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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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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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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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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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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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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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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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디아코니아」의 삶은 아름답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바보 이반’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품에서 이반은 자기 몫의 재산마저 심술궂은 형들에게 나눠준 후 가난한 살림으로 일을 하며 청각 장애가 있는 누이와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형들과 이웃 사람들은 세상 욕심이나 돈에 탐욕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그 이반을 바보라고 불렀다. 인생은 봉사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디아코니아』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봉사와 섬김의 뜻을 지닌 희랍 말인 『디아코니아』는 원래의 뜻, “시중들다” 섬기는 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라틴어로는 『노예』를 뜻하는 낱말 ‘서브스’에서 유래 되었고 이 말에서 영어의 『서비스』 섬김과 봉사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이 땅에 이름을 남기고 떠나는 것인데 섬기는 사랑의 실천으로 『디아코니아』의 삶에서 좋은 이름이 되어 빛이 되고 거울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바보처럼 살았던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이반의 삶이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다.    “흐르는 물에 빵을 던지라”는 말씀, 구약 전도서 11장 1절의 말씀으로 아라비아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여기 소개해 본다. 아라비아에 빅바드라는 작은 왕국에 왕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실종되었다. 그러다 몇 날 후 어떤 농부가 왕자를 찾아 데려왔다. 왕은 너무 기뻤다. 왕은 왕자에게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예, 아버지 제가 물에 떠내려가다가 어느 바위에 걸려서 거기에 있는데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빵이 물 위에 떠 내려와 제가 그것을 먹고살았습니다”면서 빵 한 봉지를 내보였다. 그 빵 봉지엔 모아멘 벤하산라는 이름이 있었다. 왕은 그 사람을 찾고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빵을 물 위로 던져 보냈는가” 그가 대답했다. “예, 대왕께서 아시는대로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양식을 물 위에 던지라 그리하면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말이 있어서 그 말이 사실인지 한 번 실천해 본 것뿐입니다”고 대답해 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사랑은 삶으로 실천하면 언젠가는 다시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디아코니아의 섬김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경천교회 원로목사·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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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18
  • '디아코니아'의 삶은 아름답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중에 「바보 이반」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 내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곳에 부유한 농부가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세이욘, 타라스, 그리고 이반이다. 세월이 흘러 후일에 세미욘은 요즘 말로 출세를 하여 큼직한 지위에 오르고 타라스는 역시 부자가 되어 돈 많은 귀족집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이반은 자기 몫의 재산마저 심술궂은 형들에게 나눠준 후 가난한 살림으로 일을 하면서 청각 장애가 있는 누이와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형들과 이웃 사람들은 세상 욕심이나 돈에 탐욕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그 이반을 바보라고 불렀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바보 이반」이라고 붙인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톨스토이가 다시 온다면 무슨 작품을 남길까 생각해 보게 된다. 서로 다투면서 양보 없이 싸우면서 상대방을 헐뜯고 자기 욕심만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인생은 봉사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디아코니아'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봉사와 섬김의 뜻을 지닌 희랍 말인 '디아코니아'는 원래의 뜻, '시중들다' 섬기는 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라틴어로는 '노예'를 뜻하는 낱말 ‘서브스’에서 유래 되었고 이 말에서 영어의 '서비스' 섬김과 봉사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이 땅에 이름을 남기고 떠나는 것인데 섬기는 사랑의 실천으로 '디아코니아'의 삶에서 좋은 이름이 되어 두고 두고 빛이 되고 거울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바보처럼 살았던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이반의 삶이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다.   언제는 손해 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진 몰라도 “흐르는 물에 빵을 던지라”는 말씀, 구약 전도서 11장 1절의 말씀으로 아라비아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여기 소개해 본다. 아라비아에 빅바드라는 작은 왕국에 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8살짜리 왕자가 강물에 나가 놀다가 그만 실족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래서 군대를 동원하고 온 나라에 알려 왕자를 찾았으나 찾질 못했다. 며칠 후에는 왕자의 시체라도 찾겠다고 온 나라가 법석을 떨었는데 몇 날 후 빅바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 위에서 어떤 농부가 왕자를 찾아 데리고 온 것이다.   왕은 너무 기뻐서 꿈인가 생신가 싶도록 흥분해 있었다. 왕이 왕자에게 묻기를 “예야, 너는 어떻게, 무엇을 먹고 며칠을 지냈느냐?” 했더니 “예, 아버지 제가 물에 떠내려가다가 어느 바위에 걸려서 거기에 있는데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빵이 물 위에 떠 내려와 제가 그것을 먹고살았습니다”라면서 빵 한 봉지를 내보이면서 바로 그 빵이 이 빵이라고 내놓았다. 그 빵 봉지엔 이름이 새겨 있었는데 모아멘 벤하산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은 수소문하여 그 사람을 찾았다. 왕은 그에게 묻기를 “자네는 어떻게 해서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빵을 물 위로 던져 보냈는가”했더니 모하멘 벤하산이 대답하기를 “예, 대왕께서 아시는대로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양식을 물 위에 던지라 그리하면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말이 있어서 그 말이 사실인지 한 번 실천해 본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은 삶으로 실천하면 언젠가는 다시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디아코니아의 섬김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경천교회 원로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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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15
  •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
    알렉산더대왕이 이끄는 전투부대 내에 대왕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다. 그가 전쟁 중에 적과 싸우다가 위험을 느끼고 비겁하게 도망을 쳤다. 탈영을 한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잡혀왔을 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알렉산더!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그 이름값을 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말을 변질되어가는 현대교회에 적용해보면 이처럼 세속화된 교회라면 차라리 교회이름을 무슨 친목단체라고 명칭을 바꾸든지, 아니면 교회가 본질을 회복해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하라는 말과 같다고 본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구체적인 생활철학과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순종하며 행함이 따라야 한다.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시련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고난과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해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성도’라고 부르시면서 성별된 삶,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권면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성속(聖俗)을 분별하여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하고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에서 인생의 본분을 배우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사람을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한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나 추상적인 믿음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거나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부활의 체험, 임마누엘의 은혜, 성령의 임재 등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새 힘을 얻어 봉사와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며 살아야 그의 신앙이 성장하고 지속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회복할 때 참된 신앙의 삶이라고 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에게 내적변화가 일어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행동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야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11
  • 명절을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자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이 다가왔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그 동안 흩어져 있던 모든 가족들이 한자리에서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가족 간의 우애를 다지고 조상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다. 참으로 우리 민족의 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명절에 종종 신앙적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다. 가족 전체가 믿지 않아 제사를 하는 경우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명절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은 명절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먼저 솔선수범해서 명절음식을 만든다든지 아니면 가족들을 위해 좋은 선물을 준비한다든지 아니면 어르신들에게 더 큰 효를 행한다든지 해서 ‘믿는 사람은 다르다’하는 말을 듣도록 해보자. 그런 것이 지속되면 비록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로 조상을 기린다 해도 큰 위화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가족을 전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이 봤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그만큼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명절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보내기에 더욱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유교의 강한 영향 속에서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제례에 많은 노력과 비용을 쏟았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형식과 허례허식이 된다면 4차 혁명의 지금 이 시대에는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효’라는 미덕을 위해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게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 의식을 치루는 것은 현대사회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명절음식은 간소하게 하고 대신 가족들끼리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민족최대의 명절인 설에 찬양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명절이 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미리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할 것을 권면드린다. /꽃동산교회 목사·예장합동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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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03
  • 교회 성장에 도전하는 세 가지
          교회의 본질은 영혼 구원함(벧전1:9)이며, 세계선교가 주목적이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부르너(E. Brunner)는 불은 타오름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교회 성장에 도전하는 것들 중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 불가시적인 마귀 사탄을 제외하고 현실 교회에 가시적인 세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100여 년 전에 칼 막스(Karl Marx)가 창시한 것으로 “신은 필요에 따라 고안된 정신적 허구”라고 했고, “종교는 사후라는 꽃으로 인간을 속이고 있다”면서 교회를 불 지르고 수만 명의 기독교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1991년 12월에 붕괴되었으나, 문제는 공산주의는 100여 년을 좀 지나면서 세계 77억 인구 중 약 40%의 사람을 공산화해서 단기간에 큰 확장을 본 것이다. 공산주의가 급하게 팽창된 것은 기독교에서 방법을 모방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불러 구원의 진리를 의식화시켰고, 사도행전에서 120문도가 성령을 받아 교회가 조직되었으며 그들이 세계로 동원되어 교회가 세계화된 것이다. 오늘의 공산주의자들의 원리 중에 ①의식화 ②조직화 ③동원화는 곧 예수님의 선교방법에서 모방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둘째, 사이비 이슬람교회 침투이다. 이슬람 종교는 구약 아브라함의 첩 하갈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예로서 마흐멧(570~632)이 창시한 것으로 예수님보다 600여 년 늦게 시작된 종교이다. 그들의 성경은 코란경이며 신은 알라신을 믿으며, 기독교를 적으로 알고 교회 파괴를 주목적으로 한다. 이슬람교회는 세계인구 중 17억 5천만 명이 신자로 있으며 인구 23%를 차지한다. 현재 한국 이슬람교회는 1950년 6·25전쟁 때 선교 되었으며 200 교회 37만 명의 한국인 신자가 있다고 총신대 유해석 교수가 말했다. 한국 교회가 이슬람교회를 주시해야 할 이유는 일부 중동의 이슬람은 테러족이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에서 파생된 종교 다원주의(pluralism) 사상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혼합 종교로서 모든 종교(불교, 유교, 샤만이즘, 이슬람교)는 나름대로 구원 관이 있으니 그들은 그들대로 믿고 살게 놔두라면서 구태여 기독교가 선교비 쓰면서 선교사 파송하여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의 선교 열정의 불을 끄고 있는 것이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했기에 이 사상도 과감하게 배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좌파들은 한물간 막스 레닌의 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감방을 들락거리면서도 열정적으로 주사파 사상을 전하는데 내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너무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코로나 19가 마치 교회가 잘못해서 확산 된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전국에 있는 교회의 예배를 통제하고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고 겁박해도 순한 양 같이 순종하는 모습은 잘한 일인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각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신앙을 이성이나 지성으로 받아들이고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 신앙을 가지지 못해서 믿음이 약해졌다.   이제 한국 교회는 심기일전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 충만 받아 순교 정신으로 부흥성장에 도전하는 마귀 사탄을 대적하고 공산주의 사상이나 이슬람교회와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과감히 퇴치해서 교회를 교회답게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교회는 그들도 전도대상이기 때문에, 증오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보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 기독교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은평중앙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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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1-17
  • ‘사랑’을 실천하는 네 가지 덕목
      태초에 우주와 인류가 ‘사랑’의 정신에서 시작되었듯이 현대인들은 조화와 질서의 세계를 널리 펴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평생 동안 이 ‘사랑’의 실천을 나에게 부여된 소명으로 알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고매한 정신을 널리 펴는 교육 사회 운동에 헌신해 왔다. 나는 이 고매한 정신은 ‘근면·정직·겸손·봉사’의 실천 덕목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첫째 덕목은 ‘근면’이다. 근면한 생활을 통하여 풍성한 수확을 올린 사람만이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근면하게 일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자연히 탐욕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충만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둘째 덕목은 ‘정직’의 정신이다. 거짓과 부정은 패망의 길이요, 불행의 원천이 된다. 승리는 항상 정직한 사람의 편에 선다. 정직은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올바른 정신이다. 정직의 정신이 뿌리내린 인류의 미래는 언제나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셋째 덕목은 ‘겸손’의 정신이다. 아무리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수확이라고 할지라도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다. 자신이 먼저 겸손해짐으로써 모든 불화가 사라지게 되면 자연히 사랑도 깃들게 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넷째 덕목은 ‘봉사’의 정신이다. 이해와 득실을 초월한 봉사의 정신이야말로 사랑을 구현하는 가장 직접적 실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위대한 사랑을 심어가기 위해 남의 불행과 결핍을 함께 아파하며 도울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사랑이 충만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최고의 영예요, 자랑이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듯 ‘근면·정직·겸손·봉사’ 의 정신이야말로 이 사회에 사랑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실천 덕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이 네 가지 덕목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남보다 내가 먼저 몸소 충실히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주위에서 갈등과 고통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1-13
  • [신년사] 사랑의 힘으로 행복의 새해를 만들자
    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국교회와 독자 여러분들에게 축복과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해는 ‘델타 변이’로 시작해서 ‘오미크론 변이’로 끝났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코로나 재앙의 한가운데를 통과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두 살 먹은 아이들까지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재앙 속에서 희망과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방역 일선의 의료진은 삼복더위의 찜통 속에서도, 북풍한설의 추위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비대면 온라인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국민은 코로나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승리자입니다.    위대한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 살아야 하지만 영원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사모하며 살아간다. 그러하기에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지만 그것을 돌파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올해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키는 ‘코로나19’는 인간의 문명과 기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올 한해도 마스크에 의지하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일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사랑의 실천을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위기와 절망을 극복하는 원천은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신문> 창간 당시부터 지난 56년간 이어온 창립자 故 김연준 선생님의 신념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가 계층과 세대간, 지역 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기술력으로만 코로나를 잡을 수 있고,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함의 극치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있을 때, 따뜻한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거기에 진정한 회복과 축복이 있습니다. 새해에도 본지는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진실과 정의를 알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 나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끝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 「송년엽서」를 보내 드립니다. 하늘에서 별똥별 한 개 떨어지듯 나뭇잎에 바람 한번 스쳐가듯/빨리 왔던 시간들은 빨리도 떠나 가지요/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어서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며,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습니다./목숨까지도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눈길은 고요하게 마음은 뜨겁게 아름다운 삶을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충실히 살다보면, 첫 새벽의 기쁨이 새해에도/항상 우리 길을 밝혀 주겠지요./본지 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29
  •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에게 나가자
      다사다난했던 2021년을 보낸다. 올해는 코로나 델타 변이로 시작해서 오미크론으로 마치는 해가 됐다. 그만큼 코로나가 재앙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교회 역시 비대면 예배를 드리며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무슨 사건이 터지든지 목회의 본질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양육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더 매달려야 한다. 전염병과 같은 위기가 오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살림살이가 어려운 이웃들이다.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여력이 없기에 더 많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염병이 창궐할 때 교회는 환자를 돌보고 병을 막아내는 일에 가장 앞장 서 왔다.    교회는 언제나 힘없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피난처요 보호처였다. 이것이 변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이런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자립교회 목회자를 초청해 위로하고, 격려금을 나눴다. 쪽방촌 이웃들을 찾아가 필요한 생필품을 전달했다.    방역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는 앞장 서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국교회 안에 적지 않은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물론 모든 책임을 교회에 다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방역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코로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이웃사랑은 방역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교회가 마치 집단감염의 온상이라도 되는 것 같은 소리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다시 민족의 희망과 소망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유한한 인간은 내년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코로나 재앙이 물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물론 재앙이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스크를 벗고 예배당에서 마음껏 찬양하며 기도하는 날이 더디 올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 예상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과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전 안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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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26
  • 사랑 그리고 성탄
      성탄절은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신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다. 성탄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 성취며 그 증거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시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곧장 쓰는 것처럼 제일 잘 아는 말이 사랑인 것 같지만 실제로 가장 잘 알지 못하는 말이 사랑이다.   홍수 때 물이 세상을 덮을 정도로 많지만 막상 먹을 수 있는 물이 없는 것과 같다.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가장 많이 실천하지 못하는 것, 제일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가장 희귀한 것, 그러면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폐일언하고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 생명까지 주신 주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줄 수 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도 희생하셨다. 희생이 있는 곳에 사랑이 나타난다. 희생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은 열매를 맺는다. 그 사랑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내게 필요 없는 것이나 쓰다 남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황금이 없으면 당신의 몸을 유황이 없으면 당신의 시간을 몰약이 없으면 당신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귀하다면 이제 진심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한 별이 동방박사를 아기 예수님께 인도했듯이 이제 내 삶이 다른 사람들 곧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끈 별이 되기를 헌신하자. 성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분을 왕으로 믿는 사람은 왕께 마땅한 것을 드리는 삶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성탄절 가장 진실된 마음을 삶으로 드릴 수 있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란다.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 목포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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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16
  • 역경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항해 중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게 되면 보통 세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속히 배를 돌려서 태풍이 불어오는 반대방향으로 도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태풍의 풍속이 어떠한 쾌속정보다 빠르기 때문에 실패를 한다. 두 번째는 왼쪽이나 오른 쪽으로 배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더 큰 위험을 초래한다. 배의 방향을 틀면 태풍을 맞는 면이 더 커져서 배가 전복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법으로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선장은  배의 모든 창문을 단단히 닫고 전속력으로 풍향과 균형을 맞추어 태풍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정면 돌파하는 길을 택한다고 한다. 태풍의 기세가 가장 강한 곳이 가장 거리가 짧은 곳이며 태풍으로 인한 손상을 적게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풍을 피하지 않고 직접 맞서면 오히려 짧은 시간 내에 태풍의 피해를 줄이면서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세대는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태풍을 만나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인 압박, 심리 적 불안 등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인간 최고의 가치인 믿음을 상실한 채 회복의 의지마저도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사회에 몰아치는 세대주의와 질병과 물질만능, 과학만능의 풍속에 떠밀려 실종되어가는 성도들, 무너져 가는 교회, 변질된 신학과 신앙을 기도와 말씀,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원수와 맞서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다시 일어나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고 했고, 히브리서기자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라고 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성경과 예배의 가치를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어서 교회에 모임이 제한되거나 비대면 사회가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서 전 성도를 사명자로 세워서, 개개인이 가족 목회자의 역할을 하도록 양육시켜야한다.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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