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3(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뉴스
  • [정론] 만종(晩鐘)의 감사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감사’이다.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고개 숙인 감사이다.만종의 화폭에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은 가진 지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높은 지위 때문에, 또는 종교적 경력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다.    만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 고위층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할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활동하게 하심도 감사하고 있다. 고개가 숙여지면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말 없는 감사이다. 만종의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 숙인 채, 입도 다문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가슴 저미는 감사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할 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고 마음에서 나온다.    셋째로, 함께 하는 감사이다.만종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이 보여야 한다. 남의 불행을 나의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복 받고, 함께 누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인 문화만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생각, 즉 이웃이 보이고 귀하게 여겨지는 신앙이 아쉽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고난 속에서의 감사이다. 만종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가난한 부부의 감사의 모습이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의 감사의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는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질 때 하는 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귀한 감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종은 원래의 그림에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부부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본래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체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 속의 부부의 모습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조차도 그들의 감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 슬픔조차도 가슴에 묻고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참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감사요, 바울의 감사였다. 만종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서울장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11-05
  • 잘못된 감사, 잘못된 기도
       올해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맞았다. 이 계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지상의 양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내 영혼을 먹이고 입히시며 무시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을 구하며 걱정하는 부끄러운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들어주시는 해결사이심으로 감사하는 한심한 종이다. 잘못된 기도를 들으시거나 잘못된 감사를 받으시는 주님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경은 감사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언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감사를 권면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시편 136편은 1절부터 26절까지 전체가 “감사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편은 매 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반복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감사(感謝)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자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하면 더 실감나고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헤세드’는 인자의 의미도 있지만, ‘은혜’, ‘은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궁에서 나온다. 은혜는 어머니의 사랑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젖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죄인(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감사시인 시편 136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감사하라는 언명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절) 그 외에 모든 절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으로 감사하라”(1절~3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으로 감사하라”(4절~9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라”(10절~24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언명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참 신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오늘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며 그것이 충족됨으로 감사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마찬가지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감사의 계절을 살자.
    • 오피니언
    • 정론
    2024-11-04
  • [정론] 종교개혁과 변화 그리고 경건
       2024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 개신교회의 본질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신학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고,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비롯한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토대를 구축하여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여, 중세의 봉건적 전통과 구전문화의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산업혁명은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특히 성도들에게 영적문화의 충격과 함께 성도들의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형성하면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변혁은 크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 예배 문화의 변화이다. 교회의 예배가 단순해지면서 성만찬 중심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교회 내에서 사라지고 일상적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의 보편화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하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성전 예배 중심에서 삶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예배로 예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내의 비성경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초신앙교리 교육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회 내의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숭배임을 적시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됨을 비판하고 제거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변혁이 일어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의 기초인 성경을 중심한 신앙과 생활이 강조되고 교회안의 거룩한 공동체와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지면서 다양한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함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일으켜 종교,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더 발전시켜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노동이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의 전쟁과 종교가 공적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는 한계도 드러냈다.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성직자, 교회 공동체는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의 부분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현실화’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는 매일 성경 40장 이상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실천할 때 신비의 계시가 능히 너희를 견고하게 함을 믿어야 한다(롬 16:26). 둘째, 하나님의 메시지, 타인과의 대화에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넷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행 28:30-31). 다섯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용서운동이 있어야 한다(욥 42:6, 10).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이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기억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칼빈학회 회장·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10-22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 오피니언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4-09-28

실시간 정론 기사

  • 감사와 기적
      독일에 큰 기근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릴 때 한 부자 노인이 매일 빵을 구워서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 중 ‘그레첸’이란 어린 소녀는 늘 다른 아이들에게 떠밀려 맨 마지막에 가장 작은 빵을 들고 가곤 했다. 그런데도 그레첸은 노인에게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노인은 이 소녀의 태도가 기특해서 하루는 제일 작은 빵에 은화 6개를 넣어 놓았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큰 것을 집어 들었고, 그레첸은 가장 작은 빵을 들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레첸은 빵 안에 은화 6개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소녀는 은화 6개를 돌려주러 노인을 찾아갔다. 찾아온 소녀에게 노인은 말했다.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일부러 빵 속에 은화를 넣어 구운 거란다. 걱정 말고 가지고 가거라.”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   첫째,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디베랴 바다 근처로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온 사람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신 후,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감사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이다.    둘째, 감사는 절망 중에 소망을 가져다준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에 있었던 블레셋 땅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가드왕인 아기스에게 다윗은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그 나라 장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민이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한 자라고 아기스에게 보고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지를 발휘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벽에다 자기 몸을 비비며 미친 척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감사했고, 감사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망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다. 절망 중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소망이 되게 하신다.   셋째, 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시 해야 한다. 미뤄서는 안된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후 그의 동생 마리아는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다. 그 깨뜨린 옥합의 향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셨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고(think), 그리고 깨달은 즉시 감사해야(thank) 한다.    믿음의 감사는 기적을 부른다. 비록 다윗처럼 절망의 순간에 있다할지라도 감사는 그 절망을 소망으로 또 축복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았을 때 즉시 감사하자.   마리아의 향유 옥합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될 줄 믿으며 나가자./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19
  •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선언한 후 18개월이 지났다.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듯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는 반복되는 비대면 예배와 참석 인원 제한에 부딪혀, 모여서 예배하던 당연한 것들이 오히려 지탄거리가 되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위드코로나’가 선포되어 일상으로의 회복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교회마다 터널 속에 갇혀 그냥 주저앉아버린 성도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일상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일부의 성도들에게 예배의 회복만은 더딘 것 같다.    반면, 빠른 일상으로의 회복에 발맞추어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예배할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기도할까?’, 하는 마음으로 늘 성전을 사모했던 성도들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소망의 빛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왔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 속 두 번째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연 18개월 동안 그 긴 터널 속에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지내왔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좌절하고 낙심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였는가, 아니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성도였는가 말이다.    1620년,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자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이미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중 51명이 목숨을 잃었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해서는 원주민들의 공격과 맹수의 위협,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남은 자의 절반이 죽어 49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땅을 일구어 작물을 심고 산으로 나가 짐승들을 사냥하며 물고기를 잡아 양식으로 삼으면서 처절한 생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첫 번째 맞이하는 늦은 가을, 수확한 작물을 들고 하나님께 드린 감사예배는 그들이 길 고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와 죽음을 뛰어넘은 생존의 희망의 빛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단순히 추수만을 위한 감사가 아니라 먹을 양식을 지속적으로 수확함으로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감사였다. 추수는 한 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지켜 주실 것에 대한 예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공포 속에 좌절한 사람은 왜 없었겠는가.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며 원망, 불평했던 것처럼 그들은 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길고 긴 터널을 뚫고 한발 한발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감사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전진하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이다. 날마다 산해진미로 가득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와 며칠을 굶주림에 시달린 자에게 주는 따뜻한 밥 한 끼의 감사는 그 차원이 다르듯이, 고난과 어두움, 시련, 고통을 뚫고 나왔을 때의 진짜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생존의 위협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를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추수감사절이다. 죽음의 터널을 지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 내고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사랑은 이제 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있다.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감사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더욱 감사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축원한다.  /서산 이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1-15
  •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 미래가 있다. 감사하는 생활에는 고난의 복병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역경과 거짓도 감사하는 사람을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야 할 감사를 배우며 문제를 지나친다. 근심과 염려에 붙잡히지 않는다. 불안과 두려움 따위는 가벼운 두통쯤으로 여긴다.   이러한 삶의 주인은 바로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삶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어떻게 의롭게 된 자들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바로 감사하지 않을 때 죄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훨씬 빛을 얻을 것이며 더 많은 하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영역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왜 믿는 자의 감사가 중요한가? 바로 감사의 영적인 일은 천국을 침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마다 감사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에 찌든 마음에는 감사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귀신의 영이며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약3:15). 감사가 없는 마음은 오직 스올일 뿐이라고 했다(시6:5).    아무리 믿음이 크다고 해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스올이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발현이 예배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하는 행위는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감사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헌신을 통한 시인이며 고백이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선포할 때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에 아벨은 참된 예배의 본을 보여주고 있다. 아벨은 실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감사로 예배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감사하며 양을 잡아 피로 희생의 예배를 드림으로 주의 일을 시인한다.    살아 있는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자의 한 사람인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예배의 속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벨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자같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그의 믿음이 그를 증명하여 믿음으로 가인과 다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예배에 하나님의 완전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양은 헛된 것이다.   완전한 감사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도 그의 믿음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인은 현재를 감사했다. 자기의 농사지은 것으로 자기의 현실의 만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다. 거기에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연약함 때문에 감사의 행위에 희생이 따라오지 못하며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농사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드릴 감사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미래가 없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아벨의 노선을 따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한다. 베드로 같은 고백과 시인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감사는 천국을 침노한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 오피니언
    • 정론
    2021-11-04
  • ‘자연치유’ 통해 사랑과 건강을 전합니다
      나는 1967년 꽃 피는 춘삼월 장손이신 1925년생 아버지와 1924년생 어머니의 늦둥이로 경기도 남양주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출생을 말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치유 환경이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장손 집안이었기에 전통의례와 생활풍습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누리며 성장했고, 또 농촌 생활 가운데 몸으로 배운 몸 공부가 풍부하였다. 24절기의 순환, 낮에 해와 밤하늘 별과 달과 은하수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살았고, 땅의 소중함,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가치를 남다르게 체감하면서 성장한 것이 자연치유의 큰 원동력이 됐다. 아마도 이 시절 경험한 것들이 장석종이 창안하여 펼치고 있는 “형상체질”과 “체질 푸드테라피” 그리고 “오감멀티테라피”의 시작이라 여긴다.   아버지하면 청년시절 만주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신 말씀, 한국 전쟁 당시 염병이든 고모를 지게에 지고 피난 가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키우셨던 우리 집 소는 말을 가르켜서 부리는 소였는데 송아지가 나면 코뚜레를 뚫고 말을 가르켜서 일반 소보다 비싼 가격에 우시장에 내셨던 일들도 기억된다.   겨울에 썰매를 타려면 논에 물을 대어야하는데, 벼를 베고 벼 포기의 밑 부분이 높아서 높은 벼를 낮으로 자르시고 물을 대어 겨우내 썰매를 탓던것도 기억된다.   어머니는 고향이 전라도 나주셨고 그래서인지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셨다. 지금도 나에게 소울 푸드인 들기름에 달달볶는 머위나물과 소금간이 잘 밴 오곡 찹쌀밥은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사랑의 먹을거리라 여긴다. 장손 집 맏며느리셨기에 명절 때 가장 먼저 약주술을 담그고, 그 다음에 엿을 고시고, 두부 만드시고, 묵을 쑤시고, 그리고 소당질 하시는 것을 옆에서 다 거들어야 했던 나는 지금도 묵의 달인으로 내가 쑥 묵은 차지고, 다른 묵에 비해 맛이 참 좋다.   어머니는 속병이 있으셨다. 속병은 소화 안 되는 위장병인데 그 원인은 미역국이었다. 옆집에서 생일이라 미역국을 같이 먹자고 하여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드시고 급체를 한 이후부터 평생을 속병으로 고생을 하셨다.   자연치유를 공부하면서 그 원인을 정확히 찾았는데 첫째는 어머니 체질이 수형인으로 미역국이 잘 맞지 않은 것, 둘째는 심장이 약한 분이셨기에 심장으로 인한 심하통 증상을 위장 증상으로 여긴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고생하신 심하통을 통해 나는 자연치유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국내최초, 최고를 지향하는 자연치유 인재의 숲”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번 개강 때 자연치유의 정의를 “문제를 알고 그 문제가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나의 의지와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을 통해 회복되고 소생되는 것이 자연치유다”라고 설명하였다.   간략한 두 줄의 자연치유의 정의는 1987년 자연치유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자연치유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간증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헛수고 일 때가 참 많다, 또 훌륭한 자연치유사역자를 만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하였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역시도 치유와 회복이 그리 크지 않다. 치유를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자연치유는 이뤄질 수 없다. 또 의지가 없는 자연치유는 사상누각이라 여긴다. 모든 것에 우선순위가 있듯이 병을 낳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자연치유력은 발휘가 된다. 예를 들어 아토피로 고생하는 사람이 그 원인이 음식에 있는데 나는 맛있는 것 마음껏 먹고 피부 가려움은 감내하겠다면 아토피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 의지가 참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자연치유 방법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치유를 크게 자연적인 치유(Spontaneous Healing), 자연을 통한 치유(Natural Healing), 자연적인+자연을 이용한 치유(Naturopathy) 3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적인 치유는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불균형들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생명력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제때 자고, 제때 먹고, 제때 배설되어야한다. 자연을 통한 치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치유하는 것으로 피부상처에 아로마 라벤더를 바르는 것, 구내염이 있을 때 프로폴리스를 바르는 것등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런 자연적인 그리고 자연을 이용한 치유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자연치유학이라고 본다.   장석종 박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오감을 통해 수용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오감멀티테라피”를 주장한다. 그래서 출간한 책 제목도 장석종 박사의 오감멀티테라피가 있다. 눈코귀입촉 오감을 활용, 눈과 관련된 칼라테라피, 눈의 홍채를 이용한 홍채영양학 코와 관련한 아로마테라피. 귀를 이용한 귀분석상담학, 사운드테라피, 입을 이용한 푸드테라피, 촉감을 이용한 경락치유학, 근신경치유학, 그리고 영성과 감정과 관련한 감정치유 배치 플라워에센스, 에너지테라피등을 정립하여 치유에 접목하고 있으며, 이 철학이 서울장신대학교 자연치유선교대학원 커리큘럼에 담겨져 자연치유학 석사, 박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장석종 박사는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 학회장이기도 하다. 자연치유 관련 논문을 투고하였지만 심사가 불가하다고 반려되는 경험을 하고는 자연치유학 이론 정립과 대중화를 위한 학회가 필요하고 여겨, 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를 설립하여 자연치유 논문 발표와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매년 11월에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귀분석상담사 자격증, 홍채영양학 자격증을 등록하고 자격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자격을 학회에서 운영하므로 보다 전문가들이 교육하고, 또 교육생들은 전문화 교육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 여긴다. 또 학회에서는 자연치유 도구와 교육 교재 발행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로 기존의 이혈(이침)을 업그레이드 하여 포스에너지볼을 개발하였다. 회원들에게 우수한 제품을 비용적 부담을 줄여 공급하고 있으며, 귀(EAR)용, 바디(BODY)용, 그리고 선교사용을 개발 완료하여 상표등록을 마쳤고 현재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교육교재로 귀건강분석상담학 기본과정 교재를 출간하였고 홍채영양학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서울장신대 자연치유선교대학원장·한국자연치유교육학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0-19
  • 믿음으로 사는 인생
    기독교교육의 대명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했다. “교수님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가장 중요하게 일러주신 제일의 교훈이 무엇인가요?” 교수는 한 주간이 지나 수업시간에 “지난 1주일 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신 것은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 살 것인가?’라네”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삶은 몇 미터 되지 않은 수족관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시사철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아간다. 많은 외부 영향력이 있음에도 흔들림 없는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은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기적과 비유, 많은 말씀과 행동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뒤섞여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주님은 우리가 떡으로, 옷으로, 재물로, 얻은 명성으로, 자기 의로, 자기 성취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믿음으로 사는 인생 되도록 만들려고 오셨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믿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가 생각지도 못하고 가보지 못한 길로 부르셨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생각, 아버지 데라가 가르쳐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는 영적 경험이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광야를 건너게 하셨다. 모세는 그 당시 낙타와 함께 광야를 건너던 대상들처럼 광야를 한 번도 건너 못 적이 없지만, 오히려 그 부족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가게 만든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경험이 필요하고 또 그 경험이 소중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때로는 인간적인 조건을 한 걸음으로 능가하시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길을 막히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는다.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스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선교대회 주강사로 초청받은 이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그 가정에 첫 아이 데이비스가 태어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문제는 얼마 지나자 아기의 밤낮이 바뀌었다.    부부가 일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생활 리듬이 깨져서 신경도 많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오르티스 목사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밤 녀석을 좀 때려줘야겠어. 그래야 녀석이 밤에는 자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밤에 아빠는 울고 있는 아기 침대로 갔다. 그러나 아기가 아빠를 보자 옹알이를 하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를 불렀다. “여보 이 녀석을 봐요. 이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녀석을 내가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 그때 오르티스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의 관계를 다시 깨달았다. 아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아기의 삶과 생명은 단 하나, 부모에게 붙어 있는 믿음과 신뢰의 관계이다.   믿음은 무슨 큰 업적을 세워서 받는 표창장이 아니고, 열심히 어디 다녀서 얻은 자격증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신뢰를 보내며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주님에게 붙어 있어 주님 방식 따르는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걷는 길이 기울어진 듯이 어렵지 아니한가?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사랑으로 긍휼로 대해주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숨을 쉬며 살 수 있다.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0-05
  •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종교는 공동체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문화라는 그릇을 통해 드러내며, 복음의 씨는 문화라는 토양을 전제로 성장한다. 그러기에 선교에서 문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한국 전통문화 속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안에서 성장일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대부분 기독교 교단들은 <대한예수교>나 <한국기독교>로 지칭하면서 ‘기독교’ 앞에 ‘대한’이나 ‘한국’을 넣었다. 이제 기독교는 한민족의 얼과 삶의 자리로 신앙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명절은 조상들의 얼을 신나는 멋으로 그리고 살맛 나는 삶을 찾기 위해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한국교회는 토착화했으면 한다. 그러한 축제 문화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것은 결코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민속명절을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잘 지켜왔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아이들은 꼬까옷을 입고, 어른들은 한복차림에 선물을 마련해서 서로 나누었고, 아침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하느님과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차례(추도예배)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다. 한가위 추석에는 새로 수확한 햅쌀과 햇곡식들로 밥을 지을 뿐만 아니라, 쌀가루로 빚어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가족을 비롯해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놀이가 있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토착화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위기 23:5-14에 무교절 또는 유월절은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이다. 성경주석가에 의하면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의 절기로 보리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추수한 처음 이삭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의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 명절을 받아들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보리 추수감사제사를 드렸다. 단순히 추수감사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 절기를 받아들였다. 땅의 소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보리의 열매로 누룩을 넣지 않고 떡을 빚어 출애굽 사건을 상기케 하였다. 또한 그들 조상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고난의 떡을 먹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왔다.    이와 같이 그 땅의 추수감사제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을 지어서 민족사적 의미를 가지고 유월절로 지키며 그들과 함께 보리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로 만들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그 나라를 건국하게 된 민족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침내 자기네 종교와 문화가 융합되어진 것이다. 자기네 축제 문화에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민속 축제에 신앙고백을 담을 수 있을 만한 교인 수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도 우리 민족과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한국교회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숙은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문화 속에 기독교 선교가 파고 들어가는 ‘문화 선교’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민속명절은 농경사회에서 일어난 문화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변화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했다. 그저 이름뿐이지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뀌어 요식행위로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는 사라지고 있다. 한 조상으로 살아온 민족의 혼과 얼을 엮을 수 있는 문화가 거의 쇠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축제는 열린 마당이다. 이러한 축제에 담기는 의미와 놀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명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누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선도해가는 사회적 책임의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강남대 명예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9-13
  • 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1885년 당시, 문명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개화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어렵고도 힘든 신문 발행을 결심한다.   언더우드는 신문이 조선의 인민을 개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즉 기독교인들이 이 신문을 열독하여 각지역의 의견선도자가 됨으로써 신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함께 전달하게 되면 조선의 인민과 사회가 개화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호 사설은 “누가 와서 우리에게 묻기를 조선이 이 때를 당하여 그중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들이 첫째로 말할 것은 지식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창간호 사설의 제목에서 그 정도로 그는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열망하였다.   그래서 신문 발행을 위해 관련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언문(諺文, 한글)과 양반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두 배웠고, 또 그들의 일상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문에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의 전파뿐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민을 깨우는 수고를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신문 발행뿐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지방에까지 여러 주간 여러 달을 고생하는 전도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 번역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수고를 집중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 역시 수도 없이 시도하였다.   그런 와중에 풍토병이 들었다. 〈그리스도신문〉 1897.8.6.일자에서 “월전부터 원목사께서 열병이 들어 만만 위중한 상태였다 (중략) 목사의 아들 한경이도 병이 들었다. 더욱 황황(遑遑)한 것은 조선 사람도 열병을 두려워하는 병인데, 외국 사람은 수토(水土)가 다른 고로 열병이 들면 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걸렸다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풍토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또 같은 기사에서 “원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구주의 도를 펴라 하시는 명령을 받들고 (중략) 한 때도 한가한 틈이 없이 몸이 매우 곤할지라도 자기 몸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항상 열심을 내어 주를 위하는 일만 하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주의 일을 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역자들의 믿음과 기도와 수고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되었고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신자의 수가 많지 않은 미미한 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를 선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은 무뎌졌고, 오늘날 교회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개독교’로 목사는 ‘먹사’로 교회는 ‘사업장’으로 불리고 있다. 복음과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과 시스템을 우선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 과정에 돈이 ‘억’ 소리 나게 뿌려지고 있다고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믿음을 강조하고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목사는 오히려 홀대를 당할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담보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정신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진 순교자들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예수를 따르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갱신되며 다시금 사회를 선도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론학박사, 전 김포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9-1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총회 기대
    한국교회가 어느덧 총회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언컨텍트 상황에서 맞는 두 번째 총회이다. 삶의 모든 것에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준 코로나19 상황에서 각 교단의 총회는 개최 여부를 놓고 고심하며 분주했던 지난해와는 다른 총회가 준비될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집단이든지 총회는 그 집단의 수준과 역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리이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들끼리 동일한 신앙을 확인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교제하는 기회가 되는 자리가 총회이다. 정체성을 위협하는 도전들에 대한 공동 대처의 장이 되는 것도 총회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전국적 총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임이 될 능력과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자문하며 전국의 모든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며 이제는 ‘위드 코로나(with-corona)’라는 말이 들려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드 코로나’라는 포스트 코비드(Post-Covid,코로나19 이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목회적 과제를 주는 상황인지 목회적 환경의 변화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대면예배가 전면 허용이 되어도 온라인예배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라는 공간과 주일이라는 시간은 가정과 일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주일예배가 가지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응집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올해 장로교 총회는 무엇보다 교회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예배’ 중심의 공동체보다 ‘신앙’ 중심의 공동체가 중요해지고 있다. 온라인예배는 예배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전통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일상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선교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선교의 길이 막혔다. 선교 회복이 절실하다. 다음 세대 회복도 절실한 과제이다. 25년 안에 ‘종교에 대한 경외심 증발’이 미래세대의 특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인터넷의 발달과 휴대전화를 통한 정보의 확산은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과 편견을 갖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회복, 선교 회복, 다음세대 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총회가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복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총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경험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기독교인을 시대와 동떨어진 채 살아가며 상대방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해대는 매우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않아서 생긴 오해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은 삶 속에서의 ‘행함’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행함’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는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에서 진정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루터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장로교회는 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 언제나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장로교회를 경험하고 확인하고 선포하는 이번 총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9-05
  • 장로교 총회들에 바란다
      한국 교계에서 장로교의 비중은 아주 크다. 지역으로는 몰라도 나라의 단위로 본다면 전 세계에서 장로교가 이렇게 주도적인 경우가 드물다. 구한말 선교 상황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헌신하며 애썼고 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본다.    2021년은 특별한 해다. 어느 해든지 그럴 것이지만 코로나19를 두 해째 겪으면서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이 지금의 시간을 유별나게 만들었다. 현재의 우리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땅의 기독교에 관한 진단과 처방과 결단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텐데, 위기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설 방법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에서 가장 비중이 큰 장로교 교단들이 가진 책무는 무엇인가?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서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주제를 놓고도 해석과 판단이 영 딴판일 수 있다.    2020년 1월에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현장 교회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 전체에서 교회 갱신이 주요 관심사였다. 교단과 교계 단체들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 교회의 병과 타락을 진단하면서 나름대로 논의하며 변화의 행동도 시도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갱신에 관한 주제는 옆으로 밀렸고 코로나19 감염 및 방역에 관련한 상황이 교계의 중심 주제가 됐다.    코로나 초기의 신천지 관련 사태와 기독교 극우 집단의 행동이 이 주제를 교계와 사회의 중심에 놓은 주요 원인이었다. 이른바 ‘대면예배와 비대면예배’에 관한 논의와 논쟁에서 정부의 방역 조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일부 교회의 행동도 교계와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차별 금지에 관한 법안과 평등에 관한 법안에 관한 주제도 현재 한국 교계의 중심 사안이다.    여기에 건강가정기본법안도 흐름으로 보아 한 묶음이다. 위 법안들의 내용 자체에 입법의 상식에 벗어나는 과잉입법의 논란도 있지만 교회로서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하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법안들을 반대하는 절박한 이유다. 최근 교계 단체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코로나 방역과 동성애 관련 법안들에 관한 논란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교회는 그 본질상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며 세상을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 현상에 관한 교회의 대응적 행동은 기독교 윤리에서 참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동이 교회의 자기 성찰과 갱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관한 분석과 판단, 입장 표명과 행동은 그 집단이 가진 가치관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66권 성경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 성서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존재다.   코로나를 20개월이나 겪고 있는 지금 한국 교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교세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단들이 교단 총회를 앞두고 있다. 장로교단들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장로교회를 신학 전통을 따라 말할 때 ‘개혁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정신에서 저 유명한 말이 나왔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바로 지금 교회가 약해지고 병들고 타락하는 것을 돌이키는 개혁이 시급하다. 지금 장로교단들이 그 멋진 별명, 그 이름값을 할 때다.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8-26
  • 백신접종과 교회 방역매뉴얼 문제점
      섬기는 성안교회에서 지난 주일까지 전체 교역자와 성도 70%가 백신 접종 완료 되었다.    젊은 교역자 중에는 백신 접종 후 잠시 통증의 시간을 지나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교역자들이 백신을 맞은 이유는 단순하다. 예배의 온전한 회복과 당당한 예배 인도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주의 종의 되는 이유는 예수만 보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에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고 위험 군이다. 실제 어느 교인은 “목사님 제 옆에 오지 마세요.” 라고 농담도 한다. 성안교회의 백신 접종률은 경기도 지역 백신 접종율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1차 접종만 해도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교회만 해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워지며, 교회 여러 활동도 편해진다.   백신 접종자들끼리 만나는 모든 소그룹 모임도 정상화 될 듯하다. 외적으로는 확진자와 접촉 하더라도 자가 격리가 면제되며, 해외여행 후 격리도 면제가 된다. 식당을 이용할 때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우며, 외부 활동 시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다. 이전에 비하면 완전 해방되는 느낌일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 위험한 것을 왜 맞아요? 그런 분들은 반대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위험한 코로나19는 왜 안 무서워할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고, 사람과의 만남에 긴장을 했으며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리 두기 단계의 공포심을 체감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주변은 초토화가 되고 마녀 사냥을 당하였다.   사람은 3개월 이상 자유를 잃어버리면 프레임에 걸리고 감각도 마비가 되어 길들여진 짐승처럼 순응을 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이제는 자유를 찾을 때이고 그 기회가 백신이라면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몸이 약하니 백신을 맞으면 안돼요!”라는 말과 “몸이 약하니 코로나19 위험이 크므로 꼭 백신을 맞아야 해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처럼 성안교회는 방역당국 준칙 잘 따르고, 백신 접종도 앞장서서하고 있으므로 할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4단계서 19명으로 제한한다는 교회 방역 매뉴얼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교회는 유급 직원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직장이다. 모든 직장은 열려 있고 출근을 막지 못한다. 모든 종업원은 인원 계수가 안 된다. 유급 직원과 관계없는 인원 적용은 노동법에 저촉된다. 그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책임을 질것인가?   둘째, 모든 기관은 기본적으로 열려 있다. 단 두 군데, 술집과 교회만 타킷 방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평등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셋째, 예배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청하는 것이 아닌 드림공동체다. 그래서 모든 예배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 예배의 매뉴얼을 국가가 정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심각하게 무너뜨린 것이 된다.   넷째, 백신 인센티브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70%면 국가적인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교인 중 백신 접종 완료자로만 예배를 드리게 한다면 집단 면역의 테스트가 되기도 하며 모든 경제도 살아난다.   다섯째, 이제 교회들은 예배 사수와 교회 존폐의 문제의 막다른 길에 있다. 곧 생존을 위한 거룩한 반격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전야가 지금의 시간이다.   다행히도 방역당국에서 지난 7월 30일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서 일반교인도 참석할 수 있는 대면 예배로 전환하고, 동일 시설 내 종교활동 공간이 여러 개일 경우, 동시간대에 공간별 수용인원의 10% 범위 내로 모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방안이다.단, 방역수칙 위반 시설은 제외키로 했기에 교회들이 솔선수범해서 방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 더 힘을 내자 /성안교회 목사, SAMTV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08-0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