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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교회, 하수구가 되다
      민대홍 목사   ‘고난’을 주제로 한국 역사와 자신의 일생을 성찰한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서이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한국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설명하며, 구약의 히브리 민족사와 우리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사사기 시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뉘고 결국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고난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함석헌은 1901년 평안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겪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당한 설움과 고통은 개인 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그 시대를 함께 산 모든 한국 사람들의 공통 분모였다. 그 시기에 나온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을 위로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조선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하수구’로 보았다. 하수구가 있어야 일상의 삶이 청결해지듯, 우리가 강력하고 혼탁한 폭력을 받아내는 하수구가 됨으로서 이웃 민족들의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이여 이 하수구(조선)에 감사하라. 그대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궁전에 놀게 하는 것은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자녀를 특별한 운명에서 난 것처럼 자존심 속에 기르게 하는 것이 이 하수가 아닌가? 그대의 눈에 보기 싫은 것은 언제나 달게 받아 치워주는 것이 이 하수구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의 그 살찐 육체와 그 문명한 머리를 길러주는 곡식과 채소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또한 이 하수가 아닌가? 아, 너 위대한 세계사의 하수구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에서.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성서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본 신약시대 신앙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자유와 구원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은 이러한 예수가 하수구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사순절, 그 끝에 고난주간이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온당히 받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죄인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식민통치 시기.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종교마저 자유가 아닌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졌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과 로마 법정에서의 사형판결, 예수는 뭇 백성들의 하수구가 되어 그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졌다. 예수의 제자들도, 제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바통은 우리들에게 넘겨졌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짊어지는 하수구가 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뼈를 꺾은 고난을 지낸 후 부활하신 것처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서로교회 목사, 서로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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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8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실천
     20세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교단, 교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도 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교회는 급격한 쇠퇴와 정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어 왔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는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변화된 신학을 극복하고 개혁주의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회개용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실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이시면서도 한 분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다른 인격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바로 하나님을 닮는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종교개혁교회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에 맞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성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님으로써 루터파, 칼빈파, 츠빙글리파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찬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고 있던 개혁파 회중들이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루터파의 공재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받아들이는 개혁파 회중들에게 루터파 교회의 성찬에 참여해도 된다고 답변했다.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성찬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교리와 같이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성찬론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비본질적 교리의 경우 그러한 교리 차이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은 비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막을 수는 없다. 한 가정의 형제 자매가 서로 다르게 생겼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이 닮아 한 가족임을 알 수 있듯이, 형제 간의 미세한 차이가 가족됨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의 상태에 있다면 교회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지 못할 것이며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대립의 이면에는 십자가와 희생 없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우상화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십자가를 통해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는 부활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고자 한다. 모든 생명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을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2024년 부활절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회복하고 전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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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5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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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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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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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 성서와 생활[11] 그리스도인의 영성-기도의 영성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로 이 땅 위에 세워진 주님의 새로운 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지체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부름 받은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자라게 함으로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된다.골2:12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며 주님의 표현이기에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곧 교회는 주님이 계시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바로 온전히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사역은 무엇일까? 죄사함의 구원선포와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에도 밤새워 기도한 후에 12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눅6:12-13 수시로 사람들을 피해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주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교회가 주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세워져 있다면 바로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곧 기도에 있다는 진리를 세우는 일이다, 부흥과 기사와 헌신과 선교보다 앞서야 하는 일은 기도하는 사역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한 기도가 계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교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성도가 기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교회의 가장 높은 일임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뛰어난 영적인 자녀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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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공회연합서 불어 개정판 출간
      다수 국가 사용하는 불어성경 역본 개정판 2019년 출간 에티오피아에 누에르어 성경·딩카보르어 성경을 기증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대중들이 많이 사용하는 불어 성경 역본의 개정판을 2019년에 출간했다. 전 세계 불어 사용자들이 7천 7백만 명이 넘는 가운데, 새로운 현대 불어 성경인 〈La Bible Nou velle Francais courant〉은 유럽, 캐나다와 아프리카에서 폭넓게 사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구 반대편의 미얀마에서는 성경 번역자 탕 은가이 옴 목사가 자신의 언어인 조친어로 된 첫 성경을 받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았다. 여러 해 집에서부터 번역자 사무실까지 먼 거리를 다니며, 우기에는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는 위험조차 모두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제 생애에 성경을 보았다. 그리고 이는 후손들에게 제가 남겨주는 유산이다” 조친어 성경은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번역, 제작되어 작년 2월 봉헌되었다. 지난해 성경을 봉헌한 90개 언어 중 40개 언어는 새로운 번역과 개정의 출판으로 이루어졌다.   작년 9월 핀란드에서 개최된 북사미어 성경 봉헌 예배에 참석한 에르바 닛티부오피오 총무는 “기쁨의 눈물과 함께 저는 이제 이 새로운 성경을 십대들에게 나눠줄 수 있게 되었다”라고 감격했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이 125년 전에 번역된 북사미어 성경을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직접 보았다. 새로 번역된 성경은 3만 명의 북사미어 사용자들이 보다 쉽게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최초로 북사미어 표준 문장 형식을 정립하였다.   한편 대한성서공회 반포센터(경기도 용인시 소재)에서 ‘함께하는 사랑밭’의 후원으로 남수단과 에티오피아 난민 캠프에 〈누에르어 성경〉 5,100부와 〈딩카 보르어 신약전서〉 2,100부를 보내는 기증식을 가졌다.   2011년 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남수단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있다. 주된 딩카(Dinka)부족과 누에르(Nuer)부족을 비롯하여 64개의 다양한 부족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분리 독립 이후에도 남수단 내전이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아픔으로 고통 받았다. 이들을 위한 물질적, 영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누에르 부족은 남수단과 에티오피아에 거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티오피아 캄벨라 지역의 누에르 부족 난민 캠프에는 약 40만 명의 난민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남수단성서공회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경 보급 사역을 지속하고 있으며, 전해진 성경을 통해 누에르 부족과 딩카 부족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번 기증식에서 예수마을교회의 안혜권 선교목사는 ‘합력하여(롬 8:28)’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안 목사는 “저는 오늘 전 세계 가는 곳마다 성경책이 필요한 곳에 대한성서공회와 함께 손을 잡고 성경 보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구나(생각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여러분임을 믿고, 이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인줄로 믿고, 이 사건을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면서 더 큰 사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드실 줄로 믿는다”라고 전했다.
    • 오피니언
    • 정론
    2020-04-09
  • 코로나 극복을 위한 부활절의 기도
      교인이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배가 가장 우선이라고 대답 할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도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이지만 이것은 대상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배는 그 대상이 만왕에 왕이시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친히 초청해 주심에 우리가 응답함이라 할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자체 단체장인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교회를 향해 행정명령을 내린 것을 대통령이 지지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종교에 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함과 아울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언론에서도 최근 담임목사가 구속된 특정교회의 예배모습을 계속해서 며칠씩 방영하여 마치 이 나라 모든 교회가 방역지침을 거부하고 지역주민들을 불안케 하는 것처럼 당국과 언론이 함께 교회를 폄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편향된 조치라 생각한다.    3,500여 명의 선교사를 강제 추방하고 3,000여 교회에 십자가를 부수고 파괴한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또 사이비·이단 집단인 신천지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코로나를 전파·확산시켜 많은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성경 역대하 20:9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 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셨나이다”고 말씀했고,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음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말씀했다.   무슨 일이라도 우리에게 임하면 주님이 계신 성전에서 주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하면 주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응답하신다고 미리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든 교인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 자신의 죄, 이단을 물리치지 못한 죄, 교회와 교단이 연합과 일치를 하지 못한 죄, 다음세대를 믿음 안에서 잘 양육하지 못한 죄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초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사망의 권세를 주님이 이기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위대한 철학자도, 알렉산더나 시저 같은 권력자도, 화려한 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부자들도 모두 죽었고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만이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소망과 영생의 복을 주셨다.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하여 고난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시는 근원적인 죄는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이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성령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성인과 종교 창시자도 사람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는 동시에 완전히 용서해 준 바가 없고, 자기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땅 가득히 예배가 회복되고, 교인이 교인답게, 교회가 교회되게 거룩해지는 이번 부활절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장로
    • 오피니언
    • 정론
    2020-04-09
  • 한국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성적 타락. 신학 및 신앙의식의 부족, 선거부정과 지도력의 부재, 목회자 생활의 불안정과 양극화, 교회와 성직의 세습 등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면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다. 이는 신앙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물신숭배 등 세상풍조를 따랐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사람의 기호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감리교회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정직한 감리회 지도력을 세우고자 2020년 감독회장 선거를 주목하여 동 선거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강화하여 진정한 기독교회를 세워야 한다. 영성훈련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웨슬리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공감하며 진정한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로 세상을 거룩하게 지어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셋째, 목회자의 생활 안정, 평신도 위상 정립, 제도를 개선 보완하여 합리적이고 정직한 감리교회를 지어가야 한다. 아울러 실력을 갖춰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기후위기로 비상사태를 맞고 있는 지구생태계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신앙을 배우고 환경선교에 동참하는 등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나서야 한다.   다섯째, 감리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학연을 넘어 연대, 세대를 넘어 통합, 성별을 넘어 평등한 감리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공적 교회이다.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감리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나 개혁을 요구할 것이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감리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지도력 부재 15년 동안 감리교도 35만 명이 감리교회를 떠났다. 깨끗한 이미지 갱신과 정직한 지도력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감리회 교인들의 이탈 현상은 급속도로 가속화될 것이다.   시급하게 위기를 돌파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개혁, 영성형성, 선교정책, 목회자 정책 등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차분히 만들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을 세우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감리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아니 정부의 조치가 있기 전에 먼저 예배당 예배를 중단하고 가정예배로 전환하고 새로운 신앙의식을 고민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비기독교인들도 교회를 신뢰하고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부 교회는 집단 감염소가 되었고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각성해야할 때이다. 자존심만 내세워 성심을 다하는 정부와 국민들을 대적할 게 아니다.    교회는 코로나 정국을 지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감리회목회자모임새물결 전국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0-04-08
  • 코로나19의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자
         2020년 사순절은 특별하다. 고난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맞는 사순절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을 전후해서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사이비 종교집단인 신천지가 감염의 진원지가 되면서 다중이 모이는 교회의 예배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고, 예배의 자제를 요청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교회 역시 이 어려운 상황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야 할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등을 중심으로 주중예배 자제와 주일예배를 온라인 가정예배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필자 역시 교단장으로서 총회장 목회서신을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향후 2.3주, 주일예배를 영상예배로 가정에서 드릴 것을 요청하였다. 총회장 목회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요 3;16)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요, 세상을 살리는 생명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에 해를 끼치는 전염 확산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사회 전체의 안녕과 유익을 위해 주일예배를 가정별로 드리는 일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신앙고백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언급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고백이다. 이 고백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성육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당신이 세우신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성육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 하나의 성육신 사건이다. 교회 하나가 세워질 때마다 매번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너를 위해 나를 내어 준’ 희생적 사랑의 결정체이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 그대로다. 예수는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세상의 밥‘으로 오셨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우리를 살리셨다. 코로나 19 현장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들의 모습이다. 지난 2월 25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제목이 “주변엔 ’차출됐다‘ 말하고.. 대구로 달려온 ’백의의 전사들‘” 이다. 실제로는 자원해서 대구로 내려갔으면서도 주변에서 걱정할까봐 차출되었다 말하고 내려간 의료진들의 모습을 기사화한 것이다. 거룩하고 향기롭다. 이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본다.   3월 첫 주 온라인 영상예배를 드리고 나니, CBS 노컷 뉴스에서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한 교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노컷 뉴스 실시간 검색 1위였고, 기사에 댓글이 무려 1,500여개가 달렸다. 댓글보기가 무서웠지만 교회를 향한 원성과 충고, 기대들을 채찍을 맞는 심정으로 보았다. 그 중에 기사제목을 패러디한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예배를 멈추니 예배가 보이네”가 기사 타이틀 인데, 누군가 “예배를 멈추니 예수가 보이네.”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픈 말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교회공동체에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나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 세상은 예배를 멈추라고 소리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원하는 것이다.   사순절이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계절이다. 우리의 기억이 예수의 고난을 슬퍼하는 감상에 그치고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는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코로나 19의 상황은 실로 그러한 상황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순절에, 코로나 19의 상황 한 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기를 원한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절, 사순절이기를 소망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성북교회 담임   ◇성북교회(담임=육순종목사)는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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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3-10
  • 3·1독립운동의 의미와 과제
      지금 한국은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심각한 대결구도로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3·1독립정신에 기초를 둔 국가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한데 국가 기초가 된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주도하고 있었고 거기 민족 대통합과 역량의 대본이 게시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궐기 때에 한국교회는 전인구 16,913,000 중 253,043명으로 1.49%에 겨우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시 인적 물적 피해는 전체의 25% 이상을 교회가 당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주체가 기독교라는 판단때문이었다. 지금은 30%가 교인비율이다. 무슨 일인들 교회가 나서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한국 백지도 두 장을 가지고 한 장에는 3·1독립운동 궐기장소, 다른 한 장에는 교회 소재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두 장을 겹치면 궐기장소와 교회소재지가 꼭 겹친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전국적인 확고한 자발적 민간조직은 기독교회밖에 없었다. 한국교회는 1907년 전국적인 전민죽 단위의 독로회(獨老會)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회는 전민족의 동력을 동원하는 유일한 체제였다. 3·1독립운동 당시 심지어 기생, 술장사, 달구지꾼 등 전국민이 완전 일체 동원되고 있었다. 교회에는 그런 동원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선을 동원할 힘, 의를 동원할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기독교회뿐이다. 교회에게는 집결력이 있다. 총동원력이 있다.   한국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의식이 빛났다. 3·1독립운동 당시 한국기독교회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민감하였다. 당시 세계는 민족 독립 평화 자유의 조류가 도도하였다. 그것을 포착하고 있었다. 1892년 우리가 만든 찬송가에 이미 만민 만국 만왕 과 같은 말들이 줄비하다. 1907년 독로회 창설 때에는 그 회의장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당시 거리에 통고문이 붙어 있었다. 독립운동 기간 동안 연일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요일마다 읽을 성경이 명시되어 있었다. 3·1독립운동은 성경을 기반으로 일어났던 운동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이 정도의 표준 거점위에 서서 하여야 한다.  주님은 천국을 아야기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신다. 무엇이든, 정치든 경제든, 성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야 한다.   한국교회는 근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백정 출신을 한국최초 대학의 교수로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일을 한 것이다. 교회는 근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지도층을 배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교회출신이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주초세가 국가예산의 48%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창녀촌을 곳곳에 국가가 국세로 세운다. 아편은 전매청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정신과 몸을 악으로 해체시키려 하고 있었다. 교회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국가는 도덕성이 있어야한다는 외침이었다.    3·1독립운동의 기록과 증언은 교회에서만 정직하고 그리고 대담하게 하였다. 신문보도는 일본에서조차도 1919.3.7부터 가능했고 계속 통제아래 있었다. 독립만세는 소동 폭동으로 몰고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 총회록에는 <3·1독립운동>이한 글이 나온다. 더구나 각 노회상황보고서에는 궐기 진행상황과 피해 상황자 수자 성함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실록이다.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피해 특히 교회의 피해는 막대하였다. 전국이 황폐하고 눈물과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교회는 삼천리반도금수강산을 찬송으로 외친다. 봉선화 노래를 지어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외친다. 교회는 거대환 민족의 계시록을 울린다. 전국이 하나가 된 이 거대동력은 밖으로 뻗쳐나가는 힘이 막대하였다. 일본 정상급 거물 로 천황과도 가까웠던 도꾸도미 소호가 계속 일본의 진압방법이 야만적이라 공격한다.    3·1독립운동에서 한국을 이끌 거대 동력의 거점이 기독교회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특히 난시에는 민족의 거대 동력동원체제요 예언자요 계시록이란 사실을 증명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앞으로 그럴 것이다.  /백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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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2-26
  •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세운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난 뒤 심한 분열을 겪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쓴 글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고 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장 3절~7절)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볼로나 바울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에게 모두 속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가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면서 화목케 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려고 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때 누가복음 9:54에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고 꾸짖으셨다고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나누고 가르는 것에 대해서 진노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선을 그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안식일을 지키냐 그렇지 않느냐”는 등의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온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선을 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선이 없었다. 세리 마태를 부르셨고, 그가 베푼 만찬에 참여하셨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삭개오의 집에 가셨다. 그리고 나병 환자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율법에는 쓰여져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나병 환자를 안아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에게는 선을 긋고 너는 하나님과 화목의 대상이 되고 너는 하나님과 화목의 대상이 못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일과 믿는 일과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한국 교회는 해야 될 일이 있다.   첫째,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선을 그으면 화목은 없고 정죄만 있을 뿐이다. 너는 우파고 너는 좌파라는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너는 반공주의자고 너는 용공주의자라는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광화문 집회에 나간 자는 보수주의자고 반공주의자고, 반대로 서초동 집회에 나간 자는 진보주의자고 용공주의자라는 선을 긋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느 책에서 기독교 2천 년 역사 속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인과 결탁했을 때 종교는 항상 정치에 이용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는 타락했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대로 19세기에 러시아 정교회가 그 당시 왕권과 결탁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는 타락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자를 지도자로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2-19
  • 위기를 기회로 삼자
      중국 우한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사회가 고통을 받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접촉을 금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한국교회는 다중집회 시설로 감염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어 예배를 드리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난 주일에도 거의 모든 교회에서 악수를 피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개인위생을 강화하여 예방에 앞장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 교인들은 더욱 말씀과 성경공부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 집회나 모임보다는 개인이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교회들이 첨단 IT기술을 활용하면서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교회 내 행정실과 로비, 카페 등 교인들이 머무는 공간에 무선 공유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교회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성경공부와 화상회의 등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특히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와 연계해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전도활동에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각종 스마트기기와 SNS의 발전으로 목회환경도 함께 바뀌고 있다. 오프라인을 통해 이뤄졌던 기존의 전도 패러다임을 넘어서 더욱 스마트한 전도전략이 요청되고 있다.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스마트 전도법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예배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성경과 찬송가를 보는 기독교인들도 많아졌으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말씀 묵상이나 찬양, 기독교 문화 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다양한 크리스천 앱들도 개발되었다. 요즘처럼 모이기 힘든 시기에는 이러한 앱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맞는 예배나 성경공부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보고 들을 수 있어 신앙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함께 모이는 예배가 어려운 만큼 스마트시대에 각자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성경공부는 이러한 어플을 이용하는 것이다. 휴대성이 좋은 스마트폰의 특성을 이용해 직장과 학교 등지에서 적은 시간을 이용해 성경 전체를 공부한다면 매우 유용한 성경공부 도구가 될 것이다.   우리 선교회는 바이블아카데미 앱을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구약 성경 66권에 대한 강해를 수록하여 한국교회에 전파해 왔다. 다른 성경공부 앱들에 비해 시각적으로 발전되고 강의를 듣는 도중 의문점이 생기면 인터넷 검색을 활용할 수 있어 편의성도 극대화 했다.    이단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올바른 성경공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쉽고 전문성 있는 성경공부를 제공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성경 66권 강해 동영상은 다양성과 근접성, 전문성의 장점을 갖는다.     최근 군대에서도 스마트폰이 허용이 되어 연간 7만여 명의 청년들이 군복무 중에도 바이블아카데미 앱을 통한 군 선교가 가능해졌다. 각 교회에서 입대하는 청년들이 군복무를 하며 스마트폰을 통해 성경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면 군 선교사역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사태와 같이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확산으로 모이는 일이 힘들어질 때 스마트 성경 앱은 더욱 가치가 높아진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강의를 7개 국어로 번역하여 2만 7천 명의 해외선교사들이 성경 66권을 언제 어디서든지 접하고 배우며, 선교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 사역은 한국교회가 함께 나서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축을 이겨내고 주님이 명하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스마트’한 대응이 더욱 절실하다.  /한국미디어선교회 이사장·영락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2-12
  •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바람
      지난 2년 7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거대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작년 6월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으로 광화문 구국 모임과 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지난 10월 세 차례 모임을 통하여 해방 이후에 가장 많은 시민들이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 위기를 염려하여 시민적 의사를 표출시켰다. 이런 가운데 진정하게 시민들을 존중하는 지도자라면 집권 후반기를 맞이하여 궤도수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보면 전혀 집권 후반기의 정국운영 구상에서 이러한 전환의 기미기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적 가치를 중시하는 국가의 정체성과 진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문대통령은 취임 후 3년 연속 6·25 기념식 당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6·25 때 북에 희생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인 현충일 기념사에서도 3년간 6·25와 침략 주체인 북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6·25 때 북한 편에서 공을 세운 사람 김원봉을 일제 때 광복군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추켜세웠다. 북한 남침사실은 소련 해체 이후에 드러난 군사기밀 서류에서 이미 드러나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바 있다. 이러한 심각한 민족에 대해 이렇게 심각한 범죄적 전쟁에 관한 대한민국 국가의 대통령의 인식이 이러하니 애국적 양심을 지닌 지식인들이 나라의 안보에 대하여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헌법정신을 유리하는 정권에 대하여 침묵하게 되면 결국 신앙의 자유까지 잃게된 다는 엄중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독일교회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독일 국민들은 1930년대 나치가 등장하여 공산주의자를 척결했을 때, ‘나는 아니다’라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들을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자유노조를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천주교를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나치는 개신교를 척결하고자 했다. 이때 비로소 개신교도들은 이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미 모든 자유가 상실된 상태로 때는 늦은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국민 마음을 빼앗아 가는 현 정권의 국가주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며 기독교 신앙의 기반인 대한민국 헌법,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에 든 대한민국의 정치는 경제 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챙피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집권당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탄력선거제를 요점으로 하는 정치전문가도 이해할 수 없는 당리당략적 선거법과 정권의 입맛에 맞지않는 고위 공직자들을 마음대로 수사하고 처벌하는 공위공직자 수사법을 제1야당과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여 4월 15일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모든 정략을 구사하고 있다. 야당들은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 수호를 위하여 당리당략을 버리고 하나로 뭉쳐서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분열되고 무기력하여 국가가 난파되도록 이끌려가고 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국민들을 향하여 비록 바벨론 국가라 할찌라도 주민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 성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였다. 대한민국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할 고국이요 보금자리다. 한국교회는 우리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독교인들은 신앙양심으로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바르게 이끌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져야 하고 올바른 지도자가 국회의언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절차적으로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위한 한국교회의 소금과 빛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의 진로와 운명을 주관하신다. 한국교회는 민족교회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샬롬나비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0-02-04
  • 일치는 서로의 환대를 통해 드러난다
      혈액순환은 몸을 살게 하고 생명을 유지해 준다. 죽은 자에게는 혈액순환이 멈춘다. 생명력을 상실한 때문이다. 신앙생활로 사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순환하는 혈액이고, 은혜를 갈구하고 누리는 신앙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힘이다. 그렇게 은혜와 신앙은 만난다. 서로 말을 나눈다. 뜻을 교류한다. 서로 섞여 생명을 만든다. 만나고 말하고 교류하고 급기야 생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합하여 기도라 한다.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인 인간은 기도로 만난다. 기도로 서로 묻고 답하고 대화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하나가 되어 선을 이룬다. 이렇게 만나고 교류하고 하나 되어 사는 방식은 “서로가 서로 안에 사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대제사장으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하실 때 주신 말씀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 서로서로 안에 사시기에 그 분 하나님을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 안에 계시고, 우리는 이 삼위의 하나님 안에 산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다. 동시에 우리들 서로가 같은 방식으로 서로 서로 안에 사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적 일치의 모습이다. 서로 서로 안에 살게 엮어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와 세계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려는 때문이고, 우선 기도로 구원을 향한 일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교파로, 지역으로, 교리로, 역사전통으로 다양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때로는 꼴사나운 분열로 아픔을 겪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먼저 함께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일치를 시작해 보자면서 영국 성공회의 폴 왓슨( Paul Wattson) 사제가 들고 나온 것이 “한 옥타브의 교회 일치”(a church unity octave) 프로그람 제안이다. 8개의 음정이 한 옥타브(도~도)를 이루듯이 한 주간 매일같이 합동하여 일치를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옥타브의 출발(“도”)과 마감(“도)을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고 선배인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표본으로 삼자고 했다.    수제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날(1월 18일)을 시작 일로 하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날(1월25일)을 기도 옥타브의 출발과 마감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면 차례의 변화 확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으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세 물줄기인 로마 천주교,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다만 이 기도주간은 세계 각국의 교회들이 순번을 따라 그 해에 함께 간구하고 추구할 일치의 소원과 희망을 주제로 제시하고 정해진 성경본문을 함께 명상하며 기도의 일치를 전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고귀한 운동이다. 금년에는 몰타의 그리스도인들이 제안한 일치기도를 함께 드린다. 기도의 주제와 본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인정을 베풀었다”(사도행전27:18~29:10). 초대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 등장한 선교여행 중에서 일어난 조난과 조난 가운데에서도 외딴 섬에 도달하여 원주민들로부터 환대받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이민 행렬이 던지는 세계의 문제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함께 기도하자는 뜻이다.   환대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미덕이다. 이러한 환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더욱 큰 너그러움을 보여야 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각별한 인정을 보여 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들의 각별한 인정 덕분에,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졌다. 우리 그리스도인 일치는 무엇보다도 우리 서로에 대한 환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와 다른 언어, 문화,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의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도 드러날 것이다.  /경동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1-20
  • 건강한 가족 공동체성의 회복
      설날은 음력으로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날로서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이다. 설날이란 말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는 ‘낮설다’는 말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고, 다음으로는 개시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이 점차 연음화되어 설날로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한편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설날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이런 공동체의 핵심요소로서 부모님의 권위를 중심으로 가족간의 질서 있는 화목을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날은 따뜻한 정과 사랑의 울타리가 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그런 공동체 안에서 이기주의와 탐욕주의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나눔과 배려의 삶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단절과 소외,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용서와 화합, 화목과 결속의 지혜를 배우는 계기가 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설날은 단순히 명절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 설날은 이처럼 우리에게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설날을 맞아 더욱 성숙한 성경적 가족공동체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기독교인의 가정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 조차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풍조 가운데서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육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성경은 가정을 교회에 투사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남편인 그리스도와 아내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장차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연합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남편인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 곧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설날에 그들의 가족들과 더불어 부모님의 집에 함께 모여 먼저 말씀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이 단순히 육적 생명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럼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 생명이 충만한 가정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설 명절을 통해 기독교인의 가정은 가족 상호간 사랑의 섬김 안에 규모 있고 질서 있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의 연합을 이룬 가운데 서로 사랑의 사귐을 가지면서 관계와 질서 속에 존재하듯,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사귐을 사귀면서 서로 관계와 질서를 이루고 있듯,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족들 상호간에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섬김 가운데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는 마치 건강한 몸이 각 지체들 간에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바른 관계와 질서를 유지함으로 왕성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나 가정은 모두 생명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는 그 속에 사랑의 섬김이 있으며 동시에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는 규모 있고 화목한 공동체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권과 행복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낙태, 증오심에 찬 좌우의 분열과 갈등, 무너진 공의와 혼란, 개인주의와 탐욕주의의 만연 가운데 탈북민이나 이주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 등으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는 사회에 설 명절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은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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