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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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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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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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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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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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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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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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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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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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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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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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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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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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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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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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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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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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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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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과 교회
- 서울의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일찍 피었다는 꽃소식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봄이 빨리 우리 곁에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춘래불사춘’이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욕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욕을 하고 싸잡아 비난을 해도 교회는 묵묵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코로나 펜데믹의 가장 큰 희생자가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2021년 부활절을 맞았다. 화창한 봄과 더불어 찾아온 부활절이다. 하지만 교회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기독교 최대의 축일인 부활절을 앞두고 냉냉하기만 하다. 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교회에 대한 불신과 비난의 소리가 드높아도 숨을 죽이고 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꺼내면, 세상 사람들이 온통 달아오른다.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단순히 코로나 때문일까?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때문일까? 아니면, 교회에 대한 매스컴의 부정적 보도 때문일까? 혹은 일부 정치인들의 반기독교적인 정서 때문일까? 물론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찾을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불신을 조장하는 여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이같은 의혹들은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을 통하여 코로나 이후의 교회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의하며, 다양한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의 공공성’의 이슈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대한민국 교회가 사회적 위상과 영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과연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직시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심각한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공성은 “교회가 진정으로 섬김의 공동체가 되느냐?” 라는 물음과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물음은 새로운 물음이 아니다. 이미 2천년전 초대교회부터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이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한 삶의 충격과 새로운 변화의 도전이 되었다. 곧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공동체’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공공성이 절실한 이 때, 교회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져야 한다. 과연 교회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져도 교회는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전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종교적 표상과 기복의 도구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금 십자가, 은 십자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를 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를 져야 하며, 섬김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 교회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께서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부활의 능력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나아가라.” /동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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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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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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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란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감격하여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곡조 있는 성도의 고백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으로 부터 40여 년전 한국교회는 합동찬송가와 새찬송가, 개편찬송가란 이름으로 여러 찬송가가 혼재되어 연합집회를 비롯한 초교파 모임이 있을 때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1981년 4월 9일 한국찬송가위원회(통합, 기감, 기성, 기침, 기장, 고신)와 새찬송가위원회(합동, 예감, 루터)가 교계의 뜻을 따라 한국찬송가공회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의 통일찬송가를 제작 보급하게 되었다. 통일찬송가를 사용한지 23년이 지나고 시대의 변화와 교계의 요망과 한국인의 창작찬송 필요성에 따라 새 찬송가 발행을 추진해 오던 중 2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400여회의 회의와 토론회를 거치고 해외에서 3차례(뉴욕, LA, 토론토)의 공청회를 거쳐 통일찬송가 중에서 481곡 외국 찬송 중에서 53곡 창작 한국찬송가(공모 곡 포함) 1만여 곡 중에서 엄중 심사한 후 111곡을 선정하고 645곡의 21세기찬송가를 발행하여 2006년 9월 30일에 백주년기념관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리고 오늘 까지 초교파적으로 통일된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찬송가공회는 2006년 12월 4일에 일반찬송가를 2007년 9월 10일에는 해설찬송가를 2008년 2월 5일에는 한영찬송가를 한국찬송가공회 명의로 저작권등록을 마쳤다. 그 후 한국찬송가공회는 교계의 요구와 원활한 사업 추진을 꿈꾸며 재단법인을 설립키 위해 노력해 오던 중 충청남도에서 재)한국찬송가공회를 설립하였어나 재)한국찬송가공회 설립에 관한 문제와 출판권 문제,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소송을 접하면서 7~8년 동안 막대한 소송비용과 이해 충돌로 인해 3개 교단에서 이사 파송을 중단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바라는 교계의 간절한 소망과 이해 당사자들이 한 마음 되어 상호 양보하는 차원에서 모든 재판을 합의로 종결(2016년 2월 5일)하고 재)한국찬송가공회(공동 이사장 서정배, 강무영)와 5개 교단대표(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전용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유동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채영남,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 박무용,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최부옥)와 비공회 대표들이 프레스쎈타에서 만나 (2016년 2월 11일) 많은 교계 언론사와 기자들 앞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종식하고 재)한국찬송가공회는 출판계약 당사자인 기독교서회와 예장출판사와의 계약을 존속하며 성서원,아가페,생명의 말씀사,두란노등 4개사와는 반제출판을 하도록 하고 이해 당사자들의 일보양보와 상호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정신으로 합의되었음을 확인하고 각 교단도 재)한국찬송가공회가 한국교계에 연합과 일치의 본이 되는 연합 가관이 되도록 함께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었던 과정을 지나 오늘에 이른 재)한국찬송가공회는 교단의 이해를 넘어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넓고 큰마음으로 하나 된 찬송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많은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기쁨이 충만한 찬송을 부르며 더 발전된 찬송가 제작과 보급으로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이바지 하는 기관이 되길 간절히 소원해 본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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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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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귀의하는 것
- “불교에 귀의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잘 안쓴다. 그 대신 “예수 믿는다”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왜 그럴까? 예수 믿는다는 말이 더 좋을까? 아니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표현이 더 좋을까? 예수 믿는다는 뜻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찬동하고 신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귀의라는 말은 무엇으로 돌아가 몸을 의탁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종교와 관련될 때는 종교적 절대자나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여 삶을 거기에 기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을 강조한 것이고, 귀의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 그의 삶이 누구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특별한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간다는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신자는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신념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믿는 것이야말로 귀의하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귀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의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가슴이나 머리로, 혹은 손발 중 하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빗나간 열정주의자나, 이성주의자나 혹은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믿는 바에, 사람이 되는 바, 사는 바를 일치시키는 데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삼위일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삼위일체를 상기해내고 관조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데 자기 전체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15.20.39)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으로 그분께 귀의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연 만물을 선대하여 그것들이 쉼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 대한 삶에 귀의가 없는 예수께 대한 믿음이 과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셨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분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심리적 집중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사랑을 바쳐 그분의 뜻에 귀의한 삶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까워 뒤로 빼돌려 감추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영혼까지 아버지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나타났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기독교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호들갑 떨진 말자. 비난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자.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구차히 변명하지도 말자. 예수는 믿는다고 떠들면서 삶으로 귀의하지는 않았던 우리의 위선을 돌아보자.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피를 토하며 고백했던 그 고백을 다시 드리자. “저의 잘못, 저의 크나큰 잘못 때문이옵나이다”(Mea culpa, maxima culpa).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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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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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귀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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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큰 꿈을 꾸라
-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살아계시고 과거에 역사하셨고 미래에도 역사하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 현재에도 일하시고 역사하신다. 대한민국은 이스라엘처럼 선택된 나라임이 복음 역사 선교대국으로 증명이 된다. 130여년전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선교씨앗이 오늘날 교회를 이루고 국가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대현 교회의 부흥운동은 회개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19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1973년 빌리그레함 대형집회로 선교 역사가 더욱 확장되어 오늘날 5만 교회에 이르렀다. 전 세계에서 선교대국으로 미국 다음으로 활동하는 나라가 되었다. 따라서 교회 성장과 정비례로 6·25 폐허 후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한 조국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 역사요 신적 계획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교회 성장은 예배당 건축과 정비례한 듯 전국에서 성전건축에 치중하여 십자가 종탑은 많으나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크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훈련, 기도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 아픔인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영상으로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이러스로 인하여 이단의 실체가 드러나고 교회들의 존재방식과 의식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교회를 향하신 사랑의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그 순수함을 다시 찾아 재도약해야 한다. 둘째, 비대면 예배로 코이노니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교인 사랑이 식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대교회의 성도간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영성 강화에 힘써야 한다. 말씀, 기도, 찬양의 개인 생활의 영성화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한 부흥회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넷째, 이단분별 교육과 척결에 힘써야 한다. 이단의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찾아 알리고 단호히 배격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다섯째, 목회자의 재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학교의 난립으로 목사 안수를 남발하여 자격미달 목회자 문제가 심각하며 이로 인해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 때문이다. 여섯째, 새벽기도로 영성강화에 힘써야 한다. 예수님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주기도문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고 최후의 겟세마네 피땀기도 본받아 기도생활로 영적 불꽃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일곱째, 희망을 바라고 희망을 심어야 한다. 코로나로 실망하고 좌절하는 마음들을 새롭게 희망의 꿈을 꾸도록 메시지를 전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혼구원의 방주요 든든한 성인 교회는 영성강화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다른 염려는 버리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십자가 보혈의 사랑으로 세상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할 것이다. 교회숫자, 건물의 외적 모습보다 내적 영성 강화와 종말 시대의 참된 바른 신앙 확립을 위해 온 마음의 열정을 쏟아야 할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어두운 이 터널을 지나면 영광의 빛이 찬란히 빛나리라 믿는다. /전국호남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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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큰 꿈을 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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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목사 정론
- “불교에 귀의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잘 안쓴다. 그 대신 “예수 믿는다”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왜 그럴까? 예수 믿는다는 말이 더 좋을까? 아니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표현이 더 좋을까? 예수 믿는다는 뜻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찬동하고 신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귀의라는 말은 무엇으로 돌아가 몸을 의탁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종교와 관련될 때는 종교적 절대자나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여 삶을 거기에 기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을 강조한 것이고, 귀의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 그의 삶이 누구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특별한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간다는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신자는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신념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믿는 것이야말로 귀의하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귀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의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가슴이나 머리로, 혹은 손발 중 하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빗나간 열정주의자나, 이성주의자나 혹은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믿는 바에, 사람이 되는 바, 사는 바를 일치시키는 데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삼위일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삼위일체를 상기해내고 관조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데 자기 전체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15.20.39)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으로 그분께 귀의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연 만물을 선대하여 그것들이 쉼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 대한 삶에 귀의가 없는 예수께 대한 믿음이 과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셨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분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심리적 집중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사랑을 바쳐 그분의 뜻에 귀의한 삶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까워 뒤로 빼돌려 감추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영혼까지 아버지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나타났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기독교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호들갑 떨진 말자. 비난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자.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구차히 변명하지도 말자. 예수는 믿는다고 떠들면서 삶으로 귀의하지는 않았던 우리의 위선을 돌아보자.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피를 토하며 고백했던 그 고백을 다시 드리자. “저의 잘못, 저의 크나큰 잘못 때문이옵나이다”(Mea culpa, maxima culpa). /열린교회 담임목사. 총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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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목사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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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한국교회의 미래
- 올해는 102주년 3.1독립만세 기념해이다. 3.1운동은 단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민족적 저항의 날만이 아니다. 이 독립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 국민들의 저항 정신이 한데로 모아져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생겨나게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창립하게된 것이다. 황제가 중심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 창립으로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 정신이 계승되어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자 대한민국이 1948년 새로운 국가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은 일제 식민지로부터 나라뺏긴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가동시킨 동력을 제공했다. 1910년 당시의 군국주의 일본에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무위원들이 일본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후 형식적으로 남은 국가의 권력까지 일본에 문서적으로 넘겼다. 5백년 지속된 한 나라가 한일한방 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국가의 옥쇄를 넘긴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다하고, 일본이 개화로 군사대국이 된 것도 파악하지 못한채 19세기의 서구 열강의 식민지주의에 아무런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러한 19세기 말의 식민주의 시대에 대한제국의 황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관리들은 탐관오리로 가난한 서민들을 착취하고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군대도 없었고, 경제력도 없었다. 이때 서구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 민초들의 보호자요, 선교사 저택은 민초들의 도피처였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일대를 손아귀에 넣었고,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하고 10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 일제로부터 각종 억압과 천대를 받았다. 조선의 전통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무력하여 일본 식민지 정책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갖지 못하게 할 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 의하여 평등하며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시켜주었다.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들고 와서 민초들의 상담자가 되어 신문물인 의료와 교육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 앞에 평등사상과 자유와 독립사상을 불어 넣어주었고 교회를 세워 지도자들을 양육했다. 그리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바로 독립을 되찾아야한다는 독립정신을 점화시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국가와 민족의식이 깨어있는 민족임을 입증했다. 양반, 상놈, 천대받는 기생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망국이 다 나의 책임이라고 고백한 민족적 고해성사였다. 3.1절은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이 없어진 데서 살아난 날이었다. 국가의 주권이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3.1운동은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모세와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의 신앙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이 애국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정교분리를 내세운 선교사들 모르게 독립운동을 모의하게 되었다. 교회의 전국적 조직은 당시 집회결사의 자유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유일한 전국적 연락망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기독교는 약 20만명으로 전국민의 약1.5%에 불과했으나 2천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박해와 피해를 입었다. 그 대가로 기독교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제일의 종교가 된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로 인하여 지구촌과 우리사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란 3.1정신을 계승하여 방역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코로나 퇴치에 앞장 선 종교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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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한국교회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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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직 목회, 일탈인가? 희망인가?
- 코로나19는 1년이 넘도록 기세를 떨치며 세간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대면예배를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였고 대부분의 소모임들이 중단되면서 교회는 활력을 잃고 있다. 지금으로썬 코로나19가 지나가도 예전으로 다시 회복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심방과 봉사, 설교와 성경공부, 기도회와 철야예배, 장례 및 결혼식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기존 교회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 이제 교회의 기존 시스템으로 미래를 견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목회적 케어나 상담도 점점 빛을 잃고 있으며 전문가들에게 전이되고 있다.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 차원의 새로운 선교 전략이 요청되지만 녹록치 않다. 코로나19 이후 중대형교회에 비하여 소형교회와 미자립교회는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며 목회론도 재정립해야한다. ‘이중직 목회’란 목회를 직업으로 분류한데서 파생한 말이다. 목회 외에 다른 직업을 더 가지면 이중직이 된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성서적이며 기독교전통적인 목회다. 전통적인 직업개념이 몰락하고 다중직, 다중역활 사회로 변화하는 것에 발맞추어 ‘이중직 목회’를 시대와 소통하는 선교, 목회적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실재 이중직 목회는 협소하게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중직 목회를 반대해 온 기존의 교회 구조는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가질 경우 기존 목회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미자립교회 목회자 생계 문제와 연동하여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다양성의 문제이고 선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할 과제이다. 이중직 목회란 말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목회를 광의의 의미로 담으면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을 목회로 보기도 한다. 지금 이중직이란 잣대로 보면 실재 감리회 초기 선교사는 모두 이중직이었다. 선교사들은 의사이며 목회자로 혹은 복지사와 사회선교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사회를 선도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의사였고 목회자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도 목회자이며 교육자였다. 지금 목회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이들은 미자립교회 목회자만이 아니다. 이중직 불가를 장정에 명시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이중직은 단순 잣대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코로나19 정국에서 이중직인 목회자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교단보다도 오히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중직 목회에 속한 직업군도 참 다양하다. 카페 운영자, 도서관 사서, 목수, 교회 리모델링 사업 지원, 대리 운전, 편의점 알바, 농사꾼도 있다. 택배기사, 건설 노동자나 청소부로 일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시간 강사, 사회선교사 등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식으로 선교 사역에 참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자립적 기반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19 정국에서 교회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신뢰도는 낮아졌고 교회에 대한 호감도 크게 실추됐다. 결국 교회는 미래 대안에서 밀려나고 있다. 한국 초대교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 초대교회는 주로 의료선교사와 학교 교육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지었고 오히려 교회가 부차적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목회가 등한시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영성적 토대가 되었고 깨우침을 얻는 교육의 장이었으며 기도의 산실이었고 사귐의 장이었다. 목회자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목회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를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목회를 교회 안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행하는 모든 일도 목회이다. 그러니 목회자의 일거수가 다 목회라는 새로운 목회관이 필요하다. 교회도 이제 교회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선교적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야 할 곳은 교회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다. 이중직 목회는 일탈이 아니고 대안이며 희망이다. /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전국총무·가재울녹색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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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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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직 목회, 일탈인가?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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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정론-4
- 전 헌법재판관 안창호 장로 주체사상은 김일성 일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상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론에서 나타난다. 북한이라는 사회적 생명체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은 뇌수(뇌)이고, 일반 주민은 수족이다. 뇌수인 김일성 일가의 명령에, 수족인 일반 주민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이런 주체사상에 대해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광장이나 길거리 등 공공의 장소에서, 학교에서 비판할 수 없다. 지금도 백두칭송위원회가 광화문 광장에서 ‘김정은 환영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지면서, 김정은을 위인으로 칭하고 찬양했음에도 어떤 제재가 없다. 김정은은 고모부와 이복형을 살해하고, 그의 독재체재를 위하여 2,700만 북한 동포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이다. 또 최근에는 물에 빠져 구조를 요청하던 대한민국 공무원을 죽이고 그 시체를 불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독재자로 표현하거나 주체사상의 모순을 지적하면 차별행위로 제재될 수 있다. 밝은 대낮에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비판할 수 없고, 찬양만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등 각종 학교에서 전체주의와 같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사상 등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제한되고, 성적지향 등의 보건·의료적 유해성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 통제된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 특히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와 학생들이 건전하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인격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고, 전체주의 세계관과 성적지향 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진리와 진실이 왜곡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훼손되며, 공공의 가치와 공동선이 침해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질서를 훼손하고, 공화적 가치를 지향하는 윤리를 해체하며, 도덕적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또, 공산주의자 그람시의 바람대로 가정, 교회 및 국가(문화) 공동체의 변질과 해체의 원인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긴 행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주역 안토니오 그람시는 ‘왜 이탈리아에서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를 지지하는가?’,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헤게모니에서 찾는다. 그는 ‘지배계급은 힘의 지배와 함께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지배를 유지한다. 지배계급은 헤게모니, 즉 문화적·도덕적·이데올로기적 지배를 통해,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본주의사회는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교·언론·종교를 통해 시민사회와 국가 등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토대로부터 생기는 압력을 통제하고 권력의 원천인 사회질서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그람시는 “문명세계는 무려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로 철저히 물들었다. 그러므로 유대-기독교 가치에 바탕을 둔 나라는 모두 그런 뿌리들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뒤집어질 수가 없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권력은 잘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손에 굴러 들어오게 될 것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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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정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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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시대에 대한 대응과 전략
- 2020년을 보내고 2021년 새해를 맞이하는 예배는 코로나19 감염병 거리두기 2.5단계 방역지침에 따라 방송 송출에 필요한 예배 위원 20명 미만의 인원으로 제한되어 하나님께 드려졌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며,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지난 세월 드려졌던 설렘으로 다가오는 희망의 축제의 예배보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해결되지 못한 큰 숙제를 안은 채 예배가 드려졌다. 앞으로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 시대 대비를 위해서 목회자는 교회의 목회 사역의 방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며 설정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한 달 한 달 버티기도 힘든 상황 속에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양 사역의 방향성은 어느 수준 어느 단계까지 진행하여야 하며, 웨슬리 부흥 운동 이후 교회의 노멀로 표준화되었던 주일찬양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소그룹제자훈련, 부흥회 등은 새로운 뉴노멀 비대면 혹은 소수 인원제한의 원칙이라는 작지만, 치명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 이후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것은 21세기 극도로 발전해 가고 있는 포스트모던과 세속화의 물결을 따라가는 진보·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성이다. 일본의 ‘신인류’ 혹은 ‘신진루이’라고 호칭되는 일본 젊은이들의 세속문화는 머리 염색, 문신, 계속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한국의 대중문화와 교회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은 이제 기독교 국가라는 과거의 명성에서 극도의 인본주의적 세속화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성경 읽기와 공공 기도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금지되었고, 변호사 사무실에 걸려진 십계명 등은 이웃 종교인들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코로나19 이후 더욱 강해져 가는 세속화와 자유주의 물결로 인하여 교계는 더욱 어려움에 처해가고 있다. 교계의 어려움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일부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중심’이라는 기본 신앙을 21세기 세속화의 시대에 배타적이고 아집에 가득차 자기 욕심만 부리는 이기주의의 온상처럼 오해하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간과한 사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진리의 유일성이다. 다양한 가치 체계가 공존하는 사회를 이상적 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이 관용적이지 못하다고 이야기한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중차대함에 아무런 악영향이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로 이를수록 구원을 향한 길이 좁아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코로나19 이후 극도로 강화된 포스트모던 세속화시대에 적합한 대응전략을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세속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근대 형이상학적 교리나 형식적인 규범 그리고 전통적인 예전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근대 후기에 조성되고 있는 일반 신자들의 현실적인 삶과 필요에 기독교의 본질적 영성인 ‘오직 예수의 영성’을 제공함으로써, 일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 영성’은 기독교의 본질인 ‘십자가 자기 죽음의 영성’이다. 이 본질적 영성을 한국 기독교는 모든 교회와 기관 그리고 예배와 교육, 선교와 봉사 영역에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한국교회가 ‘오직 예수 영성’을 일상에서 실천하지 아니하고 기존의 방식대로 고등 종교화하여 교리화하고 박제화 시켜버린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족하여” 세속화 시대에 매몰되어, 결국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성 부흥사회 대표회장, 주님앞에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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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시대에 대한 대응과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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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나?
- 지형은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부총회장,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교회가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독교라는 현상에서 가장 구체적인 현장은 어쨌든 제도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사역하는 가시적인 교회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처럼 제도권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 바벨론으로 여겨지면 거기에서 탈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과격한 형태의 개혁 운동이 이런 유형입니다. 남보다 올곧고 강직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제도권 교회에 대하여 이미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계속해서 지나온 시대처럼 걸어간다면 앞으로 십여 년 후에 결정적인 파국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사회 현장의 한국 교회를 어떻게든 갱신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삶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한국 교회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적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윤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21세기 오분의 일을 지나는 이 시대의 한국 교회 현장은 짙은 안개 속에 있습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그랬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명백해졌습니다. 2007년의 평양대부흥 100주년, 2017년의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교회는 이 두 번의 기회도 놓쳤습니다. 한국 교회가 걸어갈 큰 방향과 구체적인 행보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통합된 의견이 없습니다. 제각각입니다. 이념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심하게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거의 고스란히 교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 그리고 대선이 이어지는 2021년과 2022년에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이 상황을 풀어가는 방법 또는 길이 무엇입니까? 드러난 문제점들을 개별적으로 풀어가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의 병이 깊고 어떤 영역에서는 타락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본질에 근거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생사를 걸고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짚는 것이 긴요합니다. 방향과 행보와는 다르게 문제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일치합니다. 삶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일상과 인격에서 나타나는 삶의 괴리가 지나치게 큽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적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윤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사회적 신뢰의 상실이 참으로 뼈아픈 현실입니다.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목사의 책임이요 다음으로는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사회적 신뢰’ 상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입니다. 이 현상을 만들어낸 원인은 ‘신앙적 신뢰’ 상실입니다. 사회적 신뢰라는 것이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인데 신앙적 신뢰는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윤리는 성경 말씀에 토대를 둔 신앙적 윤리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교회는 기독교적인 사회 윤리를 구성해가며 삶으로 실천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린 것은 그 이전에 신앙적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신앙적 신뢰의 상실’입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 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급하다면 당장 나타나는 증세를 가라앉혀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신앙적 신뢰의 상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구약 예언자들의 외침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직한 마음으로 다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관건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형태든 신앙의 인식과 실천에서 근본적인 지점이 여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신체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하는데 계시의 중심이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의 인격과 삶이 특별계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는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의 기록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서로 안에 계시며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은 계시와 관련하여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복음이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러나 신앙의 인식 과정을 엄밀하게 따지면 오늘날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이천 년의 시공간이 있습니다. 이 간격을 넘어야 하는데, 방법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이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복음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니 그렇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관한 기록 특히 마가복음에서 이 점이 아주 명백합니다. 마가복음 8장, 9장, 10장에 기록된 세 번의 수난 예고에서 복음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것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복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기록한 8장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표현으로써 자신과 복음을 동일시하십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본문인 9장 37절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복음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합니다. 마지막 수난 예고인 10장 29절에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표현이 결정적으로 강조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개역개정판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동일하게 번역한 8장 35절과 10장 29절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10장이 8장보다 복음과 예수님을 더 확실하게 동격으로 표현합니다. 8장 35절을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옮긴다면 10장 29절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판보다 개역성경이 낫습니다. 개역성경은 8장 35절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10장 29절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및’은 ‘그리고’, ‘또’의 뜻인데 같은 종류의 성분을 연결합니다. 표준새번역도 두 곳이 다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영어성경(KJV, NIV)이나 독일어성경(루터역, 취리히역)은 두 곳을 더 강조된 10장의 표현으로 번역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합시다.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신앙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 윤리로 보아도 삶이 엉망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한 현실이 뼈아픈데 이는 신앙적 신뢰를 상실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장인 신앙적 신뢰를 회복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복음을 듣고 살면서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기록한 것이 66권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적으로는 66권 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에 기독교의 정체성이 걸려 있습니다. “교회가 길을 잃은 근본 원인은 말씀에서 멀어진 것, ‘말씀과 삶의 괴리’입니다” 한국 교회의 현상적인 문제는 삶이 망가진 것입니다. 교회가 길을 잃은 근본 원인은 말씀에서 멀어진 것, ‘말씀과 삶의 괴리’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큰 방향과 구체적인 행보는 66권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서신학이 강화된다는 얘기와 다릅니다. 성서신학을 비롯한 신학의 기능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의 일부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단순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성경이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깊이 깨달아 거기에 삶을 던져 순명(殉命)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 기록된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가장 치열하게 씨름한 때가 종교개혁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타락은 끝을 몰랐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기독교의 본질을 물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말씀입니다. 참된 교회는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작동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현장이 일차적으로 예배의 시공간이며 거기에 뗄 수 없이 연결된 것이 예배 후에 바로 이어지는 일상의 예배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삶이 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한국 교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사를 걸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66권 성경의 내용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깊게 공부하고 연구하며 동시에 더 없이 깊은 묵상과 기도를 감행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세계를 살피며 깨달은 말씀을 삶으로 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십여 년 가다 보면 갈수록 길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보수냐 진보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삶과 사회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일을 어떤 사람은 보수라고도 부르고 어떤 사람은 진보라고도 부릅니다. 교회가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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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