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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교회 종교개혁·신학교육 조명
    한국개혁신학회(회장=이승구박사)는 지난 25일 백석대학교(총장=장종현박사) 백석아트홀에서 「개혁교회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신학교육」이란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예배와 학술발표를 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개혁주의생명신학회(회장=이경직박사)와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발제자로 김영한원장(기독교학술원)과 주도홍박사(개혁·장로교회 종교개혁500주년기념대회), 유충국박사(백석대), 한상화박사(아신대), 오현철박사(성결대), 조병하박사(백석대), 우병훈박사(고신대), 김윤태박사(백석대), 박성철박사(총신대), 류성인박사(합신대), 진대경박사(성서침대), 양신혜박사(대신대), 박찬호박사(백석대), 조용석박사(연세대), 김지훈박사(신반포중앙교회), 이상은박사(서울장신대), 김요셉박사(총신대), 박영권박사(장신대) 등이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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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기독교학술원서, ‘성령과 하나님 나라’ 조명
    ▲ 기독교학술원은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포럼을 열었다.   ▲ 김영한박사   성령의 사역은 삼위일체의 구속 경륜 속에서 해석될 필요성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으로서 사람의 요소 있는 포괄적 개념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박사·사진)은 월례포럼을 통해 한국교회에서 꾸준하게 영성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5월포럼에서는 성령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국내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심도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먼저 김영한박사는 「성령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 위해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일하신다」는 주제발표를 통해 “성령은 창조사역에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셨고, 신앙의 열조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스라엘 민족으로 선택했으며, 이들이 하나님 법을 떠났을 때 심판하시고 다가오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오순절에서 결정적으로 임재했다”며,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창조와 구약시대에서 일하시고 신약시대에서 오신 성령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경륜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승현교수(호서대)는 「신구약에 나타난 성령과 교회」란 발표에서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의 역사로 발생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예루살렘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회중 곧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며, “성령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무리와 구분되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아로 믿고 경배하는 새로운 에클레시아 곧 교회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재현교수(한동대)는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상관관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통치권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통치권이 미쳐지는 영역과 그 안에 존재하는 백성으로서의 사람의 요소들도 함께 있는 포괄적 개념이다”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속 반역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 반역의 나라에 대한 완전한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령은 이 모든 과정에 중요한 존재로서 역할을 한다. 창조를 통한 시작 단계에서 하나님의 바람/숨/영으로서 말씀의 창조의 통로이며 능력이며 지혜이다”며, “옛 언약 관계에서 사람들에게 임하여 언약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와 돌봄, 심판과 회복의 일을 한다. 또 새로운 관계를 얻게 하는 과정, 곧 새 창조와 거듭남의 과정에도 성령이 관여한다”고 강조했다.  조영모교수(건신대)는 「누가와 바울이 말하는 성령과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가 기술하는 성령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다분히 한정적이다”며, “적어도 누가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의 현현은 오히려 기독론적인 면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인식할 수 있는 계시적인 능력이 되며, 동시에 그 성령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수단이 되고 있다. 구원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사는 삶 그 자체가 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예배에서 조은식박사(숭실대교목실장)는 설교에서 “지금은 1907년 대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의 최대위기다. 이것은 영적 위기 또는 영성의 위기라고 진단하기도 한다”며,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해서 나타난 현상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령의 역사는 계속됨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잘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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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1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5)
    ▲ 소기천교수   예수말씀은 “너희에게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빌려준 사람에게 다시 갚으라고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잘 알려진 613개의 유대 율례 중에서 부정적인 율례 365개(참고로 긍정적인 율례는 248개) 중에서 234번째에 해당하는 가르침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 자꾸 갚으라고 하지 말라’는 교훈은 ‘다시 갚으라고 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구분된다. 유대 율례는 단지 금전적인 채무에만 국한하고 있지만, 예수말씀에서 ‘구하는 사람’은 궁핍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전반을 가리킨다. 그는 단지 금전적인 빚이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서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의식주 가운데 무엇보다도 당장 하루 끼니가 없는 사람의 처지가 가장 다급하다. 옛날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에 농촌에서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너무 풍요로워져서 보릿고개가 어느 언덕인 줄로 아는 젊은이가 있을까 봐 구차하게 사족을 달아본다.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농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음력 4~5월경이 춘궁기 혹은 맥령기이다. 농민들은 지난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빚·이자·세금 등을 뗀 다음, 남은 식량을 가지고 초여름 보리 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때는 대개 풀뿌리나 소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고,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근래에 와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농민들의 소득도 늘어나고, 생활환경도 나아짐에 따라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와 8·15해방을 지내고 한국전쟁을 치른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서 실컷 배불리 먹어보겠다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인구가 대거 몰려들었다. 식구들마저 굶어 죽는 판에 과연 예수말씀대로 빌려준 것을 다시 갚으라고 이웃에게 말하지 않는 삶이 쉬울까? 레위기 19장을 읽어 보라. 예수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그렇게 해주어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황금률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이런 황금률도 마태복음 7장 12절과 누가복음 6장 31절이 각각 해석을 달리하고 있지만, 예수말씀은 단지 아주 진솔한 언어로 ‘이웃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9절)고 권면을 이어가신다. 정작에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한 율법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예수말씀 복음서에는 없는 가르침이지만, 누가복음 10장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집약되기도 한다. 이웃이 내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랄까? 이 질문은 곧바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꾸며, 우리가 이웃에게 받고 싶은 대로 이웃에게 그대로 해주라는 말씀이 된다. 그야말로 내 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다시 갚으라 하지 말고 빌려주고, 이웃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라는 것이 예수말씀이다. 이 황금률을 공자나 부처 혹은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통하는 바가 있다고 일반화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의 황금률은 말 만하고 삶을 전혀 다르게 산 여타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 그대로 삶의 모범을 보이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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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9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4)
    ▲ 소기천교수   예수말씀은 누가복음 6장 29절 상반절에서 “너희 뺨을 치는… 사람 …에게는, 다른 뺨도 돌려대어라”고 권면한다. 원수 사랑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고 권면하신다. 여기서 ‘돌려대라’는 단어는 우리말의 현재 명령형처럼 보이는 어법과는 달리 과거 명령형이다. 우리말이 뺨을 계속해서 돌려대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헬라어 ‘스트렙손’은 뺨을 맞다가 어느 순간에 일회적으로 돌려대어 상대방에게 경종을 울려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만일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참고 뺨을 맞기만 한다면, 이는 제정신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어느 순간에 나를 해하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그렇다고 폭력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뺨을 한순간에 돌려대면서 그가 내게 하는 행동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대어 주라”(예레미야애가 3장 30절)는 말씀이나 “너희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름 뺨도 돌려대어라”(누가복음 6장 29절)는 말씀은 상호 유사점이 많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처구니없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일어난다.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읽어 보라. 특별히 3장 13절은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권면한다. 물론 뺨을 맞는 일이 선한 일이라기보다는 수치스럽고 피하고 싶은 고난이다. 그러나 무고하게 뺨을 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부당한 행동을 합리화하고 더욱더 가리기 위해 급급해하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다. 이들을 보면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뺨을 돌려대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6장 29절 하반절에서 “너희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너희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말아라”고 권면하신다. 겉옷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벌건 대낮에 속옷도 줄 수 있을까? 창피를 무릎 쓰고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속옷도 줄 수 있다면, 그는 내공이 보통 인물이 아니다. 유대 풍습에서 겉옷과 속옷은 구분이 없이, 그냥 한 통으로 짠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식의 의복이다. 그 때문에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은 피할 수 없이 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을 주라는 말씀은 억지로 빼앗으려는 자에게 줄 수밖에 없는 당시 신앙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박해의 삶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편 22편 18절)라는 말씀대로, 십자가상에서 모든 죄인을 위해 그 속옷까지도 모두 내어 주셨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한복음 19장 23절) 로마의 미신 중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죄수의 옷을 나누어 가지면 행운이 깃든다고 믿었기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의 옷깃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신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자기 비움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워내게 모든 것을 채워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내 잔이 넘치게 된 것이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유일한 나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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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2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3)
    ▲ 소기천목사   예수말씀은 누가복음 6장 28절에서 “그리고 너를 비방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여라”고 권면한다. 비방과 기도를 단순하게 대비시킬 때, ‘비방 〉 기도’, ‘비방 〈 기도’, ‘비방 ≤ 기도’, ‘비방 ≥ 기도’ 등으로 구분된다. 비방이 큰지 기도가 큰지 혹은 비방과 기도가 서로 어떻게 상쇄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런 수리·논리적 비교와는 달리 성경은 기도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잠언 27장 11절의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는 말씀에 감히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를 향해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중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에게 대답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그 자녀들이 거역하지 않고 그 뜻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대답하시겠다는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예수말씀은 잠언의 바로 이런 지혜의 말씀을 배경으로 할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예수는 지혜자로 오신 분이시다.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의 가르침을 ‘지혜 교사의 가르침’으로, 제임스 로빈슨은 ‘지혜자들의 말씀들’로 중시하였지만, 예수는 지혜 그 자체이시다. 잠언의 지혜를 잘 알고 계신 예수께서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비방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가르치신다. 기도는 단순한 외침이나 일방적 방언 혹은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아니다. 기도는 대화이고 응답이다. 예수께서는 비방하는 자로 인하여 괴롭고 힘들 때 원망하거나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대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소홀히 여기는 성도들이 많다. 기도하려 하지 않고, 아니 기도만 빼놓고 모든 일을 다 한다. 이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차라리 일하지 말고 가만히 자리를 펴고 앉아서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고 일할 때는 내가 일하지만, 가만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읽어 보라. ‘기도하여라’는 단어인 헬라어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중간태 명령형은 ‘주어가 한 행동의 결과도 주어에게 미치게 하는 화법’이기에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곧 나를 비방하는 자를 위해서 참고 인내하면서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정작 비방하는 자에게 아무런 효과를 미치지 못할 때, 그 기도는 결국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미치게 된다. 왜 비방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그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도 내게 기도의 응답이 임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비방하는 자를 위해 계속해서 참고 고동을 감내하면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가 상대방에게 임하지 않을 때도 그 기도가 쌓여서 내게로 응답이 되는 놀라운 비밀의 차원이 있다. 흔히 중보기도를 나와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특별관리를 하셔서 그 기도가 비방하는 자를 변화시키지 못할 때, 오히려 나를 변화시켜서 내게 응답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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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3
  • 허정윤박사, 새 창조신학착상 발표
      열역학 제1법칙 ‘우주에너지 총량은 영원불변’을 제시 과학적 사실 통해 무신진화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 과학적 유신론의 권위자인 허정윤박사(〈과학과 신의 전쟁〉 저자, 케리그마신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기존의 ‘창조과학’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가한다. 이를 통해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새로운 틀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허박사는 창조론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허박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인간이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고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적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우주의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속성에 비교해서 근접할 수 없는 질적 우월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허박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우주와 우리의 생명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 우주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왜 그럴까? 허박사는 “무신론자들은 우리 우주가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 우주가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우리 우주 안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또한 우리 우주가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 우주 밖에 존재하는 초월세계도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초월세계에는 영원불변하는 두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첫째는 과학의 기초인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는 우주에너지의 총량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허박사는 설명했다. 허박사에 의하면 무신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의하여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창조자가 한 개 또는 몇 개의 원시생물을 만들었고, 그것이 자연선택에 의하여 각종 생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또 오파린은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을 결합하여 무신진화론을 주창했다. 허박사는 “지구의 나이는 과학적으로 가장 길게 보는 것이 46억년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우주가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초월세계의 영원한 시간은 지구의 나이 46억년에 수십억 배를 곱해도 채우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이다”며, “그리고 초월세계의 에너지는 에너지·물질 등가의 법칙(E=mc²)에 의하여 물질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고 설명했다.  또 무신진화론에 의하면 초월세계에서 ‘저절로 우연히’ 생명의 발생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 생명이 우리우주의 역사보다 엄청나게 긴 영원한 시간 동안 진화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박사는 “무신진화론에 의하면 초월세계의 생명이 지구에서 진화한 인간들과 비교하여 엄청난 초월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진화되었다는 합리적 추론 또한 부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신진화론에 의하여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는 ‘저절로 우연히’가 아니라, ‘저절로 필연적’이라는 것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초월적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그가 작정한 대로 E=mc² 법칙에 의하여 초월세계의 우주에너지를 우리우주의 물질적 구조로 전환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신진화론이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며, “이와 같이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추론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진화론이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이론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허박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위와 같이 성경과 과학을 통섭적으로 이해하면, 무신진화론자들의 ‘여리고성’을 함락하는 무기는 바로 무신진화론을 역이용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며, “이제 현대 기독교인들은 무신진화론의 여리고성 함락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무신진화론자들의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나면,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새 예루살렘’을 내려주실 것이다(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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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3
  • 유종필박사 김치선의 신학사상 분석
    ▲ 유종필교수는 대신교단의 설립자인 김치선박사의 신학에 대해 설명했다.  ‘조건적 예정’을 부정하며 종교개혁적 예정론을 충실하게 수용 ‘안찰’이라는 용어사용이 성령강림과 관련 있는지는 검증 필요 ▲ 황의영교수는 김치선박사의 손때가 묻은 노트를 선보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측(총회장=안태준목사)에서는 최근 교단 설립자인 고봉 김치선박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종필교수(동산교회 담임목사, 대신총회신학교)가 〈에베소서 강해〉에 나타난 김치선박사의 신학사상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먼저 신론에서 유교수는 “김치선박사는 에베소서 1장 주해에서 칼빈의 예정론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며 예정론을 분석했다. 김치선은 “창조 전에 하나님의 예정에 입각한 선택설을 말하며, 그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다. 이로써 그는 펠라기우스나 아르미니안의 ‘조건적 예정’을 부정하며 어거스틴과 칼빈의 예정론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교수에 의하면 김치선박사는 에베소서 3장 2절에서 이방인의 사도를 언급하며‘경륜’을 ‘직분’으로 번역한다. ‘경륜’에 해당되는 원어는 ‘dispensation’ 즉, ‘세대’ 또는 ‘stewardship’ 즉, ‘청지기”로 번역이 가능함을 말한다. 그래서 유교수는 “하나님은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경륜을 가지고 있는데 그 경륜은 각 개인에게 부여된 책임(직분)이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유교수는 기독론의 중심주제인 ‘그리스도의 2성 1인격’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에베소서 1장 3절 주해에서 김치선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심을 강조한다. 그는 이 부분에 충분한 신학적 토론을 하지는 않지만, 그의 신학 노선이 어디인지 분명히 드러내는 부분이다”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나 사벨리안의 입장을 부정하고, 더불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에비온파나 여호와의 증인과의 입장을 달리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구속론도 다뤘다. 유교수는 “김치선박사가 정의하는 ‘구속’은 그리스도의 속죄(redemption)와 인간의 구원을 함께 아우르는 말로 정의한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통하여 ‘속죄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둔스 스코투스나 ‘속죄의 상대적 필요성’으로 말하는 아퀴나스와 입장을 달리한다”며, “이는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는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사상과 동일 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사도직의 보편성과 연속성에 대해서도 유교수는 분석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직분으로 “사도직과 선지자직”을 말한다(에베소서4:11). 유박사는 “김치선 박사는 ‘선지자’를 언급하면서 오늘날 영적인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는 성령 사역자를 선지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들의 성령사역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한다. 그는 성령 사역자가 비록 교회의 (공식) 직분자는 아니지만 능력을 행하여 설교자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고 설명하며, “이것은 김치선박사 당시에 교회에서 허용되어지고 행해지던 다양한 은사 집회를 연상케 한다. 말씀의 신학을 고집하면서도 선지자에 대한 정의와 연하여 성령사역(은사)에 문을 열고 있는 것은 특이 할만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특징은 개혁신학의 전통과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김치선박사의 신학적 독특성으로 보려고 한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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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0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2)
    ▲ 소기천교수  누가복음 6장 27절은 “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예수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사랑의 가르침을 전한다. 원수사랑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독특한 주제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에 입각하여 사람들의 필요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어야 할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가르치신다(누가복음 7:1~9, 18~23, 24~28, 31~35; 10:2~16, 21~24; 11:14~23, 24~26; 12:2~12, 22~31, 32~34; 13:18~21, 24~30; 14:5, 16~23, 26~27; 17:33; 14:34~35; 15:4~7; 16:13; 17:1~6, 23~35; 19:12~26). 사실상 원수사랑의 가르침은 역사상 처음 제시되는 놀라운 내용이다. 예수께서 원수사랑을 가르치신 당대에만 해도 여전히 보복법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함무라비 법전의 명령으로 동해보복을 원칙으로 세간에 회자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나온 보복법이다.  곧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 한 자는 눈을 멀게 하는 등의 성문법으로 유명하다. 보복법이 나오는 모세 오경 중에서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4장, 신명기 19장 등을 차례로 읽어 보라. 이 세 곳에 명시되어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 중 하나이다. 출애굽기 21장 22~2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좋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위기 24장 19~21절도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라고 보복을 선언한다. 모세 오경보다 3백 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에 이 법령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경이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아니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 후손들이 점점 악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이 규례를 주셨던 것 같다. 이 규례는 ‘갚을지라’에 무게를 두어 복수를 명하는 ‘보복법’으로 알려져 있고, 복수를 조장내지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우선 이 규례는 처벌보다 예방에 무게를 두고 이해해야 한다. 신명기 19장은 형제를 해하려고 거짓으로 증언한 자에 대해서 명령한다.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 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19~21절) 이런 신명기의 기록이 처벌과 보복 예방적 이해를 뒷받침해 준다. 행한 대로 행해야 하는 까닭은 공동체 안에 악을 제하려는 데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악을 다시 행하지 않게끔 일벌백계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처벌은, 그가 입힌 가해의 정도 이상을 넘어서는 안 된다. 즉 최소 규정이 아니라 최대 규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아무리 검토해보아도, 아예 보복금지를 넘어서 원수사랑을 가르친 예수말씀을 넘어서는 가르침은 없다. 간디도 비폭력을 앞세웠지만, 무저항은 아니었다. 예수의 원수사랑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어느 인간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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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0
  • [오늘의 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11)
    ▲ 소기천교수   예수의 두 번째 축복은 “주린 자는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마태복음 5:6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라”고 선언한다. 누가복음 6:21이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한 선언에 관해 어찌 가난하여 주린 자만 복이 있을까에 질문이 집중될 수 있으므로, 마태복음은 당대의 공동체가 직면한 해석적 설교의 단면을 제시해준다. ‘의’라는 신학적 단어는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이므로, 누가복음이 그냥 ‘주린 자’라고 한 표현이 원래 예수께서 하신 설교의 원형에 가깝다. 예수의 세 번째 축복은 “우는 자는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예수의 이러한 간절한 가르침을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12:15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권면한다. 에스겔 9:4-6에서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는 경고도 나온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백성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였는데 성전의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교회 안에 복음의 순수함보다는 우상숭배에 눈이 어두운 곳이 많다. 예수의 네 번째 축복은 “그들이 너희를 욕하고… 그들이… 그리고 그들이… 인자 때문에… 너희를‥ 악하다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욕하다”란 단어는 “박해”(누가복음 11:49)란 단어보다는 고난의 정도에 있어서 약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당하였을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같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처음부터 고난과 박해 속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가? 네 번째 축복 선언에 이어지는 예수의 설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이 너희 앞에 있었던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으로, 예수께서는 과거에 선지자들이 당한 고난을 근거로 해서 앞으로 제자 공동체가 당하게 될 고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것은 신명기적 사관에 입각한 동일시로써, 후에 예수말씀 공동체가 자신들의 운명과 구약 선지자들의 운명을 동일시하여 박해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첫 순교를 당한 사람은 아벨이다. 가인에 의해 희생을 당한 아벨의 억울한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의 원한을 갚아 주셨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원한을 직접 갚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심판 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자신이 나서서 복수를 하는 것은 심판 주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잘못된 행동이다. 그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자(창세기 4:10),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끝없는 추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심판 사상은 희생당하셨지만 마지막 때에 심판 주로 오시는 예수께 연결된다. 여기서 언급된 ‘상’은 보상 개념이다. 이런 보상 개념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인 누가복음보다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에 더 잘 드러난다. 유대인의 보상 개념은 천국의 상급과 잘 어울리는 단어이다. 마태는 누가의 4복과는 달리 8복으로 보상을 더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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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8
  • 장로교신학회서 교회직분제도 논의
    ▲ 이날 학회에서 이승구교수는 한국장로교의 직분제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의 구분 통해 장로교 발전 “수석 부목사, 수석 장로란 용어는 유교식 개념으로 옳지 않다” 한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교파는 ‘장로교회’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침례교와 감리교가 다수를 차지하고, 유럽에서는 루터교이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오순절교회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난달 23일 열렸던 한국장로교신학회 제 33회 학술발표회에서 그 단초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날 학회에서 이승구교수(합신대 조직신학)는 「교회의 임직자 선출과 사역분담의 모범적 사례들」이란 주제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는 “한국교회 안에서 직분 문제로 분쟁이 많은 것은 직분을 섬김이 아닌 권력으로 보기 때문이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중세시대 가톨릭에도 임직이 존재했다. 이들은 교회일 만이 아닌 지역 행정도 담당했던 권세가였다”며, “천주교 감독직은 철저한 위계질서에 기초했다. 부제, 사제, 주교(감독), 대주교 순으로 일반 성도는 교회 임직을 맡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중세의 봉건적 질서가 형성됐고, 종교와 권력은 서로 결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시기에 개혁파 교회는 “목사와 장로 위에 있는 주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밝히며 감독직 폐지를 요구했다”고 이교수는 설명했다. 디도서 1:5~7에 근거 감독과 장로가 같은 직임을 주장했고,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를 근거로 개혁파 교회는 목사와 장로직분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그 결과 “치리 사역으로서 장로의 역할이 회복됐다”고 이교수는 강조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장로’로서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로서 장로가 확립돼 지금의 장로교회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교수는 이어서 제임스 패커와 스팁스의 저서 〈그리스도안에 계신 성령〉을 분석했다. 패커는 “우리 시대는 현재 평신도 지도자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우리 제도가 목사에게 부과하는 목회자의 책임을 충분히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 성경의 패턴이 요구하는 것이며, 평신도들에게 동일한 은사를 주심을 알고 믿음으로 이런 모험을 감당할 목회자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이것을 제도적으로 잘 드러낸 것이 장로교이며, 그 제도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잘 드러나게끔 작업해야 한다”고 해설했다. 그래서 “모든 직분 자들은 하나님의 선출을 받은 동등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다”며, “그런데 한국교회는 직분에 있어 종교개혁의 원리가 아닌, 여전히 천주교식 위계질서가 작용하고 있다. 유교적 질서가 이를 강화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주장했다. 특히 “수석 부목사, 수석 장로란 용어는 옳지 않다”고 이교수는 지적했다. 즉 “진정한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직분이 동등하고, 맡은 직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정신은 바로 성경적 직임의 회복이며 위계가 아닌 그리스도 앞에서의 겸손이 직분자에게 요구되는 첫째 덕목이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장로교정치의 근본적 특징에 대해 “교회의 권세는 지교회의 치리 기관 안에 있다”고 강조했다. 즉 “모든 지역 교회가 같이 목회하고, 치리하는 역할은 현 장로교회에서 ‘노회’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는 평신도가 대표로서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제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교수는 “이런 부분에 있어 한국 장로교는 아직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또 “장로 선출은 사사로운 감정에 의탁하는 행위가 아니다”며, “장로 선출에 따라 교회의 운명이 걸렸기에,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심정으로 투표에 임해야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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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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