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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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1
      최경환 공동대표   참된 신앙은 교회에서만이 아닌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교회의 공공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제자도의 신학을 넘어 이제는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신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 공공신학이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국내에도 이제 조금씩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먼저 공공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공공성은 어떤 의미이며, 기존에 신학의 한 분과로 다루던 기독교윤리와 무엇이 다른지 설명해 보려 한다. 일반적으로 공공성은 사적 영역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대부분은 사적인 신앙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을 개인의 신앙체험이나 내면의 영성으로만 설명한다든가, 조금 더 확장하면 교회중심주의로 이해하려는 경우가 많다. 분명 신앙의 어떤 부분은 사적이다. 하지만 공공신학은 신앙의 공적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한 명의 시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앙은 단순히 골방이나 교회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일반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공적이다.   공공신학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이후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학의 제반 문제들을 다룬다. 여기서 공공신학은 현대사회 속에서 민주적인 삶을 떠받치고 있는 활동 영역, 즉 ‘공론장’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이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 자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통해 그 사랑을 알 수 있고,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믿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공적 영역으로 나가야 하며, 이 세상의 영혼과 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공적인 영역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공적인 영역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 교회, 신학은 항상 세상과 관련이 있고, 구체적으로 공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 즉 복음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에서의 삶, 그리고 인류애 전체를 포괄한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와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전통적으로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공공신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또한 자신이 알든 모르든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는 세상, 정치, 시민사회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공신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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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9
  • 선거와 한국기독교 - ④
    배덕만교수 선거와 한국기독교 - ④   근본주의·반지성주의의 실수와 기독인의 올바른 선거  한국 개신교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갖는 것이 문제되는 이유는 특정한 정치집단이나 정치적 성향과 배타적으로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강력한 반공사회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남한의 우익정권에 적응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기독교의 본질과 같은 흐름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보편적인 형태, 즉 성경적으로 정통성에 선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누구만의, 누구만을 위한, 특정 정치성향을 지지하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와 이념의 갈등 속에서 특정한 진영에 서 있는 기독교가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고 제3의 지대에서 중재하고 통합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역사를 견인해 나가는 자리에 서야 한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본래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보통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비평학, 그리고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고민으로 등장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신학적 근본주의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윤리 문제가 파생되고, 정치경제적 문제와 연동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근본주의는 신학적 문제(성서무오설, 세대주의종말론)만 관심을 갖는데, 윤리적으로 가니까 복제문제, 낙태문제, 동성애문제가 이슈가 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여기에 반공, 친미가 한국 근본주의에서 중요한 아젠다라고 다뤘다.   오강남교수(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는 모든 종교는 심층과 표층이 있다고 말한다. 보다 진리를 추구하는 차원이 있기도 하지만, 종교의 힘을 빌려 현실 문제 해결하려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의 상당수가 후자, 표층적 종교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출발했는데, 성서비평학이나 진화론, 과학의 발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학문의 장에서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오히려 현대신학이 무신론적이고 세속적 인본주의라고 봤다. 세상의 학문적 발전을 악마의 궤계로 폄하했다. 그래서 일반대학 내의 신학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과 교리만 가르치겠다는 ‘성경학교’ 혹은 ‘성경대학’에 진학하고 목회자로 사역했다.    기독교 본질에 대한 공부필요, 신학자와 목회자의 몫. 이런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세상 학문을 비난하고 과학적 성취를 반기독교적이라고 가르쳤다. 미국의 경우 보수적인 정권의 지지자 중에는 이런 분위기에서 교육받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것들이 먹혀들어가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폐해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근본주의적 신앙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총체적이고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약화시키는 근본주의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신앙적 기준에서 행동할 수 있을까. 결국은 공부다. 한국 현대사와 한국 기독교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공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마치 진리인 듯 뿌려지는 기도제목 이라는 명목의 가짜 뉴스 등에 반대되는,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노력들이 교회와 단체마다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계몽시킬 책임은 목회자와 학자들에게 있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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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2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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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신학] 위기의 한국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문화공동체
      김선일 교수                                                   오직 교회만이 자신들 밖의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가 교회 내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문화의 확립을 토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핵심 실천인 선교와 전도의 문화가 조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선교’의 원래 뜻은 세상으로 보냄 받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목표로 한다. 선교는 세상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삶이라면, 전도는 그 복음에 기초한 개인을 위한 구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선교학자 데이나 로버트(보스턴대)가 비유한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몸과 심장의 관계와 같다. 선교가 총체적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전도는 생명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심장과 같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선교 사역에는 교육, 의료, 환경운동, 정의구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적 실천들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이 없이 선교는 지속적인 추동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나 레슬리 뉴비긴 등에 의해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세상과 이웃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참여라는 인식을 기초로 최근 선교적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에서 기본 착상을 빌려온 것은 맞지만, 복음주의 권의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도를 확대 갱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은 하시는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던진다. 선교적 교회론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선교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적 문화, 즉 선교적인 공동의 생활 양식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에게는 선교적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다”라는 심오한 선언을 남겼다. 나치에 항거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회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이 지역과 이웃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선교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위한 몇 가지 선한 실천들을 간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타인을 향한 관심과 환대의 리듬이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과 집회 지향의 삶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이 아닌, 소그룹과 공동체가 함께 헌신하고 상상하며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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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설교연구모임
      ◇서울신학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6일 이 대학과 온라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란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존 웨슬리의 설교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소 소장인 김성원교수는 “성경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주제로 설교한 것은 성경말씀에 충실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면서, “웨슬리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발견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하라고 하는 마지막 권면은 우리에게 특별히 귀중한 영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파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는 교훈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욱 깊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동행이며 교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를 어디에서나 감찰하시지만, 그 눈은 우리를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하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자의 눈길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편재는 궁극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면서,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며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토의시간에서 강춘이전도사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며 성령님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최병은목사는 “당장 강당에 올라가서 그대로 읽고 전해도 웨슬리의 설교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설교를 읽을 때 감동이 있으며 역동성이 있다. 코람데오의 신앙은 요셉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코람데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의 독대시간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는시간을 통해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류재성목사는 “오늘날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적용과 질문들이 필요하다”면서, “웨슬리가 편재성에 대한 설교를 당시 18세기 영국사회에 대한 것으로 적용했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를들면 소외, 불안, 분열, 갈등 등을 겪는 자들에게 그들 가운데도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우리는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류박사는 “편재하심은 부활신앙에도 중요한데, 이 부활신앙은 도마와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예수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가 있는가 하면, ‘나의 몸을 만지지 말라’라는 명령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의 경험을 강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편재하심이라는 것도 손에 쥐는 것(도마)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어줌, 비어주는 것(막달라마리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10
  • 사단법인 느헤이먀 사역을 소개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신학 연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구현과 한국교회 발전과 개혁에 헌신   사단법인 느헤미야(이사장=이문식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비전으로 2010년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성장해, 2019년에 공신력을 가진 단체로 법인화된 이름이다. 이 단체는 처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퇴보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던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며,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개의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시작한 움직임이 이제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다양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배우고자 몸부림치는 동역자들로 확장되고 있다.   창립 당시 기독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연약해진 이유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에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역시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교의 입문 과정부터 신학대학원의 석사 수준의 다양한 과정이, 학식과 인격에 깊이 있는 교수진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기독연구원은 매 학기제로 수업이 진행 중이며, 진지하고 심도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명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 ’를 구성하게 된 과정이다. 교회협의회는 기독연구원의 신학적 성과들을 공유하면서 각 교회 현장에 적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기독연구원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게 될 목회자 후보생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여, 바른 목회자로 세우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단체는 평신도를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무장하여 교회개혁의 주체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일꾼들을 안수하고 잘 훈련시켜, 각자의 소명에 맡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해져 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명에 지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단체는 △교회 및 단체, 교육기관의 연합사업 △전도, 국내선교외 사회선교 △교회개척 사업 △신학교육 및 목회자 재교육 △남북통일사업과 남북교회의 협력사업 △소속기관의 권익보호와 법률적 보호 △성서연구와 교육 및 보급 △청소년 및 청년 선교사업을 주요사업으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이 작은 사역의 한 걸음이 한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우는 귀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 사역에 동참할 교회와 성도를 초청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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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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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1
      과학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2)   현대문명을 이끌어가는 힘은 과학이다. 과학은 쉬지 않고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새로 발견한 과학 뉴스와 그 공로를 인정받은 과학자들의 노벨상 수상 소식 등은 언론 매체를 통해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다. 현대과학 뉴스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 뉴스들은 대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관점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주류 과학자들은 창세기에 쓰인 하나님의 창조기사를 믿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상당수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는 과학을 부정하면서 사회생활에서는 과학을 인정하는 이중적 생활을 하거나, 교회를 떠난다. 과학을 부정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아이들에게도 현대과학을 부정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은 현대사회에 부적응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 과학주의 사회에서 과학을 부정하는 삶은 결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과학을 부정하는 행동을 요구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학문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우주의 물리법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그것을 초월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 생물의 생명법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생명의 종류별 기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창조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하신 일들은 과학과 기독교를 통섭하는 관점에서 연구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진정한 통섭적 관점에 이르면, 열역학 제1법칙이 입증하는 영원불변의 에너지 세계에서 ‘스스로 있는 자’(출3:14)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우주를 창조하셨고, 지구에서 인간과 생물을 종류별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자신이 물질에서 저절로 생겨나 진화한 존재이고, 그의 의식은 물질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몸이 죽으면 의식도 당연히 죽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권력과 부의 축적에 성공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오히려 영생하는 방법을 더욱 간절하게 찾고 있다. ‘뉴럴링크 프로젝트’에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미끼가 바로 영생의 가능성이다. 세계 영화 배급업체 넷플릭스가 드라마로 제작한 SF [얼터드 카본, Altered Carbon]을 보면, 카본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그의 의식을 디지털 저장 장치(stack)에 저장하여 타인의 신체 또는 로봇에 이식 또는 조작하면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일본판 에니메이션 [얼터드 카본: 리슬리브]의 스토리는 한 야쿠자 조직이 초대 두목부터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죽는 전통을 이어왔으나, 사실은 초대 두목이 후계자를 죽이면서 ‘스택’에 저장한 자기의식을 죽은 후계자의 뇌에 계속 이식하는 방법으로 영생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런 SF 영화들이 유행하면서 현대인들은 과학의 힘으로 영생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모르는 인간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얼터드 카본]이라는 제목처럼 인간의 의식이 카본 화합물 따위라면, 물질에서 생명을 만들어내겠다고 공언한 오파린과 크레이그 벤터 등이 왜 단세포 박테리아 생체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100년 세월을 허송했겠는가? ‘뉴럴링크 프로젝트’ 역시 물질만으로 만들어지지 아니한 생명체를 물질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미혹하는 사탄적 기만이다. 의식을 발화하는 뇌 신경을 로봇에 연결하거나 전송하는 ‘뉴럴링크 칩’, 또는 저장 ‘스택’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짐승의 표(계13:16)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통섭적 관점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속에서 영생의 소망을 이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장성(고전 13:11)하지 못하거나 사탄의 미혹에 빠진다면, 그의 소망은 헛된 꿈이 되고 말 것이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0-10-27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X. 개혁주의적 영성신학 제시: 초연 아닌 헌신의 태도,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합 강조   1. 기독교적 삶과 연결되는 신학   1987년 3월 9일 패커는 도쿄기독교신학원(Tokyo Christian Institute) 졸업식 강연을 했다. 패커는 이 강연에서 신학이 학문으로 머물지 않고 신앙을 도와줄 수 있는지에 관하여 성찰했다. 그는 오늘날 유럽의 자유주의적 강단 신학에서 신학과 기독교적 삶이 각기 따로 움직이는 것을 지적한다. 오늘날 신학교의 교육과정들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학문적인 이슈만을 다루어, 기독교적 삶의 이슈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신학생들을 복음 전도자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인 내지 회의자가 되도록 한다. 많은 신학생들이 신학을 하고 졸업을 한 후에 신학하기 전보다 하나님을 더 멀리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신학교육 컬리큐럼에서 기독교 신학 공부와 기독교적 삶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배우는 신학적 지식과 연구가 신앙적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학교의 교과과정이 기독교적 신앙과 삶을 다루기보다는 단지 학문적인 이슈들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패커는 초대교회시 신약의 복음서나 서신서들이 쓰여진 이유는 이것들이 단순히 기독교를 개념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삶에서 따르는 제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쓰여졌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1970년대 복음주의자들은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지 아니했다. 하지만 패커는 신학과 삶을 연결시키는 용어로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패커는 영성 단어를 기독교적 진리를 삶에 적용시킨다는 의미에서 청교도 개념에 가까운 현대적 등가어로 보았다. 그리하여 패커는 영성이라는 용어를 1968년부터 사용했고,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패커는 “영성신학”이란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분야라고 하기보다는 조직신학을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패커는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 성취, 진작하고자하는 여러 가지 기독교적 활동에 대한 탐구, 그 활동에는 공예배, 개인의 기도, 그리고 이러한 경건활동에 실체적인 기독교적 삶에 미치는 결과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영성 정의(定義)는 진리를 생활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패커 자신이 중요시하여 왔고 그렇게 신학적인 활동을 하고 그렇게 살고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청교도로서 자신이 청교도적 삶을 살기를 노력했다.   2. 체계적 영성: 초연(超然) 아닌 헌신의 태도   패커는 1989년 리전트 칼리지 상우 유통 치(Sangwoo Youtong Chee) 석좌교수 취임강연에서 "체계적 영성“(systematic spirituality)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의 조직신학의 유형을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감정과 생각들을 다루는 것이다. 패커는 이러한 신학의 유형을 주관적으로 정향된 자유주의 신학으로 보고 이에 대해 명확히 반대한다. 이러한 신학은 신학의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를 다루는 것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은 19세기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불트만을 거쳐 캅((John B. Cobb)의 과정신학자들에까지 이르는 인간중심의 신학이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된 성경적 진리를 해석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패커는 이러한 신학의 유형을 객관적으로 사실에 정향된 신학으로 보고 이에 대하여 지지를 보낸다. 이는 전통적인 조직신학 유형으로 정통주의 신학이다. 이러한 신학의 유형은 단지 냉정하고 초연함(detachment) 속에서 진행될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을 개념화하고 자료들을 마치 일반 과학적 자료들처럼 취급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의 결과는 성경을 주해하는 계시신학의 차원에서 이탈하여 이성적 사유가 하나님의 진리를 지배하고 구성하는 사변신학으로 나아감을 초래한다. 이러한 신학의 학문적인 체계화 작업에 대하여 패커는 이의를 제기한다. 이러한 초연한 태도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사유 개념이라는 상자 안에 가두고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패커는 “작지만 중요한 수정”을 가한다. 그의 수정이란 초연함이 아니라 헌신(commitment)의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패커는 헌신의 태도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 상대자로 다루고 인간의 사고 틀 속애서 하나님을 사변하는 데서 벗어나 성경이 말하는 계시적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를 추구하는 올바른 태도를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헌신의 태도는 이성적 사유가 지배하기 보다는 성령의 조명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헌신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 지식(knowledge about God)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지식(knowledge of God)이 추구된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태도 속에서 그분을 묵상하고 그를 향한 기도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단지 머리로 아는 이론적 지식은 하나님을 마음과 영혼으로 아는 인격적 지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패커는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중세의 최고의 신학자인 토마스의 문장을 인용한다: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 지며, 하나님을 가르치며, 우리를 하나님에게 인도한다”(theologia a Deo docta, Deum decet, ad Deum ducit).   3.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 천명: 영성 없는 신학은 무용   패커는 신학의 방법으로 영성신학을 제안하면서 이를 위하여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을 제안한다. 조직신학의 사유는 영성의 태도 속에서 실행되어야 하고 영성의 태도는 조직신학적 사유의 표현으로 견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양자의 결혼이 이루어질 때 신학적 사유와 경건한 탐구는 체계적 영성(systematic spirituality)이 되며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패커는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에 대한 실례를 다음같이 설명하고 있다. 건전한 영성은 철저히 삼위일체론적이 되어야 한다. 건전한 영성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세 위격 모두에게 온당한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성부를 무시하면 성부의 예정과 예지를 무시하게되고, 그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사역과 훈련을 상실하고, 하나님 가정 안에서 자기 탐닉에만 몰두하여 게으르고 버릇없는 신자가 된다. 성자를 무시하면 성자의 중보와 속죄, 천상에서의 간구를 상실하게 되어 율법주의에 떨어지게 된다. 성령을 무시하면 성령께서 창조하시는 성부와의 교제, 인간 본성의 새롬게 하심, 확신과 기쁨,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패커는 하나님에 대하여 삼위일체론적으로 균형잡힌 신학적 사유를 하고자 제안하고 있으며, 이는 아주 올바른 방향이다.   패커는 교실과 강의실에서만 통용되는 강단신학을 거부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신앙과는 동떨어진 학문적 정직성에 입각하는 신학을 하게될 때 신학은 지성은 만족시키나 신앙과는 괴리(乖離)되게 된다. 불트만의 경우처럼 신약의 비신화론화라는 지성적 이해만을 만족시키고자 함으로써 탈교회적, 탈신앙적 신학이 결과된 것이다. 보수정통신학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하나님 지식을 체계화하고 알지라도 그것이 신자의 삶과 분리될 때 무용지물이 된다. 영성으로 표현되지 않는 신학은 신앙적 삶과 괴리되어 무용지물이 된다. 패커는 영성 없는 신학은 무용하다고 역설하였다.   패커는 기독교 이후 시대 진정한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자로서 학문적 신학을 수행하는 학자로서 신학이 나아가야할 진정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진정한 신학은 영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패커의 영성신학 개념은 현대를 살았던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그가 우리에게 남겨진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성신학,”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 “신앙적 삶과 연결되는 신학”이라는 패커의 용어들은 기독교 이후의 삶을 맞이하고 있는 구미(歐美)신학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전통으로 복귀하는 신학의 진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패커는 일반적으로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리는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영성”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고, “영성신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였고, “조직신학의 구체적인 적용,” “조직신학과 영성의 결혼” 이라는 신학적 개념까지 제시한 것은 그가 신학적 방법에 있어서 단지 이성을 사용하는 정통신학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신학적 경건의 열정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성신학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 패커는 단지 은사주의자들이 주구하는 신비주의로 나아가기를 주장하지 않고 로마 가톨릭적인 인간의 경건훈련을 강조하는 신인협력설로 나아가지 않고, 성령을 좇는 삶, 성령 안에서 경건을 추구하는 성경적 영성훈련을 강조한 것은 그로 하여금 시종일관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남아 있도록 하였다.   X. 정통 개혁신학 입장 제시   패커는 “될 수 있는 대로 논쟁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런 논쟁 상황에서 패커는 대개 성경적이고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같은 성공회의 복음주의적 ‘학자인 목회자(scholar-pastor)’였던 존 스토트보다 좀 더 온건하고 정통적 입장을 대변했고, 신학적으로 정통파 개혁신학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곳곳에서 잘 제시한 신학자(theologian)였다. 패커는 항상 매우 조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 안에서 개혁신학적 목소리를 강력하게 외친 사람 중 하나였다. 역사신학자 마크 놀은 패커의 개혁신학적 성향이 성공회적이며, 복음주의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어법은 영국적이며, 정서는 복음주의적이다. 패커의 복음주의적 유별한 특성은 그의 교육, 그의 칼빈주의, 그리고 그의 성공회주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결합은 아주 비역사적, 거의 비전통적인, 자주 반지성적인 복음주의가 미국 역사에서 고통을 당했던 과도함에서 벗어나게 했다,”(Mark Noll, "The Last Puritan," Noll’s contribution to Doing Theology for the People of God: Studies in Honor of J. I. Packer, edited by Donald Lewis and Alistair McGrath, InterVarsity Press, 1996).이러한 마크 놀의 평가는 패커의 균형적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에 의하여 그가 천명한 복음주의는 그동안 복음주의가 빠질 수 있었던 아주 비역사적 정향, 그라고 거의 전통 무시함, 자주 반지성적 정향에서 벗어나는 과격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지적하고 았다.   패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기도하는 것, 하나님과의 연합을 강조했다. 그는 옛 청교도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교회를 향해 회개와 거룩을 촉구했으며, 신자들에겐 성령 안에서의 동행, 자신의 죄와 싸우라고 채찍질했다. 패커는 칭의 논쟁에서도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역설했다. 패커는 특히 신론과 구원론에 있어서 개혁신학을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리하여 형벌을 받으셨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둘다 강조하고, 신학의 모든 측면에서 개혁신학의 강조점을 잘 드러냈다. 그는 참으로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였다. 패커는 그의 저서 『복음전도란 무엇인가』에서 칼빈주의가 중심교리롤 천명하는 구속론적 입장(the soteriological position)을 견지했다.   패커는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속에서 성경의 무오한 권위를 지켰다. 1977년엔 R.C 스프롤, 존 게르스트너, 노먼 가이슬러, 그레그 반센 등과 함께 국제성경무오협회를 구성했다. 이는 1978년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시카고 선언(Chicago Statement, 1978)을 끌어낸 기초가 됐다. 패커는 1978년, 시카고에서 있었던 ‘성경의 무오성을 위한 국제협회’(The International Council for Biblical Inerrancy)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학계의 유행을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이 제2바티칸공의회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해 왔으나 그 이후에는 구교의 대부분의 학자들도 신교의 회의주의에 대규모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이제는 구교에서도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입장은 소수파의 입장이 되어 버릴 것으로 보인다.” 패커는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에서의 10년간의 리더십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보며, “무오에 대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피력은 패커가 최선을 다했던 여러 이유를 설명해준다. 패커는 성경의 본질과 해석,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같은 수많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복음주의 선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를 바라본 전통주의자였다.   마크 A. 놀은 “패커는 칼빈주의자로서 무게 있는 신학적 전통들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지난 수세기 동안 진정한 신학의 전통을 이루어 왔던 서너 개의 우파들을 아우르는 학문적 심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노작들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자기의식이 뚜렷한 개혁주의 신학이다. 패커는 주의 깊은 주석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확고한 수호자, 자기의식이 뚜렷한 해석학적 이론가”라고 말한다.   패커는 2000년 제자목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학 속에 청교도 신앙과 정통주의가 융합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 “나의 신앙 형성에는 칼빈과 청교도들이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칼빈과 청교도들에는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다. 한 손에는 정통성과 진리가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 제자의 도가 있다. 이제 이것은 나의 삶의 정체성이기도 하다.”(제임스 패커 인터뷰 1, 「소금과 빛」, 2000년 7월호 특집. 두란노서원, https://cafe.naver.com/ilumok/16)   패커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교회를 약화시키는 뿌리가 된다”며 체계적인 신앙 지식 추구를 주문했다. 대표작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비롯해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기독교 기본진리』, 『청교도 사상』 등 300여권의 책과 사전 편집, 기고글 등이 있다. 그는 ESV성경의 책임 편집자를 역임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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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9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0
      과학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1)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기독교 창조론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유물론자와 진화론자, 그리고 그 이론들을 결합한 과학적 무신론자들과의 논쟁에서 밀리고 있는 동안에 과학기술은 보라는 듯이 로봇(robot)과 컴퓨터를 만들어냈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컴퓨터를 개량한 인공지능(A.I.)을 로봇에 탑재하는 휴머노이드(humanoid) 로봇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휴머노이드는 인터넷과 연결하여 세상의 모든 정보를 습득 또는 교환할 수 있는 로봇이다.   한편 미국에서 일런 머스크가 세운 테슬라사는 항공기 운항에 쓰는 오토파일럿(Autopilot)을 개량하여 지상에서 운전자 없이 자율운행(FSDC; Full Self Driving Capability)하는 자동차를 금년 중에 완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율운행 자동차의 완성은 주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딥 러닝(deep learning)한 A.I. 로봇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 로봇들과 공생하는 사회에서는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거의 모두 빼앗아 갈 것이다. 그런 우려를 비웃듯이 일런 머스크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살아있는 인간의 뇌를 로봇에 연결하는 뉴럴 링크(Neural Link)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머스크에 의하면 뉴럴 링크 로봇은 인간의 일 처리 능력을 딥 러닝 A.I.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특징은 뇌 신경망에서 발화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다른 생물과 특별히 구별된다. 인간의 뇌 신경망에서 발화하는 의식을 로봇에 연결하기 위해서는 특수하게 개발된 뉴럴 링크 칩(neural link chip)이 필요하다. 뉴럴 링크 칩을 개발하는 머스크의 뉴럴 링크회사는 최근 살아있는 돼지에 실험하여 일말의 성과를 거두었고, 곧 인간의 생체 실험에 도전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머스크의 뉴럴 링크 프로젝트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인간의 뇌 + A.I. 로봇’으로 구성되는 뉴럴 링크 인간 또는 뉴럴 링크 사이보그(Cyborg)는 살아있는 인간과 A.I. 로봇의 합성체를 만드는 것이다.   일런 머스크의 뉴럴 링크 프로젝트를 주목하는 이유는 인공생명 제조 실험을 했던 크레이크 벤터가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생명 제조 실험의 성공은 과학적 무신론자 생명의 기원이 물질의 화학작용이라는 오파린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머스크가 인간의 뇌 기능을 A.I. 로봇에 연결시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역시 과학적 무신론자의 관점이다. 그런 합성체 인간은 다양한 조합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반(半)인간 반(半)기계’로서 신의 경지에 이른 변종(變種) 인간이다.    머스크의 뉴럴 링크 프로젝트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한 영화 [메트릭스]와 일본 만화작가 시로우 마사무네(士郞正宗)의 『공각기동대』, 그리고 리처드 K. 모건의 SF 소설 『얼터드 카본』 등에서 묘사한 미래사회에서는 오히려 일상적인 개념이다. 그런 SF에서 인간의 영혼 또는 정신은 이미 메모리 칩, 스택(stack), USB 등의 컴퓨터 보조기억장치에 디지털 정보로 저장되어 있고, 아무 인간의 몸에나 이식, 또는 교체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미 많은 SF의 공상(空想)을 과학이 실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대인은 과학이 만능(萬能)이라는 관점에서 정신과 몸을 서로 바꿔가면서 영생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거나 자연발생한 원시생물이 자연선택에 의하여 진화했다고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기술에 의하여 혼합생명체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얼터드 카본』에서 혼합생명체를 지배하는 엘리트 그룹(‘므두셀라’들)은 인간의 생명을 얼마든지 조작하고 연장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스스로 변종 인간이 되어 영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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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6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9
        인간의 기원   기독교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하신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과 의무를 맡기시려는 것이었다(창1:26-28). 그러나 다윈주의자 및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그런 사실을 부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몇 개 또는 한 개의 원시 생명체를 만들었거나, 또는 아예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해서 원시생물이 생겨났고, 인간은 그것이 진화한 동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각 생물의 DNA 또는 RNA의 유사성에 따라서 진화계통수를 그려놓고, 그것이 지구 생물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각 생물의 DNA가 그 생물의 생명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화계통수는 그들의 관점에서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은 각 생물의 DNA 데이터를 처리해서 그린 허구의 그림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화계통수를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과학적 무신론에 속아서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계통수에 의하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이다. 인간과 침팬지의 게놈(유전체)을 비교하면, 약 97%에서 99%까지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과 침팬지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이질적인 면이 더 많다. 인간의 게놈을 구성하는 염색체 숫자는 46개이고, 침팬지는 48개이다. 인간의 생명 정보인 DNA를 연구하기 위해 2003년에 인간게놈프로젝트를 끝낸 과학자들은 곧바로 국제적 연구팀을 만들어 엔코드(DNA 원소 백과사전)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인간게놈을 구성하는 DNA는 약 32억 개로 밝혀졌고, 그 DNA들은 약 25,000개의 유전자로 계열화되었다. 유전자는 다시 46개의 염색체로 계열화되어 각 체세포의 핵에 들어있다. 46개의 염색체는 부모가 23개씩 나눠준 것이며, 그 23개의 쌍(짝)은 상동염색체로 불린다. 게놈을 가진 체세포는 분열하여 2개의 딸세포로 증식한다. 정자와 난자를 말하는 생식세포는 체세포의 염색체가 23개로 감수분열(46/2)한 것이다. 수억 개의 정자 중에서 1개가 난자를 만나 짝짓기에 성공하면, 모의 자궁에서 한 개의 배아를 형성한다. 그 배아가 세포분열을 통해 2-4-8-16...으로 늘어나서 성체가 된다. 인간의 몸은 약 60조 개의 체세포로 구성된다. 인간의 체세포 크기는 대개 0.1㎜, 세포핵은 0.02-0.03㎜ 정도이다.   ◇인간과 침팬지의 게놈을 비교하면, 약 97%에서 99%까지 일치한다. 그러나 인간과 침팬지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이질적인 면이 더 많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스티븐 콜린스는 단백질 생산 정보를 가진 5% 이하의 DNA만 유전자로 보고, 나머지 95%는 쓰레기(junk) DNA로 취급했다. 그러나 콜린스의 DNA 이해에는 오류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DNA가 엑손(Exon)과 인트론(Intron)의 정보를 전부 mRNA에 전달하면, 엑손 정보만이 단백질 생산에 쓰이고 인트론 정보는 쓸데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린스는 그런 오해에도 불구하고, 『신의 언어』에서 네 글자(A, T, G, C) 배열로 이루어진 DNA를 신이 설계한 생물의 생명정보라고 해석했다. 무신론자였던 콜린스는 DNA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바이오로고스(biologos)설을 제안하면서 유신론을 인정하고 회심했다. 그 뒤에 이어진 엔코드프로젝트 연구에 의하면, 아직 그 기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정크 DNA도 각각 생명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 조상으로부터 인간게놈을 이어받은 것이지, 침팬지 게놈에서 진화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인간과 각 생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유전법칙에 따라서 부모의 게놈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을 뿐이다. 더욱이 생물의 게놈에는 계통을 벅어난 변이가 발생하면, 다음 세대에서 유전자 복구 시스템이 작동한다. 진화의 계통수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유전법칙에 따라 생물의 게놈이 새로운 종의 게놈으로 진화하는 메커니즘을 각 DNA 단위로 설명해야 한다. 그런 방법으로 각 DNA 데이터를 분석하면,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려고 인간게놈을 특별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누가 하든지, 인가의 기원논쟁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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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7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8
      기독교 창조론적 관점에서 과학적 무신론 비판하기(3): 종의 기원   찰스 다윈은 하나님이 지구 생물을 종류별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생물학적으로 부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1859)에서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창조자’(Creator)에 의하여 ‘몇 개 또는 한 개’ 만들어졌고, 그것이 번식하면서 자연선택의 방법으로 인간으로까지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보다 조금 늦게 그레고어 멘델은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1866) 논문을 발표하여 생물에게 나타나는 변이는 유전자의 법칙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멘델의 주장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무작위적인 변이를 명백히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을 학습한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생명을 물질적 현상으로 보면서 창조자까지 부정했다. 그 결과 오파린은 생명이 물질에서 발생했다는 화학적 진화론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의 주장은 과학적 무신론의 핵심 이론이 되었다. 결국에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과학적 무신론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1871년 당시 찰스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서 풍자한 영국의 신문 만평 1953년에 모두 생물의 생명정보가 DNA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생물학이 수많은 실험을 거쳐 멘델의 주장을 유전법칙으로 확정하고, 다윈과 오파린의 주장은 가설로 남겨두었다. 인간게놈프로젝트(1890-2003)를 거쳐 생물의 생명 정보와 DNA 결합 구조가 더 많이 밝혀졌다. 이후에 DNA는 물질에서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유전법칙과 생식격리 현상에 의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다윈과 오파린의 가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대 생물학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의 조합에 의해 몸과 본성이 다양하게 표현된다. 유전법칙에 의하면 DNA의 조합은 그 종이 가지고 있는 DNA의 구조 안에 제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종의 생물은 유전법칙에 따라서 같은 종의 자손들을 번식할 뿐이다. DNA의 조합 과정에서 탈락이나 배열의 오류 등에 의한 변이는 기형이나 질병으로 나타날 뿐이다. 서로 다른 종은 교배를 해도 DNA의 조합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번식력 있는 자손을 낳지 못한다. 유전자 변이가 점진적으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동력이라고 주장하는 다윈주의는 진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중간 종이 현실적으로 관찰된 사례가 없다는 사실에서 부정된다. 새로 등장한, 돌연변이 가설은, 돌연변이에 의해 새로운 종이 발생하려면, 유전자와 생식기능이 동일하게 동시에 돌연변이된 암수가 동일한 장소에서 만나 교배해야 한다는 확률적 불가능성에 막힌다.   한편 다윈의 ‘창조자’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해석하는 다윈주의자들은 개혁교회에 출석하기도 한다. 그들은 유신 진화론자, 또는 진화적 창조론자 등으로 불린다. 그들은 인간도 원시 생명체에서 진화한 존재라고 보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한 사실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죄악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자이면서 구원자로 믿는 교회에 그들이 출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에 출석하는 다윈주의자들이 하는 일은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창세기를 비판하고 추종자를 모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주로 개혁교회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홍수지질학과 우주와 지구의 나이 6,000년 설을 비판한다. 그런 창조과학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창세기를 해석했던 1920년대 안식교회의 홍수지질학을 표절한 것이다. 더욱이 홍수지질학의 주제인 노아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와는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모두 알고 보면, 개혁교회에 창조과학자들도 문제이지만, 다윈주의자들도 문제이다. 현대에 이르러 개혁교회 안에서 창조과학이나 다윈주의는 이단 종파의 도그마로 변이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현대 개혁교회는 교회 밖에서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창조과학과 다윈주의의 문제에 대한 대응책 논의도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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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7
      기독교 창조론적 관점에서 과학적 무신론 비판하기(2)   하나님은 우리우주를 창조하신 다음에 ②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생물을 종류별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은 그런 사실을 부정한다. 알렉산더 오파린은 [생명의 기원](1936)에서 지구 최초의 생물은 물리적 화학작용의 ‘변증법적 비약’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생명의 보편적 개념은 물질로 구성된 생명체가 죽을 때까지 그것의 행동을 주관하는 기능을 말한다. 오파린의 관점에 의하면 생명은 생명체의 물질적 현상이다. 오파린은 생명체의 화학적 발생에 대한 법칙을 알게 되었으므로 인공생명체를 만드는 것도 곧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파린의 주장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그의 [생명의 기원]을 읽고, 그가 설명하는 물질의 화학적 또는 변증법적 과정을 전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오파린은 결론적으로 인공생명체의 제조가 곧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결론을 검증하는 것으로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사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오파린은 죽을 때(1980)까지 인공생명체 제조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추종하는 과학자들이 그의 인공생명체 제조에 관련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각 생물의 생명정보가 DNA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공생명체 제조에 성공한 과학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현재 인공생명체 연구에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진 크레이그 벤터연구소조차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 같다. 벤터 연구소는 2010년에 901개의 유전자와 약 100만개로 조직된 미코플라즈마 미코이데스 박테리아의 DNA를 해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복제했다. 벤터는 그렇게 만든 미코이데스의 인공 DNA를 미코플라즈마 카프리콜룸의 생체 세포막에 이식해서 미코이데스의 DNA 특성이 발현되는 사실을 관찰했다. 그러자 벤터는 최초의 생명체는 최소의 유전자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미니멀 세포’ 제조에 착수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친 끝에 벤터는 2016년 473개의 필수 유전자를 골라 ‘미니멀 세포’를 만든고, 그것의 생명기능 발현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의 생명은 박테리아의 생체 세포막에 이식했을 때만 발현되었고, 인공 세포막에 이식했을 때는 실패했다. 100%의 인공생명체를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벤터연구소의 인공생명체 제조 실험은 절반의 선에서 멈춰 섰고, 새로운 소식은 아직 없다.   국내에서도 인공생명체에 대한 연구가 없지 않았다. 2018년 국내 2개 대학과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이 합동으로 살아있는 식물세포와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가지며, 빛을 사용해 스스로 생체에너지(ATP)를 생산하는 인공세포 제작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시금치에서 광합성 단백질을, 박테리아에서 광전환 단백질을 각각 추출한 후 세포와 유사한 형태로 재조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인공세포 제작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허위 주장이다. 결국 생물학에서 두 개의 기둥원리인 세포는 세포에서, 생명은 생명에서 생겨난다는 세포속생설과 생명속생설이 무너지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오파린이 화학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생명의 기원 가설이 부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당황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지구 생명의 기원을 지구 밖에서 찾고자 하는 ‘범종설’(panspermia) 등의 외계기원설까지 주장했다. 그로 인하여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 종교까지 생겨났다. 생명의 기원 문제를 지구 밖으로 끌고 나갈지라도 장소만 이전될 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우리가 지구 생명의 창조자를 찾지 않을 수 없다면, 결국 그분은 성경에서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출3:14)로 설명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이 지구 생명을 창조하신 이야기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알파 창조론’은 현대과학적 관점에서 고대 히브리인 저자 모세의 서술을 일부 교정하여 그분의 창조를 사실로 믿을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0-09-28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한국교회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 긴밀히 교류하고 선교와 복음화의 영향력 넓혀야한다.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전)AEA신학위원장/ (전)한국복음주의협의회 신학위원장/숭실대 명예교수   머리말   보수 복음주의 신학자 연대(김명혁, 김상복 강승삼, 박용규, 성남용, 이승구, 이은선, 박명수 교수)가 2020년 9월 11일 성명서 ‘WEA(세계복음주의연맹)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 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예장합동(총회장 김종준 목사) 제105회 총회에서 WEA(세계복음주의연맹, World Evangelical Alliance)와의 교류단절을 재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이 이슈의 교회사적 신학적 중요성을 감안해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발표하고자 한다.   필자는 유럽에서는 1971년부터 독일 하이델베르그대, 마르부르크대, 보쿰대에서 7년간, 영국에서는 1989년 캠브리지 신학부에서 1년간, 1990년 미국에서는 예일대 신학부, 프린스턴대에서 2년 등 총 10여 년 간 신학을 연구하고 그곳 신학 및 교회 지도자들을 만난 국제적 경험, 2002년-2019년까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신학위원장, 2008년-2016년 아시아복음주의연맹(AEA)의 신학위원장으로 봉사한 선교와 복음화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WEA 연대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교단 총회를 앞두고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이슈 논란으로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세계복음주의 교회와 단체들과 긴밀히 연대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데 힘써 주기를 예장 합동측과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에 호소하고자 한다.   I. 한국교회는 기독교이후 시대에 지구촌 복음주의 연대의 책임을 각성해야 한다.   WEA는 신앙적으로 매우 건전한 세계적인 복음주의 연합체의 모임이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전 세계 기독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 세계복음주의연맹(WEA)로 재편되어 진행되었다. 오늘날 세계 복음주의 계열의 연합으로는 세계개혁주의협의회(WRF), 미국복음주의협회 (NAE), 미국복음주의신학회(ETS), 세계복음주의연맹(WEA) 등이 긴밀하게 유대관계를 맺으며 세계복음주의운동을 이끌고 있다. 이들 기구들은 성경의 완전무오성(Biblical Inerrancy)을 비롯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분명하게 표방하는 국제기구들이다. WCC는 신학적으로 많은 변천을 맞으며 기구 공학적 연합방식과 자유주의 신학, 특히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수용 논란으로 인하여 영향력을 상실했고, ICCC는 부정적 사고(negative mentality)와 극단적 분리주의(radical separatism)로 흘러 이제는 유명무실한 국제기구로 전락했다. 이에 반해 WEA는 전 세계 6억의 복음주의 개신교 인구를 대표하는 국제기구로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미치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계승하고 세계선교운동에도 큰 역할을 감당해왔다. 오늘날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130여년 만에 세계적 교회로 성장한 생동적이고 역동적 교회가 되게 하셨다. 한국교회는 지구촌 시대에서 세계기독교의 수호자로서 세계교회 안에서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를 위해서 합동교단의 WEA와의 교류단절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II. WEA는 1846년 영국에서 10개국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창설된 복음주의단체다.   WEA는 WCC보다 무려 100년이나 앞서 1846년 영국에서 설립되었다. 당시는 시대적 상황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한참 번창하는 시대요, 성경적으로는 독일로부터 밀려온 역사적 비판학(고등비평), 과학적으로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으로 진화론이 시작하던 시기요, 정치적으로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정치적 경제학 비판』(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867)으로 공산주의가 일어나, 19세기 중엽 세계가 혼란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영적으로 어두운 사상들이 전 세계를 덮기 시작하던 시대에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을 수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고자 1846년 창립되었다. 진화론, 자유주의 신학, 공산주의 발흥에 맞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변호했다. 1900년대 중엽 까지는 이 기구는 일차적으로 창립멤버 기구인 영국복음주의 연맹(British Evangelical Alliance)이었다. 이 기구는 유럽과 북미에서 불규칙적인 지원을 받다가 1951년 21개국이 모여 세계복음주의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라는 새 명칭을 갖게되었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2001년 「세계복음주의연맹」(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오늘날 WEA는 130여개 나라 교회들의 연맹이요 100개 넘는 국제 기구과 협력하는 세계적 복음주의 연합기구가 되었다. (자료: The Editors of Encyclopaedia Britannica, World Evangelical Alliance, religious organization. https://www.britannica.com/topic/World-Evangelical-Alliance).   1950년대부터 일어난 빌리 그래함의 복음화 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을 더욱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20세기 후반에 형성된 또 하나의 괄목할만한 복음주의 운동은 1974년 로잔에서 시작된 「로잔 세계복음화운동」이다.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이 모두 WEA와의 연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WEA의 신앙고백서는 예장 통합, 합동, 고신 교단의 신앙고백과 다른 것이 없다.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의 완전 유기적 영감(plenary organic inspiration)과 완전무오설(plenary inerrancy),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과 육체적 재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 구원과 성령의 거듭남, 성령의 역사, 구원 받은 자의 생명의 부활과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의 부활 등 예장 통합, 합동, 고신 교단의 신앙고백과 하나도 차이가 없다.   III. WEA는 오늘날 신학적 이슈인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한다.   필자는 2013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복음주의연맹(AEA, Asian Evangelical Alliance)에 AEA회장 김상복 목사(횃불 트리니티 명예총장)와 함께 한국복음주의 신학위원장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필자는 AEA 신학위원장으로서 2013년 신학선언(AEA 2013 Theologcial Declaration)를 기초하였다. 2013년 AEA 신학선언은 ‘오늘날 세상과의 대화’ 항목에서 다음같이 선언하였다: ”교회는 타종교와 현대적 세계관과 대화함에 있어서 사도적 전통이 결정적인 것임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라는 신앙이다. 따라서 본 선언은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한다. 그러면서도 타종교에 대한 포용의 자세를 견지한다. 교회는 다른 전통을 존중하면서 대화할 때 기독교 비전의 정합성과 매력성을 겸허히 설명해야 한다. 교회는 종교다원주의를 경계하면서 공동선을 위하여 다른 종교와 세속단체와 공동적으로 일할 수 있다.”(김영한, “1973 로잔의 개념, 현 시대 속에서 보다 구체적 천명,”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입력 : 2013.09.17. 21:21, 크리스천투데이). WEA가 WCC와 상당한 공동분모를 가지면서도 차별성이 있는 것은 WCC가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데 반하여 WEA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제시하면서 명료하게 결별하는 태도를 취하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WEA는 공동선을 위하여는 타종교와 협력을 한다는 점이다.   IV. 역사적 개혁교회는 분리주의 노선에서 탈피하고 세계적 복음주의 교회와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하나의 보편적 사도적 거룩한 교회(One Universal, Apostolic Holy Church)로서, 국제적인 연대 속에서 교제하고 신앙적인 교류 속에서 성장 발전해 왔다. 루터와 츠빙글리, 칼빈 등이 복음주의 연대 속에서 교류했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는 항상 분리되거나 도피하지 않고 이웃과 형제 사랑 속에서 세계선교와 복음화를 위하여 협력해왔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 기독교학술원, 한국 로잔위원회,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한국개혁신학회 등은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연대 속에서 세계복음주의 운동에 함께 협력하고 있다. 로잔대회를 비롯한 선교운동을 통해 아시아와 세계선교운동에도 WEA(세계복음주의연맹)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번 제 105회 총회에서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교류 단절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그동안 좋은 모범을 보여온 예장 합동교단이 만일 WEA와 단절하고 교류를 중지하게 된다면 예장합동은 해외 선교 활동에 있어서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합동 총회와 교단은 한국교회의 보수 복음주의를 대표하여 국제적으로 보수 복음주의 기관과 연대를 강화하고 해외 선교를 선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국내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대한민국을 복음화해서 남북통일과 세계선교에 앞장서는 교단이 되기를 기대한다.   IV. 예장 합동 총회의 결정은 한국교회 선교단체와 신학자들의 세계교회 복음주의단체와 연대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WEA는 약 6억 명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연합체이다. 현재 7개 대륙 복음주의연맹들이 있고 129개 교단과 국가별 연맹들, 대학생선교회(CCC), 국제기독학생회(IVF), 월드 비전(World Vision), 컴패션(Compassion) 등과 같은 150개의 선교단체들이 회원 기관으로 가입해 있다.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유오설(有誤說)에 맞서 성경의 완전영감과 완전무오사상을 천명한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의 시카고 성명서(The Chicago Statement)을 작성해 낸 신학자들도 세계복음주의연맹(WEA),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미국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같은 복음주의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장합동총회가 세계복음주의연맹(WEA)과의 교류단절을 결의하거나 재론한다면 이것은 한국교회 내의 보수 복음주의 진영을 혼란스럽게 할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수호하고 성경적 가치를 계승하려고 노력하는 한국교회와 세계복음주의 선교단체와 신학자들과 연대하고 있는 큰 흐름에 중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V. 예장 합동총회는 세계복음주의 연맹 등 세계복음주의교회와 신학적 연대를 강화할 때다.   예장 합동은 한국교회 안에 보수 복음주의 연대를 해오며 한국교회의 보수 복음주의의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한국교회를 성경적 진리의 토대 위에 세워지도록 하는 일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은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이 도전과 세속화의 거센 물결 앞에 선 한국교회는 보수 복음주의 세력이 함께 연합하여 힘을 모아 맞서야 할 때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예장 합동이 제105회 총회(2020년 9월)에서 WEA(세계복음주의연맹)와 교류 단절을 결정하거나 재론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지난 4년 동안의 많은 논의와 연구를 거쳐 2019년 104회 총회에서 ‘WEA(세계복음주의연맹)는 합동교단의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아 교류단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총회 신학부의 보고를 받기로 총대들이 신중하게 결정한 사항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론하는 것은 결코 예장 합동 총회는 물론 한국교회 전체의 복음주의 연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보수 복음주의 신학자 연대, ‘WEA(세계복음주의연맹)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 2020년 9월 11일, 김철영 기자 기사입력: 2020/09/12 [05:59] 최종편집: ⓒ newspower). 만일 재론하여 탈퇴하고 교류를 끊는다면 이는 보편적 거룩한 사도저 교회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에서 자신을 잘라내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화라는 기대한 역사적 문명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이며 역사적 기독교의 사명을 망각하는 것이다.   맺음말   2005년 예장합동이 개혁측과 연합하고 이번 총회에서 구 개혁 측 출신 첫 총회장이 될 소강석 목사는 그동안 한국교회 연합에 있어서 좋은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이번 제 105회 총회에서 아름다운 리더십을 통해 이번 예장합동이 고립주의나 분리주의가 아닌 보수 복음주의 연대를 통해 오늘날 지구촌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도약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기를 간곡하게 요청한다. 분리주의 길은 역사적 기독교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4세기에 로마 박해시 배교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공교회를 떠난 도나티스트들(Donatists)의 분리주의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다. 역사적 개혁교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기독교 교단들과 교류를 하는 것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적 거룩한 사도적 교회에 소속됨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장 합동이 WEA(세계복음주의연맹)과 교류를 끊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세계복음주의운동에 헌신하고 공헌하는 영향력 있는 국제적 교단으로 도약하고, 참으로 훌륭한 세계적인 신학 및 목회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교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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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9-15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6
      기독교 창조론적 관점에서 과학적 무신론 비판하기(1)   기독교 창조론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① 우리 우주(하늘과 땅)를 창조하셨고, ②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생물을 종류별로 창조하셨고, ③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세 가지 믿음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서 모세가 서술한 창조 톨레도트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기독교 창조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확산은 기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과학적 무신론과 생존을 건 논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논쟁의 성패는 자기의 주장을 사실적으로 잘 논증하고, 상대의 주장에서 허위 사실을 어떻게 잘 비판하느냐에 달려 있다. 앞의 세 가지 믿음을 토대로 하는 기독교 창조론의 관점에서 이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비판해보기로 한다.   ① 현대물리학과 양자이론이 우리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 그것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은 빅뱅우주론이다. 빅뱅우주론은 우리우주의 물질과 물리법칙이 빅뱅의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빅뱅우주론을 제대로 알면 우리 우주의 창조와 관련한 논쟁의 핵심은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기독교는 빅뱅우주론을 하나님이 우주 창조론의 방법으로 사용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고, 이에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빅뱅우주론에서 ‘특이점’ 이론이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법칙)을 위반한다는 사실은 지적해야 한다. 에너지 보존법칙은 물질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의 토대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 에너지 총량이 영원불변하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빅뱅우주론에서 ‘특이점’ 이론은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우주의 물질이 아주 작은 점 하나의 크기로 응축된 ‘특이점’ 상태로 있었으며, 그것이 빅뱅의 재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빅뱅 이전의 ‘특이점’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위반한 것이다. 에너지와 물질의 등가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E=mc² 상태로 보존된다. 그렇다면 빅뱅은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한 에너지 총량의 일부가 우리우주의 물질을 만들어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에너지와 물질의 등가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E=mc² 상태로 보존된다.   기독교는 우리우주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빅뱅우주론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에너지 보존법칙을 위반하는 특이점’ 이론은 배척해야 한다. ‘특이점’이론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빅뱅의 원인자이신 창조주의 존재를 가리려는 허위 이론이기 때문이다. 사실 빅뱅 이전에 에너지가 인력에 의하여 ‘특이점’으로 응축되었다는 주장은 과학적 사실로 인정될 수 없다. 인력은 빅뱅이 만들어낸 물질에서 발현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전화(轉化)를 작동하는 원인이 없다면, 영원히 보존될 뿐이다. 빅뱅우주론에서 빅뱅을 작동한 원인자(原因者)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존재한다. 기독교가 우리우주를 만들어낸 빅뱅과 빅뱅 이후 만유인력 등의 물리 법칙들이 작동하는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면, 과학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원인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과학이 그 원인자이신 ‘하나님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거나 ‘간격의 하나님이냐?’라고 반문한다면, 기독교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출3:14)라고 대답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신 하나님은 빅뱅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고, 바로 빅뱅의 원인자이시다. 빅뱅이 과학적 사실이고, 그 원인자의 존재가 필연적 조건이라면, 그 원인자로 인정할 수 있는 존재는 기독교가 우리우주의 창조주로 설명하는 하나님밖에 없다.   과학주의 시대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열역학 제1법칙이나 빅뱅우주론 등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에너지 세계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다. 빅뱅은 하나님이 우리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에너지를 물질로 전화한 사건이다. 그런 설명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 신화의 신 ‘히데스’(음부)의 열쇠를 자신이 가졌다(계1:18)고 하신 것과 같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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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9-15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V. 하나님을 아는 인격적 지식 제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고 인도함을 받음   패커의 대표작으로 ‘이 시대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1960년대 격월로 발간되던 「복음주의 잡지」 편집자가 기독교의 기본에 대해 시리즈로 써 달라고 한 것을 5년 동안 기고한 글들의 모음”이다. 이 저서를 통하여 그는 칼빈처럼 “책 한권의 사람”(homo unius libri)으로 알려졌다. 칼빈의 대표적 저서가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59)라면 패커의 대표적 저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1973)이라고 평가된다.   패커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경이로움을 강조하였다. 그의 신론 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패커는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패커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책을 통해 믿음의 열조들이 간 그 오래된 길을 따르라는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패커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오늘의 교회를 약화시키는 뿌리가 된다”고 그의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저서로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이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공에 대해 패커 자신은 깜짝 놀랐고, 이 때문에 패커는 ‘신학’과 ‘영성’을 연관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그러한 일에 자기가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패커는 성경을 아주 중요시하면서 성경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시대의 계시라고 하지 않으며, 이 성경에 근거해서 그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려고 애쓴다. 이 일에 과거 신앙의 선배들, 청교도들이 좋은 모범이 됨을 잘 드러내 준다. 과거의 청교도 신앙 선배들처럼 성경에 근거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면 그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삶을 살며 신자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Knowing God’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즉 ‘Knowing about God’을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구별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단순한 명제적, 정보적 지식으로 머리에만 남는 지식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전 인격적으로 아는 관계적·체험적 지식이며 마음을 변화시키는(transformational) 지식이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 지식(general kwowledge)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인격적 지식(personal kwowledge)임을 패커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점을 밀도있게 논의하였다. 패커는 피력한다: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하는데 필요한 규칙은 간단하지만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장엄하심,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들(주권, 전능, 전지, 편재, 영원, 거룩, 의, 진노, 사랑, 은혜, 자비 등등),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권능의 사역들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하면서, 설교자들에게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교하도록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패커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복음전도의 책임을 무시하는 일부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의 약점들 중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홈니와 비느하스)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고 신앙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사무엘은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 2:12). 이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경멸하고 하나님에 드린 제물을 강탈하는 죄를 범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7). 오늘날 신자라고 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신학을 한다고 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힘써 알자고 선포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2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호 6:1-3). 호세아가 선포한 바같이 힘써 하나님을 알라고 성심(誠心)과 열성(熱誠)을 다해 선포하는 설교자들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패커의 충고를 수용하고, 설교의 주제를 다시 하나님으로(Back to God!) 재정향해야 한다. 설교자들의 설교가 변화될 때 성도들의 신앙의 중심 축도 변화될 것이다. 패커는 오늘날 기독교이후 시대에 미주의 복음주의자들이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거룩성, 선하심, 은총과 사랑에 관하여 최고의 학문의 전당인 옥스퍼드에서 체험하고 배웠던 지식을 활용하면서 그가 가진 재능, 지혜 그리고 천부적인 능력으로 말하고 저술 활동하였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   V. 칭의 교리의 수호   패커의 저서 ‘칭의의 여러 얼굴’( Here We Stand: Justification by Faith Today, Oak Hill College, 1986; 김형원 역, 이레서원, 2016)에서 전통적 칭의론에 대한 영국 성공회 신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한 책이다. 칭의 교리에 대한 개신교적 입장을 다양한 시각으로 요약한 내용인데 동방정교회나 로마가톨릭의 칭의론도 다뤄 입체적 비교가 가능토록 했다. 책의 원본은 1986년 출간됐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다. 마치 칭의론과 관련된 오늘의 논쟁을 예측이나 한 것처럼 이와 관련된 구절들이 등장한다. 유럽 교회나 영국 성공회 내부에서도 이미 칭의론에 대한 신(新) 해석이 출현했었다는 방증이다. 책은 칭의의 기원과 정의, 근거, 성화, 전가, 최후 행위 심판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패커는 “행위에 따른 심판과 구원을 강조한다고 해서 함부로 전통적 구원관을 포기하고 행위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며 “동시에 오직 믿음과 은혜의 구원을 설교한다고 해서 이를 값싼 구원론으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패커는 이 편집서 서문에서 칭의론을 “기독교 교리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귀하고 생기있는 성경적 교리”라고 본다. “이는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붙잡을 수 있는 진리”이다. 패커는 칭의론을 신론적이며, 인간론적이며, 성령론적이며, 교회론적이며, 종말론적이며, 복음적이고, 목회적이고, 예전적이라고 특징지운다. 칭의론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역을 선포한다는 의미에서 신론적”이다. 칭의론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에서 인간론적”이다. 칭의론은 “성육신과 구속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기독론적”이다. 칭의론은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일이 성령사역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성령론적”이다. 칭의론은 “교회의 정의와 건강함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교회론적”이다. 칭의론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을 지금 여기에서 선포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다. 칭의론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영혼한 화평으로 초청한다는 의미에서 복음적”이다. 칭의론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정체성이 성도 간 교제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목회적”이다. 칭의론은 “성례를 해석하고 성례 예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예전적”이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종교개혁 칭의론을 거부하고 수정주의적 주장을 천명하였다. 새 관점 학파의 대표 주자 영국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Thomas Wright)는 “첫 칭의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최후 심판 때의 마지막 칭의는 전 생애를 통해 성령의 인도 아래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유럽 교회나 영국 성공회 내부에서도 이미 칭의론에 대한 신(新) 해석이 출현했었다는 방증이다.   패커는 이에 대하여 무게있는 논평을 제시했다. 톰 라이트(N. T. Wright)에 대해 패커는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신학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에 대해서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전문적인 수준으로 새로운 관심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현대교회가 이 문제를 완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고 피력한다.   패커는 ‘개신교 신학에서의 칭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끊임없이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가 있고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며 형태가 왜곡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에게는 이 교리가 진실로 생명줄이자 송영이며, 찬양의 외침이자 승리의 노래다.” 그럼으로써 패커는 전통적인 복음주의권이 새 관점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패커는 칭의론과 관련해 “개혁주의 교리의 기초는 타락한 인간의 전적 무능력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부르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비하심이며 이것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VI. 개혁적 성공회 신자: 성공회 신자로서 성공회를 보다 성경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패커는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를 성경적으로 변화시키기 원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영국 교회 안에서 영국 교회를 변화시키기 원했던 역사적인 비분리주의 청교도 선조들을 아주 닮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공회 교회인(Churchman)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패커는 1926년 7월 22일 글로쳐스터셔(Gloucestershire) 북부에 있는 (우리에게는 차로 유명한) 트위닝(Twyning)에서 보잘 것 없는 영국 하위 중산층 가정(lower-middle-class family)에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부친은 큰 서부 철도회사의 서기(a clerk for the Great Western Railway), 어머니는 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교사로서의 패커의 자질은 모친으로부터, 꼼꼼히 글쓰고 정리하는 자질은 서기인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았다 할 수 있다. 장자로 태어난 그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그의 부모를 따라 14살에 견신례도 받았지만, 이 때도 참된 회개나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진 것을 아니었다.   패커는 1944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였고, 후에 신학으로 편입하였다. 대학 진학 후 패커는 재즈 밴드의 클라리넷 연주자와 옥스퍼드 기독학생연합(Oxford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 OICCU)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패커의 회심은 그가 18세 되던 해인 1944년 옥스포드 대학교의 그리스도의 몸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 고전(classics) 전공 학생으로 입학했을 때 이루어진다. 1944년 가을학기에 개강한지 3주가 지난 10월 22일에 패커는 세인트 알데이트 교회(St. Aldate Church)의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나이 많은 목사의 설교가 지루하다고 느꼈지만 그 후반부에 그 설교자 목사가 소년일 때 성경 캠프에서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도전 받았다는 신앙 간증이 학생 패커의 내면에 영적 사건을 일으켰다. 패커는 자신을 그 목사와 동일시하면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로 결단했다. 그리하여 패커는 영국 성공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따르는 청교도 신자가 된 것이다.   패커는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고전을 전공하여 1948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런던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학교인 옥크힐 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에서 1948-1949년 교사(instructor, tutor)로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패커는 1949년 영국 성공회 사제를 훈련시키는 기관의 하나인 옥스포드의 위클리프 홈(Wycliffe Hall)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하고, 1952년에 부제(deacon)가 되고, 1953년에 버밍험 대성당에서 성공회 사제(priest)로 임직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버밍험의 하본 히스(Harborne Heath)에 있는 센인트 존스 교회에서 부목사직 assistant curate)을 수행하면서, 옥스포드에서 리처드 백스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D. Phil., 1954). 논문을 썼다. 죠오지 너트올(Geoffrey Fillingham Nuttall, 1911–2007)의 지도 하에서 그가 쓴 논문은 「리처드 백스터 사상에서의 인간의 구속과 회복」이라는 400페이지 넘는 논문이었다.   신학교수로서 패커 생애의 전반부는 영국 브리스톨 그리고 옥스포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55년에 그는 가족과 함께 브리스톨로 가서 1961년까지 틴대일 홀(Tyndale Hall)에서 가르쳤다. 1961년 옥스포드로 돌아와서 1961-1962년 옥스포드 라티머관 도서관의 사서(Librarian of Latimer House in Oxford), 1962년-1969년 존 스토트와 함께 설립한 복음주의 연구센터의 관장(Warden)으로 봉직했다. 1970년 복음주의 계간지의 편집인이 된다.   그 이후 패커는 계속해서 영국 성공회 목사들을 훈련하는 기관에서 가르쳐 왔고, 옥스포드 학부 때부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지질학자 제임스 휴스턴(James Houston)의 초청에 따라 1979년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전트 컬리지 신학 교수로 갔을 때도 캐나다 성공회에 속한 밴쿠버에 있는 세인트 존스 성공회(St. John's Vancouver Anglican Church)에 속해 있었다. 그는 어찌하든지 성공회가 점점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하였고, 성공회에 속한 복음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인물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성공회를 이끌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직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오래된 직제를 유지하고 있어 성도들 중에 선출되어 임직한 장로 제도가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면서, 목회자와 함께 치리를 감당한 직분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공회는 계속해서 직제에 있어 낡은 관습을 고집하였고, 전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고 더 폭넓은 방향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패커와 그의 동조자들의 노력은 결국 무색해졌다.   이때 패커는 오래 전인 1966년 10월에 마틴 로이드-존스가 ‘복음주의자들의 전국 회의(the 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영국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한 교단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제안했던 바를 다시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때 로이드-존스는 성공회 같이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회들로부터 나와서 독립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체를 형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회의 의장 역할을 하던 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를 공개적으로 반박하면서 영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심각한 균열이 있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때 패커는 20년간 함께 청교도 콘퍼런스를 개최한 로이드 존스와 함께 하지 않고 존 스토트의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패커는 동료요 선배인 로이드 존스로부터 결별을 당했다. 이는 교회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패커의 공교회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패커가 속해 있는 교회인 캐나다 성공회에서 가장 큰 회중인 세인트 존스 교회(St. John’s Church)가 캐나다 성공회에서 분리해 보다 복음주의적인 아르헨티나 교구와 하나가 되려고 하였다. 패커에게 다음 두 가지 죄목이 뒤집어 씌웠다: ①캐나다 성공회의 교리와 치리를 공적으로 거부한다 ②캐나다 성공회 밖의 다른 종교적 단체와 하나됨을 추구했다. 패커로는 영국 성공회가 임직 때에 부여 했던 말씀과 성찬을 섬기는 목사의 권한을 박탈한다(revoked)는 결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패커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거부되었다. 그러자 세인트 존스 교회는 캐나다 성공회 네트워크(the Anglican Network in Canada=ANiC)에 속하였고, 이곳은 다시 2009년 북미 성공회(the 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에 속하였다. 패커 자신은 영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서나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이를 좀 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성공회 자체가 일종의 분열을 한 셈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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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5
      기독교 창조론과 과학적 무신론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학을 부정하는 일부 근본주의 신자들의 그릇된 행태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으므로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그동안 틀려서 뒤집힌 이론이 많으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성경과 과학의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모세의 토라를 믿었던 고대의 유대교는 이후 몇 개 종파로 나뉘면서 해석과 사용하는 성경이 달라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를 개혁하면서 탄생한 기독교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이 더 많이 일어났다. 교회가 동로마 정교회와 서로마 가톨릭교회로 분열된 이후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만이 성경해석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폐해는 가톨릭교회에서 면죄부 판매사건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만인사제설이 등장했다.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각종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는 신자들의 해석은 제각각 달랐다. 전통적으로 천동설을 믿었던 기독교는 과학혁명을 촉발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지동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의 주장을 배척하고 탄압했다. 교황은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종신토록 자택연금형을 받도록 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과학을 탄압하고 배척하고 있을 때, 종교개혁에 의하여 태어난 개혁교회도 그런 입장에 동조했다.   기독교 전체가 과학을 거부했지만, 과학은 굴복하지 않고 점점 정밀하게 만들어지는 관측기구를 사용하면서 오류를 수정하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현대과학은 슈퍼컴퓨터로 데이터를 처리하고, 나노 반도체를 만들고, 미크론(㎛: 0.001㎜) 치수로 부품을 가공 및 조립하는 기술로 첨단과학 시설의 도시와 휴대폰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고 있다. 문제는 현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첨단과학이 만들어낸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과학을 부정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행위는 자기모순이요 자가당착이다. 성경해석권을 개방한 이후 개혁교회에서 유대교 수준의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을 하는 근본주의 경향이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교회가 고대 유대교 수준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역설을 넘어선 퇴행적 모습이다.   기독교에서 과학을 부정하는 것과 관련된 논란은 근본주의자들의 창세기 해석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된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현대인들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다. 1920년대에 안식교회의 근본주의 창조과학자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믿고 노아홍수 기사를 바탕으로 홍수지질학을 만들어서 단일격변설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우겼다. 그들의 행위는 당시 진화론의 공세에 맞서 기독교리를 방어하려고 했던 공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 근본주의자들이 안식교회 창조과학의 잔재를 답습하는 것은 현대 개혁교회를 무지의 종교로 격하시키는 문고리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과 교회의 존재를 미래사회에서 고립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물리적으로 연구하는 진정한 과학에 대해서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현대물리학과 양자이론은 하나님의 물질적 창조법칙을 거의 밝혀낸 상태이다. 현대 개혁교회가 비판할 대상은 유물론과 진화론이 결합한 과학적 무신론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무신론에서 비판해야 할 문제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 핵심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정보(DNA)가 오파린이 주장하는 생명의 기원과 다윈이 주장하는 종의 기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는 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 창조론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깨뜨리는 일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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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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