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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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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11
  • [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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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04
  • [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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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7
  • [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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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1
  • 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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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14
  • [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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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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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의 위대한 힘
    코로나 19 사태로 전세계가 패닉이다. 국경이 막히고, 무역이 중단되고, 사업체가 문을 닫고,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지 못하고, 학교의 교문은 굳게 닫혔다. 6.25 때도 지속 되었던 교회의 예배는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드려졌다. 미국이 약 10만이 죽고, 이탈리아와 영국이 수만 명이 죽고, 중국은 사망자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300명 안팎의 사상자만 남기고 있고, 지금도 이 바이러스와의 사투를 잘 극복하고 있다. 사스, 메르스, 신종플루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체계적인 의료체계를 갖추어 왔고, 거기에 더하여 헌신적인 의료인들의 섬김과 헌신으로 수많은 완치율을 확인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나라가 이 엄청난 재난을 극복해나가고 있을까? 가슴 뭉클한 궁금점을 갖고 필자는 계속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던 중에, 코로나 19 환자를 돌보기 위해 2개월 동안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자녀들과 통화로만 아쉬움을 달래는 한 간호사의 이야기도 보았다. 의료봉사를 신청해 놓고 차마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이야기도 못하다가 하루 전에 이야기를 하고 청도 대남병원으로 자원봉사를 한 의사의 이야기, 기저질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고자 주중에는 본인의 병원에서, 주말에는 의료봉사 현장으로 선별진료소로 향한 의사들도 많았다. 170여 명의 동네 의사들이 본인들의 병원을 잠시 내려놓은 채 선별진료소로, 대구와 경북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이러한 봉사의 걸음들은 시민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할 뿐 아니라 숙연하게 해 주었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코로나를 극복하도록 돕는 원동력이 되었다. 생계가 달린 자신의 비즈니스를 잠시 내려놓고, 가족들을 뒤로한 채 생명을 도우러 떠날 수 있는 동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의 의료인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국 최초의료원들과 의료체계가 갖추어질 수 있었던 의료 과거사를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게 된다. 의료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화 대학병원과 인천기독병원은 로제타, 제임스 홀, 셔우드 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고, 연세 세브란스병원은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1890년. 9월 미국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나온 닥터 로제타 의료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캐나다 출신 목사이며 의료 선교사인 제임스 홀과 결혼한다. 제임스 홀은 원래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었으나, 한국의 의료선교사로 지원한 로제타가 ”한국 여성들이 여자 의사가 없어서 죽어가니 나는 조선의 여성을 위해 한국에 선교사로 와야 합니다” 라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자, 중국의 선교를 접고 로제타와 결혼해서 한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 첫아들 에디스가 유아기에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연이어 로제타의 남편 제임스 홀이 풍토병으로 한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럼에도 로제타는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로제타가 키운 한국의 최초 여의사가 에스더 박(본명 김점동)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당시 심각한 질병이었던 결핵으로 죽게 된다. 그러자 제임스 홀과 로제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한국의 결핵 환자들을 위해 결핵 전문의가 된다. 그렇게 한 가정이 한국의 의료선교를 위해 눈물의 씨를 심었다.   이 위기의 때에 우리도 기억하고 또 각오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생명을 나누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을 내놓는 희생의 씨를 뿌리 선교사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안위를 버리고 의료현장으로 떠나는 의료인들. 그들의 희생정신을 이어가야 하는 일이다. 우리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로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을 걸고, 지방 곳곳에서 소금과 빛이 되며 어려운 교회들을 섬기는 모든 지역의 교역자들, 세계 각지의 선교사들, 어려운 교인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소중한 옥합을 깨트려 흘려보내야 할 때다.  /묵동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6-16
  •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2019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 7차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의 총회가 진행되었었다. 이 총회의 참석자들은 ‘지구 생물다양성 및 생태계서비스 평가에 대한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보고서’를 채택하였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지구 생태계의 생명다양성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는 인간의 농지 확대와 도시 개발, 해안 매립으로 인한 생물의 서식공간의 분절과 감소, 야생 동물의 밀렵과 희귀식물의 채취 등 불법 포획과 남획의 증가,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확산, 인간에 의한 인위적인 외래종의 침입, 그리고 기후변화를 지목하였다. 특히 이 보고서는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생명다양성을 감소시키는 여러 원인들의 영향을 더욱 심화시키는 가장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요인이라고 분석을 했다. 기후변화는 가뭄, 홍수, 폭염 등과 같은 기상 이변을 발생시키고, 해양의 산성도를 높이며, 해수면을 상승시켜 해안 토지의 침수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물들의 이동을 촉진시켜 새로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출현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우한시를 시작으로 전 세계 185개 국가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었고, 현재는 600만 명에 이르는 확진 환자가 발생하여 이 가운데 37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생물다양성과학기구의 보고서가 미래의 상황에 대한 예측 보고서가 아니라 현재의 팬데믹의 현실을 정확히 기술한 보고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현재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은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위기는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더 큰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기상기구(WMO)는 2019년에 발표한 ‘전 지구 기후 보고서’에서 2015년부터 2019년까지의 지난 5년을 인류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기’로 분석을 하였다. 이 보고서는 2019년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후에 200여 년 동안 1.1도 상승하였는데 최근 5년 사이에 무려 0.2도가 상승하는 급격한 기후변화가 현재 진행되고 있으니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UN 기후변화 회의’에서는 세계 각국의 정부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탄소배출을 줄여나가자는 내용의 기후변화 협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2018년에는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하며 2030년까지는 온실가스 배출을 현재의 45% 수준으로 감축해야한다는 IPCC의 특별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후변화의 시급성과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 정부의 노력은 아직도 미진하기만 하다.   한국교회는 6월 첫째주일을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환경주일로 정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제 37회를 맞는 2020년 환경주일의 주제를 ‘작은 생명 하나까지도 - 기후위기시대, 생명다양성을 지키는 교회’로 정하고 환경주일 연합예배를 드리며 ‘기후위기 비상사태, 한국교회는 작은 생명 하나까지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선언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과 기후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볼 것을 요청하고, 한국교회가 창조세계를 온전히 돌보지 못한 괴오를 참회하며 생태정의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생태환경선교에 온 힘을 다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목소리에 한국교회는 어떤 응답을 할 것인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6-04
  • 코로나사태와 한국교회의 예배회복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비대면 예배(Online Worship)가 요청 되면서 예배에 적잖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교인들의 예배 정신과 자세도 문제가 되지만 예배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19 이후 예배와 그 바른 방향에 대해 염려하는 분들이 많다. 워필드(B.B. Warfield)가 바르게 말한 대로 예배는 성화의 궁극적인 이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단지 윤리적인 인간을 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예배자로 만들어 영원토록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고자 하는 뜻에 있다고 한 그의 말은 옳다.    이 같은 구원의 목적을 고려할 때 예배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차원에 그치는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또한 지역과 문화 그리고 시대의 변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와 감사를 표하고 찬양을 드리는 양식은 역동적으로 거듭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예배의 본질과 원리는 불변하다고 해도 예배의 양식은 분명히 역사적 상황과 교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의 형식적 원리를 어떻게 구현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단지 한 시대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항구적인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면, 한국교회는 교단의 차이를 불문하고 하나의 통일된 그리고 확고한 예배모범을 따르지 않고 있다. 큰 교단만 하더라도 헌법이 예배의 모범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실제 교회의 예배에서는 그다지 존중되지 않고 있으며 아예 무시되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 경배와 찬양,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 등이 탈현대사회의 새로운 예배의 대안으로 등장하였고 교회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면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상기하고 그 바른 양식을 정립하는 일은 더욱 시급한 사안이 되었다.    교회마다 제각각 필요성에 대한 자각과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러한 새로운 예배양식과 사적인 다양한 고안(考案)을 채택하고 있고 여기에서 예외인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만큼 거의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적 예배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새로운 예배 형태의 기원과 의도 그리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학 전통을 반영하는 예배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적잖은 교회들이 말씀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말씀보다는 신유에, 말씀보다는 축사(귀신)에, 말씀보다는 인간의 기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에, 말씀보다는 코이노니아(교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말씀의 자리는 밀리고 말씀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이후 하나님 면전의식(코람데오)이 약화된 비대면 예배가 실시되면서 흥미를 유발 하고자 필요이상의 순서들이 예배시간을 차지함으로써 말씀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도 본래적 계시의 의미와 정신에서 변질되고 왜곡되어 가고 있다.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Man-Centered-Service)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예배(God-Centered-Worship)로 예배의 방향 회복이 절실하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제 말씀 중심의 예배(Bible-Centered-Worship)로 돌아가야 산다. 그래야 설교자도 살고 교회도 살 수 있는 것이다.  5월 31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한국교회에 진정한 예배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칼빈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5-28
  • 온라인 성경 교육이 중요해졌다
      (사)한국미디어선교회는 38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미디어 선교의 산증인이다. 한경직 목사님이 본 선교회의 초대 총재였으며, 한기원 목사님이 초대 회장이셨다. 비디오선교회는 경부고속터미널에 복음TV 33대를 설치하여 비디오를 상영하며 선교를 시작했으며, 고속버스에도 성경공부 비디오를 상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비디오로 선교하였으나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으로 더 나아가 유튜브로 그리고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앱을 통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 코로나19가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모이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각종 스포츠 경기, 문화행사들은 물론 예배를 위한 교회의 모임들도 자제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독교는 모이기를 힘쓰는 종교인데 교회에서의 모임이 적어지게 되니 교인 사이의 친교와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교육도 위축되고 있다.   비대면 사회로 진입하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요즈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활동들은 위축되지 않아야 하며 성도 간의 교제도 활성화되는 것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온라인을 통한 스마트 커뮤니티 형성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직접 대면하여 만나지는 못하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넓혀 나가자는 생각이다.   기실 오늘날 비대면 사회로 들어가며 교회에서의 모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을 통한 예배나 모임이 대안이 되기도 했다. 물론 코로나19가 약화되면서 대면하여 하는 행사들과 일들이 풀리기 시작하고 있으나, 우리는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온라인상에서의 친교의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에 교회에서의 대면 모임을 점점 늘려나감과 동시, 새롭게 발견한 비대면의 모임과 친교를 온라인상에서 확산해나갈 필요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나라는 점점 비대면 사회로 진화되고 있다. 독거노인, 싱글족, 혼밥족 등 1인 가구들이 우리 사회의 30%를 점하고 있으며 이 추세는 점점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혼자 생활하는 시간들이 많아짐으로 인한 외로움과 적적함이 우리 사회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런 고독이 만연한 시대에 사회적 거리는 멀어지고 있지만 정서적 거리는 가까워지는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으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을 통해 친숙함을 만드는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서로 간의 만남을 통해 더 나은 교회교육의 토양을 만듦과 동시, 만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교육과 성경공부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의 대면 교육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인바, 이런 온라인이나 스마트폰을 통한 교육은 하나의 보완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한국미디어선교회는 보유하고 있는 200편이 넘는 동영상 성경공부 강좌들을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즈음하여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모임이 줄어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적어지게 된 마당에서 온라인으로 대안적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본 강좌는 유튜브를 열어 ‘한국미디어선교회’를 검색한 다음 ‘구독’을 누르면 들어갈 수 있는데 이를 통한 개인의 영성훈련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이런 비대면의 활동들이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에 교회도 대면하여 만나 활동하는 일을 강조함과 동시 비대면의 공간들도 넓혀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한미선 바이블아카데미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5-15
  • 코로나19의 도전과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
       기독교신문 등 교계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온라인교인’이 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없으니 유투브 방송 같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주로 대형교회의 유명 목회자에게 몰린다고 한다. ‘가나안교인’에 이어 이제는 온라인교인이 어떤 트렌드로 자리를 잡는 것 같다. 트렌드는 한 번 형성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가나인교인’이 처음에는 작은 현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파되고 확산돼 하나의 트렌드를 이뤘듯이 코로나사태로 인한 온라인교인 증가는 일시적 현상은 아닌 듯 싶다.  코로나19 사태는 교회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를 변화시키고 있다.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교사의 수업을 듣는 ‘당연한’ 풍경은 위험한 것이 돼버렸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해오던 교육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일하는 방식도 변화될 전망이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일하는 방식에서 재택근무로 방식이 바뀌고 있다. 이러한 ‘비대면 방식’이 앞으로 인류의 보편적 생활방식이 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전망도 나오고 있다.    코로나19가 앞으로 일상화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예측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한 번 유행했다가 사라졌던 과거의 메르스나 사스 같은 바이러스와 코로나19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세계의 유수한 전문가들은 올 가을이나 겨울에 코로나가 다시 유행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떤 전문가는 독감처럼 계절성 유행 질병이 될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코로나는 한국교회에 이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가장 친밀한 방식의 예배를 드렸다.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했고, 예배 후에는 함께 식사를 했다. 함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신앙고백이자 교회 예전의 본질적 부분이었다. 또 목회자들은 성도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특히 한국교회는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통성기도와 열정적인 찬양은 그 동안 한국교회의 자랑거리이자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이러한 예배방식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몇 주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고, 공동식사는 사라졌으며, 친밀감의 표시였던 악수인사도 기피됐다. 한 곳에 모여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통성기도 역시 극도로 자제됐다. 만일 전문가들의 경고처럼 코로나19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감기처럼 계절마다 찾아온다면 교회는 이 새로운 도전에 합당한 대응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교회사가 보여주는 교회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교회사를 약간만 훑어봐도 교회가 세상의 도전 속에서 신앙과 예배를 지키기 위해 어떤 대응을 했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로마시대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카타콤, 곧 지하 동굴에서 예배했다. 지상에서는 로마의 박해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타콤 예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큰 소리로 찬송하고 기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가는 다 잡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끝났을 때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고, 거기에 맞는 존재방식을 세웠다.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방법이나 방식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방식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코로나19가 가지고 온 충격과 도전에 효과적인 대응을 해야만 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합당한 방식들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사태로 한국교회는 소모임과 온라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큰 모임과 오프라인을 무시하거나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모두가 한 곳에 함께 모여 큰 소리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자랑이자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전통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전통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소모임과 온라인에도 많은 연구와 투자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방법은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모임과 온라인은 코로나 이후 교회의 존재방식일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예장 합동측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0-04-28
  •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다시 회복될 것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은 지엽적 변화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대전환이다. 언택트(untact·비접촉)사회가 도래하고 공동체성이 해체돼 개인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문화로 바뀌며 글로벌한 사회에서 성곽문화로 변형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디지털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면서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폰을 인체의 한 부분처럼 활용하는 인간)’ 시대가 급속도로 확장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가 가져다준 교회 환경의 변화다. 과거에는 시대나 사회 문화가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파괴하는 환경으로 변화됐다. 그 결과 교회 이탈자 증가, 새신자 감소, 재정의 감소로 인해 교회에 극심한 위기가 올 것으로 보인다. 21세기교회성장연구소 김두현 박사는 “오는 9~10월이 되면 소형교회는 물론 중·대형교회를 포함해 30% 안팎의 교회가 극심한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처럼 심각한 위기상황인데도 한국교회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영적으로, 교회적으로 태만과 냉담, 방치의 습관이 체질화돼 가고 있다. 교회와 예배에 대한 각오가 너무 안이하고 태만하고 냉담한 사고로 굳어버렸다.   4·15총선의 결과로 진보사회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강화되면 보수 성향의 교회들에는 생태계의 압박이 더 부정적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고 두 달 가까이 지나니 이제야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는 상황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교회를 세우는 운동(처치 플랜팅)을 해야 한다.   첫째 순환계적 차원에서 교회세움을 해야 한다. 교회 본질을 이해시키는 교회론 교육을 강화하고 교회를 다시 주님의 몸으로 경험하게 해야 한다. 온라인예배에 익숙해 있던 성도들에게 예배의 신성함과 공동체성,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체험, 생명력 있는 설교를 맛보게 해야 한다.   둘째 포지션 영역에서 교회세움을 해야 한다. 교회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올드처치에서 뉴처치로, 교회의 옷을 뉴 패션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제도적 교회에서 창조적 교회로, 개인주의적 교회에서 네트워크 교회로, 오프라인과 온라인 예배의 병행 구조로, 대면 전도와 온라인 전도의 융합으로 뉴 포맷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자칫 실추됐을 교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고양하기 위해 교회 브랜드를 높여야 한다. 교회 안에 메디컬처치나 코로나19상담센터를 운영하는 것도 성도들에게 보건적·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방법이다. 근시적 마을교회에서 유니버설, 킹덤처치로 선교의 상상력을 확대하고 일반 주변교회에서 핵심적 중심교회로 진입해야 한다.   셋째 생태계적 차원에서 교회세움을 해야 한다. 성도들이 교회 생태계와 공교회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공적 사역의 마인드를 갖도록 교육해야 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올바르게 설정하고 교회가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회도 무조건 반정부집회만 하지 말고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넷째 다음세대 차원에서의 교회 세움을 해야 한다. 신앙의 유산으로서의 다음세대, 교회 유산으로서의 교회 세대를 잘 훈련하고 신앙을 계승시켜야 한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으로 단절돼 버린 지금, 유튜브를 통한 Z세대 전도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활성화된 기독교 유튜브 콘텐츠를, 아이들에게 교회 예배와 문화를 경험하게 하고 현장예배에 참석하도록 전도하는 통로로 삼아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를 어떻게 극복하고 대비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는 쇠락과 부흥의 갈림길에 설 것이다. 아니 코로나19가 한국교회의 신앙과 사상, 문화의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비상한 각오와 경각심으로 대응해야 한다. /예장 합동측 부총회장·새에덴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4-24
  • 완강한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요즈음의 캠퍼스는 견고한 고독 그 자체이다. 우선 새내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대학생이 된 후 기쁨과 흥분에 들떠 있었을 신입생들은 아직 제대로 된 입학식도 치르지 못했다.    긴 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을 뒤로하고, 봄을 알리기 위해 선뜻 다가오는 반가운 전령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정의 빌딩 사이로 하얀 목련과 만개한 벚꽃이 오랜만에 눈웃음을 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화사한 얼굴을 내밀면서 외치는 “안녕!”이라는 인사를 만끽하기도 전에,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날아와 내 귀에 박힌다. “교수님 발열체크하고 가세요!” 주차장을 빠져나와 연구실로 향하고 있는 나에게 캠퍼스 내에서 들려온 첫 음성이다. 발열체크를 끝내고 다시 걷는 교정의 잔디밭 위로 또다시 무거운 적막과 육중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캠퍼스의 파란 하늘 위로 마치 검은 까마귀들이 배회하고 있는 듯 착각마저 든다.    그렇다. 단지 대학의 캠퍼스만이 아니다. 전 세계 구석구석을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뒤덮고 있다. 예외가 없다. 부자나라이든 가난한 나라이든, 문명한 도시이든 낙후된 촌이든 상관이 없다. 무조건적이다. COVID-19라는 미생물이 행사하는 죽음의 파워 말이다. 솔직히 녀석은 생명체라는 축에 끼지도 못할 만큼 미흡한 자격요건으로 인해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주어진 미생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녀석이 인류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는 근래 보기 드물게 최상급이다. 죽음은 이렇게 너무도 가까이 보편적으로 견고하게 임재해 있다는 것.    녀석이 전달하는 강한 메시지는 또 있다.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 아직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 코비드-19는 인간에게 새삼 이 평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초인도 아니고 슈퍼맨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아직 이 미생물이라는 우주 내 동료와 싸워 이기는 한도 내에서만 겨우 생존이 가능하다는 레슨을 가르치고 있다.   하기야 최근까지 인간은 아주 기고만장했기에 이런 교훈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잊고 있었다. 스스로를 매우 특별한 위상의 존재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자존감이 넘쳐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신의 자리를 빼앗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했었다. 이젠 단지 시간만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유전자 복제 테크닉이 날로 발전해 가고 있는 이때,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믿었다. 최소한 병들거나 낡아진 신체의 기관들도 새 것으로 복제해 하나씩 교체하면 인간의 삶은 얼마든지 영속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치 자동차의 다된 부품을 갈아 끼우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영속이 가능해진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과제는 어떻게 이승에서 더 이상 지루하지 않게 여생을 즐길 수 있을지가 진정한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부활? 죽음이 없을 것인데 인간에게 부활이 왜 필요한가? 그리고 저승은 또 뭔가? 이승에서 얼마든지 영생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웬 저승인가? 기적도 마찬가지다. 이제 신의 선물로서의 기적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기적은 더 이상 신의 작품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니까. 이렇게 인간은 기고만장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런 모든 인간의 자신감을 단번에 짓밟은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의 희망이 얼마나 허황된 망상인지를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주 쉽고도 간단한 방식으로 가르쳐 준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하찮은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겨우 자신의 생존기간을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동료 생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순간 아침의 안개처럼 순식간에 허공으로 증발해 버리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는 사실.    생명의 하찮음과 죽음의 보편성이라는 영원한 테마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누렸던 생명이 실은 값없이 주어졌던 신의 은총의 덕분이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감신대 대학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4-14
  • 성서공회연합서 불어 개정판 출간
      다수 국가 사용하는 불어성경 역본 개정판 2019년 출간 에티오피아에 누에르어 성경·딩카보르어 성경을 기증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대중들이 많이 사용하는 불어 성경 역본의 개정판을 2019년에 출간했다. 전 세계 불어 사용자들이 7천 7백만 명이 넘는 가운데, 새로운 현대 불어 성경인 〈La Bible Nou velle Francais courant〉은 유럽, 캐나다와 아프리카에서 폭넓게 사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구 반대편의 미얀마에서는 성경 번역자 탕 은가이 옴 목사가 자신의 언어인 조친어로 된 첫 성경을 받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았다. 여러 해 집에서부터 번역자 사무실까지 먼 거리를 다니며, 우기에는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는 위험조차 모두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제 생애에 성경을 보았다. 그리고 이는 후손들에게 제가 남겨주는 유산이다” 조친어 성경은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번역, 제작되어 작년 2월 봉헌되었다. 지난해 성경을 봉헌한 90개 언어 중 40개 언어는 새로운 번역과 개정의 출판으로 이루어졌다.   작년 9월 핀란드에서 개최된 북사미어 성경 봉헌 예배에 참석한 에르바 닛티부오피오 총무는 “기쁨의 눈물과 함께 저는 이제 이 새로운 성경을 십대들에게 나눠줄 수 있게 되었다”라고 감격했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이 125년 전에 번역된 북사미어 성경을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직접 보았다. 새로 번역된 성경은 3만 명의 북사미어 사용자들이 보다 쉽게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최초로 북사미어 표준 문장 형식을 정립하였다.   한편 대한성서공회 반포센터(경기도 용인시 소재)에서 ‘함께하는 사랑밭’의 후원으로 남수단과 에티오피아 난민 캠프에 〈누에르어 성경〉 5,100부와 〈딩카 보르어 신약전서〉 2,100부를 보내는 기증식을 가졌다.   2011년 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남수단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있다. 주된 딩카(Dinka)부족과 누에르(Nuer)부족을 비롯하여 64개의 다양한 부족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분리 독립 이후에도 남수단 내전이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아픔으로 고통 받았다. 이들을 위한 물질적, 영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누에르 부족은 남수단과 에티오피아에 거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티오피아 캄벨라 지역의 누에르 부족 난민 캠프에는 약 40만 명의 난민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남수단성서공회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경 보급 사역을 지속하고 있으며, 전해진 성경을 통해 누에르 부족과 딩카 부족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번 기증식에서 예수마을교회의 안혜권 선교목사는 ‘합력하여(롬 8:28)’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안 목사는 “저는 오늘 전 세계 가는 곳마다 성경책이 필요한 곳에 대한성서공회와 함께 손을 잡고 성경 보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구나(생각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여러분임을 믿고, 이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인줄로 믿고, 이 사건을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면서 더 큰 사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드실 줄로 믿는다”라고 전했다.
    • 오피니언
    • 정론
    2020-04-09
  • 코로나 극복을 위한 부활절의 기도
      교인이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배가 가장 우선이라고 대답 할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도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이지만 이것은 대상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배는 그 대상이 만왕에 왕이시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친히 초청해 주심에 우리가 응답함이라 할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자체 단체장인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교회를 향해 행정명령을 내린 것을 대통령이 지지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종교에 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함과 아울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언론에서도 최근 담임목사가 구속된 특정교회의 예배모습을 계속해서 며칠씩 방영하여 마치 이 나라 모든 교회가 방역지침을 거부하고 지역주민들을 불안케 하는 것처럼 당국과 언론이 함께 교회를 폄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편향된 조치라 생각한다.    3,500여 명의 선교사를 강제 추방하고 3,000여 교회에 십자가를 부수고 파괴한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또 사이비·이단 집단인 신천지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코로나를 전파·확산시켜 많은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성경 역대하 20:9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 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셨나이다”고 말씀했고,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음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말씀했다.   무슨 일이라도 우리에게 임하면 주님이 계신 성전에서 주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하면 주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응답하신다고 미리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든 교인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 자신의 죄, 이단을 물리치지 못한 죄, 교회와 교단이 연합과 일치를 하지 못한 죄, 다음세대를 믿음 안에서 잘 양육하지 못한 죄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초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사망의 권세를 주님이 이기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위대한 철학자도, 알렉산더나 시저 같은 권력자도, 화려한 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부자들도 모두 죽었고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만이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소망과 영생의 복을 주셨다.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하여 고난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시는 근원적인 죄는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이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성령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성인과 종교 창시자도 사람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는 동시에 완전히 용서해 준 바가 없고, 자기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땅 가득히 예배가 회복되고, 교인이 교인답게, 교회가 교회되게 거룩해지는 이번 부활절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장로
    • 오피니언
    • 정론
    2020-04-09
  • 한국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성적 타락. 신학 및 신앙의식의 부족, 선거부정과 지도력의 부재, 목회자 생활의 불안정과 양극화, 교회와 성직의 세습 등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면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다. 이는 신앙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물신숭배 등 세상풍조를 따랐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사람의 기호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감리교회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정직한 감리회 지도력을 세우고자 2020년 감독회장 선거를 주목하여 동 선거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강화하여 진정한 기독교회를 세워야 한다. 영성훈련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웨슬리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공감하며 진정한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로 세상을 거룩하게 지어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셋째, 목회자의 생활 안정, 평신도 위상 정립, 제도를 개선 보완하여 합리적이고 정직한 감리교회를 지어가야 한다. 아울러 실력을 갖춰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기후위기로 비상사태를 맞고 있는 지구생태계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신앙을 배우고 환경선교에 동참하는 등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나서야 한다.   다섯째, 감리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학연을 넘어 연대, 세대를 넘어 통합, 성별을 넘어 평등한 감리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공적 교회이다.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감리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나 개혁을 요구할 것이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감리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지도력 부재 15년 동안 감리교도 35만 명이 감리교회를 떠났다. 깨끗한 이미지 갱신과 정직한 지도력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감리회 교인들의 이탈 현상은 급속도로 가속화될 것이다.   시급하게 위기를 돌파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개혁, 영성형성, 선교정책, 목회자 정책 등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차분히 만들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을 세우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감리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아니 정부의 조치가 있기 전에 먼저 예배당 예배를 중단하고 가정예배로 전환하고 새로운 신앙의식을 고민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비기독교인들도 교회를 신뢰하고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부 교회는 집단 감염소가 되었고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각성해야할 때이다. 자존심만 내세워 성심을 다하는 정부와 국민들을 대적할 게 아니다.    교회는 코로나 정국을 지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감리회목회자모임새물결 전국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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