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6(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실시간뉴스
  • [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10
  • [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06
  • [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8-07
  • [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7-08
  • [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5
  • [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1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가족에서 시작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독교 신자이니까 기독교의 사랑과 연결지어 성경에서 그 말을 가져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성장기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굳이 근원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에 나의 인생 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양대학에서 기술 교육을 실시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몇 해 전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학교의 졸업생을 만났을 때 그들이 자식을 키워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겠다고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실천’을 가문의 철학으로 여기고 자식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이 싸우면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아들은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남의 아들은 위로했습니다. 그게 현명한 아버지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그때 학창 시절에 듣고 배운 ‘사랑의 실천’이 상기되면서 내가 남의 아들을 사랑하면 남들도 또 내 아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늘 강조해 온 것도 사랑이란 먼저 주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당시에는 어려서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회에 나가서 현실에 부딪혀 보니까 저절로 터득되었다는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60대에 이른 사람들이 학교의 교훈이자 나의 철학인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마음 속으로 참으로 흐뭇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심히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확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교직원들 가운데에도 ‘사랑의 실천’을 가훈으로 정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결국 나의 철학에 감화를 받은 결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가정과 가족 구성원으로까지 넓고 깊게 확산되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훈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5-07
  • 코로나 19와 가정예배
    역설적으로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선물중의 하나가 가족결속력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족 결속력은 가정예배를 통한 동반상승이다. 잃어버린 대화를 회복하고 가족 구성원간의 상호 이해를 힘있게 도모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정예배를 통하여 삶의 질을 어떤 원리로 강화할 수 있을까? 신명기 6:4-9절을 보자.   첫째,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님사랑의 표현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명령하였다. 가정예배는 가족구성원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실천적 사랑이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가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둘째 가정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영적훈련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의 변화는 내면의 가치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면의 가치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확신에 기초한다. 가정예배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모든 가족 구성원이 마음에 새기는 거룩한 시간이다.   셋째, 가정예배는 믿음의 세대계승의 현장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믿음의 세대계승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영적인 각성이며 훈련이다. 가정예배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세대를 초월하여 하나 되는 현장이다.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와 손자 손녀들 세대가 어우러져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시간이다. 가정예배는 은총의 보고이다. 가정예배의 보존과 발전은 믿음의 세대계승과 직결된다.   넷째, 가정예배는 신앙의 생활화를 촉발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으로 반드시 연결된다. 가정예배야말로 주일 그리스도인을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인해 잃어버린 가정예배를 재발견하여 지금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발견되기를 소원한다.  /목사·새로남교회 담임· 미래목회포럼 대표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22
  • 기독인과 나라 디자인
      기독인들은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국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종교개혁운동으로 거슬러 가는 것 같다. 이 민주주의는 그리스에 출발점을 둔다는 일반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지적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통찰력은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맨 끝부분에 국가론을 언급한 이후 모든 개혁교회 신앙고백서 끝부분에는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교회 성도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라를 디자인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단순히 교회가 국가 정치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까 하는 것을 고민했다는 말이다. 칼빈은 귀족정치를 선호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대의정치 제도를 만들게 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삶을 풍성케 하며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을 얻게 하는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며 살 수 있는 나라를 추구하면서 이런 정치제도를 얻게 된 것이다. 유럽의 입헌군주제도나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막연하게 동성애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이런 제도가 허락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교회는 좋은 나라 영육 간에 아울러 참으로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좋은 정치가들을 길러야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타 모든 삶의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인재들을 양성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의 주역인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기독인들은 정말로 좋은 나라를 디자인하는 마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면 한다. /목사. 콜부루게신학 연구소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22
  • 창의적인 사회를 만들자
      자유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자유가 충만한 사회일수록 창의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말해서 절대적인 자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를 가든 주어져 있지 않다.   헌법 조항에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든가,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라든가, 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규정해 놓았지만 한 개인이나 사회로 볼 때, 어떤 유형·무형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고 또 심리적으로도 자유가 행사되지 않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인간의 자유는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라든가 신앙의 자유, 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는 궁극적인 자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척도로 재어지는 자유일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런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무슨 주의든 간에, 그 주의가 비록 자유주의라 할지라도 극단적으로 강화·시행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비관용적인 것, 비타협적인 것, 심하면 잔인성과 포악성까지도 드러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정치 체제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국민은 크나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조금만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작가나 예술가가 소리 없이 소멸되고 만다.   이에 비해 자유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발표되는 학술논문이나 문학작품이나 영화, 예술작품들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가를 상상해 본다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가장 강한 밑천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어떤 위치에 있든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똑똑히 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15
  • 교회의 부활
      오늘날 전 세계가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바이러스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세계 경제뿐 아니라 한국 교회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함께 모여 즐겁게 드리는 예배는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낌 속에 진행되고 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 운영은 바이러스가 확산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에 대부분 중단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서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만나던 일도 마음에 불편한 일이 되었다. 중소교회는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함께 운영해야 하는 것은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와 예배의 정의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모이는 곳에서 잠시 흩어지거나 적게 모여야 하는 곳이 되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살얼음판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가? 국가에서 제정한 방역 규정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효율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다. 교회가 모든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언론의 공격을 받고 불신자에게 덕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결국에는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조용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 조용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를 넘어 도약으로 나아가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부활이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에 직면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의 새로운 동력은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은 온라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온라인 교회의 확장이 요구된다. 더 이상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라야 한다는 장소적인 문제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교회 예배와 프로그램 운영의 디지털화 및 온라인화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제2의 탄생을 하였으면 한다. /한영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4-02
  •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천을”
    기독교신문이 본 난을 통해 사랑의 실천 캠페인을 벌이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제일 큰 교훈인 첫째 계명은 사랑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고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실천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이 세상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따르는 것이고, 그 규범은 바로 첫째 계명인 사랑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고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이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첫째 되는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둘째는 이웃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혹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르쳐주셨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그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셨다. 강도를 만나 강탈당한 처절한 형편에 처한 사람과 같은 우리 주변의 어려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대상이다. 세계화된 오늘날 지구촌에서 현재 먹지 못하고 굶주려 기아선상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북한에 이르는 모든 이가 우리가 보살펴야 할 사랑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가까이는 국내 우리 주변에 있는 타국에서 온 소외된 자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면 끝으로 어떻게 도울 것인가이다. 이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한국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먼저 가져야 하겠다. 다음으로는 이에 대한 긴급한 구호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울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30
  •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생명나눔
    하루 7.5명, 장기이식만을 기다리다 목숨을 잃는 환자의 수이다. 1년이면 2,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기기증이다.   1991년, 한양대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 수술실 근처에도 갈 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내게는 무척이나 떨리는 경험이었다. 당시 수술실에서 두 개의 신장 중 하나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떼어낸 신장 하나는 오랜 기간 투병을 하던 신장병 환자의 몸속에 이식되었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 타인 간 순수 신장기증의 순간이었다. 당시 앞뒤 가리지 않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환자에게 신장 하나를 기증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셨던 그 분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오늘날 저를 장기기증 운동으로 이끌었다.   신장기증 이후, 국내에서는 본격적인 장기기증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970여 명의 사람들이 생존 시 신장기증을 실천하며 병으로 신음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다. 이뿐 아니라 세상을 떠나며 뇌사 장기기증을 실천하신 분도 6천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여전히 장기이식 대기자와 비교해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장기이식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 생명을 나누는 일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4월 4일 부활절을 기다리며, 경건하고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의 사랑을 기리는 지금 이때에 우리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장기기증은 몇몇 뜻있는 사람만이 실천하는 아름다운 선행이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회적 의무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아름다운 사명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26
  •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생명나눔
      하루 7.5명, 장기이식만을 기다리다 목숨을 잃는 환자들의 수이다. 1년이면 2,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기기증이다.   1991년, 한양대병원에 입원을 해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 수술실 근처에도 갈 일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내게 무척이나 떨리는 경험이었다. 당시 수술실에서 두 개의 신장 중 하나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떼어낸 신장 하나는 오랜 기간 투병을 하던 신장병 환자의 몸속에 이식되었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 타인 간 순수 신장기증의 순간이었다. 당시 앞뒤 가리지 않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환자에게 신장 하나를 기증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누가복음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 마음에 큰 감동으로 다가와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셨던 그 분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오늘날 장기기증 운동으로 이끌었다.   신장기증 이후, 국내에서는 본격적인 장기기증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970여 명의 사람들이 생존 시 신장기증을 실천하며 병으로 신음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다. 이뿐 아니라 세상을 떠나며 뇌사 장기기증을 실천하신 분도 6천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여전히 장기이식 대기자와 비교해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국민의 약 3% 정도로 미국의 61%, 영국의 38%에 비하면 너무 저조하다. 장기이식 대기자는 해마다 증가해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장기이식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 생명을 나누는 일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그 ‘사랑’을 가장 많이 누린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4월 4일 부활절을 기다리며, 경건하고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의 사랑을 기리는 지금 이 때에 우리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들이 앞장서 장기기증 운동이 사회운동이 되었듯 이제 다시 한번 한국교회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며 장기기증 희망등록으로 희망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장기기증은 몇몇 뜻있는 사람만이 실천하는 아름다운 선행이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회적 의무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아름다운 사명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18
  • 그리스도인의 표지
    인간은 포유류에 속하는 고등동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피조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개개인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육체도 중요시하지만 질그릇 같은 육체보다는 정신과 영원한 생명이 담긴 속사람을 더 중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뿌리와 구심점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가야 한다. 신앙의 구심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중심이라야 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야하는 성경 중심이며, 신앙공동체에서 예배와 선교와 교육과 섬김과 나눔이 지속적으로 이뤄져가는 교회중심이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 생애에 나타난 표지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삭은 희생의 사람으로, 야곱은 통치의 사람, 그리고 요셉은 꿈과 성결의 사람으로 살았다. 우리자신의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는 무엇인가? 유대에 주샤라는 랍비가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모세처럼 살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너는 왜 주샤처럼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지구상에 70억의 인구가 살아도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도 각각 다르다. 우리는 내가 받은 은사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신앙이란 집에는 다섯 개의 불기둥이 세상을 밝히고 있다. 창조신앙, 고난(십자가)신앙, 부활신앙, 임마누엘 신앙, 재림신앙이다. 이 기둥으로 지어진 집에 들어가 기도하면 성령임재의 불과 구름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곳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면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영광중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표지의 공통분모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감사하며 삶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밝게 드러내자.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10
  • 기독교와 사랑
      기독교에는 심오한 신학적 깊이가 있어 세계적인 석학이라도 감히 자긍하지 못할 지식의 심연이 만고의 비밀을 품은 채, 지심까지 잇닿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신학에 조예를 갖지 못한 평신도로서는 신학보다도 생활에서 이해되는 사랑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요한은 말했으며,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제일이란 것을 노래했다.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내가 내 소유를 다 털어 희사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이제 우리 평신도의 입장에서 요청하고 싶은 것은 부디 그리스도의 본 모습인 사랑의 생활로 돌아가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끼리, 교인끼리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에 교회에 충실한 신자였다고 볼 수 있는 바리새인들보다도 죄인들이라 할 수 있는 창기, 거지, 문둥병자 등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음식을 같이하며 친구가 되며, 그들에게 그의 숭고한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교회 밖에 있는 ‘어린양’들에게 더 많이 쏠려야 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생활 강령이라면 그것은 무척 간단한 종교라 하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뜻을 따라 우리도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계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이웃이 누군가’라고 제자가 반문했을 때, 예수는 ‘원수라도 네가 그를 사랑하면 그가 네 이웃이 될 거다’라고 대답했다. 사랑만 한다면 이웃은 얼마든지 만들어진다는 얘기이다. 내 이웃이 누군가하고 망설일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야 하겠다고 용감하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의 넓이는 그야말로 내 인격의 넓이여서 아무것으로도 박탈할 수 없는 내 영광이 된다.  /본지 전 발행인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3-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