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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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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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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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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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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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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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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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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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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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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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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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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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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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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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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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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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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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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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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먼저 ‘죄책고백’으로 시작하자
- 한국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복음전파는 처음부터 죄책고백과 함께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일은 1903년 원산에서 하디선교사가 동료선교사들을 감동케 한 회개의 기도에서, 1907년 평양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장로가 회중을 감동케 한 죄고백의 기도에서 각자가 죄를 고백하는 회개운동으로 발전하여 한국교회 초기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체로 개인의 사적인 죄는 공중 앞에서 고백하도록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행한 고해성사의 문제성 때문이며, 사적인 죄를 공중 앞에 고백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여 죄용서의 은혜를 입도록 하고 있다(요 20:23, 시 23:5, 단 9:5, 요한1서 1:9), 그러나 인간의 죄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지만, 역시 이웃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위자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따라, 그의 행위가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성경에서 다윗은 왕의 신분과 지위에 있었기에 그가 행한 죄가 미치는 영향과 책임은 막중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의 다윗을 향한 죄책의 지적은 죄를 회개하여 다시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시 51).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도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교회와 모든 기독인의 죄책을 매 주일공예배의 하나님과 회중 앞에 일깨우고, 목회자가 죄책고백을 행하도록 권하였다(기독교강요, 3권 1~5장). 지금 한국교회는 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허물과 실수(죄)가 한국사회에서 너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으로는 지나친 개교회주의와 개교파주의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이 흔들리며, 외적으로는 교회의 공공성이 엄청난 사회적인 불신에 휩싸인 모습이다. 그래서 이전과 같은 교회성장도, 복음전도도 모두 한계에 직면한 모습이다. 더욱이 교회 내적인 문제를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도 상실한 채(교회법과 정치가 있음에도), 일반법정의 판단에 내맡겨진 교회의 문제들은 심지어 TV에 그대로 노출되어 한국교회와 목사의 권위추락 또한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이러한 위기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다윗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모든 문제(대형교회의 목회세습, 목회자의 비윤리성 등)는 해당 교회와 그 지도자의 문제이지만,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분명하다.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내 탓이오”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죄책고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마 18:15~20). 그것들이 남의 일, 타 교단, 타 교회, 타 목사의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개신교회 우리 모두의 실수(죄)임을 시인하고, 우리 하나님께 엎드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죄책고백운동”이 새해에 시작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죄책 고백은 곳곳에 모이는 신년하례 예배와 매 주일 지역교회 예배에서, 장로님의 기도와 목회자의 기도 가운데서, 한국교회 전체가 년 중 한 주간(새해 첫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든지, 또는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교단별 목사장로기도회에서, 통회하며 자복하는 죄책고백의 기도가 실천되었으면 한다(느 9:1~3, 삼상 7:3~12). 그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한국교회의 본질(거룩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지금 한국사회에 평화 시대가 도래한 것 같으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를 느끼게 되는 상황에서 그 모든 불안을 극복하고, 참 평화를 발견하는 길임을 기억하자! 우리 주님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사랑)를 가지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경고한다. 아마도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소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침묵을 깨고, 이러한 죄책고백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선다면, 이 신년 새해에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크게 쓰임 받는 기관들이 되리라 기대한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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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먼저 ‘죄책고백’으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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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한 본질교육
-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보다 3배나 높다. 그리고 자살이 10년째 청소년 사망원인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개선될 기미조차 없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 청소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9~24세)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 평상시 스트레스를 느낀 중·고등학생은 지난해 37.2%나 됐다. 게다가 ‘최근 12개월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중·고등학생도 25.1%였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외국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부모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가출한 청소년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보았더니 가출 이유에 대해 73%가 부모 때문에 가출하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결국 부모와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잘 교육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시대마다 특별한 방법을 찾았지만, 그 방법은 유행처럼 끝나버린 경우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요즘 왜 많은 목회자들이 쉐마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마다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각 교단마다 총회뿐 아니라, 노회 그리고 교회에서 다음 세대의 중요성을 알고 이제라도 가르쳐 보려고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자녀교육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들에게 “네 자녀, 네가 가르쳐라!”고 말씀하고 있다.(신 6;4~9) 즉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통해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쉐마교육의 핵심은 질문과 토론에 있다. 질문과 토론으로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질문을 많이 하면 할수록 대답하기 위해서 뇌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히 부모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쉐마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회에 데려다주는 것은 잘했지만, 부모가 직접 자녀들을 가르치진 않았다. 물론 가정예배도 시도해 보고 몇 가지 자녀를 가르치는 방법도 동원해 보았지만, 그때뿐이고 지속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방법이 중요하다. 이미 예수님은 질문과 토론으로 성경에 310회 정도를 말씀하고 있다(눅 2:46-47). 덧붙여 말하면 질문과 토론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면 얼마 큰 유익이 있는가는 이미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외국에서 많이 실시하고 있는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인성교육과 부모와 소통을 위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부모와 함께하는 금토캠프, 부모와 함께 드리는 주일예배, 인성 교육을 위한 암송, 부모와 함께는 역사탐방’ 등이 있다. 2010년부터 시작한 쉐마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본질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해갈수록 많은 기관과 매스컴에서 관심을 갖고 초청을 한 이유도 성경적 방법으로 다음세대를 세워보자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퍼진다면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는 분명히 회복될 것이고,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도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 /쉐마학당연구원 원장·과천약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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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한 본질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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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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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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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 ▲ 주도흥목사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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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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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 예수가 우리를 찾아 나선 첫 날
- ▲ 정인교목사 “어머니 난 지금… 참호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몹시 추운 날씨지만 참호속은 지푸라기가 넉넉해 꽤 아늑해요. 오늘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적없는 기적같은 광경을 보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페이스북에서 ‘1914년 기적의 크리스마스’라는 영상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영상이었지만 보는 내내 가슴을 잔잔히 적셔왔다. 앨프레드 두건 차트 소위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로 지역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온종일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리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멀리서 간간히 포성이 들리는 사이로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노래 소리가 들여왔다. 스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영국군이 그 찬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같은 찬송을 부르다니….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영국군 병사 하나가 비무장인 채로 참호에서 나왔다. 그것을 보고 양국 병사들이 하나둘씩 참호에서 나온다. 주님이 오신 성탄절 아침 그들은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눈다. 어제 부른 찬송 이야기를 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양 팀으로 나눠 축구경기를 하고 서로 상대편의 머리를 깎아 준다. 다시금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고 이들은 서로 별일 없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자신들이 소중히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성탄의 기적은 그렇게 전쟁터에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 나선 첫날인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기적 아닌가?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가해자인 인간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신 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에게 생명의 손을 내미신 날…. 서로를 겨누던 총부리를 내려놓는 기적은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닌가? 영상을 보니 영국군은 메리, 즐거운 크리스마스로 인사하고 독일군은 ‘프로헤 바이나흐텐’ 즉 경건한 성탄으로 인사한다.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전장의 병사들이 호응한 감동의 날은 당연히 즐거운 날면서 경건한 날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누우실 구유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백화점 세일과 만원이 된 모텔, 일년 대목 보는 술집이 들어서고 술집 매상이 들어서서 즐겁다고 한다. 성탄이라는 명칭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자리에 Season’s Greeting을 새겨 넣은 채 말이다. 이렇게라도 즐거워야 할 만큼 우리 인생사가 각박하다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저녁에 귀가하는데 아파트 입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통장님, 너무 수고 많으세요. 올해 제가 처음 본 성탄 트리네요” 모든 아파트 통장 중에서 역사상 가장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통장님이 방긋 웃으셨다. “다들 예전 같지 않아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지 얼궁에 웃음도 사라지고 성탄절이 코앞인데도 아무 생각들이 없는 것 같아요. 제발 성탄절만이라도 서로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어요” 나는 안다. 우리 통장님이 예수 믿는 권사님이라는 사실을…. 성탄트리를 장식하면서 권사님의 기도가 내 기도와 같았으면 좋겠다. ‘주님 이 땅에 평화를 주세요.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살게 해 주세요.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예수 믿어 행복하게 해 주세요!’ 1914년의 기적이 올해 다시 이 땅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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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 예수가 우리를 찾아 나선 첫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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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에서 희망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서라
- ▲ 황인찬목사 언제부턴가 한국의 기독신자로서 자부심을 잃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정통 교회와 이단을 일반 사회가 구분하지 못하므로 이단 사이비들의 준동과 비윤리와 반사회적인 작태가 오롯이 교회의 몫이 될 때 아픔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단과 사이비들의 행태여서 우리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아니 더 치를 떨며 비판하고, 암 덩어리 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거품을 물며 그들의 해악을 말하고, 우리 교회가 진정 그렇지 않음에 자위를 했다. 하지만 정통교회와 그 목사들의 일탈과 비윤리, 비도덕의 현장이 고발될 때면,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 한, 때로는 자랑스러워하던 인사나 교회의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 된다. 너무나도 만연한 목사들의 잘못과 부정부패, 역사의식이 실종된 망언 등을 접할 때 한국교회에 정말 희망이 있는가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처럼 심해에 좌초된 것 같은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여기의 성은 환란으로 멸망에 이른 오늘의 한국교회다. 열국의 부러움을 사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열방의 수치와 모욕거리가 되었다. 선지자는 ‘슬프다’는 말로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위로 받고자 해도 위로 자가 사라져 위로 받을 수가 없다. 상황의 악화로 그 비참함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선지자는 고백한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소망이 끊어진 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강제로 옷 벗김을 당한 사람처럼 참담한 모습으로 손가락질 받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을 마땅히 의지하고 경외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맘몬을 믿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안중에 하나님 없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 처절한 형편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피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절망에 찢긴 나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는 한 희망은 있다. 우리 교회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깨어지고, 망한 자처럼 되었어도,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기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주님의 위로가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겨두신다. 그 남겨진 그루터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신다. 한국교회 심장의 박동을 멎게 하지 않으시고, 의의 사람 10사람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찾으시고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게 하신다. 시편의 기자는 말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희망, 나의 소망은 주님께만 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회개의 무릎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변질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서 희망이 되자.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하지만 고난이 인생의 큰 유익이 된다.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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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에서 희망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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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과 변혁
-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선수의 한국 여자탁구가 여자단체전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8전 8승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 손기정 선수 이후에 한국의 어떤 스포츠가 세계를 제패한 일이 처음이었다. 이 열기로 탁구장이 많이 생겼다. 내가 중학교 때 탁구를 배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탁구를 가르친 코치는 늘 자신이 이에리사 선수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처음에 기본 동작을 배웠다. 붉은 벽돌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탁구장에서 동네 뒷산까지 뛰어 올라가는 일이 훈련의 시작이었다. 뒷산에서 벽돌을 들고 기본 서식을 연습했다. 한 달 동안은 탁구채를 잡지도 못하게 했다. 벽돌을 탁구채 삼아 포핸드와 백핸드 동작을 팔이 아파서 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했다. 탁구장에 돌아와서도 탁구채는 잡지 못했다. 선수급 되는 사람들이 치는 것을 관찰하게 했다. 그들의 동작을 보면서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한 달 정도 후에 처음으로 탁구채를 잡았는데, 신기하게 탁구가 되었다. 모든 운동에는 기본기가 있다. 그 운동에서 얼마만큼 발전하느냐는 기본기가 얼마나 잘 잡혀있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이 중심이다. 중심이 확고하면 경기를 할 때 벌어지는 다양한 변화의 상황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중심이 깊고 확실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삶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신앙의 중심이 든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의 중핵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계시를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나누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를 가장 실제적으로 말하면 66권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여기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다. 중심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중심에서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 또는 변혁의 탄력성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너무도 뚜렷한 현상이 변화다. 기술의 발전과 변화의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변화의 흐름에서 밀려나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필수 항목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기대어 오늘날의 인간 생존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나는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이와 연관된 굳건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요 뿌리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자칫 잘못하면 교조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해명 없이 기존의 생각을 무조건 고수하는 고정관념 말이다. 성서에 대한 깊은 믿음이 교조주의의 곁길로 빠지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변화의 탄력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변화의 흐름에 문을 걸어 잠그면 교조주의로 빠진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근간으로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변혁의 역동성이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해야 한다. 성경은 원래 그런 책이다. 남북, 북미 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큰 틀이 변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중심이 분명한가, 그리고 변화의 탄력성이 충분한가? /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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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과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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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가 되라
- ▲ 김영한원장 한국교회는 외적으로는 시대적인 세속주의, 젠더주의, 이슬람의 공격으로 도전을 받고 있으며 내적으로는 연합기관의 분열, 대형교회 세습 관행, 신천지, 안상홍 하나님 교회 침투 등 각종 이단들의 내부공격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첫째, 세속주의라는 세상의 풍습과 타협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이 잠식되고 있다. 교회 기관의 직분은 섬기는 자리인데 여기에 물질과 권력추구가 중심이 되고 있다. 성경적 헌신에서 떠나서 세상적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젠더주의가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질서로 간주하여 교회를 미혹하고 있다. 젠더주의는 남녀로 태어나는 생물학적 성질서를 부정하고 성이란 사회가 지정한다는 사회적 성을 주장한다. 셋째, 이슬람이 세계적인 대두로 지구촌의 세력이 되어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슬람은 한국을 세계의 이슬람화의 전초기지로 보고 각종 선교사 파송과 이슬람 노동자들을 파송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외부적 도전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속주의의 도전은 초대교회부터 있어왔다. 오늘날에는 물질주의와 권력추구는 기독교를 변질시키고자 한다. 젠더주의는 양성질서인 성경적 창조질서를 인간이 조작한 성평등질서로 변질시키고자 한다. 성경은 창세기 19장 사사기 19장의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회적으로 타락한 사건에 대한 폭로기사를 통하여 분명이 동성애가 가증한 짓(토예바), 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은 알라라는 중동지역의 부족신을 유일신으로 믿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믿는 야웨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종교다. 무함마드는 이슬람교의 교주이나, 예수는 기독교를 만든 자가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이 만든 신앙고백 공동체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서 단일신을 믿는 이슬람과는 전혀 다른 종교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외부적으로 도전받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내적으로 단합해야 한다. 첫째, 보수교회 연합기관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금 보수기관은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세 기관으로 분열되어 각기 권력을 추구하고 있어 비난을 받고 있다. 오늘날 연합기관은 교회 연합을 추구하지 못하고 권력다툼, 교권 비리, 사회 집권 등의 현장이 됐다. 특히 대표회장 선출을 두고 일어나는 다툼이 문제가 있으며 또 희생, 연합 정신이 결여돼 있다. 명예나 개인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을 각오를 해야하는데 구호만 외친다. NCCK는 별도로 진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난맥상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대형교회가 담임목사직을 세습케 함으로써 사회에 대하여 바른 윤리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형교회당 담임목사직 승계는 목회승계라는 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으나 대형교회당 담임목사직 세습은 막대한 재정과 인사 등 권력이 대물림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비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셋째, 신천지, 안상홍 하나님 교회 등이 정권교체기의 느슨해진 틈을 타 한국주류교회에 추수꾼의 명목으로 침투하여 각종 교회분열과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신천지는 이만희를 재림주로 세우면서, 하나님교회는 죽은 안상홍을 하나님으로 장길자를 영적 어머니로 믿고 각종 종교적 미혹으로 신자들을 공교회에서 이탈하게 하고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있다. 공교회는 하나가 되어 이에 대해 바른 대처를 해야 한다. /전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원장·기독교학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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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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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성경이다
- ▲ 이상원교수 추수감사절은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염원하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 온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첫 해의 살인적인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맞이한 이듬 해 첫 수확을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마련한 절기였다. 주로 미국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여 형성된 교회가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미국교회의 관행들이 한국교회에도 도입되었고, 그 관행들 가운데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미국교회로부터의 기원과 관련하여만 생각한다면 현대 한국교회에서 그 의미가 약화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현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도시에 세워져 있고 대다수의 성도들이 농사가 아닌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실 때문에 일 년 단위로 추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추수감사절은 피부에 와 닿는 절기가 되기 어렵다. 농사를 짓지 않는 성도들의 경우에는 이들이 행한 수고에 대한 보답이 반드시 11월에 한 번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석이라는 한국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절기가 이미 국가적인 명절로 크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한층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국가 최대의 명절 가운데 하나로 지켜지고 있는 미국과는 달리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 교회 내의 절기로서만 지켜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추수감사절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다르다. 현대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의미 있게 지키기를 원한다면, 추수감사절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어야한다. 추수감사절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는 성경 상의 절기로는 수장절을 들 수가 있는데, 사실상 수장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절기는 아니다. 수장절은 구약성경에서 유월절 - 맥추절 - 수장절로 이어지는 ‘삼대 절기’의 하나로서 한해 농사를 마무리 짓는 절기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장자를 죽이실 때 어린 양의 피가 문지방에 묻어 있는 집의 장자를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시기적으로는 씨앗을 뿌리는 시점에 거행하는 절기다. 이 절기는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 맥추절은 보리의 첫 열매를 거두는 시점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강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뿌리신 구원의 씨앗의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을 기념한다. 그러면 수장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절기인가? 수장절은 완전히 익은 모든 열매를 다 거두어 곳간에 들이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며 모든 믿는 자들을 천국으로 모아들이는 사건을 예기적으로 기념하는 절기가 된다. 현대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에 구약 수장절의 의미를 부여하여 준수한다면 추수감사절은 영구적인 의미를 가진 교회의 절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님이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를 묵상하고,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여보내듯이 신자들을 모아 천국에 들여보내시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또 쭉정이를 모아 불에 태우듯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지옥에 넣으시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복음전도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렇게 된다면 추수감사절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의미를 가진 절기로서 유지되며 지금 한국교회에게 큰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총신대 부총장·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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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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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감사생활의 길
- 그분이 내게 믿음을 주셨다는 이유만으로 오직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생각과 이론은 쉬우나 실체(진리)가 된다는 면에서는 많은 장애와 어려움이 있다. 감사생활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을 거치고 나서 숨을 고르며 감사의 평안을 맛보게 된다. 그래도 그 고마운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감사할 마음의 조건이 구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면, 우리 앞에 축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이러한 기사이적을 감사의 생활이 가져다가준다. 우리에게 그 분이 계시다면 그를 향한 믿음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되어 준다. 가령 나에게 그 분이 없다면 나의 삶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은 생명의 길로 나아가나,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는 죽음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바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귀신들린 딸의 질병으로 이미도 가장 큰 고통과 아픔과 수치심과 절망 속에서 수많은 갈등과 복잡한 감정의 탄식들은 인생의 큰 장애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으로 주님께 신앙고백을 한다.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고 자신의 수치스러운 문제를 숨김없이 다 털어 놓았으나 돌아온 것은 냉대와 무시였다. 이 중복된 장애가 믿음을 없이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더욱 감사함으로 절을 하며 주님께 나아간다. 참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오직 수치심의 상처에 머물지 않고 주님만을 공경하며 나아간다. 이 때 너그러운 은혜가 아닌 더욱 좌절감 속에 내동댕이 쳐진다. 돌아온 답변은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에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여인은 이러한 낮아짐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주여 옳소이다”라고 찬미함에 있다. 주님은 이러한 믿음을 크다고 하셨고, 즉시 질병에서 자유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은 모든 장애를 이기고 사망에서 나와 생명 길을 가게 한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옳소이다”에 있다. 어떤 고통과 좌절과 낮아짐 속에서도 이러한 환경이 내게 합당치 않다고 불평하지 않고 이것은 내가 당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좋은 환경을 찾지 않음은 이미 믿음이 가장 좋은 환경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나오는 감사를 깊은 감사라고 한다. 주께 날마다 감사함으로 기사와 이적을 이끌어 올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입으로만 하는 감사가 아니다. 자기 의존의 끈이 끊어진 낮아짐 속에 있는 믿음에서 나온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장애를 이긴 믿음의 힘으로만이 가능하다. 주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거칠 때 나오는 맘이 감사의 마음이다. 가장 낮아진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주의 종 앞에서 성도 앞에서 자신을 더욱 낮출 수 있을 때 비로서 감사생활이 가능해 진다. 생명 길로 인도하는 믿음에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장애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겼기 때문에 감사하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은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믿음을 가졌음에 감사하는 자는 가장 겸손한 자요, 가장 낮아짐을 맛본 자에게만 있는 감사생활이다. 모든 장애를 이기고 축복의 문으로 안내하는 감사는 이처럼 깊은 데서 나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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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감사생활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