재하는 현주소이다.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의 네 가지에 헌신하는 것이 된다. 첫째가 인도적 인륜도덕, 둘째가 생태적 환경윤리, 셋째가 법치의 민주주의, 넷째가 상생의 시장경제이다. 교회가 사회 안에서 이 네 가지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잃고 말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이 네 가지를 축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교회 내적으로는 모든 개 교회들과 교단들의 거룩한 연대를 말하며, 교회 외적으로는 세상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변화되는 일에 동참하며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다시금 성경적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 10년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5년에서 8년이 한국 교회의 골든타임일 것이다. 다시금 온몸으로 고백하자.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지형은(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남북나눔 이사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3-21
  • 봄이 오는 소리
    ▲ 문교수목사   하나님은 사계절을 절묘하게 구분하셨다. 봄이 먼저 시작되게 하시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오며 겨울이 온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뜨겁고 무더운 여름만 있는 곳도, 또 눈과 얼음과 빙하로 덮인 겨울만 있는 곳도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각 지역에 따라서 어찌 그리 오묘하게 계절을 만드셨는지 피조물인 우리는 그저 감탄한다.  특별히 아시아 대륙 한반도에는 뚜렷한 사계절이 있어서 춥고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면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온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봄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에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 첫째로 봄은 활기찬 소망의 소리다. 봄이 오는 소리에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이 팔다리에 힘을 얻고, 집에만 있던 사람들이 산과 강으로 나오며, 농부는 준비했던 일 년 농사를 시작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조화 속에 봄처럼 새 소망으로 차오르는 시간이 또 어디 있을까! 봄의 따스한 공기가 세상을 감싸기 시작하면 꽃 봉우리도 소망을 가지고 피어나며 땅도 푸릇푸릇한 색으로 갈아입는 소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둘째로 봄은 동토를 녹이는 시작의 소리다. 봄은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여서 새싹이 올라오게 한다. 차갑게 얼었던 씨앗이 겨울잠을 끝내고 기지개를 편다. 누구도 새싹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땅 속 생명들은 동토를 뚫고 올라와 봄의 햇살을 만난다. 우리의 삶에도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와야한다. 따스한 성령의 일하심으로 우리 마음을 얼고 굳어지게 했던 모든 죄악과 탐욕, 음란과 우상숭배, 시기와 원망, 거짓과 분열의 역사들이 떠나갈 것이다. 우리 개인과 가정, 교회, 사회 각계 각층의 얼어붙었던 모든 것들이 풀어지고 녹아져 새롭게 시작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셋째로 봄은 씨를 뿌리는 소리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말씀하고 있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두게 되어 있다.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렸던 선교사들을 통해 지금 전 세계의 선교를 감당하는 한국교회가 있지 않은가! 닥터 로제타 홀은 미국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마치고 조선 땅의 영혼들을 살리고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이곳에 여성의료선교사로 왔다. 그녀가 특별히 조선의 여성들과 맹인들을 위해 44년간 뿌린 씨앗의 열매들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지난 3월 6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부활의 기쁨을 우리는 믿는다.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절기이기에 우리에겐 영원한 봄의 소망이 있다. 겨울이 다소 길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부활의 봄이 올 것을 믿는다. 2019년 당신은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조국 대한민국에 150여 년 전부터 들려오던 그 봄이 오는 소리를 말이다. 사람이 만든 소리가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그 봄의 소리, 복음의 소리가 오늘도 들려오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는 성도, 교회, 나라와 민족이 되길 소망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봄이 오는 소리를 들려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3).  /묵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3-14
  • 대화와 소통 그리고 평화
    ▲ 전계헌목사   대한민국의 국민 뿐 아니라 온 지구촌이 집중하고 있었던 하노이 북미대화가 기대했던 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유산되고 말았다. 다시 만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지만 북미 두 지도자는 상대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쉽게 드러내지 않은 진실을 파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북한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적당한 선에서 북한 땅에서 가장 급선무인 경제제제를 풀어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속셈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미국은 북한의 구체적이고 완전한 핵 폐기 로드맵이 없이는 경제제제를 풀려는 일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축하연 같은 식사도 공동선언도 없이 양 정상은 기약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북한의 김정은은 베트남부터 북한까지 그 수천리 길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측 불가하다는 트럼프는 역시 사업가 기질로 협상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전문가들이 이미 분석하고 종합하여 예측한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하는 신실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대로 모든 일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대화는 필요하다. 국가 간의 대화나 어느 집단의 대화 그리고 개인이나 구성원들 간의 대화는 항상 필요하다.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한 구체적인 대화가 절실한 때다. 한기총과 한교연이 통합을 위해 대화를 하고 있다니 이는 일단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대화는 스킬이 필요하다. 청각 할 수 있고, 감각 가능한 대화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어야 대화는 가능하다. 즉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 진정성이 대화를 이룰 수 있고, 그 대화에서 결과물을 함께 얻어낼 수도 있다. 이번 북미 정상 간의 대화에서 크게 아쉬웠던 부분은 드러내지 않은 진정성이었다. 내 마음을 감추고 상대를 어리석게 보아 대충 얼버무리려는 방식은 어린아이들 세계에서도 통하지 않는 일이다. 더욱이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대화하여 연합체를 만들려고 한다면 더욱 힘들게 성육신적인 자세와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하에 대해 강조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다. 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한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진정성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또 거기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의 대화가 아니라 진솔하고 섬기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버마스(J. Habermas)는 “대화는 인격적인 소통이다”고 정의했다. 그런 노고 끝에 결과를 도출해 낸 것이 평화의 선물이어야 한다. 엄마가 아들을 품에 안는 기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0달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출산의 단말마적 고통을 겪어야 누리는 즐거움이다. 농부가 수확의 환희를 누리는 것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않던가. 평화도 물론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거듭하여 쟁취하는 것이다. 대화의 기술이 소통을 가져오고, 그 노력의 열매가 평화를 이루도록 이 땅의 지도자를 위시한 모든 국민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한다. /전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사)미래와 도약 이사장·익산동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3-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