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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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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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신학] 위기의 한국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문화공동체
      김선일 교수                                                   오직 교회만이 자신들 밖의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가 교회 내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문화의 확립을 토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핵심 실천인 선교와 전도의 문화가 조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선교’의 원래 뜻은 세상으로 보냄 받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목표로 한다. 선교는 세상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삶이라면, 전도는 그 복음에 기초한 개인을 위한 구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선교학자 데이나 로버트(보스턴대)가 비유한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몸과 심장의 관계와 같다. 선교가 총체적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전도는 생명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심장과 같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선교 사역에는 교육, 의료, 환경운동, 정의구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적 실천들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이 없이 선교는 지속적인 추동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나 레슬리 뉴비긴 등에 의해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세상과 이웃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참여라는 인식을 기초로 최근 선교적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에서 기본 착상을 빌려온 것은 맞지만, 복음주의 권의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도를 확대 갱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은 하시는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던진다. 선교적 교회론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선교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적 문화, 즉 선교적인 공동의 생활 양식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에게는 선교적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다”라는 심오한 선언을 남겼다. 나치에 항거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회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이 지역과 이웃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선교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위한 몇 가지 선한 실천들을 간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타인을 향한 관심과 환대의 리듬이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과 집회 지향의 삶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이 아닌, 소그룹과 공동체가 함께 헌신하고 상상하며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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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설교연구모임
      ◇서울신학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6일 이 대학과 온라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란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존 웨슬리의 설교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소 소장인 김성원교수는 “성경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주제로 설교한 것은 성경말씀에 충실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면서, “웨슬리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발견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하라고 하는 마지막 권면은 우리에게 특별히 귀중한 영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파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는 교훈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욱 깊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동행이며 교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를 어디에서나 감찰하시지만, 그 눈은 우리를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하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자의 눈길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편재는 궁극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면서,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며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토의시간에서 강춘이전도사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며 성령님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최병은목사는 “당장 강당에 올라가서 그대로 읽고 전해도 웨슬리의 설교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설교를 읽을 때 감동이 있으며 역동성이 있다. 코람데오의 신앙은 요셉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코람데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의 독대시간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는시간을 통해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류재성목사는 “오늘날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적용과 질문들이 필요하다”면서, “웨슬리가 편재성에 대한 설교를 당시 18세기 영국사회에 대한 것으로 적용했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를들면 소외, 불안, 분열, 갈등 등을 겪는 자들에게 그들 가운데도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우리는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류박사는 “편재하심은 부활신앙에도 중요한데, 이 부활신앙은 도마와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예수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가 있는가 하면, ‘나의 몸을 만지지 말라’라는 명령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의 경험을 강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편재하심이라는 것도 손에 쥐는 것(도마)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어줌, 비어주는 것(막달라마리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10
  • 사단법인 느헤이먀 사역을 소개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신학 연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구현과 한국교회 발전과 개혁에 헌신   사단법인 느헤미야(이사장=이문식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비전으로 2010년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성장해, 2019년에 공신력을 가진 단체로 법인화된 이름이다. 이 단체는 처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퇴보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던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며,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개의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시작한 움직임이 이제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다양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배우고자 몸부림치는 동역자들로 확장되고 있다.   창립 당시 기독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연약해진 이유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에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역시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교의 입문 과정부터 신학대학원의 석사 수준의 다양한 과정이, 학식과 인격에 깊이 있는 교수진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기독연구원은 매 학기제로 수업이 진행 중이며, 진지하고 심도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명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 ’를 구성하게 된 과정이다. 교회협의회는 기독연구원의 신학적 성과들을 공유하면서 각 교회 현장에 적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기독연구원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게 될 목회자 후보생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여, 바른 목회자로 세우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단체는 평신도를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무장하여 교회개혁의 주체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일꾼들을 안수하고 잘 훈련시켜, 각자의 소명에 맡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해져 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명에 지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단체는 △교회 및 단체, 교육기관의 연합사업 △전도, 국내선교외 사회선교 △교회개척 사업 △신학교육 및 목회자 재교육 △남북통일사업과 남북교회의 협력사업 △소속기관의 권익보호와 법률적 보호 △성서연구와 교육 및 보급 △청소년 및 청년 선교사업을 주요사업으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이 작은 사역의 한 걸음이 한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우는 귀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 사역에 동참할 교회와 성도를 초청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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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4
    김현관 교수  ‘산상수훈’은 오늘 날의 경제문제에 이상적이며 실천 가능한 대안   루터의 이와 같은 관점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들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루터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이 곧 자선활동이 되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은 과연 가장 약한 자들의 삶의 필요성에 부합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무분별한 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소비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며, 고아와 과부 및 나그네를 붙드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재정의 주인 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좀 더 책임감 있는 경제활동을 하도록 도전하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여 준다. 둘째로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상적 교훈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 실천원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산상수훈은 이상적이거나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원리에 의한 행동 원칙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로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서 산상 수훈의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한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화와 상대적인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분명한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루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루터의 관점들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체제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루터가 살던 세기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다양한 경제 주체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전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지만, 루터가 당대에 대면했던 세상의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초래한 문제점들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다르지 않다.    루터가 가진 관점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복지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신자유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를 뛰어 넘는 자유이다. 화폐 증식의 경제를 통하여서 개인의 부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위대한 것은 기꺼이 자신의 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고 기독교의 정수가 드러나는 곳마다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는 사회 전체를 변혁시켜 왔다. 로마제국에서의 초대교회가 그러했고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경제적 영역에서 성서적 목소리를 선포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복음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이것이 세기의 경제적 상황에서 루터가 외친 예언자적 목소리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메아리쳐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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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하나님나라 신학과 한국교회 ③
    김형국 목사 행정 조직적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적 교회구조로 전향 필요    만인제사장주의가희석화된것은교회가하나님나라사상을잃었기때문이다.그결과로평신도와 목회자라는구분은평신도와사제라는구교적분리에서크게다르지않게한국교회안에자리를잡고있다.사역자가부르심을받아교회를세우는일에전적으로헌신한일군으로서전문성도있고 그필요성도있지만,사역자가일반성도들보다우월하지도않고,교회를세우는일에사역자의역할과성도의역할이동등 되게있음에도불구하고,성도들은평신도로서사역자를기껏해야보조하는 모습으로전락했다.   한국교회는우리모든성도가하나님나라의백성이며,그하나님나라백성가운데어떠한위계도있지않다는사실을신학적으로정돈해야한다.이는유교적위계질서를하나님의권위와동일시한많은한국교회로서는매우어려운과제이다.그러나이제라도교회를세우고,교회사역을감당하는일에있어서성도의일반적역할과사역자들만이담당해야할전문성이정리되어야한다. 성경은다만 자비량또는타인 또는공동체의후원을받으며전적으로사역을하는사역자가있음을보여주고있는데,그들은성도들보다우월한것이아니라,부르심을따라성도를세우고,성도들이교회를세우게한다고말한다(엡4:12-13).   교회를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자들의공동체라고볼때,교회속에서성도와 사역자의역할을하나님나라의관점에서정립하고실행하는일이시급하다.현재의상태를지속한다면, 하나님나라가드러나는교회보다는일반종교에서보이는사제와일반성도의구분이개신교속에서도그대로보여,하나님나라 운동공동체로서의교회의모습은전혀부각되지않고,하나님나라가갖는급진성역시약화될것이다.뿐만 아니라,하나님께서성도하나하나에게주신잠재력이 그대로 사장되어버리고,교회공동체는교회의최고지도자인목사의한계를넘어서지못해서,하나님나라의운동성은교회라는조직속에갇혀버리고결국사장되어버릴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이땅에오심으로말미암아하나님나라가시작되었고,그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 사람들의공동체가바로교회라는신약성경의가르침은로마가원시기독교를합병한이후로천년이넘는세월동안왜곡되었다.교회는종교기관과조직이되어버렸다.이러한문제를극복하기위한공동체운동들이구교속에서도일어났지만,구교의전체적인흐름을주도한것은정치조직화된 기관으로서의카톨릭교회였다.종교개혁은만인제사장주의등을내세워새로운출발점을만들었으나,불행하게도이렇게정치조직화된교회의모습의한계를극복하는일을완성하지는못하였다.   대부분의개신교는구교가가지고있던교회론에 약간의수정을가하였지고세월이지나가면서종교개혁의정신이승화발전시키기보다는구교의큰틀에서벗어나지못했다.위에서살핀평신도와사역자를나누는구분이이러한변혁하지못한구교의대표적전통이라고할수있다.개신교는다양한교파가생겨나고,그교파는교파나름의조직을위해서교단을형성하고그교단내에서는중립적인의미의정치가있을수밖에없었다.그러나 결국세월이지나면서,개신교의대부분의교단과그교단에속한교회는삶의현장에서사랑을주고받으며살아가는공동체적성격보다는종교조직으로서정치적구조를갖춘기관으로전락하였다.                                                                                                                                                          / 하나님나라복음DNA네트워크 대표, 신학박사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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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말론적 창조론-10
      일곱 인 떼기(4): 일곱째 인(“모든 성도”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요한계시록에서 “장차 될 일들”은 두루마리의 일곱 개 인이 떼어질 때마다 하나씩 드러났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장차 될 일들”의 카이로스적 진행 과정을 그들의 크로노스적 인식체계를 통해 이해하려면.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나눠서 살펴보아야 한다. 두루마리 일들의 기승전결을 보면, 기(起) 단계는 넷째 인을 떼기까지이며, 그것들은 성도들이 장차 땅에서 겪어야 하는 네 가지 환난들이다. 그것의 승(承) 단계는 다섯째 인이 떼어지는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신원을 청원하는 것과 그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장면이다.   전(轉) 단계는 그리스도가 여섯째 인을 떼실 때, 하나님이 그의 승리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승리에는 성도들을 박해한 사탄의 무리를 멸절하신 종말의 심판이 함의되어 있다. 사탄의 무리는 종말의 심판을 피하려고 우왕좌왕한다. 그러나 종말의 심판 때까지 사탄의 무리는 네 가지 환난과 핍박을 자행할 것이다. 땅에서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핍박과 환난을 이겨내야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종말의 심판을 통하여 순교자들의 신원과 복수를 이뤄주시는 한편, 그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예정하신 백성의 수를 채우신다.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성도들과 모든 천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는 예배 장면이 전개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세우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 이뤄지게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심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원인을 찾아보면,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창1:28)을 벗어나서 사탄인 옛 뱀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저버린 아담의 행위는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든 죄악이 되었다. 그러나 진노의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의 창조를 훼손한 사탄에게 있다. 그날에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과 사탄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도록 심판하셨고, 천지 만물에까지 저주를 내리셨다. 종말의 심판에서 하나님은 사탄의 무리를 벌하시고, 진노와 저주를 해소하신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사탄에게 미혹되어 그의 추종자가 될 뿐이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그리스도마저 그들의 모략에 걸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더욱 진노하신 하나님은 종말의 심판에서 옛 하늘과 옛 땅을 불태우시고, 사탄의 무리를 불못에 던지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합한 자에게 영생을 주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그의 나라를 완성하신다.   일곱째 인이 떼어지면 결(結)의 단계이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 하나님은 안식하셔야 한다. 그러나 요한이 보기에 하나님의 안식 시간은 “반 시간쯤 고요”함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두루마리의 인 떼기 외에도 일곱 단계의 “장차 될 일”을 두 번 더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과정에서의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일에 이미 착수하셨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여섯 단계로 나눠 완성하시고, 일곱째 단계에서 안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려면, 기승전결로 나눠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와 평화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공의와 평화를 파괴하는 사탄과 그에게 미혹된 추종자들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은 짧은 안식 후에 제단에서 향연과 함께 땅에서 올라오는 “모든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응답을 땅에 전달하기 위하여 보좌 앞에는 일곱 천사가 이미 나팔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 성도가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은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를 통해 땅에 전달될 것이다. 이제 몇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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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1-05-21
  • 종말론적 창조론-9
      일곱 인 떼기(3): 여섯째 인(144,000과 큰 무리)   그리스도가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은 6장에서 다섯째 인을 떼실 때 보여주신 제단 밑에서 순교자들이 신원을 청원하는 데 대한 응답이다. 땅에는 이미 환난을 가져올 네 마리 말이 내려왔으나, 하나님에게는 그 순교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가 정하신 수를 채우실 일이 남아있다.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수의 사람들에게 인치는 일을 천사에게 맡기신다. 요한계시록에서 인침을 받는다는 말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땅에 나타난다.    그 천사는 그의 일이 끝날 때까지 땅과 바다에 환난을 가져올 천사에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다. 인치는 천사는 요한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을 자의 수는 144,000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환상에서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나와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노래에 이어서 모든 천사가 엎드려 경배하면서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귕하 권능이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찬양한다.   현대에 이르러 위 두 개의 환상을 해석하는 견해는 해석자의 수만큼 많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현대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해석자가 두 개의 환상을 모호하게 상징으로 왜곡하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이방인 중에서 어떤 누구도 위 두 개의 환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저자의 의도대로 문자에 따라 해석했기 때문이다. 천사가 인치는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수가 찰 때까지, 땅에서 네 가지 환난과 병행하면서 “장차 될 일”이다. 그리고 뒤의 환상에서 흰 옷 입은 큰 무리와 모든 천사가 나와서 구원을 찬양하는 장면 역시 최후의 심판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 올리게 될 예배 장면이다.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장차 될 일”은 위 두 개의 환상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요한의 계시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왜곡하는 자들은 사탄의 무리, 곧 거짓 그리스도들이다.   그들의 왜곡된 해석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6장의 기록과 연결하여 두 가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첫째는 여기서 인침을 받은 144,000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지파별로 12,000씩 배정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지파가 새로 개편된 것을 보면, 단이 빠지고 레위가 대신 들어 갔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이탈한 지파를 버리고 구약의 성전 제사가 페기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자 144,000을 상징적 해석의 제물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144,000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제단 밑의 순교자들에게 “형제들”이다.    둘째는 큰 무리가 나타나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이방인 족속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며, 제단 밑의 순교자들에게 “동무 종들”이다. 그들이 입은 흰 옷은 첫째 인을 떼던 때에 나온 흰 말의 색깔처럼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그런 흰색의 옷이 아니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순교 또는 순교에 가까운 엄청난 환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문제는 결론이 이미 다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요한이 기록한 카이로스적 환상의 순서를 그대로 크로노스적 시계열(時系列)에 적용하면, 요한계시록은 난해함을 넘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가 된다. 그 예가 바로 앞의 환상에서 나오는 144,000과 14장 1-5절에 나오는 144,000의 시계열 문제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큰 무리가 부르는 노래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앞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환상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1-05-12
  • 장남철박사, 은진힐링국제교육원
    ◇은진힐링국제교육원 장남철박사는 교회가 치유사역을 하지 않기에 약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 본받기 위한 선지동산 필요하다” 4년 과정 방학 없이 2년 수료, 외국대학 연계 졸업증   은진힐링국제교육원(원장=장남철박사)은 성경적 원리에 따른 자연적 치유를 보급하고 확산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원장 장남철박사는 “창세기 1:31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는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지금 이 시대에 어떤 교회, 어떤 신학교 어떤 목회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실까.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하나님이 너 때문에 좋다고 말씀하시길 원한다”며, “이런 가운데도 이 세상은 세계 보전기구(WHO)와 같은 단체와 기구를 통해서 인류의 건강을 오직 현대의학인 병원과 약을 사용하여 치료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본받기 위한 선지동산이 필요한 때이다. 온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이 시대의 현실을 바로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만 한다. 세상의 빛과 소망이 되며, 천하보다 귀한 사람을 사랑하며 이 뜻을 이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사명감에 불을 붙이는 신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대는 병원의 환자는 갈수록 느는데, 교회는 문을 닫고 있다. 장남철원장은 “교회가 교회의 일을 하지 않고, 치유사역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토록 많은 신학교들이 수많은 목회자를 양성했는데도 답을 찾을 수 없었을까? 신학이 병들었기 때문이다”며, “제2의 암흑시대에 성경적 신학이 꼭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인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전파하신 사역을 부활시켜야 한다. 주님 안에는 영혼 뿐 아니라 우리 육체도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으셨다. 분명히 자연치유의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알아야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은진힐링국제교육원이 개원했다. 장원장은 “오늘날 교회와 신학교가 문을 닫고 있는 상황 가운데 본원이 사역을 시작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하셨다. 이것이 본원의 사명이다”며, “시작이기에 여러 가지로 미약하다. 우에게는 오직 주님밖에 없다. 만사에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때가되면 이루실 것이다”고 강조했다.   은진힐링국제교육원의 과정, 차별성, 혜택에 대해 장원장은 “이곳은 예수님의 3대 사역 중 치유사역을 활성화하여 뉴모델시대의 일꾼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질병도 자연치유적으로 개선될 수 있으며 자연치유 석·박사과정도 있다”고 전했다. 은진힐링국제교육원은 방학 없이 1년 4학기제로 운영되면 2년 만에 졸업이 가능하다. 해당과정은 미국 KSU, 필리핀 사마르 외국대학 연계과정이다. 장원장의 치유사례 자연치유 석·박사과정 수업은 금 17:00-21:3이고 수업방법은 온라인·오프라인 겸하고 있다. 졸업 후에는 힐링센터에서 힐링목회를 할 수 있으며, 치매와 암 등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치유사역을 하게 된다. 이에 더해 장총장이 몽골 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몽골 명예시민상도 받았기에 원생들에게 해외선교의 기회도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성경적 치유, 자연치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장원장은 “어느 날은 내가 감기에 걸었는데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설교하는데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오는 상태가 거의 한달 동안이나 지속되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이때 제 몸의 원리를 알기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감기는 바이러스를 통해 오는 것이고, 내 몸의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바이러스와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면역력을 높이는 것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일반적으로 면역력을 높인다고 생각하면 건강의약품이나 건강기능식품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비용이 발생한다면 누구나 쉽게 치유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만인이 사용할 수 있는 면역력 높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해법을 따뜻한 물 한잔에서 찾았다”고 전했다. 이후 장원장은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따뜻한 물 한잔을 마셨고, 토요일 새벽기도가 없을 때에는 사우나에 갔다. 그랬더니 그 이후로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장원장은 “치료와 치유는 다르다. 치료는 증상을 다스릴 뿐이지만, 치유는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치유는 발병의 원인을 다스려 다시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게 한다. 그러기에 완전한 치료라 할 수 있다. 현대의학은 증상을 쫓아 병을 치료하지만 근원적으로 치유하지는 못 한다”며, “우리 은진힐링국제교육원은 이러한 성경적 자연치유의 제자를 양성하는 곳이다”고 말했다.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1-04-28
  • 복음주의윤리학회서 정기 논문 발표
    ◇복음주의윤릭학는 철저한 방역가운데 대면 및 온라인 방식으로 학술발표회를 진행했다.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회장=신원하박사) 정기학술발표회가 지난 24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온라인 및 대면방식으로 열렸다. 이날 김대중박사(서울성경신학대)가 「지구온난화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다른 대처」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고, 김경호박사(총신대)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란 제목으로 자유발표를 했다.   김대중박사는 “복음주의 우파는 단지 지구온난화 문제뿐만 아니라 종의 소멸, 원자력 발전, 화석연료 사용 등의 각종 환경 관련 이슈들에 있어 환경운동가들의 주장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 환경문제에 대해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고 바른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대응하려면 복음주의 우파가 앞으로 더욱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그리하여 서로 다른 이 두 입장을 양쪽 테이블에 두고 그 사이에서 지혜와 겸손의 품성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라기로는 앞으로 두 학파 간 건전한 논의를 통해 기독교 환경윤리가 더욱 발전하고 좀 더 균형 있는 기독교 환경운동이 일어났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인 사람, 특히 그중에서도 사회의 약자들이 좋은 환경 가운데 건강하게 살아가고,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다스리고 돌보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양낙형박사(성결대)는 논평에서 “본 논문은 복음주의 우파의 지구온난활를 보는 시각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설명한다. 요약하면 긍정적인 면에서 첫째, 복음주의 우파는 기독교 세계관을 보완한다. 복음주의 우파는 환경윤리의 창조론적 근거와 하나님의 형상론적 근거 그리고 죄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둘째, 복음주의 우파는 복음주의 좌파의 시각과 대처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현상은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셋째, 특히 가난한 사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고 평했다.   자유발표에서 김경호박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의 이중 용법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도했다. 첫째, 이론적 타당성의 측면에서, 영역주권론의 이중용법의 불일치의 문제는 일반은총과 반정립이라는 두 가지 용법의 관계를 ‘모순’이나 ‘모호성’이 아니라(헤슬럼, 에드가, 브라트) ‘균형’(반틸, 맥코넬)이나 ‘긴장’(끌라베이크, 자위데마)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영역주권의 불일치의 문제는 세상으로의 ‘참여’를 위한 정체성의 ‘차이’(베르그, 랑홀레이, 프람스마)로, 이해하게 될 때 그 본래의 장점이 잘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둘째, 적용 가능성의 측면에서, 영역주권론의 이중용법의 오용의 문제는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발전과 함께 그 타당성을 인정받은 동시에 재조정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며, “이 말은 영역주권에서 영역책임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대한 고려 없이 영역주권론을 획일적(권위적, 정적, 한 면)으로 적용하게 될 때, 하나님의 주권이 고용주의 주권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영역주권은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고려에 열려 있을 때(영역책임), 또한 하웃즈바르트가 제안한 올바른 해석(규범적, 동적, 두 면)에 의해 재조정될 때, 보다 적실성 있는 전략적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양찬호박사(웨스트민스터대)는 논평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대표 사상인 ‘영역주권의 이중용법’에 대한 입장을 학자들 마다 다양하게 비판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저의 신앙과 신학적 배경으로 볼 때 영역주권론의 이중용법의 불일치 문제는 이론적으로 ‘모순’이나 ‘모호성’이 아닌 ‘균형’과 ‘긴장’이며, 세상으로의 ‘참여’를 위한 ‘차이’로 이해되며, 그리고 적용의 입장에서도 사회경제적 상황의 고려를 통한 ‘영역책임’ 사고로 쉽게 받아드려 진다”고 평했다. 한편 폐회예배에서 설교한 신원하회장은 “코로나팬데믹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학문연구와 가르치는 사역에 더욱 최선을 다하자”고 격려했다. 이상원 전 회장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귀한 점심과 간식으로 섬겨주신 신원하원장님과 고신대 측에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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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1-04-25
  • [영적 거장들의 기도-1] 한나의 기도
      1. 서론: 한나의 생애와 신학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하여 특별한 뜻을 갖고 계실 때에 그 선택된 한 사람의 탄생 이전에 많은 예비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에 의해 태어나는 인물은 대부분 그 인물의 잉태부터 출산 때까지 고통스런 상황이 펼쳐지거나 심상치 않은 일을 겪게 된다.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멸시 받거나 낙담하다가 기도함으로 자식을 얻게 되는 내용은 성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식이 없던 상황에서 기도했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구약성서에 ‘한나’와 ‘사라’가 있고, 신약성서에는 ‘엘리사벳’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을 잉태하지 못해 고통을 겪다가 오랜 기간 인내하며 기도한 결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각각 ‘사무엘’, ‘이삭’, ‘세례요한’과 같은 특별한 자식을 얻었다.   한나(Hannah)는 엘가나(Elkanah)의 부인이었다.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사는 에브라임 사람이었다. 엘가나에게 부인이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첫째 부인이 한나였고, 브닌나는 둘째 부인이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남자들이 둘 혹은 그 이상의 아내들을 거느렸다는 증거들이 있다.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들의 경우, 그 관행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요인들에 의한 것이었다고 설명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두 번째 부인을 얻는 것은 첫 번째 부인의 불임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신 21:15-17은 두 사람 모두 자녀를 낳았을 때의 상속 관행들을 법제화 한다). 하나님께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셨을까? 아브라함, 야곱, 기드온, 다윗, 솔로몬 등이 모두 중혼을 했고, 모세의 율법도 일부다처제를 묵인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 즉 신명기 21장 15-17절의 본문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한 명의 남편이 여러 명의 부인과 결혼하는 풍습을 허용하신 걸로 오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 뜻은 일부일처제이며, 신약 성경에서도 이 점에 관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딤전 3:12). 중혼을 묵인한 것과 적극적으로 그것이 옳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즉 일부일처제는 창조의 원리(창세기 2:24)인 반면에 중혼은 명백한 죄악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신 이외에 또 다른 아내가 있는 여자의 일생은 어떤 삶이었을까? 가난보다 힘들고 척박한 삶이 아닐까? 한나의 삶이 바로 그런 고통스런 삶이었다. 세상 일이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다 해결이 된다면 이렇게 복잡한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엘가나도 한나의 불행을 보면서 행복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Peninnah). 그녀는 그녀대로 행복하지 않았다. 브닌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한나를 괴롭힌다. 사무엘서는 초장부터 한 남자에게 아내가 둘이라는 암울함이 배경이다. 이 암울한 배경이 바로 한나의 삶의 배경이었다.   일부일처제를 최초로 파괴한 인물은 가인 계통의 라멕이다. 즉 라멕은 구약성서에서 최초로 두 아내를 맞이한 자다. 창세기 2장 24절(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에는 신성한 결혼의 원리가 나타나 있다. 이에 반해 불과 2장 뒤로 가면 창세기 4장 19-24절에 결혼 붕괴의 이야기가(라멕의 두 아내 이야기) 나타난다. 사무엘상에서는 결국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브닌나 모두 행복하지 않은 일그러진 가정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고, 한나의 삶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사무엘서 1장 2절에 의하면,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브닌나는 축복받는 존재이고, 한나는 불임의 벌을 받는 존재같이 여겨질 수도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은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사상이었다.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로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악(죄)을 행하면 악(죄)의 결과로서 하나님께 벌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사상이다. 그렇기에 한나의 불임은 한나 또는 엘가나의 죄에 기인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했던가? 사무엘서 1장에서도 결국 고난이 축복이 되었다.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사상은 사무엘서 이외에도 성경의 여기 저기(욥기 등)에 살짝 숨어있는 관념 중 하나이다. 결혼 생활에서의 한나의 불임도 겉으로 보기에는 죄에 대하여 받는 벌로 비춰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사실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1장 5절에서처럼 한나의 불임은 하나님께서 한나로 하여금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불임의 고통을 준 것은 한나에게 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한나의 불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계획안에 있었던 일이었고,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한나가 불임으로 인한 고통 중에 통곡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서원기도까지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1:5). 결국 한나가 임신하지 못해 자식을 낳지 못한 일도 훗날에 사무엘을 낳게 되는 큰 복을 받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것이다.   엘가나는 예배의 사람이었다. 매 해 자기의 성읍에서 나와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1:3).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생명을 잉태하여 자녀를 낳는 일을 아직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로 브닌나가 한나를 업신여겼었을까? 자식은 브닌나에게만 있었음에도 남편 엘가나의 사랑이 한나에게 편중되는 것에 대한 브닌나의 질투에 의해서였을까? 브닌나는 한나를 심히 격분케 했고 괴롭게 하였다(1:6). 엘가나는 한나를 편애하여 분깃을 두 배로 주면서 티를 냈고, 이에 브닌나는 한나를 더 미워하게 된 것 같다. 어쨌든 브닌나가 한나를 격분시키자, 한나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먹지 아니하였다. 이에 남편 엘가나는 왜 먹지 않고 울기만 하고 슬퍼하는지 물어 보기도 하고, 자신이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고 했다(1:8). 한편 한나라는 이름은 ‘은혜(grace)’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매력적인(gracious)’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한나는 그 이름대로 실제로도 매력적인 여성이었을까? 그녀의 이름의 의미대로 한나가 매력적인 여성이라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까? 결국 한나는 하나님께 사무엘을 낳는 은혜를 입게 되고, 이후 6자녀들을 더 낳는 축복을 받는다(2:21).   2.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1장 9-18절에 나타난 기도의 특징들   하나님만이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음을 깨달은 한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나의 기도’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한나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다. 어떤 간절함이었을까? 성경에 보면 여호와 앞에서 운 사람들이 그 눈물의 힘으로 승리한 경우를 보게 된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를 통해 죽으리라는 통보를 받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심히 통곡했다(왕하 20:2-3).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보아주셨고(왕하 2:5) 그는 15년을 더 사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의 배경은 사무엘상 1장 9절에 나타난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10절에서는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때 한나의 기도의 첫 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즉 한나의 기도는 통곡하는 기도이다. 통곡이란 무엇인가? 통곡(痛哭/慟哭)은 “소리를 높여 슬피 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히브리어로 ‘통곡’이라는 말은 강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나가 보통으로 통곡한 것이 아니라 아주 심히 통곡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한나의 기도는 여호와 앞에서 울면서 더 깊어지는 기도였다. 성경에 보면 한나가 울었다는 표현이 7절, 8절, 10절에서 세 번이나 등장한다. 그런데 7절과 8절의 눈물이 홀로 서러워서 흘린 눈물이었다면, 10절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울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통곡했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두 번째 한나의 기도는 서원하는 기도이다. 서원하는 기도란 맹세하는 기도이다. 즉 하나님과 1:1의 약속을 하는 기도이다.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11절)라는 말로 자신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잊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을 표현했다. 한나의 서원의 내용은 1장 11절(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에 나타난다.   세 번째 한나의 기도는 오래하는 기도였다. 그동안 부흥집회라든가 교회 여러 곳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왔다. 重言復言(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은 성서 중 마태복음 6:7-8에 나타난다. 한자로 중언부언이라는 말에서 중은 중복되다 할 때의 중(重)이고 부(復)는 ‘다시’라는 의미가 있다, 즉 반복하는 의미로 부(復)자를 사용한다. 이 말 때문에 여러 말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여러 말을 반복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기도하는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말 저말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다른 본문으로 예를 들자면 누가복음 18장 1-8절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가 참고가 될 수 있다. 네 번째 입술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기도를 했다. 한나는 술에 취한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며 심정을 토로하는 기도를 했다.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13절)라는 말인데, 이 말은 입으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했다는 뜻이다.   다섯 번째 원망과 앙갚음 대신 기도했다. 한나는 자신을 격분하게 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만드는 브닌나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았다. 한나는 마음이 괴롭고 원통하며 격분될 때 오히려 기도했다(1:6, 7, 10, 16).   여섯 번째 근심들을 하나님께 다 맡기는 기도를 했다. 그러했기에 한나의 얼굴에는 근심 빛이 사라졌다고 한다(1:18). 즉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먹고 일상생활을 하며 다시는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고 한다.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선포했을 때, 한나는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랐다.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했을 때. 한나는 걱정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아닌 평안한 마음으로 갔을 것이다. 한나는 근심들을 하나님께 다 맡기는 기도를 했다. 그러했기에 한나의 얼굴에는 근심 빛이 사라졌다(1:18). 즉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먹고 일상생활을 하며 다시는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고 한다. ‘평안한 마음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께 근심과 걱정과 아픔과 회한 등 모든 것을 맡겼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간구를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시 116:1). 즉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인내하는 자에게는 당신의 적절한 응답을 분명히 허락하신다(약 1:4).   3. 한나의 기도 그 내용: 사무엘상 2장 1~ 10절   한나의 기도의 내용은 사무엘상 2장 1-10절을 통해 알 수 있다. 한나가 이런 찬양을 지어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한나의 찬양은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한나의 감사 찬송은 신약의 마리아에 의해 되풀이 되었다(눅 1:46-55). 이제 그녀에게 공허와 비참함과 수치는 다 지나가고 생명과 기쁨, 그리고 존귀가 찾아왔다.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첫째로 한나의 기도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감사의 기도였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내 뿔)이 높아졌음을 고백하는 기도였다. 여기서 뿔이란 ‘강력한 능력’을 상징한다(단 7:21 참조). 한나는 사무엘을 낳은 것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높여 주셨음을 감사하고 있다. 원수들을 향하여 입이 크게 열렸다는 것은 이제는 멸시하는 자들 앞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게 되었다. 한나는 주님의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기도를 했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둘째로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기도였다. 하나님 같은 반석은 그 어디에도 없고, 하나님 이외에는 거룩하신 이가 없으며, 하나님 밖에 다른 존재는 없다는 고백을 하는 기도였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고전 10:4).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셋째로 교만한 자에 대한 경고의 기도였다. 한나는 타인들(청중들, 독자들)을 향하여 종용한다. 즉 자신을 향해 교만한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한나는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행동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것과 같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마 10:30). 아무리 용기가 충만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이는 그 용사의 활이 꺾인다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멸망하게 되고 넘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잠 16:5). 교만은 멸망의 지름길이다(잠 16:18). 결국 풍족하던 자들도 이제는 양식이 없다. 그러므로 품을 팔러 다닌다. 하지만 주리던 자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2:5). 또한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한나는 이제 노래한다. 자신은 자녀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두었던 자는 이제 쇠약하다(2:5)고 승리의 노래를 한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넷째로 한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찬양하며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스올에 내려가게도 하시고 스올에서 올리시기도 하신다는 기도이다. 한나는 모든 만물들은 여호와의 것이며 모든 것들을 세우신 이도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가난한 자를 일으키시고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찬양하는 기도를 했다.   9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당할 자가 없다는 기도를 한다. 철저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고 섬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이다. 거룩한 백성들의 발을 지켜주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악인들을 잠잠케 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찬양하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완전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표현을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라고 표현했다. 하늘에서 우레로 대적자들을 치신다고 하신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심을 다시 일깨워준다. 한나는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그 분의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여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했다.   4. 결론: 기도의 교훈들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삶 전체를 주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심판하시고 때로는 축복하시면서 당신의 예정하신 목적을 향하여 역사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은 그들이 세상의 빛이 되도록 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메시야의 강림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범죄 한 백성 위에 임박한 진노를 게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제사장과 은혜를 저버린 백성들을 심판하신다는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사무엘상 1장과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이야기에서 개인과 민족의 이야기가 얽혀 있지만 이 모두를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직 한 분 이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범죄로부터 흉악하고 불순종하는 민족의 큰 죄악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자비와 공의로 다스리신다. 이와 같은 사상을 갖고 있는 민족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섭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알아 본 한나의 기도에서 실천할 사항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로 슬프고 괴로울 때에 기도해야 한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울 때 슬플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리고 사무엘을 얻은 후에 그가 서원한 대로 이행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8) 둘째로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하고, 오래 기도해야 한다. 한나의 기도에서 배웠듯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오래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인격보다는 집합적 인격을 강조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도덕, 종교 문제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가족적, 사회적, 민족적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주실 때 개인적인 기도의 응답으로만 주시지 않았다. 즉 한나도 결국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얻었지만 이는 개인적인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한나의 아들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사사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사사로 세워 주신 분도 하나님 이셨고, 왕국 건설을 위한 선지자 중 첫 선지자(모세 이후로)로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 이셨다. 하나님께서는 한나가 브닌나로 인해 격분될 때, 통곡하며 탄식하며 기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태를 통해 위대한 영적지도자 사무엘을 주셨다. 사사시대의 어둠을 거둬내시고 빛을 주셨다. 아이를 낳지 못해 고통당했던 한나는 그저 자신에게도 아이를 허락해 달라고 개인적인 기도를 했지만, 하나님은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될 아이를 세워가셨다. 넷째로 근심과 걱정 그리고 고통이 있을 때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한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갔다. 한나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완전한 계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통이 있고 근심과 걱정 등이 있을 때,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토로하고 맡기는 기도를 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성숙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이 이뤄 가신다. 다섯째로 사람과 다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한나가 브닌나와 다투지 않은 것처럼, 사람과 다투지 말고 염려와 고통과 억울한 심정을 다 주님께 아뢰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마지막으로 사무엘서에 신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다. 계시와 이스라엘 선택의 문제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다. 엘리와 사무엘, 사울과 다윗이 섬긴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슨 표(10:2-9)나, 꿈이나, 신탁이나, 예언(26:6) 등으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셨고,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힘이셨다(4:21).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며,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성공의 유일한 원인이시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다. 병고(삼하 21:1-14)도 죽음(6:19)도 하나님의 의지에 달렸으므로, 이 세상의 역사 뿐 아니라 생명과 사망에까지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으로 주관하신다(1:5). 절대자이신 하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사람에게 협력을 요구하시는 것이다(15: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 전서 5:7   기도: 우리가 한나의 기도를 배워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하고, 오래 기도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서원하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는 기도를 하여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에도 감사하고, 한나처럼 욥처럼 축복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예진 박사    평택대학교(B.A)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M.A 구약신학 수료)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M.A구약신학 , M.Div) 피어선신학전문댜학원(Ph.D 구약신학) 순복음 목양교회 부목사 시인• 수필가(한국문인협회 2014년 등단) 《칼빈신학과 한국신학》(2009) 《우리들이 좋아하는 푸른 시 100선》 1.2.3.4(2017, 2018, 20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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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5
  • 종말론적 창조론-8
      일곱 인 떼기(2): 다섯 째 인   그리스도가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요한에게는 살아 있는 순교자들이 제단 밑에서 탄원하는 모습이 환상으로 열렸다. 그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다. 땅에서 순교를 당한 그들이 하늘의 제단 밑에서 무언가를 탄원하면서 살아 있다는 계시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는 핵심은 세 가지 문제의 이해에 있다. 첫째 문제는 그들의 영혼이 언제부터 하늘의 제단 아래에 살아 있었는가이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 의하면, 죽은 자는 하나님의 생기가 닿으면 살아날 수 있다(겔37:9). 그래서 구약성경만을 믿는 유대교인은 죽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생기가 깨워주기를 기다리며 잠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가르친다(고전15:20).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부활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직후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마27:52-53).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살아나신 분이라면, 제단 밑의 영혼들은 그 이후에 부활한 자들이다.   둘째 문제는 그 순교자들의 정체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 중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보다 먼저 죽임을 당한 순교자는 없었다. 그리스도는 생전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선언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밝혀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언급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로 죽임을 당했던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쉬면서 그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무 종들과 형제들”을 기다리라는 말씀에서도 뒷받침된다.   셋째는 그들이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라는 신원(伸冤)을 하나님이 언제 이뤄주시냐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각각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그들의 신원에 대해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자기처럼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6:11)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죽임을 당하여 그 수”를 채워야 할 “동무 종들과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성도들 이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순교를 당하는 성도들은 바로 하늘에서 부활한다. 요한은 그런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부른다(계20:4-6).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수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도들이 순교를 당해야 하는지, 그 수가 차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들이 어느 때까지 쉬면서 기다려야 하는지 하나님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수가 차고, 그 순교자들의 신원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때 그날에 대해 섣불리 말하거나, 그런 말을 듣고 미혹되는 자는 그 순간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그들에게 둘째 부활은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이 될 것이다. 불못은 처음 창조 이후에 있었던 인간의 죄와 저주를 불태워 없애는 용광로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했다”(벧전1:8-9).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처음 창조에 대해 제대로 아는 지식이 없는 자가 마지막 날에 새로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의 복을 얻는 지식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1-04-25
  • 종말론적 창조론-7
      일곱 인 떼기(1): 넷째 인까지 4/11   요한계시록에서 “장차 될 일”이란 종말의 날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가 새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이다. 그러나 그 복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마귀와 그 무리에게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멸망의 저주이다. 마귀는 그동안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에게 죄를 짓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제사장들을 미혹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하여 진노하신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듯이 마귀와 그 무리를 하늘에서 쫓아내셨다. 하나님의 군대에 의하여 이 땅에 쫓겨 내려온 마귀와 그 무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우는 사자처럼 날뛰고 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무리는 성도들을 미혹하거나 핍박을 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마귀의 미혹을 끝까지 이겨낸 성도들에게 영생의 약속과 그의 백성이 되는 소망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장차 될 일”은 마귀 무리의 미혹과 핍박을 이기고 자기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싸움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나침판이다. 그날에 하나님은 마귀에게 미혹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옛 땅과 옛 하늘을 불태워 버리신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날에 마귀의 유혹에 빠졌거나 핍박에 굴복해 버린 자에게는 마귀의 무리와 함께 불못에 던져지는 판결문이 된다. 요한계시록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계시자이신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대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장차 될 일”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24장, 막13장, 눅11장). 요한계시록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왕위에 즉위하신 후 요한에게 “장차 될 일”을 계시해주신 것이다. 그 두 가지의 말씀을 비교해보면, “장차 될 일”이 분명하게 이해된다.   땅에서 ”장차 될 일“은 그리스도가 두루마리의 첫째 봉인을 떼면서 시작해서 넷째 봉인을 떼기까지 나타나는 네 마리 말이 상징하고 있다. 네 마리 말의 상징을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순서대로 비교해보면, 거짓 그리스도, 전쟁, 기근,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마귀의 무리가 성도들을 미혹하고 환난에 빠뜨리는 무기로 사용된다. 성도들은 땅에 살아있을 때, 누구나 마귀의 시험을 겪는다. 그리스도는 악의 화신인 마귀 무리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6:13). 마귀의 무리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마24:14)할 것이다. 끝까지 마귀의 유혹과 환난을 이기는 자만이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적은 마귀의 무리에 속하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그리고 거짓 교회의 지도자 등이다. 그리스도는 종말의 시기에 대하여 그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마24:14)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여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는 도망”하라고 말씀하셨다(마24:15-16). 다니엘의 예언은 BC. 167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인용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헤롯 성전이 파괴되는 일로 성취되었다. 그때 환난의 참상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것이었고,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그때 시작되었다.   거짓 선지자 등의 마귀 무리는 종말의 시기를 왜곡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에 초점을 맞춰놓고, 다니엘서에서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아낸다. 거짓 교회는 말씀을 왜곡하여 새로운 제3 성전의 건축이 필요하다고 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면 성도들이 가진 영생의 소망은 물거품처럼 깨질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은 언제 온다는 것인가?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1-04-07
  • 종말론적 창조론-6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과 마귀   요한은 하늘교회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왕으로 즉위하시는 예배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린 양”은 땅에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이 그리스도가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면서 나타나는 환상을 보니, 그 두루마리에 씌어 있는 “장차 될 일”은 땅에서 그리스도를 죽인 마귀와 그 무리에게 진노하신 주 하나님이 기획하신 것이었다. “장차 될 일”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한에 의하면 진노하신 주 하나님은 마귀와 그 무리를 심판하여 불못에 던지시고, 새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백성으로 삼아 영원한 왕국을 만드신다.   그러나 “장차 될 일”은 땅으로 쫓겨난 마귀와 그 무리가 그리스도가 세우신 일곱 교회의 성도들을 핍박과 미혹하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스토리는 마귀와 그 무리의 핍박과 미혹을 이기는 성도들이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 백성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진다. 교회 성도들은 주 하나님이 기획하시면, 어떤 일이라도 땅에서 역사적 현실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교회와 성도들의 소망을 실현하는 일에 가장 큰 방해꾼이 마귀와 그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냐고 하면 마귀와 그 무리는 모두 핍박과 미혹으로 교회와 성도를 공격하면서 성도의 소망 성취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마귀의 정체를 요한의 수준만큼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이 부족한 자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요한계시록의 문자들은 읽는 자가 상상하는 대로 왜곡 해석된다. 왜곡된 해석의 효과는 그런 해석을 믿는 성도들의 순전한 소망을 날려버릴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마귀는 ‘큰 용, 옛 뱀, 사탄’이라고도 불리면서 ‘온 천하를 꾀는 자’이고, 하늘에서 미카엘과 싸워서 패하여 그의 무리와 함께 땅으로 쫓겨 내려왔다(계12:7-9).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방해했으나(창3:4-5),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였다(욥1:7). 마귀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막으려고 광야에서 그를 미혹했으나 실패했다(마4:1-10), 그러자 마귀는 유대인 대제사장들을 미혹하여 그들이 그리스도를 로마 총독에게 참소해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했다(마27:1-50). 마귀는 하늘에서 밤낮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을 참소하던 자였다(계12:10). 하늘 전쟁에서 마귀를 이긴 천사들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즉위식에서 그런 사실을 새 노래로 찬송했다(계5:11-12). 마귀와 그 무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거나 미혹하여 그들 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 마귀의 무리는 과학적 무신론을 무기로 삼아 권세를 잡고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면서 성도들을 핍박한다. 마귀의 무리는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직통 계시 또는 성령을 받은 선지자를 가장하여 요한계시록을 왜곡 해석한다. 요한에 의하면 진노하신 하나님은 마귀와 그 무리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거나, 그들에게 미혹된 성도들까지 그의 백성에서 제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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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1-03-29
  • 종말론적 창조론-5
        하늘교회에서 열린 그리스도의 즉위식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보낸 후에 요한은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요한은 하늘교회에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 광경을 보았다. 요한에 의하면 보좌에 앉으신 주 하나님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 같았다. 요한이 본 주 하나님은 형체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빛으로 계시는 분이시다. 주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무지개가 둘러있는데, 그것은 땅의 죄악을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다는 언약의 표징이다(창9:13). 요한에 의하면 그분은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로 말씀하신다. 보좌 앞에는 일곱 영의 불이 일곱 등에 켜져 있고,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보좌 주위에는 앞 뒤에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 보좌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교회에는 24명의 장로가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각자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금관을 바쳐 경배하면서 “전능하시며,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주 하나님이 그들의 창조주이심을 찬양한다. 그리고 요한은 하늘교회의 예배를 한 번 더 보게 된다.   보좌에 앉으신 주 하나님이 “장차 될 일”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들고 일곱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를 찾으신다. 그때 요한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일곱 뿔과 일곱 영의 눈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그 어린 양은 주 하나님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땅의 생명을 모두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 하나님은 어린 양에게 “장차 될 일”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넘겨주신다. 그것은 주 하나님이 어린 양에게 세상을 다스릴 왕권을 주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에 따라 어린 양의 왕위 즉위식이 거행된다, 먼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왕이 되신 어린 양 앞에 엎드려서 새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에게 드리시고,”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고 찬양한다. 그러자 어느새 만만 천천 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고 찬양한다. 세 번째는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고 찬양한다.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그의 즉위식 예배가 네 생물이 아멘 하고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면서 끝날 때까지 지켜보게 하셨다.   요한이 하늘에서 본 위 첫째 예배 장면은 하늘교회에서 항상 있는 예배이다. 그러나 둘째 예배 장면은 땅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승천하신 후에 하늘교회에서 이미 있었던 즉위식 예배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하늘교회에서 요한에게 이미 지나간 즉위식 예배 장면을 굳이 다시 보여주시면서 전달하시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땅에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앞으로의 세상을 다스릴 왕권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땅의 교회 성도들에게 분명히 알려주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이같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과 “장차 될 일”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은 계시록의 이해에 올바른 등대 역할을 하게 된다. 즉위식을 마치신 그리스도는 곧 두루마리에서 일곱 인을 떼심으로써 하늘과 땅에서 “장차 될 일”을 시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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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1-03-15
  • 3.29일, 성서학연구원서 성서학심포지움
      장로회신학대학교 성서학연구원(원장.소기천박사.사진)은 3월 29일 17:00 ~ 19:00까지 제106회 성서학 심포지엄을 온라인으로 개최한다. ‘예배의 자유와 동성애에 대한 대책’이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심포지엄에는 성서학을 전공하는 대학원 석·박사과정 학우 및 관심 있으신 모든 사람들은 참여할 수 있다.   발제자는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종교의 자유)과 조영길 전 법관(동성애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회의 복음적 대응) 등이다. 장신대 홈페이지[이거모임]에서 신청한 사람에 한해 링크주소를 문자로 발송한다.   소기천교수는 “예배의 자유와 동성애 대책은 지금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과제이다. 여기에 대한 성경적이고 법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최고의 강사들이 나서는만큼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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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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