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2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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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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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10
  • [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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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06
  • [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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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8-07
  • [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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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7-08
  • [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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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5
  • [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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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1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북한에 사랑의 식량을 보내자
      손양원목사는 여순 반란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한 아들은 때려 죽이고, 다른 아들은 총으로 쐈던 안재선에게 사형언도가 내리자, 손목사는 판사에게 눈물로 용서해 주라고 부탁했다.   나아가 손목사는 안재선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데, 밥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나 참으면서 함께 살았다.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삶으로 나타냈다. 손목사의 위대한 삶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으로 출판됐고, 영화도 만들어졌다. 손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기도 했고, 결국 한국전쟁 중에 순교하셨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다.   우리는 북조선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면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로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북조선에서는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6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른다고 하며, 개성에서도 매일 수십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한다. 대북제재, 한재, 홍수, 코로나로 국경무역 완전봉쇄 등 악재가 겹치고 있다. 김정은위원장은 2023년 2월 전체회의를 소집해 ‘농업’ 하나만을 주제로 토론했고, 김여정을 개성에 보내어 실태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한 듯하다.   남한에서는 버리는 음식이 30조원에 이르고,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북에 즉시 긴급식량지원을 해야 한다. 쌀, 식량 150만톤을 보내서 기근에서 구하고, 희토류 등을 교환해 와서 북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전달해야 한다. 파주 남북세관(CIQ)에 가져다가, 북측 주차장에 쌓아 놓고 오면 된다. 주겠다고 말하지도 말고, 신문, TV, SNS에 공개하면 안된다.   필자가 신앙 간증하는 것은 북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문제를 돕는 일을 2007년부터 고 백승인장로와 더불어 계속하고 있다. 밤, 잣, 사과, 토마토 농장 등을 조성해 많은 식량지원을 직·간접적으로 해 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 “나와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다. 지금 가장 어려운 일들을 당하고 있는 북한동포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되면, 우리는 천국 잔치에 초대될 것이다. /연세대 명예교수,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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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3-17
  • [사랑의실천]아름다운 섬김의 봉사 인생
      유태인들이 즐겨 읽는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세가지 기준이 있다. 그 세가지 기준은 첫째, 키이소오(돈주머니)요. 둘째는 코오소오(술잔)이요. 셋째는 카아소오(노여움)이라는 것이다.   먼저, 그 사람의 인격을 측정해 보려면 그 사람에게 돈 보따리를 맡겨보라는 얘기다. 그가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쓰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을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론 돈 못지않게 그 사람의 인격을 뒤흔드는 게 “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술을 좋아 하다가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도가 넘치면 결국 술에 사람이 본정신을 잃고 술이 사람을 망가뜨리게 된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다가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자신도 망하고 상대방의 생명을 잃게하는 일이 얼마나 비극인가. 술이 도가 넘치면 큰 사고를 만든다. 비극이다.   그리고 사람이 노여운 일(카아소오)을 겪을 때 그 사람의 인간성을 엿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스스로를 자제하고 잘 참는 사람이 덕스러운 인격자임을 알게 된다. 분노로 폭력을 수반하기도 하고 큰 죄로 번질 수도 있다. 그래서 잠언서에도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인격을 다듬으며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게 된다. 인생을 돈의 노예가 되어 목적을 삼고 살 게 아니라 돈은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로 알고 돈을 보람있게 쓸 것이요, 술에도 노예가 되듯이 술에 도취 되어 탈선하지 말 것이며 우리가 사는 동안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잘 조절하고 자제하면서 무엇보다 배려하고 섬기는 봉사하는 삶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봉사는 희랍말로 디아코니아(Diakonia)로서 “시중드는 일” 섬김을 뜻하고 영어의 서비스(Service)는 라틴어의 노예를 뜻하는 Servus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봉사(섬김)는 주는 것이요 희생하는 것이다. 에릭 프롬은 봉사에는 사랑의 행위를 실천함으로 돌봄(Caring)과 책임(Responsibility)과 존경(Respect)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역시 봉사(섬김)에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봉사란 “타인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행동하는 의욕”이라고 했다. 행동하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밝은 등불이요 희망일 것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 중에는 서울역 앞 빈민촌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헌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 목사님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의 모습이라고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예장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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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3-14
  • [사랑의실천 - 칼럼] “둘째도 그와 같으니”
      오 헨리(1862~1910)가 쓴 『현자의 선물』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돈리’는 직장을 잃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추운 겨울철 구걸에 나서 고급식당 앞에 자리를 잡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합니다. 그러나 식당 안으로 들어가던 한 여인이 돌아와 ‘1달러’를 돈리의 손에 쥐어 주면서 살리는 일, 너무 훈훈한 일이 시작됩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돈리를 중심으로 노인과 신문팔이 소년, 그리고 길 잃은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1달러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돈이 시너지효과를 나타냄으로 배고픔이라고 하는 지극히 원초적인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현자의 선물』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팁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대단히 짧고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는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랑이 담긴 그 1달러는 주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 희망이 되고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토라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나오는데 248가지는 “하라”는 긍정명령이고,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부정명령입니다. 십계명의 1에서 4까지의 계명은 하나님관계 계명이고, 5에서 10까지는 대인, 대물관계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예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축약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서 놓치지 말아야 될 핵심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둘째도 그와 같으니”(마 22:39)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만 사랑해 달라고 하는 철저히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무시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형식적으로 대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듯 너희끼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주문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심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총체’이자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자’(롬 13:8)가 되는 것이고,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의 핵심이 사랑이며,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펜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 이상기온으로 인한 식량을 포함한 주요 자원의 안전망에 구멍이 뚫린 가운데 이제는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역의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서 지구촌의 앞날이 캄캄하고 살아갈 방도마련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때를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와 사랑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주셨으니 더욱 깨어 영적으로 무장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신앙생활의 진수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예장 합동한신 총회장·예향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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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2-21
  • ‘예수 생명’과 ‘사랑’,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입춘과 함께 봄이 오기 시작하면 대지의 생명이 충만해지고 푸른 새싹들이 고개를 내민다. 생명이 다시 움트는 계절은 우리들에게도 삶의 기쁨과 의욕으로 다가온다. 푸르른 숲과 생기 넘치는 자연을 보노라면, 만물을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나 공동체를 보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영적 생명이 충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린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영적 생명이 충만한 사람들은 상처받고 파괴되는 관계를 용서하고 화목하여 생명을 낳는 활기찬 공동체로 바꾸는 능력을 발휘한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생명이 죽어 있는 공동체는 아무리 애를 써도 되는 일이 없기 마련이다. 수고하고 힘써도,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려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냉랭하고 점점 더 썩어들어간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려면, 영적 생명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이해타산으로 영적 생명을 죽이지 않도록, 모두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며 공동체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이 불타오르도록 서로 격려해야 한다.   영적 생명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반드시 무너진다. 계산과 이해관계로만 얽혀있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세상적으로는 인정과 칭송을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일에는 무익(無益)한 종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살리고, 학교를 살리고, 국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영적 공동체로 바로 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속한 공동체 안에 사랑과 용서와 섬김이 나타나고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영적 생명력이 가득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며, 그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는 창조적인 삶으로 나타난다. 예수 생명, 예수 사랑이 갈수록 풍성해지는 한국교회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예장 백석 총회장·백석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2-10
  • 예수님은 참 빛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주신 세가지 빛이 있다. 첫번째는 햇빛이다. 이 햇빛에 사십여만종의 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한다. 사람의 먹이가 되는 오곡백과도 햇빛에 의해 꽃을 피우고 맺은 열매를 무르익게 한다. 산에 사는 동물도 상처난 부위를 햇볕에 쪼이면서 치료를 받는다. 사람들은 햇볕에서 몸에 필요한 비타민 D를 공급받는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런 햇빛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다 공급된다(마5:45).   둘째 과학자들이 찾아낸 빛들이 있다. 엑스 광선을 통해 몸속의 상태를 본다. 레이저 광선을 통해 수술도 하고 각종 문명의 이기들이 생겨난다. 이런 빛들은 과학의 눈을 뜬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다. 과학이란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해놓으신 물질들이나 원리나 불변의 법칙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셋번째는 참 빛이 있다. 이 빛은 죄악으로 어두어진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밝히고 치료하여 구원하는 빛이니 곧 예수그리스도이다. 세례요한은 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히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낸자 이다(요1:7~8). 예수님은 참 빛이다. 이 참 빛은 치료하는 광선이다. 그리하여 38년된 난치병자가 고침을 받는다(요5:1~18). 12년된 혈루병 여인도 고침을 받는다(막5:25~34).   예수님은 지은죄로 마음이 어두웠던 여리고의 세무서장 삭개오에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참 빛이 되어 주셨다(눅19:1~10). 그래서 예수님은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빛이 되셨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자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셨다(마4:16).   우리나라 조선말기는 흑암에 갇혀 있었다. 남존여비로 주색잡기로 각종 우상숭배로 문맹자가 많은 나라였다. 그때에(1884,4,5) 미국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왔다.   그들의 전도로 기독교 인구가 20만명 되었을 때에 민족대표 33인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었다. 그들이 일본에 항거 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 후 미국 다음으로 해외선교사를 많이 보내면서부터 현재 우리나라는 10위귄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참 빛이신 예수님만 유일한 소망이다. 예수님이 참빛로 왔으나 그를 구주로 영접 하는자 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귄세가 주어진다(요1:12~13). /예장 백석측 증경총회장·해오름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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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2-13
  • 말하는 힘
      사람들은 말하기는 좋아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지혜자가 되려면 말하기 훈련을 하기 전에 반드시 듣는 훈련을 해야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란 야고보서 1장 19절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기만 해도 인간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상담의 제1원리는 경청하는 것이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자기 스스로 결론을 다 내리고 털어놓고 나서 ‘시원하다’고 말하며 일어난다. 그런데 가르치려 하고, 훈계하려고 하면 기분이 나빠 마음을 열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듣는 훈련이 중요하다. 이렇게 사람의 말을 들어 줄 때 성공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한국 기독교가 열심히 모여 예배하고 날마다 말씀을 듣는데, 세상을 향한 영향력은 점점 떨어지는가? 그것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시온성이 나오고, 소원의 항구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세상사람들은 강한 것이 이기고 오래간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혀와 치아를 비교해 보라. 부드러운 혀가 딱딱한 치아보다 훨씬 오래간다. 잠언 25장 15절에서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한다. 노자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고 말한다. 물방울은 부드러우나 계속 떨어지면 돌을 뚫는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약한 사람 같으나 강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은 충돌하고, 부러지고, 상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감싸고, 덮어 주고, 위로자가 된다.   세상에 생명이 왕성한 것은 모두 부드럽다. 어린아이는 부드럽다. 그러나 숨이 끊어진 시체는 한 시간만 지나면 돌덩어리가 되고 만다. 부드러운 것에 생명이 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틀렸어’라고 말하지 말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사람이란 별명을 가졌던 요한도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구약에서 한 성질 하는 것으로 유명한 모세도 ‘온유함이 세상사람들 중에 최고’란 칭찬을 받았다.   한국교회가 힘차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다시 굳게 일어서길 기대하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우리 성도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어지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의 힘을 회복해 말로 새로운 생명들을 얻길 소원한다. /거룩한빛광성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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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2-02
  • 노숙인의 자활을 위한 사역활동 앞장
    (서울역노숙인 자활센터 최성원목사) 서울·용산역서 무료로 급식제공,  목욕과 생필품 등 지원   주민등록 회복시켜주는 작업과 취업 연계등 자활활동도     서울역노숙인 자활센터 최성원목사(사진)는 27년간 노숙인들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월남전 참전용사 시절 서원을 하고 목회자가 된 그는 노숙인들을 위한 사역으로 ‘노숙인의 대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2년 전 후암로 인근에 개설된 이 센터는 서울역과 용산역 일대에서 무료급식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노숙인들을 위한 숙소제공을 비롯한 사역을 하며, 궁극적으로 자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목사가 노숙인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IMF사태와 연관이 있다. IMF사태 당시 대우빌딩 앞 지하도에서 수백명의 노숙인들을 본 최목사는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목사는 “이들을 볼 때 눈물이 났다. 어렸을 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웠던 과거가 떠올렸다. 내가 저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진짜 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 당시 목회를 했지만, 갈등이 있었다. 진짜 목회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이들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센터는 매주 서울역과 용산역 일대에서 200명 가량의 노숙인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노숙자들을 위해서 잠바, 양말, 수건, 칫솔, 치약 등 생필품등도 나누어주고 있다. 그리고 무료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하고 있다.   ◇ 서울역노숙인 자활센터는 노숙인들을 위해 급식배식과 취업연계 등의 사역을 하고 있다.   그가 노숙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는 사역은 ‘신분의 회복’이다. 많은 수의 노숙인이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최목사는 말소된 이들의 주민등록을 회복시켜주는 행정상 절차를 지원하고 있다. 또 노숙인들이 지원 받을 수 있도록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시켜주는 일도 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지원비로 노숙인들을 위한 숙소를 연결해 준다.   그의 사역에 핵심은 노숙인들의 자활이다. 지금까지 최목사를 통해 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취업해서 자활에 성공했다. 최목사는 “자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터가 있어야 한다. 노숙인들이 취직하기 위해서는 보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보증을 서준다”면서. “청소부, 목욕탕 때밀이, 건설 신호수, 주차관리원 등으로 취업을 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목사는 노숙인의 취업에 앞서 그들이 금연과 금주를 할 수 있게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의 마음과 몸이 회복되면 각자의 여건에 따라서 일자리를 연결해주고 있다. 특히 출소 후 자립하도록 주거를 지원하는 등 출소자에게 미래를 꿈꾸도록 집중하여 사례관리도 하고 있다. 또 그는 현재 센터에서 5명의 노숙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들은 최목사의 사역을 함께 도우면서 자활에 나서고 있다.   최목사는 ‘노숙인의 자활’을 이 사역에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한다. 최목사는 “군인장교 출신이 이혼당해 노숙자가 됐다. 하지만 지금은 자활에 성공하고 재혼까지 해서 잘살고 있다”면서, “또한 자활에 성공한 노숙인 출신이 고맙다면서 노숙인들에게 수박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가장 큰 보람이다”고 말했다.   한편 월남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베트남에 대한 관심도 크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사역도 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 중 한국에서 결혼을 원하는 이들에게 100불씩 지원하여 한국어를 가르치고, 결혼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고 있다.   ◇ 노숙인 자활센터, 목욕지원과 노숙인들과 숙식을 하고있다.  마지막으로 최목사는 사역을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사회복지 안전망 바깥에서 자활을 지원하는 노숙인 사역은 그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 그런데 어렵다”고 말했다. 코로나사태로 시민후원금이 끊어지면서 센터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센터 운영을 위해 본인의 기초생활수급자비와 월남참전 용사 국가유공자 수당까지 보태는 중이다.      현재는 전기세 미납으로 인해 센터에 전기가 끊겨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전기가 끊기니 목욕지원과 부식보존, 식사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잠자리에까지 밀려들어오는 겨울 추위는 센타가 겪는 어려움, 이중고이다. 최목사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는 성탄되도록 사회적 약자들에게 기도와 지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 전기가 끊긴 노숙인 자활센터, 식재료보관과 목욕지원, 난방이 중지되었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1-29
  • 한국교회여, 젊은이들 빼앗긴 죄악을 참회하고 통회하라
      이태원 사고는 그것을 당한 분들의 부모와 가족과 친지와 우리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과 놀람과 고통을 준 불행한 사건이다. 왜 이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우리 모두의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정부 차원의 철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고를 성경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여기에 담긴 영적 차원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진단하며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할로윈 데이'라는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전해온 축제를 맞이하여 엄청나게 많은 젊은이들이 좁은 도로에 한꺼번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압사를 일으킬만한 정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왜 그곳에 가게 되었는가? 아마 사고를 당한 분들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들리는 말에는, 많은 젊은들이 호기심으로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주일학교 현실에서 초등부와 중고등부는 물론 대학청년부에 이르기까지 출석하는 인원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주일학교 자체가 없어진 교회들이 대단히 많다고 듣고 있다. 기독교적 정신과 가치와 이념을 따라 세워진 대학들에서조차 기독교인 대학생들의 숫자가 전체 학생의 5% 이하이며 그래서 오늘날 대학생들을 가리켜 '미전도 종족'이라고 말하는 어느 대학교 교수의 말을 들은 것이 최근이다. 자라나는 세대가 이렇게 점점 더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 반면, 교회와 상관없는 모임과 나아가 교회를 거부하고 반대하며 배척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일어난 젊은이들의 ‘탈-교회’ 현상이다. 한국의 손흥민 선수가 뛰는 축구 경기 중계 화면을 보면, 그렇게 큰 축구 경기장에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은 연로하신 소수의 신자들이 크고 웅장한 영국 교회의 예배당에 모여 쓸쓸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왜 젊은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과 상관없는 것에 정신이 팔리도록 만들어 왔는가? 우리는 왜 젊은이들의 영혼을 그들의 주인이 되신 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인가? 이태원 사고를 놓고 우리는 외면만 화려하고 풍성하게 보이지, 영적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무능하고, 무력하며, 무책임한 한국교회의 영적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각성해야 한다.  나를 비롯해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은 주 하나님 앞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을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빼앗긴 우리의영적인 무능력과, 무책임과, 무관심을 애통하며 통곡하며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버리고 떠나가고 있는 상황을 방치하고 내버려 둔 죄악을 참회하고 통회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호 6:1).   젊은이들의 영혼을 복음으로 붙잡기 위해 지금 눈물로 기도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도 유럽과 북미 교회들의 전철을 따라갈 것이다. 사탄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세속의 물결과 죄악의 물결과 사탄의 물결(계 12:15)에 우리도 다 휩쓸리고 마귀의 밥이 되어 배교의 벼랑 끝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마겟돈으로 부르는 영적인 최후 전쟁(계 16:16)을 앞두고 있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종말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벼랑 끝에 서있는 절박하고 위급한 마음으로 독수리의 두 날개를 보내주시도록(계 12:14) 절박하게 급박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심각한 영적 위기의 때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대행·대전 늘사랑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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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1-21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하박국이 예언한 시기는 주전 600년경으로 포로 전 유다 왕 요시야가 죽는 때와 겹치는 시기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일으켰던 요시야 왕이 죽게 되자 유다는 점차 국가적인 혼란, 도덕적인 부패, 종교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 백성들이 점점 악해져 가고 망국적인 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의로운 사람이 핍박당하고 악인들이 득세하고, 잘못된 행동과 주장이 정의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를 징벌하려 행동을 개시한다.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쓰시고자 세운 바벨론 왕국은 무력의 왕국이다. 군마와 무기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그들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없다. 오직 힘이 정의이다. 여기에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이미 3000년 동안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지만 힘이 약화되고 있다.   헬라는 도시국가를 형성하면서 이제 점점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하며 제국의 기운을 모아가고 있었다. 로마 역시 절치부심하며 나라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 이 강대한 제국들 가운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정복을 당한다.   유다를 중심으로 제국들이 힘을 겨루는 험난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도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다. 이것이 하박국의 눈에는 멸망으로 가는 자신들의 운명으로 보였다.   국가와 사회는 모두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시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지혜롭다고 한다. 어떻게든 돈을 많이 모아야 성공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유치한 행동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그래야 산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다시 부흥하는 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익산 동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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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1-14
  • 함께 슬퍼하며 기도합시다
        이태원 압사사고로 귀한 생명을 잃어버린 일이 일어났다.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들이다. 상상할 수 없는 참상 앞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 대부분이 10대, 20대의 우리 자녀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집에서 나갔다고 했는데 밤에 비보를 들은 가정들은 청천벼락을 맞은 것이다. 어떤 말로 위로하며 아픔을 대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함께 슬퍼할 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아낸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그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만남도 있고 위로도 필요하며 쉼과 놀이도 누려야 했기에 그 공간을 빌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공간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비극의 자리에 슬퍼할 뿐이다 . 슬픔과 애도의 자리에서 교회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생명을 주는 진리인데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느냐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이 사회를 건강한 문화로 이끌고 섬겼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피해자인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꿈과 비전을 심어주어 다음세대를 주안에서 미래세대로 세웠느냐는 것이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붙잡아야 한다. 샬롬부흥의 직분자로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함께 슬퍼하며 기도하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린도후서 1:4~7)”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예장 합동측 총회장 · 주다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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