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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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나 ‘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꽝’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그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소)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꽝’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그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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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6
  • [정론] 핵심가치를 세워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청소년 문제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그래서 10대들의 문제는 사실상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관이 무너진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채 방자히 행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꿈과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보다 의미있게 살려는 의욕조차 없음을 알 수 있다.    왜 가치가 중요할까? 첫째, 가치는 삶의 특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옷감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르듯이 인생 또한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르다. 가치는 바로 각 사람의 인생과 조직의 활동에 독특한 정채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가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에 대한 참여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과 단체에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비전을 품은 공동체일수록 “우리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이는가”, “우리 각자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아야만 한다.    셋째, 가치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가치를 갖지만 모든 가치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포기하고 교회 수련회에 가지만, 어떤 학생은 학원 때문에 신앙을 깊이 다지는 수련회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된다. 넷째. 가치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의거해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외면하고 예전의 것을 고집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선태고가 결정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    다섯째, 가치는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거나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가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는 가치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기초는 우리의 가치란 말이다.  여섯째, 가치는 믿을 만한 리더쉽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일종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리더들이 끼치는 영향력의 차이는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비롯된다.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리하여 그들이 진리 가운데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인류의 가슴 속에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끼쳐 왔다.    마지막으로 가치는 인생의 비전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이고 비전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상명령이다. 가치상실과 가치 혼돈의 불확실성 시대에 살아가는 청소년과 젊은이에게, 변함없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핵심가치를 견고하게 세워서 보다 가치있는 삶을 펼쳐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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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2-20
  • [정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연합해 종종 여러 의미 있는 일들을 해 왔다. 한국선교 초기부터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4)를 설립했으며,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찬송가공회’ 등 개신교는 교단을 초월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념적 갈등이다. 소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보존하고 변화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자유주의’는 “기존 전통이나 제도를 새롭게 하고 수정하며 개혁하고 변화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기에, 이 용어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가는, 선호하는, 진보나 발전의 특징을 갖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종종 고전적 예배뿐만 아니라 예술이 포함된 생명력 있는 예배, 질문을 포함한 지성적 정직,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긍정,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를 존중, 생태 문제·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이라는 말보다 ‘진보적’이라는 말을, ‘보수주의적’라는 말보다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이 둘의 조화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는 말이 과거를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라, 변화에 대해 열려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적 문제에 중점을 두어야 연합과 일치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한국 교회에 내재된 갈등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이 서신들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도 사랑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위격 논쟁, 삼위일체 교리 등 여러 공의회들을 통해 결정된 교리들도, 성경을 당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재해석한 분투의 결과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의 진리를, 각 시대의 언어와 철학으로 해석했던 변증의 역사였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과학적 무신론에 빠져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회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이 제기하는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이념적, 사상적, 신학적 갈등을 가속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이슈들에 대해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서로 소통하며 나아갈 때, 한국 교회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감리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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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23
  • 성서와 생활[11] 그리스도인의 영성-기도의 영성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의 승리로 이 땅 위에 세워진 주님의 새로운 몸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음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받은 지체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다. 부름 받은 모든 지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자라게 함으로 온전함으로 나아가게 된다.골2:12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며 주님의 표현이기에 교회의 사명은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곧 교회는 주님이 계시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바로 온전히 주님을 나타내는 일에 있다.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일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사역은 무엇일까? 죄사함의 구원선포와 치유의 역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교회 사역의 중심이 되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를 세우는 일에도 밤새워 기도한 후에 12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눅6:12-13 수시로 사람들을 피해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시다.롬8:34 주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교회가 주님 사역의 연장선 위에 세워져 있다면 바로 기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곧 기도에 있다는 진리를 세우는 일이다, 부흥과 기사와 헌신과 선교보다 앞서야 하는 일은 기도하는 사역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한 기도가 계시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위해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준비하는 길이 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교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큰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작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성도가 기도하는 일은 교회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교회의 가장 높은 일임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뛰어난 영적인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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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19
  • [정론] 하나 됨과 평화의 길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눅19:42)   한 때 교회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나였다. 하지만 보편교회는 이미 해체되었고, 다양한 종교와 인종, 민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가 약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교회는 소수자들 모임이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 교회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로 출발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적은 무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한마디로 교회가 힘이 빠지는 현상은 ‘정체성 회복의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하고(고후11:30),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이다(고후12:9).   그동안 교회는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가진 권력과 부를 통해 발생한 현상이었고, 가난한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여성과 이방인 등은 교회의 소외 계층으로서 말할 기회를 상실했다. 신약성서는 여성을 포함해 이방인도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고, 만일 언어 문제로 소통이 어려울 때는 그들을 대표하는 집사를 임명해 그들이 소외되는 일을 방지했었다. 하지만 교회가 강해지면서 교회 안에는 장벽들이 출현했다.   교회는 약한 자들을 환대할 때 존재의 이유가 명징해진다. 교회는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힘을 빼앗긴 자들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배척 당하는 자들이다(눅6:20-22). 이제 그들은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이 땅에서 자신의 처지에 있는 자, 또는 있었던 자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기뻐한다.   뉴비긴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기에 좋든 싫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회중은 하나님이 몸소 기꺼이 불러 그 아들과 교제하도록 모으신 사람들이다. 그 교인들은 그분이 직접 택하신 것이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므로, 좋든 싫든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 격리된 모임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모임이며, 그것을 조성한 힘은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까지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치시는 그 사랑이다”.   한국 교회가 이 땅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되기 위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길은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품을 때 평화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이 일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받는 길이다(마5:9).   갑진년 새해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약한 자들을 위한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면 여전히 희망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소명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나?“ /성서대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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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1-18
  • [정론] 기독교 ‘사랑의 실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사랑의 종교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담겨 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시점에 ‘기독교가 사랑을 실천하는가?’ 그리고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은 ‘글로 쓰여진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사랑’을 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글로 쓰여진 사랑’과 ‘삶으로 쓰는 사랑’이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보여준 소설이 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인 <올리버 트위스트>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1834년에 제정된 ‘신빈민 구제법’에 저항하기 위해 썼다. 영국의 ‘신빈민 구제법’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구빈원 같은 수용시설에 집어넣어서, 아주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잠잘 공간,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가혹한 일을 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법이다.   사랑을 삶으로 써야 하는 기독교는 약자를 함부로 대하였고, 더 혹독하게 다뤘다.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구빈원 위원들은 구빈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잠자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강요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올리버다. 약자를 대표하는 그는 아침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 노동 강도에 비해 식사량은 턱 없었다. 아이들이 먹는 식사량은 세 숟가락의 수프뿐이다. 배가 고파 아이들이 얼마나 숟가락으로 긁어먹었는지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구빈원’이란 자유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도 없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이 있다. 미국 성공 신화로 유명한 팀 하스다. 회장은 하형록 회장으로, 사훈은 책 처럼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는 잠언 31장 20절 말씀이다. 잠언 31장 20절은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다. 팀 하스는 하형록 회장의 잠언 31장 20절 말씀에 근거해 회사를 경영하자 미국 동부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100대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글로 쓰여진 헛된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여진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한다. 김하중 대사는 <하나님의 대사:사랑의 중보자>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따라 배울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으로 하는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두드러진 특징이어야 한다. 이 사랑의 실천, 인간의 힘으로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기 위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된다.     기독교 영성가인 달라스 윌라드는 영성 훈련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영성 훈련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절제의 훈련이다. 다른 하나는 참여의 훈련이다. 사랑의 실천은 참여의 훈련에 속한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한 구빈위원들은 올리버가 배가 고파 구빈원 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주세요.” 결과는 참혹했다. 올리버는 국자로 맞기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프를 조금만 더 달라’는 말 한 마디로 위원회가 회집되었다. 글로 쓰여 진 사랑의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2023년 말이 다가온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기독교는 삶으로 쓰여진 사랑을 했는가?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많은 이웃이 나보다 힘들다면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해야 한다. 기독교가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 실현이다.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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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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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 대 진보, 이보다 높은 기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하다. 보수와 진보, 세대, 사회적 성취에 따른 계층, 지연과 학연, 혈연 등이 그 현상들이다. 이 중 보수와 진보는 사회 갈등을 총칭하는 통속적인 표현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그 본디 개념에 부합되지 않는다. 정치 현장을 중심으로 정당의 이익을 위한 도구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려면 보수와 진보의 틀을 넘어서는 상위 가치의 틀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단어의 뜻을 먼저 정의한다.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을 중심으로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 하면 ‘팩트’다. 언론 보도의 유형으로 말하면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의 내용이다. 언론의 기획 기사나 심층 보도에서는 취재 기자나 기자 팀의 시각과 주견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는 언론 보도의 일반적인 준칙에 따라 사안 자체의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사실을 의도적으로 꺾거나 비트는 것은 언론을 병들게 한다.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사실 또는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을 뜻한다. 이 단어의 개념에서는 사람의 자의식 곧 마음에 인식하고 있는 거짓이 있느냐가 중점이다. 거짓 정보를 진짜라고 굳게 믿고서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마음의 자의식에 거짓은 없으니 진실이다. 그러나 사실에서는 틀렸다. 인격이 훌륭하고 윤리도덕으로 수양이 깊은 사람은 진실성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에서 실수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올바른 정보가 차단되고 거짓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사실에서 실수한다.   ‘진리(眞理)’는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를 뜻한다. 특히 종교에서는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르침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복음인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가리킨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끊임없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묵상에서 깨달은 바를 인격적인 결단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는 정보 습득 차원의 지식과 다르다. 삶의 처신이나 처세의 성숙함을 뜻하는 지혜와도 다르다.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이들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인들까지 보수냐 진보냐를 물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 요한복음 18장 38절에 있다. “진리가 무엇이냐?”   위에서 살핀 세 단어를 사용해서 세심하게 표현해보자. 먼저 아주 분명한 것, ‘진실’에서 벗어나는 사람 곧 마음에 거짓을 품은 사람은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보수든 진보든 거짓은 하나님 앞에서 죄다. 다음으로, ‘사실’을 알려는 노력과 수고가 없이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을 파악하는 데 힘을 쏟는다. 보수든 진보든 사실에서 어긋나면 잘못이다. 진리는 그 안에 진실과 사실을 포함한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가치는 진리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가치는 사실과 진실의 본디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 상황에서 사실의 규명이나 이른바 진실 게임 같은 것들을 놓고 논쟁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진리를 중심에 놓고 이를 근거로 사실과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현재의 갈등을 넘어서는 더 높은 기준을 갖고 보수와 진보를 끌어안는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축이다.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4-15
  • ‘춘래불사춘’과 교회
       서울의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일찍 피었다는 꽃소식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봄이 빨리 우리 곁에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춘래불사춘’이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욕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욕을 하고 싸잡아 비난을 해도 교회는 묵묵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코로나 펜데믹의 가장 큰 희생자가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2021년 부활절을 맞았다. 화창한 봄과 더불어 찾아온 부활절이다. 하지만 교회는 조용하고 잠잠하다. 기독교 최대의 축일인 부활절을 앞두고 냉냉하기만 하다. 교회의 사회적 위상과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교회에 대한 불신과 비난의 소리가 드높아도 숨을 죽이고 있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꺼내면, 세상 사람들이 온통 달아오른다.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단순히 코로나 때문일까?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때문일까? 아니면, 교회에 대한 매스컴의 부정적 보도 때문일까? 혹은 일부 정치인들의 반기독교적인 정서 때문일까? 물론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이유를 우리는 찾을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불신을 조장하는 여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이같은 의혹들은 오늘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전문가들을 통하여 코로나 이후의 교회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의하며, 다양한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의 공공성’의 이슈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대한민국 교회가 사회적 위상과 영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과연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직시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심각한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공공성은 “교회가 진정으로 섬김의 공동체가 되느냐?” 라는 물음과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물음은 새로운 물음이 아니다. 이미 2천년전 초대교회부터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이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신선한 삶의 충격과 새로운 변화의 도전이 되었다. 곧 교회가 세상에서 ‘대안공동체’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공공성이 절실한 이 때, 교회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져야 한다. 과연 교회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져도 교회는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전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종교적 표상과 기복의 도구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금 십자가, 은 십자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를 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저하지 말고 십자가를 져야 하며, 섬김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 교회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살고, 교회가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께서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부활의 능력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나아가라.” /동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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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4-02
  • 찬송가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감격하여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곡조 있는 성도의 고백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으로 부터 40여 년전 한국교회는 합동찬송가와 새찬송가, 개편찬송가란 이름으로 여러 찬송가가 혼재되어 연합집회를 비롯한 초교파 모임이 있을 때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1981년 4월 9일 한국찬송가위원회(통합, 기감, 기성, 기침, 기장, 고신)와 새찬송가위원회(합동, 예감, 루터)가 교계의 뜻을 따라 한국찬송가공회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의 통일찬송가를 제작 보급하게 되었다.   통일찬송가를 사용한지 23년이 지나고 시대의 변화와 교계의 요망과 한국인의 창작찬송 필요성에 따라 새 찬송가 발행을 추진해 오던 중 2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하여 400여회의 회의와 토론회를 거치고 해외에서 3차례(뉴욕, LA, 토론토)의 공청회를 거쳐 통일찬송가 중에서 481곡 외국 찬송 중에서 53곡 창작 한국찬송가(공모 곡 포함) 1만여 곡 중에서 엄중 심사한 후 111곡을 선정하고 645곡의 21세기찬송가를 발행하여 2006년 9월 30일에 백주년기념관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리고 오늘 까지 초교파적으로 통일된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찬송가공회는 2006년 12월 4일에 일반찬송가를 2007년 9월 10일에는 해설찬송가를 2008년 2월 5일에는 한영찬송가를 한국찬송가공회 명의로 저작권등록을 마쳤다.   그 후 한국찬송가공회는 교계의 요구와 원활한 사업 추진을 꿈꾸며 재단법인을 설립키 위해 노력해 오던 중 충청남도에서 재)한국찬송가공회를 설립하였어나 재)한국찬송가공회 설립에 관한 문제와 출판권 문제,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소송을 접하면서 7~8년 동안 막대한 소송비용과 이해 충돌로 인해 3개 교단에서 이사 파송을 중단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바라는 교계의 간절한 소망과 이해 당사자들이 한 마음 되어 상호 양보하는 차원에서 모든 재판을 합의로 종결(2016년 2월 5일)하고 재)한국찬송가공회(공동 이사장 서정배, 강무영)와 5개 교단대표(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전용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유동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채영남,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 박무용,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최부옥)와 비공회 대표들이 프레스쎈타에서 만나 (2016년 2월 11일) 많은 교계 언론사와 기자들 앞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종식하고 재)한국찬송가공회는 출판계약 당사자인 기독교서회와 예장출판사와의 계약을 존속하며 성서원,아가페,생명의 말씀사,두란노등 4개사와는 반제출판을 하도록 하고 이해 당사자들의 일보양보와 상호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정신으로 합의되었음을 확인하고 각 교단도 재)한국찬송가공회가 한국교계에 연합과 일치의 본이 되는 연합 가관이 되도록 함께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었던 과정을 지나 오늘에 이른 재)한국찬송가공회는 교단의 이해를 넘어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넓고 큰마음으로 하나 된 찬송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많은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기쁨이 충만한 찬송을 부르며 더 발전된 찬송가 제작과 보급으로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이바지 하는 기관이 되길 간절히 소원해 본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3-30
  • 믿는 것과 귀의하는 것
      “불교에 귀의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잘 안쓴다. 그 대신 “예수 믿는다”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왜 그럴까? 예수 믿는다는 말이 더 좋을까? 아니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표현이 더 좋을까?   예수 믿는다는 뜻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찬동하고 신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귀의라는 말은 무엇으로 돌아가 몸을 의탁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종교와 관련될 때는 종교적 절대자나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여 삶을 거기에 기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을 강조한 것이고, 귀의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 그의 삶이 누구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특별한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간다는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신자는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신념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믿는 것이야말로 귀의하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귀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의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가슴이나 머리로, 혹은 손발 중 하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빗나간 열정주의자나, 이성주의자나 혹은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믿는 바에, 사람이 되는 바, 사는 바를 일치시키는 데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삼위일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삼위일체를 상기해내고 관조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데 자기 전체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15.20.39)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으로 그분께 귀의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연 만물을 선대하여 그것들이 쉼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 대한 삶에 귀의가 없는 예수께 대한 믿음이 과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셨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분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심리적 집중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사랑을 바쳐 그분의 뜻에 귀의한 삶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까워 뒤로 빼돌려 감추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영혼까지 아버지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나타났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기독교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호들갑 떨진 말자. 비난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자.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구차히 변명하지도 말자. 예수는 믿는다고 떠들면서 삶으로 귀의하지는 않았던 우리의 위선을 돌아보자.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피를 토하며 고백했던 그 고백을 다시 드리자. “저의 잘못, 저의 크나큰 잘못 때문이옵나이다”(Mea culpa, maxima culpa). /열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3-10
  • 영성의 큰 꿈을 꾸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살아계시고 과거에 역사하셨고 미래에도 역사하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 현재에도 일하시고 역사하신다. 대한민국은 이스라엘처럼 선택된 나라임이 복음 역사 선교대국으로 증명이 된다. 130여년전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선교씨앗이 오늘날 교회를 이루고 국가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대현 교회의 부흥운동은 회개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19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1973년 빌리그레함 대형집회로 선교 역사가 더욱 확장되어 오늘날 5만 교회에 이르렀다. 전 세계에서 선교대국으로 미국 다음으로 활동하는 나라가 되었다. 따라서 교회 성장과 정비례로 6·25 폐허 후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한 조국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 역사요 신적 계획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교회 성장은 예배당 건축과 정비례한 듯 전국에서 성전건축에 치중하여 십자가 종탑은 많으나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크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훈련, 기도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 아픔인 코로나 바이러스로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영상으로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이러스로 인하여 이단의 실체가 드러나고 교회들의 존재방식과 의식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교회를 향하신 사랑의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그 순수함을 다시 찾아 재도약해야 한다. 둘째, 비대면 예배로 코이노니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교인 사랑이 식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대교회의 성도간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영성 강화에 힘써야 한다. 말씀, 기도, 찬양의 개인 생활의 영성화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한 부흥회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넷째, 이단분별 교육과 척결에 힘써야 한다. 이단의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찾아 알리고 단호히 배격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다섯째, 목회자의 재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학교의 난립으로 목사 안수를 남발하여 자격미달 목회자 문제가 심각하며 이로 인해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 때문이다. 여섯째, 새벽기도로 영성강화에 힘써야 한다. 예수님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주기도문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고 최후의 겟세마네 피땀기도 본받아 기도생활로 영적 불꽃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일곱째, 희망을 바라고 희망을 심어야 한다. 코로나로 실망하고 좌절하는 마음들을 새롭게 희망의 꿈을 꾸도록 메시지를 전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혼구원의 방주요 든든한 성인 교회는 영성강화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다른 염려는 버리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십자가 보혈의 사랑으로 세상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할 것이다. 교회숫자, 건물의 외적 모습보다 내적 영성 강화와 종말 시대의 참된 바른 신앙 확립을 위해 온 마음의 열정을 쏟아야 할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어두운 이 터널을 지나면 영광의 빛이 찬란히 빛나리라 믿는다.  /전국호남협의회 대표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3-05
  • 김남준목사 정론
    “불교에 귀의하다”라는 말은 사용해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표현은 잘 안쓴다. 그 대신 “예수 믿는다”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왜 그럴까? 예수 믿는다는 말이 더 좋을까? 아니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표현이 더 좋을까?   예수 믿는다는 뜻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찬동하고 신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귀의라는 말은 무엇으로 돌아가 몸을 의탁한다는 뜻인데, 이것이 종교와 관련될 때는 종교적 절대자나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여 삶을 거기에 기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을 강조한 것이고, 귀의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 그의 삶이 누구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특별한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간다는 포괄적인 개념을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신자는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신념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믿는 것이야말로 귀의하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귀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의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독교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가슴이나 머리로, 혹은 손발 중 하나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빗나간 열정주의자나, 이성주의자나 혹은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믿는 바에, 사람이 되는 바, 사는 바를 일치시키는 데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삼위일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삼위일체를 상기해내고 관조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데 자기 전체를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15.20.39)   예수를 믿는 것은 사실상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으로 그분께 귀의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연 만물을 선대하여 그것들이 쉼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 대한 삶에 귀의가 없는 예수께 대한 믿음이 과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셨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분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심리적 집중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사랑을 바쳐 그분의 뜻에 귀의한 삶이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까워 뒤로 빼돌려 감추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영혼까지 아버지께서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나타났다.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기독교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호들갑 떨진 말자. 비난하는 사람들 원망하지 말자.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구차히 변명하지도 말자. 예수는 믿는다고 떠들면서 삶으로 귀의하지는 않았던 우리의 위선을 돌아보자.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피를 토하며 고백했던 그 고백을 다시 드리자. “저의 잘못, 저의 크나큰 잘못 때문이옵나이다”(Mea culpa, maxima culpa).      /열린교회 담임목사. 총신대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2-25
  • 3.1운동과 한국교회의 미래
      올해는 102주년 3.1독립만세 기념해이다. 3.1운동은 단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민족적 저항의 날만이 아니다. 이 독립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 국민들의 저항 정신이 한데로 모아져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생겨나게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창립하게된 것이다. 황제가 중심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 창립으로서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 정신이 계승되어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자 대한민국이 1948년 새로운 국가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은 일제 식민지로부터 나라뺏긴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가동시킨 동력을 제공했다. 1910년 당시의 군국주의 일본에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무위원들이 일본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후 형식적으로 남은 국가의 권력까지 일본에 문서적으로 넘겼다. 5백년 지속된 한 나라가 한일한방 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국가의 옥쇄를 넘긴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다하고, 일본이 개화로 군사대국이 된 것도 파악하지 못한채 19세기의 서구 열강의 식민지주의에 아무런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러한 19세기 말의 식민주의 시대에 대한제국의 황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관리들은 탐관오리로 가난한 서민들을 착취하고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군대도 없었고, 경제력도 없었다. 이때 서구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 민초들의 보호자요, 선교사 저택은 민초들의 도피처였다.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일대를 손아귀에 넣었고,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하고 10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 일제로부터 각종 억압과 천대를 받았다.   조선의 전통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무력하여 일본 식민지 정책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갖지 못하게 할 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 의하여 평등하며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시켜주었다.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들고 와서 민초들의 상담자가 되어 신문물인 의료와 교육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 앞에 평등사상과 자유와 독립사상을 불어 넣어주었고 교회를 세워 지도자들을 양육했다. 그리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바로 독립을 되찾아야한다는 독립정신을 점화시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국가와 민족의식이 깨어있는 민족임을 입증했다. 양반, 상놈, 천대받는 기생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망국이 다 나의 책임이라고 고백한 민족적 고해성사였다. 3.1절은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이 없어진 데서 살아난 날이었다. 국가의 주권이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3.1운동은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모세와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의 신앙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이 애국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정교분리를 내세운 선교사들 모르게 독립운동을 모의하게 되었다. 교회의 전국적 조직은 당시 집회결사의 자유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유일한 전국적 연락망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기독교는 약 20만명으로 전국민의 약1.5%에 불과했으나 2천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박해와 피해를 입었다. 그 대가로 기독교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제일의 종교가 된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로 인하여 지구촌과 우리사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란 3.1정신을 계승하여 방역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코로나 퇴치에 앞장 선 종교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02-23
  • 이중직 목회, 일탈인가? 희망인가?
      코로나19는 1년이 넘도록 기세를 떨치며 세간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대면예배를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였고 대부분의 소모임들이 중단되면서 교회는 활력을 잃고 있다. 지금으로썬 코로나19가 지나가도 예전으로 다시 회복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심방과 봉사, 설교와 성경공부, 기도회와 철야예배, 장례 및 결혼식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기존 교회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 이제 교회의 기존 시스템으로 미래를 견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목회적 케어나 상담도 점점 빛을 잃고 있으며 전문가들에게 전이되고 있다.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 차원의 새로운 선교 전략이 요청되지만 녹록치 않다. 코로나19 이후 중대형교회에 비하여 소형교회와 미자립교회는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며 목회론도 재정립해야한다.   ‘이중직 목회’란 목회를 직업으로 분류한데서 파생한 말이다. 목회 외에 다른 직업을 더 가지면 이중직이 된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성서적이며 기독교전통적인 목회다. 전통적인 직업개념이 몰락하고 다중직, 다중역활 사회로 변화하는 것에 발맞추어 ‘이중직 목회’를 시대와 소통하는 선교, 목회적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실재 이중직 목회는 협소하게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중직 목회를 반대해 온 기존의 교회 구조는 목회자가 다른 직업을 가질 경우 기존 목회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미자립교회 목회자 생계 문제와 연동하여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중직 목회는 다양성의 문제이고 선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할 과제이다.   이중직 목회란 말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목회를 광의의 의미로 담으면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을 목회로 보기도 한다. 지금 이중직이란 잣대로 보면 실재 감리회 초기 선교사는 모두 이중직이었다. 선교사들은 의사이며 목회자로 혹은 복지사와 사회선교사로 교회를 섬겼으며 사회를 선도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의사였고 목회자였다. 아펜젤러 선교사도 목회자이며 교육자였다. 지금 목회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이들은 미자립교회 목회자만이 아니다. 이중직 불가를 장정에 명시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이중직은 단순 잣대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코로나19 정국에서 이중직인 목회자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교단보다도 오히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중직 목회에 속한 직업군도 참 다양하다. 카페 운영자, 도서관 사서, 목수, 교회 리모델링 사업 지원, 대리 운전, 편의점 알바, 농사꾼도 있다. 택배기사, 건설 노동자나 청소부로 일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시간 강사, 사회선교사 등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식으로 선교 사역에 참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자립적 기반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19 정국에서 교회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신뢰도는 낮아졌고 교회에 대한 호감도 크게 실추됐다. 결국 교회는 미래 대안에서 밀려나고 있다.   한국 초대교회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 초대교회는 주로 의료선교사와 학교 교육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왔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지었고 오히려 교회가 부차적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목회가 등한시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영성적 토대가 되었고 깨우침을 얻는 교육의 장이었으며 기도의 산실이었고 사귐의 장이었다.   목회자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목회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를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목회를 교회 안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행하는 모든 일도 목회이다. 그러니 목회자의 일거수가 다 목회라는 새로운 목회관이 필요하다. 교회도 이제 교회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선교적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야 할 곳은 교회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다. 이중직 목회는 일탈이 아니고 대안이며 희망이다.   /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전국총무·가재울녹색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7
  • 한국교회정론-4
    전 헌법재판관 안창호 장로   주체사상은 김일성 일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상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수령론에서 나타난다. 북한이라는 사회적 생명체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은 뇌수(뇌)이고, 일반 주민은 수족이다. 뇌수인 김일성 일가의 명령에, 수족인 일반 주민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이런 주체사상에 대해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광장이나 길거리 등 공공의 장소에서, 학교에서 비판할 수 없다. 지금도 백두칭송위원회가 광화문 광장에서 ‘김정은 환영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지면서, 김정은을 위인으로 칭하고 찬양했음에도 어떤 제재가 없다. 김정은은 고모부와 이복형을 살해하고, 그의 독재체재를 위하여 2,700만 북한 동포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이다. 또 최근에는 물에 빠져 구조를 요청하던 대한민국 공무원을 죽이고 그 시체를 불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독재자로 표현하거나 주체사상의 모순을 지적하면 차별행위로 제재될 수 있다. 밝은 대낮에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비판할 수 없고, 찬양만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언론이나 소셜 미디어,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등 각종 학교에서 전체주의와 같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사상 등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제한되고, 성적지향 등의 보건·의료적 유해성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 통제된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 특히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와 학생들이 건전하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인격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고, 전체주의 세계관과 성적지향 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진리와 진실이 왜곡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훼손되며, 공공의 가치와 공동선이 침해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질서를 훼손하고, 공화적 가치를 지향하는 윤리를 해체하며, 도덕적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또, 공산주의자 그람시의 바람대로 가정, 교회 및 국가(문화) 공동체의 변질과 해체의 원인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긴 행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주역 안토니오 그람시는 ‘왜 이탈리아에서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를 지지하는가?’,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헤게모니에서 찾는다. 그는 ‘지배계급은 힘의 지배와 함께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지배를 유지한다. 지배계급은 헤게모니, 즉 문화적·도덕적·이데올로기적 지배를 통해,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본주의사회는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교·언론·종교를 통해 시민사회와 국가 등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토대로부터 생기는 압력을 통제하고 권력의 원천인 사회질서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그람시는 “문명세계는 무려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로 철저히 물들었다. 그러므로 유대-기독교 가치에 바탕을 둔 나라는 모두 그런 뿌리들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뒤집어질 수가 없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권력은 잘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손에 굴러 들어오게 될 것이다”고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6
  • 코로나19 이후 시대에 대한 대응과 전략
      2020년을 보내고 2021년 새해를 맞이하는 예배는 코로나19 감염병 거리두기 2.5단계 방역지침에 따라 방송 송출에 필요한 예배 위원 20명 미만의 인원으로 제한되어 하나님께 드려졌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며,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지난 세월 드려졌던 설렘으로 다가오는 희망의 축제의 예배보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해결되지 못한 큰 숙제를 안은 채 예배가 드려졌다.    앞으로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 시대 대비를 위해서 목회자는 교회의 목회 사역의 방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며 설정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한 달 한 달 버티기도 힘든 상황 속에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양 사역의 방향성은 어느 수준 어느 단계까지 진행하여야 하며, 웨슬리 부흥 운동 이후 교회의 노멀로 표준화되었던 주일찬양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소그룹제자훈련, 부흥회 등은 새로운 뉴노멀 비대면 혹은 소수 인원제한의 원칙이라는 작지만, 치명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 이후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것은 21세기 극도로 발전해 가고 있는 포스트모던과 세속화의 물결을 따라가는 진보·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성이다. 일본의 ‘신인류’ 혹은 ‘신진루이’라고 호칭되는 일본 젊은이들의 세속문화는 머리 염색, 문신, 계속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한국의 대중문화와 교회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은 이제 기독교 국가라는 과거의 명성에서 극도의 인본주의적 세속화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성경 읽기와 공공 기도가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금지되었고, 변호사 사무실에 걸려진 십계명 등은 이웃 종교인들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코로나19 이후 더욱 강해져 가는 세속화와 자유주의 물결로 인하여 교계는 더욱 어려움에 처해가고 있다. 교계의 어려움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일부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중심’이라는 기본 신앙을 21세기 세속화의 시대에 배타적이고 아집에 가득차 자기 욕심만 부리는 이기주의의 온상처럼 오해하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간과한 사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진리의 유일성이다. 다양한 가치 체계가 공존하는 사회를 이상적 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이 관용적이지 못하다고 이야기한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중차대함에 아무런 악영향이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로 이를수록 구원을 향한 길이 좁아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코로나19 이후 극도로 강화된 포스트모던 세속화시대에 적합한 대응전략을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세속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근대 형이상학적 교리나 형식적인 규범 그리고 전통적인 예전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근대 후기에 조성되고 있는 일반 신자들의 현실적인 삶과 필요에 기독교의 본질적 영성인 ‘오직 예수의 영성’을 제공함으로써, 일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 영성’은 기독교의 본질인 ‘십자가 자기 죽음의 영성’이다. 이 본질적 영성을 한국 기독교는 모든 교회와 기관 그리고 예배와 교육, 선교와 봉사 영역에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한국교회가 ‘오직 예수 영성’을 일상에서 실천하지 아니하고 기존의 방식대로 고등 종교화하여 교리화하고 박제화 시켜버린다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족하여” 세속화 시대에 매몰되어, 결국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성 부흥사회 대표회장, 주님앞에제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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