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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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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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신학] 위기의 한국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문화공동체
      김선일 교수                                                   오직 교회만이 자신들 밖의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가 교회 내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문화의 확립을 토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핵심 실천인 선교와 전도의 문화가 조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선교’의 원래 뜻은 세상으로 보냄 받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목표로 한다. 선교는 세상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삶이라면, 전도는 그 복음에 기초한 개인을 위한 구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선교학자 데이나 로버트(보스턴대)가 비유한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몸과 심장의 관계와 같다. 선교가 총체적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전도는 생명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심장과 같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선교 사역에는 교육, 의료, 환경운동, 정의구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적 실천들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이 없이 선교는 지속적인 추동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나 레슬리 뉴비긴 등에 의해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세상과 이웃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참여라는 인식을 기초로 최근 선교적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에서 기본 착상을 빌려온 것은 맞지만, 복음주의 권의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도를 확대 갱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은 하시는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던진다. 선교적 교회론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선교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적 문화, 즉 선교적인 공동의 생활 양식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에게는 선교적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다”라는 심오한 선언을 남겼다. 나치에 항거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회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이 지역과 이웃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선교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위한 몇 가지 선한 실천들을 간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타인을 향한 관심과 환대의 리듬이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과 집회 지향의 삶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이 아닌, 소그룹과 공동체가 함께 헌신하고 상상하며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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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설교연구모임
      ◇서울신학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6일 이 대학과 온라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란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존 웨슬리의 설교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소 소장인 김성원교수는 “성경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주제로 설교한 것은 성경말씀에 충실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면서, “웨슬리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발견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하라고 하는 마지막 권면은 우리에게 특별히 귀중한 영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파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는 교훈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욱 깊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동행이며 교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를 어디에서나 감찰하시지만, 그 눈은 우리를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하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자의 눈길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편재는 궁극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면서,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며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토의시간에서 강춘이전도사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며 성령님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최병은목사는 “당장 강당에 올라가서 그대로 읽고 전해도 웨슬리의 설교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설교를 읽을 때 감동이 있으며 역동성이 있다. 코람데오의 신앙은 요셉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코람데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의 독대시간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는시간을 통해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류재성목사는 “오늘날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적용과 질문들이 필요하다”면서, “웨슬리가 편재성에 대한 설교를 당시 18세기 영국사회에 대한 것으로 적용했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를들면 소외, 불안, 분열, 갈등 등을 겪는 자들에게 그들 가운데도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우리는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류박사는 “편재하심은 부활신앙에도 중요한데, 이 부활신앙은 도마와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예수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가 있는가 하면, ‘나의 몸을 만지지 말라’라는 명령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의 경험을 강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편재하심이라는 것도 손에 쥐는 것(도마)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어줌, 비어주는 것(막달라마리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10
  • 사단법인 느헤이먀 사역을 소개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신학 연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구현과 한국교회 발전과 개혁에 헌신   사단법인 느헤미야(이사장=이문식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비전으로 2010년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성장해, 2019년에 공신력을 가진 단체로 법인화된 이름이다. 이 단체는 처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퇴보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던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며,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개의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시작한 움직임이 이제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다양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배우고자 몸부림치는 동역자들로 확장되고 있다.   창립 당시 기독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연약해진 이유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에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역시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교의 입문 과정부터 신학대학원의 석사 수준의 다양한 과정이, 학식과 인격에 깊이 있는 교수진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기독연구원은 매 학기제로 수업이 진행 중이며, 진지하고 심도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명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 ’를 구성하게 된 과정이다. 교회협의회는 기독연구원의 신학적 성과들을 공유하면서 각 교회 현장에 적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기독연구원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게 될 목회자 후보생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여, 바른 목회자로 세우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단체는 평신도를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무장하여 교회개혁의 주체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일꾼들을 안수하고 잘 훈련시켜, 각자의 소명에 맡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해져 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명에 지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단체는 △교회 및 단체, 교육기관의 연합사업 △전도, 국내선교외 사회선교 △교회개척 사업 △신학교육 및 목회자 재교육 △남북통일사업과 남북교회의 협력사업 △소속기관의 권익보호와 법률적 보호 △성서연구와 교육 및 보급 △청소년 및 청년 선교사업을 주요사업으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이 작은 사역의 한 걸음이 한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우는 귀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 사역에 동참할 교회와 성도를 초청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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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마틴루터의 경제 이야기 4
    김현관 교수  ‘산상수훈’은 오늘 날의 경제문제에 이상적이며 실천 가능한 대안   루터의 이와 같은 관점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들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루터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이 곧 자선활동이 되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제활동은 과연 가장 약한 자들의 삶의 필요성에 부합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무분별한 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소비 행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며, 고아와 과부 및 나그네를 붙드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재정의 주인 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좀 더 책임감 있는 경제활동을 하도록 도전하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여 준다. 둘째로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상적 교훈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 실천원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산상수훈은 이상적이거나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원리에 의한 행동 원칙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동기로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서 산상 수훈의 가르침의 본질을 추구한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문화와 상대적인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분명한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루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루터의 관점들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자본체제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루터가 살던 세기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다양한 경제 주체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전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지만, 루터가 당대에 대면했던 세상의 초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초래한 문제점들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다르지 않다.    루터가 가진 관점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복지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신자유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를 뛰어 넘는 자유이다. 화폐 증식의 경제를 통하여서 개인의 부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위대한 것은 기꺼이 자신의 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이 회복되고 기독교의 정수가 드러나는 곳마다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는 사회 전체를 변혁시켜 왔다. 로마제국에서의 초대교회가 그러했고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경제적 영역에서 성서적 목소리를 선포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복음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이것이 세기의 경제적 상황에서 루터가 외친 예언자적 목소리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메아리쳐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 서울한영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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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6
  • [신학] 하나님나라 신학과 한국교회 ③
    김형국 목사 행정 조직적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적 교회구조로 전향 필요    만인제사장주의가희석화된것은교회가하나님나라사상을잃었기때문이다.그결과로평신도와 목회자라는구분은평신도와사제라는구교적분리에서크게다르지않게한국교회안에자리를잡고있다.사역자가부르심을받아교회를세우는일에전적으로헌신한일군으로서전문성도있고 그필요성도있지만,사역자가일반성도들보다우월하지도않고,교회를세우는일에사역자의역할과성도의역할이동등 되게있음에도불구하고,성도들은평신도로서사역자를기껏해야보조하는 모습으로전락했다.   한국교회는우리모든성도가하나님나라의백성이며,그하나님나라백성가운데어떠한위계도있지않다는사실을신학적으로정돈해야한다.이는유교적위계질서를하나님의권위와동일시한많은한국교회로서는매우어려운과제이다.그러나이제라도교회를세우고,교회사역을감당하는일에있어서성도의일반적역할과사역자들만이담당해야할전문성이정리되어야한다. 성경은다만 자비량또는타인 또는공동체의후원을받으며전적으로사역을하는사역자가있음을보여주고있는데,그들은성도들보다우월한것이아니라,부르심을따라성도를세우고,성도들이교회를세우게한다고말한다(엡4:12-13).   교회를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자들의공동체라고볼때,교회속에서성도와 사역자의역할을하나님나라의관점에서정립하고실행하는일이시급하다.현재의상태를지속한다면, 하나님나라가드러나는교회보다는일반종교에서보이는사제와일반성도의구분이개신교속에서도그대로보여,하나님나라 운동공동체로서의교회의모습은전혀부각되지않고,하나님나라가갖는급진성역시약화될것이다.뿐만 아니라,하나님께서성도하나하나에게주신잠재력이 그대로 사장되어버리고,교회공동체는교회의최고지도자인목사의한계를넘어서지못해서,하나님나라의운동성은교회라는조직속에갇혀버리고결국사장되어버릴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이땅에오심으로말미암아하나님나라가시작되었고,그하나님나라를받아들인 사람들의공동체가바로교회라는신약성경의가르침은로마가원시기독교를합병한이후로천년이넘는세월동안왜곡되었다.교회는종교기관과조직이되어버렸다.이러한문제를극복하기위한공동체운동들이구교속에서도일어났지만,구교의전체적인흐름을주도한것은정치조직화된 기관으로서의카톨릭교회였다.종교개혁은만인제사장주의등을내세워새로운출발점을만들었으나,불행하게도이렇게정치조직화된교회의모습의한계를극복하는일을완성하지는못하였다.   대부분의개신교는구교가가지고있던교회론에 약간의수정을가하였지고세월이지나가면서종교개혁의정신이승화발전시키기보다는구교의큰틀에서벗어나지못했다.위에서살핀평신도와사역자를나누는구분이이러한변혁하지못한구교의대표적전통이라고할수있다.개신교는다양한교파가생겨나고,그교파는교파나름의조직을위해서교단을형성하고그교단내에서는중립적인의미의정치가있을수밖에없었다.그러나 결국세월이지나면서,개신교의대부분의교단과그교단에속한교회는삶의현장에서사랑을주고받으며살아가는공동체적성격보다는종교조직으로서정치적구조를갖춘기관으로전락하였다.                                                                                                                                                          / 하나님나라복음DNA네트워크 대표, 신학박사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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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2
    둘째 날⓶: ‘라키아’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다     현대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물은 원자 크기로 나눠질 수 있다.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회전하는 궤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전자궤도가 원자의 껍질이 된다. 전자의 수가 많으면 회전하는 궤도의 층이 여러 겹이 된다. 그런 경우에는 가장 바깥의 전자궤도가 그 원자의 껍질이 되다. 그것을 ‘전자껍질’이라고 한다. 전자껍질은 다른 원자의 전자껍질과 결합하여 더 무거운 원자나 원자가 여러 개가 모인 분자를 만들 수도 있다. 분자는 바깥 원자의 전자껍질을 경계로 나눠진 것이다. 원자 단위로 물을 나누면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이고, 물은  그것들이 결합된 분자(H₂O)이다. 물을 분자 단위로 나누면, 미세한 물방울의 수증기가 된다. 원자나 수증기 분자들은 기체가 되어 대기를 형성한다. 현대인들에게 지구의 하늘은 곧 대기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라키아’가 물을 나누라고 하신 명령은 전자껍질이 물을 원자 또는 분자로 나누라는 것이고, ‘라키아’가 하늘이라고 하신 말씀은 물의 기체로 만들어진 대기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과학적 지식으로 물을 나누는 ‘라키아’의 실체가 원자들의 바깥을 감싸는 최외곽 ‘전자껍질’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창조 톨레도트의 둘째 날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시는 과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라키아’를 현대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보면,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는 하늘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둘째 날부터 현재까지 존재하는 지구의 대기권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라키아’가 나눈 원자와 분자로 대기권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이 둘째 날 지구에 하늘을 만드신 것은 매우 특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계획은 생물, 특히 최종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무신 진화론자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에서 물질이 생명체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원시 대기에는 산소가 없었다는 주장을 명확하게 반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원시지구에는 이미 바다와 태양이 있었다. 바닷물에서 증발한 수증기의 산소가 대기 아닌 다른 곳으로 갔다는 말인가?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에 세 층이 있다는 삼층천의 우주관을 갖고 있었다.    라키아’의 실체가 드러난 뒤에 문제는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우기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박해했던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실재하지 않았던 ‘라키아’를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마술쟁이로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창조를 거짓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현대과학적 지식으로 ‘라키아’를 이해하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라키아’에 대한 모세의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목회자가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를 고대 히브리인들의 문자대로 믿어야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강변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의 선택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는 그런 목회자를 시대에 뒤떨어져 무지하다고 불신하거나, 또는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 배척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를 문자대로 믿을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에 대해 사실에 맞지 않는 지식을 원하실까? 기독교인들이 그의 이름이 걸린 교회를 떠나기를 원하실까? 그 책임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왕국 시절에 이미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는 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는 말씀을 전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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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5-06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1
    둘째 날⓵: ‘라키아’(궁창)   둘째 날 창조 톨레도트를 보면, 모세에게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1:6)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이때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공중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눈에는 깊은 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깊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믿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시’(창조 서사시)에는 최초에 바다의 신과 호수의 신이 서로 물을 섞어서 자식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집트 신화는 신들과 땅도 바다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모세는 이집트 왕가에서 자랐으므로 이집트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양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밀레투스의 탈레스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에서 첫날의 밤인 흑암의 시간에 깊은 물이 땅을 덮고 있었음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의 지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절은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있으라(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으라(ִ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로 직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게 하려고 ‘라키아’(רָקִיעַ:궁창)를 만드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라키아’를 깊은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는 도구로 만드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7).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שָׁמָיִם:샤마임)이라고 칭하셨다고 서술했다(1:8). 둘째 날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궁창)를 하늘이라고 칭하셨다는 서술은 현대인들을 당혹감에 빠뜨린다. 현대인들에게 창세기의 깊은 물은 바다로, 하늘은 대기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현대인들과 모세 사이에는 엄청난 이해의 괴리가 있다. 깊은 물 속에 있던 ‘라키아’가 어떻게 하늘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 톨레도트 전체 기사에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모세의 설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발생하는 이해의 괴리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히브리인 모세에게 ‘라키아’는 청동 또는 구리 등의 금속을 ‘얇게 두드려 얇게 펴서 늘린 판 또는 거울’ 등의 뜻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물을 아래와 위로 나누기 위한 도구로 ‘라키아’를 만드셨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보면 자세한 설명 없이 짧게 말씀하신다. 그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 칭하셨을 때, 모세는 그가 선지식(先知識)으로 알고 있던 ‘라키아’가 그대로 올라가서 하늘이 되었다고 이해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라키아’(궁창)은 하늘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는 판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 동사를 보면,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에 ‘라키아’가 있어 물에 ‘나눠짐’이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뿐이다. 히브리어 ‘마베딜’은 ‘바달’ 동사 앞에 ‘멤’(ם)을 붙여서 ‘비히’ 동사의 주어인 명사형 분사(나눠짐)로 쓰였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다만 물과 물 사이를 나누는 ‘얇은 막’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이해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현대과학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물과 물 사이를 나누는 그 ‘얇은 막’은 원자의 최외곽 전자궤도가 만드는 전자껍질(Electron shell)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라키아’(전자껍질)는 원자 단위로 물질을 나눈다. 그렇게 나눠지는 원자는 당시 모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나 분자의 기체이다. 하나님은 그런 기체로 채워지는 대기권을 하늘이라 칭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 히브리인들의 지식수준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지구에 대기권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의 눈으로 보는 대로, 그가 아는 지식으로 설명했다. 만약 하나님이 모세에게 물이 전자껍질에 의해 원자 크기로 나뉘는 것까지 보여주셨더라면, 모세는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부르신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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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6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지구촌 재난의 때 기독교 신앙은 그 빛을 발해야 한다     IV. 한국교회의 신속한 방역 협력과 영상 예배, 구호활동   1. 한국교회의 사회적 협력 한국교회 대형교회들(새문안, 영락, 온누리, 사랑의교회, 지구촌교회 등)은 신종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맞아 지난 3월-4월 8주 째 공적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렸다. 특히 코로나 방역과 관련하여 교회의 공예배가 자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교회의 어려움이 크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3월 첫 주일 부터 4월 19일 주일까지 공예배를 영상예배로 전환함으로써 주일에 교회당은 텅비었다. 이것이 2020년 수난절과 부활절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 정부가 권장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하여 공교회는 신속히 이를 자율적으로 수용하여 코로나19 방역(防疫)과 종식(終熄)에 협력했던 것이다.   대구 신천지 집단의 코로나19 집단 감염 때문에 한국교회의 공교회가 집단 감염 우려로 인하여 몇 주째 공적 예배를 자율적으로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 그리고 가정 예배로 드리고 있다. 이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일제 신사참배 강요 시나 6.25 전쟁 발발 시에도 한국교회는 공적 예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이 전염병 때문에 대량 감염 방지를 위하여 한국교회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영상 예배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아쉽지만 불가피한 사태이다.   중소형 교회 조차도 전통적인 방식의 주일예배를 영상 예배로 전환하여 드리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는 주일예배를 고수하는 일부 교회들에 대해 교회가 마치 이 전염병 확산의 중심에 있거나 책임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며 적개심마저 부추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대량 오염 건 중 개신교회와 관련된 것은 0.7% 정도로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직접적으로 교회의 예배참석을 통한 감염이 아니고 신천지 위장교인과 관련되었거나 수련회에서의 감염이다. 마스크 착용, 손 소독제 사용,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의 기본을 지키고 있는 한 교회의 예배는 오히려 청소년들의 PC방이나 학원을 통한 감염, 노래방 나이트클럽 같은 집단무도회장이나 유흥업소, 극장 마트 커피숍 등과 같은 다중이용시설, 직장인들의 집단적 사무실 환경이나 대중교통 등을 통한 집단감염의 가능성보다 더 낮다는 것이 사실과 부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   2020년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는 4월 12일 새문안교회에서 70개 교단 지도자들 100여명이 모여서 감염병 예방을 위해 띄엄 뒤엄 앉아 예배를 드리고 이날 예배는 코로나19 사태로 74년 만에 처음으로 영상 예배로 진행되었다. 이는 코로나19 전염병 대감염 재난 속에서 불가피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고 있다. 4월 들어와 전국적으로 감명 확진자 수가 한 자리 수로 안정되고, 4.15 총선을 치루었으나 대량 감염이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였다. 종교적 예배에 대한 자제 권고가 완화된 후 4월 마지막 주일인 26일부터는 한국교회는 대부분 예배당 모임을 재개했다. 방역 수칙의 사회적 거리를 지키면서 예배 참석 신청자, 또는 직분자 중심으로 발열 체크, 예배 찬성 카드 작성, 소득 등 감염 예방 7대 준칙을 지키며 진행되었다. 사회적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10명 이하로 감소하고 완치율이 80%이상으로 높아지면서 질병관리본부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생활방역으로 전환을 제안하면서 5월 부터는 보다 더 많은 회중들이 모이는 예배를 거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지고 있다.   2. 정교 분리 원칙 모르는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정 지난 2월 대구경북 지역 집단 감염사태 이후지역사회감염의 단계로 발전한 코로나19 사태가 더 확산되지 않도록 질병관리본부와 정부의 행정 지도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가 권장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가운데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들에 대해 일부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들은주일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에 대해 이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거나 법적 제제를 가했다. 경기도 행정1부지사는 지난 3월 17일 브리핑을 갖고 ‘코로나19 감염예방수칙 미준수 종교시설 밀접집회 제한명령’을 하고, 기독교계가 영상예배로 전환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부득이 영상예배 전환이 어려운 소규모 교회에 대해서는 규칙을 제시했다. ①교회 입장 전 발열 기침인후염 등 증상 유무 체크 ②교회 입장 시 마스크 착용 ③교회 내 손소독제 비치 활용 ④예배 시 신도 간 2m 거리 유지 ⑤예배 전후 교회 소독 실시 ⑥예배 시 식사 제공 금지 ⑦예배 참석자의 명단 및 연락처 작성의 7가지 집회제한 조치를 발표하고, 만일 7가지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제한명령을 위반해 종교집회를 개최했을 때 확진자가 발생하는 경우, 감염원에 대한 방역비와 감염자 치료비 등 제반 비용에 대한 구상권(求償權)이 청구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런 조치들이헌법 제10조에 명백히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정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닌지 보다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한다. “강행”이라는 말을 통해 행정기관은마치 주일예배를 지속하는 교회가 무슨 범법행위를 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주일예배는 강행이 아니라 교회의 마땅한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는 것으로 이는 범법행위가 아니다. 이들은 교회의 주일예배를 규제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말하는 것임으로 주일예배를 제재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그 종교가 마땅히 규정하고 있는 종교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교회의 종교활동으로서의 예배는 교회의 필수적인 종교행위이며 이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교회가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시행한다. 정치인이나 관료가 이를 명령할 수 없으며 만일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헌법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주일예배를 유지하는 교회와 신자들은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잘 알고 있는 선한 시민들이며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정교분리 원리는 이럴 때 적용되어야 한다. 국가는 예배에 관련해서는 교회의 자율적 조치와 결정을 존중하고 일임하고 간섭해서는 안된다. 한국도 미국처럼 클럽이나 유흥시설, 음식점 등 사람들이 다수 밀집하는 다중 시설을 폐쇄하거나 그와 같은 조치를 요청하는 가운데 교회의 자율적 동참을 호소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런데 다른 곳은 그냥 놔두고 유독 교회만 압박하고 이를 어길 경우 벌금을 물겠다는 공직자들은 교회에 적(籍)을 두긴 했으나 아직도 기독교 이해와 성수 주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3. 한국교회의 코로나19방역 지원활동 한국교회는 이 어려운 시기에 예장통합(새문안교회·소망교회·온누리교회·잠실교회·주안장로교회 등), 예장 합동(서울 사랑의교회, 경기 용인 새에덴교회, 대전 새로남교회, 분당우리교회 등), 감리교(성남 만나교회 등) 기하성 교단(여의도순복음교회 등)에 속하는 대형교회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한국교회봉사단 중심으로 대구경북지역 코로나 확진 환자들을 위하여 봉사와 재정지원하고 있다. '코로나 19 구호 헌금'도 8억여원이 모금됐다. 그리고 개신교 대형 교회와 교단들이 코로나 감염증 사태로 고통받는 미자립 교회의 월세 지원에 나섰다. 전국 6만개에 이르는 교회 중 80% 가까이는 교인 헌금으로 임차료 내기도 버거운 미자립 상태. 이 때문에 임차료 걱정을 덜고 코로나 극복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교단과 대형 교회가 나선 것이다.지역과 교단 구분 없이 돕는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19일 오후 현재 국내외에서 1만여 명이 참여해 11억여원이 모금됐다. 지역교회들은 휴대용 손세정제, 마스크, 12가지 식료품을 상자에 담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봉사는 국제 구호개발 기구 월드 비전의 함께 나눔 프로젝트의 하나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 소상공인과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학술원, 샬롬나비도 한국윤리재단 및 대구의사회, 코로나19대구경북방역지원운동 그리고 여러 기독교시민단체들과 협력하여 성금 모금과 방역 지원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이라는 위기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섬김의 자원들을 활용해서 국가방역시스템에 적극 협력하여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섬기며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국난 극복의 소망을 심어주어야 하겠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시민운동 단체를 활용하여 코로나종식국민운동을 펴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아 주고, 우리 국민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만의 안일을 돌보는 자들이 아니라 이웃의 건강과 행복을 돌보는 자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를 향하여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각인시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늘 그래 왔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다.     V. 영상 예배는 공동체 예배의 보완일 뿐이다   교회의 본질은 성도(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개인 성전)이나, 성도들은 모여서 그리스도의 성전(교회 공동체)을 이룬다. 물론 교회당 예배가 예배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면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말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영적 예배를 가르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요 4:23-4). 영적 예배는 장소나 시간, 참가자 수(數)에 제약받지 아니한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를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주로 인격적으로 모신 신자가 성전이요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포로되어 귀양간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이 모이는 바벨론 회당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기독교 박해 시에는 카타콤이라는 지하동굴에서 수세기 동안 예배를 드렸다.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는 가톨릭 정부의 핍박을 피해 산과 광야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 드리는 자들에게 임재하는 영과 선포되는 진리가 핵심이다.   온라인 예배는 영상 예배로서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서 예배의 본질에 미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예배는 공동체 예배를 대체할 수 없다. 영상 예배는 공동체 예배의 보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영상 예배에는 세례와 성찬식과 친교와 봉사와 감정적 교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 출석없는 영상 교인은 실제 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공적 모임의 중단이 공동체의 영적 역동성 상실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성도들은 신앙의 공동체로서 한 자리(교회당이라는 공간)에 함께 모여 신앙을 함께 고백한다.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면서 신앙을 서로 격려한다. 이웃과 사회를 향한 소금과 빛의 사명을 함께 다짐한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이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 모임 없이 각자 자기들 처소와 가정 단위로만 흩어져 있으면 공동체의 역동성이 약화될 수 있다. 거기다 이런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신앙공동체의 결속이 너슨해질 것이다는 우려가 야기된다.   VI. 세상의 고통 가운데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1. 인간의 교만과 패역을 경고하시는 통치하시는 하나님 4월 22일 현재로 코로나 19 감염의 현황에 의하면 국내 1만 여 명 확진자, 사망자 2백 여 명, 세계적으로 250만 여 명, 사망자가 17만 여 명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에 확진되어 치료 중에 있고, 목숨을 잃고 있다.   시편 107편 저자는 다음같이 인간이 재난과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패역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시 107: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10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11절)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시 107:10-12).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17절)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시 107:17-18). 하나님은 이러한 코로나 19 펜데믹을 통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질병에 걸리고 사망에 이르게 함으로서 인간에게 겸허의 시간을 주시어 인간의 진정한 모습, 자신이 불사조(不死鳥)가 아니라 창조물이요 먼지요 티끌에 불과한 죽을 인생임을 깨닫게 하신다.   2. 지구촌에 재앙으로 다가온 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하나님은 고통의 주로 계신다. 하나님은 코로나 19 펜대믹으로 인하여 혼란과 충격에 빠진 지구촌 인류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인격적이고 공감의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의 코로나19 재난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인간의 삶에 공감과 연민을 지니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구약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면서 이에 벗어나고자 염원하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고난의 현장 가운데 계시고 이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는 그의 백성의 탄식과 애소(哀訴)를 들어시는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한 가운데 계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구약성경 시편 46편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찬송 시 “내 주는 강한 성”의 밑바탕을 이룬다. 이 시편에서 저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환난 중의 도움이시라고 노래하고 있다: “(시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편)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7편). 시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자로서 자연과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친히 주관하시는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에 무관하게 초연히 계시거나 또는 인간의 악행에 대해 징벌만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경고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불행에 대해 슬프하시는 분이시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죄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당시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 말씀을 다음같이 대언하고 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 대하여 징계하시면서 사랑으로 권면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5절)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하나님은 재앙 가운데서도 우리 인간들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과 교만과 패역한 행위에서 돌이키기를 촉구하신다.   시편 47편 저자는 하나님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7절)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8절)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시 47:7-9).   3. 예수 그리스도는 코로나19 펜대믹으로 고통받는 우리 가운데 세상의 죄 짐을 대신 지시고 대속하신 구세주로서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팬데믹 질병 바이러스를 보내시고 온역(瘟疫)으로 죽음을 허용하시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시고 일하신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류의 중보자로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고난당하셨다. 2천 8백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으로 찔림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4:4).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죄와 질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 그리스도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고통과 절망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인류사회를 향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는 오늘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환자의 중보자요 구세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과 무관하게 우리를 처벌의 대상으로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코로나19 팬데믹과 그로 인한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위로하시는 구세주이시다.   4. 성령은 오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고난을 신원하신다. 성령은 오늘날 코로나19로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인류를 위하여 탄식하시며 함께 하신다. 성령은 세계 창조시 공허하고 혼돈한 지구 표면에서 정리와 질서의 사역을 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성령은 말씀이신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하나님의 우주와 세상 창조 시에 공허하고 혼돈 속의 지구를 향하여 공허와 혼돈을 정리하시는 질서의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인간 창조시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breath)를 인간에게 부여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진흙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짐으로써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이시다.   바벨론에 의하여 황폐해진 예루살렘에 대해 성령은 예언자 예레미아의 영을 통하여 그의 애곡을 들려주신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애 1:1). 그리고 타락한 창조세계와 인간을 위하여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충격과 절망에 빠진 인류를 향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성령은 그분의 성도의 영의 기도를 통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인류가 하나님으로 되돌아 오도록 간구하고 계신다.   5.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인자하신 분이시다. 시편 107편 저자는 인간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시고 죄가 있을짜라도 인간을 불행과 사망에서 구원해주시는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6절)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6-7).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인생들이 저들의 재난과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13절)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14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15절)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시 107:13-16)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인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19절)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19-21).   하나님은 고도의 과학기술 문명의 바벨탑을 쌓으므로 교만해진 우리 인류를 경고하기 하기 위하여 코로나19 팬데믹를 허용하였으나 우리 인류가 회개하고 낮아지고 창조주에게 겸손히 돌이킬 때 우리 인류에게 치유와 살길을 허용하시는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6. 코로나19 대유행 가운데서도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은 불행이 아니라 평강이요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나 처벌이 아니라 평강이며 미래와 희망이시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고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 옛날 바벨론에 포로되어간 유대 백성에게만 아니라 오늘날 지구촌의 사람들, 더욱이 그 가운데서 그의 백성들에게도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 29:12).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다음같이 예레미아에게 애가를 노래하도록 하신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31절)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32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1-33).   예수님은 당시 그의 유대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같이 오늘날에도 그를 신뢰하기 원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30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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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0)
      첫째 날(2), 창조주의 지구 임재   창조 톨레도트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시공간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일부 설교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빛은 사도 요한에 의하여 주 하나님의 지구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요1:1-3, 계22:5 등). 그리고 시공간은 빛(낮)이 있기 전에 흑암(밤)의 시간에 이미 생겨난 것이다. 그동안 창조주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도 그런 사실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창조 이후에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여 인간과 대화하신 성경의 기록이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구 임재라는 요한의 해석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논의해보기로 한다.   첫째, 요한의 창조주 지구 임재설과는 다른 과학자들의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알렉산더 오파린이 『생명의 기원』(1936)에서 주장한 것처럼,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지구 생명이 원시지구의 바다에서 물질의 화학적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파린이 장담했던 인공생명의 제조가 성공하지 못하면서 과학적 무신론은 점차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과학적 무신론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은 외계 생명 기원설 또는 유신진화론을 주장한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은 1953년 DNA 구조를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클릭이 있다. 후자로는 인간게놈 연구와 DNA 지도를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프랜시스 콜린스가 있다. 콜린스는 『신의 언어』(2006)를 썼다. 그들은 모두 지구에서 생명이 생겨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크릭은 생명의 개념을 뇌신경에서 발생하는 의식현상으로 보았으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 생명체의 것으로 주장했다. UFO 등의 외계 생명체 지구 도래설을 믿고 있는 자들이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무신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창조자의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 점에서 지적 설계론도 같은 계열로 볼 수 있다.  콜린스는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지휘하면서 DNA 지도를 연구한 뒤에 지구 물질이 화학작용으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주장하는 바이오로고스(biologos)설은 신이 진화의 방법으로 생명을 창조한 이후에 방치했다고 보는 유신 진화론적 견해이다. 요한의 창조주 지구 임재설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세 가지 가설들을 모두 부정하는 기독교적 관점이다.   둘째, 우주에서 지구는, 다른 행성과는 달리,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진 생태계가 특별히 잘 보존되고 있다. 지구에서 생물, 특히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물과 대기권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런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등장한 인본 원리(Anthropic Principle)에 의하면, 지구에는 누군가 우주상수를 미세조정(fine-tuned)해놓았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가 가능해졌다. 그동안 미국 NASA의 우주 탐사에서 지구처럼 풍부한 물과 대기권이 보존되고 있거나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은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지구는 우연히 존재하는 행성이 아니라, 누군가 인간을 위하여 특별히 창조했다는 주장이 강력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지구에 직접 임재하여 생태계와 생명체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바로 그 분이 모세에게 지구의 창조 사건을 보여주신 주 하나님이시다.   ◇흑암의 우주 속에서 지구는 유일하게 생명이 넘치는 푸른 별이다. 지구에만 생명이 존재하는가?   셋째, 창조 톨레도트는 모세에 의하여 두 개의 층위로 서술되어 있다. 첫째 층위에는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록한 것이다. 둘째 층위는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환상을 그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층위를 비교해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모세가 서술한 창조 톨레도트의 빛을 사도 요한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창조주 하나님의 지구 임재’라고 새로 해석했다. 요한은 주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종말에 새 하늘,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새로 창조하실 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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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9)
    허정윤박사(알파창조론연구소소장)   첫째 날의 낮과 밤: 빛과 흑암 창세기 1:3절에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יְהִי אֹור)하시니, “빛이 있었다”(וַיְהִי־אֹור)고 서술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은 영국국교회 제임스 어셔 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연대기』에서 하나님이 처음 “있으라”고 하신 빛이 BC. 4004년 10월 23일 일요일 아침 해가 뜨면서 비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어셔 주교에 의하면 그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었으며, 24시간 하루였다. 모세는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1:4), 빛을 낮으로, 어둠을 밤으로 칭하시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1:5)이라고 서술했다. 히브리인들의 하루는 밤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밤이라고 칭하신 어둠은 히브리어로 ‘호셰크’(חֹשֶׁךְ)이다. ‘호세크’는 1:2절에서 처음 나오며 흑암으로 번역되어 있다. 한글 성경은 1:2절에서 ‘흑암’으로 번역한 ‘호셰크’를 1:4절에서는 ‘어둠’으로 번역하고, 하나님이 어둠을 밤으로 칭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한글 성경만 읽으면 어둠을 밤이라 칭하신 저녁부터 ‘밤’이 시작된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 첫날의 밤은 1:2절의 ‘호셰크’부터 시작된 것이 맞다. 영어 성경도 ‘호셰크’를 darkness로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다.   모세의 서술에 의하면 첫날의 밤인 ‘호셰크’에는 이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으며, 깊은 물과 그 밑에 잠겨 있는 땅이 있었다. 그것은 원시 지구의 모습이고, 모세는 그곳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모습도 보았다. 첫날의 낮은 ‘빛’이 ‘호셰크’에 비치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성경을 문자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것이 첫째 날에 비친 빛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첫날의 낮 이전의 밤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거나 첫째 날은 밤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불완전한 창조자로 만드는 해석이다. 현대인들의 과학적 상식 또한 태양이나 우주보다 먼저 지구에 빛이 비쳤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구에 빛이 있기 전의 모든 우주적 사건들이 첫날의 밤 즉 ‘호셰크’(흑암) 시간에 일어났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어셔 주교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천동설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일 수 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의 빛이 주관하는 주야를 제정하셨다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1:14-18). 그러므로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태양에서 나온 빛이 첫째 날에 지구에 비쳤고, 그때부터 24시간 하루가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성경적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은 물론 현대인들의 과학적 상식까지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제대로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주장은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날의 빛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우주는 빛과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 빛에 대해서는 이미 사도 요한이 해석해놓았다(요1:1-3). 요한은 첫째 날의 빛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지구에 임재하신 주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요한의 해석은 지구의 생명이 물질에서 화학작용으로 저절로 생겨났다는 과학적 무신론을 부정하는 관점이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요한에 의하면 주 하나님의 빛은 태양이 빛을 비추기 전에도 있었고, 미래의 새 예루살렘에도 있을 것이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22:5).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요한의 관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이신 하나님을 직접 보았으며, 주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여 창조를 진행하는 것을 보았다. 모세가 첫날에 본 빛은 햇빛이 아니라, 창조주로 지구에 임재하신 주 하나님의 빛이다. 요한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 가장 기독교적인 성경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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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4
  • 김영한박사, 문화마르크스주의 비판
      인권, 차별금지 등 다양한 형태의 선한 얼굴로 다가와서 시민을 현혹 “인본주의적 이상향으로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한다”   김영한박사(기독교학술원장·사진)가 「문화 마르크스주의. 비판적 성찰」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문화 마르크스주의(cultural marxism)는 신마르크스주의의 다른 얼굴로서 21세기 초반인 오늘날 인권, 관용, 포용, 인도주의, 인종 차별금지, 환경 보호, 노동자 권익보호, 여성에 대한 차별금지 등 다양한 형태의 선한 얼굴로 다가와서 선량한 시민들을 현혹하고 있다. 김박사는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추구는 이러한 선한 가치들의 보존이 아니라 배후에서는 전통적 사회와 기독교 가치를 무너뜨린다. 그것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러한 선한 가치들을 단지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있다”며,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으로는 특권을 누리는 소수자가 지배하는 유사-전체주의, 무차별적 평등의 세속주의, 성 해방의 에로스 사회, 하나님 없는 인본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한다”고 지적했다.   김박사에 의하면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1920년대 유럽에서 발생하여 1960대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주었다. 김박사는 “1990년대 이후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종식되었으나, 문화 마르크스주의로 문화적인 모습을 바꾸어 전통 계몽사회를 추락시키기를 위협하면서 서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질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다”며, “2020년대 오늘날 서구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 노동, 대중, 연예는 문화마르크스주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으로 얼룩져 있다”고 진단했다. 김박사는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특징을 서술했다.   첫째, 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한다.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이론과 비판이론으로 소급된다. 김박사는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상가들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열쇠는 마르크스의 노동자 소외 이론과 프로이드의 성 욕망 억제 이론을 접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들은 기독교 금욕윤리가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성적으로 억압하여 각종 질환과 사회적 소외문제가 야기하였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기독교 윤리와 가치체계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둘째, 전통 기독교 가치의 전복을 꾀한다. 김박사는 문화 마르르스주의 내용들은 “급진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게이 권리, 무신론 등이다. 이 영역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가 일반 대중들에게 지배력을 가지기를 시도한다”며, “이들이 창안해 내는 생각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통해 일반 시민들이 마르크스적 대중적 추세에 합류하기를 유도한다. 그 대표적인 아젠다가 “성 해방과 동성애”라고 김박사는 지적했다. 1960년대 프랑스의 6.8혁명은 이러한 흐름을 대표한다. 김박사는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이 관용이요, 성의 자유를 즐기는 것이 ‘성적 자기 결정’이라는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선언한다”며, “이 용어 그 자체는 일반 학자들에 의해서는 순수하게 사용되기도 했으나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여 이 용어가 건전한 사회적 에토스(ethos)를 비판하는 문화 이데올로기적 용어로 왜곡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셋째, 마르크스적 이상향적 무차별적 평등사회 건설을 지향한다. 김박사는 “소련연방과 동구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적 혁명이란 일격에 의하지 않고 문화기관을 통한 사회변혁이란 긴 행진을 통하여 자신들의 마르크스적 이상향 사회라는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며,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위하여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고 노동자들을 계몽시키고 문화 혁명에 참가하도록 훈련시킨다”고 분석했다.   김박사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문화헤게모니를 쟁취하여 전초전과 진지전을 통해 그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이루고자 한다”며, “이는 인본주의적 프로메테우스적 반신적(反神的) 이상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정의와 사랑이 평화로서 입 맞추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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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0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8)
    ◇허정윤박사(알파창조론연구소소장)    하나님의 창조를 서술하는 동사   한글성경으로 창세기를 읽으면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바라’(בָּרָא: 창조하다)라는 한 가지 창조 명령만으로 진행되었다고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물에 따라 창조 명령에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하셨다. ‘바라’는 ①조각하다 ②창조(생산)하다 ③낳다 ④먹다 등의 다의적 의미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개별적 창조 명령에 적합하지 않은 말이다. ‘바라’는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쓴 말이다.   하나님의 각 창조 사건에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 구절 뒤에 모세가 추가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접속사(וְ) + 동사로 이어져 나온다. 그리고 찬양하는 후렴구와 창조 사건의 날짜가 마지막에 나오면서 하루의 창조가 끝난다.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는 창세기 1:1부터 2:3절까지 하나의 ‘톨레도트’(תולדות:역사, 계보)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 구절들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 동사와 모세가 창조의 진행을 서술하는 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가지 동사의 관계를 검토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톨레도트’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되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천지 만물을 현대의 첨단 과학기구로 관측한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불치의 트라우마(trauma)이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창조 사건을 보여주셨으나, 모세는 창세기 ‘톨레도트’를 그의 수준에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서술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는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창세기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대한 논의와 이해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서 창조의 ‘톨레도트’에 쓰인 동사를 아래와 같이 표로 만들어보는 것이, 좋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쓰인 동사와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동사를 구분해서 이해한다면, 창세기의 서술에서 사실성의 문제와 기독교의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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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1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7)
    ◇허정윤박사(알파창조론연구소소장)   창세기 용어의 오역과 의미의 변화(2)   ‘테홈’이 창세기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야곱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때이고, 한글 성경에서는 ‘원천’으로 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테홈’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쫓겨난 군대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는데, ‘무저갱’이 ‘테홈’을 번역한 말이다(눅8:31). 한편 로마서에서 ‘테홈’은 “혹 누가 음부로 내려가겠느냐 하지말라”는 말에서 ‘음부’로 번역되었다(10:7). 두 곳의 ‘테홈’을 KJV한영 성경은 각각 ‘깊음’과 ‘the deep’로, ASV는 ‘the abyss’로 번역했다. 그리스어 신약성경(Greek NT Byzantine/Majority, 2000)과 현대 히브리어 성경(Hebrew Modern)을 비교해보면, ‘테홈’은 그리스어 ‘아비소스’(αβυσσος)를 번역한 것이다. ‘아비소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본’에서 ‘테홈’을 번역한 말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거꾸로 ‘아비소스’를 ‘테홈’으로 번역했다.   신약성경에서 ‘테홈’은 귀신조차 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으로 변했다. 그 이유를 알려면 히브리어 신약성경에서 ‘테홈’을 가장 많이 사용한 요한계시록을 찾아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테홈’은 그리스어 명사구 ‘του φρεατος της αβυσσου’을 번역한 것이다. 그것을 ASV는 ‘‘the pit of the abyss’로 직역했고, KJV는 ‘bottomless pit’(바닥없는 구덩이)로 의역했다. 한글성경은 KJV를 따라 그것을 한문으로 ‘무저갱’(無底坑)이라고 번역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9:1). 그 별이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의 왕노릇을 하니, 그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אבדון)이고 그리스어로는 ‘아볼루온’(Απολλυων)이다이다(9:11). 영어로는 Apollyon으로 불린다. ‘아바돈’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마귀요 사단이요 곧 옛 뱀인 용을 잡아 무저갱에 감금하는’ 천사이다(20:1). 여기서 누가복음(8:31)에서 귀신이 무저갱을 두려워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현대 우주론은 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부’는 그리스어 ‘하데스’(ᾍδης)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성경은 ‘Hades’(ASV), 또는 ‘the hell’(KJV) 등으로 번역했다. ‘하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범죄한 신이나 인간의 사후 거주지인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최고신의 이름이므로 그대로 음역하는 것이 올바르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사망과 음부(‘하데스’)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것으로 서술했다(계1:18). 예수 그리스도의 열쇠는 ‘아바돈’이 가진 무저갱의 열쇠와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이 성경 용어의 의미 변화를 연구하면,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확장되는 것이다. 요한의 서술은 계시록의 세계관이 그리스 신화를 차용했다는 비난을 받기에 딱 알맞은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랐다고 밝혔다(1:1).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자기에게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한편,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하데스’가 다스리는 ‘타르타로스’(ταρταρωσας)를 언급했다. 베드로에 의하면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둬두고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벧후2:4). ‘타르타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타르타로스’를 영어성경(KJV, ASV)은 ‘hell’로, 한글성경은 ‘지옥’으로 번역했다. 문자적으로 보면 ‘하데스’와 ‘타르타로스’라는 말은 성경의 세계관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과 베드로는 그리스 신화와 ‘타협’한 것인가? 그들은 당시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선교할 목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배웠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현대사회를 주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할 방법을 요한과 베드로에게 배워야 한다.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인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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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홍인표박사의「자유인 김재준」 출간 화제
    ◇홍인표박사는 김재준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제시했다.     김재준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을 추구한 ‘자유인’ “김재준과 박형룡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홍인표박사(사진)가 「자유인 김재준」이란 제목의 저서를 발간해 교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이 아니면서도 기장교단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신학적 거두에 대한 연구서를 내놓았다.   홍박사는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인기를 끌던 ‘톰소여의 모험’이란 만화를 티브이에서 봤다. 그 중 톰이 가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교회에 출석해서 회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거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이 흘러나왔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홍박는 나중에 이 찬송가의 작사가가 김재준이란 사실을 알게 됐고,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이며 행동하는 신앙인”이란 해설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당시 자유주의는 성경을 파괴하는 나쁜 것으로 알고 있었고, 행동하는 신앙인은 좋은 것으로 보였다”며,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런 두 이미지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장공 김재준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됐다”고 홍박사는 전했다.   본서의 목적은 오늘날 파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장공에 대한 통전적 인식을 갖도록 하려는 데 있다고 저자는 스스로 밝힌다. 다시 말해 “오늘날 김재준에 대한 인식은 그와 평생에 걸쳐 경쟁적 대립관계를 형성한 박형룡을 통한 인식, 해방 이후 남한 교회의 진보적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강원룡,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을 통한 인식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장공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인’이다고 강조했다. 보수적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신학’은 장공을 오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자유주의란 예수를 오로지 도덕적 인간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예수의 초자연적 탄생이나 기적, 부활 등을 어떤 역사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장공은 예수의 초자연적 이적과 속죄. 육체적 부활과 승천을 다 믿고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1930년대 죽산 박형룡과 김재준의 신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장공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허망 중의 허망이다. 허나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진리다”라고 단언했다. 홍박사는 장공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기절설, 환상설 등 여러 가설을 소개했으며,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장공은 정통주의 신학자이다. 1930년 대 장공의 논문을 보면 이게 박형룡의 글이지 잘 구별이 안 될 정도이다”로 말했다.   홍박사에 의하면 장공은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교과서도 아니다.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책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무오하다”고 말했다. 그러하기에 장공의 신학을 단지 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파편적이다. 이렇게 홍박사는 김재준과 박형룡 사이의 차이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장공과 죽산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해석에 장공은 ‘오류’라는 말을, 죽산은 ‘난제’라는 말을 사용했다. 장공은 “내가 동정녀 탄생도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쓴 글과 강의록을 다 봐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또 장공은 역사비평, 양식비평 등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화하면서 강요하지 않았다고 홍박사는 주장한다. 고등비평은 해석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자 도구일 뿐이다.   홍박사는 “장공 김재준의 신학에는 알려진 것보다 보수적인 부분도 많으며, 그의 신학을 특정한 주의의 범주로 놓아서는 안 되고 그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생동하는 신앙을 선물로 받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자’ 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홍박사는 다음과 같은 장공의 고백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닙니다. 다만 한 개의 겸비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심정을 좀 더 이해하고 그의 뜻을 따를까 하는 걱정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를 장공 신학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홍인표박사는 충남대 음악학과(성악 전공)를 졸업 후 침신대 신대원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숭실대학교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기독교역사 전공(Ph.D cand), 백석대학교 기독교 전문대학원에서 역사신학(한국교회사)으로 Ph.D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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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7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6)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창세기 용어의 오역과 의미의 변화(1)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언어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창세기의 언어는 창조 이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면서 의미가 계속 변했다. 의미의 변화는 사물의 역할이나 위치 또는 질량 등이 바뀌는 것이므로 개념도 바뀌게 한다. 그 변화를 알면 처음에 몰랐던 의미가 새로 드러나기도 한다.    번역 성경에서 언어의 변화를 알려면 원어 성경을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조금 복잡하다. 게다가 번역 성경에서는 언어를 오역한 것도 있다.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언어의 오역과 의미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선입견에 의해서 잘못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다. 창세기를 읽으면, 누구에게나 숱한 의문이 일어난다. 의문 없이 창세기를 읽는 사람은 천재 아니면 바보다. 그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에 걸친 통섭적 지식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안목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어 ‘테홈’(תְהֹום)을 골라 살펴보기로 한다.   ‘테홈’은 1:2절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테홈’은 처음에는 지구를 덮고 있었던 ‘깊은 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리스어 ‘70인역본’에서 ‘아비소스’(ἀβύσσος)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the deep’로, 한글로는 ‘깊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창세기 1:2절은 지구가 둥글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태초의 지구는 달걀 속의 노른자위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테홈’이 흰자위이고, 그 안에 노른자위가 지구이다. 또 ‘흑암’이 ‘테홈’의 껍질처럼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테홈’ 위를 강보처럼 싸고 있는 흑암 속에서(욥38:9) 지구를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인들은 지구가 달걀처럼 생겼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의하면 땅의 기둥(욥9:6, 시75:3)이 받치는 평평한 지구 위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있다(욥26:11. *주석서 등에서 그림들을 참조하라).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 지구의 70%가 물이다. 이 과학적 사실이 창세기의 테홈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첫날에 흑암과 빛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 테홈’을 ‘하마임’(הַמַּיִם)으로 바꿔 부르시고, ‘하마임’ 가운데에 평평하게 펴진 ‘라키아’(רָקִיעַ)를 만드셨다, ‘하마임’이 ‘라키아’의 아래와 위로 나뉘게 되었다. 궁창으로 번역된 ‘라키아’가 하늘이 되니, 하늘 위의 물은 위로 들어 올려졌다. 하나님은 이때 하늘 아래에 산을 만들어 하늘을 받치는 기둥으로 삼으신 것으로 보인다. 하늘 아래에서 물이 약 절반으로 줄어들자, ‘테홈’에 잠겼던 지구에 마른 땅이 드러났다. 3일째에 하나님은 궁창 아래의 물을 뭍의 한 곳으로 모아서 ‘야밈’(יַמִּים)을 만드시니 ‘테홈’은 깊은 바다가 되었다. 하나님이 마른 땅과 깊은 바다의 경계선을 만드시니, 넘치던 물이 이때 땅을 받치는 기둥 사이로 내려갔을 것이다. 4일째에 하나님은 밑의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이때 하늘의 창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노아의 때에 홍수로 심판하셨다.   노아의 홍수는 궁창 위의 물이 하늘의 창들을 통해 비로 쏟아졌고, 땅 밑에서 ‘테홈’의 샘이 터진 것이다(창7:11). 궁창 위에 있던 물과 궁창 아래에 있던 물이 땅 위에서 다시 합쳐지자, ‘테홈’이 처음처럼 지구를 다시 덮었다. 창세기 저자는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15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였다’(7:20)고 설명했다. 현재 15규빗을 환산하면 6.8m에 해당한다. 노아의 방주가 멈춘 아라랏산은 해발 5,185m로 알려져 있다. ‘테홈’의 샘과 하늘의 창이 닫히고 비가 그치매 지구를 덮었던 홍수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구를 덮었던 ‘테홈’의 물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과학적으로 큰 의문이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은 물이 평평한 땅 밑으로 내려가서 ‘테홈’이 더 깊어졌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창세기 뒤에 쓴 구약성경에서 ‘테홈’은 대개 ‘깊은 물’ 또는 ‘깊은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그런 사실을 반증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26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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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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