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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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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11
  • [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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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1-04
  • [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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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7
  • [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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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21
  • 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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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10-14
  • [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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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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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노멀 시대 교회의 예배 논란 성찰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이스라엘의 예배 신학에 있어서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포로기 이전의 예배에서는 성전이란 공간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포로기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포로기 이전에는 제사와 의식, 그리고 거룩의 정도에 따른 성전의 세분화된 공간들이 예배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 생활이 시작되면서 물리적 공간인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는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하던 것에서 조금씩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은 메데와 페르시아의 점령하에서 유대백성들은 본국과 타국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성전이 없는 제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된 유대 백성들은 사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회당은 게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첫째 안식일에 모여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고, 둘째 유대인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이 지니고 있던 지성소, 성소, 그리고 이방인 뜰과 같은 그런 차별화된 공간이 없었다. 회당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거룩은 공간이라기 보다는 안식일 그 자체로서 그것은 일종의 구별된 시간이었다.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매일 정한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예배행위로 생각했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신앙 전통이 되었다. 다리오 왕 시절에 관원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30일 동안 왕 외에는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니엘은 죽음을 무릅쓰고 매일 정해진 기도 시간을 중단하지 않았던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단 6:10).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을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유대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란 일종의 “시간의 지성소”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공간인 성전을 잃어버린 백성들과시간이라는 지성소에서 만나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예배 신학에서 공간은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고 보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고래스 왕의 칙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즉 스룹바벨과 일차 귀환 세대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와 이차 귀환 세대를 보내셔서 성전 재건을 완성 시키셨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있어서 공간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예배에 있어서 비가시적 공간인 시간과 함께 가시적인 공간으로서의 물리적 공간도 여전히 중요했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균형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특별한 선물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만 예배하는 그의 백성에게 특별하게 응답한다.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제한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예배는 마치 우리가 차린 식탁에 하나님이 초대되어 대접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천지의 주재이시고 영원에 계신 하나님이 피조계와 역사라는 시공간에 자신을 꿰맞추셔서 인간이 앉는 자리에 내려 오시고 그 인간들을 만나주시고 함께 시공간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배란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황공한 환대와 다를 바 없다.   2020년 한해 동안 한국 교회는 정부의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행정명령 등으로 예배에 대해 큰 혼돈을 겪었다. 어쩌면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이 겪었던 혼란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혼란을 겪어왔다. 어떤 신학자는 코로나 19 이후의 교회의 예배와 예배 신학은 전과는 무척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사이버 교회의 탄생과 급속한 증가세를 예견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마치 디지털 시대에 들어오면서 물리적 공간은 약화되고 시간과 기술에 기반한 사이의 공간이 현대인의 삶을 상당 부분을 잠식한 것처럼, 교회와 성도의 예배 생활에 있어서도 사이버 예배가 새로운 예배 트렌드가 되고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것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이 흐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개혁과 연관시켜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주듯 예배는 시공간에 창조된 인간의 존재 양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물리적 공간과 비물리적 공간인 시간의 조합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존재 양식 속으로 앞으로도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시공간의 예배에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예배자에게 천상의 양식을 먹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떡을 공급받은 성도들은 서로서로 육신의 떡을 떼고 나누며 서로가 주안에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며 살아갈 것이고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19 둘째 해를 시작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대한 통전적인 인식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지난 한해를 지나면서 이렇게 가면 머잖아 전통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고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뉴 노멀의 예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주의를 기울이되, 과도한 일반화와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성도들은 시공간에서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자들이다. 물리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떡을 떼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생활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의 존재 양식의 본질에 더 부합한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시공간을 함께 하여 예배하는 생활에 더욱 가치를 두고 힘을 써 가야 할 것이다.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이 부자연스런 시기가 속히 끝나고 예배당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노래하고 성도들이 신령한 양식을 받아 먹고, 성도들끼리 나누는 그런 복된 예배를 회복하게 되는 날이 속히 오도록,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1-12
  • 예수님 중심의 제3의 길로 나아가자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초대 교회 당시 로마의 귀족이요, 관리였던 디오그네투스에게 기독교에 관하여 쓴 편지(Letter to Diognetus)가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 편지 내용 가운데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표현으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단어로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제1의 종교는 로마인들이 섬기는 종교이다. 여러 신들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바치며 각 가정마다 가정 신을 따로 모시고 살았다. 제2의 종교는 유대교였다. 로마는 유대교를 존중했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많은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 점령한 모든 땅에 퍼져 있었기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리고 제3의 길이었던 기독교가 있었다. 그런데 AD 40년경 기독교인의 숫자는 오천 명 정도였지만 AD 300년경에는 6만 5천 교회, 500만 명이 되었다. 약 250년 사이에 천 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때는 로마의 핍박과 탄압이 극심한 시기였지만,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계속 성장을 했던 것이다.   2021년을 마주하게 될 우리의 목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세는 여전할 것이다. 여러 가지 산적한 위기와 어려움들은 더해 갈 것이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우리는 로마 시대의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교회는 첫째 오직 예수님이 중심이었다. 힘이 있었고, 강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종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낮고 천한 곳에 친히 오셔서 섬김의 삶을 사셨다. 가난한 자의 편에서 함께 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최악의 죄인이 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수님만을 믿고 따랐다. 그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썼다.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며 닮아가려고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핍박 그리고 순교로 점철되었던 250년간의 초대 기독교의 고난과 박해사의 한 가운데서도 성장을 했다. AD 313년에는 기독교 공인을 이루어낼 정도로 로마를 변화시켰다. 그 원동력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로마의 기독교는 AD 313년 로마 내에서 공인되고, AD 379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면서 기독교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제1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그 위치가 변화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 역시 그 생명력의 핵심인 ‘초심’을 잃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고백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박해와 핍박은 사라지고 세상 권력에 가까이 가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 중심,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삶을 떠나 습관적이고 문화적인 기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가 멸망하듯 기독교 역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21년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다시 예수님 중심의 제3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제3의 길로 나아가며 초심을 되찾고,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예배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도 닮아가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다. 예수님께로, 예수님 중심으로 2021년을 다시 시작하자. 비록 우리가 맞닥뜨릴 2021년이 쉽지 않겠지만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 역시 풍성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제3의 길을 걸어간 것처럼 먼저 예수님을 알고 배우고 닮아가며 더욱 열심히 성경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어 신앙을 실천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현 상황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12-31
  • 2021년 국내 교계 전망
    2021년을 내다보는 일은 우리가 걸어온 2020년을 돌아봐야 가능하다. 역사는 가장 과격한 단절이라고 여기는 혁명에서조차 늘 이어져 흐르기 때문이다. 교계의 앞길을 전망하는 일은 사회의 흐름을 살펴야 가능하다. 교회는 사회속의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0년을 돌아보며   참 유난스러운 한해였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이 세계를 덮쳤다. 코로나19 말이다. 이 전염병이 인류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길게 보면 17세기 이래 지속해 온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삶의 방식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경고다. 짧게 보면 지난 30여 년 가속 페달을 밟아온 전 세계적인 시장 확대와 무제한의 소비 확산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다. 기후 환경 위기는 발등의 불이 되었다. 인류 생존의 마당인 지구행성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정신사의 흐름에서 인류의 존재 방식과 연관된 문명사적 전환이 다방면으로 논의되고 있다. 초-연결을 기반으로 삼는 기술의 발전에서 4차 산업혁명 또는 인더스트리4.0이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또는 온택트가 개인의 삶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면서 생활 방식과 구조뿐 아니라 이와 뗄 수 없이 연결된 삶의 태도와 사유 방식까지 변화되고 있다.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올 한해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소모적 싸움에 시달려왔다. 이른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에 대한 극심한 찬반으로 사회 여론이 추하게 반목했다. 전통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 매체의 보도를 다 보고도 사실 확인이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갈등의 와중에서 코로나19의 방역까지 정쟁과 싸움의 도구로 변질됐다. 남북이 갈린 휴전 상태에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교계를 보자. 코로나19 초기 상황에서 신천지 집단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터였다. 코로나 상황은 한국 교회에 더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얼마나 서투르고 미숙한지 그 민낯이 드러났다. 교계 안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사회의 판박이였다. 교회가 성경에 근거한 자체의 영역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과 교회의 갈등은 구분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로나19의 매서운 상황은 개인부터 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국가와 문화권까지를 막론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자기 성찰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자기 성찰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현재의 상황보다 더 혹독한 시대가 많았지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자기 성찰을 감행한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오늘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2021년, 내적인 상황과 연관된 교계 전망   섣달그믐과 정월 초하루의 시간적 흐름은 연중 여느 날이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의 인식에서는 한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의 흐름은 특별하다. 우리에게 곧 열릴 새해가 한국 교회에는 어떤 시간일까. 교회 내적인 과제가 무겁고 힘겨울 것이다. 코로나19가 2021년에도 국내에서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 분명한데, 공예배 출석 인원의 감소가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는 개 교회의 예산이 감소하는 것이 힘겨운 현안이다. 완전히 폐쇄할 정도로 재정 타격이 심한 교회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반면 많지는 않겠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오히려 재정이 증가한 교회도 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 교회들은 어떻게든 견디어내면서 2021년의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할 것이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보통은 고정비와 긴요하지 않은 간접 광고비부터 줄인다. 교회도 단체로서는 별 다를 바 없다. 교역자 수와 국내외를 포함한 외부 선교비를 줄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일 테다.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더 어려울 텐데 선교비만은 줄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교회들도 있겠다. 참 감사한 일이다. 국내 교계 단체들의 후원 및 모금이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이전에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는데 코로나로 더 어렵게 됐다. 현장 교회의 재정 감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정과 연관된 교계의 생태 구조에 연쇄적 타격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사역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여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의 신앙 인식과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조사에서 이미 확인된 터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신앙 인식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고 목회의 방향과 방법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 광범위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예배는 코로나19가 잠잠해져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 중에 온라인 예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단 온라인 시스템에 승차하고 보니까 여러 다른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쉽게 접근한다. 좋으나 싫으나 설교를 비롯하여 목회자들의 목회에 관한 전방위적 검증이 시작됐다. 예장 합동에서 추진을 발표했고 지난 12월 초의 한교총 총회에서도 채택된 안건 곧 한교총, 한교연, 한기총 세 연합기관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구상에는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한기총을 통합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문제다. 한교총 안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내년의 사회 정치 일정과 연관하여 교회가 또 사회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일까 심히 염려된다. 보수적인 영역의 대표성은 이미 한교총으로 교통정리가 끝났다. 다시 한기총을 끌어들이려는 인식이 걱정된다. 시급한 문제는 연합기관의 통합이 아니라 지도자들 인격의 변화다.   2021년, 외적인 상황과 연관된 교계 전망   교회 외적인 상황과 연결된 과제가 결코 만만치 않다.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그동안 교회가 사회속의 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의 어느 단체든 일을 해나가면서 언론이나 여론에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사회적인 관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그에 관한 적절한 판단이나 식견이 성숙하지 못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처럼 교회는 결코 사회속의 섬이 아니다. 교회의 사역이 그들만의 리그일 수 없다.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거룩한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과 빛이 교회다. 2021년에는 기후 환경 위기와 연관된 담론이 세계적으로 강하게 확산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두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의 차기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19로 인해서 현재 지구의 기후 환경 위기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다. 탄소 중립에 관한 논의는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복음주의적 교계에서 인식과 관심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와 김정은, 트럼프와 문재인과 김정은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만나면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인 의제가 되었다. 북한은 끊임없이 한반도 문제를 국제적인 의제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한다. 북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조금만 생각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장기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한반도 문제가 6자회담 국가들에게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안이 되는 게 당연히 유리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에서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사이에 견해 차이가 큰데 교계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넘는 평화와 통일의 구상을 가져야 한다. 2021년 4월에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있다. 2022년 3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내년의 일이다. 선거 때마다 교회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로 갈려 움직였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권이 가장 쉽게 이용하는 종교 집단이 기독교다. 현재 교계 안의 극우 세력이 시장 선거와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은 뻔하다. 기독교가 정치, 그것도 가장 통속적인 구조로 움직이는 선거에 단선적으로 뛰어들면 기독교에 독이다. 정교분리라는 이천 년 기독교의 정통 입장을 이리저리 오해들 한다.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명령에 따른 십자가의 방식 곧 사랑과 평화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한다는 것이 정교분리의 큰 틀이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길이다. 교회가 이 면에 기여한다면 참 감사한 일이다.   2021년, 갱신의 카이로스적 기회   한국 교회에 바라는 사회의 시각이나 교회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각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갱신돼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명제는 교회론의 부록이 아니다. 갱신과 개혁은 교회론의 본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결된 계시인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 기준이다. 거룩한 말씀의 심장인 십자가 사건의 가르침에 교회의 생사가 걸려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성서의 말씀에 자신의 삶과 세계를 비추어보며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자다.   외적으로는 허점이 많은 제도와 불완전한 인간의 모임인 교회에는 늘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며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거룩한 모임이 교회다. 한국 교회가 양적인 감소를 겪은 시간이 벌써 사반세기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갱신을 외치는 목소리와 노력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코로나19가 한국 교회에 주는 각성 중에서 갱신이 핵심이다. 코로나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한국 교회 갱신의 카이로스적 기회다. 코로나가 끝나기 전에 의미 있는 움직임들을 통해서 적어도 한국 교회 갱신의 발동은 걸려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새해 인사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사회와 21세기의 인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겸손과 회개와 경외의 마음을 맞이한다. 기독교 역사의 신앙 선배들과 인류 역사의 현자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믿음과 용기로 이겨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해를 열어주신다. 깊고 강한 믿음으로 인사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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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0
  • 한국교회정론-2
      안창호장로(전 헌법재판관)   2020년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 국회의원 10명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차별금지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도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안(「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을 만들어, 그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성별 및 사상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좋은 것 아니냐고 질문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차별금지법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되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며, 차별을 조장할 뿐 아니라, 선량한 미풍양속과 국가질서를 해칠 수 있는 아주 나쁜 법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 설교를 하면 처벌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가짜 뉴스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학교(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미션스쿨, 신학교)에서, 공공의 장소(길거리, 군대내 교회, 경찰 신우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하면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 최근 아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전인데도, 방통위에서는 극동방송과 CTS가 차별금지법 반대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주의를 경고했다.   그 제재는 단기 징역형, 벌금 수백만 원보다 무겁다.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이 부과될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가능하다. 손해의 2배 내지 5배의 배상, 최소 500만 원 이상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집단소송을 제기하면, 10명이면 5천만 원, 100명이면, 5억 원, 1만명이면 500억 원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와 단체는 파산되고 초토화될 수밖에 없다. 단순 징역형이나 벌금형보다 훨씬 무서운 제재이다. 차별금지법을 7,80%의 국민이 지지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 법에 대하여 아무런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고 질문 받으면, 많은 사람들은 차별을 금지하자는데 하면서 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게 되면 차별금지법이 그런 악법이냐면서 반대한다.   어떤 분들은 차별금지법이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등, 아주 나쁜 법이라면,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이를 추진하려고 하냐고 질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이념 때문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유럽계열의 민족, 독실한 기독교 신앙심, 농촌 거주자들,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과 미국적 정체성의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려 한다.”고 한다(프란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수경 역, 한국경제신문, 2020년, 196면). 반기독교적 이념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장애, 국적 등을 이유로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제3조). 차별금지법은 차별 대상인 ‘성별’이 남성, 여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고 한다(제2조 제1호). 성별에서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인정한 것은 성의 구별이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에 의하여 이뤄져야 한다는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 이외에 제3의 성을 인정하면, 인간이 인정하는, 인간이 만드는 제3의 성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계속)
    • 오피니언
    • 정론
    2020-12-15
  • 한국교회정론-1
    소기천(장신대 신약학교수/한국교회정론대표)   오바마가 미국에 남긴 공헌은 오바마 캐어인 전국민 의료보험체계와 동성애 인권 논리이다. 트럼프가 기적적으로 클린턴을 꺾고 45대 미국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이 두 가지를 폐기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에 가지고 갔지만, 판결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과연 더는 논란이 없는 문제일까?   오바마 8년 동안 미국이 정책적으로 동성애, 젠더 정체성, 사회적 성평등, 낙태 조장, 이슬람 난민 허용,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등을 실시하여 진보적인 소수 종교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침묵하는 다수인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많은 기독교인이 민주당의 기세에 눌려서 살던 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반전이 일어나면서 기독교가 숨을 쉴 수 있었다. 물론 지난 트럼프 재임 4년 동안 온두라스에서 시작된 이민자들이 무작정으로 걸어서 미국으로 향하는 대열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음으로써 꽉 막힌 상황에서 미국의 반이민 정서에 인권 문제까지 불을 붙임으로써 논쟁이 가중되었지만,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함으로써 어느 샌가 매스컴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국경을 봉쇄하여 미국인의 일자리를 사수해야 한다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어느 사이에 쿠바 난민들이 플로리다에 대거 몰려가서 터전을 마련한 이후의 상황에서 같은 히스패닉계이지만 쿠바 이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옹호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반이민 장벽을 쌓은 것을 지지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4년 전의 대선처럼 플로리다를 민주당에게 내주지 않은 보상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7천만표를 얻은 트럼프는 재임으로까지 이어지기 어렵게 되었고, 바이든이 미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7천5백만표 이상의 득표를 하고 대의원의 과반수를 얻은 상황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승복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법적으로 반발하기 때문에 바이든은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얻지 못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의 와중에 미국에서 국론 분열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기에, 누군가는 나서서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시급하다. 그동안 미국 대선은 정책 대결보다는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대방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일에 급급한 것이 선거가 끝난 상황에서도 트럼프가 좀처럼 백악관을 내줄 것 같지 않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일단 대선이 끝났고 개표가 말해주듯이 바이든이 대의원의 매직 넘버인 270표를 훌쩍 넘긴 상황이다.   바이든은 3수라는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었지만, 과거에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 않은 것처럼 앞으로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일이 전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바이든은 트럼프가 어려운 여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이전에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린 정책에 대해 인정하고, 미국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는 트럼프에 대해서 전염병을 핑계로 사사건건 마스크만을 물고 늘어지고 여론몰이를 통해서 트럼프를 조롱하고 깎아 내린 가벼움을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중시하여 주례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이든이 어떤 경우에서도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트럼프를 향해서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은 대선 유세를 마무리한 행보를 비난한 것이나 자신의 선거에 유리하게 거액의 광고를 통하여 계속해서 조롱한 것은 결코 세월이 지나간다고 쉽게 잊힐 일이 아니다. 그만큼 바이든은 절대다수의 언론 매체가 지지하는 기반을 바탕으로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그를 지지하면서도 침묵하는 샤이 트럼프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바이든이 대선에 이기고서도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쉽게 얻지 못하는 것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8년의 재임 기간에 교회는 양분되었다.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회가 동성애 합법화를 선언하고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락하게 되자, 2천여 개의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여 1/3로 교세가 줄어들었다. 프린스톤 출신이 한국 신학교에 대거 몰려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몇몇 교단은 동성애 인권 논리의 싸움터로 변질되었다. 이것을 거울로 삼은 미국감리교회는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용한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동성애 지지파와 동성애 반대파가 교단을 분립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파국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성경은 동성애를 죄악으로 말한다. 그런데 신학교가 동성애를 성경대로 죄악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시에 인권이라고 교묘하게 포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인권 선언문과 권리장전에 동성애가 인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가? 동성애를 인권으로 옹호하는 것은 상황 윤리를 근거로 하는 논리이며, 사회적 성과 젠더 정체성을 옹호하려는 반성경적인 주장이다. 트럼프가 승복하지 않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 발생한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기독교가 동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바이든은 깊이 생각하고, 오바마의 8년 재임 기간과는 다른 인권 정책으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여야 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죄악이다. 인권으로 옹호를 하므로 동성애자가 파국으로 치닫다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야 뒤늦게 뉘우치고 동성애로부터 돌이켜서 탈동성애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이후이다.   바이든은 다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인권 논리에 빠져서 동성애자 결혼식 주례를 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대로 굳게 믿고 나가는 샤이 트럼프, 곧 다수의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든은 4년 내내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이든은 성경의 진리를 존중하여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0-11-23
  • 코로나 이전부터 문제였다
        코로나19와 연관된 논의가 사회는 물론이고 교계에서도 한창이다.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가 시작된 올해 2월에 설문조사를 시작한 이래 내년 전반기까지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되는 ‘코로나19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교회의 사역은 거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대략 내년 말쯤이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방식으로 끝나든 독감 바이러스처럼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든, 코로나 이후 시대에 관한 예측과 대책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받는 타격을 추스르면서 내부적으로는 목회의 동력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방안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걸려 있다. 향후 5년에서 8년 어간이 한국 교회의 골든타임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골든타임, 자연재해를 비롯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매몰된 사람이 생존한 채로 구조될 수 있는 한계 시간을 말한다.   1885년을 한국 선교의 기점으로 본다면 선교 역사 110년만인 1995년부터 한국 교회의 교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벌써 25년 그러니까 사반세기가 지났다. 양적으로 성장을 구가해온 시간의 거의 사분의 일 동안 이미 쇠락해온 것이다. 1999년에 저 유명한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한국 교회의 하락과 연관해서 상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2020년의 코로나 상황에서 불거진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올해의 문제가 아니다. 사반세기 전부터 현상이 시작된 것인데 코로나 상황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표출됐을 뿐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볼썽사납게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들의 신학적이며 인격적인 소양 저하, 지도자들의 윤리적 해이, 신학교육 기관의 동력 상실, 연합기관의 분열과 대표성 약화, 교단 및 교계 정치의 비윤리성, 기복주의에 토대를 둔 번영신학과 물량주의적 성장 신학, 교회 직분 제도의 경직성, 그리스도인 개인의 자기정체성 약화와 사회적 영향력의 상실 …….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없는 영역이 어디인가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교육, 의료, 한글 교육, 생활 개선, 민족의 정체성, 국제적 연결 등 사회 전반에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였다. 우리 사회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지나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걸어오는 동안 교회의 부침이 많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회는 내부적으로만 아니라 사회 상황과 연관해서도 동력이 충만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친일과 신사참배를 놓고 교회의 분열과 부끄러운 자기정당화가 있었고 한국전쟁과 이후의 상황에서 좌우 대립의 극심한 반목이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굴곡 속에서도 복음 전도의 열정과 어려운 이들에 대한 구제가 한국 교회에 넉넉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교회가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시절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쇠락의 변곡점이 어디였나. 한국 교회가 신앙의 동력을 잃어온 시간이 이제는 꽤나 길어서 한두 가지 처방으로는 회복되기 힘들다. 기초 체력이 워낙 허약해져 있어서 근본적인 원인 진단과 중장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진부할지 모르지만 오래된 가르침을 듣는 것이 확실하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명제 말이다. 교회는 자신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순례하는 나그네 공동체다. 자신의 제도와 구조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교회는 병들고 허약해진다. 자신 스스로가 목적이 되면서 교회는 끝내 타락하고 복음에 대적하는 세속 집단이 된다.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문구까지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얼마나 건강하게 작동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힘차게 작동하는지 보면 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을 기록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일성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거룩한 이중 국적자다.   그러면 묻자.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릇 ‘나라’라고 할 때는 어떤 법이 구속력을 갖고 작동하는 일정한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 곧 성경 말씀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교회 역사에서 신앙이 병들고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쳤던 소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자’였다. 기독교 신앙의 시원(始原)이 성경이니까 이 외침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처음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는 주님 바라보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온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고 우러르는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 몸부림해야 한다. 성경을 끌어안고 십 년 정도는 외길을 걸어야 한다. 사회적 영향력 회복은 묻지 않아도 좋다. 성서의 말씀대로 살면 사회적 신뢰는 문제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 운운할 필요도 없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강력해진다. 코로나 한참 이전부터 문제였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풀려면 코로나 한참 이후까지 바라보는 긴 호흡을 갖고 다시금 온몸을 던져야 한다. 말씀 속으로.    /지형은목사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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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18
  • ‘있음’의 감사 ‘없음’의 감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끼는 재산이든 내 옆에 항상 있을 수는 없다. 내 존재도 그렇다. 있다가도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진다. 그래서 삶이란 “있음”과 “없음” 사이에 놓여 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존재’, 곧 ‘있음’에 집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직장이 “있고”, 집이 “있고”, 재산이 “있고”, 명예와 권력이 자기에게 “있게” 하기 위해 골몰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게 되면 만족스러워하고 즐거워한다. 모두 “있음”에 방점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재산이 불어나고, 사업이 성공하며, 염원하던 일이 이루어질 때 자연스레 감사하게 된다.   추수감사절도 그 시작은 곡식의 풍성한 결실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신 것’ 곧 우리에게 ‘있는 것’을 세어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만약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면 어떻게 될까? ‘욥’처럼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한국 기독교는 최근 들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 사회에서 쌓아온 사회적 존중과 신뢰를 잃어버렸다.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낮아졌다. 실제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싸늘한 눈초리를 자주 느끼게 되었다.   일반시민들은 기독교가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며, 타협과 관용이 없는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그들의 눈에 기독교는, 길거리에 나와 좌파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강경 우파의 중추세력, 코로나19 방역 상황에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감염은 아랑곳하지 않는 집단, 감염된 뒤에는 자신의 행동을 숨기고 거짓말까지 하여 방역체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다. 교회는 할 말이 많을 것이고 억울한 부분도 적지 않다. 때로는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 영향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간에 이미 교회는 어린이와 젊은이의 숫자가 급감하고, 새신자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교회는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점차 노령화되고 있다. 설상가상, 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가 늘어나면서 교회의 결속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다시 대면예배를 시작했지만, 출석 교인 수와 헌금이 크게 감소했다는 걱정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내년에는 교역자들을 줄이고 인건비를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듣는다. 개척은 꿈도 꾸기 어렵고, 작은 교회들은 존립이 위태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앞으로 이어질 거라는 데 있다. 그야말로 위기다.   교회는 지난 20~30년간 한국 사회의 발전과 도시화 과정에서 크게 부흥했다. 사람도 돈도 넘쳐났고, 영향력도 권력도 커졌다. 그야말로 “있는” 시대였다. 이제 교회는 “있는” 시대에서 “없는” 시대로 넘어간다.   다시금 예언자 하박국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참 신앙인은 “있어서만” 감사하지 않는다. “없어져도” 감사한다. 아니 “없음” 때문에 더욱 감사한다. 신앙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우리는 명예나 부, 권력의 포장이 벗겨질 때 참 자기를 보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먼저, 위기는 본질을 깨닫게 한다. “없음”의 시대에 신앙을 굳게 하고 더욱 감사할 준비를 해야겠다.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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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12
  • 태어날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2020년 10월 7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낙태죄 개정안은 여론이 자연법칙을 이기고 정치가 생명과학을 이긴, 후대에 수치스러운 시도가 될 것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하였다.   헌법 정신은 ‘모든’ 생명의 보호이며, 민법에서도 생명의 시기는 수태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법 정신이나 실정법이 태아가 생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태어날 사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국가가 법으로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결정인가!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 보호를 위한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의 목소리는 낙태에 대한 책임이 남성과 사회는 빠진 채, 여성에게만 부과되어 온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오늘 입법 예고된 법무부 낙태죄 개정안은 임신의 공동 주체인 남성은 합법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하고, 수많은 여성은 피임의 수단으로 낙태를 강요당하게 만들며,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태아는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동안 지속해서 제기되었던 임신의 책임이 있는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 법안 마련 등의 노력을 해보지도 않은 채, 임신 14주까지 사유를 불문한 낙태 허용 입법 예고는 태아의 생명 보호의 최소한 장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엄연한 차별이며, 생명침해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생명과학 전문가 그룹인 의학계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했는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부는 남성의 양육책임법을 제정했는가? 여성의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낙태가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를 입히는지에 관해 충분한 연구와 의견수렴을 했는가? 여성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법무부의 낙태죄 개정안 입법 예고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태어난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악법을 예고하였다. 과학과 의학은 생명의 시작에 대한 진실을 계속 증명해내고 있고, 사회는 모든 생명이 조건과 상관없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중대한 차별을 입법 예고하였다. 우리는 어느 순간까지는 생명이 아니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생명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주까지의 태아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인지 대한민국 정부에게 묻는다. 97%의 낙태 시술이 임신 14주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법조문의 실제 내용은, 앞으로는 모든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뜻이 아닌가! 의학계와 생명과학계, 그리고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의 의견만을 편들어 14주라는 생사의 구분선을 마련한 정부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실제적 조화를 이뤄 개정안을 발표하였다고 하였으나,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을 보호하는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 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타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반인권적 시도를 정부는 당장 철회하기를 요구한다. 태아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우리 모두 경험한 과거이다. /사단법인 프로라이프 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10-27
  • 정도를 걷는 개혁의 정신 회복하자
      두 번째 밀레니엄을 앞두고 라이프지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 100가지와 인물 100인을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쿠텐베르크의 성경인쇄와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에 이어 세 번째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순위에 들어있다. 미국 문화권에서 선정한 것이기에 다른 문화권의 시각에서 보면 선정과 순위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조사하던지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이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어느새 우리의 삶에 자리잡고 있는 천 년의 사건이 되어 있는 것이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종교개혁은 과거에 지나간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어야 한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의 본질과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함으로 오늘의 개혁을 이어갈 우리의 마음을 되짚어 보자.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본질에로의 회복이다. 개혁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은 원래로의 회복, 원래적 진리에로의 회귀가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15세기 가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무수히 왜곡시켜 놓았다. 루터의 외침은 이 왜곡으로부터 개혁하여 원래의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5세기 로마 교황권은 어떻게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켜 놓았는가?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장 유명한 것이 면죄부이다. 루터의 95개 논제 중 27조는 이렇게 말한다. ‘헌금함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면죄부란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 돈으로 신앙적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구속의 사건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95개 논제의 79조는 말한다. ‘교황이 사용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교황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모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참이나 왜곡하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95개 논제 10조에는 이런 언급까지 있다. ‘임종을 맞은 자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교황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돈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대리했다. 이런 왜곡으로부터 본질을 회복하고 참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바른 정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세계는 어떠한가? 인간적인 것들이, 세속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교리, 신학, 목사, 사람, 돈, 권세, 교권일지라도 하나님보다 상위 개념에 둔다면 그곳이 개혁의 자리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회를 개혁하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비난받고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개혁의 정신을 망각하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자기의 이익추구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이제는 교회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부단스런 짐이 되고있지는 않는지 우리 교계가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개혁의 정신으로 다시 무장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한국교회가 상실했던 사회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현실은 어떤가? 참 진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 정도가 아닌 꼼수와 술수가 지혜로운 처세술로 용납되고 있지는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참 진리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많은 이익이 있더라도 사도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참 진리가 있는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어제의 종교개혁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새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10-22
  • 추석을 맞는 기독교의 효정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다. 우리는 죄와 문제와 우리 육체를 이기기 위해서 자유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유자가 되었다. 그래서 자유자는 예배자이다.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고린도전서10:20)라고 했을 때의 제사는 제사가 아니라 고사이다. 제사와 고사는 다르다. “이방인의 고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라고 성경에 번역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와 고사를 구분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사와 고사를 구분한다. 부모님과 조상에게 하는 것은 고사가 아니라 제사라고 구분이 되어 있다.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한국에는 무당집에 점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며 그 중에는 교회의 제직자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축복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영혼구원 받기 위해서이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는 것이다. 신앙생활 잘하면 그 다음에 복이 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도 예배하는 것도 복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면, 나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나라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 살면 주인이 책임져줘서 영양 있는 것 맛있는 것을 다 먹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격체이시고 완전한 분이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심판주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온전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적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성경적 효는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어른을 공경하며,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성실과 열심으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부모님과 상의하고 결정하자고 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어른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존중하고, 스승은 제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이·청소년·제자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봐야 한다.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겸손과 온유로 인내하며 가르쳐서, 신앙과 삶을 바르게 전수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나라, 가족, 교회는 밝은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천국은 가족이고 가족은 작은 천국이다. 하나님은 가족공동체를 귀하게 여기신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최초로 만들어 주신 공동체다.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우리의 가족이 바로 설 때 신앙천대, 축복천대, 자손천대가 이루어진다.   나라 사랑은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더불어 대한민국에 속한 백성이다. 최고의 나라 사랑은 대한민국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가 제물이었다면 신약의 예배는 감사를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물질을 드릴지라도 감사하며 드려야 한다. 물질을 아무리 드려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물질은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직접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은 부모님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버금가는 은혜가 부모님의 은혜인 것이다. 올 추석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심을 담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 참다운 기독교의 효 정신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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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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