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2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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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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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10
  • [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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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06
  • [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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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8-07
  • [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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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7-08
  • [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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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5
  • [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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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1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
    알렉산더대왕이 이끄는 전투부대 내에 대왕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다. 그가 전쟁 중에 적과 싸우다가 위험을 느끼고 비겁하게 도망을 쳤다. 탈영을 한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잡혀왔을 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알렉산더!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그 이름값을 하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말을 변질되어가는 현대교회에 적용해보면 이처럼 세속화된 교회라면 차라리 교회이름을 무슨 친목단체라고 명칭을 바꾸든지, 아니면 교회가 본질을 회복해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하라는 말과 같다고 본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구체적인 생활철학과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순종하며 행함이 따라야 한다.   마틴 루터는 “시련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시련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고난과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해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성도’라고 부르시면서 성별된 삶,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권면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성속(聖俗)을 분별하여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하고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에서 인생의 본분을 배우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사람을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한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나 추상적인 믿음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거나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부활의 체험, 임마누엘의 은혜, 성령의 임재 등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새 힘을 얻어 봉사와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며 살아야 그의 신앙이 성장하고 지속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회복할 때 참된 신앙의 삶이라고 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에게 내적변화가 일어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행동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야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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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명절을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자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이 다가왔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그 동안 흩어져 있던 모든 가족들이 한자리에서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가족 간의 우애를 다지고 조상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다. 참으로 우리 민족의 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명절에 종종 신앙적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다. 가족 전체가 믿지 않아 제사를 하는 경우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명절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은 명절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먼저 솔선수범해서 명절음식을 만든다든지 아니면 가족들을 위해 좋은 선물을 준비한다든지 아니면 어르신들에게 더 큰 효를 행한다든지 해서 ‘믿는 사람은 다르다’하는 말을 듣도록 해보자. 그런 것이 지속되면 비록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로 조상을 기린다 해도 큰 위화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가족을 전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이 봤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그만큼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명절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보내기에 더욱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유교의 강한 영향 속에서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제례에 많은 노력과 비용을 쏟았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형식과 허례허식이 된다면 4차 혁명의 지금 이 시대에는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효’라는 미덕을 위해 이미 돌아가신 분들에게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 의식을 치루는 것은 현대사회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명절음식은 간소하게 하고 대신 가족들끼리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민족최대의 명절인 설에 찬양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명절이 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미리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할 것을 권면드린다. /꽃동산교회 목사·예장합동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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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03
  • 교회 성장에 도전하는 세 가지
          교회의 본질은 영혼 구원함(벧전1:9)이며, 세계선교가 주목적이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부르너(E. Brunner)는 불은 타오름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교회 성장에 도전하는 것들 중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 불가시적인 마귀 사탄을 제외하고 현실 교회에 가시적인 세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이다. 공산주의는 100여 년 전에 칼 막스(Karl Marx)가 창시한 것으로 “신은 필요에 따라 고안된 정신적 허구”라고 했고, “종교는 사후라는 꽃으로 인간을 속이고 있다”면서 교회를 불 지르고 수만 명의 기독교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1991년 12월에 붕괴되었으나, 문제는 공산주의는 100여 년을 좀 지나면서 세계 77억 인구 중 약 40%의 사람을 공산화해서 단기간에 큰 확장을 본 것이다. 공산주의가 급하게 팽창된 것은 기독교에서 방법을 모방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불러 구원의 진리를 의식화시켰고, 사도행전에서 120문도가 성령을 받아 교회가 조직되었으며 그들이 세계로 동원되어 교회가 세계화된 것이다. 오늘의 공산주의자들의 원리 중에 ①의식화 ②조직화 ③동원화는 곧 예수님의 선교방법에서 모방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둘째, 사이비 이슬람교회 침투이다. 이슬람 종교는 구약 아브라함의 첩 하갈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예로서 마흐멧(570~632)이 창시한 것으로 예수님보다 600여 년 늦게 시작된 종교이다. 그들의 성경은 코란경이며 신은 알라신을 믿으며, 기독교를 적으로 알고 교회 파괴를 주목적으로 한다. 이슬람교회는 세계인구 중 17억 5천만 명이 신자로 있으며 인구 23%를 차지한다. 현재 한국 이슬람교회는 1950년 6·25전쟁 때 선교 되었으며 200 교회 37만 명의 한국인 신자가 있다고 총신대 유해석 교수가 말했다. 한국 교회가 이슬람교회를 주시해야 할 이유는 일부 중동의 이슬람은 테러족이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에서 파생된 종교 다원주의(pluralism) 사상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혼합 종교로서 모든 종교(불교, 유교, 샤만이즘, 이슬람교)는 나름대로 구원 관이 있으니 그들은 그들대로 믿고 살게 놔두라면서 구태여 기독교가 선교비 쓰면서 선교사 파송하여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의 선교 열정의 불을 끄고 있는 것이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했기에 이 사상도 과감하게 배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좌파들은 한물간 막스 레닌의 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감방을 들락거리면서도 열정적으로 주사파 사상을 전하는데 내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너무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코로나 19가 마치 교회가 잘못해서 확산 된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전국에 있는 교회의 예배를 통제하고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고 겁박해도 순한 양 같이 순종하는 모습은 잘한 일인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각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신앙을 이성이나 지성으로 받아들이고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 신앙을 가지지 못해서 믿음이 약해졌다.   이제 한국 교회는 심기일전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 충만 받아 순교 정신으로 부흥성장에 도전하는 마귀 사탄을 대적하고 공산주의 사상이나 이슬람교회와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과감히 퇴치해서 교회를 교회답게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교회는 그들도 전도대상이기 때문에, 증오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보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 기독교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은평중앙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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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1-17
  • ‘사랑’을 실천하는 네 가지 덕목
      태초에 우주와 인류가 ‘사랑’의 정신에서 시작되었듯이 현대인들은 조화와 질서의 세계를 널리 펴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평생 동안 이 ‘사랑’의 실천을 나에게 부여된 소명으로 알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고매한 정신을 널리 펴는 교육 사회 운동에 헌신해 왔다. 나는 이 고매한 정신은 ‘근면·정직·겸손·봉사’의 실천 덕목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첫째 덕목은 ‘근면’이다. 근면한 생활을 통하여 풍성한 수확을 올린 사람만이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근면하게 일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자연히 탐욕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충만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둘째 덕목은 ‘정직’의 정신이다. 거짓과 부정은 패망의 길이요, 불행의 원천이 된다. 승리는 항상 정직한 사람의 편에 선다. 정직은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올바른 정신이다. 정직의 정신이 뿌리내린 인류의 미래는 언제나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셋째 덕목은 ‘겸손’의 정신이다. 아무리 근면하고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수확이라고 할지라도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다. 자신이 먼저 겸손해짐으로써 모든 불화가 사라지게 되면 자연히 사랑도 깃들게 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넷째 덕목은 ‘봉사’의 정신이다. 이해와 득실을 초월한 봉사의 정신이야말로 사랑을 구현하는 가장 직접적 실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위대한 사랑을 심어가기 위해 남의 불행과 결핍을 함께 아파하며 도울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사랑이 충만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최고의 영예요, 자랑이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듯 ‘근면·정직·겸손·봉사’ 의 정신이야말로 이 사회에 사랑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실천 덕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이 네 가지 덕목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남보다 내가 먼저 몸소 충실히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주위에서 갈등과 고통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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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1-13
  • [신년사] 사랑의 힘으로 행복의 새해를 만들자
    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국교회와 독자 여러분들에게 축복과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해는 ‘델타 변이’로 시작해서 ‘오미크론 변이’로 끝났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코로나 재앙의 한가운데를 통과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두 살 먹은 아이들까지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재앙 속에서 희망과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방역 일선의 의료진은 삼복더위의 찜통 속에서도, 북풍한설의 추위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비대면 온라인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국민은 코로나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승리자입니다.    위대한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 살아야 하지만 영원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사모하며 살아간다. 그러하기에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지만 그것을 돌파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올해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키는 ‘코로나19’는 인간의 문명과 기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올 한해도 마스크에 의지하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일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사랑의 실천을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위기와 절망을 극복하는 원천은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신문> 창간 당시부터 지난 56년간 이어온 창립자 故 김연준 선생님의 신념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가 계층과 세대간, 지역 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기술력으로만 코로나를 잡을 수 있고,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함의 극치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있을 때, 따뜻한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거기에 진정한 회복과 축복이 있습니다. 새해에도 본지는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진실과 정의를 알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 나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끝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 「송년엽서」를 보내 드립니다. 하늘에서 별똥별 한 개 떨어지듯 나뭇잎에 바람 한번 스쳐가듯/빨리 왔던 시간들은 빨리도 떠나 가지요/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 어서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며,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습니다./목숨까지도 떨어지기 전 미루지 않고/사랑하는 일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했던 벗이여!/눈길은 고요하게 마음은 뜨겁게 아름다운 삶을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충실히 살다보면, 첫 새벽의 기쁨이 새해에도/항상 우리 길을 밝혀 주겠지요./본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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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29
  •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에게 나가자
      다사다난했던 2021년을 보낸다. 올해는 코로나 델타 변이로 시작해서 오미크론으로 마치는 해가 됐다. 그만큼 코로나가 재앙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교회 역시 비대면 예배를 드리며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무슨 사건이 터지든지 목회의 본질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양육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더 매달려야 한다. 전염병과 같은 위기가 오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살림살이가 어려운 이웃들이다.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여력이 없기에 더 많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염병이 창궐할 때 교회는 환자를 돌보고 병을 막아내는 일에 가장 앞장 서 왔다.    교회는 언제나 힘없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피난처요 보호처였다. 이것이 변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이런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자립교회 목회자를 초청해 위로하고, 격려금을 나눴다. 쪽방촌 이웃들을 찾아가 필요한 생필품을 전달했다.    방역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는 앞장 서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국교회 안에 적지 않은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물론 모든 책임을 교회에 다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방역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코로나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이웃사랑은 방역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교회가 마치 집단감염의 온상이라도 되는 것 같은 소리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다시 민족의 희망과 소망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유한한 인간은 내년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코로나 재앙이 물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물론 재앙이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스크를 벗고 예배당에서 마음껏 찬양하며 기도하는 날이 더디 올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고난의 시간이 예상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과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전 안양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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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26
  • 사랑 그리고 성탄
      성탄절은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신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다. 성탄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 성취며 그 증거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시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곧장 쓰는 것처럼 제일 잘 아는 말이 사랑인 것 같지만 실제로 가장 잘 알지 못하는 말이 사랑이다.   홍수 때 물이 세상을 덮을 정도로 많지만 막상 먹을 수 있는 물이 없는 것과 같다.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가장 많이 실천하지 못하는 것, 제일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가장 희귀한 것, 그러면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폐일언하고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 생명까지 주신 주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줄 수 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도 희생하셨다. 희생이 있는 곳에 사랑이 나타난다. 희생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은 열매를 맺는다. 그 사랑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내게 필요 없는 것이나 쓰다 남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황금이 없으면 당신의 몸을 유황이 없으면 당신의 시간을 몰약이 없으면 당신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귀하다면 이제 진심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한 별이 동방박사를 아기 예수님께 인도했듯이 이제 내 삶이 다른 사람들 곧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끈 별이 되기를 헌신하자. 성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분을 왕으로 믿는 사람은 왕께 마땅한 것을 드리는 삶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성탄절 가장 진실된 마음을 삶으로 드릴 수 있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란다.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 목포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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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2-16
  • 역경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항해 중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게 되면 보통 세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속히 배를 돌려서 태풍이 불어오는 반대방향으로 도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태풍의 풍속이 어떠한 쾌속정보다 빠르기 때문에 실패를 한다. 두 번째는 왼쪽이나 오른 쪽으로 배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더 큰 위험을 초래한다. 배의 방향을 틀면 태풍을 맞는 면이 더 커져서 배가 전복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법으로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선장은  배의 모든 창문을 단단히 닫고 전속력으로 풍향과 균형을 맞추어 태풍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정면 돌파하는 길을 택한다고 한다. 태풍의 기세가 가장 강한 곳이 가장 거리가 짧은 곳이며 태풍으로 인한 손상을 적게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풍을 피하지 않고 직접 맞서면 오히려 짧은 시간 내에 태풍의 피해를 줄이면서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세대는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태풍을 만나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인 압박, 심리 적 불안 등의 위기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인간 최고의 가치인 믿음을 상실한 채 회복의 의지마저도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사회에 몰아치는 세대주의와 질병과 물질만능, 과학만능의 풍속에 떠밀려 실종되어가는 성도들, 무너져 가는 교회, 변질된 신학과 신앙을 기도와 말씀,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원수와 맞서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다시 일어나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고 했고, 히브리서기자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라고 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성경과 예배의 가치를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어서 교회에 모임이 제한되거나 비대면 사회가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서 전 성도를 사명자로 세워서, 개개인이 가족 목회자의 역할을 하도록 양육시켜야한다.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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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복음이 전해진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부흥을 이루었다.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의료, 교육, 복지 등 사회 전반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중병에 걸린 것처럼 신음하고 있다. 하나의 교회로 시작한 장로교단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300개가 넘는 현실이고, 성경의 진리와 권위를 부정하는 세속의 공격에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분오열되는 상황이다. 강단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가 사라지고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만 넘쳐나고 있다.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는 성도의 지식을 채워주고 마음에 평안을 줄 수는 있지만 영혼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쇠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의 사변화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서구 기독교의 몰락과 맥을 같이 한다. 서구교회와 한국교회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신학이 지나치게 사변화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학이 성경에서 떠난 것, 마지막으로 신학이 지적인 학문의 틀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철학의 한 분야로 발달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 경험으로 하나님을 연구하고자 했다.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시며 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지식의 틀에 가두고자 한 것이다. 철학의 방법론으로 하나님을 연구하다보니 성경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쪼개고 나누어 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신학이 발달하고 신학자들이 많아질수록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 역시 1980년 MDiv. 정규학위 과정이 처음 시작되면서 서구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대거 유입됐고, 서구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이식했다. 신학자 자신이 배운 학문적인 성과만 주입하는 교육에 급급했다. 그 결과, 신학은 사변화되고 성경의 권위는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영이신 하나님을 학문의 틀에 가둘 수 없다. 성경 66권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의 목적과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데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들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온 마음과 인격을 다해서 들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신학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참된 신학을 통하여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려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신학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으로서의 신학을 회복해야 한다.    / 예장 백석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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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9
  • 현대 추수감사절 열매
      추수감사절이다. 지난 11월 11일에 CBS 생명돌봄 국민운동 캠프 출범식이 있었다. CBS 김학중 이사장이 인사를 했고, 이영훈 목사가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인사말을 했다.    그 내용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인구 열매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인구절벽이라는 대재앙을 어떻게 물리치고 집집마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울고 웃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이 일에 CBS가 패스파인더가 되어 주고 출산 운동을 위한 허들링의 역할을 해 줘 감사하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정부에서 한국교회에 몇 조만 지원해 주었더라면 0.84라는 재앙은 면했을 것이라고 본다. 목회하면서 아이들을 한 명 더 낳으면 유모차를 사준다고 해도 유모차를 받으려고 애를 낳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4명을 낳으면 성지순례를 보내준다고 했더니 3명 난 사람이 성지순례 가서 애 하나 베어오겠다고 해서 보내준 적도 있다. 교회는 이렇게 즉각 효과를 보는 곳이다. 또, CBS에 몇 조만 지원해 줬다면, 지금 시골이건 도시건 애들 우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가득하고 전혀 새로운 베이비부머 시대를 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CBS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국교회와 함께 생명돌봄 국민운동을 하게 되어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구재앙이라는 광야에 서 있을지라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선도적 길을 손을 잡고 함께 간다면 생명 경시와 죽음의 진혼곡, 레퀴엠을 물리칠 수 있. 생명의 탄생이라는 아리아와 생명의 녹색 심포니가 조국 땅에 가득가득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조국 땅에 생육과 번성의 푸른 젖줄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푸르고 푸른 길, 아름다운 생명의 꽃길을 CBS가 앞장서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린다. 한국교회도 더 출산운동에 앞장서겠다.   정말 우리나라는 인구절벽으로 큰 재앙을 맞고 있다. 이럴 때 우리 젊은 친구들이 동성애 보다 이성애의 축복을 알고 다 결혼해서 출산운동에 앞장서기 바란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 새에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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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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