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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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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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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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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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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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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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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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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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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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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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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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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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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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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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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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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현대 추수감사절 열매
- 추수감사절이다. 지난 11월 11일에 CBS 생명돌봄 국민운동 캠프 출범식이 있었다. CBS 김학중 이사장이 인사를 했고, 이영훈 목사가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인사말을 했다. 그 내용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인구 열매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이라는 대재앙을 어떻게 물리치고 집집마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울고 웃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일에 CBS가 패스파인더가 되어 주고 출산 운동을 위한 허들링의 역할을 해 줘 감사하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정부에서 한국교회에 몇 조만 지원해 주었더라면 0.84라는 재앙은 면했을 것이라고 본다. 목회하면서 아이들을 한 명 더 낳으면 유모차를 사준다고 해도 유모차를 받으려고 애를 낳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4명을 낳으면 성지순례를 보내준다고 했더니 3명 난 사람이 성지순례 가서 애 하나 베어오겠다고 해서 보내준 적도 있다. 교회는 이렇게 즉각 효과를 보는 곳이다. 또, CBS에 몇 조만 지원해 줬다면, 지금 시골이건 도시건 애들 우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가득하고 전혀 새로운 베이비부머 시대를 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CBS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국교회와 함께 생명돌봄 국민운동을 하게 되어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구재앙이라는 광야에 서 있을지라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선도적 길을 손을 잡고 함께 간다면 생명 경시와 죽음의 진혼곡, 레퀴엠을 물리칠 수 있. 생명의 탄생이라는 아리아와 생명의 녹색 심포니가 조국 땅에 가득가득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조국 땅에 생육과 번성의 푸른 젖줄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푸르고 푸른 길, 아름다운 생명의 꽃길을 CBS가 앞장서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린다. 한국교회도 더 출산운동에 앞장서겠다. 정말 우리나라는 인구절벽으로 큰 재앙을 맞고 있다. 이럴 때 우리 젊은 친구들이 동성애 보다 이성애의 축복을 알고 다 결혼해서 출산운동에 앞장서기 바란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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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메시지] 현대 추수감사절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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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기르자
- 지금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중국이 밀리는 듯하다.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중국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도 허황한 꿈이 되어 중국 자체가 분해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 정부는 중국에 바짝 붙어 무슨 이득을 보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으름장에 싸드도 포기하고, 중국제 태양광을 온천지에 깔았다. 이 세상의 모든 분야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코로나19의 예방도 결국 병균을 막아내는 면역력을 키우기 위함이 아니던가? 힘이 있으면 이기고 힘이 없으면 죽는다. 예컨대 「체력(體力)이 국력(國力)이다」라는 말이 있다. 허약한 육체의 힘을 갖고 있으면, 국가의 힘도 없다는 것인데, 아마도 국가 체육을 권장하는 말인듯하다. 하기야 올림픽 금메달 개수가 국력이 되는 것도 맞는 말이다. 또한 「경제력이 국력이다」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개인도, 회사도, 국가도 경제가 든든하게 힘을 바쳐 주어야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고, 국제적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 지구상에 가장 못사는 가난뱅이 나라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토양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를 일으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어 세계가 한국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역시 경제적 힘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정치력이 국력」이기도 하다. 최근에 돌아가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잘 나가고 있는 반면에, 정치는 가장 후진적이고,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상식이란다. 내년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에서는 후보 경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후보 경쟁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진실하게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탈락 되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사기꾼, 부동산 투기꾼, 도적 사람, 불법을 자행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은 표를 많이 받고 있으니... 정말 이 나라가 어째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유권자라는 사람들도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다. 나라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일할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권에만 개입하고, 세 치 혓바닥으로 이리저리 둘러대고, 감언이설로 여론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표를 주고 있다. /전 총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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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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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의 참뜻
- 단순히 생각하면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만물과 인간이 신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고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그런 관계 설정 속에서 흔히 얘기하듯 구원사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가령,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즉 육신이 죽으면 신의 은총에 따라서 생애를 산 사람은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신의 은총 속에서 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사랑을 베푸는 일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어떻게 생각하면 다분히 편협함을 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배타적인 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선량하고 착하게 살더라도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편협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모 신학 대학의 교수 한 분이 반드시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그 삶이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그러니까 평생 사랑을 실천하면서 세상을 선량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그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을 일으킨 예도 있는데 이것 역시 결국 기독교인들의 사랑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근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사랑의 실천’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범인류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다. 그야말로 인류의 모두를 감싸 안는, 그리고 인류 모두가 반목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고 빼앗는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 있는 범세계적이고 범인류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주장하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에서 그 사랑이란 내세의 구원사적인 전제가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신의 뜻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뜻을 가지고 산 사람은 죽은 뒤에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의 실천’은 내세가 전제된 사랑이 아니라 현존하는 인류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반목과 갈등과 약육강식의 냉엄한 질서라든가 이런 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 척도로서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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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의 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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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버린 인간들
- 금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지 504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혁은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무용지물처럼 버림받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할 때, 그 종국은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명백히 교시하고 있다. 진리를 버리면 자아가 자신의 주인이 되고 누구에게도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는 무신론자가 된다. 무신론은 심판자가 없다는 것이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형벌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신의 심판이 두렵지 않다. 종교개혁이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버리고 세속화된 삶에서 이를 청산하고 본질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해야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답게 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많은 소유를 가지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낙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느냐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있지만, 참된 인간의 삶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다가 죽느냐는 것을 성경에서 배우고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 내용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고전과 문학 작품들이 수없이 줄을 이어 출간되었다. 그중에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어거스틴의 『참회록』, 존 번연의 『천로역정』, 존 밀톤의 『실락원』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등이다. 이 작품의 공통점은 죄악 속에 사는 인간의 현주소와 죄를 범한 인간이 받는 각종 고난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사후에 받을 심판으로 인한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인간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복귀해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개혁의 기치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 하박국에 의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자(합2:4), 사도 바울이 계시를 받아서 우리를 일깨워 준 주옥같은 말씀이다.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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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버린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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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의 기적
- 나는 일찍이 한양대학에서 기술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학생들은 잘 이해를 못했으나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모두 이해를 한다고 하였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학교의 졸업생을 만났을 때 그들이 자식을 키워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겠다고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실천’을 가문의 철학으로 여기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이 싸우면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아들은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남의 아들은 위로했습니다. 그게 현명한 아버지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그때 학창 시절에 듣고 배운 ‘사랑의 실천’이 상기되면서 내가 남의 아들을 사랑하면 남들도 또 내 아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라고 전한 적이 있다. 내가 학생들에게 늘 강조해 온 것도 사랑이란 먼저 주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당시에는 어려서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회에 나가서 현실에 부딪혀 보니까 저절로 터득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60대에 이른 사람들이 학교의 교훈이자 나의 철학인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속으로 참으로 흐뭇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심히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확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교직원들 가운데도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정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결국 나의 철학에 감화를 받은 결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가정과 가족 구성원으로까지 넓고 깊게 확산되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우리 사회의 개개인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인류 모두가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는 때가 오면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는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말을 생각하고 또 교훈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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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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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추석
-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추석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추석은 설, 단오, 정월대보름과 함께 4대 명절 중 하나로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이다. 그날은 8월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의미에서 한가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 추석날이 다가오면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그 의미가 두 가지 측면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들뜬 마음으로 일 년 동안 기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이다. 조상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은덕을 기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석의 기원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달에 대한 신앙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어두움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때에 8월 보름달은 어두움을 밝히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밝은 달 아래 축제를 하며 큰 명절로 지키었다. 우리 조상들은 추석이 되면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었다. 송편에 소를 놓고 접기 전에는 보름달 모양이지만 소를 넣고 접으면 반달 모양이 된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송편에도 반달 모양의 달이 보름달로 자라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로 인해 추석은 아쉽게도 그 유리를 살펴보면 일종의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은 의미 없는 명절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의 소산을 열매로 거두는 축복의 명절이 될 수 있다. 한 해의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절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고 있다. 추수 감사 주일의 유래는 영국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1621년 가을 매사추세츠의 플리머드에서 3일 동안 행한 축제에 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에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해 소득의 일부를 남겨 두는 것은 어떨까? 가난한 자와 병든 이들을 위해 배려하는 추석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한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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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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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만 빛내는 총회 되길
- 9월 전국 교단 정기총회를 앞두고, 최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탈환한 것을 보면서 20여년 전 기억이 아스라이 되살아났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극단 이슬람 테러집단 알 카에다가 미국 아메리칸 항공 소속 여객기를 납치하여 세계의 심장 뉴욕에 위치한 제1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조금 후 또 다른 쌍둥이 빌딩 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을 공격하였다. 이 사건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 9.11테러다. 미국 본토가 적에게 공격당한 것은 1913년 이후 88년 만이었다. 9.11테러는 2,977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2만 5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사망자 가운데는 소방관, 경찰관이 412명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이 테러 현장을 떠나 안전지대로 달려갔다. 그런데 소방관과 경찰관은 시민들과는 정반대로 달려 역주행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역주행을 했는가? 왜 무너져 내린 비참한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는가? 무엇이 그들을 험지로 뛰어들도록 몰아갔는가? 그 이유는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릴 적부터 목회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 바로 신학대학으로 진학해 목회자가 된 이들과 같다. 이들은 인생전체를 바쳐 헌신한 사명자들이다. 9월 전국 교단 총회에 참석키 위해 전국 각지에서 달려오는 장로들과 목사들,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전 세계 복음 사역의 최전선에서 뛰는 선교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 존재임을 확신했다. 바울을 사도로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파송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다. 바울의 삶에서 예수님을 제거하면 그의 삶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1563년 독일 개혁교회에서 출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제1문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이 삶의 유일한 위로라고 선언한다. 제발 예수 그리스도만 빛나는 정기총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사)미래목회포럼 대표·새로남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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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만 빛내는 총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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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의 전파자
-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독교 신자이니까 기독교의 사랑과 연결지어 성경(聖經)에서 그 말을 가져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성장기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굳이 근원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資産)에 나의 인생 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기독교를 보는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당에 나간다는 것과 나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입으로만 사랑, 사랑이라고 말할 뿐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참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의 실천’을 만들게 된 발상(發想)의 근원에는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의 교훈으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성경에서 얻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더러 이와 유사한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랑으로 사는 운동’이라거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등에서 그 유사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요즘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랑의 실천’에 대해 내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몇 해 전에 ‘사랑으로 사는 운동’ 본부에서 나를 찾아와서 주제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노래를 작곡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정도로 나는 일생 동안 그것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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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실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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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의 전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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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영성회복
- 한국 교회는 위대한 영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난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이 황폐했던 강토에 찾아왔다. 희망도 없고 깊은 좌절과 혼돈 속에서 한민족의 운명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 속에서 그 거룩한 뜻이 임하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비참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들려왔다. 특히 20세기 초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복음적 캐릭터를 결정한 놀라운 민족적 경험이었다. 거기에서 핵심을 이룬 영성은 회개였다. 망국의 비애와 함께 개인적인 깊은 죄의 깨달음이 있었다. 그 이후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바로 이 회개와 십자가의 복음이 근본이요 본질임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고난과 순교의 역사를 통해 지켜온 이 십자가의 복음의 영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이제 경제 강국이 되었고 교회도 크나큰 성장과 외적, 물질적 부흥을 이뤘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속에 깊이 새겨진 십자가의 영성과 복음의 핵심은 다른 많은 것들에 의해 휩싸이게 된 것 같다. 이 때문에 십자가는 신앙, 영성의 중심성을 잃게 된 것이 아닐까? 한국교회 영성의 회복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길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가난하고 궁핍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이타적인 사랑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성령의 은혜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내어드리고 성령의 인도 속에서 완전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복음이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부인과 주님을 따르는 데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영성의 회복은 바로 십자가를 다시 찾는데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원리, 가치를 따라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하려면, 십자가의 길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되어 세상에 빛과 향기를 다시 발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이제 이 환난의 시기를 통해 한국교회의 영성이 본래적인 형태를 회복하고 복음의 진리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감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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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영성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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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 인간의 존엄성은 사랑으로써만 보호될 수 있고 정의는 사랑이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사랑은 정의를 추구함으로써만 실천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할 때,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함께 행사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공정한 사랑의 바탕에서 남을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 때만이 비로써 공의의 법과 정의에 대해서 말을 한다. 법은 옳은 지성이 합치될 때 의를 나타내고 공정하게, 모두에게 적용된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매우 흔하게 공정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한다. 언론 보도에도 공정한 사회 기강을 말하고는 있으나, 실상은 공정하지 못하고 편파적인 일들이 너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어느 종교단체에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요즈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변화가 많은 이 사회 어느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알 수조차도 없다. “왜 그럴까?” 정의가 상실된 사회에서 공정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회 속에 하나의 일원으로 살면서 엄청난 불의와 부정이 자행되고 편파적인 일들을 수 없이 당하고 격어 왔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속았고 또 배반을 당한 것이다. 공정은 먼저 자신을 향한 진정한 호소여야하고 자신이 먼저 공정하게 할 때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정을 말하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의 눈에 정의롭게 비쳐져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공정의 외침은 오직 독선이요 허구일 뿐이다. 그리고 공정이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한다. 인간의 위대한 인격적 품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로써 창조주의 성품을 닮아가야 한다. 그럴 때만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마음속에 사랑을 품을 수 있다. 진정한 사랑만이 공정한 사회, 정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이웃을 해하여야 자신이 잘되는 줄 아는 잘못된 이기적 양심을 가지고 어떻게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수없이 들었던 정의사회, 부정부패, 부조리가 없는 공정한 사회실현은 마땅히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장 개혁 혁신측 총회장·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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