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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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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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신학] 위기의 한국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문화공동체
      김선일 교수                                                   오직 교회만이 자신들 밖의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가 교회 내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문화의 확립을 토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핵심 실천인 선교와 전도의 문화가 조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선교’의 원래 뜻은 세상으로 보냄 받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목표로 한다. 선교는 세상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삶이라면, 전도는 그 복음에 기초한 개인을 위한 구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선교학자 데이나 로버트(보스턴대)가 비유한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몸과 심장의 관계와 같다. 선교가 총체적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전도는 생명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심장과 같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선교 사역에는 교육, 의료, 환경운동, 정의구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적 실천들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이 없이 선교는 지속적인 추동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나 레슬리 뉴비긴 등에 의해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세상과 이웃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참여라는 인식을 기초로 최근 선교적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에서 기본 착상을 빌려온 것은 맞지만, 복음주의 권의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도를 확대 갱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은 하시는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던진다. 선교적 교회론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선교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적 문화, 즉 선교적인 공동의 생활 양식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에게는 선교적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다”라는 심오한 선언을 남겼다. 나치에 항거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회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이 지역과 이웃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선교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위한 몇 가지 선한 실천들을 간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타인을 향한 관심과 환대의 리듬이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과 집회 지향의 삶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이 아닌, 소그룹과 공동체가 함께 헌신하고 상상하며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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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설교연구모임
      ◇서울신학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6일 이 대학과 온라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란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존 웨슬리의 설교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소 소장인 김성원교수는 “성경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주제로 설교한 것은 성경말씀에 충실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면서, “웨슬리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발견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하라고 하는 마지막 권면은 우리에게 특별히 귀중한 영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파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는 교훈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욱 깊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동행이며 교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를 어디에서나 감찰하시지만, 그 눈은 우리를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하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자의 눈길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편재는 궁극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면서,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며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토의시간에서 강춘이전도사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며 성령님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최병은목사는 “당장 강당에 올라가서 그대로 읽고 전해도 웨슬리의 설교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설교를 읽을 때 감동이 있으며 역동성이 있다. 코람데오의 신앙은 요셉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코람데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의 독대시간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는시간을 통해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류재성목사는 “오늘날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적용과 질문들이 필요하다”면서, “웨슬리가 편재성에 대한 설교를 당시 18세기 영국사회에 대한 것으로 적용했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를들면 소외, 불안, 분열, 갈등 등을 겪는 자들에게 그들 가운데도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우리는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류박사는 “편재하심은 부활신앙에도 중요한데, 이 부활신앙은 도마와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예수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가 있는가 하면, ‘나의 몸을 만지지 말라’라는 명령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의 경험을 강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편재하심이라는 것도 손에 쥐는 것(도마)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어줌, 비어주는 것(막달라마리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10
  • 사단법인 느헤이먀 사역을 소개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신학 연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구현과 한국교회 발전과 개혁에 헌신   사단법인 느헤미야(이사장=이문식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비전으로 2010년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성장해, 2019년에 공신력을 가진 단체로 법인화된 이름이다. 이 단체는 처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퇴보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던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며,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개의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시작한 움직임이 이제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다양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배우고자 몸부림치는 동역자들로 확장되고 있다.   창립 당시 기독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연약해진 이유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에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역시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교의 입문 과정부터 신학대학원의 석사 수준의 다양한 과정이, 학식과 인격에 깊이 있는 교수진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기독연구원은 매 학기제로 수업이 진행 중이며, 진지하고 심도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명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 ’를 구성하게 된 과정이다. 교회협의회는 기독연구원의 신학적 성과들을 공유하면서 각 교회 현장에 적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기독연구원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게 될 목회자 후보생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여, 바른 목회자로 세우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단체는 평신도를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무장하여 교회개혁의 주체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일꾼들을 안수하고 잘 훈련시켜, 각자의 소명에 맡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해져 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명에 지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단체는 △교회 및 단체, 교육기관의 연합사업 △전도, 국내선교외 사회선교 △교회개척 사업 △신학교육 및 목회자 재교육 △남북통일사업과 남북교회의 협력사업 △소속기관의 권익보호와 법률적 보호 △성서연구와 교육 및 보급 △청소년 및 청년 선교사업을 주요사업으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이 작은 사역의 한 걸음이 한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우는 귀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 사역에 동참할 교회와 성도를 초청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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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4
    김현관 교수  ‘산상수훈’은 오늘 날의 경제문제에 이상적이며 실천 가능한 대안   루터의 이와 같은 관점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들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루터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이 곧 자선활동이 되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은 과연 가장 약한 자들의 삶의 필요성에 부합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무분별한 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소비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며, 고아와 과부 및 나그네를 붙드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재정의 주인 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좀 더 책임감 있는 경제활동을 하도록 도전하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여 준다. 둘째로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상적 교훈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 실천원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산상수훈은 이상적이거나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원리에 의한 행동 원칙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로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서 산상 수훈의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한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화와 상대적인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분명한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루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루터의 관점들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체제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루터가 살던 세기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다양한 경제 주체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전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지만, 루터가 당대에 대면했던 세상의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초래한 문제점들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다르지 않다.    루터가 가진 관점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복지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신자유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를 뛰어 넘는 자유이다. 화폐 증식의 경제를 통하여서 개인의 부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위대한 것은 기꺼이 자신의 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고 기독교의 정수가 드러나는 곳마다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는 사회 전체를 변혁시켜 왔다. 로마제국에서의 초대교회가 그러했고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경제적 영역에서 성서적 목소리를 선포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복음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이것이 세기의 경제적 상황에서 루터가 외친 예언자적 목소리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메아리쳐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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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하나님나라 신학과 한국교회 ③
    김형국 목사 행정 조직적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적 교회구조로 전향 필요    만인제사장주의가희석화된것은교회가하나님나라사상을잃었기때문이다.그결과로평신도와 목회자라는구분은평신도와사제라는구교적분리에서크게다르지않게한국교회안에자리를잡고있다.사역자가부르심을받아교회를세우는일에전적으로헌신한일군으로서전문성도있고 그필요성도있지만,사역자가일반성도들보다우월하지도않고,교회를세우는일에사역자의역할과성도의역할이동등 되게있음에도불구하고,성도들은평신도로서사역자를기껏해야보조하는 모습으로전락했다.   한국교회는우리모든성도가하나님나라의백성이며,그하나님나라백성가운데어떠한위계도있지않다는사실을신학적으로정돈해야한다.이는유교적위계질서를하나님의권위와동일시한많은한국교회로서는매우어려운과제이다.그러나이제라도교회를세우고,교회사역을감당하는일에있어서성도의일반적역할과사역자들만이담당해야할전문성이정리되어야한다. 성경은다만 자비량또는타인 또는공동체의후원을받으며전적으로사역을하는사역자가있음을보여주고있는데,그들은성도들보다우월한것이아니라,부르심을따라성도를세우고,성도들이교회를세우게한다고말한다(엡4:12-13).   교회를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자들의공동체라고볼때,교회속에서성도와 사역자의역할을하나님나라의관점에서정립하고실행하는일이시급하다.현재의상태를지속한다면, 하나님나라가드러나는교회보다는일반종교에서보이는사제와일반성도의구분이개신교속에서도그대로보여,하나님나라 운동공동체로서의교회의모습은전혀부각되지않고,하나님나라가갖는급진성역시약화될것이다.뿐만 아니라,하나님께서성도하나하나에게주신잠재력이 그대로 사장되어버리고,교회공동체는교회의최고지도자인목사의한계를넘어서지못해서,하나님나라의운동성은교회라는조직속에갇혀버리고결국사장되어버릴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이땅에오심으로말미암아하나님나라가시작되었고,그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 사람들의공동체가바로교회라는신약성경의가르침은로마가원시기독교를합병한이후로천년이넘는세월동안왜곡되었다.교회는종교기관과조직이되어버렸다.이러한문제를극복하기위한공동체운동들이구교속에서도일어났지만,구교의전체적인흐름을주도한것은정치조직화된 기관으로서의카톨릭교회였다.종교개혁은만인제사장주의등을내세워새로운출발점을만들었으나,불행하게도이렇게정치조직화된교회의모습의한계를극복하는일을완성하지는못하였다.   대부분의개신교는구교가가지고있던교회론에 약간의수정을가하였지고세월이지나가면서종교개혁의정신이승화발전시키기보다는구교의큰틀에서벗어나지못했다.위에서살핀평신도와사역자를나누는구분이이러한변혁하지못한구교의대표적전통이라고할수있다.개신교는다양한교파가생겨나고,그교파는교파나름의조직을위해서교단을형성하고그교단내에서는중립적인의미의정치가있을수밖에없었다.그러나 결국세월이지나면서,개신교의대부분의교단과그교단에속한교회는삶의현장에서사랑을주고받으며살아가는공동체적성격보다는종교조직으로서정치적구조를갖춘기관으로전락하였다.                                                                                                                                                          / 하나님나라복음DNA네트워크 대표, 신학박사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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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적 거장들의 기도
    Ⅰ. 버나드의 생애와 신학   버나드는 1090년 프랑스 디용에서 가까운 폰테인에 있는 부르건디안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버나드의 아버지 테셀링은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출정하여 전사했고, 버나드가 17세 되는 해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영적인 후원자인 경건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버나드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부터 더욱 세속적인 관심에서 떠나 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21세 때 어느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후에 버나드는 평생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그의 친구 윌리엄((William of St. Thierry)은 버나드가 세상과 결별하고 수도사가 된 것은 육체의 시험들을 피하고 영적인 온전함을 구하기 위함이었다고 보고한다. 버나드는 당시 수도원 개혁의 중심지였던 시토 수도회(The Cistercian Order)에 1111년에 가입을 했고, 2년 뒤 23세의 젊은 청년 버나드는 30여 명의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시스터시안 교단의 첫 번째 수도원이었던 시토에 입교함으로 구도자의 삶을 시작했다. 이때 시토 수도원은 수도원의 갱신과 회복을 위해 베네딕토 수도원 정신에 입각한 엄격한 규칙과 원칙과 금욕적인 삶을 토대로 초기 수도원 운동의 회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1115년 시토 수도원장이었던 스테벤 하딩에 의해 버나드는 클레르보에 파견되어 자신을 따르는 수도사들과 함께 수도원(Clairvaux)을 열고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원에 38년 동안 평생 머무르면서 68개의 시토 수도원을 유럽 곳곳에 설립했다. 버나드가 설립한 수도원은 기존의 수도원들이 수사만을 위한 구별된 방식을 추구한 흑의 수도사(black monks) 방식을 버리고, 일반 백성들까지 가르치기 위한 백의 수도사(white monks) 방법을 채택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수도사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만남과 경험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버나드는 일반 평민들을 수도원으로 불러 모아 이들을 훈련 시켰고, 그들로 클레르보 수도원 운동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버나드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개혁 운동을 그 안에서 펼쳤지만 동시에 수도원 밖에서 일어나는 여러 신학 논쟁들과 교황의 직무와 역할 그리고 교권 정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개혁 등을 위해 노력하였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그중에서 버나드의 『아가서』는 버나드 신앙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버나드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사랑, 의지, 실천적 경건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깊이 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키는 신비적 연합을 그 핵심으로 한다. 특히 성 버나드는 인간의 전적 타락, 오로지 이신칭의 등 중심신학의 내용에서 개신교 종교개혁과 거의 일치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으므로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흠모를 받았고, 그들의 신학적인 버나드의 신학을 많이 인용하였다.   Ⅱ. 기도는 하나님과 합일을 향한 갈망이다.   버나드는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창 1:26). 영혼이 더 높이 올라가 그를 만드신 분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모양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삼위일체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정신은 하나님의 모양인데(likeness), 기억, 이해와 의지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기억과 이해와 의지(사랑)가 그분을 반영하도록 모든 행동을 동기(근거, 기준) 지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부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구별하는 버나드는 그의 저작 『은혜와 자유 선택에 관하여』(On Grace and Free Choice)에서 버나드는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그 내용이 자연 영역에 속하는 한도 내에서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유 선택’에서 ‘자유’의 의미를 의지와 연결한다. 자유란 이성적 판단 때문에 어떤 강압적 구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스스로의 의지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결정은 피조물을 의롭게 하거나 불의하게 만들고 그 결과에 따라 행복이나 불행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의지와 연결되고, ‘선택’은 이성과 관련이 있다고 버나드는 말한다. 의지는 내재적인 자유의 성격으로 인하여 어떤 힘이나 필연에 의하여 그것으로부터 반대하거나 그것에도 불구하고 동의하도록 강요될 수 없다. 의지는 피조물을 의롭거나 불의하게 만들고, 행복이나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한다. 그 스스로가 의로움이나 불의에 동의하는 한에서 그렇게 된다. 모든 판단의 행위가 의존되어있는 자발적 동의를 ‘자유 의지’라고 정의한 것이다. ‘자유’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선택’은 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버나드는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자발적인 결단을 내리는 이성과 의지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버나드는 그것이 자유라고는 하나 이 자유는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는 자유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 의지와 이성의 힘으로는 구원의 길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기억과 이해와 의지(사랑)가 그분을 반영하도록 모든 행동을 동기(근거, 기준) 지어질 수 있는가? 그러므로 불완전한 ‘자유 선택’이라는 인간의 기능은 그 자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버나드는 말한다. 구원받아야 온전한 상태에 도달하여 구원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원래의 “하나님 모양”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회복의 과정을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자유 선택이라는 인간의 역할과 하나님의 은혜, 이 두 가지가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버나드의 기본적 가르침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만이 기억, 이해, 의지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겸손하게 인식시키는 기억과 이해를 조명하고,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의지가 사랑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의지의 합일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므로 버나드의 합일은 존재론적 합일이 아니고 의지적 합일이다. 버나드는 사랑(사랑의 본성은 기도이다)을 통하여 기억과 이해,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합일하는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Ⅲ. 기도는 사랑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이다   버나드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 사랑의 질서, 사랑의 순서라는 것을 요한일서 4장 19절에 근거하여 주장한다. 회복의 근거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응답에 두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 내면의 질서가 파괴되었으나 먼저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힘입어, 인간 내면의 질서를 찾으려고 갈망하고 그 질서 세우려고 부단히 기도하는 것이다. 질서는 타락으로 불완전하게 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을 온 마음으로 구하는 헌신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버나드는 인간 내면의 회복 과정을 기도와 연결하여 3단계로 설명하였다.   첫째, 제1단계는 육체하고만 관계가 있는 단계로 동물적 단계이다. 감각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의 형태이다. 제1단계의 성장은 완전한 순종에 의해서 육체에 대한 통제력을 얻어 육체가 복종하게 됨으로써 얻어진다. ‘감각적 상태’에 있는 초보자는 그리스도의 풋내기 신병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까이하시도록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창조와 형성, 생명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영적인 초보자가 성숙에 도달하는 것은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다. 일순간의 회심이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과제가 아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은 중단하지 되지 않는 감사의 기도에서 비롯된다. 항상 성령의 기쁨 속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감사에 몰두하게 된다. 감각적 상태의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생겨난 하나님 사랑은 성경을 읽은 것에 자라가고 묵상으로 양분을 삼으며, 기도 때문에 강해지고 밝아진다.   둘째, 제2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영적 상태로 나아가는 가운데 ‘감각적인’ 상태로부터 ‘이성적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은 완전한 실재를 향한 전진이 된다. ‘감각적인’ 상태의 영적 진보에는 외면적인 사람이 미덕 추구를 위해 준비되도록 특별한 육체의 훈련이 요구되듯이 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죄와 타락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악한 감정(affection)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며 자각하며 감정의 질서를 잡아나가는 단계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영혼의 호기심과 영혼의 분산 부패를 조심해야 한다. 지식으로 교만한 사상에 맛을 들여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참 만족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최우선이며, 하나님의 길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가치의 기준이 실재이신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성적 선택의 기준틀을 세워나가는 단계이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며, 가장 뛰어난 존재를 향해 손을 벌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을 알게 된다. 이성적인 사람은 영적 질서 속에서 가장 높은 것 즉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향해 항상 자신이 발돋움하는 것을 사랑한다.   셋째, 제3의 단계는 영적 단계이다. 의지가 사모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될 때 소원의 범위와 그 대상을 사모하는 방식을 검토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 소원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의 합당한 근거가 될 때, 인간의 기억, 이해, 의지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은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감각과 애정을 가지고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신 것과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실체적 사랑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았던 기억, 이해, 의지는 하나님 사랑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되며, 성령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기도와 묵상 혹은 연구를 위해 사랑을 베푸신다.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몰두하거나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최상의 기쁨이 된다. 이때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사랑으로 성령의 임재를 깨닫게 하신다. 인간의 의지는 그 자체가 사랑이 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합일될 때 인간의 기억 속에 있던 감정들이 즉 지혜로운 감정이 되어 하나님의 선한 것을 마음으로 맛보아 알게 된다. 하나님과 연합된 자는 죄악으로 인해 마음속에 잠재되었던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소외감, 슬픔, 불안의 감정들이 치유되어 온 맘 다해 하나님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요 17:26) 하신 진리의 말씀을 그 마음을 둔 사람을 위한 것이며, 감정, 이해, 의지의 하나님을 향한 진보를 가리킨다. 하나님께로의 상승은 하나님의 뜻하시는 대로 인간이 뜻하는 것이 같아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표현은 실재로는 표현될 수 없는 방식으로만 관찰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체험하게 될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항상 청결하도록 기도와 묵상을 해야 한다. 버나드는 영적 단계의 청결에 관하여 “만일 우리가 사랑받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가 더 사랑받아야 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은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청결한 자의 상태를 버나드 『아가서』의 신랑을 향한 신부의 순수하고 다른 목적이 없는 전폭적인 사모함과 애정으로 이해한다.   Ⅳ. 버나드의 사랑과 마지막 기도   버나드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정서가 하나님 구원 안에서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영적이고,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묘사하였다. 인간의 내면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 기억(마음), 이해(생각), 의지로 남아있어,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죄의 습성으로 일그러진 기억, 이해, 의지는 오히려 교제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기억(경험)에서 비롯된 우리의 감정은 마음의 습관을 형성해서 죄악 된 생각으로 이끌며, 결국 습관적 행동(잘못된 의지) 속으로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학자들과 뇌과학자들은 삶에서 여러 가지 선택, 대인관계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그 감정에 대한 반응양식 등이 모두 마음의 습관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감정의 치유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버나드는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의 근원이 될 때 하나님과 같은 의지로, 하나님의 사랑에 연합할 수 있으며, 영혼은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성화의 과정이며, 성화의 과정을 사랑의 교제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안수한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은혜를 구할 때 넘치는 기쁨의 주입이 있고,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빛과 밝아진 마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버나드의 사랑개념은 관계적이고, 창조적이고 실천적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아울러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볼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갱신된 관점을 제공해 준다. 그 증거로 그의 서거 800주년이 되는 1953년에 교황 피우스 12세로부터 진정한 생명을 주는 교부로, 감미로운 박사(Doctor Mellifluous)라고 경하 받았다. 버나드의 마지막 기도문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끊임없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사모함과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된다면,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가진 자로 감미로운 오늘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의 기쁨을 이웃에게 전달하는 행복자가 될 것이다.   《마지막 버나드의 기도문》   그리하온즉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창조주이신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고, 아버지의 지혜이시여,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받아 지혜롭게 살도록 인도되며, 당신, 곧 우리 사랑의 대상이시며 감정의 근원이신 성령이여. 우리는 당신 안에 거하여 더욱 그 안에서 살기를 바라보나이다.   영원하신 삼위일체, 한 실체, 한 하나님이여, 그로부터 우리가 존재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존재하며, 그 안에 우리가 존재하는 이시여, 죄가 우리를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고, 죄가 우리가 지닌 당신의 형상을 일그러뜨릴지라도,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당신은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시작이신 당신께 돌아가고, 모범이신 당신을 따라가며, 우리를 화해시킨 은혜이신 당신께 경배하고, 찬송하오니, 당신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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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0
  • 창조론적 종말론-15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5): 여섯째 나팔 ③ (성전과 두 증인)    힘센 천사의 역할은 11장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고, “성전 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말한다. 그는 성전 바깥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이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글 성경이 그리스어 동사 μετρησον을 ‘측량하다’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 오해를 유발한다. 그렇게 번역하면 구약시대에 희생제물을 드렸던 성전을 목적어로 이해하게 된다. 앞에서 유브라데 강의 네 천사가 풀려난 이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는 사라졌고 성전은 파괴되어 없어졌다.     그런 오해의 대표적인 산물이 소위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다.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제3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이다. μετρησον 동사에는 ‘숫자를 세다’는 뜻이 있다. μετρησον을 그렇게 이해하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경배를 드리는 자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신약시대의 교회로 이해해야 한다.     이어서 힘센 천사는 그의 “두 증인”을 세웠으니, 그들이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했다. 여기서 나온 “두 증인”은 수많은 이단 종파를 만들어낸 말이다. 촛대와 그것에 기름을 공급하는 감람나무는 성전을 표현하는 전통적 비유어이다. ‘힘센 천사’가 말하는 “두 증인”은 두 사람의 증인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의 권능과 역할을 담당하는 신약교회들을 가리킨다. 모세는 출애굽처럼 성도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교회적 역할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를 증언하는 역할을 대표한다. 신약교회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실행해야 한다. 굳이 유대인의 증언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면, 성경이 한 증인이 될 수 있으므로 성경을 증언하는 모든 성도를 “두 증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을 악용하여 말세의 “두 증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 또는 마귀의 미혹에 빠진 자들로 대개 이단 종파를 만든다.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서술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두 증인” 부분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두 증인”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목자들은 대개 “두 증인”의 승천이 환난의 시작이며, 그때 공중에서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휴거하여 극심한 환난을 면하게 한다고 예언한다. 심지어는 휴거의 시간표까지 예언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죽으면서 저절로 입증되고 있다.   그때는 언제인가? 요한은 ‘힘센 천사’의 입을 빌려 이방인들이 성전 바깥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예언한 것과 같이, “천이백육십 일” 또는 “사흘 반”과 그 외에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등의 말들을 사용하여 그에게 계시된 사건들의 시간을 서술한다. 이들 시간에 관련된 용어들은 대개 다니엘서의 후반부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하는 데 쓰인 말들이다. 다니엘서 등의 구약 예언서는 모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까지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시를 유대인들의 시간 틀에 적용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시간표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 시간표를 만드는 자들은 대개 사탄의 무리에 미혹된 자들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그런 사탄의 거짓 시간표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하나님 자신도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애굽 노예 생활을 정하신 기간은 400년(창15:13)이었으나, 실제로는 430년 후에 출애굽이 이뤄졌다(출12:40, 갈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시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그 수가 차기까지”(계6:11)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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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5
  • 창조론적 종말론-18
        일곱 대접에 담은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그리스도의 최후 승리)   “15장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생명책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다. 셋째 화”는 그 노래들에 담긴 예언처럼 일곱째 나팔 단계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 진행되는 일곱 대접의 재앙이다. 모세의 노래는 두 가지가 있다.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넜을 때 불렀던 것(출 15:1-18)과 광야에서 환난을 겪고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부른 것(신32:1-43)이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수룬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다(신32:15). 그들은 결국 구원의 반석이신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게 했다. “어린 양의 노래”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일곱 인으로 봉인한 두루마리를 받을 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모등 천사들이 부른 새 노래이다(5:9-13).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5:13) 돌리는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계시록에서 짐승은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을 부인하는 사탄의 무리이다. 땅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성도들에게 닥쳐오는 환난들은 짐승들의 핍박과 미혹이다. 성도들은 짐승들의 핍박과 미혹을 이겨내고, 그들의 우상 숭배 강요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환난을 이겨낸 성도들은 어린 양의 심판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상 받는 자가 될 것이다. “셋째 화”가 사탄과 그의 무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멸망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이겨낼 수 있는 환난이다.   16장은 일곱 대접에 담긴 하나님의 진노가 최후심판의 재앙이라고 설명한다. 천사들이 첫째부터 넷째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대접들을 땅에 쏟으면, 땅의 생태계가 모조리 파괴되고어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고 의로우시도다”고 찬양한다.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세를 알면서도 비방하고 회개치 아니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일곱 대접 내러티브 역시 ‘기승전결의’ 전형을 따른다.   다섯째 대접에 담긴 하나님의 진노가 짐승의 나라 왕좌에 쏟아지니 그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종기가 나서 아파서 혀를 깨물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할 뿐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한다. 여섯째 대접의 진노가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지면, 강물이 마르고 동방의 왕들이 오는 길이 예비된다. 이제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 모든 경계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아마겟돈에서 그리스도와 그가 가려낸 새 이스라엘의 알곡 성도와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탄과 그의 무리로 나눠진 최후 전쟁밖에 없다. 사탄이 최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그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세 더러운 영”으로 미혹한 그의 무리를 ‘아마겟돈’으로 모은다. 이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달된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목적이 환난을 이겨낸 그의 알곡 성도들을 구원하려는 것임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일곱째 대접이 부어지면, 하늘에서의 일은 다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땅에서의 일을 끝내기 위해 첫째 부활한 자들과 천사들을 거느리고 재림하신다. 깨어서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자들은 아마겟돈’ 전쟁에 참전한다. 아마겟돈’ 전쟁은 그리스도의 군대가 사탄과 그의 무리를 모두 잡아 유황불 못에 던짐으로써 끝난다. 창세 이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자들과 저주받은 피조물들은 모두 불에 타서 사라진다. 이때 땅에서 죽은 자들은 둘째 부활에서 모두 일어나 그리스도 앞에서 생명책의 심판을 받게 되고, 옛 하늘과 옛 땅은 불못에서 태워진다. 아마겟돈 전쟁에 참전했던 자들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려져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리스도는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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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5
  • 창조론적 종말론-17
      17.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7): 일곱째 나팔②(그리스도가 하실 일)   14장은 “셋째 화”인 일곱째 나팔 재앙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삽입구다. 앞의 12장과 13장 두 장이 사탄과 그의 무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악과 장차 저지를 죄악을 서술한 데 반하여, 14장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장차 하실 일을 서술하고 있다. 문맥의 구조로 보면, 14장도 ‘힘센 천사’가 말한 “하나님의 그 비밀”에 속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이미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준 것이기 때문에 비밀이 아니다. 여기에서도 크로노스적 시간의 순서는 도치(倒置)되어 있어 주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십사만사천이 시온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서서 “새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상태를 나타낸다. 요한이 본 그 장면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가 최후심판을 끝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우실 “새 예루살렘”에서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계시이다.   “새 노래”를 부르는 십사만사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던 옛 이스라엘 성도들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믿고 있던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사탄의 무리에게 핍박을 받았다. 사탄은 궤계(詭計)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으나, 그들은 죽기까지 사탄의 무리와 싸워서 이겼다. 그들이 이김으로써 사탄은 무저갱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죽음으로써 사탄을 이긴 그들만의 독특한 영성을 간직한 것이므로 그들 외에는 배울 수 없는 노래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은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에게 전해져야 한다.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알고 경배하라’는 것이다.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까지 “영원한 복음”이 전해지지 아니한 곳에 거주자가 있다면, 천사들이 공중으로 날아가 전할 것이다. “영원한 복음”의 전도를 방해하는 사탄과 그의 무리는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가 창조주임을 부인하게 하려고 우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경배하게 하고, 그들의 추종자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모두 유황불 못에 던져지는 징벌을 받는다. 그러나 “영원한 복음” 안에서 죽는 자는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는 복을 얻을 것이다.   예리한 낫을 가지고 땅의 곡식을 추수하시는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마지막 때에 이르면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에 사탄의 무리가 몰래 덧뿌려 놓았던 가라지를 뽑아내시고 쭉정이를 가려내어 알곡을 추수하신다(마13:30). 그리고 또 다른 천사는 성전에서 가지고 나온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에서 포도송이처럼 달려있는 사탄의 무리를 남김없이 거둬들인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서 밟힌다.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서 밟히는 사탄의 무리는 그들의 피를 내놓는다. 그 피는 사탄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성도들이 흘린 피를 하나님이 그의 공의대로 갚아 주는 것이다(6:10). 사탄의 무리가 흘린 피의 양이 천육백 스타디온을 말굴레 높이까지 채우는 것이라면, 그동안 죽임을 당하고 첫째 부활한 성도들(20:4-5)이 흘린 피도 정확하게 그만큼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여기서 첫째 부활하는 자들 외에 다른 ‘휴거’(携擧, rapture)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날에 땅에서 살았던 모든 자가 그리스도 앞에서 최후심판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은 누구나 “생명책”의 심판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알곡 성도들은 ‘휴거’라는 말에 미혹되어 자신을 쭉정이 또는 가라지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휴거’는 사탄의 무리가 바울의 말(살전 4:14-17)을 오해하도록 지어낸 말이다. 추수는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말이다. 최후심판은 첫째 부활자들과 천사들을 거느린 그리스도가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탄과 그의 무리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이기신 뒤에 진행될 것이다. 최후심판은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가려낸 가라지와 쭉정이와 함께 사탄의 무리를 불못에 던짐으로써 끝난다. 그때 가려진 알곡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어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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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7
  • 창조론적 종말론-16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6): 일곱째 나팔①(사탄의 범죄)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두 증인이 하늘로부터 부름을 받고 승천한다. 그 짐승은 사탄의 영을 받은 세상 나라의 독재 권력자다. 곧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들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께 경배하며 탄원한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라고. 하늘의 큰 음성이 말한 것과 이십사 장로의 탄원이 바로 ‘힘센 천사’가 말한 “하나님의 그 비밀”의 일부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최후심판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비밀”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루기 위해서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수 없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대적하는 사탄과 그의 무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창조주이신 그분의 창조목적을 달성하시는 것이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는 것이다. 성도들이왕에게 필요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의의 하나님에게 멸망 당해야 할 사탄과 그의 무리가 저지른 죄악은 무엇인가? 이십사 장로들은 “이방인들” 곧 사탄과 그의 무리를 멸망시켜야 할 이유로 그들이 분노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는 처음부터 그것을 방해해온 사탄과 그의 무리를 그대로 두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서 멸망은 가장 엄중한 처벌이다. 멸망에 해당하는 죄를 짓지 아니했음에도 하나님이 멸망시키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세상 나라에서도 분노한다는 이유만으로 멸망시키는 처벌은 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보여주시기 위해 사탄과 그의 무리에게 동등하게 기회를 주신다. 요한은 그런 사실을 환상으로 보고 들었다. 마흔두 달 동안 이방인이 성전 바깥마당을 짓밟는 기간은 옛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를 해산할 여자가 광야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양육되는 천이백육십 일과 같다. 그러나 옛 이스라엘은 사탄의 미혹에 빠져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참소해서 죽임을 당하게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 올라가 천년을 다스린다.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새 이스라엘의 형제들이 죽기까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사탄을 이긴 사실을 짤막하게 암시한다. 그리하여 사탄은 ‘힘센 천사’에 의해 무저갱에서 천년을 갇히게 된다. ‘힘센 천사’의 두 증인이 마흔두 달을 예언하는 것처럼 사탄의 권세를 받은 짐승들도 그만큼 일할 권세를 받는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사탄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었으나, 사탄은 무저갱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의 무리에게 범죄행위를 멈추게 하지 않고 권세를 준다. 하나님은 사탄과 그의 무리의 죄악이 아직 그들을 멸망시키실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공의적 관점에서 그들이 범죄를 계속하여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그 비밀”의 나머지 부분이다.   요한은 그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사탄과 그의 무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악들은 12장에, 그들이 장차 저지를 죄악들은 13장에 서술되어 있다. 요한은 사탄과 그의 무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난해하게 상징을 사용하고 있지만, 성도들은 그 상징들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다만 사탄이 저지르는 죄악들이 성도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길이다. 있지도 않을 휴거를 부추기는 자와 기대하는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춰 자기들의 행위를 돌아보고 말하라. “666”과 “짐승의 표”는 각각 사탄의 권세를 받은 이 세상 독재 권력자들과 그들의 하수인이 되는 인증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경외하는 성도들만이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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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1
  • 종말론적 창조론-14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4):여섯째 나팔 ⓶(작은 두루마리)   일곱 나팔 재앙은 요한계시록의 전(轉)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일곱 나팔 재앙 사건에서 전(轉)에 해당하는 부분은 여섯째 나팔이다. 10장에 서술한 “작은 두루마리” 사건은 여섯째 나팔 사건의 재앙을 계속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주신 계시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치한 삽입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이 그가 본 것, 지금 있는 일, 장차 될 일을 정확하게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 아니한 것처럼, 삽입구들 역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서술하지 아니했다.   “작은 두루마리” 사건은 요한이 여섯째 나팔 재앙에 관련한 서술을 마치고,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환상을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문맥적 주류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재앙과 심판이다. 여기서 보는 제10장처럼 문맥적 주류를 벗어난 삽입구들은 대체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삽입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적 주류 사건과의 연결고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10장 삽입구에서 연결고리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힘 센 천사”의 정체성과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의 내용이다. 둘째는 요한이 듣기는 했으나, 기록하지 아니한 일곱 우레가 말한 내용이다. 셋째는 그 천사가 창조주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과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는 말의 시간성, 그리고 “다시 예언하여야 하”는 예언의 범위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난해한 만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런 견해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진실한 성도들에게 무의미한 일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정당한 해석 한 가지뿐이다.   첫째, 여기서 “힘 센 다른 천사”는 5장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펴며, 누가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묻던 “힘있는 천사”와 동일한 천사이다. 한글성경(개역 개정)에서는 두 구절을 서로 다른 말로 번역했지만, 그리스어는 동일하게 ‘αγγελον ισχυρον’를 썼다. 그 천사는1:1에서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보낸 계시의 전달자이기도 하다. 그 천사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두 발로 바다와 땅을 딛고 선 모습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위상에 버금간다. 여기서 ‘힘 센 천사’의 역할은 “작은 두루마리”를 요한에게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천사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처분을 땅에서 집행하는 총사령관 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가 들고 있던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는 그의 집행 계획서였을 것이다.   둘째, 번개를 뒤따르는 우레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말하는 것이고, 그 처분은 일곱 단계로 진행된다. 유브라데 강의 네 천사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놓여난 때에 일곱 우레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전에 ‘힘 센 천사’가 집행할 일곱 단계의 무시무시한 재앙에 관련한 것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요한이 일곱 우레의 말을 듣고 기록하려는데, ‘힘 센 천사’의 외치는 소리를 뚫고 하늘에서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일곱 우레가 한 말을 보류 또는 취소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일곱 우레”가 한 말들에 대해서 연결고리를 찾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22)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과 일곱 우레가 소리로 한 말을 연결하지 아니한다면, 그리스도의 계시는 여기서 실질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셋째, ‘힘 센 천사’는 창조주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는 일을 “지체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명령했다. 요한은 “다시 예언하여” 그의 계시록을 남겨놓았다. 요한이 다시 한 예언은 말하기에는 달고, 행하기에는 쓰다. 그렇다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 “하나님의 비밀”은 “지체하지 않”고 이루어질 것인가?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1-08-02
  • 정홍열 교수, 아신대학교 11대 총장으로 선임
     학교법인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은 7월 20일 열린 제148회 이사회에서 아신대학교(이하 ‘ACTS’) 제11대 총장으로 정홍열 교수를 선임했다. 그리고 정홍열 총장(사진)은 선임과 동시에 학교의 업무를 시작했다. 임기는 2025년 7월까지다.   정총장은 선임 인사에서 “제가 ACTS의 교수로 24년 째 되는 올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안팎으로 매우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학이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은 신학대학으로서 우리 학교가 넘어야 할 파고는 더 높고 힘겹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엄중하고 어렵다 해도 우리 액츠 가족들이 마음과 힘을 모으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총장은 “그동안 우리 학교는 수많은 고난을 견뎌내고 이겨왔습니다. 교수와 직원, 학생과 동문들이 하나가 되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학교를 굳건하게 지켜왔습니다. 또 한국교회 안에는 우리 학교를 사랑하는 많은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제아무리 힘겨운 큰 파도가 닥쳐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바른길로 우리가 나아가면 넘지 못할 파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의 원래의 설립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변화하는 교육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때, ACTS를 찾아오는 모든 학생들과 졸업한 동문들에게 우리 학교는 더욱 자랑스럽고 소중한 주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정총장은 “학령인구감소와 코로나19로 인한 교육환경 악화 등 대학을 둘러싼 외부환경이 급속도로 변화돼 위기를 맞고 있지만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마음으로 새로운 ACTS를 향한 걸음을 여러분과 함께 내딛기 시작하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의 기도와 격려 그리고 진심어린 관심과 충언을 기대합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아신대학교는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대학의 정체성을 지키고 설립목적을 달성하고자 최근 학교명을 변경하고 학부제로 교과과정을 전면 개편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정총장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금속공학과를 전공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 Div.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직신학전공을 거쳐 독일 에어랑엔 대학교 신학박사(Dr. Theol.)학위를 취득했고, 아신대학교에서 1998년부터 조직신학을 가르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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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종말론적 창조론-13
      13.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3): 여섯째 나팔 (둘째 화)   여섯째 나팔 재앙은 독수리가 경고한 둘째 화이다. 둘째 화는 여섯째 나팔 천사가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줌으로써 진행된다. 네 천사는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자들이다. 여기서 ‘큰 강 유브라데’와 그곳에 ‘결박한’ 네 천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필요해진다. “큰 강 유브라데”는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네 개의 강 가운데 이름 그대로 현존하는 유일한 강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15:18에서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했다. 그 언약은 아브람의 자손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와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강조되었다(신11:24, 수1:4).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다윗에게 통일 왕국을 세우게 하신 하나님은 솔로몬 왕 시대에 그 언약을 성취할 기회를 딱 한 번 주신 적이 있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때였다. 그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누구보다 큰 지혜와 부귀영화를 주셨고,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애굽 지경까지의 모든 왕을 다스리게 하셨다(대하9:26). 그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스라엘의 영토를 “큰 강 유브라데” 까지 확장하라고 주신 기회였다. 그러나 자기의 궁전을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크게 지은 솔로몬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들여서 자기의 쾌락에 국력과 인생을 낭비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문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그 언약은 깨졌고,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곧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지만 “큰 강 유브라데”를 이스라엘과 동쪽 이방인들의 경계로 정하신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신다. 여기서 아담이 떠난 에덴동산 “동쪽에” 지키는 그룹들을 두셨던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네 천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동쪽 경계선인 “큰 강 유브라데”를 지키기 위해 두신 자들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유브라데를 점령한 바빌론이 예루살렘에 침략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왔을 때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네 천사는 그곳에 있었다. 그와 같이 “큰 강 유브라데”에서 하나님이 주신 지키는 임무에 ‘매여있었던’(δεδεμενους, are bound in). 네 천사를 “결박한” 것으로 오역한 한글성경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쨌든 하나님이 네 천사를 풀어준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의 경계가 사라졌고, 그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뜻이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여섯째 나팔 재앙을 집행하기 위해 네 천사에게 마병대를 주신다. 요한이 본 이만만의 마병대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의미하며, 그들의 무기는 입에서 나오는 연기와 불과 유황이라는 세 가지 재앙이다. 그들은 땅의 네 방향을 나눠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은 물론, 배교한 성도들도 죽일 것이다. 네 천사와 마병대는 사탄의 세 영이 아마겟돈에서 온 천하의 왕들을 모아 그리스도의 군대와 최후의 전쟁을 할 때까지(16:16), 이 땅에서 사람들 삼분의 일을 죽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하거나 사탄의 무리에 미혹되는 자들은 세 가지 재앙을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재앙을 이기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생명책의 심판에서 탈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세워서 다스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을 알려준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과 심판을 몸소 이겨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계시를 올바로 알고 실행하는 길밖에 없다. 그 길을 벗어나 왜곡된 해석이나 억지 주장으로 성도를 미혹하는 자는 사탄의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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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9
  • 종말론적 창조론-12
      12.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2): 다섯째 나팔(첫째 화)   네 천사의 나팔 불기가 끝나자, 요한은 독수리가 아직 땅에 세 가지 화를 불러오는 세 천사의 나팔 소리가 남아있다는 경고를 들었다. 그 세 가지 화는 일곱 천사의 나팔 사건의 승·전·결(承·轉·結)에 해당한다. 다섯째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고 요한이 본 환상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문을 여는 모습이다. 그때 무저갱의 구멍으로 검은 연기가 올라와 해와 대기를 어둡게 하고, 그 연기 가운데서 황충이 생겨난다. 황충의 재앙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황충은 전갈처럼 독을 가지고 사람들을 쏜다. 황충에 쏘인 자들은 다섯 달 동안 죽기보다 못한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황충들의 왕은 사탄에 속한 존재로서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으로 불리고, 헬라어로는 “아불루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 이름은 각각 ‘파멸’과 ‘파괴자’를 뜻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황충을 보면, 곤충강으로 분류되며, 메뚜기목에 속한다, 그러므로 황충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모든 식물을 먹어치우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메뚜기는 하나님이 기근 재앙을 내리실 때 사용되는 도구이다. 요한이 본 “황충들의 모양”은 땅에서 사는 생물이 아니라, 육신이 없는 악령의 모습이다. 황충은 하나님이 그의 인침을 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에 독침을 쏘는 도구로 특별하게 만드신 것으로 보인다. 황충에게 독침으로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쏘게 하신 것은 식물을 먹지 못하게 하신 대신 그들의 영혼을 빨아 먹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그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황충의 독침에 쏘인 영혼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황충의 재앙을 위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 황충의 재앙을 정당하게 이해하려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황충을 나오게 문을 열어준 일과 20장에서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가 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천년 동안 가두고 인봉하는 일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각각 난해한 문제를 야기하는 두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는 무저갱의 문을 여는 별과 문을 인봉하는 천사 중에서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이냐의 순서가 모호하다. 다른 하나는 20장의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선한 천사임이 분명하나, “떨어진 별”의 정체는 애매하다.   먼저 황충이 나오도록 무저갱의 문을 열어주는 사건은 9장에서 나오지만,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넣고 문을 인봉하는 사건은 20장에서 서술된다, 여기서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은 크로노스적 시간 순서에 따라 보고 서술한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적 시간 속에서 보고 서술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20장의 천사가 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넣어 인봉한 사건이 먼저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떨어진 별”은 사탄을 무저갱에 인봉한 천사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그러나 그 열쇠는 봉인된 문의 열쇠가 아니라, 연기가 나오는 구멍의 열쇠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그 천사는 무저갱에서 나오는 연기로 만들어지는 황충들에게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해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황충의 재앙은 “다섯 달 동안”의 일회성 유행병이 아니라, 심판의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떨어진 별”의 정체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 선한 천사 또는 악한 천사- 대립하고 있다. 그중에서 어느 견해가 정당할까?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진노에 의해서 땅에서 일어날 재앙과 환란의 시대를 이미 사탄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 내려온 사탄의 무리에 속한 천사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 사탄은 무저갱에 천년 동안 인봉되어 있지만, 그의 무리는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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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2
  • 종말론적 창조론-11
      일곱 천사의 나팔 불기(1): 넷째 나팔 불기까지   어린 양이 두루마리 일곱 인을 뗐을 때, 하나님의 뜻이 모두 드러났다. 하나님의 뜻은 사탄의 무리를 멸절하여 그의 나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것같이,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사탄의 무리가 하늘에서 이미 모두 쫓겨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늘에서 쫓겨 내려온 사탄의 무리와 그것들에 미혹되는 인간들까지 멸절해야 한다.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반 시간쯤 고요”한 시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각각 나팔을 받은 일곱 천사가 서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에서 그의 뜻을 독단적으로 집행하시지 않고, 그의 백성이 될 “모든 성도의 기도”를 먼저 들으신다. 보좌 앞 제단의 천사가 “모든 성도의 기도”를 향로의 불에 향과 함께 태워 올린다. 제단의 천사가 땅에다 쏟는 향로의 불에는 모든 성도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응답은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들리면, 땅에서 집행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천재지변이 시작된다. 넷째 천사까지 나팔을 부는 동안 네 가지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요한이 보니 땅과 바다와 강뿐만 아니라, 하늘의 해, 달 별들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의 삼분의 일에 재앙이 닥치는 것이다. 네 가지 천재지변은 일곱 나팔의 기(起) 단계에서 일어나는 불의 재앙들이다. 불의 재앙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호세아 8장에서 그런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호세아에 의하면 하나님은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사마리아를 진노로 불태우시고(5절), 이어서 “자기를 지은 자” 곧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그들이 세운 왕궁과 견고한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삼키게 하리라”(14절)고 경고하셨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궁들과 성읍들이 불타서 멸망한 사실은 역대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그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게 만든 진노의 본질은 무엇인가? 호세아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고, 창조주를 잊어버린 죄에 대해 진노하셨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설명했다(엡2:8). 바울은 또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는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롬2:8) 내리싷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그의 창조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며, 불의는 하나님의 진리인 공의를 벗어나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창세기 1:26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아담에게 원복음(창1:28)으로 주어진 것이다. 원죄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을 잊어버리고, 사탄인 옛 뱀의 미혹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다.   현대 과학적 관점으로 요한이 본 네 가지 환상을 보면, 해와 달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입는 순간에 중력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전상 운행 궤도를 이탈하는 대참사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물질적 우주는 즉시 붕괴하고, 우리 지구의 생명체도 곧바로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롬2:5)이다. 따라서 요한이 본 천재지변은 종말의 날에 옛 하늘과 옛 땅을 불태우기 직전의 네 가지 장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천재지변은 그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모든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지 아니 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일곱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그들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더 많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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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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