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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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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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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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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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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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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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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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풍요로움이 진정한 축복일까?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은 직후 즉,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입성한지 불과 30년만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축복의 땅에 입성하여 행복과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할 바로 그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후에 38년의 광야의 생활을 통해 불순종의 세대는 전부 죽고, 오로지 새로운 순종의 세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느끼며 경험한 세대, 즉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시대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했다’고 말하고 있는 사사기 2장 10절은 사사기에 여러 번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로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민족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어 경제적으로 부흥해집니다. 그런데 그 경제적 풍요와 안정이 오히려 축복이 아니라 패망으로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것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한국의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감사할 것들이 많은 시대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세상을 더욱더 사랑하고 섬기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영적으로는 사사기와 같이 더욱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기로 우리를 인도하는 두 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6장24절에서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하십니다.    둘째 거짓말은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의 신앙을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을 때 우리의 자녀들 즉 다음세대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많은 풍요로움을 거저 받아서 가나안 땅에 입성했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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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5-11
  •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은혜
      인간이 예수 부활의 진리를 부정한다고 해도 진리가 거짓으로 바뀌지 않는다. 굴을 파서 만든 예수의 무덤 앞에 큰 돌로 가로막고, 로마 군인들이 주야로 철통같이 지키며, 지혜나 온갖 술수를 써서 부활을 부정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도 예수는 부활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지난 4월 17일 부활절 아침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K집사가 목양실에 찾아와서 요즈음 왼쪽 발에 통증이 와서 어찌나 아팠던지 오늘 교회에 못나오는 줄로 알았는데 아픔을 참고 억지로 나왔다면서 자신의 고충을 호소했다. 그는 온종일 서서 일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몹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잘 아는 발 교정사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 서로 상담을 하도록 연결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한 후 K집사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예배실로 올라갔다. 순간 성령님이 나에게 책망을 하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목사냐? 내가 너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었거늘 어찌 내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지 않느냐?” 나는 즉시 K집사를 불러서 안수 기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령님을 소멸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통회하면서 환자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 주일에 K집사가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통증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교회 내에 순식간에 퍼지면서, 2부 예배를 드린 후에 다수의 성도들이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해서 별도로 3부 안수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기도는 인간이 하지만 예수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권능을 베푸셔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치유사역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교회가 세속화 되고, 코로나로 인해 대면을 꺼려하고, 성도들이 기도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수기도를 중단한 상태였다.   초대교회처럼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힘써 일하면 지금도 많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믿음과 사역의 가치를 이뤄나가도록 역사하신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다시 사셨음을 체험하고 만방에 전하자.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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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5-04
  • ‘사랑의 실천’의 전파자
    내가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기독교를 보는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당에 나간다는 것과 나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입으로만 사랑, 사랑이라고 말할 뿐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참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의 실천’을 만들게 된 발상의 근원에는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의 교훈으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성경에서 얻어온 것만은 아니다. 성경에는 ‘실천’이라는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할 때에는 교회나 사회에서도 거론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반세기 전에 나는 이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의 실천 정신임을 간파하고 줄기차게 그것을 외쳐 왔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은 내가 처음으로 만들고 또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데 앞장 서 온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더러 이와 유사한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랑으로 사는 운동’이라거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등에서 그 유사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요즘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랑의 실천’에 대해 내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사는 운동’ 본부에서 한경직목사가 김병래장로를 대동하고 나를 찾아와서 주제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노래를 작곡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정도로 나는 일생 동안 그것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4-27
  • [부활절 메시지] 다시 일어서는 계절
    부활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의 계절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인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다시 산다’는 진리와 희망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직접 부활을 의미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에게이로ἐγείρω’, 즉 일어나신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마28:6~7) 이는 부활은 절대로 없다는 의미나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 혹은 전설 속에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경우와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황당한 거짓말이거나 허탄한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도 오해할 수 없도록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활이란 결코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개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매순간 인식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를 위한 희망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무너진 곳들과 삶의 자리를 잃고 흩어진 수많은 난민들이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기금모금에 참여하며 생명의 능력과 따뜻한 사랑으로 부활의 삶이 경험되는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산불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동해, 삼척, 울진지방의 이재민을 위한 ‘한국교회 사랑의 집짓기 모금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새롭게 선출된 대통령이 취임준비를 하며 나라가 새로운 출발을 하는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올해 부활절은 회복을 위한 기회이자, 도전(Challenge)과 변화(Change)를 위한 위임의 기회(Chance)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복을 함께 누리길 원합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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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4-13
  • 욕심에서 내려오라
    마음속에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묻고 있던 삭개오에게 예수는 하나의 탐구대상이었다. 도대체 그가 누군데 그 많은 사람이 그의 무릎 아래 발을 꿇는 것일까? 나는 그다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데 그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그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님은 그 군중들 속에서 자신에게 향해있는 한 염원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 그를 불렀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와라” 여기에서 나무라 함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의미한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견고한 자의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의 곤고한 마음을 보았고 그것을 측은히 여겨 그에게 새 삶의 길을 제시했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예수만은 그의 마음에 들끓고 있는 갈등에 주목했다. 갈등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과오투성인 인간이었다. 백성들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임의로 털어내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탐심에 젖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삶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그 갈구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게 했고 애써 올라간 나무에서 또 내려보게 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다.   내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때 이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단하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기회란 없다. 우리는 나의 모든 운명의 변화가 예수를 만나기 위한 일련의 절차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오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수고로움이 죽어도 싫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 고집 때문이다. 이 일을 버리면 당장 밥을 굶주림 같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을 빛의 자녀가 아닌 어둠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간다.   잠시의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인하고 “내려오라”는 말씀에 순종해 평생 예수의 사람으로 산 삭개오의 정신을 아무리 음미해도 부족하기만 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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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4-10
  • 욕심에서 내려오라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사는 세리장이었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욕을 많이 먹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의 서민들에게 세금을 걷으러 다니는 일이 그의 직업이다보니 삭개오 또한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렵기까지 했을터였다. 그러던 차에 여리고로 가는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마음속에 항상 “ 이렇게 살아야 될 것인가”묻고있던 그에게 예수는 하나의 탐구대상이었다. 도대체 그가 누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릎아래 발을 꿇는 것일까? 나는 그다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데 그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그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워낙 키가 작아서이기도 했지만 예수에 대한 탐구심이 그만큼 깊었음을 엿볼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그 군중들 속에서 자신에게 향해있는 한 염원을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숨어 있는 그를 불렀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와라” 여기에서 나무라함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의미한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견고한 자의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의 곤고한 마음을 보았고 그것을 측은히 여겨 그에게 새 삶의 길을 제시했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예수만은 그의 마음에 들끓고 있는 갈등에 주목했다. 갈등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과오투성인 인간이었다. 백성들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임의로 털어내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탐심에 젖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삶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그 갈구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게 했고 애써 올라간 나무에서 또 내려보게 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내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때 이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단하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기회란 없다. 우리는 나의 모든 운명의 변화가 예수를 만나기 위한 일련의 절차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오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 수고로움이 죽어도 싫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 고집 때문이다. 이 일을 버리면 당장 밥을 굶주림 같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을 빛의 자녀가 아닌 어둠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간다. 잠시의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인하고 “내려오라”는 말씀에 순종해 평생 예수의 사람으로 산 삭개오의 정신을 아무리 음미해도 부족하기만 한 교훈을 담고 있다./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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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4-05
  • “인류위한‘사랑의 실천’ 운동을”
      만약 참 사랑의 가치 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 역사의 명령을 경청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역사는 이제 인간의 덕목 가운데 사랑이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가 도래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지나온 역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싸늘한 본능이 지배하는 사회, 아집(我執)과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나태와 부정직이 지배하던 사회는 시급히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웅변으로 가르치고 있다. 입으로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참으로 실천하는 사회가 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제 인간들이 과거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인류의 행복과 평화와 번영은 결코 도래할 수 없다는 교훈을 역사의 힘은 가르치고 있다. 이 역사의 힘을 거스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일 따름이다. 남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이 고매한 정신이 우리 삶에 뿌리내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사회, 아름다운 세계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단절과 갈등, 그리고 분쟁 속에 휩싸여 왔다. 이제는 환경 파괴와 핵무기의 위험이 우리의 앞에 가로놓여 있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맑고 청정한 정신을 갖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사랑’은 질서와 조화의 정신이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여러 악기들은 한데 모여 아름다운 멜로디를 창조해 낸다. 이 모든 악기들이 질서와 조화의 정신으로 통합되지 않고, 각각의 소리만을 고집한다면 그냥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계와 인류가 울려내는 오묘한 멜로디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한국,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어 가려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자 포부이다.   내가 평생 동안 외쳐 온 이 ‘사랑의 실천’ 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울러 이 정신 운동을 통해서 밝고 건강한 인류의 장래는 약속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깊이 인식하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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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3-30
  •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지금 지구촌은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져 만신창이가 되었다. 또한 폭우와 홍수로 한 지역의 도심지를 휩쓸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거대한 산불로 인해 엄청난 산림을 불태우고 수많은 주택이 전소되었다. 한마디로 지구촌이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재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지구촌이 자연재해나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계가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계의 오늘의 실상을 보자. 먼저 공교회의 연합단체는 선지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반면에 교권과 자리다툼, 이권에는 혈안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강도의 소굴로 변해 버렸다.   또한 국가와 이 사회를 올바른 길로 선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거나 소극적이다. 그리고 이 세상이 정의로운 사회로 바로 서가도록 적극적으로 지도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에는 관심이 없고 어떠한 정치세력에 줄을 서려고 안달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한자리? 아니면 어떤 면으로든지 자기이익을 챙기려 하는 것인지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공교회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 따라야 한다. 보수편이나 진보편도 있을 수 없다. 여편도, 야편도 안 된다. 물론 목회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적으로는 각자가 다 다른 소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교회 연합단체로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교직자들이 정치사상과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진리를 사고팔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무속신앙에 빠져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이 설 수 없는 심히 부족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를 위해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유보시키고 무속에 사로잡힌 자를 선택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유보시키고 정권유지나 교체에 이용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무를 망각해버린 것으로서 직무유기다. 한마디로 더러운 추태로서 참으로 가슴 아픈 심각한 타락인 것이다. 우리 모두 정신 차려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와 그동안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악들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어서 빨리 사명의 현장에 나아가 생명을 바쳐 충성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이 세상의 천재지변과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모두 어서 빨리 하나님께로 회복하자./예장 대신측 증경총회장·한국교회연합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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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3-15
  • ‘처치쉽’에서 ‘디사이플쉽’으로
    교회는 예배만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교회는 다섯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가 예배, 둘째가 사역, 셋째가 미션, 넷째가 교제, 다섯째가 제자화이다. 한마디로 교회의 기능은 처치쉽과 디사이플쉽으로 나눌 수 있다.   계속되는 코로나 위기 앞에서 처치쉽이 무너지니까 오늘의 교회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처치쉽에 치중해온 것이 사실이다. 성도들도 보이는 교회를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해옴으로 교회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자신들의 신앙이 흔들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위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주님이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라고 지상명령으로 말씀하셨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교회의 사명을 모이는 교회와 훌어지는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모이는 교회가 처치쉽이라면 흩어지는 교회는 디사이플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최대의 교회를 섬겨온 모 담임목회자가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전환하기 위한 결단으로 자신이 목회한 교회를 100개의 교회로 분리 개척하겠다는 소신을 발표함으로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우리 모두는 코로나 재난이 종식되어 다시 예배가 회복되도록 기도할 뿐만 아니라 훌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바로 하도록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제자화교육과 훈련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에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칭의의 신앙이요, 그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정화의 진망이다. 칭의의 신앙이 처치쉽에서 왔다면, 성화의 신앙은 디사이플쉽에서 온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데는 그 사명을 다해왔지만, 신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디사이플쉽에는 소홀히 해온 것은 아닌지 우리의 목회사역을 깊이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이 코로나 재난을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처치쉽 신앙에서 성숙한 디사이플 신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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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28
  • 사랑의 실천에 힘쓰는 한국교회가 되자
    코로나 역병의 장기화로 우리의 모든 생활이 변하고 있다. 특히 교회의 본질인 성도들의 ‘교제’가 크게 제약받고 있다. 코로나 자체보다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한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치명적인 상황이다. 더욱이 정신장애인과 신체장애인, 치매 환자, 취약가정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경우가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제도적, 실질적 지원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이 코로나로 인한 불확실성이 높고,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개인의 고용과 일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화할 수 있다면서 각국이 코로나 방역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고용과 일상회복 등 전방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이에 대한 적극적 대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다. 사랑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탐욕(우상숭배)의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교회 속에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2:15), 곧 특이한 기질과 독선과 아집 등을 “배설물”(빌3:8)로 처리하지 못한 채 분열을 방관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것이다. 교회가 먼저 탐심과 증오를 버릴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를 향하여 ‘복음과 사랑’으로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빛은 어둠을 밝힌다. 소금은 부패를 저지한다. 코로나 시대야말로 교회가 우선하여 혐오와 분열을 극복하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실천해야 할 때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주님의 새 계명을 지켜가야 한다. 주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가의 말씀(마22:37-40)이라고 하셨다. 새 계명은 내가 목숨을 다해서 너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마음속에 이루어진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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