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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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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11
  • [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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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04
  • [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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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7
  • [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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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1
  • 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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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14
  • [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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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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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주일은 성경연구와 보급을 위해 매년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절기이다. 1804년 영국에서 성서공회가 처음으로 조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서주일 예배를 드린 것은 1899년이었다. 그 해 5월 성령강림주일에 ‘성서공회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성서주일을 지켰다.   당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총무인 켄뮤어가 처음으로 성서주일을 주창하여, 모금을 통해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1900년 「신약젼셔」가 발간되면서 ‘성서공회주일’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고, 1954년부터는 세계 교회와 함께 ‘성서주일’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오고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성경의 종교’이다.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전승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기록하게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지켜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성경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 중의 으뜸이다. 특히 한국의 성서공회는 지금도 꾸준하게 세계 곳곳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던 나라에서 이제 성경을 세계에 보급하는 자랑스러운 국가가 된 것이다.    성경보급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19세기 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한글성경은 복음전파와 부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남녀노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기록에 보면 선교사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무엇보다 종이인쇄출판의 쇠퇴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스마트기기를 통해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인가?   편리함 때문에 예배 시간에 화면을 사용한다. 찬송과 성경이 화면으로 나오다보니 이제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성경과 찬송을 보지 않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경은 점점 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이런 편리함에 익숙해져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는 이 말씀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성서주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 기간에 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반포되어 읽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쇠퇴기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한국교회에 쇠퇴기가 온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신앙의 편의주의가 쇠락을 앞당긴 것이 아닌가?   대강절과 성서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성경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부터 먼저 회개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 사랑의 길로 다시 나가자. /전 총신대총장. 코메니우스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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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2-08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쉴즈 간호선교사만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바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변함없이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우리는 당시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 개월치의 방세를 줌으로써 그들을 도와야 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회갑연에서 받은 선물을 세브란스 병원 안에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식 급수대 3개를 설치하는데 사용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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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 위기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이슬람과 공산주의와 이단과 동성애는 지구촌 교회를 일시에 허무는 2백 마리의 여우와 같이 하나님의 포도원 담장을 허무는 사탄의 세력이다. 이미 이들의 공격으로 무너진 서구교회는 재건이 불가능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자취를 감춘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그루터기가 되어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을 신속하게 회복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인 일부 목사는 세상과 타협을 하기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장로들이 깨어서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굳게 지켜야 한다.   신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슬람 대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슬람화되면 교회는 더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7대 교회는 다 무너지고 주저앉고 돌무더기만 가득하다. 이것이 이슬람의 실체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원어를 들먹거리면서 이슬람을 샬롬이나 살렘과 같은 평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랍어 동사 아슬라마("복종시키다")의 동명사인 이슬람은 "복종하기"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아랍어 사전)이고, "알라와 그가 준 율법에 복종하는 것"(꾸란어휘사전)이고, "평화와 복종과 순종, 알라가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알라의 가르침과 인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한국이슬람교중앙회)이다. 곧 이슬람은 무함마드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종교이므로. 평화란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복종을 강요하는 이슬람은 무자비한 복종을 모토로 지하드(성전 聖戰)를 자행하는 폭탄테러의 주범이다.   기독교보다 600년 후에 나타난 이슬람은 신구약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은 호전적인 종교이다. 코란이 성경을 들먹거리고 다수 성경인물을 묘사하지만 면밀히 검토하면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이다. 이슬람이 성경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기독교인에게 포교하려고 의도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는 이단이다. 이단은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집요하게 정통교회를 뒤흔들고 나온 사이비 집단이다. 이단은 처음에는 정통교회의 전통에 편승하다가 점차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정통교회와 같은 것 같다가 마지막에 다른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한국교회는 절반 이상이 이단이다. 유라시아와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과 쿠바에 종교의 자유가 없지만, 이미 많은 이단이 활동하면서 공산당에 신물을 느낀 주민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전도도 금지되어 교회가 허물어지고 신앙의 대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에 편향된 영혼이 죽어가고 기독교문화마저 녹슬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생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신학생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자기들이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의 장로이다. 이 점에서 장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며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는 분이므로, 인사문제를 목회자에게만 일임하지 말고, 인선 위원회에 들어가서 신학후보생들을 검증할 수 있어야한다. 평생 동안 한 교회에서만 섬긴 장로의 영적 지도력은 현대 목회에서 아주 필요한 부분이다. 과거 장신대에 수도 없는 데모가 있을 때마다 장로들이 ‘저런 문제아를 교회에서 청빙하면 안 된다’라는 목소리를 높일 때, 신학생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중하던 일이 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한국교회 정론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2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24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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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선언한 후 18개월이 지났다.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듯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는 반복되는 비대면 예배와 참석 인원 제한에 부딪혀, 모여서 예배하던 당연한 것들이 오히려 지탄거리가 되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위드코로나’가 선포되어 일상으로의 회복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교회마다 터널 속에 갇혀 그냥 주저앉아버린 성도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일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일부의 성도들에게 예배의 회복만은 더딘 것 같다.    반면, 빠른 일상으로의 회복에 발맞추어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예배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기도할까?’, 하는 마음으로 늘 성전을 사모했던 성도들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소망의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왔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속 두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연 18개월 동안 그 긴 터널 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지내왔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좌절하고 낙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였는가, 아니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성도였는가 말이다.    1620년,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이미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중 51명이 목숨을 잃었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해서는 원주민들의 공격과 맹수의 위협,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남은 자의 절반이 죽어 49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땅을 일구어 작물을 심고 산으로 나가 짐승들을 사냥하며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삼으면서 처절한 생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첫 번째 맞이하는 늦은 가을, 수확한 작물을 들고 하나님께 드린 감사예배는 그들이 길 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와 죽음을 뛰어넘은 생존의 희망의 빛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단순히 추수만을 위한 감사가 아니라 먹을 양식을 지속적으로 수확함으로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였다. 추수는 한 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지켜 주실 것에 대한 예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공포 속에 좌절한 사람은 왜 없었겠는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며 원망, 불평했던 것처럼 그들은 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길고 긴 터널을 뚫고 한발 한발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감사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전진하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날마다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와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린 자에게 주는 따뜻한 밥 한 끼의 감사는 그 차원이 다르듯이, 고난과 어두움, 시련, 고통을 뚫고 나왔을 때의 진짜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생존의 위협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를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추수감사절이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 내고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 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있다.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더욱 감사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축원한다.  /서산 이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15
  •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 미래가 있다. 감사하는 생활에는 고난의 복병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역경과 거짓도 감사하는 사람을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할 감사를 배우며 문제를 지나친다. 근심과 염려에 붙잡히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 따위는 가벼운 두통쯤으로 여긴다.   이러한 삶의 주인은 바로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어떻게 의롭게 된 자들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바로 감사하지 않을 때 죄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훨씬 빛을 얻을 것이며 더 많은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영역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왜 믿는 자의 감사가 중요한가? 바로 감사의 영적인 일은 천국을 침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마다 감사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에 찌든 마음에는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귀신의 영이며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약3:15). 감사가 없는 마음은 오직 스올일 뿐이라고 했다(시6:5).    아무리 믿음이 크다고 해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스올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발현이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하는 행위는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감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통한 시인이며 고백이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선포할 때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에 아벨은 참된 예배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아벨은 실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감사로 예배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감사하며 양을 잡아 피로 희생의 예배를 드림으로 주의 일을 시인한다.    살아 있는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자의 한 사람인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예배의 속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자같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그의 믿음이 그를 증명하여 믿음으로 가인과 다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예배에 하나님의 완전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헛된 것이다.   완전한 감사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믿음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인은 현재를 감사했다. 자기의 농사지은 것으로 자기의 현실의 만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다. 거기에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연약함 때문에 감사의 행위에 희생이 따라오지 못하며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농사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드릴 감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미래가 없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아벨의 노선을 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한다. 베드로 같은 고백과 시인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감사는 천국을 침노한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정론
    2021-11-04
  • ‘자연치유’ 통해 사랑과 건강을 전합니다
      나는 1967년 꽃 피는 춘삼월 장손이신 1925년생 아버지와 1924년생 어머니의 늦둥이로 경기도 남양주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출생을 말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치유 환경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장손 집안이었기에 전통의례와 생활풍습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누리며 성장했고, 또 농촌 생활 가운데 몸으로 배운 몸 공부가 풍부하였다. 24절기의 순환, 낮에 해와 밤하늘 별과 달과 은하수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살았고, 땅의 소중함,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가치를 남다르게 체감하면서 성장한 것이 자연치유의 큰 원동력이 됐다. 아마도 이 시절 경험한 것들이 장석종이 창안하여 펼치고 있는 “형상체질”과 “체질 푸드테라피” 그리고 “오감멀티테라피”의 시작이라 여긴다.   아버지하면 청년시절 만주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신 말씀, 한국 전쟁 당시 염병이든 고모를 지게에 지고 피난 가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키우셨던 우리 집 소는 말을 가르켜서 부리는 소였는데 송아지가 나면 코뚜레를 뚫고 말을 가르켜서 일반 소보다 비싼 가격에 우시장에 내셨던 일들도 기억된다.   겨울에 썰매를 타려면 논에 물을 대어야하는데, 벼를 베고 벼 포기의 밑 부분이 높아서 높은 벼를 낮으로 자르시고 물을 대어 겨우내 썰매를 탓던것도 기억된다.   어머니는 고향이 전라도 나주셨고 그래서인지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셨다. 지금도 나에게 소울 푸드인 들기름에 달달볶는 머위나물과 소금간이 잘 밴 오곡 찹쌀밥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먹을거리라 여긴다. 장손 집 맏며느리셨기에 명절 때 가장 먼저 약주술을 담그고, 그 다음에 엿을 고시고, 두부 만드시고, 묵을 쑤시고, 그리고 소당질 하시는 것을 옆에서 다 거들어야 했던 나는 지금도 묵의 달인으로 내가 쑥 묵은 차지고, 다른 묵에 비해 맛이 참 좋다.   어머니는 속병이 있으셨다. 속병은 소화 안 되는 위장병인데 그 원인은 미역국이었다. 옆집에서 생일이라 미역국을 같이 먹자고 하여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드시고 급체를 한 이후부터 평생을 속병으로 고생을 하셨다.   자연치유를 공부하면서 그 원인을 정확히 찾았는데 첫째는 어머니 체질이 수형인으로 미역국이 잘 맞지 않은 것, 둘째는 심장이 약한 분이셨기에 심장으로 인한 심하통 증상을 위장 증상으로 여긴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고생하신 심하통을 통해 나는 자연치유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국내최초, 최고를 지향하는 자연치유 인재의 숲”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번 개강 때 자연치유의 정의를 “문제를 알고 그 문제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나의 의지와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을 통해 회복되고 소생되는 것이 자연치유다”라고 설명하였다.   간략한 두 줄의 자연치유의 정의는 1987년 자연치유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자연치유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간증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헛수고 일 때가 참 많다, 또 훌륭한 자연치유사역자를 만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역시도 치유와 회복이 그리 크지 않다. 치유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자연치유는 이뤄질 수 없다. 또 의지가 없는 자연치유는 사상누각이라 여긴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가 있듯이 병을 낳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자연치유력은 발휘가 된다. 예를 들어 아토피로 고생하는 사람이 그 원인이 음식에 있는데 나는 맛있는 것 마음껏 먹고 피부 가려움은 감내하겠다면 아토피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 의지가 참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치유를 크게 자연적인 치유(Spontaneous Healing), 자연을 통한 치유(Natural Healing), 자연적인+자연을 이용한 치유(Naturopathy) 3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적인 치유는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불균형들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생명력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제때 배설되어야한다. 자연을 통한 치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치유하는 것으로 피부상처에 아로마 라벤더를 바르는 것, 구내염이 있을 때 프로폴리스를 바르는 것등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런 자연적인 그리고 자연을 이용한 치유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자연치유학이라고 본다.   장석종 박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오감을 통해 수용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오감멀티테라피”를 주장한다. 그래서 출간한 책 제목도 장석종 박사의 오감멀티테라피가 있다. 눈코귀입촉 오감을 활용, 눈과 관련된 칼라테라피, 눈의 홍채를 이용한 홍채영양학 코와 관련한 아로마테라피. 귀를 이용한 귀분석상담학, 사운드테라피, 입을 이용한 푸드테라피, 촉감을 이용한 경락치유학, 근신경치유학, 그리고 영성과 감정과 관련한 감정치유 배치 플라워에센스, 에너지테라피등을 정립하여 치유에 접목하고 있으며, 이 철학이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커리큘럼에 담겨져 자연치유학 석사, 박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장석종 박사는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 학회장이기도 하다. 자연치유 관련 논문을 투고하였지만 심사가 불가하다고 반려되는 경험을 하고는 자연치유학 이론 정립과 대중화를 위한 학회가 필요하고 여겨,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를 설립하여 자연치유 논문 발표와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매년 11월에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귀분석상담사 자격증, 홍채영양학 자격증을 등록하고 자격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자격을 학회에서 운영하므로 보다 전문가들이 교육하고, 또 교육생들은 전문화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여긴다. 또 학회에서는 자연치유 도구와 교육 교재 발행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로 기존의 이혈(이침)을 업그레이드 하여 포스에너지볼을 개발하였다. 회원들에게 우수한 제품을 비용적 부담을 줄여 공급하고 있으며, 귀(EAR)용, 바디(BODY)용, 그리고 선교사용을 개발 완료하여 상표등록을 마쳤고 현재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교육교재로 귀건강분석상담학 기본과정 교재를 출간하였고 홍채영양학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서울장신대 자연치유선교대학원장·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0-19
  • 믿음으로 사는 인생
    기독교교육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교수님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가장 중요하게 일러주신 제일의 교훈이 무엇인가요?” 교수는 한 주간이 지나 수업시간에 “지난 1주일 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신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 살 것인가?’라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삶은 몇 미터 되지 않은 수족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시사철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외부 영향력이 있음에도 흔들림 없는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은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기적과 비유, 많은 말씀과 행동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뒤섞여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주님은 우리가 떡으로, 옷으로, 재물로, 얻은 명성으로, 자기 의로, 자기 성취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 되도록 만들려고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믿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가보지 못한 길로 부르셨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생각, 아버지 데라가 가르쳐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는 영적 경험이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광야를 건너게 하셨다. 모세는 그 당시 낙타와 함께 광야를 건너던 대상들처럼 광야를 한 번도 건너 못 적이 없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가게 만든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경험이 필요하고 또 그 경험이 소중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때로는 인간적인 조건을 한 걸음으로 능가하시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길을 막히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는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스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선교대회 주강사로 초청받은 이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그 가정에 첫 아이 데이비스가 태어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자 아기의 밤낮이 바뀌었다.    부부가 일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생활 리듬이 깨져서 신경도 많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오르티스 목사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밤 녀석을 좀 때려줘야겠어. 그래야 녀석이 밤에는 자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밤에 아빠는 울고 있는 아기 침대로 갔다. 그러나 아기가 아빠를 보자 옹알이를 하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이 녀석을 봐요. 이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 그때 오르티스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의 관계를 다시 깨달았다. 아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아기의 삶과 생명은 단 하나, 부모에게 붙어 있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이다.   믿음은 무슨 큰 업적을 세워서 받는 표창장이 아니고, 열심히 어디 다녀서 얻은 자격증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신뢰를 보내며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주님에게 붙어 있어 주님 방식 따르는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걷는 길이 기울어진 듯이 어렵지 아니한가?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사랑으로 긍휼로 대해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숨을 쉬며 살 수 있다.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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