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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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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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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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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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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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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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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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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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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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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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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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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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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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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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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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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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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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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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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 ▲ 안준배목사 은퇴한 광고 에이전시 보스 해리엇(셜리 맥클레인)은 어느 날 신문의 부고 기사를 읽다가 어처구니 없어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의 사망기사인데 터무니 없이 미화된 기사를 읽고는 신문사의 CEO에게 항의 방문 하였다. 그런 후에 부고 작성 전문기자 앤(아만다 사이프리드)을찾아가 따지기 까지 하였다. 이렇게 알게 된 사망기사 전문기자 앤에게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달라고 한다. 앤은 해리엇에 대한 부고기사를 생전에 쓰기 위해 ‘해리엇 인생 꾸미기’에 나섰다. 앤은 해리엇이 뽑아준 300명의 지인 명단을 갖고 인터뷰를 하였다. 그녀의 남편과는 오래전에 이혼하였고 의사인 딸은 엄마 해리엇과는 전화조차 하지 않는 단절된 사이이다. 앤은 해리엇이 나가고 있는 교회의 사제를 만났으나 교구 사제마저도 해리엇에 대한 평가가 바닥이었다. 앤은 이런 상태에서 해리엇이 죽기 전에 도저히 부고기사를 쓸래야 쓸 수 없게 되었다. 앤과 해리엇은 이제라도 해리엇의 완벽한 엔딩을 위한 4가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 프로젝트를 세운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친구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 ‘아주 우연히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는 나만의 와일드카드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들은 공개된 유언장을 통하여 해리엇의 전재산을 교회와 사회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리엇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자신들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마천 사기열전에 나오는 진나라 여불위는 투자의 달인이다. 여불위의 투자원칙은 희소성의 원칙이다. 현재 처한 상황이 어려워서 상품가치가 없지만 미래가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여불위는 왕위 계승 서열이 뒤쳐진 자초왕자에게 전 재산을 투자하여 마침내 진나라 영자초 장양왕이 되게 하였다. 여불위와의 사이에서 임신된 절세미인 애첩 초희를 자초에게 주어서 황후가 되게 하였다. 그 소생 영정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집권 10년에 여불위를 파면하였다. 그래도 여불위에게 하남 땅을 봉읍으로 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각 나라의 수 많은 선비가 여불위를 찾아오자 시황제는 여불위에게 최후통첩의 서신을 보냈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에게 하남을 봉읍하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는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라고 중부라고 불리었는가? 그대는 당장 가족과 함께 촉땅으로 옮겨 살아라” 여불위는 참수당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거두었다. 상국이라 함은 재상중의 으뜸으로서 왕과 비등한 지위이다. 중부는 왕의 부친이라는 호칭이다. 사실상 여불위의 권세는 황제 이상이었다.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에서 여불위의 인생을 유문무실로 기재하였다. ‘그의 인생은 화려하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이다’는 평가이다. 교비횡령으로 4년 9개월의 형을 받았고 이어서 연금재단 배임 선고공판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된 박아무개는 총회장 6년, 총무 8년을 합하여 14년 동안 교단을 전횡하였다. 그가 지명하면 줄줄이 교단 총회장이 되고 총무가 되고 신학교 총장, 이사장, 헌법위원장, 재판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이 되었다. 교단 내에 아무도 그를 견제할 수 없었다. 무소불위의 교단 실세였다. 교단의 절대권력 박 아무개의 판결서에는 교단내에 그 어떤 제동장치도 전무하였다고 기재되었다. 아직도 그런 이를 롤 모델로 삼는 교단과 교계의 실세들이 여전히 출몰하고 있다. 그런 이들은 여전히 추종자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줄을 세우고 위세 한다. 그렇지만 그가 죽고 나서 마지막 들어야 할 말은 ‘화려하다고 소문만 무성했지 별 것 아닌 인생이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이사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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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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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희망을 전하는 교회의 소망
- ▲ 이상대목사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선택한다면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로 대표되는 이교 사상과 대립하는 한편, 펠라기우스주의와 도나투스주의 등 이단 사설을 논박하며 기독교 신앙을 굳건히 지켜낸 인물이다. 무너져가는 고대 로마의 끝자락에서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섰던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을”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신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교회는 죄와 악이 없는 깨끗한 ‘성소’가 아니라 그것에 고통을 받는 이들이 모여 치료를 받는 ‘병원’이었다. 당대 어떤 이보다도 열정적으로 이단을 적대시했지만, 이단에 몸담았던 이가 올바른 교회로 돌아온다면 이전까지 지녔던 신앙과 성례는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무한한 일치와 관용을 우선시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과연 아름다운 모습일까. 수없이 난립하는 교회연합기관들은 수년 동안 통합을 약속했지만, 그 끝은 공허하기만 했다. 각 교단 총회가 끝나고 현재는 각 교단마다 노회가 열리고 있지만 사회에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화합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정치 이슈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퀴어 단체와 반동성애 단체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는 NAP를, 교육부는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친 동성애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1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남북·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 질서에 어마어마한 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제주도 난민 문제와 미투운동은 또 어떠한가.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에서 신속히 논의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이 시기에 교회에 일치와 관용을 필두로 하는 연합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자리만을 지켜내고자 하는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이제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아 이 땅에 굳건히 서서 새로움을 전해주어야 한다. 이 암울하고 슬픈 세계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반석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반석으로 삼음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했던 반석이 무엇인지 숙고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하는 반석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개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가 자칫 무색해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개혁하는 교회,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한국은 물론 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로 한 다짐을 힘씀으로 이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이룩하고자 하루빨리 연합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소모적인 분쟁과 논란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끝내고, 한국교회가 진리의 깃발 아래 모여 다 함께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 되어 세상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이다. 현실이 지금 이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와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미래목회포럼 전 대표회장·서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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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희망을 전하는 교회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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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을 전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한다
- ▲ 박진탁이사장 미국 LA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중 겪었던 일이다. 미국에 살고 있던 옛 친구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3일 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담당의사는 뇌사가 되었다며 사망으로 인정하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라고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의사가 가족들에게 “장기기증 의사를 생전에 표시하지 않으셨지만, 가족들이 원하시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아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중학교 2학년인 친구의 딸이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인정하는 일이 어렵지만, 이제 하늘나라에 가신다고 생각하면 장기기증이 뭐가 어려워요. 아빠의 건강한 심장이 다른 이에게 옮겨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라며 엄마를 설득하고 나섰다. 결국 그 다음날, 친구의 가족들은 장기기증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친구는 7개의 장기를 기증하며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장기기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미국에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장기기증’, 생명을 살리는 이 일을 고국으로 돌아가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미국에 가족들을 둔 채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와 기도하던 도중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는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을 받았다. 그때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당장 순종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991년 1월 24일 신장 하나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기증했다. 그리고 그 감동으로 시작된 장기기증운동은 27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장기기증운동은 하나님의 강한 인도하심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의 장기기증운동은 갈 길이 멀다. 미국 48%, 영국 32%, 대한민국 3%,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각 나라별 인구 대비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의 비율이다. 한국교회가 앞장 서 장기기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운동이 사회운동이 되었듯이 생명을 살리는 귀한 사역이 온 국민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기까지도 한국교회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 ‘생명을 나누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동기로 장기기증 희망 등록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고통 받고 있는 장기부전 환자들을 위해 생명나눔운동에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공격은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와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더 널리 퍼뜨리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말과 혀로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제는 받은 사랑을 나눌 때이다. 특히 병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많은 환자들을 위해 사랑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삶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사랑의 장기기증서약을 통해 고통 받는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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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을 전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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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생명동산
- ▲ 김기석총장 우리는 가장 더운 여름을 경험하였다. 미래에는 이보다 더 더워진다 하니 정말 걱정이다. 기후변화의 문제가 이젠 과학자들의 논쟁거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존의 문제이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에서 앨 고어는 인공위성에서 찍은 대기권의 사진을 보여주며, 지구 대기권이 얼마나 얇고 연약한지 설명한다. 지구는 아주 크기 때문에 인간의 영향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다. 지구 대기권은 아주 얇기 때문에 매우 취약하다(vulnerable). 지구를 농구공이라 치면, 대기권의 두께는 공 표면에 칠해진 광택제 두께에 불과하다. 대기권은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등 네 층을 합하여 총 140 킬로미터에 달하지만, 기체의 80%는 지상으로부터 약 12 킬로미터 정도까지 뻗어있는 대류권에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해발 4,000미터 이하에서만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다. 지구가 형성된 이래 대기의 구성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해 왔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그동안에는 화산이나 판 이동에 따른 지질학적 격변, 생명체 활동에 의한 화학반응, 소행성 충돌 등 자연 환경에 의한 변화였지만, 최근에는 인간에 의한 변화가 주된 요인이다. 바로 산업화로 인한 온실가스의 배출이 그것이다. 지구 기후는 에너지 평형의 흐름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태양광선을 통해 지구로 도달한 에너지는 일부는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고 일부는 지구에 흡수되었다가 결국 방출됨으로써 지구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에너지 평형을 이룬다. 간단히 말해 기후란 지구 에너지가 평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인식해야 할 점은 지구 기후는 항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지구 기후는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개입하기 전부터 지구기후는 변동을 겪어왔다. 기후변동의 주요한 원인으로 세 가지 요인은, 첫째 태양 에너지의 변화 혹은 지구 공전궤도의 변화, 둘째 우주로 반사된 빛 에너지, 셋째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에 350ppm 이하였던 지구대기 중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2016년에 400ppm을 넘어섰다. 기후학자들은 수십년 이내에 450ppm을 넘어설 것이며 그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기후 격변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구기후 시스템에 인간이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변화의 방아쇠를 당기면 기후도 막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새로운 평형을 향해 급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기후는 나무늘보가 아니라 순식간에 달려드는 맹수이다. 지난 1만 년 동안의 따뜻하고 안정된 기후는 빙하기 중에 찾아온 행운의 나타난 아주 짧은 기간의 현상이었다. 만일 안정된 기후가 지금부터 격변의 단계로 들어선다면 과연 인류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이러한 전 지구적 규모의 변화로 인한 위기가 닥쳐올 경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과 종교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과학기술의 지식은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종교는 위기 앞에 자기 혼자만 살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모든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위기를 극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류를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과 수많은 생명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이다. 이 땅과 하늘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다른 동식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복을 베풀어 주신 생명동산이다. 이젠 시간이 촉박하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소중한 생명동산을 보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나서야 할 때이다. /성공회대 총장·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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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생명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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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으로 드리는 삶
- ▲ 민필원목사 미국 미시간주 칼빈신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는 동안에 갈보리교회라는 현지 미국인들이 다니는 교회를 일 년 넘게 출석한 적이 있다. 그 교회는 매 주일에 대략 5000여 명이 모이는 꽤 규모 있는 교회였다. 어느 주일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그날은 그 교회의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교회 설립 75주년 기념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예배였지만 그 가운데 그 교회의 긴 역사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몇몇 특별한 순서들이 있었다. 그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순서 한 가지는 헌금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바이올린 독주였다. 사실 이 교회는 아주 잘 구성된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아마도 교인 중에는 젊고 훌륭한 연주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헌금 시간에 바이올린 독주를 하러 나오신 분은 백발의 85세 할머니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강단 위로 걸어 나오신 그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서서히 연주를 시작하셨다. 조용한 가운데 흘러 퍼진 그 할머니의 바이올린 연주는 그 곳에 앉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으로 들려왔다. 할머니의 떨리는 손에서부터 전해오는 감동스러운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 그 아름다운 바이올린 독주를 하신 이 할머니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 바이올린 독주를 하신 그 할머니는 그 교회가 창립되던 75년 전부터 그 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온 분이셨다. 교회가 설립될 당시 10살이었던 소녀가 무려 75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교회의 예배를 돕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봉사해온 것이었다. 그날 그 할머니의 연주 가운데 느껴지던 감동은 그 바이올린 소리뿐 아니라 그 할머니의 신실함에서부터 오는 감동이었다. 이 할머니의 연주와 신실함이 그 할머니뿐만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감동케 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매우 빨리 그리고 쉽게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너무나 쉽게 바뀌고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쉽게 변하고 소망도 쉽게 변한다. 과연 이러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많은 봉사와 사랑과 섬김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종종 목사님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흔히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성도들 못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종종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목사는 섬김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 안타깝게도 목회의 현실에서 이러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지만 이것이 가슴 아픈 것은 목사와 성도들 간에 신실함이 상실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목사를, 목사가 성도들을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교회의 현실인 것은 매우 아픈 일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실함으로 나누는 삶의 연주가 되기를 소망한다. 75년간 변함없이 신실함으로 한 교회를 섬기셨던 85세의 할머니의 손 떨리는 바이올린 연주가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하게 연주함으로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천안반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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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으로 드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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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
- ▲ 김진호목사 매년 9월이 오면 장로교는 성총회가 열리고 교단을 섬기고 이끌어 갈 큰 지도자(총회장)들을 선출하게 된다. 장로교는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이기에 그 사명이 막중함으로 항상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장로교의 한 지도자의 탄생은 한국교회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에 더더욱 그 책임도 크고 기대함도 큰 것이다. 이제 총회를 앞두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로, 오늘의 한국교회를 가리켜 위기라고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 위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장로교단의 성총회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먼저 지도자 된 우리 모두가 각성과 지성으로 한국교회의 정화운동의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뉴스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성(性) 스캔들과 일부 총회장 선거의 타락상과 소수의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세습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기보다 실망을 주고 있음이 사실이 아닌가? 먼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참회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시 34:18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장로교의 총회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둘째로, 총회를 통해 사분오열된 한국교회를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주님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하나 되도록 명령하셨는데 한국교회(특히 장로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핑계 삼아 찢어지고 갈라져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 아닌가? 오죽하면 한국교회를 가리켜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제는 서로 용납하고 관용하여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연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고 화합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세상을 향해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교리나 신학이 예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총회를 통해서 교단과 교단이 연합하고 여러 연합체 기관들도 하나의 연합체가 되도록 거룩한 결단을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지금 이 나라, 이 사회가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애쓰는 저출산 문제와 자살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도 함께 고민하며 진지한 연구와 대책을 세워나가는데 일조해야 한다. 교회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공동체가 아니기에 이 사회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진리의 공동체가 아닌가? 현재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급격히 줄어가고 있으며 크리스천 중에서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장로교의 총회는 세상과 함께 진지한 연구와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열리는 총회가 총회장 선거나 치루고 마는 행사 위주와 안일한 총회가 되지 말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 부흥하게 하는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총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기감 전 감독회장·도봉감리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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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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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단 총회에 바란다
- ▲ 이정익목사 9월은 장로교단 총회시즌이다. 이제 여러 장로교단들은 마지막 총회준비에 한창이다. 여러 장로교단들은 교단마다 당면한 총회 이슈들이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해결과 결의와 치유가 있었으면 한다. 먼저 통합측의 총회 핫 이슈는 명성교회 문제가 아닐까 한다. 총회의 뜨거운 감자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총회 재판국에서 예상을 뒤엎고 합법으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재심청원을 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재심청원은 판결문을 송부받은 지 30일 내에 신청해야 한다. 재심청원을 하려면 9가지 사항 중 2개 이상의 분명한 위법사항이 있어야 신청할 수 있다. 현재 반대 측에서는 재심청원을 모색하고 있겠지만 문제는 두 가지 이상의 타당한 위법 사항이 있어야 가능한데 현저히 위법하다는 조항이 없다는데 고민이 있다. 총회 재판국이 합법으로 판결을 한 근거는 총회에서 이미 세습금지법을 결의한 사항에 대해서 헌법위원회가 금지조항에 대해서 삭제 내지 보완 수정하라는 해석을 내린 것을 근거로 재판을 하였기 때문에 마땅한 재심청구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총회에서는 재판국의 재판사항이 집행부 보고로 끝나기 때문에 이 명성교회 문제는 일단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반대 측에서는 총회를 보이콧하거나 총회장소를 점거하자는 여러 설이 나오고는 있지만 통합총회는 그런 물리적 수단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합동측 총회의 핫 이슈는 총신대 문제가 아닐까 싶다. 현재 학교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교육부가 개입하기로 한 상태이다. 이미 총장과 이사진은 해임됐고 곧 관선이사가 파송될 예정이다. 누가 관선이사가 될 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교육부는 흔히 관선이사를 파송할 때 교육부가 만들어 놓은 인재풀에서 파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학교와 관련된 유관 기관 즉 동문회, 후원회 등 기관추천도 받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방법은 또 총장측이 연관된 인사들을 추천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관선이사들이 파송되면 먼저 이사회를 구성하고 새 총장도 선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신백석측의 총회 이슈는 대신측과의 통합 불발문제가 될 전망이다. 백석측은 대신측과 통합하면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통합 된지 벌써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근착이 되지 못하고 갈등 중에 있다가 대신 수호측의 소송으로 통합은 불법이고 대신이라는 교단명칭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고법의 판결이 나와 결국 대신 합류파는 백석과 결별하고 대신수호측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것은 교단통합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길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장총회는 이번 총회를 제주도에서 개최한다. 이번 기장총회에서는 제주도 4·3사태와 강정마을 사건, 통일문제를 다룰 것 같다. 이런 문제들을 실제적으로 다루기보다 성명서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오늘 각 교단들은 모두 산적해 있는 난제들을 안고 있다. 물론 각 총회는 당면한 이슈들을 먼저 집중해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자칫 이런 당면한 문제들에 매몰되어 정작 한국교회가 공히 당면한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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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단 총회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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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후원, 함께 변화하는 여정
- ▲ 양호승 미국에서부터 10년 넘게 후원하는 르완다 아동이 있다. 미국에 거주할 때 미국월드비전을 통해서 인연을 맺게 된 아동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동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거나 선물을 보내며 내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기도하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대신하고 있는데, 나처럼 게으른 후원자와는 다르게 많은 분들이 후원아동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들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번역자원봉사자들이 있는데 월드비전만 해도 약 천 명이나 되는 번역자원봉사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월드비전의 최고령 번역자원봉사자께서 전화를 주셨다. 14년 간 해오던 편지 번역 자원봉사를 이제는 그만해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봉사를 시작하고 한번도 쉬신 적도, 마감을 어기신 적도 없는 성실한 분이었고 그만큼 귀한 분이어서 아쉬움이 매우 컸다. 하지만 81세로 고령의 나이를 가지고 계시니 어쩌면 힘에 부치셨을지도 모르겠다. 이 분이 봉사를 하게 된 계기는 투병 중이던 남편이 천국을 가고 자식들이 출가한 후 허전함과 외로움 속에 3년을 헤매고 있을 때, 동생의 제안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픔과 외로움이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이 자리 잡더라고요”라고 말할 정도로 이 분을 힘든 시간 속에서 건져냈다. 나는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해외아동후원이 후원자와 후원아동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 둘을 잇는 봉사자의 삶까지 변화시키다니. 너무 멋진 이야기가 아닌가! 먼 나라에 사는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해외아동후원이 사업후원이나 특별후원과 다른 점은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그 관계를 맺고 깊어 가는 과정 속에서 아동과 후원자, 그리고 가교 역할을 하는 봉사자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된다’는 점이다. 그 변화는 자존감을 높이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넣어주며, 다른 이를 향한 배려와 사랑을 포함한다. 실제로 후원을 받은 아동이 그렇지 못한 아이에 비해 자존감도 높고 훨씬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해외아동후원, 더 나아가 해외 빈곤지역을 돕고자 하는 경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약 3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난해와 올해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것은 월드비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종기관들도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고 고령화, 청년실업 등의 사회적 불안감이 높아짐에 따라 전반적으로 나눔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를 도와야 한다고 할 때 흔히들 ‘대한민국은 옛날에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어려운 나라를 도와야 한다’ 또는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당위성과 책임론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후원과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변화에 주목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앞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후원은 단순히 돕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관계 맺음이며, 더 나아가 후원자와 아동, 그리고 봉사자의 삶에 기쁨과 보람을 넘어서 변화를 가져다 준다. 주님과 우리가 관계 맺음을 통해 변화하듯 우리도 아동과 더불어 간접적으로 관계 맺는 봉사자까지 관계 맺음을 통해 예수의 향기와 예수의 삶을 전하고 그들과 내가 함께 주님을 닮아 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에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의 손길이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평안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길 기도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월드비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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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후원, 함께 변화하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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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 ▲ 이승열사무총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야곱, 이삭, 위대한 지도자 모세, 다윗, 그리고 예수의 조상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된 여인 중 하나인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 등이 난민의 생활을 했었고 예수님은 친히 어린 아기 시절에 베들레헴의 학살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살았던 분이셨다. 즉 하나님이 친히 난민으로서의 경험도 하시고 그들의 입장을 옹호지지 돕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는 본류가 아닌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라는 여종도 죽어가던 중 도와주시고 살려주신 구호의 역사가 있다. 여기서 하갈은 나를 살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독일개신교회는 지난 2017년에 교회대회의 주제성구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정하였고 시리아 난민 120만 명을 받아들인 독일의 교회적 입장과 역할을 논한 바가 있다. 우리나라 또한 난민의 역사를 간과할 수 없으며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난민들의 임시정부로 시작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전쟁난민들이 국제적인 도움으로 연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 한 후 난민법이 2013년에 발효되었고 그동안 누적된 난민신청자는 모두 2017년 당시 40,470명이며,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4.1% 그리고 인도적 체류를 허락받은 자들은 7.6% 모두 합해서 11.7%인데 전 세계의 통계(난민 인정이 24.1%, 보충적 보호 12.3% 합 36.4%)에 비해 매우 저조한 통계라 할 수 있다. 현재 제주도에 무사증으로 입국하여 난민신청을 한 외국인들은 금년에 모두 1,055명인데 예멘 549명, 중국 353명, 인도86명 그 외 소수의 몽골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유독 예멘인들은 더 이상 무사증으로 입국하지 못하도록 법무부가 지난 6월 1일자로 조치를 했으며 대부분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을 보장해주었는데 예멘인들은 제주도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출도제한 조치를 감행하여 제주도에 갇혀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들이 무슬림, 가짜난민, 이슬람선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등등의 잘못된 오해와 가짜뉴스와 더불어 제주도민들이나 교회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혐오적 배타적 포비아(공포, 두려움) 현상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먹고, 자고, 일하는 생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사회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주도의 기독교의 반응도 대부분 도민들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난민들에 대한 기독교와 교회의 입장은 어떠한 차별 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과 과제임을 깨닫고 그들을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먹이고 재우고 일자리를 제공하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문화를 익히게 하고 섬기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모금에도 동참하고 있는 자들도 기독교인들이다. 특히 (사)제주외국인평화공동체 부설 제주외국인이주민센터(공동대표=홍성직)는 현재 64명의 예멘난민신청자들을 수용하여 돌보고 있다. 현재적 난민에 대한 오해와 배타적 혐오적 자세를 바른 성경적 이해로 극복하고 전향적 자세로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즉 그들은 작은 자이고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믿음의 열매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선교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고 찾아가서 선교하느라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이치와 전략상 맞지 않은 것 같다.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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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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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전기는 안전한가?
- ▲ 유만석목사 요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연일 기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22일 서울의 기온이 섭씨 38도를 기록하였다. 이런 더위는 수십 년 만의 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백여 년만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런 푹푹 찌는 무더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겪는 일이라고 하니, 자연 재해가 우려되고, 그 재앙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력수요도 지난 20일, 8,808kw로 역대 최대 전력 수요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2016년 8월에 8,518만kw를 기록한 것을 다시 경신한 것으로, 올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 갈아 치우는 기록적인 전기 수요량이다. 이제 8월 달에는 더 많은 전기량을 사용하게 될 터인데, 냉방과 가전제품에 주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서민들이 전력난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현재 정부가 확보한 예비 전력량은 10% 남짓으로 그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럴 경우 가정에도 문제가 되지만, 전기를 통해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과 기업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정부에서는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가, 급한 나머지 그 원전 가동을 지난 21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로써 전체 원전 24기 가운데 14기만을 가동하던 것을 현재는 17기로 늘려 가동하고 있으며, 앞으로 19기까지 늘릴 계획이란 언론 보도가 있다. 현 정권에서는 대통령 공약으로 탈원전 정책을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신규 원전 전면 중단 및 건설계획 백지화,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 및 월성 1호기 폐쇄, 탈원전 로드맵을 수립하는 공약을 발표하였었다. 그리고 지난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탈원전 에너지 전환 정책을 구체화하면서, 원자력계와 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19일 대통령이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원자력발전소 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천명했었다. 이에 따라, 원자력발전소인 신고리 5/6호기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공론화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지난 해 10월 20일 공론화위원회는 찬성 59.5% 대 반대 40.5%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을 재개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원자력에 대한 안전의 우려와 친환경적인 재생에너지에 대한 정책은 필요하겠으나, 아직 뚜렷한 대책과 대비가 없는 가운데, 성급하게 ‘탈원전 정책’으로 가는 것은, 이번의 경우처럼 폭염이 계속되고, 전력수요의 급증으로 인하여, 전기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지 않을까 염려하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기 발전을 함에 있어, 여러 가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에너지관리공단의 통계에 의하면, 석유가 40.1%, 석탄이 27.8%, LNG가 15.4%, 원자력이 11.6%, 신재생이 4.6%, 수력이 0.5%이다. 그러나 전기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은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이 kwh당 250원인데 비해, 원자력은 68원 정도에 불과하다. 원전이 중단된 가운데 전기량이 급증하면, 당장 석탄과 LNG 연료를 사용하여 발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료는 미세먼지와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단점이 있다. 탈원전 정책을 펴는 정부로서도 중장기적인 계획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2030년이 되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20%로 늘린다고 한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생산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들어간다. 올 여름 날씨는 기록적인 맹위를 떨치고, 전력 수급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우리나라 전기는 안전한가를 묻고 싶다. /한국교회언론회 대표·수원명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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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전기는 안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