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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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론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무신론자로 살 것이냐 일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의 질과 영혼의 구원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던 사람과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과의 차이점은 삶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접할 때마다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지난 냉전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간에는 우주 항공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미⋅소 양국의 우주인에게 당국에서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귀환한 후에 자진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상반된 진술을 하였다. 즉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대기권 밖에 진입해서 우주여행을 하였던 소련의 가가린은 “여기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 어디를 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후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였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여행 중에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진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상을 평소에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무수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제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서 주님이 수난당하시기 직전까지 책망을 받던 그들이 예수의 부활과 성령체험을 하면서 불과 40여일 만에 성숙한 영성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여 선교의 지평을 열어가는 인물로 쓰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뉴톤 같은 수많은 탕자를 만인의 숭앙을 받는 성자로 만들어 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 살면서 예배생활과 성경적인 삶과 기도 생활을 중히 여기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천국에서 누릴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성령체험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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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4-08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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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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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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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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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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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공동체성과 공공성 회복에 힘쓰자
    ▲ 정일웅소장   현재 한국교회는 공동체성과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전자는 지나친 개 교회주의와 교파주의의 만연으로 서로의 돌봄과 협력을 망각하고 경쟁적인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이며, 후자는 신앙고백만 강조할 뿐 신앙실천이 따르지 않아 사회적 공신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한국교회의 공동체성과 공공성 회복을 위한 두 가지 실천방안을 제언해 본다.   첫째, 개교회주의적이며 개교파주의적 사고를 뛰어넘어 연합하는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연합은 우리 주님이 원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에 지체의 관계로 형성된 신앙공동체로써 언제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기를 분명히 권고하기 있다.   최근 한교총과 한기연이 연합하겠다는 소식이 들렸다. 연합은 옳은 방향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우리는 매 예배마다 고백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고백과 신앙실천은 여전히 이원적인 모습이다. 물론 수많은 한국교회 내의 이단들 때문에 단순히 연합을 말하기에는 염려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연합과 협력의 길로 나가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약 80%에 달하는 미자립교회들에 대해 자립교회들이 책임지는 협력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사회의 빈부격차는 정부의 책임이지만, 교회의 빈부격차를 줄이는 일은 전적으로 자립교회들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이 문제를 시급히 논의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복음의 동역자들에 대해 개교회와 개 교파를 뛰어넘어 돕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를 먼저 섬기며 봉사해야한단 말인가! 지금부터라도 개인의 돈이나 은행에 빚을 내어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교회를 개척하느라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고전분투했던가? 이러한 관행을 끊고 사람들이 그간 불신하던 교회에 대한 신뢰성과 공공성을 회복하고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찾는 복음전도의 새로운 역사가 거기서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됨의 길로 나가자! /전 총신대학교 총장· 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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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8-11-06
  •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다
    ▲ 김연준   나는 국가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다. 누군들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마는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   내가 민간 외교에 관심을 가지고 처음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피플 투 피플’이라고 하는 단체에 가입한 뒤부터였다. 이후 1975년 12월에 한국 본부 총재를 맡게 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민간 외교에 관심을 지녔다. 그러던 중 1976년 대선 당시 카터가 미국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내세웠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 중 누구 한 사람 선뜻 나서서 왜 그런 공약을 내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카터를 설득해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선회하도록 해야 할 텐데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했다.   평소에 먼저 나라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며, 따라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품고 있던 나는 카터의 큰 오류를 바라만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찾아가서 ‘만약 한국에서 미군 병력을 완전히 철수시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가서 그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을 강력히 외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행동에 착수하고 있을 무렵 카터의 절친한 친구인 웨인 스미스라고 하는 미국인 목사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웨인 스미스는 카터와 절친한 사이인데, 카터가 남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그를 불러 우정의 사절단이라는 단체의 총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우정의 사절단 총재가 되어 각국을 순방하던 중에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김장환목사를 통해 스미스와 만나기로 했다. 당시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나를 찾아온 스미스에게 평소 마음속에 있는 간곡한 뜻을 전달했다. 이후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한반도에서의 미군 철수라는 그의 공약은 수정되었다. 스미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그의 생각에 변화가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때 나는 민간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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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8-10-30
  • 진정한 개혁의 길
      세속주의로 끊임없이 치닫는 한국교회가 교권만 있고, 신앙의 자유는 없다. 믿음은 있다고 해도 구원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믿음과 구원에 대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서 인본주의적인 독단과 기복주의 설교가 판을 친다. 세속화에 극대화되어 가고, 오만과 독선으로 인해 분열과 정죄를 일삼고 있다.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거리로 여겨 예배드리는 공간에 불과한 예배당을 성도들의 집을 담보하고 힘에 겹도록 대출을 하여 예배당을 건축한다.   수백억 원의 부채때문에 그 빚을 갚지 못해서 교회가 파탄을 맞고, 결국에는 경매에 팔려 이단집단에 넘어가고 있다. 교인들이 신앙의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나는 일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목회자의 성공여부가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잘 짓느냐고 한다면, 사회적으로나 기독교적으로 누가 공감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얼마 전 성도들과 함께 로마에 가서 베드로 성당을 둘러 보니 너무도 웅장하고 잘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면죄부까지 팔아야 했던 당시 교계 지도자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진심으로 돌이킬 수 있어야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 합리적 생활과 복음사역을 이어온 개혁적 신앙운동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 한다.   설교 강단에서는 올바른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진정한 내 안에서부터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과거를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닌 새 것을 추구함에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하였으니, 누구를 탓하지도 말고 나부터 변화되어 자신이 한국교회에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희생과 죽음을 말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죽어야 하고,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국교회가 한다. 우리는 올바른 진리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가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길이 개혁의 시발점이다. /예장 개혁혁신 총회장·엘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8-10-23
  • 평화의 조건
    ▲ 이홍렬목사   한반도 해빙의 무드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듯하다. 이제 평화, 화해, 비핵화, 정상회담, 대화, 상생 등등의 단어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핵 없는 한반도를 위한 도도한 흐름이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지 않은가 하는 조심스러운 짐작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평화는 아니다. 참되고 완전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위적인 수단이 참 평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매일 싸움을 하는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아이디어를 내었다. 남편이 밖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 집에 들어올 때는 부인이 조심하도록 미리 모자를 삐뚤게 쓰기로 했다. 또한 부인이 화가 나 있을 때는 앞치마를 돌려차기로 했다. 그렇게 평화협정을 맺으니 한동안 부부싸움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모자를 삐뚤게 쓰고 들어왔다. 대문을 열고 보니 아내가 앞치마를 돌려차고 있었다. 도리가 없었다. 또 옛날처럼 싸웠다는 우스개 이야기이다.  평화협정이,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 몇 마디가 우리 세상을 참 평화로 인도하지 못한다. 참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심을 깨닫고 주님의 평화를 우리는 간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 먼저는 인내로 기다려 주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걸음걸이가 더디더라도 정부를 믿고 기다려 주는 인내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 급하다고 벼 이삭을 뽑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한반도 평화 만들기를 위한 절대적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라는 자리를 양보했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까지 양보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만드셨다.   내 것만을 주장하는 한 진정되고 영원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나에게만 이익이 되고 너는 손해가 되는 것을 요구해서는 평화의 발걸음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기 어렵다. 남북의 평화 만들기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가슴에 칼을 품고 있는 한, 남북회담을 천 년 동안 해도 평화는 어렵다. 마음속의 칼을 버리는 양보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한반도의 평화의 물결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기도가 절실한 시점이다. /루터회 증경총회장·새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8-10-17
  • 영혼구원과 사랑의 실천
    ▲ 이기복목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3:16) 성경 중의 성경, 복음 중의 복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생명을 얻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다 들어 있다. 우리는 이 결실의 가을, 다시 한 번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은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의 근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살리고 모든 우주만물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는 살리는 생명이 있고 영원히 사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모든 사람들이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신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차별 없이 뜨겁게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 중에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지만 믿지 아니하면 천하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전도는 천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오직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요 축복이다. 이웃 사랑의 최고의 극치는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구제를 해도, 병을 고쳐도 교육을 하여 사람을 가르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아 내는 것도,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결국 영혼구원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하여 지옥을 향하는 숱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쉰들러 리스트이야기처럼 우리도 구원시켜야 할 전도의 리스트를 놓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전도는 축복의 기회이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최고의 사랑 실천은 전도이다.  /남부연회 전 감독·하늘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8-10-10
  • 상식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자
    ▲ 김연준박사   현실을 떠나서는 아무도 살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현실을 바로 파악하면서 살려고 하지만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현실이 부단히 그 변수를 지니고 변화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정치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랫동안 정치는 국민 위에 군림했다. 정치인들의 무한한 권력을 약화하고 국민의 의사를 강화해 정치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작심이 성취된다면 우리 사회는 전진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무도 독재를 못 한다.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 사회를 휘두르고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의 횡포는 과거의 유물로 치부해야 한다.    힘이 아니라 국민에 의한 정치가 성숙해야 할 것이며, 소수의 견해가 존중되는 정치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의 민주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에서 특혜는 소멸해야 한다. 소득의 공정한 분배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야 하지 인위적으로 조정한다면 부작용을 야기할 것이다.   언제나 전환기의 문턱은 모두에게 불확실성에서 야기되는 불안을 심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점일수록 냉철한 판단을 요구된다. 우리는 불안을 극소화하려는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사회가 어수선하기가 이를 데 없다. 무수한 공약들이 쏟아지고 선거의 오열로 들끓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결정권을 똑똑하게 행사한다면 정치는 국민을 무서워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대두될 것이다. 이에 맞추어 경제는 자연스럽게 올바른 자본주의 질서를 확립하고 건전한 정치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민주화를 지향하는 길목에서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의 폭넓은 요구를 묵살한다면 반대 여파 역시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전환기일수록 눈과 귀를 열고 민주화의 길로 줄달음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전환기는 우리가 현명하게 현실을 안정의 길로 유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것이 민주화의 정착을 보장하는 방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민주화란 국민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민주화의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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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8-10-02
  • 문제를 풀어가는 교회지도자
    ▲ 김국경목사   매년 9월이면 한국의 장로교단들이 정기총회를 열어 총회 임원진들을 선출하고 향후 1년간의 사업계획과 예산을 세운다. 무엇보다도 교계의 관심사는 어떤 인물이 교단과 한국교회를 이끌 수장이 되는가이다.    지도자는 당면한 문제를 잘 풀어가는 능력이 있는 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느 때, 어디서나 문제가 발생하고 싸이게 되어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우리 하나님이 지배하지 아니하시는 영역은 한 치도 없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지도자는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서 영적 권세와 지혜를 받아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산적된 문제를 잘 풀어가려고 전력투구했다. 국가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인 침략과 약탈행위에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제일선에 나서 싸웠다. 문맹을 퇴치하고 내일의 지도자를 길러 국력을 쌓고자 여러 곳에 기독정신으로 학교를 설립했고, 교회와 병원을 세워서 민족복음화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영적 세계를 경험하며 암울한 시대에 백성들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했다.    해방 후에는 기독교가 독재 정권과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민중들과 함께 싸워서 오늘의 자유, 평등, 평화의 나라를 이루었고,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는 새벽기도와 근로정신, 사랑의 실천, 신앙 운동과 헌신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의 문제점은 북한의 핵 개발, 자연환경훼손과 자원남용, 교회의 신뢰성 상실, 교인의 급격한 감소현상, 교회와 교파 간의 분열과 타 종교와의 분쟁과 갈등, 종교다원화와 세대주의, 이슬람교도의 잠입과 이단 집단들의 횡포와 불법행위, 인권문제, 동성애, 이혼, 낙태, 저출산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금번 총회를 통해 선출된 각 교단의 새로운 지도부가 대정부, 대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하여 권위와 영적 권세를 가지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산적된 제반 문제를 잘 풀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예장 합동선목측 총회장 ·목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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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2
  •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맞는 배우자를 원한다. 백 번이라도 선을 보고 인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드는 자를 찾고자 한다. 사랑 받을게 조금도 없는 흠집투성이인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이 사랑의 방정식이다. 내가 돌아서면 그것으로 끝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사랑 중에는 으뜸이긴 하지만 그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 ‘나’라는 존재의 머리카락마저도 태초부터 계획하셨던 내가 무엇을 하든 언제든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거리다가 찾아가면 아늑한 보금자리를 펴놓고 있는 그런 믿음직한 사랑이 있다. 바로 하나님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한 피조물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초리로 나를 살펴보고 계신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불신이라는 늪에 발목이 붙잡히고 만다.   내 기도에 응답이 없다며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슴에 못이 박힐 말을 서슴없이 내 뱉는다. 자신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집착할 뿐이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은 자주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물론 그럴리야 없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참 지쳐 계실듯하다. 여기저기서 달라고만 하니 그 소원들을 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겨우실까 싶은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게 사랑 받을 일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고 내가 하는 이 일이 그 분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울까 돌아보고 언제든지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삼아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으면 그가 우리를 마지막 시대에 필요한 일을 잘 감당하도록 역사하실 줄 믿는다.  /예장 합동한신 증경총회장·목포중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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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8-09-05
  • 공동체 의식을 가지자
    ▲ 김연준   인간의 진화는 인간 생활의 사회화 과정에서 성취된다고 한다. 우리는 거대한 재해와 압력을 다가오는 자연에 맞서야 했다. 이에 대한 극복은 인간의 집단적인 노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인간 집단이 생겨나고 그와 동시에 집단 대 집단의 사회적인 도전도 생겨났다. 그래서 인간 역사에는 경쟁과 전쟁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인간이 온갖 도전과 대결하여 생존과 진화를 전취하려면 단결과 공동 작전을 위해 중지를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가 진화의 척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생활만이 진화의 척도는 아니다. 인간의 인간적 자각, 자발적인 정신적·윤리적 결단과 합작에 따라 의식화한 공동체가 될 때 실현된다.   우리는 수천 년 이래로 한 민족으로 집단 사회를 이루어 왔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비로소 민족 공동체 의식이 계발되었다. 그러나 오늘에도 자기중심의 이기주의가 삶의 철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별적으로는 우수하나 집단적으로는 약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 아닌가 한다.   풍요와 안일이 반드시 사회 진보에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풍요를 어떻게 민족 공동체 발전에 공여하느냐에서 축복이 오는 것이다. 그처럼 빈곤과 고통이 또한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샬달은 오히려 고통은 진화의 동력이라고도 말한 바 있다. 물론 그 고통이 인류를 발전시키려면 하나의 목적을 향한 공동의 고통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도 공동체적으로 의식된 고통인 경우에야 그것이 무서운 생명력으로 역사를 추진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 사람의 관심사가 전체의 관심사가 되고 전체의 관심사가 개개인의 관심사로 될 때 공동체 의식은 부각될 수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당선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있어서 학부형들의 심리 속에는 철저한 개인적 입신양명이 팽배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얼마나 비사회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무엇보다 공동체 의식이 함양이 전반적으로 시급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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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18-08-29
  • 나그네인생을 사는 참 지혜
    ▲ 이홍렬목사    참으로 무더운 여름이었다. 하지만 이제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지났다. 흔히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계절의 엄연한 순행을 드러내는 때가 바로 처서이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진다.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아무리 여름이 기세등등해도 그 위세를 끝낼 때가 오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이치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지혜 중에 큰 지혜는 끝이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인생도 결코 무한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끝낼 때가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더위도, 인생도, 사랑도, 권세도, 아름다움도 다 마찬가지이다. 권력에도 끝이 있음을 알았다면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적 종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힘이 영원할 줄 알았을 것이다. 감히 자기들을 감옥에 보낼 자는 없을 줄 알았을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어린 아이를 보라. 냇가에서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저녁연기 올라가면 미련없이 돌아선다. 놀이를 끝낼 때를 아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끝내면 그만인 것을, 그 가장 단순한 지혜가 없어서 문제이다. 모든 비극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는 끝이 없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반드시 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한한 인생임을 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100년 뒤에 내가 다시 만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런 이야기는 별로 안좋아하지만 한계가 있음을 알고 사는 것, 그것이 나그네 인생을 사는 참 지혜가 아니겠는가? 끝날 때가 있음을 아는 지혜를 가지면 과도한 욕심을 버리게 된다.    끝날 때가 있음을 아는 지혜를 가지면 좀 더 사랑하며 살 수 있다. 인생이 한 천년쯤 된다면 한 100년 정도는 미워하고 살아도 900년쯤은 사랑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100년도 안되는 유한한 인생이기에 사랑하며 살 시간도 부족하다.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 시간을 쪼개어 원망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불평하며 산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래서 전도서는 끝이 있음을 망각하고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도서 3:1-2).  /루터회 증경총회장·새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1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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