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선교/해외Home >  신학/선교/해외 >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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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율법과 새 계명
모든 종교는 주장하는 진리를 교리로 설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계율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가르치며 이를 생활 속에서 따르도록 한다. 불교는 팔정도를 강조하는데 이를 정견(正見), 정사유(情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라 한다. 유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르친다. 유대교는 무엇보다 십계명을 율법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의 조항들을 오직 사랑이라는 하나의 개념 안에 담으며 그러므로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또 권면한다.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마태 22:34-40)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기독교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십계명이 여러 율법 조항으로 복잡해지고 이를 두고 여러 주장과 해석이 난무할 때, 예수께서는 이를 두 계명으로 집약시키고 이를 단 하나의 계명으로 귀일되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새 계명’이라고 하면서 마치 새로운 법령을 내리듯이 새롭게 이름 짓는다. ‘새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이 낡아지고 화석화 되어 갈 때 이전의 것을 흐르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이제부터 새 숨을 쉬고 새 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새로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옛 계명이 주로 ‘하지 말라!’는 투의 말인데 비해 새 계명은 ‘하라!’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거 같이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 마른 광야가 물댄 동산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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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YWCA-YMCA·공동기도주간·연합예배
세계의 이슈 및 상황속에서 기도와 실천을 독려 자연위기가 인간의 위기로 회복위해 노력해야 한국YWCA연합회(회장=조은영)와 한국YMCA(사무총장=김경민)은 지난 11일 YMCA-YWCA 국제친선 및 기도 주간을 맞아 서울YWCA 4층 강당에서 연합예배를 열었다. 자연을 통해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했다. 특히 참석자들은 우리의 과거인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임을 인식했다. 세계YWCA와 세계YMCA는 세계 에큐메니컬 기독청년 단체로 운동 방향성 공유를 위해, 매년 11월 중 공동 기도주간을 정하고 공통의 주제와 내용으로 기도하며 연합예배를 드려왔다. 또한 현재 세계 이슈 및 상황과 관련하여 성서적 해석과 기도 주간 매일의 기도문 책자, 연간 성서읽기 계획을 공유하여 전 세계 공동체의 기도와 실천을 독려해 왔다. 올해는 「자연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기 - 물, 흙, 불, 바람」이란 주제로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세계기도주간을 정해 함께 기도했다. 제공된 기도문에서는 성경과 일상에서 묘사되고 경험되는 자연 요소들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했으며, 묵상의 관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도록 했다. 「△1일차: 믿음으로 폭풍을 뚫고 나아가기 △2일차: 믿음으로 가뭄을 지나가기 △3일차: 믿음으로 골짜기를 지나가기 △4일차: 믿음으로 들판을 지나가기 △5일차: 믿음으로 불 속을 지나가기 △6일차:믿음으로 어둠속을 지나가기 △7일차: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란 매일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7일 동안 기도했다. 11일에 열린 세계YMCA-YWCA 연합예배는 이창호 한국YMCA연합회 국장의 인도로 진행했다. 이번 연합예배는 올해 주제인 「자연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기」라는 제목 아래 세 가지 말씀 묵상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 묵상은 서울YWCA 김현숙팀장이 열왕기상 19장 11절부터 12절 말씀을, 두 번째 묵상은 한국YWCA연합회 유은비간사가 시편 104편 1절부터 3절 말씀을, 세 번째 묵상은 한국YMCA전국연맹 한희수팀장이 요한복음 3장 5절부터 8절 말씀을 묵상했다. 또 「기후위기 시대에 안에서 나오는 것과 들어가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신(信)연구소 소장인 이은선교수(세종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가 설교를 했다. 이교수는 “현재의 열매와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과거에 쌓은 선험이다. 과거의 은혜를 잊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열매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썩음이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자연은 우리의 과거이며 인간 삶의 토대다”며, “우리의 과거인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이다”말했다. 이어서 함께 부르는 노래와 기도 순서가 이어졌다. 찬송과 함께 한국YMCA전국연맹 장다영간사가 「전쟁의 시대, 사랑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지구촌 평화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다음으로 서울YWCA 박미용부장이 「기후정의와 회복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기도를 이어갔으며, 마지막으로 한국YWCA연합회 최유주간사가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바른 신앙을 위해 기도하며 마무리했다. 이번 연합예배는 특별히 쿠팡에서 과도한 노동으로 사망한 고 정슬기님을 비롯해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봉헌했으며, 인도자를 따라 공동축도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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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식탁
“이 광야가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찬송가 ‘십자가 그늘 아래’(415장)에 나오는 가사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광야로 표현하고 있다. 광야가 뭔지도 모르고 광야에 가 본 적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물론 구약 성경을 배우고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공부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역사를 알게 되었으나 광야를 내 삶의 현실과 일치시키는 일은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광야나 사막을 관광 스케줄의 하나로 삼을 만큼 우리 경제생활은 부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이 광야 같은 세상’이라고 찬양을 부른다. 광야를 과거 어느 나라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국한 하지 않고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상징어로 일컫는다는 뜻일 게다. 한때 젊은이들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던 싯귀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시는 러시아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시인 <푸쉬킨>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처형당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래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날이 더 많아지는 나이일수록 지나간 삶이 내가 스스로 만들거나 이미 잘 만들어진 길을 걸었던 때 보다는 길이 막혀 더 이상 한 발도 내 디딜 수 없을 때의 기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캄캄하던 그때, 뜻밖의 길이 생겨나고 그래서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났었다는 간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고속도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오솔 길, 굽은 길, 절벽 길 또는 그야말로 ‘길 없는 길’을 오직 믿음만으로 걸었던 기억을 뒤늦게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곡조에 담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우리는 오늘도 시편 78편 기자와 함께 광야에서의 힘들고 아프고 쓰렸던 기억의 반찬들을 ‘광야의 식탁’(19절)에 올리며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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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광야, 기억의 현재화
기독교 예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기념하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는 안식 후 첫날인 부활의 날로서, 주님이 잡히시던 전 날 밤에 대한 기억과 사흘 뒤에 일어난 부활의 의미가 중첩되어지는 기념의 날로 점차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부활의 날에 모여서 예수의 살과 피 곧 생명을 나누면서 “나를 기념하라”는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지켰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과거 사건의 현재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마지막 만찬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부활이라는 의미로 현재화 되며 이는 다시 오시리라는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미 실현되어 왔는데 그들은 홍해 사건과 광야의 경험을 오랜 세월 세대를 거치면서 이어지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민족 절기 특히 유월절이나 무교절이나 초막절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 하고 또 미래로 이어지도록 하는 축전이 되었다.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묶는 귀중한 원천 자료였다. 이를 통해서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고 따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들은 또 어떻게 이를 이어받으며 실행해야 하는 지를 절기를 지킴으로서 터득할 수 있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레위기와 신명기는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시편은 축제의 현장에서 울려 퍼진 감사의 노래였다. 시편 기자는 시와 노래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시편 107:33)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시편 1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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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하늘양식
광야의 삶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 마실 물과 먹거리 문제였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고 먹어야 한다.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민족은 수르 광야 길을 사흘 걷다가 겨우 한 샘터를 발견하여 마시려 하였으나 그 물은 안타깝게도 마실 수 없는 쓴물 곧 ‘마라’였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 그리고 이어지는 기적은 양식에 대한 것이었다. 곧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이었다. 막힌 길이 열리고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하늘에서 먹을 양식이 내리는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비로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곧 “내가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리라”(출애 16:12)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었다. 기적이 기적을 낳는 기적의 연속이 아니라 기적 그 다음에 따라오는 삶에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하늘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하루치 양식이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아침이 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각각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에 익숙해졌고 누구라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깨닫게 하신 공적 신앙과 그에 따른 공동체적 삶은 그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살아가는 양식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특히 내 먹을 양식을 위해 창고를 크게 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웃의 몫을 가로채려는 욕심이다. 광야는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앞서 보여주는 예표였으며 이를 실천하는 수련의 터전이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정치적 식견은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신앙의 또 다른 식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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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과 광야 길
광야 길의 체험은 비단 모세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지도자이기에 먼저 그 길을 가야했다. 그래야 앞에서 이끌고 따라오도록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모세가 겪은 광야를 함께 겪어내기를 요구하였다. 보다 짧고 보다 넓고 보다 쉬운 길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각 지파를 대표하는 정탐꾼들의 겁에 질린 판단 때문이며 이를 어리숙하게 따르는 민중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책벌이기도 하였으나 어차피 이스라엘 민족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들어감 보다 거기에서 오래도록 살아냄이 보다 중요했다. 그 유명한 <가데스바네아>사건이 일어난 ‘바라’라는 광야 한 곳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어지는 수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에서의 시련과 단련과 수련 과정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이나 바라 광야에서 죽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으며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며 돌변하였다. 급기야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옷을 찢기까지 하였다. 정탐 날 수인 사십일의 그 하루를 한해로 바꾸어 계산 할 만큼 그들의 잘못은 무겁고 큰 것이었다.(민수기 14장) 광야는 책벌이며 아픔이며 고난이며 역경이다. 광야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광야는 가나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광야를 거치지 않고 ‘그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름길이 아닌 힘겨운 광야 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의 경험 없이는 삶의 깊고 어두운 세계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없이 삶을 알 수 없고 골짜기 없이 봉우리를 말할 수 없고 추위 없이 따스함을 맛 볼 수 없으며 밤이나 어두움 없이 낮의 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어둠 속에서라야 타오르는 불꽃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알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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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율법과 새 계명
- 모든 종교는 주장하는 진리를 교리로 설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계율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가르치며 이를 생활 속에서 따르도록 한다. 불교는 팔정도를 강조하는데 이를 정견(正見), 정사유(情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라 한다. 유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르친다. 유대교는 무엇보다 십계명을 율법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의 조항들을 오직 사랑이라는 하나의 개념 안에 담으며 그러므로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또 권면한다.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마태 22:34-40)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기독교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십계명이 여러 율법 조항으로 복잡해지고 이를 두고 여러 주장과 해석이 난무할 때, 예수께서는 이를 두 계명으로 집약시키고 이를 단 하나의 계명으로 귀일되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새 계명’이라고 하면서 마치 새로운 법령을 내리듯이 새롭게 이름 짓는다. ‘새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이 낡아지고 화석화 되어 갈 때 이전의 것을 흐르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이제부터 새 숨을 쉬고 새 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새로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옛 계명이 주로 ‘하지 말라!’는 투의 말인데 비해 새 계명은 ‘하라!’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거 같이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 마른 광야가 물댄 동산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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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율법과 새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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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YWCA-YMCA·공동기도주간·연합예배
- 세계의 이슈 및 상황속에서 기도와 실천을 독려 자연위기가 인간의 위기로 회복위해 노력해야 한국YWCA연합회(회장=조은영)와 한국YMCA(사무총장=김경민)은 지난 11일 YMCA-YWCA 국제친선 및 기도 주간을 맞아 서울YWCA 4층 강당에서 연합예배를 열었다. 자연을 통해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했다. 특히 참석자들은 우리의 과거인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임을 인식했다. 세계YWCA와 세계YMCA는 세계 에큐메니컬 기독청년 단체로 운동 방향성 공유를 위해, 매년 11월 중 공동 기도주간을 정하고 공통의 주제와 내용으로 기도하며 연합예배를 드려왔다. 또한 현재 세계 이슈 및 상황과 관련하여 성서적 해석과 기도 주간 매일의 기도문 책자, 연간 성서읽기 계획을 공유하여 전 세계 공동체의 기도와 실천을 독려해 왔다. 올해는 「자연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기 - 물, 흙, 불, 바람」이란 주제로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세계기도주간을 정해 함께 기도했다. 제공된 기도문에서는 성경과 일상에서 묘사되고 경험되는 자연 요소들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했으며, 묵상의 관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도록 했다. 「△1일차: 믿음으로 폭풍을 뚫고 나아가기 △2일차: 믿음으로 가뭄을 지나가기 △3일차: 믿음으로 골짜기를 지나가기 △4일차: 믿음으로 들판을 지나가기 △5일차: 믿음으로 불 속을 지나가기 △6일차:믿음으로 어둠속을 지나가기 △7일차: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란 매일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7일 동안 기도했다. 11일에 열린 세계YMCA-YWCA 연합예배는 이창호 한국YMCA연합회 국장의 인도로 진행했다. 이번 연합예배는 올해 주제인 「자연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기」라는 제목 아래 세 가지 말씀 묵상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 묵상은 서울YWCA 김현숙팀장이 열왕기상 19장 11절부터 12절 말씀을, 두 번째 묵상은 한국YWCA연합회 유은비간사가 시편 104편 1절부터 3절 말씀을, 세 번째 묵상은 한국YMCA전국연맹 한희수팀장이 요한복음 3장 5절부터 8절 말씀을 묵상했다. 또 「기후위기 시대에 안에서 나오는 것과 들어가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신(信)연구소 소장인 이은선교수(세종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가 설교를 했다. 이교수는 “현재의 열매와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과거에 쌓은 선험이다. 과거의 은혜를 잊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열매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썩음이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자연은 우리의 과거이며 인간 삶의 토대다”며, “우리의 과거인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이다”말했다. 이어서 함께 부르는 노래와 기도 순서가 이어졌다. 찬송과 함께 한국YMCA전국연맹 장다영간사가 「전쟁의 시대, 사랑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지구촌 평화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다음으로 서울YWCA 박미용부장이 「기후정의와 회복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기도를 이어갔으며, 마지막으로 한국YWCA연합회 최유주간사가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바른 신앙을 위해 기도하며 마무리했다. 이번 연합예배는 특별히 쿠팡에서 과도한 노동으로 사망한 고 정슬기님을 비롯해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봉헌했으며, 인도자를 따라 공동축도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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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YWCA-YMCA·공동기도주간·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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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식탁
- “이 광야가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찬송가 ‘십자가 그늘 아래’(415장)에 나오는 가사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광야로 표현하고 있다. 광야가 뭔지도 모르고 광야에 가 본 적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물론 구약 성경을 배우고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공부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역사를 알게 되었으나 광야를 내 삶의 현실과 일치시키는 일은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광야나 사막을 관광 스케줄의 하나로 삼을 만큼 우리 경제생활은 부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이 광야 같은 세상’이라고 찬양을 부른다. 광야를 과거 어느 나라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국한 하지 않고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상징어로 일컫는다는 뜻일 게다. 한때 젊은이들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던 싯귀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시는 러시아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시인 <푸쉬킨>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처형당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래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날이 더 많아지는 나이일수록 지나간 삶이 내가 스스로 만들거나 이미 잘 만들어진 길을 걸었던 때 보다는 길이 막혀 더 이상 한 발도 내 디딜 수 없을 때의 기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캄캄하던 그때, 뜻밖의 길이 생겨나고 그래서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났었다는 간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고속도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오솔 길, 굽은 길, 절벽 길 또는 그야말로 ‘길 없는 길’을 오직 믿음만으로 걸었던 기억을 뒤늦게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곡조에 담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우리는 오늘도 시편 78편 기자와 함께 광야에서의 힘들고 아프고 쓰렸던 기억의 반찬들을 ‘광야의 식탁’(19절)에 올리며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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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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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광야, 기억의 현재화
- 기독교 예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기념하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는 안식 후 첫날인 부활의 날로서, 주님이 잡히시던 전 날 밤에 대한 기억과 사흘 뒤에 일어난 부활의 의미가 중첩되어지는 기념의 날로 점차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부활의 날에 모여서 예수의 살과 피 곧 생명을 나누면서 “나를 기념하라”는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지켰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과거 사건의 현재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마지막 만찬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부활이라는 의미로 현재화 되며 이는 다시 오시리라는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미 실현되어 왔는데 그들은 홍해 사건과 광야의 경험을 오랜 세월 세대를 거치면서 이어지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민족 절기 특히 유월절이나 무교절이나 초막절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 하고 또 미래로 이어지도록 하는 축전이 되었다.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묶는 귀중한 원천 자료였다. 이를 통해서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고 따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들은 또 어떻게 이를 이어받으며 실행해야 하는 지를 절기를 지킴으로서 터득할 수 있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레위기와 신명기는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시편은 축제의 현장에서 울려 퍼진 감사의 노래였다. 시편 기자는 시와 노래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시편 107:33)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시편 1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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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광야, 기억의 현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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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하늘양식
- 광야의 삶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 마실 물과 먹거리 문제였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고 먹어야 한다.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민족은 수르 광야 길을 사흘 걷다가 겨우 한 샘터를 발견하여 마시려 하였으나 그 물은 안타깝게도 마실 수 없는 쓴물 곧 ‘마라’였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 그리고 이어지는 기적은 양식에 대한 것이었다. 곧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이었다. 막힌 길이 열리고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하늘에서 먹을 양식이 내리는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비로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곧 “내가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리라”(출애 16:12)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었다. 기적이 기적을 낳는 기적의 연속이 아니라 기적 그 다음에 따라오는 삶에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하늘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하루치 양식이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아침이 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각각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에 익숙해졌고 누구라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깨닫게 하신 공적 신앙과 그에 따른 공동체적 삶은 그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살아가는 양식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특히 내 먹을 양식을 위해 창고를 크게 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웃의 몫을 가로채려는 욕심이다. 광야는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앞서 보여주는 예표였으며 이를 실천하는 수련의 터전이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정치적 식견은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신앙의 또 다른 식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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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하늘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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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과 광야 길
- 광야 길의 체험은 비단 모세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지도자이기에 먼저 그 길을 가야했다. 그래야 앞에서 이끌고 따라오도록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모세가 겪은 광야를 함께 겪어내기를 요구하였다. 보다 짧고 보다 넓고 보다 쉬운 길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각 지파를 대표하는 정탐꾼들의 겁에 질린 판단 때문이며 이를 어리숙하게 따르는 민중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책벌이기도 하였으나 어차피 이스라엘 민족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들어감 보다 거기에서 오래도록 살아냄이 보다 중요했다. 그 유명한 <가데스바네아>사건이 일어난 ‘바라’라는 광야 한 곳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어지는 수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에서의 시련과 단련과 수련 과정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이나 바라 광야에서 죽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으며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며 돌변하였다. 급기야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옷을 찢기까지 하였다. 정탐 날 수인 사십일의 그 하루를 한해로 바꾸어 계산 할 만큼 그들의 잘못은 무겁고 큰 것이었다.(민수기 14장) 광야는 책벌이며 아픔이며 고난이며 역경이다. 광야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광야는 가나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광야를 거치지 않고 ‘그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름길이 아닌 힘겨운 광야 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의 경험 없이는 삶의 깊고 어두운 세계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없이 삶을 알 수 없고 골짜기 없이 봉우리를 말할 수 없고 추위 없이 따스함을 맛 볼 수 없으며 밤이나 어두움 없이 낮의 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어둠 속에서라야 타오르는 불꽃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알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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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과 광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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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율법과 새 계명
- 모든 종교는 주장하는 진리를 교리로 설정하고 이를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계율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가르치며 이를 생활 속에서 따르도록 한다. 불교는 팔정도를 강조하는데 이를 정견(正見), 정사유(情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라 한다. 유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르친다. 유대교는 무엇보다 십계명을 율법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의 조항들을 오직 사랑이라는 하나의 개념 안에 담으며 그러므로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또 권면한다.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마태 22:34-40)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기독교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십계명이 여러 율법 조항으로 복잡해지고 이를 두고 여러 주장과 해석이 난무할 때, 예수께서는 이를 두 계명으로 집약시키고 이를 단 하나의 계명으로 귀일되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새 계명’이라고 하면서 마치 새로운 법령을 내리듯이 새롭게 이름 짓는다. ‘새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이 낡아지고 화석화 되어 갈 때 이전의 것을 흐르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이제부터 새 숨을 쉬고 새 영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새로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옛 계명이 주로 ‘하지 말라!’는 투의 말인데 비해 새 계명은 ‘하라!’고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거 같이 그렇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 마른 광야가 물댄 동산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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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율법과 새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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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YWCA-YMCA·공동기도주간·연합예배
- 세계의 이슈 및 상황속에서 기도와 실천을 독려 자연위기가 인간의 위기로 회복위해 노력해야 한국YWCA연합회(회장=조은영)와 한국YMCA(사무총장=김경민)은 지난 11일 YMCA-YWCA 국제친선 및 기도 주간을 맞아 서울YWCA 4층 강당에서 연합예배를 열었다. 자연을 통해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기로 다짐했다. 특히 참석자들은 우리의 과거인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임을 인식했다. 세계YWCA와 세계YMCA는 세계 에큐메니컬 기독청년 단체로 운동 방향성 공유를 위해, 매년 11월 중 공동 기도주간을 정하고 공통의 주제와 내용으로 기도하며 연합예배를 드려왔다. 또한 현재 세계 이슈 및 상황과 관련하여 성서적 해석과 기도 주간 매일의 기도문 책자, 연간 성서읽기 계획을 공유하여 전 세계 공동체의 기도와 실천을 독려해 왔다. 올해는 「자연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기 - 물, 흙, 불, 바람」이란 주제로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세계기도주간을 정해 함께 기도했다. 제공된 기도문에서는 성경과 일상에서 묘사되고 경험되는 자연 요소들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했으며, 묵상의 관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도록 했다. 「△1일차: 믿음으로 폭풍을 뚫고 나아가기 △2일차: 믿음으로 가뭄을 지나가기 △3일차: 믿음으로 골짜기를 지나가기 △4일차: 믿음으로 들판을 지나가기 △5일차: 믿음으로 불 속을 지나가기 △6일차:믿음으로 어둠속을 지나가기 △7일차: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란 매일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7일 동안 기도했다. 11일에 열린 세계YMCA-YWCA 연합예배는 이창호 한국YMCA연합회 국장의 인도로 진행했다. 이번 연합예배는 올해 주제인 「자연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기」라는 제목 아래 세 가지 말씀 묵상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 묵상은 서울YWCA 김현숙팀장이 열왕기상 19장 11절부터 12절 말씀을, 두 번째 묵상은 한국YWCA연합회 유은비간사가 시편 104편 1절부터 3절 말씀을, 세 번째 묵상은 한국YMCA전국연맹 한희수팀장이 요한복음 3장 5절부터 8절 말씀을 묵상했다. 또 「기후위기 시대에 안에서 나오는 것과 들어가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신(信)연구소 소장인 이은선교수(세종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가 설교를 했다. 이교수는 “현재의 열매와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과거에 쌓은 선험이다. 과거의 은혜를 잊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열매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썩음이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자연은 우리의 과거이며 인간 삶의 토대다”며, “우리의 과거인 자연의 위기가 곧 인간의 위기이다”말했다. 이어서 함께 부르는 노래와 기도 순서가 이어졌다. 찬송과 함께 한국YMCA전국연맹 장다영간사가 「전쟁의 시대, 사랑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지구촌 평화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다음으로 서울YWCA 박미용부장이 「기후정의와 회복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기도를 이어갔으며, 마지막으로 한국YWCA연합회 최유주간사가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바른 신앙을 위해 기도하며 마무리했다. 이번 연합예배는 특별히 쿠팡에서 과도한 노동으로 사망한 고 정슬기님을 비롯해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봉헌했으며, 인도자를 따라 공동축도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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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식탁
- “이 광야가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찬송가 ‘십자가 그늘 아래’(415장)에 나오는 가사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광야로 표현하고 있다. 광야가 뭔지도 모르고 광야에 가 본 적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물론 구약 성경을 배우고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공부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역사를 알게 되었으나 광야를 내 삶의 현실과 일치시키는 일은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광야나 사막을 관광 스케줄의 하나로 삼을 만큼 우리 경제생활은 부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이 광야 같은 세상’이라고 찬양을 부른다. 광야를 과거 어느 나라 어느 특정한 지역에 국한 하지 않고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상징어로 일컫는다는 뜻일 게다. 한때 젊은이들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던 싯귀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시는 러시아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시인 <푸쉬킨>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처형당한 친구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래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날이 더 많아지는 나이일수록 지나간 삶이 내가 스스로 만들거나 이미 잘 만들어진 길을 걸었던 때 보다는 길이 막혀 더 이상 한 발도 내 디딜 수 없을 때의 기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캄캄하던 그때, 뜻밖의 길이 생겨나고 그래서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났었다는 간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 고속도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오솔 길, 굽은 길, 절벽 길 또는 그야말로 ‘길 없는 길’을 오직 믿음만으로 걸었던 기억을 뒤늦게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곡조에 담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우리는 오늘도 시편 78편 기자와 함께 광야에서의 힘들고 아프고 쓰렸던 기억의 반찬들을 ‘광야의 식탁’(19절)에 올리며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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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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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광야, 기억의 현재화
- 기독교 예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기념하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는 안식 후 첫날인 부활의 날로서, 주님이 잡히시던 전 날 밤에 대한 기억과 사흘 뒤에 일어난 부활의 의미가 중첩되어지는 기념의 날로 점차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부활의 날에 모여서 예수의 살과 피 곧 생명을 나누면서 “나를 기념하라”는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지켰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과거 사건의 현재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마지막 만찬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부활이라는 의미로 현재화 되며 이는 다시 오시리라는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미 실현되어 왔는데 그들은 홍해 사건과 광야의 경험을 오랜 세월 세대를 거치면서 이어지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민족 절기 특히 유월절이나 무교절이나 초막절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 하고 또 미래로 이어지도록 하는 축전이 되었다.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묶는 귀중한 원천 자료였다. 이를 통해서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고 따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들은 또 어떻게 이를 이어받으며 실행해야 하는 지를 절기를 지킴으로서 터득할 수 있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레위기와 신명기는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시편은 축제의 현장에서 울려 퍼진 감사의 노래였다. 시편 기자는 시와 노래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시편 107:33)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시편 1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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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광야, 기억의 현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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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 영성]하늘양식
- 광야의 삶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 마실 물과 먹거리 문제였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고 먹어야 한다.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넌 민족은 수르 광야 길을 사흘 걷다가 겨우 한 샘터를 발견하여 마시려 하였으나 그 물은 안타깝게도 마실 수 없는 쓴물 곧 ‘마라’였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 그리고 이어지는 기적은 양식에 대한 것이었다. 곧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이었다. 막힌 길이 열리고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하늘에서 먹을 양식이 내리는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비로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곧 “내가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리라”(출애 16:12)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었다. 기적이 기적을 낳는 기적의 연속이 아니라 기적 그 다음에 따라오는 삶에 보다 큰 의미가 있었다. 하늘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하루치 양식이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아침이 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각각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에 익숙해졌고 누구라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깨닫게 하신 공적 신앙과 그에 따른 공동체적 삶은 그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이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살아가는 양식은 어느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특히 내 먹을 양식을 위해 창고를 크게 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웃의 몫을 가로채려는 욕심이다. 광야는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앞서 보여주는 예표였으며 이를 실천하는 수련의 터전이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정치적 식견은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신앙의 또 다른 식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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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과 광야 길
- 광야 길의 체험은 비단 모세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지도자이기에 먼저 그 길을 가야했다. 그래야 앞에서 이끌고 따라오도록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모세가 겪은 광야를 함께 겪어내기를 요구하였다. 보다 짧고 보다 넓고 보다 쉬운 길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각 지파를 대표하는 정탐꾼들의 겁에 질린 판단 때문이며 이를 어리숙하게 따르는 민중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책벌이기도 하였으나 어차피 이스라엘 민족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들어감 보다 거기에서 오래도록 살아냄이 보다 중요했다. 그 유명한 <가데스바네아>사건이 일어난 ‘바라’라는 광야 한 곳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어지는 수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에서의 시련과 단련과 수련 과정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이나 바라 광야에서 죽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으며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겠다며 돌변하였다. 급기야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옷을 찢기까지 하였다. 정탐 날 수인 사십일의 그 하루를 한해로 바꾸어 계산 할 만큼 그들의 잘못은 무겁고 큰 것이었다.(민수기 14장) 광야는 책벌이며 아픔이며 고난이며 역경이다. 광야는 약속의 땅이 아니다. 광야는 가나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광야를 거치지 않고 ‘그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지름길이 아닌 힘겨운 광야 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그곳의 경험 없이는 삶의 깊고 어두운 세계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없이 삶을 알 수 없고 골짜기 없이 봉우리를 말할 수 없고 추위 없이 따스함을 맛 볼 수 없으며 밤이나 어두움 없이 낮의 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어둠 속에서라야 타오르는 불꽃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알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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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과 광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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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사역문화연구소서 목회자소명세미나
- 무디의 사역에 대해서 소개하는 무디사역문화연구소 소장 이문주목사 한국교회의 부흥방안과 무임목사의 영적 생활 조명 목회사역 중단한 목회자 사역지속위한 지원에 매진 무디사역문화연구소(소장=이문주목사)가 오는 8일 관악구에 위치한 새소망교회에서 「복음 전하는 일, 나의 소명」이란 주제로 제1회 목회자소명세미나를 진행한다. 대상은 현재 목회를 하지 않고 있는 목회자와 무임목사를 대상으로 한다. 이번 세미나는 무임목사들의 소명감 재정립을 위해 진행된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 연구소 소장이자 미국 엠허스트 시온교회 설립자인 이문주목사가 「무디 사역 문화 연구소의 소개」, 서울한영대 전 신대원장 남궁선박사의 「목사의 소명」, 유선호목사(평강교회)의 「한국 교회의 미래」, 이진우목사(새소망교회)의 「한국교회의 부흥은 어떻게 해야 하나?」, 허인규목사(가좌 은혜교회)의 「무임 목회자의 영적 생활」이란 제목으로 강의가 진행된다. 연구소 소장 이문주목사는 “D.L 무디는 19세기에 미국과 영국 교회에 부흥운동을 일으켜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무디사역문화연구소는 무디의 사역문화를 이어나감으로써 오늘날 영적으로 쇠퇴해져 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과 부흥 운동을 돕고자 한다”면서, “또한 목회사역을 중단한 목사들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설립됐다”고 말했다. 이목사는 이번 세미나를 진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 “미국에서 사역하던 당시 현지목회자들과 함께 초교파적으로 기도회를 했다. 기도회를 하면서 알게된 목회자가 교회 내 방향성 문제로 사임하고, 작은교회로 가서 성경공부 교사가 된 것을 보았다”면서, “선교사를 하다가 들어온 사역자가 새신자반을 인도하는 것도 보았다. 또 은퇴목사가 다른 교회로 가서 안내를 섬기는 모습도 봤다. 그들은 목회를 그만두고도 영적관리를 위해 이러한 섬김의 자리로 나아온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교회 무임목사 중 ‘자기들의 영적관리를 위해 이러한 섬김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영적관리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이 처음 가졌던 소명을 확인하고, 그들이 목양지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또 “나는 무임목회자들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각 교단에서 자격이 되기 때문에 안수를 했다. 그 분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목회지를 떠나 패배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수리기 힘든 목회자들이 계시다”면서, “이런 분들에게 소명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하고자 한다. 세미나가 거듭해 갈수록 많은 무임목사들이 이런 일에 함께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연구소는 앞으로 무임목사들이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목사는 “무임목사들은 설교도 할 수 있으며, 성도들을 가르칠 수도 있다. 한국교회의 자산인 이들이 사역을 쉰다는 것은 한국교회에도 마이너스이다”면서, “목회자들은 설교를 해야 자존감이 확립된다. 목회자들이 목회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이런 사역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연구소는 △무디의 특성을 연구하고 개발 △현시대에 맞는 복음전파위한 문화적 접근 △목양지를 떠난 목회자들 위한 해결방안 제시 △목양지를 떠난 목회자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 제공 △목회자 영성프로그램 마련 등의 사역에 매진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목사는 “이전에도 무디를 소개하는 사역을 많이 했다. 앞으로도 무디의 사역을 한국교회에 알리는 일에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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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사역문화연구소서 목회자소명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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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영성]하나님의 마음
-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모세는 민족을 위한 구체적 사명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 하고 있는 그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고통당하는 사정을 알고 그들의 감독자 때문에 받는 근심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고통과 근심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를 해결 하시고자 모세를 선택하고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역을 맡기셨다. (출애 3:7)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지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기에 앞서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의 민족이 당하고 있는 근심과 고통과 억울함과 이러한 것들에 대한 부르짖음이다. 하나님은 안타깝게 부르짖는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으며 사역자 모세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소리를 듣도록 하시며 또 이런 귀를 갖도록 하시며 이런 마음을 갖도록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사역자와 이른바 영적 지도자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광야는 이것에 대한 의미와 깨달음을 얻게 하는 장소이다. 광야 한복판에 서서 광야를 광야로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광야는 에덴동산이 아니다. 광야는 푸른 초장이 아니다. 광야는 오아시스도 아니다. 광야는 거친 바람과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다. 하여 풀 한 포기와 보잘 것 없는 나무 한 그루와 물 한 구덩이의 귀중함을 깨닫도록 하는 곳이다. 그리고 하늘의 가없음과 땅의 광활함으로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도록 가르치는 곳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 깊이 와 닿도록 까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아니신가. 40일 동안 몸소 광야를 체험하신 그분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사람들,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정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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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모스영성]하나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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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체험, 그 다음
- 종교학이나 신학에서 ‘종교체험’ 또는 ‘신비체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의 현상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보이시는 그 이유가 있고 이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신(神)과의 일체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대부분의 종교에 있으나 특별히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체험 그 자체 보다는 그 다음 단계를 중시해왔다. 이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땅과 온갖 생명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겨주셨다.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 번성, 충만, 정복이라는 문자는 곧 창조, 생명, 보존, 평화로 재해석 될 필요가 있다. 아담이 모든 생물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 불렀으니 그 이름대로 잘 보전하고 관리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아담에게 맡겨진 책임은 모세에게로도 이어진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에게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도록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가나안은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하며 고통 받는 한 민족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을 부르신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신비를 제대로 체험한 이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경험한 그 장소와 그 순간을 절대화하기보다 이 세상 만물로 향하게 하고 고통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아가도록 한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학이며 성례전적 삶이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낮아지고 사람이 되시고 또한 종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자기 비움을 실행하심으로 빌립보 2장 말씀대로 케노시스의 본보기가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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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체험, 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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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체험
-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 3:5)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나서 가장 먼저 모세에게 하신 명령의 말씀이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장면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모세가 신고 있는 신발의 대조적 모습이다. 본래 거룩에 대한 히브리어는 ‘카도쉬’라는 말로 구별이나 분리를 뜻하는데, 하늘과 땅이 구별되고 선과 악이 구별되고 성(聖)과 속(俗)이 구별 되듯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되는 그러한 구별이다. 그런데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들어나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두 발을 딛고 있는 땅으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모세가 서 있는 그 땅,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런 광야도 아울러 거룩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곳으로 들어갈 때는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요구이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모세는 그동안 신고 다니던 신발을 벗어야 했다. 여기에서 신발은 여러 가지를 상징한다. 신발은 발이며 발걸음이며 걸음 거리이며 내가 현재 가고 있으며 또 앞으로 가려는 방향이기도 하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이제 그 일을 멈추겠다는 의미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길을 멈추고 방향에 대한 모색을 멈추겠다는 의지며 표명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 2:3) 레위기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1:45)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거룩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가든 길을 멈추고 하려던 일을 놓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진정한 ‘쉼’의 세계를 누려야 한다. 곧 쉼을 통한 거룩의 체험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거룩에 대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양면적 특성을 생각할 수 있다. 특수성이란 구별과 분리를 통해서 나타나고 보여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 현상이며, 하늘이 아닌 땅 특별한 땅이 아닌 누구라도 신발을 벗으면 들어올 수 있는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라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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