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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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 오피니언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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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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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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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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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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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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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에서 영광으로 다시 비상하라
    ▲ 소강석목사   고난주간을 맞는다. 초대교회 신앙은 고난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당연한 기쁨으로 여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사도 바울, 로마의 카타콤베와 갑바도기아에 살았던 사람들, 폴리갑, 이그나티우스 같은 교부들도 스스로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며 주님 앞에서 고난받는 것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겼다. 칼빈도 고난과 결부된 경건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현대교회와 성도들은 고난 자체를 싫어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이 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이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관례적인 행사로 보내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고난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으려는 특징이 있다.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 지금 안티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교회를 향해 핍박보다 더 무서운 빈정거림과 조롱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첫째, 고난을 영광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고난을 다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신앙의 마인드로 볼 때 주님을 위한 고난과 수난은 최대의 영광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둘째,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요즘 경제불황으로 인하여 모두가 다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시대를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직장을 잃은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퇴직을 당하고 아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절망적 시대다. 또한 소상공인들은 목숨 걸고 장사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가 사회적 아픔을 공감하고 소통하며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나눠야 한다.  셋째,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선용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의미 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난을 잘 선용만 하면 더 큰 영광과 전화위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비록 교회는 교회대로 힘들고 성도들도 나름대로 힘들지만, 고난을 원망만 하지 말고 잘 선용하면 분명한 영광과 복이 있다.  넷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억하며 하나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골로새서 1장 24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서로 다투고 싸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서로 교권싸움을 하고 나눠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연합기관이 3개, 4개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고난과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가지 않으셨던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한다면 무조건 하나 되어야 한다. 분열된 연합기관도 반드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며 대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고난주간을 맞아 고난 앞에서 더 낮아지고 기도하며 우리도 남은 고난,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 그리하여 그 고난의 활주로에서 다시 영광으로 웅비하고 비상하자.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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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4-09
  • 인간의 죄악을 이기는 힘
    ▲ 김기석총장   부활절이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절기는 또한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마침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다. 겨우내 움츠렸던 자연은 점점 따스해지는 봄날 햇빛을 받아 새싹을 돋우고 가지를 활짝 펴 새로운 생명의 축제를 준비한다. 자연은 계절의 순환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여주는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해야 할 사명을 받은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위신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잊을만하면 언론에 터지는 목회자들의 도덕적 일탈과 일부 대형교회의 부자세습 문제, 게다가 신천지를 비롯한 신흥 사이비 교단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까지 더해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거꾸로 대중매체와 세속의 법정에 나와 판결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처해있는 것이다. 약 이천 년 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악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능력이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죄악성을 초월한다는 선언이다. 당시 인간의 죄악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권력을 통해 집약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들의 장악했던 종교적 권력, 정치적 권력, 그리고 군사적 권력은 인간의 불의한 죄와 탐욕의 집결체였다. 그 불의한 권력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고발하였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파괴했던 것이 곧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인간의 죄악을 이기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완결성(Integrity of Creation)을 위협하는 환경-생태계 파괴, 세계적이고 지역적 차원에서 점점 극심해져 가는 빈부격차, 인류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살상 무기를 생산하면서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반평화 세력, 그리고 돈과 물질적 풍요만으로 인간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세속 학문과 문화의 연합세력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세력들이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맞이하는 부활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부활을 통해 주님 안에서 그동안 지니지 못했던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길 원하셨기에 제자들에게 상처를 내어 보이셨다. 그리고 죽음의 상흔으로 가득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의 숨결을 이 세상에 불어 넣으시는 날이다.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폭력과 전쟁을 꿈꾸고 생명을 아끼지 않은 이들을 축복하는 날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무릇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생명의 숨을 마시고 위로받아 희망을 품고 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도모해야 할 교회연합의 방향과 내용은 매우 분명하다.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연대를 결성하여 거짓세력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백 주년의 해이다. 백 년 전 교회가 민족 지도자들과 손잡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분투했듯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세계 선교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오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손잡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펼쳐야 할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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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4-03
  •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세 개 있다.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이다. 앞의 두 개는 구체적으로 그 문구가 성경에 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십계명이고, 신약에서는 주기도문이다. 사도신경은 그 문구 자체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오랜 기간 형성된 신앙의 요체를 담은 글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의 내용은 이 세 가지를 해설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루터의 ≪대교리 문답≫의 기본구조는 이 세 가지에 관한설명이다. 사도신경에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중요한 문장이 있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사적인 집단이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적 기관이다. 공교회를 오랜 기독교 전통으로 말하면 구체적인 내용이 네 가지인데, “거룩하고, 사도적인, 하나의, 보편적 교회”다. 한국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전부 합쳐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지구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의 공교회다. 시간적으로 창세 이후로 존재했던, 하나님을 믿는 모든 교회가 하나의 공교회다. 거룩한 공교회를 종교개혁의 시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곳에 참된 교회가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교회가 교리와 역사 문화적 상황에 따라서 분파되었지만 오늘날의 교회들은 다시금 하나인 것을 확인하며 연대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 덕분인 점이 적지 않다. 시장말로 ‘각개약진’ 방식으로 저마다 자기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켜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다. 사도신경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하면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을 다시금 깊이 인식해야 한다. 거룩한 공교회가 교회 내적인 상황을 우선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 표현 안에 포함된 것이면서 교회 외적인 상황을 말하는 표현이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이다. 교회는 세상과 떨어져서 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에 이 점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모인 공동체이며, 하나님 품에서 새 사람으로 양육되는 공동체이며, 다시 세상으로 파송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철저하게 역사와 사회 속에 존재한다. 그곳이 교회가 존재하는 현주소이다.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의 네 가지에 헌신하는 것이 된다. 첫째가 인도적 인륜도덕, 둘째가 생태적 환경윤리, 셋째가 법치의 민주주의, 넷째가 상생의 시장경제이다. 교회가 사회 안에서 이 네 가지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잃고 말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이 네 가지를 축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교회 내적으로는 모든 개 교회들과 교단들의 거룩한 연대를 말하며, 교회 외적으로는 세상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변화되는 일에 동참하며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다시금 성경적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골든타임은 길지 않다. 10년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5년에서 8년이 한국 교회의 골든타임일 것이다. 다시금 온몸으로 고백하자.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지형은(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남북나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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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3-21
  • 봄이 오는 소리
    ▲ 문교수목사   하나님은 사계절을 절묘하게 구분하셨다. 봄이 먼저 시작되게 하시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오며 겨울이 온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뜨겁고 무더운 여름만 있는 곳도, 또 눈과 얼음과 빙하로 덮인 겨울만 있는 곳도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각 지역에 따라서 어찌 그리 오묘하게 계절을 만드셨는지 피조물인 우리는 그저 감탄한다.  특별히 아시아 대륙 한반도에는 뚜렷한 사계절이 있어서 춥고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면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온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봄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에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 첫째로 봄은 활기찬 소망의 소리다. 봄이 오는 소리에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이 팔다리에 힘을 얻고, 집에만 있던 사람들이 산과 강으로 나오며, 농부는 준비했던 일 년 농사를 시작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조화 속에 봄처럼 새 소망으로 차오르는 시간이 또 어디 있을까! 봄의 따스한 공기가 세상을 감싸기 시작하면 꽃 봉우리도 소망을 가지고 피어나며 땅도 푸릇푸릇한 색으로 갈아입는 소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둘째로 봄은 동토를 녹이는 시작의 소리다. 봄은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여서 새싹이 올라오게 한다. 차갑게 얼었던 씨앗이 겨울잠을 끝내고 기지개를 편다. 누구도 새싹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땅 속 생명들은 동토를 뚫고 올라와 봄의 햇살을 만난다. 우리의 삶에도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와야한다. 따스한 성령의 일하심으로 우리 마음을 얼고 굳어지게 했던 모든 죄악과 탐욕, 음란과 우상숭배, 시기와 원망, 거짓과 분열의 역사들이 떠나갈 것이다. 우리 개인과 가정, 교회, 사회 각계 각층의 얼어붙었던 모든 것들이 풀어지고 녹아져 새롭게 시작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셋째로 봄은 씨를 뿌리는 소리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말씀하고 있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두게 되어 있다.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렸던 선교사들을 통해 지금 전 세계의 선교를 감당하는 한국교회가 있지 않은가! 닥터 로제타 홀은 미국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마치고 조선 땅의 영혼들을 살리고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이곳에 여성의료선교사로 왔다. 그녀가 특별히 조선의 여성들과 맹인들을 위해 44년간 뿌린 씨앗의 열매들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지난 3월 6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부활의 기쁨을 우리는 믿는다.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절기이기에 우리에겐 영원한 봄의 소망이 있다. 겨울이 다소 길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부활의 봄이 올 것을 믿는다. 2019년 당신은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조국 대한민국에 150여 년 전부터 들려오던 그 봄이 오는 소리를 말이다. 사람이 만든 소리가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그 봄의 소리, 복음의 소리가 오늘도 들려오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는 성도, 교회, 나라와 민족이 되길 소망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봄이 오는 소리를 들려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3).  /묵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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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3-14
  • 대화와 소통 그리고 평화
    ▲ 전계헌목사   대한민국의 국민 뿐 아니라 온 지구촌이 집중하고 있었던 하노이 북미대화가 기대했던 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유산되고 말았다. 다시 만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지만 북미 두 지도자는 상대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쉽게 드러내지 않은 진실을 파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북한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적당한 선에서 북한 땅에서 가장 급선무인 경제제제를 풀어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속셈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미국은 북한의 구체적이고 완전한 핵 폐기 로드맵이 없이는 경제제제를 풀려는 일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축하연 같은 식사도 공동선언도 없이 양 정상은 기약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북한의 김정은은 베트남부터 북한까지 그 수천리 길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측 불가하다는 트럼프는 역시 사업가 기질로 협상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전문가들이 이미 분석하고 종합하여 예측한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하는 신실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대로 모든 일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대화는 필요하다. 국가 간의 대화나 어느 집단의 대화 그리고 개인이나 구성원들 간의 대화는 항상 필요하다.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한 구체적인 대화가 절실한 때다. 한기총과 한교연이 통합을 위해 대화를 하고 있다니 이는 일단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대화는 스킬이 필요하다. 청각 할 수 있고, 감각 가능한 대화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어야 대화는 가능하다. 즉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 진정성이 대화를 이룰 수 있고, 그 대화에서 결과물을 함께 얻어낼 수도 있다. 이번 북미 정상 간의 대화에서 크게 아쉬웠던 부분은 드러내지 않은 진정성이었다. 내 마음을 감추고 상대를 어리석게 보아 대충 얼버무리려는 방식은 어린아이들 세계에서도 통하지 않는 일이다. 더욱이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대화하여 연합체를 만들려고 한다면 더욱 힘들게 성육신적인 자세와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하에 대해 강조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다. 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한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진정성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또 거기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의 대화가 아니라 진솔하고 섬기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버마스(J. Habermas)는 “대화는 인격적인 소통이다”고 정의했다. 그런 노고 끝에 결과를 도출해 낸 것이 평화의 선물이어야 한다. 엄마가 아들을 품에 안는 기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0달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출산의 단말마적 고통을 겪어야 누리는 즐거움이다. 농부가 수확의 환희를 누리는 것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이마에 땀을 흘리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않던가. 평화도 물론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거듭하여 쟁취하는 것이다. 대화의 기술이 소통을 가져오고, 그 노력의 열매가 평화를 이루도록 이 땅의 지도자를 위시한 모든 국민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한다. /전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사)미래와 도약 이사장·익산동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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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3-10
  • 사순절을 맞으며
      이번 주 성회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보내는 신앙적 절기이다. 경건한 신앙인은 이 사순절 동안에는 특정 음식이나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한다. 금년에는 4월 21일이 부활절 주일이 된다. 사순절을 맞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적 가치를 생각해 본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이며, 두 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나 의미상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2단어가 아니라 사실상 1단어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십자가의 죽음이 전제되지 않는 부활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인 동시에 십자가의 종교이다. 지금 우리 교회와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로 대변되는 고난과 자기희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십자가 설교는 청중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부활을 잃어버린다. 지금 우리는 나도 모르게 외면해버린 십자가의 신앙을 다시 찾아야 할 때이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너를 위해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갈등이 풀리지 않는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희생을 하고 내가 십자가를 져야 문제가 풀린다. 그런데 모두 나는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하지 않고 너만 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나는 갈등의 현장을 보라. 교회 안에 벌어지는 수많은 분쟁의 현실을 보라. 거기에는 십자가 정신이 없다. 나의 유익만이 있다. 너는 죽어도 좋으나 나는 살아야겠다는 이기적 마인드만 넘쳐나고 있다. 십자가를 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먼저 용서가 있다. 십자가는 한 마디로 내가 죽어 너를 용서하는 신앙이다. 미운 사람, 못마땅한 사람,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진정 용서할 수 있다면 이미 그는 십자가의 신앙을 실천하는 성도이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화해요 하나 됨이다. 기독교 신학 중에 화해론이라는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바로 이 reconciliation 즉 화해를 이룩하셨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re (재)-conciliation(화해)을 이루신 곳이 바로 십자가 현장이다. 십자가가 선 골고다 언덕은 하늘과 땅이 화해하는 장소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는 사건이다. 교회는 바로 그 십자가의 화해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십자가가 전해주는 화해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이다. 십자가는 담을 쌓고 길을 막지 않는다. 막힌 곳은 열고 닫힌 곳은 뚫는다. 십자가 신앙은 갈라서고 나뉘어서 원수 되는 것이 아니라 모이고 하나 되어 화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결코 십자가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진다.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가가 아니다. 이미 그 속에 부활을 잉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신앙은 오늘의 십자가 속에서 부활의 새벽을 바라보는 신앙이다. 십자가의 참 의미는 죽음이 아니다. 부활이다. 십자가는 단지 부활의 또 다른 한쪽 면일 뿐이다. 부활절을 감격과 감동 속에 맞이하려면 이 사순절기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를 상실한다면 사순절기는 의미가 없다. 용서, 화해, 자기희생이라는 십자가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함으로 의미 있는 사순절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래서 다가오는 부활의 새벽을 큰 기쁨과 환희 속에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루터교 증경총회장·새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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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7
  •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준비
    ▲ 권문상목사   올해는 3·1절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이 한 세기나 흐른 시점에서 한국교회에서도 3·1운동 정신이 계속 회자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교회의 세속화는 100년 전 3·1운동 정신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오늘날 양심 있는 교회 성도들이라면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고 한국교회는 어떻게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 숙고해보자. 첫째, 3·1운동에서 우리는 지도자의 헌신과 희생을 배울 수 있다. 3·1운동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종교계 인사들 총 33명이 목숨 걸고 앞장서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을 강제 합병시킨 일본이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폭력과 수탈 행위에 기반을 둔 무단통치를 일삼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불합리한 일본의 강점을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은 자기희생적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 지도자들은 자신의 반 제국주의적 행동을 통해 자신이 구속당하여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 거사를 감행하였다. 이들의 자발적 희생은 전국에 걸쳐 만세 시위를 확산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는 결국 일제로 하여금 무단통치를 포기하게 하였으며 국민들에게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궁극적으로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하는 전환점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온 국민으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하나를 이루게 하는데 33인의 지도자들의 자기희생적 행동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곧 지도자의 희생적 결단이 대중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라 하겠다. 둘째, 이들 지도자들은 세계사적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자기 결정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희망적 메시지를 제시한 자들이었다. 3·1 운동은 단순히 강자에게 한풀이식 일회성 시위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종식되자 각국이 평화 협상을 하는 중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면서 식민 지배를 받던 세계 각 나라와 민족은 독립의 희망을 갖는 분위기였다. 이때 이들 33명의 지도자들은 우리나라도 고유의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여 독립할 수 있다는 세계사적 희망의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세계사적 흐름에 민감하며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결단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지 그 능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도자의 덕목으로 ‘자기희생’과 ‘자기결단’을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지도자 무능’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어떤 마음으로 준비해야 할지 두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3·1운동 지도자들의 자기희생 정신을 본받아, 세속화된 한국교회 곧 기업화된 교회,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명예와 자리에 대한 탐욕이 가득한 교계 등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교회에 대해 그 불의를 지적하고 스스로 희생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자기희생적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둘째, 3·1 운동 지도자들처럼 자기결단 능력을 제시할 희망의 메신저를 자임할 교계의 지도자를 기대한다. 교회가 신본주의 영적 재무장을 통해 자정 능력을 회복하여 교회 밖 세계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교회 자결주의’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본다. 현재 교회 밖으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듣는 한국교회이지만 천국시민 의식의 회복과 성결의 영으로 무장하면 교회 스스로의 힘으로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타파하고 한국교회가 우리나라 시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지도자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원해보자.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장·웨신대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19-02-24
  •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는 삶
    ▲ 황수원목사  미국의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적인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후 그 부대를 방문한 선배 장군으로부터 책망 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어느 날 부대를 방문한 장군은 카터에게 “자네는 사관학교를 몇 등으로 졸업했나?”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때 카터는 “800명 가운데서 59등을 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큰 칭찬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부동자세로 꽂꽂이 서 있었으나 그 장군의 대답은 의외였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면서 책망을 받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카터는 그때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함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면서 그 때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선을 다한다’는 그의 수칙은 훗날 주지사로 진출 하게 하였고 거기서도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으로서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카터는 대통령직을 다한 후에도 전 세계를 순방하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해비타트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열심히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로마서 12장 11절~13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게을러서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다소 과격한 듯한 말씀을 던지면서 부지런히 일할 것을 요청하였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루손섬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지 않고 열심히 일함으로 필리핀 민족의 불행과 슬픔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운전수 노릇하면서도 그 부지런함이 인정되어 버스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세계 2차 대전 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국방장관이 되었고 마침내 그는 겨우 46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당시 만연하고 있던 부정부패를 막고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공직자 재산등록을 실시하여 공무원들로 하여금 부정축재를 못하게 막았으며 백성들로부터는 인정받는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했을 때 필리핀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슬퍼할 정도로 위인의 삶을 살았다. 이광웅시인은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라. 무엇이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고 외쳤다. 사랑의 우리 하나님께서도 창조하신 우리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라고 명령하셨다.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대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2-13
  • 형제 사랑으로 명절을 보내자
     사람들은 신정이나 구정이 되면 단순히 새 달력을 사용하는 시기라는 의미 이상의 느낌을 가진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서 다른 무엇이 있을까? 또는 특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지내는 것이 좋을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거의 대부분 12월 31일 늦은 밤에 모여 새해 0시를 예배를 드리면서 보내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거나 1월 1일 오전에 모여 ‘신정예배’를 드린다. 성경에도 없고 서양교회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교회의 새로운 문화로 정착해가는 것 같다. 어떤 교회들은 신년을 맞아 한 주간 또는 몇 주간 ‘새해맞이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와 시간의 주인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새해를 맞아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와 헌신과 신앙고백을 드리는 기회를 가지는 일은 성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의미가 있는 교회문화라고 보겠다. 한편 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세상에서 말하는 ‘새해/신년’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본래 성도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My times are in your hands,” NIV). 또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전도서 1:9). 그러므로 설날이 되었다 해서 영적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칫 세속적인 세계관을 따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데살로니가전서 5:16, 18)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고린도후서 4:16) 삶과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말론적인 삶(베드로후서 3:8~14)을 살아가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세상풍조는 변하고 국내와 국제의 정세도 늘 변화하지만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만유와 만민의 주님이 되시므로(고린도전서 3:21~22)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민족과 세계복음화라는 지상목표를 추구하는 데(마태복음 6:33; 28:18~20)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설 연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도 마음이 들뜨거나 풀어져서 TV 앞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쉽다. 신앙서적들을 읽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기회로 삼는 이들은 영성형성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CCC나 기독실업인회 같은 단체에서는 ‘원단금식기도회’를 가진다. 어떤 작은 교회는 해마다 설 연휴 때 교인의 절반 정도가 네팔에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온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사랑으로 섬기는 기독청년들의 활동도 있다. 설에 할 수 있는 참 아름답고 선한 일들이다. 설날에 남녀노소가 설빔을 하고 부모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드리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나,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설 명절 문화는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미리 성묘도 하고 고향에 다녀온 후 설 연휴 기간에 가족이 함께 놀이동산에 가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설 기간에나 그 이전에나 고향의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문안인사 드리며 용돈을 드리는 일은 꼭 지켜나가야 할 미풍양속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예절을 등한히 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며 전도 길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특히 사이비이단 교주들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경계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할 행동이 필요가 있다(고린도전서 9:19~23). 믿지 않는 부모 형제가 설 명절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경우, 믿음을 핑계로 찾아가지 않는 예가 있는데 본이 되지 않는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절하는 행위는 해선 안 되겠으나, 음식 준비하는데 비용도 부담하고 돕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평소에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공경해드려야 할 것이며,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때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전 칼빈대 신대원장, 현 영목신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1-31
  •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승리하자
     2019년 새해 1월에 들어섰다. 많은 교회들이 송구영신예배 시에 ‘신년 말씀 카드’를 기도로 하나씩 뽑아서, 그 말씀을 하나님이 새해에 주신 말씀으로 받고 믿으며 기뻐한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에 덜 흡족하면 다시 줄을 서서 뽑기도 한다. 필자도 새해 여러 교회를 말씀 사역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가는 교회마다 이 말씀 카드를 뽑았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계속 받게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이사야 41:9)”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고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고난과 방랑의 역사 속에서 터득한 교훈으로 일찍부터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교육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환경이 또다시 올 수 있음을 예견하여 가정 학교(Family School)를 열고 부모가 선생님이 되어 말씀을 통해 험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말씀 중심의 삶 교육인 ‘쉐마(말씀을 들으라) 교육’으로 알고 있다. 쉐마교육은 유대인들의 교육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까지 자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지금까지 굳건하게 그들만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제국들이 결국 다 무너졌지만, 이스라엘의 유대 문화만큼은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했다. 간추린다면 첫 번째는 야훼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로 무장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정체성, 두 번째는 유대 지도자들(특히 성경 교사들이었던 랍비)의 모범적인 리더십을 들 수 있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어, 말씀에 기반한 삶을 살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케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구름 기둥으로 고단한 광야 생활을 인도하셨던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2019년 새해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길 원하시며, 말씀으로 새롭게 되길 원하신다. 말씀으로 새 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이 여러분 말씀 카드를 넘어서 매일의 삶을 다스리심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홍해를 갈라서 육지를 만들어 바다 가운데로 길을 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 한민족의 통일문제도 준비하신 길이 있다. 우리 교회들의 기도 제목들 하나하나에도 준비하신 길이 있다. 사면초가 진퇴유곡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준비하시며 행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자. 기적의 하나님,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을 믿으며 나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어려움은 축복으로 바뀔 것이다. 그분의 살아있고 활력 있는 말씀만 의지하며 따라가는 복된 한 해가 되길 축복한다. 그분은 말씀으로 길을 인도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시다. /묵동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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