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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만종(晩鐘)의 감사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감사’이다.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고개 숙인 감사이다.만종의 화폭에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은 가진 지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높은 지위 때문에, 또는 종교적 경력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다.    만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 고위층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할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활동하게 하심도 감사하고 있다. 고개가 숙여지면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말 없는 감사이다. 만종의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 숙인 채, 입도 다문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가슴 저미는 감사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할 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고 마음에서 나온다.    셋째로, 함께 하는 감사이다.만종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이 보여야 한다. 남의 불행을 나의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복 받고, 함께 누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인 문화만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생각, 즉 이웃이 보이고 귀하게 여겨지는 신앙이 아쉽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고난 속에서의 감사이다. 만종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가난한 부부의 감사의 모습이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의 감사의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는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질 때 하는 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귀한 감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종은 원래의 그림에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부부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본래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체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 속의 부부의 모습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조차도 그들의 감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 슬픔조차도 가슴에 묻고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참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감사요, 바울의 감사였다. 만종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서울장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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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5
  • 잘못된 감사, 잘못된 기도
       올해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맞았다. 이 계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지상의 양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내 영혼을 먹이고 입히시며 무시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을 구하며 걱정하는 부끄러운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들어주시는 해결사이심으로 감사하는 한심한 종이다. 잘못된 기도를 들으시거나 잘못된 감사를 받으시는 주님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경은 감사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언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감사를 권면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시편 136편은 1절부터 26절까지 전체가 “감사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편은 매 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반복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감사(感謝)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자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하면 더 실감나고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헤세드’는 인자의 의미도 있지만, ‘은혜’, ‘은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궁에서 나온다. 은혜는 어머니의 사랑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젖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죄인(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감사시인 시편 136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감사하라는 언명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절) 그 외에 모든 절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으로 감사하라”(1절~3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으로 감사하라”(4절~9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라”(10절~24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언명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참 신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오늘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며 그것이 충족됨으로 감사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마찬가지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감사의 계절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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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4
  • [정론] 종교개혁과 변화 그리고 경건
       2024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 개신교회의 본질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신학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고,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비롯한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토대를 구축하여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여, 중세의 봉건적 전통과 구전문화의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산업혁명은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특히 성도들에게 영적문화의 충격과 함께 성도들의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형성하면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변혁은 크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 예배 문화의 변화이다. 교회의 예배가 단순해지면서 성만찬 중심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교회 내에서 사라지고 일상적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의 보편화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하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성전 예배 중심에서 삶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예배로 예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내의 비성경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초신앙교리 교육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회 내의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숭배임을 적시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됨을 비판하고 제거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변혁이 일어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의 기초인 성경을 중심한 신앙과 생활이 강조되고 교회안의 거룩한 공동체와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지면서 다양한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함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일으켜 종교,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더 발전시켜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노동이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의 전쟁과 종교가 공적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는 한계도 드러냈다.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성직자, 교회 공동체는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의 부분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현실화’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는 매일 성경 40장 이상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실천할 때 신비의 계시가 능히 너희를 견고하게 함을 믿어야 한다(롬 16:26). 둘째, 하나님의 메시지, 타인과의 대화에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넷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행 28:30-31). 다섯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용서운동이 있어야 한다(욥 42:6, 10).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이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기억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칼빈학회 회장·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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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22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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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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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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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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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교회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
      기윤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10명 중 7명은 ‘한국 교회’와 ‘목사’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교회가 신뢰받기 위해선 25.9%가 ‘불투명한 재정사용 개선’을 꼽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변화’(22.8%), ‘타 종교에 대한 태도 고치기’ (19.9%) 순으로 나타났다.   목회자 신뢰 제고 방안으로도 ‘윤리 및 도덕성’ 개선이 51.5%로 가장 높았으며, 개신교인이 신뢰를 받기위해 개선해야 할 문제로는 ‘남에 대한 배려 부족’(26.6%), ‘정직하지 못함’(23.7%), ‘배타성’(22.7%) 등이 지목됐다.   신도수의 급감, 대 국민 신뢰도의 추락은 그대로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코로나 19 사태 국면에서 예배 등 소모임이 소원해지면서 교회 출석률이 낮아지고 신앙과 봉사의 강도도 낮아지면서 위기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나 자정 능력의 한계가 드러났고, 지나친 양적 성장과 성직, 성공주의가 기독교적 가치와 정신, 영성과 신앙의 내실화를 가로 막았다. 이런 상황을 총체적 위기로 인식하고 위기관리를 넘어 국면 전환 및 혁신을 가져와야 한다.   초대 한국교회는 서민대중의 친구가 되었고, 고단한 시민들의 기댈 언덕이 되었다. 나아가 민족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독립운동, 농촌계몽운동, 교육운동, 의료복지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사회는 교회의 은덕을 많이 입었고 그 덕분에 많은 분들이 개신교신도가 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한축은 한국전쟁과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자본의 자양분 덕에 양적 성장을 이뤘고 다른 한축은 독재와 맞서 산업선교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성장주의 교회들이 교권을 장악하면서 기독교 정신과 내면의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자본과 시장 원리의 한계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금융위기와 경제위기 거기에 생태계위기까지 겹쳐 사면초과에 놓이게 되면서 교회는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성직자의 윤리의식과 성감수성의 퇴락과 재정 유용은 교회의 근본을 묻게 했고, 지나친 근본주의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보편적 사랑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복음을 정죄와 심판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교회는 독선적 사고로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였고 나아가 시대정신을 거역함으로 시대의 핀잔을 사고 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사회를 섬겼던 교회는 이익집단이 되었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던 교회는 부자를 대변하고 약자들을 비판함으로 그 중심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교회는 변화지 않으면 결국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다.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개선하는 길은 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신의 원인인 ‘불투명한 재정사용을 투명하게 개선’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보내는데 있다. 아울러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의 윤리 및 도덕성을 높이고 배타성을 극복하며 남에 대한 배려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공동체로 거듭나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을 형성하고 대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사회책임위원회 및 생태환경문제를 다룰 생태선교위원회를 구성하고 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혀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다면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교정할 수 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는데 앞장선다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거기에 한국교회의 근본적 가치인 영성을 회복하고 사랑의 섬김을 활성화한다면 개신교회는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좋은 사람은 이미 좋은 세상이란 한 시인의 말처럼 좋은 교회는 이미 좋은 세상이다.  /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전국총무·가재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7-31
  • 생명존중의 사회분위기 조성이 절실하다
      또 충격이다. 박원순시장이 자살을 하였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자살이 아니라 충동 자살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 그를 자살로 이끈 동기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자살 그 자체만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분명 자살은 죄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자살은 살인죄이다. 타인만 죽이는 것이 살인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나를 내가 죽이는 것도 살인죄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율 1위 이라는 것을. 그리고 매년 일만 5천여명 이상이 자살이라는 살인죄로 스스로 생명을 거두고 있다.    특별히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과 인지도가 높은 서울 시장의 자살은 연쇄 자살을 염려하게 만든다. 바로 베르테르 효과 이론 때문이다. 독일이 나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가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라는 책을 쓴다. 그 책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연인 로테에게 실연을 당하자,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이 자살을 모방한 자살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이를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으로 붙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최진실이라는 유명 탤런트 자살 이후 많이 이들이 따라 자살을 하였다. 바로 베르테르의 효과인 것이다.  이번 박 시장의 자살로 자살 유혹이나 충동을 받는 이들이 없기를 기도해 본다.    자살하는 동기가 다양하겠지만, 단순하다 힘들다는 것과 절망한다는 것과 결국 도피이다.    최근에 젊은 여자 청년을 만났다. 20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순간, 속으로 내내 눈물을 뿌렸다. 들려 준 이야기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이 두 살 때, 아버지가 뺑소니 자동차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 결과로 아버지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기를 버리고 가출했다 한다. 지금까지도 그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그 이후 자신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키워 주셨다고 한다. 대학교까지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시더니 그날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후 급격하게 더 큰 어려움이 불어 닥쳤단다. 할머니 돌연사로 할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이내 눕게 되셨다고 한다. 한순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20대 중반이라는 정말 젊은 나이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였단다. 나를 사랑해 주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스스로 돌보기 위해서, 요양 보호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자살한 박시장과 이 여자 청년의 얼굴이 겹쳐 지나간다. 누가 더 힘들까?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혼자 몸으로 돌보아야 하는 이 여자 청년이 더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 여자 청년은 인생 운명을 이겨 내려고 한다. 그 어려움을 헤쳐 내려고 용기를 내려고 한다. 자살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청년 안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예수’였다. ‘신앙’이었다. 예수님이 주시는 희망 한 줄 잡고, 삶을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이 영웅적 삶이 아닐까? 신앙 영웅이다.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속으로 웃었다. 이 여자 청년에게 이 삶의 무게를 잘 이해하고 함께 걸어가 줄 수 있는 남자 기독 청년 만나, 반려자가 되어, 인생이 꼭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고 들려주는 행복 고백을 듣고 싶다. 그렇게 기도했다.  /루터회 전 총회장, 작은예수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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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7-14
  • 차별금지법은 신앙의 자유를 훼손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을 내세우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신앙을 중시하는 신본주의의 차원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헌법은 차별금지를 보장하는데, 2019년 8월에 문재인정부의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소위 포괄적 차별금지법인 NAP는 양성을 명시한 헌법 32조와 양성평등기본법을 전면적으로 무시한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결의로,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현저하게 훼손하고 있다. NAP 정책은 인권이 아니라, 실상은 차별금지를 빙자한 한국교회를 향한 규제법이다. 성경이 ‘가증한 것’으로 여기는 동성애는 호전적이다. 인본주의는 동성애를 이용한다.   플라톤의 ‘대화록’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향연’은 에로스를 동성애의 최고신으로 극찬한다. 성인남자가 미소년과 동성애를 나누면서 후견인이 되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서 기원한다. 후견인과 수혜자 관계가 로마 세계에 그대로 전해져서 예수의 시대에는 동성애가 이방신전의 제사뿐만 아니라, 일상에까지 깊이 들어왔다. 식탁교제인 향연이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서 심포지엄으로 일상화되었는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동성애 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다.   고대 시대의 교육은 동성애의 미궁 속에서 혼란스럽다. 미소년 때는 성인후견인과 동성애자의 관계에 있다가, 성년이 되어 미소년과 동성애에 빠지고, 결혼 후에는 한 여인과 자녀를 낳는 이성애자가 된다. 인생에서 두 번 동성애자가 되고 한 번 이성애자가 되는 동성애와 양성애의 교육에 그대로 노출되어 자녀들이 자라는 것이 고대 다신론적 사회이다. 동성애교육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신앙교육과는 판이하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세 개의 성인 자웅동체의 성과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신 것과는 달리, 다신론적 배경 속에 있는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의 제자인 제우스가 사람을 창조했다. 처음부터 남성과 여성이 따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자웅동체로 한 몸인 둥그런 달에서 태어났기에, 반쪽으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한다. 남성은 태양에서 태어났고, 여성은 대지에서 태어났다. 이런 연유로 태양과 대지는 천지차이가 나므로, 남성은 남성을 여성은 여성을 본능적으로 동성애 사랑을 한다.   지중해 세계를 27년 동안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음란한 문화를 예수말씀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동성애와 양성애와 성전환을 이단이라고 규정을 하였다. 이단이라는 헬라어가 하이레시스로 고대 창녀인 헤타이라와 연관되어 있다. 이단은 이방신전에 가득한 동성애를 유발하는 우상숭배이기에, 바울은 동성애를 악덕목록에 넣어서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것으로 죄악시하였다. 그래서 2018년 예장 통합측에서 ‘퀴어신학 이단’을 결의했다.   스웨덴의 증오표현금지법은 원래 유대인을 공격하는 신나치주의자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데, 지금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을 인용하거나 설교를 금지하는 법으로 악용되고 있다. 동성애 독재의 파고 속에서 목사까지도 성소수자를 인권이란 미명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에 동조한다. 인본주의와 퀴어(괴상한) 신학으로 인해서 한국교회가 성경적 복음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다.   인권문제로 사람에게 집중하면 저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 인간의 모습을 소홀히 하는 반성경적 입장으로 나간다. 인권은 인본주의인 좌파의 옷을 입고 유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섭리가운데 인생을 대하신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신앙적 행위이다. 교회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성애자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동성애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순종하도록 일깨워야 한다.  /장신대 교수·예수의 토라·소기천TV 유튜버)
    • 오피니언
    • 정론
    2020-07-09
  • 부강한 국가를 위한 교회의 역할
      6·25전쟁는 아무 준비 없이 몰아닥친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역사였다. 우리는 항상 영육 간에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 준비된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의 전쟁으로 유엔군 전사자 37,902명을 기록한 수많은 인명피해를 남겼다. 아직도 휴전이라는 상태로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아픔을 안겨준 6·25전쟁는 수많은 이산가족과 함께 평생 고통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민족의 아픔을 남긴 역사였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꿈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죽은 후에 낙심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선택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시기를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여기 일어나라고 하신 말씀은 앞을 향한 전진할 자세를 의미하는 말이며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행동개시를 의미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자는 걸을 수 있고 걷는 자는 뛰어갈 수가 있다. 우리는 가나안 축복의 땅을 밝히 바라보면서 과감하게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미래를 향하여 꿈을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과감하게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향하여 약속하신 바가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미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믿음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참된 믿음의 발자국은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가져오게 하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승리를 성취하도록 이끄셨다.   이러한 승리자가 되는 비결은 바로 마음이 담대하고 강한 자가 되는 데에 있다. 여호수아서 1장 7절 말씀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했다. 여깃 ‘담대히’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에 뜻을 살펴보면 ‘힘이 세다. 견고하다, 위대하다. 용기가 있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는 무슨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어떠한 강한 대적도 쳐서 이기는 백전백승의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마음의 강한 자에게 큰일을 맡겨주시고 그 강한 마음을 도구로 들어서 사용해 주시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이 크게 쓰신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가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들이었단 사실이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했다. 우리가 담대해질 수 있는 비결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실 때 되는 것이며 수많은 대적을 이길 수 있는 비결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승리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무엇에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크고 위대하게 쓰임 받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승리자가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기만 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되며 형통하게 된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복되게 사시며 나라와 민족이 모든 삶에서 승리가 있고 다시는 6·25전쟁 같은 역사가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주안에서 우리가 크게 쓰임 받고 매사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란다. /한국개혁교단협의회 대표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6-24
  • 호국의 달에 생각하는 대한민국과 교회
      6월이면 한국교회는 해마다, 현충일과 6.25를 기억하며 국가수호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호국의 달’로 지킨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항했던 독립투사들과 6.25의 참전용사들이 호국을 위해 바친 희생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음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호국영령들과 그 가족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되돌아보면 올해는 8·15해방을 맞이한 75주년, 6.25를 겪은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아직도 남북이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세월이 많이 지나다 보니, 오늘의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어떤 방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할지, 분명한 대한민국의 역사관과 국가관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저 친북적 성향의 주장들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장래가 걱정될 때가 많다. 특히 지난해 우리 대통령이 동계올림픽 개회 연설과 현충일 기념사에서 신영복과 김운봉을 치켜세우며 그들이 마치 대한민국의 호국영령들인 것처럼 오해되게 하여, 때아닌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정치이념대립을 불러일으키는 해프닝이 발생했었다. 그래도 의식해서인지 올해는 오해를 극복한 연설을 해 준 것 같아 대통령께 감사드리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우리 국민들과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가 아무리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 할지라도, 지나친 친북적인 언사와 북한 주장의 정치이념을 추종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현 정치인들의 태도를 경험할 때, 그들의 호국정신의 미확인이 염려스러우며, 대한민국 장래가 걱정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다수는 아직도 6.25 남침에서 북한이 저지른 행위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으며, 탈북자들의 생생한 증언에서 북한의 인권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충분히 느끼게 되며, 심지어 전 세계도 벌써 3대째 이어진 “김씨 왕조의 공산 독재주의 국가”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먼 장래의 통일을 전망하면서, 그간 대립 일변도를 극복하고 소위 정치적인 평화상태 견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을 지키는 호국정신에 근거한 노력이어야지, 갑자기 싱가포르 회담과 미.한.북 정상들의 판문점 방문으로, 마치나 통일이 다 된 것처럼 들뜬 감상적 통일환상이나, 북한 주장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형태의 평화정치는 깊이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   비록 한국 정치가 지금은 여대 야소로 나뉘어 여당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가 예견되나, 국민은 언제나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며, 정부 여당은 야당과 협치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연습하며 훈련받는 성숙을 향한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때로는 다투며 대립할지라도 그것은 국민을 위한 정책적인 견해 차이 때문일 뿐, 대한민국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호국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 역시 하나가 되어 함께 호국의 책임을 힘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지금부터라도 “원수를 사랑하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저 북한 국민을 향해서 실천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복음이 말하는 화해와 용서와 사랑을 90년대 북한에 쌀 보내기를 실천했던 것처럼 힘쓰기를 바란다. 그 대신 정부와 여야의 대북관계 정치는 상호호혜주의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이며, 교회는 한국의 타 종교들과 뜻을 함께하여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 국민을 직접 돕는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그 어느 날엔가 참으로 국민을 위하지 않는 악한 독재국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며, 끝까지 국민을 위하고, 사랑하며, 돕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견지한 나라는 1990년 기적 같은 통일을 맞보았던 저 서독국가처럼, 대한민국에도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통일을 맞보게 되는 날이 가까워지리라 확신한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6-18
  •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의 위대한 힘
    코로나 19 사태로 전세계가 패닉이다. 국경이 막히고, 무역이 중단되고, 사업체가 문을 닫고,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지 못하고, 학교의 교문은 굳게 닫혔다. 6.25 때도 지속 되었던 교회의 예배는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드려졌다. 미국이 약 10만이 죽고, 이탈리아와 영국이 수만 명이 죽고, 중국은 사망자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300명 안팎의 사상자만 남기고 있고, 지금도 이 바이러스와의 사투를 잘 극복하고 있다. 사스, 메르스, 신종플루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체계적인 의료체계를 갖추어 왔고, 거기에 더하여 헌신적인 의료인들의 섬김과 헌신으로 수많은 완치율을 확인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나라가 이 엄청난 재난을 극복해나가고 있을까? 가슴 뭉클한 궁금점을 갖고 필자는 계속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던 중에, 코로나 19 환자를 돌보기 위해 2개월 동안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자녀들과 통화로만 아쉬움을 달래는 한 간호사의 이야기도 보았다. 의료봉사를 신청해 놓고 차마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이야기도 못하다가 하루 전에 이야기를 하고 청도 대남병원으로 자원봉사를 한 의사의 이야기, 기저질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고자 주중에는 본인의 병원에서, 주말에는 의료봉사 현장으로 선별진료소로 향한 의사들도 많았다. 170여 명의 동네 의사들이 본인들의 병원을 잠시 내려놓은 채 선별진료소로, 대구와 경북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이러한 봉사의 걸음들은 시민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뿐 아니라 숙연하게 해 주었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코로나를 극복하도록 돕는 원동력이 되었다. 생계가 달린 자신의 비즈니스를 잠시 내려놓고, 가족들을 뒤로한 채 생명을 도우러 떠날 수 있는 동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의 의료인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국 최초의료원들과 의료체계가 갖추어질 수 있었던 의료 과거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게 된다. 의료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화 대학병원과 인천기독병원은 로제타, 제임스 홀, 셔우드 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고, 연세 세브란스병원은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1890년. 9월 미국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나온 닥터 로제타 의료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캐나다 출신 목사이며 의료 선교사인 제임스 홀과 결혼한다. 제임스 홀은 원래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었으나, 한국의 의료선교사로 지원한 로제타가 ”한국 여성들이 여자 의사가 없어서 죽어가니 나는 조선의 여성을 위해 한국에 선교사로 와야 합니다” 라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자, 중국의 선교를 접고 로제타와 결혼해서 한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 첫아들 에디스가 유아기에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연이어 로제타의 남편 제임스 홀이 풍토병으로 한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럼에도 로제타는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로제타가 키운 한국의 최초 여의사가 에스더 박(본명 김점동)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당시 심각한 질병이었던 결핵으로 죽게 된다. 그러자 제임스 홀과 로제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한국의 결핵 환자들을 위해 결핵 전문의가 된다. 그렇게 한 가정이 한국의 의료선교를 위해 눈물의 씨를 심었다.   이 위기의 때에 우리도 기억하고 또 각오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생명을 나누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내놓는 희생의 씨를 뿌리 선교사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안위를 버리고 의료현장으로 떠나는 의료인들. 그들의 희생정신을 이어가야 하는 일이다. 우리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로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을 걸고, 지방 곳곳에서 소금과 빛이 되며 어려운 교회들을 섬기는 모든 지역의 교역자들, 세계 각지의 선교사들, 어려운 교인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소중한 옥합을 깨트려 흘려보내야 할 때다.  /묵동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6-16
  •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2019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 7차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의 총회가 진행되었었다. 이 총회의 참석자들은 ‘지구 생물다양성 및 생태계서비스 평가에 대한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보고서’를 채택하였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지구 생태계의 생명다양성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는 인간의 농지 확대와 도시 개발, 해안 매립으로 인한 생물의 서식공간의 분절과 감소, 야생 동물의 밀렵과 희귀식물의 채취 등 불법 포획과 남획의 증가,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확산, 인간에 의한 인위적인 외래종의 침입, 그리고 기후변화를 지목하였다. 특히 이 보고서는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생명다양성을 감소시키는 여러 원인들의 영향을 더욱 심화시키는 가장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요인이라고 분석을 했다. 기후변화는 가뭄, 홍수, 폭염 등과 같은 기상 이변을 발생시키고, 해양의 산성도를 높이며, 해수면을 상승시켜 해안 토지의 침수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물들의 이동을 촉진시켜 새로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출현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우한시를 시작으로 전 세계 185개 국가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었고, 현재는 600만 명에 이르는 확진 환자가 발생하여 이 가운데 37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생물다양성과학기구의 보고서가 미래의 상황에 대한 예측 보고서가 아니라 현재의 팬데믹의 현실을 정확히 기술한 보고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현재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은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위기는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더 큰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기상기구(WMO)는 2019년에 발표한 ‘전 지구 기후 보고서’에서 2015년부터 2019년까지의 지난 5년을 인류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기’로 분석을 하였다. 이 보고서는 2019년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후에 200여 년 동안 1.1도 상승하였는데 최근 5년 사이에 무려 0.2도가 상승하는 급격한 기후변화가 현재 진행되고 있으니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UN 기후변화 회의’에서는 세계 각국의 정부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탄소배출을 줄여나가자는 내용의 기후변화 협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2018년에는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하며 2030년까지는 온실가스 배출을 현재의 45% 수준으로 감축해야한다는 IPCC의 특별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후변화의 시급성과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 정부의 노력은 아직도 미진하기만 하다.   한국교회는 6월 첫째주일을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환경주일로 정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제 37회를 맞는 2020년 환경주일의 주제를 ‘작은 생명 하나까지도 - 기후위기시대, 생명다양성을 지키는 교회’로 정하고 환경주일 연합예배를 드리며 ‘기후위기 비상사태, 한국교회는 작은 생명 하나까지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선언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과 기후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볼 것을 요청하고, 한국교회가 창조세계를 온전히 돌보지 못한 괴오를 참회하며 생태정의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생태환경선교에 온 힘을 다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목소리에 한국교회는 어떤 응답을 할 것인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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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6-04
  • 코로나사태와 한국교회의 예배회복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비대면 예배(Online Worship)가 요청 되면서 예배에 적잖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교인들의 예배 정신과 자세도 문제가 되지만 예배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19 이후 예배와 그 바른 방향에 대해 염려하는 분들이 많다. 워필드(B.B. Warfield)가 바르게 말한 대로 예배는 성화의 궁극적인 이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단지 윤리적인 인간을 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예배자로 만들어 영원토록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고자 하는 뜻에 있다고 한 그의 말은 옳다.    이 같은 구원의 목적을 고려할 때 예배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차원에 그치는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또한 지역과 문화 그리고 시대의 변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와 감사를 표하고 찬양을 드리는 양식은 역동적으로 거듭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예배의 본질과 원리는 불변하다고 해도 예배의 양식은 분명히 역사적 상황과 교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의 형식적 원리를 어떻게 구현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단지 한 시대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항구적인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면, 한국교회는 교단의 차이를 불문하고 하나의 통일된 그리고 확고한 예배모범을 따르지 않고 있다. 큰 교단만 하더라도 헌법이 예배의 모범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실제 교회의 예배에서는 그다지 존중되지 않고 있으며 아예 무시되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 경배와 찬양,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 등이 탈현대사회의 새로운 예배의 대안으로 등장하였고 교회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면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상기하고 그 바른 양식을 정립하는 일은 더욱 시급한 사안이 되었다.    교회마다 제각각 필요성에 대한 자각과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러한 새로운 예배양식과 사적인 다양한 고안(考案)을 채택하고 있고 여기에서 예외인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만큼 거의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적 예배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새로운 예배 형태의 기원과 의도 그리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학 전통을 반영하는 예배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적잖은 교회들이 말씀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말씀보다는 신유에, 말씀보다는 축사(귀신)에, 말씀보다는 인간의 기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에, 말씀보다는 코이노니아(교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말씀의 자리는 밀리고 말씀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이후 하나님 면전의식(코람데오)이 약화된 비대면 예배가 실시되면서 흥미를 유발 하고자 필요이상의 순서들이 예배시간을 차지함으로써 말씀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도 본래적 계시의 의미와 정신에서 변질되고 왜곡되어 가고 있다.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Man-Centered-Service)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예배(God-Centered-Worship)로 예배의 방향 회복이 절실하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제 말씀 중심의 예배(Bible-Centered-Worship)로 돌아가야 산다. 그래야 설교자도 살고 교회도 살 수 있는 것이다.  5월 31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한국교회에 진정한 예배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칼빈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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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5-28
  • 온라인 성경 교육이 중요해졌다
      (사)한국미디어선교회는 38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미디어 선교의 산증인이다. 한경직 목사님이 본 선교회의 초대 총재였으며, 한기원 목사님이 초대 회장이셨다. 비디오선교회는 경부고속터미널에 복음TV 33대를 설치하여 비디오를 상영하며 선교를 시작했으며, 고속버스에도 성경공부 비디오를 상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비디오로 선교하였으나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으로 더 나아가 유튜브로 그리고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앱을 통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 코로나19가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모이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각종 스포츠 경기, 문화행사들은 물론 예배를 위한 교회의 모임들도 자제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독교는 모이기를 힘쓰는 종교인데 교회에서의 모임이 적어지게 되니 교인 사이의 친교와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교육도 위축되고 있다.   비대면 사회로 진입하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요즈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활동들은 위축되지 않아야 하며 성도 간의 교제도 활성화되는 것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온라인을 통한 스마트 커뮤니티 형성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직접 대면하여 만나지는 못하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넓혀 나가자는 생각이다.   기실 오늘날 비대면 사회로 들어가며 교회에서의 모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을 통한 예배나 모임이 대안이 되기도 했다. 물론 코로나19가 약화되면서 대면하여 하는 행사들과 일들이 풀리기 시작하고 있으나, 우리는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온라인상에서의 친교의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교회에서의 대면 모임을 점점 늘려나감과 동시, 새롭게 발견한 비대면의 모임과 친교를 온라인상에서 확산해나갈 필요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나라는 점점 비대면 사회로 진화되고 있다. 독거노인, 싱글족, 혼밥족 등 1인 가구들이 우리 사회의 30%를 점하고 있으며 이 추세는 점점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혼자 생활하는 시간들이 많아짐으로 인한 외로움과 적적함이 우리 사회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런 고독이 만연한 시대에 사회적 거리는 멀어지고 있지만 정서적 거리는 가까워지는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으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을 통해 친숙함을 만드는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서로 간의 만남을 통해 더 나은 교회교육의 토양을 만듦과 동시, 만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교육과 성경공부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의 대면 교육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인바, 이런 온라인이나 스마트폰을 통한 교육은 하나의 보완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한국미디어선교회는 보유하고 있는 200편이 넘는 동영상 성경공부 강좌들을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즈음하여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모임이 줄어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적어지게 된 마당에서 온라인으로 대안적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 강좌는 유튜브를 열어 ‘한국미디어선교회’를 검색한 다음 ‘구독’을 누르면 들어갈 수 있는데 이를 통한 개인의 영성훈련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이런 비대면의 활동들이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에 교회도 대면하여 만나 활동하는 일을 강조함과 동시 비대면의 공간들도 넓혀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한미선 바이블아카데미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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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5-15
  • 코로나19의 도전과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
       기독교신문 등 교계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온라인교인’이 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없으니 유투브 방송 같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주로 대형교회의 유명 목회자에게 몰린다고 한다. ‘가나안교인’에 이어 이제는 온라인교인이 어떤 트렌드로 자리를 잡는 것 같다. 트렌드는 한 번 형성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가나인교인’이 처음에는 작은 현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파되고 확산돼 하나의 트렌드를 이뤘듯이 코로나사태로 인한 온라인교인 증가는 일시적 현상은 아닌 듯 싶다.  코로나19 사태는 교회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를 변화시키고 있다.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교사의 수업을 듣는 ‘당연한’ 풍경은 위험한 것이 돼버렸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해오던 교육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일하는 방식도 변화될 전망이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일하는 방식에서 재택근무로 방식이 바뀌고 있다. 이러한 ‘비대면 방식’이 앞으로 인류의 보편적 생활방식이 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전망도 나오고 있다.    코로나19가 앞으로 일상화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예측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한 번 유행했다가 사라졌던 과거의 메르스나 사스 같은 바이러스와 코로나19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세계의 유수한 전문가들은 올 가을이나 겨울에 코로나가 다시 유행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떤 전문가는 독감처럼 계절성 유행 질병이 될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코로나는 한국교회에 이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가장 친밀한 방식의 예배를 드렸다.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했고, 예배 후에는 함께 식사를 했다. 함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신앙고백이자 교회 예전의 본질적 부분이었다. 또 목회자들은 성도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특히 한국교회는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통성기도와 열정적인 찬양은 그 동안 한국교회의 자랑거리이자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이러한 예배방식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몇 주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고, 공동식사는 사라졌으며, 친밀감의 표시였던 악수인사도 기피됐다. 한 곳에 모여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통성기도 역시 극도로 자제됐다. 만일 전문가들의 경고처럼 코로나19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감기처럼 계절마다 찾아온다면 교회는 이 새로운 도전에 합당한 대응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교회사가 보여주는 교회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교회사를 약간만 훑어봐도 교회가 세상의 도전 속에서 신앙과 예배를 지키기 위해 어떤 대응을 했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로마시대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카타콤, 곧 지하 동굴에서 예배했다. 지상에서는 로마의 박해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타콤 예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큰 소리로 찬송하고 기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다 잡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끝났을 때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고, 거기에 맞는 존재방식을 세웠다.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방법이나 방식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방식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코로나19가 가지고 온 충격과 도전에 효과적인 대응을 해야만 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합당한 방식들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사태로 한국교회는 소모임과 온라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큰 모임과 오프라인을 무시하거나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모두가 한 곳에 함께 모여 큰 소리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자랑이자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전통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전통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소모임과 온라인에도 많은 연구와 투자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방법은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모임과 온라인은 코로나 이후 교회의 존재방식일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예장 합동측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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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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