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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한국교회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설 명절은 한국 사회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되묻는 시간이다. 가족과 고향을 찾는 이 명절의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으며, 무엇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인적·재정적 자원이 집중된 도시교회와 달리, 농어촌교회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 목회 지속의 어려움 속에서 생존 자체를 고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동안 도시교회는 농어촌교회를 돕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일회적 후원이나 명절 중심의 시혜적 지원에 머물렀고, 구조를 바꾸는 상생의 관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농어촌교회는 도시교회가 도와야 할 ‘선교 대상’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뿌리이자 공동 운명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전 12:26). 농어촌교회의 위기는 일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위기다. 더 나아가 오늘의 위기는 단지 교회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농어촌은 경제적 관점에서 낙후된 공간이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 미래 생존의 핵심 터전이다. 농촌이 무너지면 도시는 지속될 수 없고, 농어촌교회가 사라지면 한국교회의 생태적·영적 토대 역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설 명절을 맞아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가 상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몇 가지 실천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후원이 아닌 관계 맺기다.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가 일대일로 결연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공동 예배와 상호 방문, 청년·청소년 교류를 통해 삶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둘째, 경제적 상생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농어촌교회와 지역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교회 소비 구조 안으로 연결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관계가 아니라 공정한 거래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목회 협력의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농어촌목회를 실패나 후퇴로 보는 시선을 거두고,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순환 사역과 공동 연구, 공동 설교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설은 ‘돌아감’의 절기다. 이번 설 명절에 한국교회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화려한 성장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뿌리다.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의 상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생존의 길이다. 말로만 상생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도시교회 성도들이 고향을 찾듯 농어촌교회를 방문하고, 농어촌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그 땅에서 나는 먹거리와 신앙의 지혜를 함께 나눌 때 상생은 선언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 관계 속에서만 신뢰가 자라고, 신뢰 속에서만 지속 가능한 협력이 가능하다. 설 명절이 한국교회가 농도상생의 길로 방향을 전환하는 거룩한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예장통합측 총회농촌선교센터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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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가 하나되게 하소서
2026년 새해가 밝았지만, 마음이 어둡다. 보통 새해에는 위정자가 덕담하는 것이 관례이고 국민에 대한 예의인데,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교회를 조직적으로 조사한다’라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사를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잘 모르지만, 한국교회 성도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가 빌립보서 4장 6절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나는 이 구절 앞에 있는 4절부터 중학교 시절에 좌우명으로 삼아왔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평생 장신대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다가 은퇴 후에 더 바빠진 일상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머릿속에 이 구절이 쟁쟁하다. 그래서 이 구절을 외우고 언제든지 묵상한다. 새해니까 근심 걱정 털어버리고 기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6절의 “다만”이란 표현이 내가 외울 때는 구역판에서 “오직”이란 구절이었는데, 혹시나 해서 개역개정판과 대조를 해보니 달라졌다. “오직”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다른 것은 관계없이 전적으로”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이”라는 뜻이다. “다만”은 “다른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단지”라는 뜻이다. 국어사전 상에서 서로 비슷한 뜻이지만, “다만”이 모든 일의 조건이나 상황에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으니, 2026년 새해의 암울한 상황에서 더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다. 6절의 “아뢰라”라는 단어는 명령형으로 “안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그노리조이다. 그 의미에 맞게 다시 의미를 새긴다면 새해에 각자가 간직한 기도와 간구와 간청을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하여라”라는 뜻이다.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나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아시도록 하여라”라는 의미이니,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잘 아뢰도록 해야겠다. 그러려면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는 74 엑스플로(EXPLO)가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여의도 광장에 1백만 명이 모여서 하나가 되어 기도하였다. 당시 나는 선린상고에서 1주일 동안 영락교회의 서대문 구역원으로 숙식 하면서 지냈고, 매일 한강을 건너가서 참여한 저녁 집회를 마칠 무렵 교회에서 훈련받은 대로 빌리 그래함 목사의 결신자 초청 시간에 우후죽순처럼 일어선 새신자에게 다가가서 결신자 카드를 작성하는 임무를 감당했다. 희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이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과 국가기록 문화유산으로 동시에 추진하는 상황이다. 그때 한국교회는 기도로 하나가 되었고, 모이기에 힘을 써서 세계교회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누구 하나 교단이나 기독교를 대표할 사람이 부재한 상황이다. 이런 답답한 현실을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알려드려야” 할 사명이 성도에게 있는데, 그 열심이던 새벽기도의 열풍도 명성교회 이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도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기도하기 전에는 인간만이 고단하게 일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역사하시기 시작한다. 다시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에 하나가 되자. /예수말씀연구소장·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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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4:4)
연초부터 국외적으로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면서 전 세계가 시끄럽다. 국내적으로는 해가 바뀌었지만, 감정 정치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여전하다. 이렇듯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항상 갈등이 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갈등이 있었다. 바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과연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심한 갈등과 다툼이 있었다(갈 2:11-21). 하지만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긴 논의 끝에 서로 친교의 악수를 통해 자칫 분열될 수 있는 초대교회의 갈등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결하였다(행 15장). 이러한 초대교회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폴 왓슨(Paul Wattson, 1863-1940) 신부는 1908년 ‘사도 베드로의 고백 축일(Confession of St. Peter)’인 1월 18일부터 ‘사도 바울의 회심 축일(Conversion of St. Paul)’인 1월 25일까지 8일 동안 북반구의 그리스도인이 갈라진 교회의 일치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을 제안했다. 이후 1966년에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의 리옹에서 공식적으로 일치기도 주간 자료집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68년 공동으로 준비한 일치기도 주간 자료를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치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아 1968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함께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을 준수하기 시작했다. 한편 1961년 뉴델리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채택된 ‘교회일치에 대한 문서’는 교회를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뜻이자,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분을 주님과 구원자로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성령을 통하여 완전히 책임적인 공동체적 삶으로 인도될 때 교회의 일치가 가시화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일치가 로마가톨릭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교회의 일치는 획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한다. 각 교파의 독특한 전통과 유구한 역사를 각각 존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한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추구한다. 2026년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영성을 주제로 삼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라는 에베소서 4:4의 성경적 소명을 성찰한다. 에베소서는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가 인간을 분열시키는 장벽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면에서 평화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 중 하나이다. 세상 속의 교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시대의 갈등에 대해 말해야 하며, 갈등 해소에 동참해야 한다. 전쟁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며 감정적으로 분열되는 이 세상을 향해 교회는 화합과 평화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준 교훈대로 우선 서로 갈라진 교회들의 깊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 일치의 과정 가운데 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있는 세상을 향해 화합과 평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또한 기후 위기라는 우리 모두의 재난 앞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갈등과 다툼에 있는 곳에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자./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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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외교회 전망] 창조질서 회복위한 연대활동 활발
9월 첫째 주 ‘창조질서’ 지키는 움직임도 확산 위기시대 속에서 ‘신앙위축’아닌 ‘신앙회복’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기후 재난은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을 먼저 위협하고 있으며, 한반도 역시 분단의 구조 속에서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며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켜두신 작은 등불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지난 한 해 세계교회의 현장에서 그 등불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일구는 그들을 보며, 2026년을 살아갈 힘이 ‘함께 걷는 연대’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녔지만, 공통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창조의 신음, 응답하는 교회 세계교회협의회는 지난해 ‘기후정의행동 에큐메니컬 10년(2025~2034)’을 선포했다. 이는 하나의 국제 캠페인이나 선택적 사역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신음에 응답하려는 신앙적 선언이다. 기후 비상사태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가뭄, 태평양의 침수, 아시아의 폭우와 불볕더위는 거대한 뉴스가 아니라, 개인의 삶을 뒤흔드는 비극으로 매일 반복되고 있다. 기후 비상사태는 정의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라면 창조세계가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침묵할 수 없다. 2026년의 한국교회는 기후정의 행동 여정에 동참했으면 한다. 교회가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연대하는 행위는 더 이상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신실한 예배이다. 특히 에큐메니컬운동중 하나로, 9월 첫째 주부터 지키는 ‘창조절’을 각 교단의 공식 교회력에 포함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창조절을 지키는 날이 속히 오기를 희망한다. 갈라진 틈에 서는 예언자 전쟁과 분쟁의 현실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심각한 위기다. 미얀마와 수단의 폭력은 이미 수백만 명의 삶을 빼앗았고, 그 여파는 이주와 난민 문제를 통해 우리의 일상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한국 사회 역시 극심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진영 논리에 갇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혐오의 언어가 난무했고, 그 여파는 교회 안까지 스며들어 성도들마저 갈라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두웠던 시간, 나는 세계교회가 한국을 위해 보내온 뜨거운 연대를 기억한다. 세계교회는 우리의 정치적 혼란과 관련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며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와 연대는 내게 다시 묻게 했다. “교회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성서는 예언자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갈라진 틈에 서서 하나님의 화해를 증언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세계교회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도 갈등의 한복판에서 서로의 손을 잡게 하는 ‘화해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 분열이 깊을수록 예언자의 자리는 가장 낮은 곳,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 있다. 2026년, 우리가 서야 할 곳은 바로 그 갈라진 틈을 메우는 자리이다. 고통을 나의 자리로: 듣는 영성 현대의 교회는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듣는 능력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는 데 익숙하지만, 고통의 진실을 듣는 일에는 낯설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고통을 나의 자리로 들여오는 일이며,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영적 사건이다. 지난해 나는 이집트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과 직제 제6차 세계대회’에 참여했다. 다양한 교파와 인종이 모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하던 그 현장은 갈라진 세상을 치유할 힘이 복음의 일치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오순절운동, 청년, 여성 등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진정한 일치가 서로의 존재를 깊이 듣는 것에서 이루어짐을 확인했다. 겸손히 듣는 것으로부터 평화로 가는 길이 열린다. 2026년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듣는 용기이다. 말이 아닌 발걸음으로 2026년의 세계가 평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 경제적 불안, 기후재난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 위기의 시대가 신앙을 위축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신앙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2026년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망은 감정적 낙관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희망이길 바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13년 부산총회 이후,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순례’라는 단어로 정의해 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순례자 공동체이다. 이 순례의 길 위에서 희망은 말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통해서 형성된다. 새해에는 서로의 다름을 넘어서고, 시대의 고통을 깊이 듣고, 창조 세계를 돌보는 책임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 2026년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발을 맞추어 ‘정의와 화해, 일치의 순례’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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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내교회 전망] 한국교회의 본질회복 사역에 중점
남·북 상황속에서 예수의 용서·화해정신 실천 교회·지자체 함께 결혼만남 프로젝트 추진도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대통령 윤석열이 갑자기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파면결정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대립했고, 광장에서도 탄핵 찬반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그리고 민주당 이재명후보가 6.3대선을 통해 제2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특검을 설치해 내란 청산작업이 진행됐다. 내란 청산작업을 통해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부패한 권력과 유착돼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교회가 사악한 정치권력과 결탁한 모습은 기독교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누구 하나 자성하고 공적인 회개 고백이 없이 2025년을 보내 버렸다. 물론, 선교 140주년 기념행사와 영남지역 산불피해 구호 및 복구작업 등 긍정적인 활동도 했지만 윤석열 내란사태에 다 묻혀 버렸다. 이제 새로운 2026년 새해 붉은 해가 솟았다. 장엄한 일출을 보면서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는 기대감으로 새롭게 펼쳐질 그림을 미리 그려본다. 공명선거운동과 남북의 화해에 앞장 2026년은 지방분권과 시민자치, 시민주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해이다. 오는 6월 3일, 제9회 지방선거가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된다. 광역단체장부터 교육감, 광역의원, 지방의원을 뽑는다. 기독교계는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한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을 중심으로 투표참여 및 공명선거 캠페인을 전개한다. 교회들은 목회자의 설교 등 강단에서 공직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2026년, 한국교회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운동에 힘을 모아야 한다. 지난해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교류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정권은 꼼짝도 안 하고 있다. 2023년 적대적 두 국가론을 천명한 이후 하나의 조국으로 보지 않고 있다. 두 국가론이 장래 남북통일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위원장 간 관계로 미루어 볼 때,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북한의 수교도 예상된다. 그렇게 될 경우 한반도 평화의 기운은 다시 솟아오를 수 있다. 또한 남북 관계 개선에 획기적인 문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 특히 당국자 간 교류이전에 민간교류가 먼저 재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종교계, 특히 한국교회와 북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중심으로 한 교류협력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있어서 정부보다 한걸음 먼저 대안을 제시하고 움직였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한마음으로 기도운동의 중요성 한국교회는 우리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익의 이념대립이 심화된 한국사회에서 편가르기의 가해자로 낙인찍힌 한국교회는 역으로 편가르기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들을 굳이 극우니 극좌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어느 한편을 혐오하고 반대로 어느 한편을 숭상했다고 해서 얻은 것은 없다.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2026년, 한국교회가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설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먼저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크다고 했다. 영국의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었던 메리여왕은 존 낙스의 기도를 1만 명의 군대보다 두려워했다. 2026년, 한국교회 안에 애국, 애족, 구국기도운동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영혼구원과 저출생문제에 전념 이와 함께 2026년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한국교회가 총력을 다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1971년 1월 1일 0시 대학생선교의 선구자 김준곤목사(한국CCC 설립자)는 CBS기독교방송을 통해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엑스플로‘74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에서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이처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집중하면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을 현실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대의 국가적 과제는 저출생문제를 극복하는 일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저출생 극복에 앞장 서왔다. 교회를 출생과 돌봄의 산실로 만들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성경적 출산과 돌봄을 강조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저출생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를 넘어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줄 때이다. 지역교회와 지자체가 손을 맞잡고 신뢰도 높은 결혼만남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2026년 새해 한국교회는 강점으로 승부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그를 통해 대사회적 신뢰도가 회복되고 한국교회도 회복될 것이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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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하는 자세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이사야 66:2 하반절입니다.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먼저, 이 자세는 영적 분별력을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피상적인 제자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의 문제는 영적 분별력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일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7:16-17).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자세가 없으면 성령을 대적합니다. 결국 영적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이사야 66:2 상반절까지 성경 역사를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이것을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사야 66:2 하반절이 말하는 자세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고, 항상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자세가 없으면 올바른 예배도 드릴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정을 따라 가장 살지고 좋은 제물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이사야 1:11-14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정말 싫어하셨습니다(이사야 66:3). 왜냐하면 바로 이사야 66:2의 자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세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으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드리는 종교적인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조차 사라집니다.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게 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 오늘날 성도들의 상태가 결코 이사야 시대보다 낫지 않을 만큼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고자 하여 하나님의 뜻과 길을 알기 위해 고민하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목적과 목표가 성취되고 세상에서 잘 살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목회자들에게 그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은 그들을 붙잡기 위해, 그들의 삶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좋은 약속들만 임의로 골라서 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축복과 평강의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에는 최소한 두 가지 자세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 알기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자세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 뿐 아니라 그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고,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셨습니다(요한복음 4:34, 5:30). 그 결과 예수님에게 영적 분별력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이 주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자세가 매우 필요합니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단순히 목회의 성공, 교회의 성장, 목표의 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도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성도들의 경우에도 자기 문제의 해결, 자기 기도의 응답, 자기 사업의 확장, 자기 자녀의 성공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깊이 고민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 갈망하는 분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등 신앙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진정으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에게 이 자세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교회 목사·기독교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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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한국교회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 설 명절은 한국 사회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되묻는 시간이다. 가족과 고향을 찾는 이 명절의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으며, 무엇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인적·재정적 자원이 집중된 도시교회와 달리, 농어촌교회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 목회 지속의 어려움 속에서 생존 자체를 고민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동안 도시교회는 농어촌교회를 돕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일회적 후원이나 명절 중심의 시혜적 지원에 머물렀고, 구조를 바꾸는 상생의 관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농어촌교회는 도시교회가 도와야 할 ‘선교 대상’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뿌리이자 공동 운명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전 12:26). 농어촌교회의 위기는 일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위기다. 더 나아가 오늘의 위기는 단지 교회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농어촌은 경제적 관점에서 낙후된 공간이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 미래 생존의 핵심 터전이다. 농촌이 무너지면 도시는 지속될 수 없고, 농어촌교회가 사라지면 한국교회의 생태적·영적 토대 역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설 명절을 맞아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가 상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몇 가지 실천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후원이 아닌 관계 맺기다.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가 일대일로 결연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공동 예배와 상호 방문, 청년·청소년 교류를 통해 삶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둘째, 경제적 상생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농어촌교회와 지역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을 교회 소비 구조 안으로 연결함으로써, 도움을 주는 관계가 아니라 공정한 거래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목회 협력의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농어촌목회를 실패나 후퇴로 보는 시선을 거두고,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순환 사역과 공동 연구, 공동 설교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설은 ‘돌아감’의 절기다. 이번 설 명절에 한국교회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화려한 성장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뿌리다.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의 상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생존의 길이다. 말로만 상생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도시교회 성도들이 고향을 찾듯 농어촌교회를 방문하고, 농어촌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그 땅에서 나는 먹거리와 신앙의 지혜를 함께 나눌 때 상생은 선언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 관계 속에서만 신뢰가 자라고, 신뢰 속에서만 지속 가능한 협력이 가능하다. 설 명절이 한국교회가 농도상생의 길로 방향을 전환하는 거룩한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예장통합측 총회농촌선교센터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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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한국교회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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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가 하나되게 하소서
- 2026년 새해가 밝았지만, 마음이 어둡다. 보통 새해에는 위정자가 덕담하는 것이 관례이고 국민에 대한 예의인데,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교회를 조직적으로 조사한다’라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사를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잘 모르지만, 한국교회 성도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가 빌립보서 4장 6절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나는 이 구절 앞에 있는 4절부터 중학교 시절에 좌우명으로 삼아왔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평생 장신대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다가 은퇴 후에 더 바빠진 일상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머릿속에 이 구절이 쟁쟁하다. 그래서 이 구절을 외우고 언제든지 묵상한다. 새해니까 근심 걱정 털어버리고 기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6절의 “다만”이란 표현이 내가 외울 때는 구역판에서 “오직”이란 구절이었는데, 혹시나 해서 개역개정판과 대조를 해보니 달라졌다. “오직”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다른 것은 관계없이 전적으로”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이”라는 뜻이다. “다만”은 “다른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단지”라는 뜻이다. 국어사전 상에서 서로 비슷한 뜻이지만, “다만”이 모든 일의 조건이나 상황에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으니, 2026년 새해의 암울한 상황에서 더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다. 6절의 “아뢰라”라는 단어는 명령형으로 “안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그노리조이다. 그 의미에 맞게 다시 의미를 새긴다면 새해에 각자가 간직한 기도와 간구와 간청을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하여라”라는 뜻이다.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나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아시도록 하여라”라는 의미이니,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잘 아뢰도록 해야겠다. 그러려면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는 74 엑스플로(EXPLO)가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여의도 광장에 1백만 명이 모여서 하나가 되어 기도하였다. 당시 나는 선린상고에서 1주일 동안 영락교회의 서대문 구역원으로 숙식 하면서 지냈고, 매일 한강을 건너가서 참여한 저녁 집회를 마칠 무렵 교회에서 훈련받은 대로 빌리 그래함 목사의 결신자 초청 시간에 우후죽순처럼 일어선 새신자에게 다가가서 결신자 카드를 작성하는 임무를 감당했다. 희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이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과 국가기록 문화유산으로 동시에 추진하는 상황이다. 그때 한국교회는 기도로 하나가 되었고, 모이기에 힘을 써서 세계교회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누구 하나 교단이나 기독교를 대표할 사람이 부재한 상황이다. 이런 답답한 현실을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알려드려야” 할 사명이 성도에게 있는데, 그 열심이던 새벽기도의 열풍도 명성교회 이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도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기도하기 전에는 인간만이 고단하게 일하지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역사하시기 시작한다. 다시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에 하나가 되자. /예수말씀연구소장·한국교회정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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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가 하나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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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4:4)
- 연초부터 국외적으로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면서 전 세계가 시끄럽다. 국내적으로는 해가 바뀌었지만, 감정 정치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여전하다. 이렇듯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항상 갈등이 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갈등이 있었다. 바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과연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심한 갈등과 다툼이 있었다(갈 2:11-21). 하지만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긴 논의 끝에 서로 친교의 악수를 통해 자칫 분열될 수 있는 초대교회의 갈등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결하였다(행 15장). 이러한 초대교회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폴 왓슨(Paul Wattson, 1863-1940) 신부는 1908년 ‘사도 베드로의 고백 축일(Confession of St. Peter)’인 1월 18일부터 ‘사도 바울의 회심 축일(Conversion of St. Paul)’인 1월 25일까지 8일 동안 북반구의 그리스도인이 갈라진 교회의 일치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을 제안했다. 이후 1966년에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직제위원회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의 리옹에서 공식적으로 일치기도 주간 자료집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68년 공동으로 준비한 일치기도 주간 자료를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치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아 1968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함께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을 준수하기 시작했다. 한편 1961년 뉴델리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채택된 ‘교회일치에 대한 문서’는 교회를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뜻이자,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분을 주님과 구원자로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성령을 통하여 완전히 책임적인 공동체적 삶으로 인도될 때 교회의 일치가 가시화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일치가 로마가톨릭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교회의 일치는 획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한다. 각 교파의 독특한 전통과 유구한 역사를 각각 존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한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추구한다. 2026년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영성을 주제로 삼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라는 에베소서 4:4의 성경적 소명을 성찰한다. 에베소서는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화가 인간을 분열시키는 장벽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면에서 평화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 중 하나이다. 세상 속의 교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시대의 갈등에 대해 말해야 하며, 갈등 해소에 동참해야 한다. 전쟁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며 감정적으로 분열되는 이 세상을 향해 교회는 화합과 평화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준 교훈대로 우선 서로 갈라진 교회들의 깊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 일치의 과정 가운데 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있는 세상을 향해 화합과 평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또한 기후 위기라는 우리 모두의 재난 앞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갈등과 다툼에 있는 곳에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자./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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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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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외교회 전망] 창조질서 회복위한 연대활동 활발
- 9월 첫째 주 ‘창조질서’ 지키는 움직임도 확산 위기시대 속에서 ‘신앙위축’아닌 ‘신앙회복’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어둡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기후 재난은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을 먼저 위협하고 있으며, 한반도 역시 분단의 구조 속에서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며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켜두신 작은 등불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지난 한 해 세계교회의 현장에서 그 등불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일구는 그들을 보며, 2026년을 살아갈 힘이 ‘함께 걷는 연대’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녔지만, 공통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창조의 신음, 응답하는 교회 세계교회협의회는 지난해 ‘기후정의행동 에큐메니컬 10년(2025~2034)’을 선포했다. 이는 하나의 국제 캠페인이나 선택적 사역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신음에 응답하려는 신앙적 선언이다. 기후 비상사태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가뭄, 태평양의 침수, 아시아의 폭우와 불볕더위는 거대한 뉴스가 아니라, 개인의 삶을 뒤흔드는 비극으로 매일 반복되고 있다. 기후 비상사태는 정의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라면 창조세계가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침묵할 수 없다. 2026년의 한국교회는 기후정의 행동 여정에 동참했으면 한다. 교회가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연대하는 행위는 더 이상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신실한 예배이다. 특히 에큐메니컬운동중 하나로, 9월 첫째 주부터 지키는 ‘창조절’을 각 교단의 공식 교회력에 포함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창조절을 지키는 날이 속히 오기를 희망한다. 갈라진 틈에 서는 예언자 전쟁과 분쟁의 현실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심각한 위기다. 미얀마와 수단의 폭력은 이미 수백만 명의 삶을 빼앗았고, 그 여파는 이주와 난민 문제를 통해 우리의 일상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한국 사회 역시 극심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진영 논리에 갇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혐오의 언어가 난무했고, 그 여파는 교회 안까지 스며들어 성도들마저 갈라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두웠던 시간, 나는 세계교회가 한국을 위해 보내온 뜨거운 연대를 기억한다. 세계교회는 우리의 정치적 혼란과 관련한 소식을 듣고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며 기도했다. 그들의 기도와 연대는 내게 다시 묻게 했다. “교회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성서는 예언자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갈라진 틈에 서서 하나님의 화해를 증언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세계교회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도 갈등의 한복판에서 서로의 손을 잡게 하는 ‘화해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 분열이 깊을수록 예언자의 자리는 가장 낮은 곳,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 있다. 2026년, 우리가 서야 할 곳은 바로 그 갈라진 틈을 메우는 자리이다. 고통을 나의 자리로: 듣는 영성 현대의 교회는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듣는 능력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는 데 익숙하지만, 고통의 진실을 듣는 일에는 낯설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고통을 나의 자리로 들여오는 일이며,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영적 사건이다. 지난해 나는 이집트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과 직제 제6차 세계대회’에 참여했다. 다양한 교파와 인종이 모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하던 그 현장은 갈라진 세상을 치유할 힘이 복음의 일치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오순절운동, 청년, 여성 등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진정한 일치가 서로의 존재를 깊이 듣는 것에서 이루어짐을 확인했다. 겸손히 듣는 것으로부터 평화로 가는 길이 열린다. 2026년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듣는 용기이다. 말이 아닌 발걸음으로 2026년의 세계가 평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 경제적 불안, 기후재난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 위기의 시대가 신앙을 위축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신앙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2026년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망은 감정적 낙관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희망이길 바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13년 부산총회 이후,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순례’라는 단어로 정의해 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순례자 공동체이다. 이 순례의 길 위에서 희망은 말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통해서 형성된다. 새해에는 서로의 다름을 넘어서고, 시대의 고통을 깊이 듣고, 창조 세계를 돌보는 책임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 2026년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발을 맞추어 ‘정의와 화해, 일치의 순례’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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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외교회 전망] 창조질서 회복위한 연대활동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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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내교회 전망] 한국교회의 본질회복 사역에 중점
- 남·북 상황속에서 예수의 용서·화해정신 실천 교회·지자체 함께 결혼만남 프로젝트 추진도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대통령 윤석열이 갑자기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파면결정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대립했고, 광장에서도 탄핵 찬반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그리고 민주당 이재명후보가 6.3대선을 통해 제2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특검을 설치해 내란 청산작업이 진행됐다. 내란 청산작업을 통해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부패한 권력과 유착돼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교회가 사악한 정치권력과 결탁한 모습은 기독교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누구 하나 자성하고 공적인 회개 고백이 없이 2025년을 보내 버렸다. 물론, 선교 140주년 기념행사와 영남지역 산불피해 구호 및 복구작업 등 긍정적인 활동도 했지만 윤석열 내란사태에 다 묻혀 버렸다. 이제 새로운 2026년 새해 붉은 해가 솟았다. 장엄한 일출을 보면서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는 기대감으로 새롭게 펼쳐질 그림을 미리 그려본다. 공명선거운동과 남북의 화해에 앞장 2026년은 지방분권과 시민자치, 시민주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해이다. 오는 6월 3일, 제9회 지방선거가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된다. 광역단체장부터 교육감, 광역의원, 지방의원을 뽑는다. 기독교계는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한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을 중심으로 투표참여 및 공명선거 캠페인을 전개한다. 교회들은 목회자의 설교 등 강단에서 공직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2026년, 한국교회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운동에 힘을 모아야 한다. 지난해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교류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정권은 꼼짝도 안 하고 있다. 2023년 적대적 두 국가론을 천명한 이후 하나의 조국으로 보지 않고 있다. 두 국가론이 장래 남북통일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위원장 간 관계로 미루어 볼 때,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북한의 수교도 예상된다. 그렇게 될 경우 한반도 평화의 기운은 다시 솟아오를 수 있다. 또한 남북 관계 개선에 획기적인 문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 특히 당국자 간 교류이전에 민간교류가 먼저 재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종교계, 특히 한국교회와 북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중심으로 한 교류협력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있어서 정부보다 한걸음 먼저 대안을 제시하고 움직였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한마음으로 기도운동의 중요성 한국교회는 우리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익의 이념대립이 심화된 한국사회에서 편가르기의 가해자로 낙인찍힌 한국교회는 역으로 편가르기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들을 굳이 극우니 극좌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어느 한편을 혐오하고 반대로 어느 한편을 숭상했다고 해서 얻은 것은 없다.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2026년, 한국교회가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설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먼저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크다고 했다. 영국의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었던 메리여왕은 존 낙스의 기도를 1만 명의 군대보다 두려워했다. 2026년, 한국교회 안에 애국, 애족, 구국기도운동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영혼구원과 저출생문제에 전념 이와 함께 2026년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한국교회가 총력을 다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1971년 1월 1일 0시 대학생선교의 선구자 김준곤목사(한국CCC 설립자)는 CBS기독교방송을 통해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엑스플로‘74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에서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이처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집중하면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을 현실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대의 국가적 과제는 저출생문제를 극복하는 일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저출생 극복에 앞장 서왔다. 교회를 출생과 돌봄의 산실로 만들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성경적 출산과 돌봄을 강조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저출생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를 넘어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줄 때이다. 지역교회와 지자체가 손을 맞잡고 신뢰도 높은 결혼만남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2026년 새해 한국교회는 강점으로 승부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그를 통해 대사회적 신뢰도가 회복되고 한국교회도 회복될 것이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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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국내교회 전망] 한국교회의 본질회복 사역에 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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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하는 자세
-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이사야 66:2 하반절입니다.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먼저, 이 자세는 영적 분별력을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피상적인 제자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의 문제는 영적 분별력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일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7:16-17).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자세가 없으면 성령을 대적합니다. 결국 영적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이사야 66:2 상반절까지 성경 역사를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이것을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사야 66:2 하반절이 말하는 자세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고, 항상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자세가 없으면 올바른 예배도 드릴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정을 따라 가장 살지고 좋은 제물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이사야 1:11-14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정말 싫어하셨습니다(이사야 66:3). 왜냐하면 바로 이사야 66:2의 자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세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으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드리는 종교적인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조차 사라집니다.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게 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 오늘날 성도들의 상태가 결코 이사야 시대보다 낫지 않을 만큼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고자 하여 하나님의 뜻과 길을 알기 위해 고민하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목적과 목표가 성취되고 세상에서 잘 살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목회자들에게 그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은 그들을 붙잡기 위해, 그들의 삶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과 상관없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좋은 약속들만 임의로 골라서 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축복과 평강의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에는 최소한 두 가지 자세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 알기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자세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 뿐 아니라 그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고,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셨습니다(요한복음 4:34, 5:30). 그 결과 예수님에게 영적 분별력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이 주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자세가 매우 필요합니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단순히 목회의 성공, 교회의 성장, 목표의 달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도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성도들의 경우에도 자기 문제의 해결, 자기 기도의 응답, 자기 사업의 확장, 자기 자녀의 성공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깊이 고민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 갈망하는 분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등 신앙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진정으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에게 이 자세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교회 목사·기독교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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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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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희망을 전하는 교회의 소망
- ▲ 이상대목사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선택한다면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로 대표되는 이교 사상과 대립하는 한편, 펠라기우스주의와 도나투스주의 등 이단 사설을 논박하며 기독교 신앙을 굳건히 지켜낸 인물이다. 무너져가는 고대 로마의 끝자락에서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섰던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을”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신학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교회는 죄와 악이 없는 깨끗한 ‘성소’가 아니라 그것에 고통을 받는 이들이 모여 치료를 받는 ‘병원’이었다. 당대 어떤 이보다도 열정적으로 이단을 적대시했지만, 이단에 몸담았던 이가 올바른 교회로 돌아온다면 이전까지 지녔던 신앙과 성례는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무한한 일치와 관용을 우선시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과연 아름다운 모습일까. 수없이 난립하는 교회연합기관들은 수년 동안 통합을 약속했지만, 그 끝은 공허하기만 했다. 각 교단 총회가 끝나고 현재는 각 교단마다 노회가 열리고 있지만 사회에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화합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정치 이슈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퀴어 단체와 반동성애 단체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는 NAP를, 교육부는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친 동성애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1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남북·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 질서에 어마어마한 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제주도 난민 문제와 미투운동은 또 어떠한가. 어느 때보다도 한국교회에서 신속히 논의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이 시기에 교회에 일치와 관용을 필두로 하는 연합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자리만을 지켜내고자 하는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이제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아 이 땅에 굳건히 서서 새로움을 전해주어야 한다. 이 암울하고 슬픈 세계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반석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반석으로 삼음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했던 반석이 무엇인지 숙고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고자 하는 반석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개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가 자칫 무색해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개혁하는 교회, 변화하는 교회가 되어 한국은 물론 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로 한 다짐을 힘씀으로 이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이룩하고자 하루빨리 연합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소모적인 분쟁과 논란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끝내고, 한국교회가 진리의 깃발 아래 모여 다 함께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 되어 세상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이다. 현실이 지금 이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와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미래목회포럼 전 대표회장·서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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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희망을 전하는 교회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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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을 전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한다
- ▲ 박진탁이사장 미국 LA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중 겪었던 일이다. 미국에 살고 있던 옛 친구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3일 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담당의사는 뇌사가 되었다며 사망으로 인정하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라고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의사가 가족들에게 “장기기증 의사를 생전에 표시하지 않으셨지만, 가족들이 원하시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아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중학교 2학년인 친구의 딸이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인정하는 일이 어렵지만, 이제 하늘나라에 가신다고 생각하면 장기기증이 뭐가 어려워요. 아빠의 건강한 심장이 다른 이에게 옮겨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잖아요”라며 엄마를 설득하고 나섰다. 결국 그 다음날, 친구의 가족들은 장기기증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친구는 7개의 장기를 기증하며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장기기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미국에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장기기증’, 생명을 살리는 이 일을 고국으로 돌아가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미국에 가족들을 둔 채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와 기도하던 도중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는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을 받았다. 그때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당장 순종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991년 1월 24일 신장 하나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기증했다. 그리고 그 감동으로 시작된 장기기증운동은 27년을 맞았다. 우리나라 장기기증운동은 하나님의 강한 인도하심에 의해 시작되었고,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의 장기기증운동은 갈 길이 멀다. 미국 48%, 영국 32%, 대한민국 3%,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각 나라별 인구 대비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의 비율이다. 한국교회가 앞장 서 장기기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운동이 사회운동이 되었듯이 생명을 살리는 귀한 사역이 온 국민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기까지도 한국교회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 ‘생명을 나누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동기로 장기기증 희망 등록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고통 받고 있는 장기부전 환자들을 위해 생명나눔운동에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공격은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와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더 널리 퍼뜨리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말과 혀로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제는 받은 사랑을 나눌 때이다. 특히 병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많은 환자들을 위해 사랑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삶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사랑의 장기기증서약을 통해 고통 받는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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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을 전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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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와 생명동산
- ▲ 김기석총장 우리는 가장 더운 여름을 경험하였다. 미래에는 이보다 더 더워진다 하니 정말 걱정이다. 기후변화의 문제가 이젠 과학자들의 논쟁거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존의 문제이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에서 앨 고어는 인공위성에서 찍은 대기권의 사진을 보여주며, 지구 대기권이 얼마나 얇고 연약한지 설명한다. 지구는 아주 크기 때문에 인간의 영향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다. 지구 대기권은 아주 얇기 때문에 매우 취약하다(vulnerable). 지구를 농구공이라 치면, 대기권의 두께는 공 표면에 칠해진 광택제 두께에 불과하다. 대기권은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등 네 층을 합하여 총 140 킬로미터에 달하지만, 기체의 80%는 지상으로부터 약 12 킬로미터 정도까지 뻗어있는 대류권에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해발 4,000미터 이하에서만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다. 지구가 형성된 이래 대기의 구성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해 왔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그동안에는 화산이나 판 이동에 따른 지질학적 격변, 생명체 활동에 의한 화학반응, 소행성 충돌 등 자연 환경에 의한 변화였지만, 최근에는 인간에 의한 변화가 주된 요인이다. 바로 산업화로 인한 온실가스의 배출이 그것이다. 지구 기후는 에너지 평형의 흐름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태양광선을 통해 지구로 도달한 에너지는 일부는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고 일부는 지구에 흡수되었다가 결국 방출됨으로써 지구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에너지 평형을 이룬다. 간단히 말해 기후란 지구 에너지가 평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인식해야 할 점은 지구 기후는 항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지구 기후는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개입하기 전부터 지구기후는 변동을 겪어왔다. 기후변동의 주요한 원인으로 세 가지 요인은, 첫째 태양 에너지의 변화 혹은 지구 공전궤도의 변화, 둘째 우주로 반사된 빛 에너지, 셋째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에 350ppm 이하였던 지구대기 중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2016년에 400ppm을 넘어섰다. 기후학자들은 수십년 이내에 450ppm을 넘어설 것이며 그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기후 격변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구기후 시스템에 인간이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변화의 방아쇠를 당기면 기후도 막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새로운 평형을 향해 급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기후는 나무늘보가 아니라 순식간에 달려드는 맹수이다. 지난 1만 년 동안의 따뜻하고 안정된 기후는 빙하기 중에 찾아온 행운의 나타난 아주 짧은 기간의 현상이었다. 만일 안정된 기후가 지금부터 격변의 단계로 들어선다면 과연 인류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이러한 전 지구적 규모의 변화로 인한 위기가 닥쳐올 경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과 종교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과학기술의 지식은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종교는 위기 앞에 자기 혼자만 살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모든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위기를 극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류를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지구는 인간과 수많은 생명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이다. 이 땅과 하늘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다른 동식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복을 베풀어 주신 생명동산이다. 이젠 시간이 촉박하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소중한 생명동산을 보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나서야 할 때이다. /성공회대 총장·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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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으로 드리는 삶
- ▲ 민필원목사 미국 미시간주 칼빈신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는 동안에 갈보리교회라는 현지 미국인들이 다니는 교회를 일 년 넘게 출석한 적이 있다. 그 교회는 매 주일에 대략 5000여 명이 모이는 꽤 규모 있는 교회였다. 어느 주일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그날은 그 교회의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교회 설립 75주년 기념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예배였지만 그 가운데 그 교회의 긴 역사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몇몇 특별한 순서들이 있었다. 그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순서 한 가지는 헌금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바이올린 독주였다. 사실 이 교회는 아주 잘 구성된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아마도 교인 중에는 젊고 훌륭한 연주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헌금 시간에 바이올린 독주를 하러 나오신 분은 백발의 85세 할머니였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강단 위로 걸어 나오신 그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서서히 연주를 시작하셨다. 조용한 가운데 흘러 퍼진 그 할머니의 바이올린 연주는 그 곳에 앉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으로 들려왔다. 할머니의 떨리는 손에서부터 전해오는 감동스러운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 그 아름다운 바이올린 독주를 하신 이 할머니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 바이올린 독주를 하신 그 할머니는 그 교회가 창립되던 75년 전부터 그 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온 분이셨다. 교회가 설립될 당시 10살이었던 소녀가 무려 75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교회의 예배를 돕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봉사해온 것이었다. 그날 그 할머니의 연주 가운데 느껴지던 감동은 그 바이올린 소리뿐 아니라 그 할머니의 신실함에서부터 오는 감동이었다. 이 할머니의 연주와 신실함이 그 할머니뿐만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감동케 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매우 빨리 그리고 쉽게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너무나 쉽게 바뀌고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쉽게 변하고 소망도 쉽게 변한다. 과연 이러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많은 봉사와 사랑과 섬김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종종 목사님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흔히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성도들 못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종종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목사는 섬김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성도들에게 말씀하신다. 안타깝게도 목회의 현실에서 이러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지만 이것이 가슴 아픈 것은 목사와 성도들 간에 신실함이 상실된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목사를, 목사가 성도들을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교회의 현실인 것은 매우 아픈 일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실함으로 나누는 삶의 연주가 되기를 소망한다. 75년간 변함없이 신실함으로 한 교회를 섬기셨던 85세의 할머니의 손 떨리는 바이올린 연주가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하게 연주함으로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천안반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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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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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으로 드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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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
- ▲ 김진호목사 매년 9월이 오면 장로교는 성총회가 열리고 교단을 섬기고 이끌어 갈 큰 지도자(총회장)들을 선출하게 된다. 장로교는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이기에 그 사명이 막중함으로 항상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장로교의 한 지도자의 탄생은 한국교회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에 더더욱 그 책임도 크고 기대함도 큰 것이다. 이제 총회를 앞두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로, 오늘의 한국교회를 가리켜 위기라고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 위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장로교단의 성총회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먼저 지도자 된 우리 모두가 각성과 지성으로 한국교회의 정화운동의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뉴스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성(性) 스캔들과 일부 총회장 선거의 타락상과 소수의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세습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기보다 실망을 주고 있음이 사실이 아닌가? 먼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참회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시 34:18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장로교의 총회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둘째로, 총회를 통해 사분오열된 한국교회를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주님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하나 되도록 명령하셨는데 한국교회(특히 장로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핑계 삼아 찢어지고 갈라져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 아닌가? 오죽하면 한국교회를 가리켜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제는 서로 용납하고 관용하여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연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고 화합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세상을 향해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교리나 신학이 예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총회를 통해서 교단과 교단이 연합하고 여러 연합체 기관들도 하나의 연합체가 되도록 거룩한 결단을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지금 이 나라, 이 사회가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애쓰는 저출산 문제와 자살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도 함께 고민하며 진지한 연구와 대책을 세워나가는데 일조해야 한다. 교회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공동체가 아니기에 이 사회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진리의 공동체가 아닌가? 현재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급격히 줄어가고 있으며 크리스천 중에서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장로교의 총회는 세상과 함께 진지한 연구와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열리는 총회가 총회장 선거나 치루고 마는 행사 위주와 안일한 총회가 되지 말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 부흥하게 하는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총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기감 전 감독회장·도봉감리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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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총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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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단 총회에 바란다
- ▲ 이정익목사 9월은 장로교단 총회시즌이다. 이제 여러 장로교단들은 마지막 총회준비에 한창이다. 여러 장로교단들은 교단마다 당면한 총회 이슈들이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해결과 결의와 치유가 있었으면 한다. 먼저 통합측의 총회 핫 이슈는 명성교회 문제가 아닐까 한다. 총회의 뜨거운 감자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총회 재판국에서 예상을 뒤엎고 합법으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재심청원을 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재심청원은 판결문을 송부받은 지 30일 내에 신청해야 한다. 재심청원을 하려면 9가지 사항 중 2개 이상의 분명한 위법사항이 있어야 신청할 수 있다. 현재 반대 측에서는 재심청원을 모색하고 있겠지만 문제는 두 가지 이상의 타당한 위법 사항이 있어야 가능한데 현저히 위법하다는 조항이 없다는데 고민이 있다. 총회 재판국이 합법으로 판결을 한 근거는 총회에서 이미 세습금지법을 결의한 사항에 대해서 헌법위원회가 금지조항에 대해서 삭제 내지 보완 수정하라는 해석을 내린 것을 근거로 재판을 하였기 때문에 마땅한 재심청구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총회에서는 재판국의 재판사항이 집행부 보고로 끝나기 때문에 이 명성교회 문제는 일단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반대 측에서는 총회를 보이콧하거나 총회장소를 점거하자는 여러 설이 나오고는 있지만 통합총회는 그런 물리적 수단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합동측 총회의 핫 이슈는 총신대 문제가 아닐까 싶다. 현재 학교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교육부가 개입하기로 한 상태이다. 이미 총장과 이사진은 해임됐고 곧 관선이사가 파송될 예정이다. 누가 관선이사가 될 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교육부는 흔히 관선이사를 파송할 때 교육부가 만들어 놓은 인재풀에서 파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학교와 관련된 유관 기관 즉 동문회, 후원회 등 기관추천도 받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방법은 또 총장측이 연관된 인사들을 추천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관선이사들이 파송되면 먼저 이사회를 구성하고 새 총장도 선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신백석측의 총회 이슈는 대신측과의 통합 불발문제가 될 전망이다. 백석측은 대신측과 통합하면서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통합 된지 벌써 몇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근착이 되지 못하고 갈등 중에 있다가 대신 수호측의 소송으로 통합은 불법이고 대신이라는 교단명칭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고법의 판결이 나와 결국 대신 합류파는 백석과 결별하고 대신수호측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것은 교단통합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길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장총회는 이번 총회를 제주도에서 개최한다. 이번 기장총회에서는 제주도 4·3사태와 강정마을 사건, 통일문제를 다룰 것 같다. 이런 문제들을 실제적으로 다루기보다 성명서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오늘 각 교단들은 모두 산적해 있는 난제들을 안고 있다. 물론 각 총회는 당면한 이슈들을 먼저 집중해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자칫 이런 당면한 문제들에 매몰되어 정작 한국교회가 공히 당면한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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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단 총회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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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후원, 함께 변화하는 여정
- ▲ 양호승 미국에서부터 10년 넘게 후원하는 르완다 아동이 있다. 미국에 거주할 때 미국월드비전을 통해서 인연을 맺게 된 아동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동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거나 선물을 보내며 내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기도하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대신하고 있는데, 나처럼 게으른 후원자와는 다르게 많은 분들이 후원아동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들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번역자원봉사자들이 있는데 월드비전만 해도 약 천 명이나 되는 번역자원봉사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월드비전의 최고령 번역자원봉사자께서 전화를 주셨다. 14년 간 해오던 편지 번역 자원봉사를 이제는 그만해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봉사를 시작하고 한번도 쉬신 적도, 마감을 어기신 적도 없는 성실한 분이었고 그만큼 귀한 분이어서 아쉬움이 매우 컸다. 하지만 81세로 고령의 나이를 가지고 계시니 어쩌면 힘에 부치셨을지도 모르겠다. 이 분이 봉사를 하게 된 계기는 투병 중이던 남편이 천국을 가고 자식들이 출가한 후 허전함과 외로움 속에 3년을 헤매고 있을 때, 동생의 제안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픔과 외로움이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이 자리 잡더라고요”라고 말할 정도로 이 분을 힘든 시간 속에서 건져냈다. 나는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해외아동후원이 후원자와 후원아동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 둘을 잇는 봉사자의 삶까지 변화시키다니. 너무 멋진 이야기가 아닌가! 먼 나라에 사는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해외아동후원이 사업후원이나 특별후원과 다른 점은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그 관계를 맺고 깊어 가는 과정 속에서 아동과 후원자, 그리고 가교 역할을 하는 봉사자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된다’는 점이다. 그 변화는 자존감을 높이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넣어주며, 다른 이를 향한 배려와 사랑을 포함한다. 실제로 후원을 받은 아동이 그렇지 못한 아이에 비해 자존감도 높고 훨씬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해외아동후원, 더 나아가 해외 빈곤지역을 돕고자 하는 경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약 3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난해와 올해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것은 월드비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종기관들도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고 고령화, 청년실업 등의 사회적 불안감이 높아짐에 따라 전반적으로 나눔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를 도와야 한다고 할 때 흔히들 ‘대한민국은 옛날에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어려운 나라를 도와야 한다’ 또는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당위성과 책임론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후원과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변화에 주목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앞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후원은 단순히 돕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관계 맺음이며, 더 나아가 후원자와 아동, 그리고 봉사자의 삶에 기쁨과 보람을 넘어서 변화를 가져다 준다. 주님과 우리가 관계 맺음을 통해 변화하듯 우리도 아동과 더불어 간접적으로 관계 맺는 봉사자까지 관계 맺음을 통해 예수의 향기와 예수의 삶을 전하고 그들과 내가 함께 주님을 닮아 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에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의 손길이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평안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길 기도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월드비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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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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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후원, 함께 변화하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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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 ▲ 이승열사무총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야곱, 이삭, 위대한 지도자 모세, 다윗, 그리고 예수의 조상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된 여인 중 하나인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 등이 난민의 생활을 했었고 예수님은 친히 어린 아기 시절에 베들레헴의 학살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살았던 분이셨다. 즉 하나님이 친히 난민으로서의 경험도 하시고 그들의 입장을 옹호지지 돕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는 본류가 아닌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라는 여종도 죽어가던 중 도와주시고 살려주신 구호의 역사가 있다. 여기서 하갈은 나를 살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독일개신교회는 지난 2017년에 교회대회의 주제성구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정하였고 시리아 난민 120만 명을 받아들인 독일의 교회적 입장과 역할을 논한 바가 있다. 우리나라 또한 난민의 역사를 간과할 수 없으며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난민들의 임시정부로 시작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전쟁난민들이 국제적인 도움으로 연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 한 후 난민법이 2013년에 발효되었고 그동안 누적된 난민신청자는 모두 2017년 당시 40,470명이며,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4.1% 그리고 인도적 체류를 허락받은 자들은 7.6% 모두 합해서 11.7%인데 전 세계의 통계(난민 인정이 24.1%, 보충적 보호 12.3% 합 36.4%)에 비해 매우 저조한 통계라 할 수 있다. 현재 제주도에 무사증으로 입국하여 난민신청을 한 외국인들은 금년에 모두 1,055명인데 예멘 549명, 중국 353명, 인도86명 그 외 소수의 몽골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유독 예멘인들은 더 이상 무사증으로 입국하지 못하도록 법무부가 지난 6월 1일자로 조치를 했으며 대부분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을 보장해주었는데 예멘인들은 제주도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출도제한 조치를 감행하여 제주도에 갇혀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들이 무슬림, 가짜난민, 이슬람선교,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등등의 잘못된 오해와 가짜뉴스와 더불어 제주도민들이나 교회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혐오적 배타적 포비아(공포, 두려움) 현상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먹고, 자고, 일하는 생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사회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주도의 기독교의 반응도 대부분 도민들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난민들에 대한 기독교와 교회의 입장은 어떠한 차별 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과 과제임을 깨닫고 그들을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먹이고 재우고 일자리를 제공하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문화를 익히게 하고 섬기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모금에도 동참하고 있는 자들도 기독교인들이다. 특히 (사)제주외국인평화공동체 부설 제주외국인이주민센터(공동대표=홍성직)는 현재 64명의 예멘난민신청자들을 수용하여 돌보고 있다. 현재적 난민에 대한 오해와 배타적 혐오적 자세를 바른 성경적 이해로 극복하고 전향적 자세로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 즉 그들은 작은 자이고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믿음의 열매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선교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고 찾아가서 선교하느라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이치와 전략상 맞지 않은 것 같다.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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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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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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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전기는 안전한가?
- ▲ 유만석목사 요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연일 기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22일 서울의 기온이 섭씨 38도를 기록하였다. 이런 더위는 수십 년 만의 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백여 년만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런 푹푹 찌는 무더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겪는 일이라고 하니, 자연 재해가 우려되고, 그 재앙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력수요도 지난 20일, 8,808kw로 역대 최대 전력 수요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2016년 8월에 8,518만kw를 기록한 것을 다시 경신한 것으로, 올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 갈아 치우는 기록적인 전기 수요량이다. 이제 8월 달에는 더 많은 전기량을 사용하게 될 터인데, 냉방과 가전제품에 주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서민들이 전력난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현재 정부가 확보한 예비 전력량은 10% 남짓으로 그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럴 경우 가정에도 문제가 되지만, 전기를 통해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과 기업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정부에서는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가, 급한 나머지 그 원전 가동을 지난 21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로써 전체 원전 24기 가운데 14기만을 가동하던 것을 현재는 17기로 늘려 가동하고 있으며, 앞으로 19기까지 늘릴 계획이란 언론 보도가 있다. 현 정권에서는 대통령 공약으로 탈원전 정책을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신규 원전 전면 중단 및 건설계획 백지화,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 및 월성 1호기 폐쇄, 탈원전 로드맵을 수립하는 공약을 발표하였었다. 그리고 지난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탈원전 에너지 전환 정책을 구체화하면서, 원자력계와 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19일 대통령이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원자력발전소 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천명했었다. 이에 따라, 원자력발전소인 신고리 5/6호기의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공론화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지난 해 10월 20일 공론화위원회는 찬성 59.5% 대 반대 40.5%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을 재개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원자력에 대한 안전의 우려와 친환경적인 재생에너지에 대한 정책은 필요하겠으나, 아직 뚜렷한 대책과 대비가 없는 가운데, 성급하게 ‘탈원전 정책’으로 가는 것은, 이번의 경우처럼 폭염이 계속되고, 전력수요의 급증으로 인하여, 전기 공급에 차질이 빚어질지 않을까 염려하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기 발전을 함에 있어, 여러 가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에너지관리공단의 통계에 의하면, 석유가 40.1%, 석탄이 27.8%, LNG가 15.4%, 원자력이 11.6%, 신재생이 4.6%, 수력이 0.5%이다. 그러나 전기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은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이 kwh당 250원인데 비해, 원자력은 68원 정도에 불과하다. 원전이 중단된 가운데 전기량이 급증하면, 당장 석탄과 LNG 연료를 사용하여 발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료는 미세먼지와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단점이 있다. 탈원전 정책을 펴는 정부로서도 중장기적인 계획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2030년이 되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20%로 늘린다고 한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생산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들어간다. 올 여름 날씨는 기록적인 맹위를 떨치고, 전력 수급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우리나라 전기는 안전한가를 묻고 싶다. /한국교회언론회 대표·수원명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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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전기는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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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 건강한 교회
- ▲ 이정구 신앙의 척도 기준이 불명확하기 때문에 연령 별로 신앙양태를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대 이후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2000년 대 신앙생활을 시작한 젊은 층의 신앙양태가 다름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천당과 지옥’을 강한 어조로 가르쳤고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다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성경구절에서 특정 부분을 따오거나 응용하여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에는 ‘교인군사 같이 구주 지휘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매우 전투적이며 극단적인 문장들이 많다. ‘주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군대, 전투와 같은 이미지와는 퍽 다르게 느껴지지만 정작 교회는 박해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인들에게 순교에 가까운 무조건적 신앙과 전도하기를 요구하고 가르쳐왔다. 급기야 어느 신자는 불상을 훼손하고 심지어 사찰을 정복이라도 한 듯이 절터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지신밟기와 유사한 상징행위를 했다. 최근 제주도에 예멘 인들이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것을 비롯하여 이주노동자로 입국하여 국내에서 3D 직종에서 노동하며 생활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증가를 일부 한국인들은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최근 몇 소수 대학에서는 이슬람과 관련된 센터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이 기구의 기능은 대체로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거나 이들이 기독교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앞으로 국내에 무슬림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많은 교회들은 그 긴장도를 더 높여 갈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마찰은 주로 기독교 측에서 문제를 야기해 왔는데 최근 마찰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땅 끝까지 교인군사’로서 기독교복음를 전파해야 하는데 다른 종교들이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 왔던 탓이다. 지상에서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들을 모조리 말살하고 나면 정말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필자의 엷은 신앙 탓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상에 오직 기독교만 있다면 인간들 사이에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평화가 올까? 아마 가톨릭과 개신교사이, 개신교 안의 수많은 교단 분쟁이 더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유일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우상이요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죄목은 국내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십여 년 전 ‘신의 역사’를 쓴 옥스퍼드 대학 종교학부의 가톨릭 수녀 카렌 암스트롱이 느닷없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비난이 크게 일자 카렌은 “내가 어느 종교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대응을 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 글에 격노할 분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시대는 급변하는데도 주입식 교육으로 무장시키고 타 종교를 말살하도록 경주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기독교가 적대시 하고 있는 불교, 이슬람과 이런 이단 종파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물리쳐야 할 진정한 적이 어느 쪽인지 분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고는 하지만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감성적 확신 안에도 이성은 있는 것이다. 이성이란 계산한다는 의미인데 내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신앙이 혹 이웃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평화는커녕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산해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앙을 굳건히 지키겠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착각이며 우상이다. 4차 산업, 다문화 사회에서 타 문화, 타 종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평화를 위해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면 하나님께서 격노하실까? 성숙한 신앙이 교회를 건강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성공회대 총장·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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