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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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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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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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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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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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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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 [사랑의실천] 탈북 가정에 복음통일의 마중물
    ◇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다문화가족들이 추석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붕어빵을 굽던 삶에서 영혼을 낚는 어부의 삶으로 전환 예수마음교회. 탈북 어린이들을 통일한국 인재로 양육   강화에 자리한 예수마음교회의 담임인 이무열목사(사진)는, 사업의 실패로 어려워진 생계를 잇고자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고, 1년 반을 매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장사했다. 그런 그에게 교회 성도들은 “물고기 빵만 구울 게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기도 끝에 교사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그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 광신학대에 입학했다. 그 후 이목사는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준 것 같이 너도 탈북자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연고도 없는 김포에 무작정 정착했다. 한국에 가족이 없는 탈북 청소년 10명과 함께 개척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택에서 아이들과 살며 이렇게 탈북 아이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는 소중한 교회가 탄생되었다. 이목사가 시무하는 예수마음교회는 크게 3가지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첫 번째, ‘우리두리하나센터’ 사역이다. 이 센터는 탈북 청소년·다문화가정 및 위기가정(아동학대 등) 청소년 “5대 영역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2012년에 설립된 기관이다. 5대 영역의 빈곤퇴치는 △경제적 빈곤퇴치 △사회 정서적 빈곤퇴치 △교육을 통한 지적 빈곤퇴치 △영양실조 및 영양 불균형으로 인한 신체적 빈곤퇴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는 영적 빈곤 퇴치를 말한다. 두 번째는 ‘진심예배’ 사역이다. 매월 네째 주 주일에 '진심예배‘가 열린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남과 북의 성도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예배하며, 남한과 북한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자는 의미를 담아 ’진심‘이라 이름 지었다.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에 북한에서 온 친구들만 공동체를 이루면 또 하나의 북한이 되고 마는 상황을 많이 봤다”며, “남한 아이들과 만남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진심예배는 여느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완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를 초청해 통일에 관한 강연을 듣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통일 한마당‘ 사역이다. 매년 명절에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추석에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갈 수 있는 고향도 없는 외로운 나그네 같은 이들이 서로 위로하고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다. 참석자들은 매년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낸다. 송편을 비롯해 북한의 전통음식인 두부밥과 인조고기를 만들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윷놀이 등의 게임으로 마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명절 기분도 누리게 된다. 이목사는 “참석자들이 행복한 통일 한국을 이곳에서 경험하길 바란다”며, “다양한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한다. 끝으로 이목사는 “통일이 되어도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을 처음부터 환영하지는 않을 것 같다. 때문에 이 아이들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성장해서 통일한국에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바램을 전했다. 예수마음교회는 지난 달 25일 성탄절에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성탄찬양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탈북·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산타가 되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사회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또 이목사는 예수마음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역인 ’숨, 쉼, 삶 힐링센타‘사역에도 많은 기도를 부탁했다. 이 센타는 쉼과 안식이 필요한 탈북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안식의 터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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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2-26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먼저 한국을 배워라
      카터가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고 레이건이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나는 카터와 사귄 것처럼 약소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의 권력자들을 사귀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라를 위한 일이며, 특히 나라가 어떤 어려운 경우에 처한다면 그때 절대 필요한 것이 민간 외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민간 외교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생각한 대로 미국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우호국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항상 내가 귀를 기울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레이건이 대통령에 입후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은 그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할 때 국장을 하던 자니 존슨목사였다. 그는 레이건과 대단히 가까워서 주정부의 국장인가를 지냈으며 대통령 선거 후에는 백악관에 비서진으로 들어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주변의 중상모략 때문에 결국은 백악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레이건이 대통령직을 물러났을 때 반관반민의 무슨 조직의 장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큰 어려움 없이 레이건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카터와의 인연을 닿게 해준 웨인 스미스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나는 그동안 에디 알리슨이라고 하는 사람과도 오래 교분을 나누었는데 그는 레이건이나 부시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와 레이건의 만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여러 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레이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가졌던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나를 잊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한국 사람으로 처음 레이건을 만난 사람이 나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와의 친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레이건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공화당 당직자들과도 상당히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에게 우리나라를 바로 알게 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무슨 대가를 바라고 그 일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내가 한 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한편으로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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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7-02
  •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목회
      인류 역사를 크게 나눌 때 B.C와 A.D로 나눈다. B.C.는 예수 탄생 이전과 A.D.는 예수 탄생 이후라는 뜻이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세계사적으로 큰 변화를 낳았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생긴 말이 B.C와 A.C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B.C.는 코로나19 이전을 말하고, A.C.는 코로나19 이후라는 뜻이다. 그만큼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은 세계적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학 전문가들은 올가을이나 늦어도 겨울철까지 2차 펜데믹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떤 충격을 받았으며 교회지도자들은 어떻게 크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인가를 크게 고민하고 대응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예장 통합측이 전문회사에 의뢰해서 발표한 설문 결과, 70%의 교회에서 헌금이 줄었는데 평균 30% 정도 헌금 액수가 줄었다고 한다.   10주 이상 현장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한 후에 출석교인 회복이 6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목회자들의 40%가 ‘교인들의 주일성수 인식 및 소속감이 약해지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답을 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목회방안에 관해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먼저 본질에 더욱 집중하는 목회를 생각해야 한다. 비본질적이고 형식적이며 성장지상주의적 목회에 함몰되어 있었던 여러 요소를 잘라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 다음 건물 위주의 보이는 교회 목회를 지양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회는 담을 쌓고 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대상으로 양육하고 심방하는 관리형 목회였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가두리 양식장과 같은 목회라 하겠다.   코로나19가 닥칠 것이라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알 것인가. 우리 모두 겸손하게 무릎꿇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사도행전적 목회의 원형질을 찾아가자. 인간이 할 수 없다고 백기투항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크로스로드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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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6-24
  • 전쟁의 역사가 주는 교훈
      금년은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쟁과 관련해서 단편적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이민족들로부터 무려 993회나 침략을 당했으며, 외세에 의해 침략을 당할 때마다 우리의 조정과 백성들이 큰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피해를 입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일례로 1637년 1월 30일은 조선왕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소위 삼배구고두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은’ 치욕적인 날이었다. 인조 왕은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 용포를 벗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강화 삼전도에서 이 의식을 치렀다. 당시 청나라 군사 3만 명이 쳐들어올 때까지, 임금과 신하들은 주지육림에 빠져있었고 태만한 군의 수뇌들과 병졸들은 국방에는 관심이 없이 안일 무사한 태도로 방만했다. 침략자인 청군이 난폭한 행동을 하며 횡포를 하자, 섬에 살던 부녀들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60만 명의 인질들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일본 침략사에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사건은 소위 ‘을미사변’이다. 일본의 무장군인들이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왕실을 침투해서 민비를 시해하고 황후의 시신을 토막 낸 후 경복궁 뒤뜰에서 재가 되기까지 장작불로 태웠다. 당시 고종의 둘째왕자인 의화군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으로 피신을 했고, 고종은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포 속에 지내다가, 1896년 2월 9일에 조정을 드나드는 신하를 가장해서 가마를 타고 일본군의 눈을 피해 아관으로 가서 피신하다가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어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의 우리 민족이 근세사에서 상기되는 6·25전쟁은 동족상잔이란 글자 그대로 동족끼리 총을 겨누며 강산이 피바다가 되도록 싸운 비극 중에 비극인 전쟁이다. 삼천리강산은 초토화 되었고, 600만의 사상자와 20만의 전쟁미망인, 10만의 전쟁고아, 1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와 피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16개국 유엔참전국의 수많은 장병들이 이 땅에 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를 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얻은 역사적인 교훈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의 발견이다. 전쟁에서 지면 자유가 없는 불행한 노예로 탈락된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대국과 복음주의 국가를 이루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믿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으로 국력이 있어야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으니 ‘국력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다시는 이 땅에서 불행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모아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이웃사랑으로 자유와 평화적인 국가를 이루도록 기도하자. /예장합동선목총회·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6-18
  • 한국 신학대학의 미래
      한국전쟁 70년.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대국을 이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자란 신학교는 대학이 되었고 신학교는 본래의 모습보다는 일반 대학의 신학과의 모습으로 많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 왔고 복음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세워진 설립의 본래의 뜻은 희석되고 대학의 발전이라는 일반적 논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인구절벽이라는 문제는 신학교에 또 하나의 악재로 덮치고 있다. 최근 뉴스앤조이 보도는 금년도 20개 전국주요대학 신학과 정시입시에서 7개 대학은 미달이고 20개 대학 입시경쟁율 평균이 1.5:1로 겨우 인원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신학과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 계속될 터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정규 교육을 받은 내일의 교회지도자를 어떻게 공급하느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이 시점에서 내일의 교회의 지도자를 누가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말 할 것도 없이 지금의 교인들 외에 아무도 없다. 심고 가꾸지 않고 자라는 나무는 없다. 고3 학부모들이 모여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도 기도회를 하는 것도 좋지만 한나 같이 자녀들이 주의 일을 할 일꾼이 우리 교회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임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많은 신학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 교육부는 칼을 갈고 있다. 학생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학교는 문을 닫게 하겠다는 것이 2021년 교육부의 ‘구조조정 원칙’이다.   신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일는 중요하다. 2018년에 교육부가 대학기본역량 평가를 하였는데 대부분의 신학대학들이 진단 제외를 신청하여 평가를 받지 않았다. 재정지원도 받지 못했다. 신학대학들은 대부분 소규모 대학들이다. 왜 당당히 평가를 받고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대학평가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모럴 서포트와 재정적 뒷받침이 없으면 해내기 힘든 싸움이다. 교육부가 소규모라 해서 대학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조직, 학습을 위한 기구와 인원을 감해 주지 않는다. 교회와 교단이 재정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 해외선교비, 사회구제 등 현시성 예산과 함께 당장 효과가 보이지는 않지만 주의 일꾼을 기르는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할 때이다. 좋은 교역자를 모시는 일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은 내일 우리 교회를 위해 그리고 주를 위해 더욱 귀한 일이다. 교단 배경이 없는 대학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입만 열면 큰 교단임을 자랑하는 분들은 이 기회에 귀 교단의 소속 대학들에 대한 특단의 지원을 하기를 바란다.  /한국성서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6-16
  • 한국의 신학대학 어디로 가나?
    한국전쟁 70년.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대국을 이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못 먹고 헐벗었어도 어린 소나무 밑동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던 선대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다.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 복음이라고 믿고 복음을 전할 일꾼을 길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학교들을 세웠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자란 신학교는 대학이 되었고 신학교는 본래의 모습보다는 일반 대학의 신학과의 모습으로 많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 왔고 복음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세워진 설립의 본래의 뜻은 희석되고 대학의 발전이라는 일반적 논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신학교로서의 특색도 잃고 일반대학으로서 극심한 경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해 몸살을 앓고 있는 대학들이 늘어 가고 있다.   인구절벽이라는 문제는 신학교에 또 하나의 악재로 덮치고 있다. 최근 뉴스앤조이(2020.01.30) 보도는 금년도 20개 전국주요대학 신학과 정시입시에서 7개 대학은 미달이고 20개 대학 입시경쟁율 평균이 1.5:1로 겨우 인원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신학과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 계속 될 터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정규 교육을 받은 내일의 교회지도자를 어떻게 공급하느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원천적인 책임이 대학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시대를 향도해야 하는 신학교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마땅히 가야할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자기(自己)를 잃어버린 신학교는 스스로 버틸 힘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신학대학은 리더로서의 위치와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입시 경쟁률이 떨어진다고 입학정원을 줄이는 것은 재고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학과가 있는 가운데 신학과가 입학정원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입학정원은 학생 수는 물론 교수정원, 학교예산 등 학교의 여러 결정요인의 중심에 있는 중요한 정수이다. 신학과의 정원은 배의 평형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 평형수는 볼품도 없고 마실 수도 없지만 일정량은 있어야 한다. 평형수는 그 배의 균형을 잡아주고 풍랑을 이기는 힘을 배 전체에 공급하는 것이 평형수의 역할이다. 대학은 신학과의 정원을 줄일 것이 아니라 지원자를 늘려 안전한 포구를 향해 항해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신학과가 학문적인 수월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 20년 전, 한국복음주의신학대학총장협의회가 연말 연찬회에 홍정길 목사를 연사로 초청한 적이 있다. 그는 새로 고용한 목사에게 성경공부를 시켰더니 설교를 하고 있더라고 전하면서 ‘신학대학 졸업자가 성경공부와 설교도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한심해 했다. 신학대학은 현장이 요구하는 인재를 길러야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이 시점에서 내일의 교회의 지도자를 누가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말 할 것도 없이 지금의 교인들 외에 아무도 없다. 심고 가꾸지 않고 자라는 나무는 없다. 또 옛날 애기 한다고 탓할지 모르지만 그 때는 매년 한 두 명 정도 신실한 청년(고3)은 신학교에 갔다. 교회가 의식을 가지고 뜻있는 젊은이를 신학교를 가도록 부추길 필요가 있다. 요즈음 입시철이 되면 40일 기도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교회마다 내 걸리고 있다. 고3 학부모들이 모여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도 기도회를 하는 것도 좋지만 한나 같이 자녀들이 주(主)의 일을 할 일꾼이 우리 교회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임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많은 신학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 교육부는 칼을 갈고 있다. 학생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학교는 문을 닫게 하겠다는 것이 2021년 교육부의 ‘구조조정 원칙’이다.   신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일는 중요하다. 2018년에 교육부가 대학기본역량 평가를 하였는데 대부분의 신학대학들(14개)이 진단 제외를 신청하여 평가를 받지 않았다. 재정지원도 받지 못했다. 신학대학들은 대부분 소규모 대학들이다. 왜 당당히 평가를 받고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대학평가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모럴 서포트(moral support)와 재정적 뒷받침이 없으면 해내기 힘든 싸움이다. 교육부가 소규모라 해서 대학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조직, 학습을 위한 기구와 인원을 감해 주지 않는다. 교회와 교단이 재정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 해외선교비, 사회구제 등 현시(顯示)성 예산과 함께 당장 효과가 보이지는 않지만 주의 일꾼을 기르는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할 때이다. 좋은 교역자를 모시는 일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은 내일 우리 교회를 위해 그리고 주를 위해 더욱 귀한 일이다. 교단 배경이 없는 대학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입만 열면 큰 교단임을 자랑하는 분들은 이 기회에 귀 교단의 소속 대학들에 대한 특단의 지원을 하기를 바란다.   /한국성서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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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6-10
  • 새로운 인간상을 위한 교육적 과제
      입시를 통하여 미래를 담당할 준재들을 받아들이는 대학이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도 인간성 회복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산업 사회 건설을 위한 지도자·기술자·경제인·공무원 등등을 훈련하여 공급하며, 산업에 필요한 조사·연구·자료수집·구상·발명 등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 인간의 문제가 등한시되며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인간 상실의 상황에까지 밀려가게 된다. 그래서 근년에는 대학에서의 인간 형성의 문제가 대학 교육의 중요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어떠한 인간상을 지향할 것이냐의 문제도 함께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현대 문명 안에서는 인간이 전인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 개성이 없는 기능으로만 행동하고 있다는 것, 윤리적으로 중성화하여 다만 효능이나 이해관계로만 행동 기준을 찾는다는 것 등일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독자적인 초월성을 되찾지 못한다면 인간은 물욕에 사로잡힌 꼴이 되고 기계의 종이 되어 인간 상실의 비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중세의 인간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간 일이어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성 상실의 현대를 솔직하게 시인함과 동시에 그 상황 안에서 살출 될 수 있는 최선의 인간상을 모색하고 그런 인간상의 창출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은 과학의 혜택에서 동떨어져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과학이란 인종도, 국가도, 사상도, 종교도 편파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공통 또는 초월된 보편성을 지닌다. 과학의 기본 법칙이나 그 활용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성도 진실과 정직의 토대 위에서 인간성을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기술의 세계에 있어서는 효능이 매우 중요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현대 인간이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그 지식이 세밀한 분과적 성질의 것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 이외의 모든 다른 인간들이 공동체적으로 나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으로서의 위상을 지킬 수 잇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도 현대의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형성’과 ‘새 인간상’ 모색에 진지한 관심을 지녀야 할 줄로 안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6-04
  •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단 몇 개월 만에 지구촌의 모든 산업과 인간관계가 제한적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세계 굴지의 도시마다 매일 수백, 혹은 수천 명씩 발생하고 있다.   전염병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힘이 있다. 14세기 유럽 전역을 강타한 흑사병이 그렇다. 전염병의 공포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잃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여겼던 흑사병 속에서 인간이 맡을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민은 이성의 해방을 촉구하는 르네상스 시대로 이어졌다. 동시에 교회의 역할을 비판하며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교회 권력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교인의 관계가 회복됐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권력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시켰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처럼, 코로나19 이후의 우리 생활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비대면 생활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도시화, 집중화된 사회 환경이 개별화된 생활 방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한국교회도 코로나19 이후의 변화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이후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첫째, 예배의 변화가 필요하다. 신학적 신념은 공고히 하되 예배의 문화는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에는 예배 참여의 횟수가 신앙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이제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둘째, 강단을 낮춰야 한다. 예배당의 구조를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주입식 예배에서 묻고 답하는 예배로 바꿔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규모의 예배를 탈피하고 교인 모두가 알차고 내실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강단의 높이를 낮춰야 한다.   셋째, 대면 전도를 사회봉사의 형태로 바꿔야 한다. 불신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대면 전도를 지양하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질서를 지키고 정직하며 친절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넷째, 청소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이다. 그러나 주일 학생이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교회는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사회적 격랑 속에서도 교회는 언제나 이 땅의 중심에 있었다. 교회는 역사의 주체이지 방관자가 아니다. 코로나19 이후의 한국교회는 더 큰 사명을 부여받았다.    1907년, 나라의 위기 속에서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가 재난 속에서 회개와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새로운 부흥 운동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교통문화선교협의회 대표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5-28
  • 위기를 이기는 유연성
      2020년 한국 땅의 봄은 6·25 전쟁 이후 가장 혹독한 봄이 분명하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로 특별히 대구 도시가 가장 큰 치명타를 입고 있다. 대구 시민, 경북 도민,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신의 보호하심이 있기를 바란다.   어려움이나 위기는 예기치 못한 때에 공격해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이 유연성이다. 유연성은 우리 신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체에 유연성이 부족하면 다치기 쉽다. 어린 아기는 유연성이 엄청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연성을 급격히 떨어진다. 살짝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몸에 이상이 온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유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려움이 닥칠 때, 생각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신체적 유연성이 우리 몸을 보호하듯이, 생각의 유연성은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우리를 크게 돕는다. 생각의 유연성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라고 한다. 방어기제에는 신경증적 방어기제와 건강한 방어기제가 있다. 도전해 온 어려움으로 인해 더 어려움으로 이끌어 가는 방어기제를 신경증적 방어기제라고 한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서 다시 평온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건강한 방어기제이다. 건강한 방어기제의 다른 말이 생각의 유연성이다.   신경증적 방어기제가 있다면 건강한 방어기제도 있기 마련이다. 미국 하버드의대 정신의학자 베일런트가 소개하는 네 가지의 건강한 방어기제이다. 첫째로 억제이다. 참는 것이다. 무의식적 참는 것은 억압으로 화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억제란 의식적 참음이다. 감정 조절 능력이다. 그러므로 억제는 힘이 필요하다. 둘째로, 이타주의를 언급한다. 어려움의 도전을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우므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셋째로, 승화이다. 누구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데, 승화시켜 복서가 되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넷째로 유머를 꼽는다. 유머는 농담과 다르다. 농담은 타인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유머는 자신의 어려움을 승화시키고 이기기 위한 것이다. 유머로 유명한 민족이 유대인이요, 그래서 그들의 희락을 후대에 남기고자 탈무드의 유머라는 문화 장르를 남기었다.   이 위기에 스데반 돌봄 사역원에서는 건강한 방어기제로 유머를 강조하고 싶다. 지금 어렵다고 울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지나 가리라’라는 생각의 유연성으로 이겨낼 것인가?   정신과 의사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한 가지를 밝힌다. 홀로코스트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낸 것은 유대인 그들의 유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할 때, 한가지 유연성이 더 필요하다. 한가지 유연성이 아니라 유일한 유연성이다. 바로 영적인 유연성이다. 신앙의 유연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려움을 당할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떠 올릴 수도 있다. 신앙의 유연성은 지금의 불행 한복판에서 나와 함께 울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연성이다.   바로 13년의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는 요셉의 신앙적 유연성이요, 고난의 대표 주자 욥을 붙들어 준 것이 바로 신앙인 안에 숨쉬고 있던 신앙의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필요하다. 몸도 유연성이 필요하다. 생각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필자는 어려움 속에 우리와 더욱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의 유연성을 강조하고 싶다.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작은예수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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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5-21
  •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포와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나라는 의료진의 희생적인 헌신 덕분에 진정국면에 접어드는가 싶더니 황금연휴에 이태원의 클럽을 찾은 사람들 때문에 온 국민이 다시 긴장하고 있다. 이 같은 국면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코로나의 완전한 극복을 위하여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온 국민이 모든 역량을 모아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해 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야말로 코로나로 인하여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두 달여 동안 대부분 교회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지나왔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해 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온라인 예배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다른 형태의 예배라고 평가하면서 이제 한국교회는 여러 형태의 예배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온라인 예배를 완전한 형태의 예배라고 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다.   두 달도 넘게 교회당은 텅 비어있었고, “모이는 교회”로서의 기능은 상실된 상태로 지나오게 되어 예배의 회복은 물론 영적인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코로나 때문에 입은 손실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예배의 회복은 물론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교회가 입은 영적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재개한 교회마다 예배에 참례하는 교인이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감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는 소문이다. 이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아마도 지난 두 달여 동안 주일마다 교회당에서 당국이 요구하는 것을 철저히 지키면서 예배를 드려온 교회들은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교회가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모이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오직 온라인 예배만을 고수해 온 교회들로서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모든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우리나라가 코로나를 잘 극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의료진들이 몸을 던져 희생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코로나로 인한 타격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음을 세계교회 앞에 보여줄 차례이다. 코로나로 인한 고통과 손실은 너무나도 크지만 힘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우리의 본분을 다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꿔나가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 염천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0-05-21
  • 효와 가정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은 “세 살 교육이 여든 간다”는 긍정적 교훈으로 고쳐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영,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태중에서부터 바른 교육을 시키기 위해 태교에 노력했다. 애굽 왕실에서 바로의 딸로 자란 모세는 애굽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을 위해 헌신했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자기 친어머니에게서 받은 영, 유아기 교육의 영향 때문이다(출2:9). 사랑하는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겨 줘야할 것은 재산이 아니라 부모의 가르침이다.    성경에 ‘효’라는 단어는 한글 개역성경에서 오직 한 군데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딤전5:4). 효를 배우는 곳은 ‘자기 집’이다. 가정교육이 효교육이며, 효교육은 뿌리 교육이다.   성경 66권에서 효교육의 핵심을 빼낸 것이 성경7효이다. 성경7효는 첫째,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김 둘째, 부모·어른·스승 공경 셋째, 어린이·청소년·제자사랑 넷째, 가족사랑 다섯째, 나라사랑·국민사랑 여섯째, 자연사랑·환경보호 일곱째, 이웃사랑·인류봉사이다. 이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부모공경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은 하나님의 효자, 부모의 효자로서 완성된다. 효는 자연발생적인 결과가 아니라 가정에서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목적의식적인 명령이다.    내가 효운동을 하게 된 것은 우리 가문의 내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가 9대 독자였다. 9대이면 300년 동안 외아들로만 온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4형제 고모 둘, 6남매를 낳았다. 그런데 6·25가 우리 아버지 형제 삼형제를 다 죽게 했다. 그 때가 우리 아버지는 32세, 둘째 작은 아버지는 29세, 셋째 작은 아버지는 26세였다. 아버지 삼형제가 한 해에 다 돌아가셨다. 우리 할아버지가 9대에 독자이시며 내가 전쟁 통에도 죽지 않은 이유는 효운동하는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효자는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이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신앙이 곧 자녀의 신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1대1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도 다음 세대가 신앙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내 자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잠22:15). 자녀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인 어린이들을 학교와 학원에만 맡겨두고 있지 않는가? 가정의 달 5월, 효를 가르치고 신앙을 전수하는 5월의 가정이 되어야겠다.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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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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