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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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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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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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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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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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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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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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사랑의실천] 사명적 교회로 돌아가자
      미국에 미래교회 학자인 레너드 스위트 박사는 이 땅에는 4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첫번째 교회는 사명적 교회(Mission Church)가 있다. 두번째 교회는 목회적 교회 (Ministry Church)가 있다. 세번째 교회는 현상유지적 교회(Maintenance Church)가 있다. 마지막 네번째 교회는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가 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사명적 교회로 출발하다가 두 번째 교회인 목회적 교회로 변질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때는 목사 중심으로 교회 행정조직이 중요해지면서 많은 교회들이 두 번째 교회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본래적 사명은 뒷전으로 물러가면서 드디어 세번째 교회인 현상유지적 교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교인들이 다 떠나간 박물관 교회가 되어 가는데, 바로 이런 교회들 이 역사적 유물만 남기는 유럽에 있는 교회들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마16:15-18)고 고백했을 때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명적 교회이지, 묵회적 교회나 현상유지적 교회 가 아니며 더욱이 박물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사명적 교회를 세우시고 그 사명을 위해 지도자를 세우고 일꾼을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 세워진 오늘의 교회들이 사명적 교회로 가고 있는가를 냉철히 돌아보며 바른 진단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의 사명이 중심되지 못하고 사명적 교회로써의 순수한 열정이 사라지고 많은 교회들이 목회자 중심에 목회적 교회로 가고 있으며 드디어 보이는 교회 중심으로 현상 유지해 가는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본래의 사명을 소홀히 하면서 교회 자체를 위한 교회로 타락해 가고 있기에 초대교회 이후 사명적 교회가 인간 교황이 중심되어가는 중세에 카톨릭 교회가 변질됨으로 결국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올 불러오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사명적 교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개신교회들마저 목회적 교회에서 현상유지교회로 그리고 드디어 유럽에 많온 교회들이 박물관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교회 위기시대가 온 것이다. 현재는 미국 교회들마저 이런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도 사명적 교회에서 목회적 교회와 현상유지적 교회가 되지 않을까 심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회심한 후 당시에 영국교회도 현상유지교회에서 박물관 교회로 내려가고 있을 때 웨슬리를 통해 위기에 찬 영국교회를 사명적 교회로 변화시켰고, 결국 이 땅에 사명적 교회인 감리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본래의 사명적 교회 위치에 굳게 서야 한다. 세계의 교회들이 목회적 교회에서 현상유지교회와 박물관 교회로 갈지라도 한국교회는 첫 사랑의 사명이 변질되지 않도록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깊은 회개과 결단으로 이 마지막 시대에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소원을 반드시 이뤄 드리는 사명적 교회(Mission Church)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집자가를 바로 지고 가는 건강한 한국교회가 되자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에 계 간곡히 호소하는 바이다.  /기감 전 감독회장·도봉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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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0-26
  • [사랑의 실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존재감을 들어내면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세속적인 어떤 인물보다 더 탁월하고 월등한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특히 영적 지도자로 진취적인 삶을 살며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삶의 질, 신앙의 질, 사고의 질을 높여야만 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정하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신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하려면 첫째로 거듭나야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셨다. 거듭남의 증거는 외형적인 것보다 내면적이고 영적인데 있다. 거듭남이란 생명의 본체이시며 근본인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웨슬레는 거듭남의 의미를 신적변화, 내적변화, 완전한 변화, 신비로운 변화라고 했다. 거듭나야할 이유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적인 것은 항상 죄와 연결되어 있고 영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구습을 버리고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을 죄에 내맡겨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 성령을 좇아 살라”고 했다. 거룩함을 동반한 성장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지만 성화(聖化)가 없는 성장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케 하며 파괴로 이끌기 위한 마귀의 방해공작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서는 학문의 질을 업그레이드해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고등학문이고 세상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항상 내적 전환, 마음의 변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서는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항상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시듯 성경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됨을 확인하고 인간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복음화가 우선되어야 하며, 복음화는 인간화,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0-10
  • 거룩성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주요 장로교단의 총회가 마무리됐다. 장로교회는 총회 앞에 꼭 ‘거룩한 성’자를 붙여 ‘성총회’라고 말한다. 다른 감리교나 성결교 등 다른 교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총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칫하면 총회가 거룩성을 잃어버린 채 정치싸움의 장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지듯이 교회와 교회의 회의도 거룩성을 잃으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코로나를 거치면서 위기는 한층 더 심화됐다. 특히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감소와 이에 따른 지방의 소멸에 한국교회는 존립을 걱정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주일학교는 갈수록 줄고, 2030 청년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이다. 위기에 대처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성의 회복이다. 총회장이 되고, 대표회장이 되는 것은 어떤 권력과 힘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진정한 리더십이 생기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려면 당연히 목회자 스스로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과 기도에 전력하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성 위에서 교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이다.    목회자부터 거룩함을 회복하고, 교회가 거룩함 위에 견고히 세워지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교인이 몇 명 모이고, 교회건물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거룩성의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지금부터 거룩함의 회복을 위한 연습과 훈련에 돌입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4~45)” /한기총·한장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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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9-25
  • [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스위스를 매년 회의차 다니면서 스위스의 옆 나라인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몇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의 안내로 그곳 시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그림은 「기회」라는 큼직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머리에 뒷머리 부분은 없이 앞머리만 길게 늘어져 있고, 발은 말과 같아서 뛰기를 잘하게 생겼으며, 괴상하여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한 폭의 추상화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주는 의미는 크게 감명을 줬다. 설명하는 안내자에 의하면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지 지나가 버린 후 잡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었다. 해설을 듣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까, 그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에서 못 잡으면 뒤통수에는 머리마저 벗겨져 있어서 뒤에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기회’와 같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현재라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후회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교훈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고 만다.   사랑의 실천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오늘이요, 바로 지금이다.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곧 섬김의 삶이다. ‘더 건강하고 더 시간이 나면 하리라’, ‘더 넉넉하면 섬기고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빨리 스쳐 지나가고, 사랑의 실천은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천을 통해 보람을 찾고, 좋은 결과로 사랑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향기를 멋지게 남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본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결과 그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미담이다. 가룟유다는 ‘그 아까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하고 위선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고 이 사랑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야말로 사랑을 실천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절)고 했다. 선한 일은 사랑을 지금 바로 실천하는 일이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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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8-31
  • [사랑의 실천]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자
       우리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한다. 1919년 3월 1일 선조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1945년 8월 15일 쟁취한 광복을 기리며 1948년 8월 15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일제 식민지배의 고통과 아픔의 흔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곳곳에 상채기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분단의 아픔과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서로 간에 지울 수 없는 증오심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들의 헌신 덕분에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선진국의 반열에 서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뿌리 깊은 반일 감정, 남북의 분단과 극심한 좌우 대립,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 수많은 문제가 분출되어 대한민국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원한과 갈등과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고 공존 공영하는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 22:37~40)고 말씀하셨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믿는다.    설령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우세하다고 해도 상대방은 승복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의 실천만이 최선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 2장 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사 랑을 실천하며 살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 온 세상은 거짓과 증오로 가득차 있다. 나에게 예수 생명이 가득 차 있어야 미움을 덮을 수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하늘나라 주소를 소유해야 하고 물질을 소유해야 물질을 나누어 줄 수 있듯이 하늘 생명을 소유해야 천국을 얻지 못한 굶주린 헐벗은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야고보서 2장 12절은 자유의 율법을 가진 자라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일서 3장 24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자들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사랑을 실천하며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든 원한과 고통과 갈등을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늘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의 고통과 상처도 이겨내고 남북 분단의 골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을 열어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그날을 기대하며 살아가자./ 조은교회 원로목사·(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전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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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8-08
  • [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성경의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분복이다. 특히 가족과 직업은 많은 성취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허무한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의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바는 만물을 괴롭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한 조각, 어리석음이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분복은 소홀히 하고 머나먼 지평선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헛된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나오는 틸틸과 미틸의 여행처럼 말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주리라 믿고 거침없이 자연을 훼손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환경파괴의 저주로 불행해 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자. 선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므로 비록 우리의 선행에 대해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선행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지만 많은 사람은 일시적 욕망과 목전의 이익 때문에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 헛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하니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혹은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며 위로이다.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나도 우리 이웃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이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나도 남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를 다 함께 노력해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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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7-21
  • [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만 70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휴전 곧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70년 동안 휴전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을 모두 따지면 78년이나 된다.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날카롭게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기억과 여전히 다투는 중이다.    나는 10살에 6.25를 경험하였다. 내 고향 강화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인접한 위험한 섬이었다. 유년으로 소년으로 성장하던 무렵에 겪은 전쟁은 70년이 지나도록 평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우리 노년 세대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전쟁을 넘어서 미국과 소련이란 체제를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목숨과 소중한 가정을 잃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등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흘러야 심리적 종전을 선언할 수 있을까? 언제쯤 지나야 남북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공동체는 너무나 커다란 시대의 우울과 분노를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갈등이나,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하는 진영논리는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길 빈다.      그럼에도 희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은 고난은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분단은 앞으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 없는 민족공동체로 나아갈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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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7-18
  • [사랑의실천]‘사랑의 실천’위한 삶의 길
       성자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실천’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 뿐 아니라 원수들에게 까지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을 삶과 몸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 사람들 중에 세 사람을 지적하면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라고 고백하면서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사랑과 섬김’의 부스러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파키스탄으로 중국의 연변 지역으로 때로는 일본으로 북한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 다니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만큼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강변교회 원로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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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6-20
  • [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인간의 역사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네 삶속의 미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들이다. 나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갈등 구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내가 살고 죽는 문제로 인해 그 갈등을 피해갈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면 그 갈등의 고리를 풀 수있는 데 그 양보가 어려워 끝내는 아픔의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등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감추거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침잠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갈등은 당장 편하다고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꺼내놓고 해소하고 치유한 다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큰 갈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나 가정 안의 갈등의 문제가 정말 나의 생존권에 관한 것인가? 나의 양보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99.99%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상의 문제이든 최소한 신앙사회 속에서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해결의 의지, 치유의 의지를 가지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신앙안에서는 그 방법이 있다. 먼저 기쁨으로 손해 보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신앙사회는 이기고 지는 곳이 아니다. 내 의견이 꼭 관철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조금 손해 보아 은혜롭다면 그 또한 주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을까? 상호간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보씩 양보하면 의외로 문제는 풀릴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기쁨으로 손해보라. 자신의 권위를 기쁨으로 조금만 내려놓으라 자신의 체면을 조금만 내려놓고 기쁨으로 손해 보기로 마음먹어보라. 문제는 은혜중에 해결될 수 있다. 왼뺨을 치려하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은 엄청난 손해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기쁨으로 그 손해를 감당하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웃으며 오른뺨을 돌려대는 사람에게 그 뺨마져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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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3
  • [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톨스토이가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소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톨스토이가 그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이라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지만 일단 소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울지말아라, 오늘은 이 가방을 줄 수 없지만 내일은 이 가방이 내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꼭 내일주마.” 목을 놓아 울던 소녀는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톨스토이의 목에 매달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 가방을 들고 다음날 소녀의 집에 갔을 때 소녀는 죽은 상태였다.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무덤에 그 가방을 바쳤다.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아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지만 제 약속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많은 약속을 한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자와 앞으로의 어떤 일에 관하여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둔 것’이라고 되어있다. 한번 한 약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무덤 속에 남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고 상대방이 그 약속을 명확하게 믿고 있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나님과 한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으시다. 어허 저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저렇게 거짓말을 하네 하며 기억하시곤 질타하신다.   톨스토이는 한 철없는 소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하물며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기도제목을 이렇게 삼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중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생각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언뜻 일방적인 나만의 약속처럼 느껴져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성령이 역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만큼 진실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내가 무슨 약속을 드렸는지, 그 약속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다. 톨스토이의 가방을 받아든 소녀의 영혼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 또한 굉장히 기뻐할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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