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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거룩이 사랑임을 삶의 예배로 드리며(레위기 19장 1~10절)
모세오경인 레위기는 구약성경의 주제인 '제사장 나라'를 관통하며,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로 이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레위기 19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이자, 동시에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명령을 통해 자비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16번이나 강조하는 레위기 19장에서, 예수께서 구약 전체를 요약하며 인용하신 말씀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만나는데, 바로 이때 우리의 거룩은 일상의 차원이 됩니다. 레위기 19장은 룻기 2장과 함께 이어집니다. 레위기 19장에는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품위 있고 위로가 되는 법이 기록돼 있습니다.(레 19:9~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인데 장차 그들이 자기 밭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 추수를 할 때 밭모퉁이 일부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수준 높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제사장 나라 법'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통해 주신 이 밭모퉁이 법을 베들레헴의 보아스가 그의 밭에서 실천하였기에 룻기에서 보아스는 타국인 룻을 위하여 네 가지 배려(룻 2:8-16)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제사장 나라 법을 실천했습니다. 이후에 보면 추수 때가 지나면서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는 과정에서도 제사장 나라 법인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을 지켜감으로 결국 그 가문에서 하나님의 종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마 1:1~6)이, 보아스가 제사장 나라 '밭모퉁이 법'을 지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에 밭모퉁이 일부를 남겨 두라는 준엄한 명령은 하나님의 무한하고도 거룩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고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미리 ‘가나안 그들의 밭에서’ 지켜야 할 법을 주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라 하는데 이는 “분리하여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 자신을 구별해 드리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 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9장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같습니다.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으로 품꾼의 삯을 당일에 주어야하며(레 19:13), 공의로 재판해야 하며(레 19:15), 공평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라(레 19:36)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다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부부의 영적인 하나 됨을 통해서 무너진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 거룩의 시작입니다. 거룩한 부부의 삶의 축복이 자녀에게 흘러가며, 거룩한 가정들이 세워져야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으며 거룩한 나라가 될 수 있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거룩은 사랑’입니다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읽어내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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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창세기 28장 10절에서 15절)
야곱의 이름은 ‘발꿈치를 움켜 잡은 자’란 뜻입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았고 형이 먼저 나오는데 동생 야곱이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발꿈치를 확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발꿈치를 잡은 자’란 뜻을 가지게 됐습니다. 야곱은 그 이름처럼 끈질기게 살았습니다. 야곱은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생각하실 때 마음이 짠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악착같이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마음이 짠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믿음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짠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야곱을 친근하게 느끼는 이유는 야곱이 우리랑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초창기 기록을 보면 야곱이 기도했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참 믿음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 믿음이 야곱의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완전히 변화가 되는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쫓겨났을 때였습니다. 안락한 생활을 누릴 때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잃고 쫓겨났을 때 버림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야곱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지나온 삶을 그냥 걸어온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이사를 갈 때 앞이 캄캄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사간 그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경험한 주님의 위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 같았습니다. 야곱이 정든 고향땅을 떠나서 아무도 없고, 그 누구도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외롭고 쓸쓸한 그 길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야곱아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야곱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약속을 야곱에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야곱은 지금까지는 구부러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런 야곱이 어떻게 은혜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야곱이 은혜를 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롭고 쓸쓸하고 죄짓고 잘못한 야곱을 하나님은 그냥 받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용서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을 잡으려고 오는 그 분노의 찬 형을 향해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은혜의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적군을 향해서 당신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은혜는 용서의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받아 주시고 안아 주시고 용서하시고 품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그 은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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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
마태복음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저는 태국에서 27년간 대학생 중심의 교회들을 개척하며 섬기다가 고국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하는 목사입니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기 전 교회개척사역을 하다가 부름을 받았는데 선교사로 있는 동안은 한국교회의 기도와 전도의 열정을 배웠고 경험하였기에 그것을 선교지 교회에 가르치고 실천해 왔습니다.그런데 한국에 다시 와서 목회를 해보니 한국교회가 기도와 전도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교회와 선교단체들 모두가 교회밖의 안티세력에 의해, 교회내부의 크리스텐덤(Christendom)적 기독교 왕국을 지향하는 모습 등으로 인해 야성을 잃은 교회가 되어버렸음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12제들을 불러 마지막 유언인 지상명령을 하실 때 17절에 보면 놀랍게도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라는 말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말씀하기 전 제자들의 상태를 말씀하며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지상명령에 임하는 이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지상명령은 전쟁터에서 주어지는 중요한 명령을 말하고 이 명령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한 신문의 통계에서 알게 된 사실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중 절반이 넘는 약 51%는 지상명령이란 단어를 한 번도 교회에서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약 25%의 성도들은 들어본 적은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불과 출석자 중 17%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중대한 실수가 되고, 마지막 때 하나님께 크게 꾸지람을 받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믿는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의 내용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선택이 아닌 필수적으로 감당해야 사명이고 의무입니다. 한국교회의 전도의식을 보면 기도와 전도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렸지만, 대형교회는 시스템으로 전도하는 일을 명맥을 이어가는데 정작 전도에 집중해야 할 작은 교회들이 전도 의욕도 없고 시스템도 없어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민족, 모든 영역에 가야 합니다. 모든 민족뿐 아니라 소외된 모든 계층에도 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가까이 있기에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다양한 민족들이 있는데 제가 있는 안산에만 118개국의 민족이 와 있고, 주변의 소외된 젊은이 청소년들이 미전도 족속이 되어 가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우리는 미래세대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은 능력의 주님이 함께하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현장에서 보았던 12명의 제자들 중 승천을 앞둔 예수의 눈으로 보니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부족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주님의 중대한 지상명령이 잊혀져버린 한국교회와 성도,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이기주의에 야성을 잃어버린 교회에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주의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교회는 주님이 하신 지상명령 중 우리 성도와 교회가 잊혀버린 중요한 사실은 내가 가야 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대리인으로 보내는 것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로마 콘스탄틴에 의하여 종교의 자유가 오기 전에는 모든 교회가 선교적인 교회였고 모든 성도가 복음 전하는 전도자였고,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는데 오늘날과 같이 교회와 성도라면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은 사역자들의 일이고, 모든 성도는 자신의 신앙만 잘 지키고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예배에 참석하고 경건 생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주님께 꾸지람을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사역은 경기장에는 나가지 않고 응원석에서 선교사와 목사 소수의 전도 인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고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그 사명이 다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을 회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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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말씀은 생명, 능력, 실제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돈을 주시지 않으시고도 콩나물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나중에 주신대요 하면 콩나물을 주셨습니다. 또 군대에 갔다 오시면 아실 것입니다. 사단장이 이곳에 사격장을 하나 만들라 하면 그 말대로 됩니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콩나물을 가져올 수 있고, 단장의 말 한마디에 땅의 지형과 용도가 바꾸어지는 것처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말씀은 그것보다 더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위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말씀은 생명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날마다 음식을 먹듯이 먹어야 만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처럼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읽지 않는 이유로는 말씀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기에 꼭 읽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부터라도 읽기를, 아니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먹고 자면서 자라나듯이 우리 영혼이 튼튼한 생명을 얻게 되고, 결국은 장성한 어른이 됩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말씀은 능력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 사람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 40년 믿음의 훈련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요단강은 곡식 거두는 시기였기에 물이 많은 때였습니다. 여호수아3장 17절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법궤가 요단강을 가로막고 서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너듯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렇듯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말씀은 우리의 삶의 그 무엇보다 실제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사람의 말과 되는 환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결국은 망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대로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난공불락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매일 한 번씩 소리 없이 돌고, 마지막 일곱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나팔소리와 함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성이 무너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 성은 말씀대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이렇듯 이런 일은 우리의 삶의 현실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그 말씀대로 그 성이 무너지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현실보다 더 실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고 능력이고, 우리의 삶의 현실보다 더 실제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신약의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말씀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민족이 다시 뜨거운 부흥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복된한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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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 창세기 35장 1절
성경의 인물 중, 야곱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던 믿음의 인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야곱의 삶을 보며 때로 도전도, 때로 위안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야곱의 삶이 오늘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야곱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야곱이 세겜성에 거주하던 중, 그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성 사람들에게 할례를 조건으로 복수를 계획했다. 할례 후,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나머지 아들들이 노략질을 했다. 이로 인해 야곱은 동맹 도시들의 보복을 우려하며 큰 두려움에 빠졌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창 35:1)’라고 말씀하신다. 벧엘은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던 중 돌 베개를 베고 유숙하던 곳에서 하나님이 꿈에 나타났던 장소이다. 홀로 죽음의 위기를 피해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꿈을 통해 함께 계시고 그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주신 장소이다. 이로 인해 야곱은 힘을 내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 현재, 자신의 자녀들이 저지른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서 하나님은 벧엘을 말씀하시며, 죽음의 위기 앞에 놓인 야곱에게 그 옛날처럼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며, 야곱과 야곱의 가정에게 벧엘을 향해 올라가라고 독려하시는 말씀이다. 이는 오늘날 21세기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믿음의 성도들은 세겜이라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세겜이 아닌 벧엘, 즉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며 우리의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 설교자로 큰 딜레마를 느낀다. 필자는 20년 넘게 ‘벧엘로 올라가라’는 설교를 해왔으나, 실질적으로 벧엘로 올라가는 성도를 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사역의 초기에는 ‘왜 내 설교를 듣고 벧엘로 올라가지 않을까?’ 고민하는 시기였다면, 시간이 조금 지난 후부터는 벧엘로 올라가라고 설교하고 있는 내 자신도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살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약 10년 전쯤에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가슴 아팠던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2014년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서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 1,000명 중 약 80%가 불안, 우울, 수면 장애 등 다양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경험했다고 보고되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브라운관을 통해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재난 영화 및 히어로 영화에서는 이보다 더한 장면을 시청해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는 목회자인 동시에 심리학을 전공한 임상심리사로서 이러한 상반된 결과가 왜 나타나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재난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 오늘날 나를 비롯한 많은 성도가 좋은 설교를 찾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웃기도 하지만 정작 영혼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충격은 받지 않고 있는 것과 일면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내가 수많은 시간 동안 ‘벧엘로 올라가라’라는 설교를 했으나 성도들은 벧엘로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안전한 장소 영화를 보듯이 벧엘로 올라가라는 설교를 시청했다는 사실이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설교를 듣는 것이 마치 전쟁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사는 것은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영화가 아닌 실제 전쟁터로 나가는 것만큼 명확한 차이가 난다. 설교자인 나와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듣고 있지만, 정작 벧엘로 올라가는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서게 되는데, 당신은 벧엘로 올라가는 설교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실제 벧엘을 향해 올라갈 것인가? 만약 당신이 이 말씀을 듣고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낸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청하는 것이 아닌 영혼에 충격을 받은 자로 왕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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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인터넷 예배를 개혁하라 - 레위기 10장 1~2절
“우리는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만족합니까?” 인터넷으로 먹는 방송 시청이 식사가 아니고, 인터넷 부부가 없듯, 인터넷 예배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허상입니다. 여러 무지로부터 일어난 개혁이 1517년 종교개혁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은 목사절대주의, 인터넷예배주의, 무교회주의, 탈권주의, 동영상숭배, 택배성찬과 같은 잘못된 예배론과 교회론의 개혁입니다. 예배의 중요한 전제는 ‘예배는 하나님과 참여자들의 만남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뜨거운 만남, 성도들 간의 뜨거운 사랑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개혁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또한 분별력 없는 지도자들의 용어 사용은 예배 혼란을 증가시키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모든 경건 모임을 ‘예배’라는 단어로 획일화하는 것은 남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 방향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인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좌로는 만인제사장과 영적 교회론을 극단화 시키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과격하게 허무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배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은 오직 성경이 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할 때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과 같이 예배를 실패하고 잘된 성경 인물이 없습니다. 예배라는 것은 ‘예의를 갖추어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대요리문답에서 예배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논하고 이어서 노래와 기도로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존 칼빈은 “우리는 예배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들려 올라간다. 말씀의 설교, 성례전, 거룩한 회집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전체 기관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연합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무엇이겠는가?”라고 했고, 로버트 웨버는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니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속행위를 경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피터 부르너는 독일어로 예배가 ‘고테스디엔스트(Gottesdienst)’인데 이는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회중의 봉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는 은혜와 치료와 회복입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은 예배를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결국 예배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회중의 모임’을 ‘만남의 장소’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주일예배는 주님과의 예배 적인 만남과 성도 간의 서로의 만남이 중심적 가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에서 영적이면서도 성도 간에 조직적인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장로교 신학에는 ‘예배 규정 원리(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가 전통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예배 표준 문서인 낙스의 공동 전례서를 필두로 하여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던 목사와 신학자들이 작성한 ‘공예배 지침서’가 164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후에 이것이 장로교회의 예배의 규범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 개혁은 예배 규정 원리로(RPW)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을 다한 성경 적인 예배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RPW의 핵심은 ‘예배와 관련하여 성경에 명령이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요구되며, 명령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금지된다’ 입니다. 결국 거룩한 성경에 지시된 것만 예배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부부가 없고, 인터넷 식사가 없고, 인터넷 무당 신내림이 없고, 인터넷 장례식이 없고, 인터넷 출산도 없고, 인터넷 재판도 없고, 인터넷 예배도 없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직접 대면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터넷 예배 주의는 예수님의 몸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부정하고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정신만 공유하려는 신영지주의사상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능력이 넘치지만, 육체로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은 원격으로 십자가를 시청하지 않으시고 직접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교제하시고 먹고 마시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병자를 가까이하시며 치료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신영지주의사상을 버리고 컴퓨터 앞에 시청자가 아니라 원래의 자리에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서울에스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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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거룩이 사랑임을 삶의 예배로 드리며(레위기 19장 1~10절)
- 모세오경인 레위기는 구약성경의 주제인 '제사장 나라'를 관통하며,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로 이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레위기 19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이자, 동시에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명령을 통해 자비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16번이나 강조하는 레위기 19장에서, 예수께서 구약 전체를 요약하며 인용하신 말씀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만나는데, 바로 이때 우리의 거룩은 일상의 차원이 됩니다. 레위기 19장은 룻기 2장과 함께 이어집니다. 레위기 19장에는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품위 있고 위로가 되는 법이 기록돼 있습니다.(레 19:9~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인데 장차 그들이 자기 밭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 추수를 할 때 밭모퉁이 일부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수준 높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제사장 나라 법'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통해 주신 이 밭모퉁이 법을 베들레헴의 보아스가 그의 밭에서 실천하였기에 룻기에서 보아스는 타국인 룻을 위하여 네 가지 배려(룻 2:8-16)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제사장 나라 법을 실천했습니다. 이후에 보면 추수 때가 지나면서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는 과정에서도 제사장 나라 법인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을 지켜감으로 결국 그 가문에서 하나님의 종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마 1:1~6)이, 보아스가 제사장 나라 '밭모퉁이 법'을 지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에 밭모퉁이 일부를 남겨 두라는 준엄한 명령은 하나님의 무한하고도 거룩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고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미리 ‘가나안 그들의 밭에서’ 지켜야 할 법을 주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라 하는데 이는 “분리하여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 자신을 구별해 드리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 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9장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같습니다.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으로 품꾼의 삯을 당일에 주어야하며(레 19:13), 공의로 재판해야 하며(레 19:15), 공평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라(레 19:36)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다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부부의 영적인 하나 됨을 통해서 무너진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 거룩의 시작입니다. 거룩한 부부의 삶의 축복이 자녀에게 흘러가며, 거룩한 가정들이 세워져야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으며 거룩한 나라가 될 수 있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거룩은 사랑’입니다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읽어내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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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거룩이 사랑임을 삶의 예배로 드리며(레위기 19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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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창세기 28장 10절에서 15절)
- 야곱의 이름은 ‘발꿈치를 움켜 잡은 자’란 뜻입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았고 형이 먼저 나오는데 동생 야곱이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발꿈치를 확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발꿈치를 잡은 자’란 뜻을 가지게 됐습니다. 야곱은 그 이름처럼 끈질기게 살았습니다. 야곱은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생각하실 때 마음이 짠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악착같이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마음이 짠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믿음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짠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야곱을 친근하게 느끼는 이유는 야곱이 우리랑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초창기 기록을 보면 야곱이 기도했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참 믿음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 믿음이 야곱의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완전히 변화가 되는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쫓겨났을 때였습니다. 안락한 생활을 누릴 때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잃고 쫓겨났을 때 버림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야곱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지나온 삶을 그냥 걸어온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이사를 갈 때 앞이 캄캄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사간 그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경험한 주님의 위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 같았습니다. 야곱이 정든 고향땅을 떠나서 아무도 없고, 그 누구도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외롭고 쓸쓸한 그 길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야곱아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야곱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약속을 야곱에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야곱은 지금까지는 구부러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런 야곱이 어떻게 은혜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야곱이 은혜를 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롭고 쓸쓸하고 죄짓고 잘못한 야곱을 하나님은 그냥 받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용서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을 잡으려고 오는 그 분노의 찬 형을 향해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은혜의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적군을 향해서 당신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은혜는 용서의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받아 주시고 안아 주시고 용서하시고 품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그 은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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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창세기 28장 10절에서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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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
- 마태복음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저는 태국에서 27년간 대학생 중심의 교회들을 개척하며 섬기다가 고국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하는 목사입니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기 전 교회개척사역을 하다가 부름을 받았는데 선교사로 있는 동안은 한국교회의 기도와 전도의 열정을 배웠고 경험하였기에 그것을 선교지 교회에 가르치고 실천해 왔습니다.그런데 한국에 다시 와서 목회를 해보니 한국교회가 기도와 전도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교회와 선교단체들 모두가 교회밖의 안티세력에 의해, 교회내부의 크리스텐덤(Christendom)적 기독교 왕국을 지향하는 모습 등으로 인해 야성을 잃은 교회가 되어버렸음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12제들을 불러 마지막 유언인 지상명령을 하실 때 17절에 보면 놀랍게도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라는 말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말씀하기 전 제자들의 상태를 말씀하며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지상명령에 임하는 이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지상명령은 전쟁터에서 주어지는 중요한 명령을 말하고 이 명령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한 신문의 통계에서 알게 된 사실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중 절반이 넘는 약 51%는 지상명령이란 단어를 한 번도 교회에서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약 25%의 성도들은 들어본 적은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불과 출석자 중 17%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중대한 실수가 되고, 마지막 때 하나님께 크게 꾸지람을 받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믿는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의 내용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선택이 아닌 필수적으로 감당해야 사명이고 의무입니다. 한국교회의 전도의식을 보면 기도와 전도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렸지만, 대형교회는 시스템으로 전도하는 일을 명맥을 이어가는데 정작 전도에 집중해야 할 작은 교회들이 전도 의욕도 없고 시스템도 없어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민족, 모든 영역에 가야 합니다. 모든 민족뿐 아니라 소외된 모든 계층에도 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가까이 있기에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다양한 민족들이 있는데 제가 있는 안산에만 118개국의 민족이 와 있고, 주변의 소외된 젊은이 청소년들이 미전도 족속이 되어 가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우리는 미래세대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은 능력의 주님이 함께하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현장에서 보았던 12명의 제자들 중 승천을 앞둔 예수의 눈으로 보니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부족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주님의 중대한 지상명령이 잊혀져버린 한국교회와 성도,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이기주의에 야성을 잃어버린 교회에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주의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교회는 주님이 하신 지상명령 중 우리 성도와 교회가 잊혀버린 중요한 사실은 내가 가야 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대리인으로 보내는 것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로마 콘스탄틴에 의하여 종교의 자유가 오기 전에는 모든 교회가 선교적인 교회였고 모든 성도가 복음 전하는 전도자였고,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는데 오늘날과 같이 교회와 성도라면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은 사역자들의 일이고, 모든 성도는 자신의 신앙만 잘 지키고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예배에 참석하고 경건 생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주님께 꾸지람을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사역은 경기장에는 나가지 않고 응원석에서 선교사와 목사 소수의 전도 인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고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그 사명이 다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을 회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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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잊혀버린 주님의 지상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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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말씀은 생명, 능력, 실제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돈을 주시지 않으시고도 콩나물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나중에 주신대요 하면 콩나물을 주셨습니다. 또 군대에 갔다 오시면 아실 것입니다. 사단장이 이곳에 사격장을 하나 만들라 하면 그 말대로 됩니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콩나물을 가져올 수 있고, 단장의 말 한마디에 땅의 지형과 용도가 바꾸어지는 것처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말씀은 그것보다 더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위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말씀은 생명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날마다 음식을 먹듯이 먹어야 만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처럼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읽지 않는 이유로는 말씀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기에 꼭 읽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부터라도 읽기를, 아니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먹고 자면서 자라나듯이 우리 영혼이 튼튼한 생명을 얻게 되고, 결국은 장성한 어른이 됩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말씀은 능력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 사람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 40년 믿음의 훈련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요단강은 곡식 거두는 시기였기에 물이 많은 때였습니다. 여호수아3장 17절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법궤가 요단강을 가로막고 서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건너듯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렇듯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말씀은 우리의 삶의 그 무엇보다 실제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사람의 말과 되는 환경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결국은 망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대로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난공불락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매일 한 번씩 소리 없이 돌고, 마지막 일곱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나팔소리와 함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성이 무너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 성은 말씀대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이렇듯 이런 일은 우리의 삶의 현실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어 그 말씀대로 그 성이 무너지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현실보다 더 실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고 능력이고, 우리의 삶의 현실보다 더 실제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신약의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말씀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민족이 다시 뜨거운 부흥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복된한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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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말씀은 생명, 능력, 실제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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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 창세기 35장 1절
- 성경의 인물 중, 야곱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던 믿음의 인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야곱의 삶을 보며 때로 도전도, 때로 위안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야곱의 삶이 오늘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야곱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야곱이 세겜성에 거주하던 중, 그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성 사람들에게 할례를 조건으로 복수를 계획했다. 할례 후,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나머지 아들들이 노략질을 했다. 이로 인해 야곱은 동맹 도시들의 보복을 우려하며 큰 두려움에 빠졌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창 35:1)’라고 말씀하신다. 벧엘은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던 중 돌 베개를 베고 유숙하던 곳에서 하나님이 꿈에 나타났던 장소이다. 홀로 죽음의 위기를 피해 도망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꿈을 통해 함께 계시고 그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주신 장소이다. 이로 인해 야곱은 힘을 내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 현재, 자신의 자녀들이 저지른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서 하나님은 벧엘을 말씀하시며, 죽음의 위기 앞에 놓인 야곱에게 그 옛날처럼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며, 야곱과 야곱의 가정에게 벧엘을 향해 올라가라고 독려하시는 말씀이다. 이는 오늘날 21세기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믿음의 성도들은 세겜이라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세겜이 아닌 벧엘, 즉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며 우리의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 설교자로 큰 딜레마를 느낀다. 필자는 20년 넘게 ‘벧엘로 올라가라’는 설교를 해왔으나, 실질적으로 벧엘로 올라가는 성도를 보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사역의 초기에는 ‘왜 내 설교를 듣고 벧엘로 올라가지 않을까?’ 고민하는 시기였다면, 시간이 조금 지난 후부터는 벧엘로 올라가라고 설교하고 있는 내 자신도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살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약 10년 전쯤에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가슴 아팠던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2014년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서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 1,000명 중 약 80%가 불안, 우울, 수면 장애 등 다양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경험했다고 보고되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브라운관을 통해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재난 영화 및 히어로 영화에서는 이보다 더한 장면을 시청해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는 목회자인 동시에 심리학을 전공한 임상심리사로서 이러한 상반된 결과가 왜 나타나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재난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 오늘날 나를 비롯한 많은 성도가 좋은 설교를 찾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웃기도 하지만 정작 영혼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충격은 받지 않고 있는 것과 일면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내가 수많은 시간 동안 ‘벧엘로 올라가라’라는 설교를 했으나 성도들은 벧엘로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안전한 장소 영화를 보듯이 벧엘로 올라가라는 설교를 시청했다는 사실이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설교를 듣는 것이 마치 전쟁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사는 것은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영화가 아닌 실제 전쟁터로 나가는 것만큼 명확한 차이가 난다. 설교자인 나와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듣고 있지만, 정작 벧엘로 올라가는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서게 되는데, 당신은 벧엘로 올라가는 설교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실제 벧엘을 향해 올라갈 것인가? 만약 당신이 이 말씀을 듣고 벧엘로 올라가는 삶을 살아낸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청하는 것이 아닌 영혼에 충격을 받은 자로 왕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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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 창세기 3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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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인터넷 예배를 개혁하라 - 레위기 10장 1~2절
- “우리는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만족합니까?” 인터넷으로 먹는 방송 시청이 식사가 아니고, 인터넷 부부가 없듯, 인터넷 예배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허상입니다. 여러 무지로부터 일어난 개혁이 1517년 종교개혁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은 목사절대주의, 인터넷예배주의, 무교회주의, 탈권주의, 동영상숭배, 택배성찬과 같은 잘못된 예배론과 교회론의 개혁입니다. 예배의 중요한 전제는 ‘예배는 하나님과 참여자들의 만남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뜨거운 만남, 성도들 간의 뜨거운 사랑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 개혁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또한 분별력 없는 지도자들의 용어 사용은 예배 혼란을 증가시키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모든 경건 모임을 ‘예배’라는 단어로 획일화하는 것은 남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 방향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인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좌로는 만인제사장과 영적 교회론을 극단화 시키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과격하게 허무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배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은 오직 성경이 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할 때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과 같이 예배를 실패하고 잘된 성경 인물이 없습니다. 예배라는 것은 ‘예의를 갖추어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대요리문답에서 예배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논하고 이어서 노래와 기도로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존 칼빈은 “우리는 예배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들려 올라간다. 말씀의 설교, 성례전, 거룩한 회집 그리고 교회의 외적인 전체 기관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연합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무엇이겠는가?”라고 했고, 로버트 웨버는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니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속행위를 경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피터 부르너는 독일어로 예배가 ‘고테스디엔스트(Gottesdienst)’인데 이는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회중의 봉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는 은혜와 치료와 회복입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은 예배를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결국 예배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회중의 모임’을 ‘만남의 장소’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주일예배는 주님과의 예배 적인 만남과 성도 간의 서로의 만남이 중심적 가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에서 영적이면서도 성도 간에 조직적인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장로교 신학에는 ‘예배 규정 원리(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가 전통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예배 표준 문서인 낙스의 공동 전례서를 필두로 하여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던 목사와 신학자들이 작성한 ‘공예배 지침서’가 164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후에 이것이 장로교회의 예배의 규범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 개혁은 예배 규정 원리로(RPW)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을 다한 성경 적인 예배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RPW의 핵심은 ‘예배와 관련하여 성경에 명령이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요구되며, 명령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금지된다’ 입니다. 결국 거룩한 성경에 지시된 것만 예배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부부가 없고, 인터넷 식사가 없고, 인터넷 무당 신내림이 없고, 인터넷 장례식이 없고, 인터넷 출산도 없고, 인터넷 재판도 없고, 인터넷 예배도 없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직접 대면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터넷 예배 주의는 예수님의 몸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부정하고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정신만 공유하려는 신영지주의사상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능력이 넘치지만, 육체로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은 원격으로 십자가를 시청하지 않으시고 직접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교제하시고 먹고 마시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병자를 가까이하시며 치료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신영지주의사상을 버리고 컴퓨터 앞에 시청자가 아니라 원래의 자리에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서울에스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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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인터넷 예배를 개혁하라 - 레위기 10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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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게 하시는 방법 (시76:1~12)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두려워하는 그들을 향해서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2~33)고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믿음 안에서 이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는 한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실패자로, 낙심에 빠져 사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며, 삶의 어떤 문제 안에서도 이기는 힘을 가지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갈 때 이기는 감격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지를 깨닫고 매일 승리의 감격을 누리며 살기를 축원한다. 첫째:가까이 계셔서(1~3)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이 실패와 절망 속에서 이기게 하시는 방법의 첫 번째는 가까이 계셔서 힘과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1절)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2절)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멀리 동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다. 멀고 먼 하늘 보좌에서 이 땅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깊은 곳에 찾아 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엠마로오 향하던 두 제자는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과 긴 시간을 걸으며 대화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온 신경과 마음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며 그 임재와 함께 사는 자는 자신의 삶에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3절)이 사라지는 축복을 경험하며 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둘째:심판을 통하셔서(4~9)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이 실패와 절망 속에서 이기게 하시는 방법의 두 번째는 악인들을 심판하여 평안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실족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7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움직이시면 악인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9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고통과 절망의 순간들을 살아가고 있지만, 온유함을 잃지 않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함을 잃지 않게 되고, 하나님은 그 온유한 자를 위해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그 모든 상황을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온유한 자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셋째:헌신을 받으셔서(10~12)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이 실패와 절망 속에서 이기게 하시는 방법의 세 번째는 돌이켜 회복하고자 하는 헌신을 받아 주시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11절)는 말씀이 어떻게 살아야 이기는 삶을 사는지 가르쳐 준다. 오늘 본문은 지난날 서원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지키지 못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을 당장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하는 지금,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것을 지키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다. 서원하고, 결단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한다.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깨달음과 감동이 있는데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주저앉게 되면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며, 날마다 이기게 하시는 경험을 통해 더 큰 일을 계획하고, 바라보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다윗의 삶에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준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8:6,14)고 말이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야지 이길 수 있다. 이겨야 할 상대가 눈에 보이고,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고 해서 그것을 상대해 이기는 것이 세상의 방법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라는 말씀이 분명히 깨우쳐 준다. 날마다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영적인 전쟁터에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을 붙들고 치열하게 살면서 하나님 안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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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게 하시는 방법 (시7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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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의 일 순위 (시71:4~12)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이 세상의 모든 관계와 만남이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일의 분주함과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살면서 정말 중요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살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건강하게 살고, 내 존재를 인정받으며 살기위해 애쓰는 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나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모든 만남과 관계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가장 일 순위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내 평생에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고백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신뢰의 하나님(4~5) 내 평생의 한분이신 하나님이 일 순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소망이며 신뢰하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린 시절부터 그 어떤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맺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평생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이 소망이며 가장 신뢰할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 책임이 일차적으로 어린 시절 양육하는 부모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 오늘 본문은 그 해답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며, 가장 신뢰하는 이로 살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나의 삶에 일 순위,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둘째:의지의 하나님(6~8) 내 평생의 한분이신 하나님이 일 순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모태에서부터 택하셨고 의지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력과 깨달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일상의 모든 순간에 녹아 있음을 고백하기 시작하면 본문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아멘으로 받아들 수 있게 된다. 성경을 보면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가 세례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을 만날 때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눅1:44)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레1:5)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택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시험과 환란이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셋째:동행의 하나님(9~12) 내 평생의 한분이신 하나님이 일 순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늙을 때에 버리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음으로 잃어버리고, 떠나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치이며, 창조의 섭리이다. 하나씩 놓아주고, 흘려보내는 것을 인정하며 그것을 순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고, 놓아 줄 결단이 있다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9절)라는 간구가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축복을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인가?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이 행복일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며, 은혜임을 기억하며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일 순위인 것을 놓치지 않기를 축원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소망한다. 요즈음 내 삶의 일 순위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를 무엇이 차지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예수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해답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뒤바뀐 순서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어려움을 만나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 순위를 붙잡고 승리를 경험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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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의 일 순위 (시7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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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시67:1~7)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모세가 소명을 받고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나와 관계된 것들, 나의 삶의 문제,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산적한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여기며 어리석은 믿음으로 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고백하고,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첫째:얼굴 빛을 비추심(1~3)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고백되어질 수 있는 첫 번째는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을 향해 그 얼굴을 드시고 바라보시는데 그 이유는 책망이나 질책이 아니라 바로 은혜를 베풀어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1절). 다윗은 그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음을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7~8)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대하는 것이 기쁨이 될 수도 있고, 두려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나를 향해 복을 주시고자 그 얼굴을 향하시고, 그 빛을 비추고 계신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세상의 것들만 쫓아다니고 바라보느라 하나님과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사는지,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둘째:공평히 심판하심(4~5)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고백되어질 수 있는 두 번째는 하나님의 기준은 언제나 정의로 공평하기 때문이다.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4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공평한 기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은혜이다.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이 분명히 기다리고 있기에 불의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타협하지 않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5~6)는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그 공평한 심판에 대해서는 의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53:1)의 말씀처럼 자기가 기준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심판자이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며 이 땅에서 수고하고 애쓰며 사는 것이 은혜이며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셋째:소산을 내어 주심(6~7)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고백되어질 수 있는 세 번째는 나의 필요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이다. “땅이 그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6절)에서 보듯이 나의 삶에 일용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땅이 소산을 내어 주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4~15)는 약속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살았던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이 솟았으며, 그에게 땅은 100배의 소산을 내어 주었다(창26:12~22).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 삶에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게 아무런 대가 없이 빌려 주신 것임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누리며 사는 인생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위해서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축복 선포하게 하셨는데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그 얼굴을 향하시고, 웃으시며,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마음보다 큰 은혜가 있을까? 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만 잊어버리고 살고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만은 붙들고, 기억하며 사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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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시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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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소중한 것들 (시63:1~11)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시편 63편은 사울왕에게 쫓기며 광야에 머물던 시절이 아니라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도망쳐야 했던 시기(삼하15장~16장)에 기록되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재를 뒤집어 쓰고 예루살렘을 나오면서 쫓아오며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의 소리를 들을 때 다윗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 삶의 가장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뒤로 하고, 막막한 광야에 머물 때 정말 자신이 의지하고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광야는 저주나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영적으로 잠들었던 내가 깨어나는 자리이며, 정신없이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는 은혜의 자리이며, 믿음이 다시 세워지는 회복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첫째:예배하는 자리(1~4) 광야의 삶이라 할지라도 소중하게 여겨야할 것의 첫 번째는 예배하는 자리이다.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는 자는 그가 머무는 곳이 바로 ‘성소’이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이 된다. 다윗은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광야에 있지만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절)라고 고백한다. 다윗에게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이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칠 때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레위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다윗과 함께 가려고 하였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삼하15:25)고 만류하며 돌려보냈다. 하나님의 궤는 없지만, 그 광야에 머물며 성소에서 내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하는 다윗의 모습은 상황이나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나의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야 함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둘째:일상의 터전(5~7) 광야의 삶이라 할지라도 소중하게 여겨야할 것의 두 번째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척박한 광야의 삶, 자신이 살던 왕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들은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은 그 광야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의 도움이 되시는 것 하나만으로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다윗은 자신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 곳에서 감사의 고백들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5절) 만족하며 살고 있으며, 왕궁의 침대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6절)의 기쁨을 고백하고 있다. 불평과 원망으로 밤을 세우고, 주변에 사람들에게 가시돋힌 말들을 쏟아 내면서 지금 나의 처한 현실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살지 말자. 다윗은 광야의 일상에서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됨을 감사하며 살고 있다.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동행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기쁘게 찬송하는 은혜의 자리에 머물기를 바란다. 셋째:하나님의 곁(8~11) 광야의 삶이라 할지라도 소중하게 여겨야할 것의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 그 손길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으시거니와”(8절)에서 보듯이 나를 대적하는 이들과,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모든 문제들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따를 때, 그 곁에 붙어 있을 때 해결된다. 그런 결단으로 광야를 지나갈 때 ‘주의 오른손’이 붙들어 주실 뿐 아니라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6~7)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 한 발 더 다가설 것인지, 세상을 향해 한 발 나아갈 것인지 분명히 결정하며 살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광야가 축복의 장소이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은혜의 장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은 사실 누리고, 곁에 있을 때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깨닫는 경우가 많다.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속여서 받고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던 야곱은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누워 잠들었다가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을 보고 그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부른다(창28:18). 아무도 없다고 느끼던 곳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곳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이제 빈털터리라고 여기던 곳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장소로 변하게 되었다.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 한 분임을 고백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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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소중한 것들 (시6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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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16절)
- 오늘은 우리가 등한히 했던 믿음의 본질을 상기해 보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 성서 표현으로 하면 더 좋은 곳, 하늘 본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성서 속 선열들이 본향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선열들이 이 땅에서 어떤 믿음으로 본향을 향했는지를 보겠습니다. 우선 질문할 것은 그들은 왜 이 땅 살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곳을 동경했을까? 무엇보다도 세상살이가 힘든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선조들도 순탄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들도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외롭게 살았습니다. 모두 기막힌 우여곡절을 한 웅큼씩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벨의 경우, 그는 인류 최초의 피살해자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형제에게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평범한 자연사가 아닙니다. 인간의 악이 최악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에녹도 힘든 세상을 살았습니다. 유다서에 에녹관련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다서 1:14~15) 경건하지 않다는 말을 네 번 반복합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홀로 경건히 살아야 했습니다. 노아의 경우도 세상 속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홍수 때, 노아 가족만 구원받았다는 그 자체가 세상의 오염도를 말해줍니다. 이들은 세상 속 외로운 섬에서 어떤 의식으로 인생을 살았을까요? 이들이 공통적으로 뚜렷하게 가진 의식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나그네신분이라는 의식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 땅은 임시거처로 알았습니다. 야곱의 경우,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후 바로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의 말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그네라는 표현을 통하여 자신이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는 자기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 할아버지 아브라함 모두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실제 그들은 천막생활을 하면서 가나안 땅 이곳저곳을 두루 이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뺏길 뻔 했습니다. 이삭의 경우, 그는 자신의 우물을 세 번이나 뺏겼습니다.(창 26장, 사막에서 양치는 일이 주업인 사람들에게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을 일했지만 품삯을 열 번이나 속았습니다. 모두 나그네이기 때문에 겪는 불이익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더더욱 이 땅이 아닌 더 나은 본향을 동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족장들만 그런 의식을 가진 게 아닙니다. 본향에 들어가는데 이생에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붙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그들이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 약속한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자신을 길손과 나그네 신세로 알았다고 합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기나요? 하나님 말씀이 내면에서 삶의 원리가 되고 삶으로 의식화된 결과입니다. 또한 예수정신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문제의식이 열매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바탕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이 발판으로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권력에 학대받는 약자들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그리는 것도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는 게 불운한 사람은 역설적으로 더욱 더 본향을 사모합니다. 진실로 가난, 억압, 착취, 차별 없는 곳에서 제 숨 편히 쉬고 살고 싶다는 소망이 강할수록 이생은 그렇지 못하니 더 좋은 곳, 하늘 본향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하늘본향을 의식하고 그리워하고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사십시오/ 대구새민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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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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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않을 이유 (시56:1~13)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자는 두려움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이라 선포하고 있다. 두려울 수 있지만 그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파도와 바람을 보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혀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믿음과 두려움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각 자의 삶을 자리에서 나를 두렵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문제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새 힘과 용기를 얻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담대함(1~4) 이 세상을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를 두렵게 하는 이들은 ‘종일’(1,2절)토록 멈추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리다”(3절)에서 보듯이 두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서 내려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요동하게 된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바로 ‘금송아지’사건(출32장)이다. 또한 민란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손을 씻는 빌라도의 모습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진리안에 사는 자는 세상의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담대함을 가지고 산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11절)라는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둘째:약속의 말씀(5~8) 이 세상을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의 두 번째는 하나님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은 나의 말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판단 될 것인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5절)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의인은 어느 곳에 가든지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풍조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그 마음에 품고, 그것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이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 예수님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복음 안에 살 때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 믿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면서 받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의 눈물은 “주님의 병”(8절)에 담겨지게 되고, 그것은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평안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면서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께 기억되어질 뿐만 아니라 참된 위로와 평안함으로 갚아 주심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내 편(9~13) 이 세상을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의 세 번째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내 편임을 삶을 통해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살아계심을 삶의 자리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9절)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그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58:11)의 고백처럼 의인은 의인의 삶대로, 악인은 악인의 삶대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원칙이며, 공의이다. 그 하나님이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24:1)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받은 손해와 피해를 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믿음을 지키며 사는 길이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편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편으로 살 때 우리는 어두움이 아닌 “하나님 앞, 생명의 빛”(13절)으로 다니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저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믿음 안에 살 때 은혜로 주시는 평안과 담대함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두려움을 만날 수 있지만 주님의 나의 힘과 도움이 되시며, 나의 산성이여 나의 요새이며 나의 소망이시기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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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않을 이유 (시5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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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사는 것 (시50:16~23)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평생 사는 것은 목적을 이루고, 원대한 꿈을 성취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씩 잃어버리는 것을 알아가며 붙잡지 않으려는 자세를 배워가는 시간들이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아니 영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것은 중요하고,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라질 것들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는 정말 중요한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정신없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깨닫고, 하나님을 다시 온전히 붙드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말씀(16~17)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는 첫째로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산다.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며, 그 입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만(16절), 실제로는 그 교훈을 미워하고, 그 말씀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뒤로 던지며(17절)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서 가뭄이 오고, 들려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그 분에 대한 믿음은커녕 존중이나 신뢰도 없기 때문임을 명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며 놓치지 않기 위해 사는지 점검하길 바란다. 둘째:임재(18~21)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는 둘째로 그 분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 도둑과 연합하고, 간음 자와 친구가 되고(18절), 입을 악에게 내어 주어 악한 말들을 일상처럼 쏟아 놓으며, 혀로 거짓말을 일삼으며(19절), 형제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형제간에 비방하는 것을 거리껴하지 않은 것(20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21절)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하나님을 잃어 버린자의 모습이다. 나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하고 돌이켜 보기를 바란다. 셋째:감사(22~23)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는 셋째로 감사가 없다. 감사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삶에 배여 있는 태도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진정한 감사가 드러나는 순간까지는 내면에서 치열한 영적인 전투가 필요하며, 그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감사의 제사가 필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23절)라는 말씀이 이를 증명해 준다. 감사하기 보다는 간구에 매달리고, 간구가 응답되어야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 감사는 그 삶에 자리 잡을 수 없다. 하나님이 계셔야지 감사가 흘러나오게 된다. 지금 내게 감사의 제목들이 사라졌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전제는 그 전에는 하나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의 모습에 대해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경고를 통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돈, 건강, 명예, 권력 그런 것들은 잃어도 된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정말 모든 것을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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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사는 것 (시5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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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난처, 나의 힘 (시46:1~11)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찬양은 인생의 가장 쓰리고, 처절한 순간이라 여겨질 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멈추지 않는 순간이다. 때로는 힘들고 아플 수 있지만 고난이 주는 유익은 그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물론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멈추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자녀들을 혼자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심을 기억하며 본문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고난의 순간에도 참된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쉬지 않기를 위해 결단하길 축원한다. 첫째:환난 중의 도움(1~3)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나의 힘이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의 첫 번째는 바로 환란 중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이다.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는 말씀은 환란이 결코 나쁜 것만을 동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본문을 살펴보면 환란 중의 도움이 되는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맞이하지 않도록 주변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3절)에서 보듯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을 주셔서 이겨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셔서 그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만, 고난을 정면으로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돌파하여 나갈 수 있는 평안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환란이 없다면 아무 문제도 없이 행복할 수 있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게 되면 환란이 없다면 큰 도움을 만날 수 없게 됨을 깨닫기 바란다. 둘째:흔들리지 않는 반석(4~7)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나의 힘이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의 두 번째는 바로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곳이 된다(5절). 또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절)고 말이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터널 같은 깊은 밤의 시간이 지나면 여명이 밝아오며 새벽을 지나 아침이 오듯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들은 긴 밤을 지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둠의 사자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은 새벽에 황급하게 자신에게 달려온 다리오 왕에게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단6:22)라고 고백한다. 문제는 얼마나 큰 환란이며, 과연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상황의 중심에 계시도록 내어 맡길 수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전쟁 중의 평화(8~11)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나의 힘이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의 세 번째는 바로 전쟁 중의 평화를 만드시기 때문이다. 전쟁을 멈추게 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패 또한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모두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증거이다. 가나안 땅을 둘러보고 보고하는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하고 정확한 판단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적인 확률게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믿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을 됨을 알지어다”(10절)는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출14:14),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다. 고난과 환란을 만나면 즉시 반응하기보다 멈추는 인생이 되자. 생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풀어내셔야지 그 결과가 평안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믿고,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고 말이다. 급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주변을 둘러보며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곤 하지만 항상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돌아서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 그 눈을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 때 나의 삶의 피난처이며,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그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으로 살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 넓은 품으로 우리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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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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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난처, 나의 힘 (시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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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의 권세(사사기13:17-18)
- 예수품교회 이영무 목사 어떤 목사님이 해외여행으로 비행기를 탔다. 전도를 해야 할 마음이 생겨서 승무원을 붙들고 “혹시 예수를 아느냐?”질문했다. 승무원은 “잘 모른다”라고 하더니 잠시 후에 와서 대답했다. “손님! 탑승객 명단에는 예수라는 분은 없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그럴수 있나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그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붕어빵 전도를 하다가 성탄절이 되어서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에게 물었다. “성탄절이 누구의 생일인지 아니?” 그 아이는 주저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산타클로스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이 사회에서 점점 줄어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12월의 몇몇 일간지의 기사제목은 이랬다. “해를 거듭할수록 냉랭한 성탄 분위기” “퇴조하는 크리스마스”등. 가슴아픈 기사 제목이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지난해부터 붕어빵 전도를 하면서 몇가지 원칙을 삼았다. 그중에 하나가 “절대로 교회이름을 전하지 않고 예수님만 전한다”이다. 왜 교회이름을 말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던 집사님도 계셨다. 지금까지 이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물론 돈을 받지 않고 최고의 재료로 만든 붕어빵을 봉지에 담아 아이들에게 전달하면서 묻는 질문이 있다. “이 맛있는 붕어빵을 누가 주시는 지 아니?” 이제 익숙해진 아이들은 주저없이 “네 예수님이 주세요”라고 대답한다. 필자는 의도적으로 봉사자들에게 그렇게 교육하고 있고, 필자도 직접 그렇게 물어서 그 대답을 받아낸다. 누구도 예수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신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누구로 부터도 예수라는 용어를 듣지 못한다. 학교에 가면 진화론을 가르친다. 붕어빵을 받으려고 줄을 서있는 한 아이에게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지 아니?” 라고 물었을 때 그 아이의 대답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원숭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의 근원과 뿌리가 원숭이라고 가르치는 죽은 학교의 교육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이제 우리는 예수 이름의 권세를 회복해야 한다. “예수” 그 존귀하신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한다.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 삼손이 태어날 때 마노아의 가정에 그 사실을 알린 사자의 이름이 기묘자이다. 그는 미가엘이나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가 아니라 바로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말한다. 이사야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외에도 예수님께는 또 다른 이름도 있다. 임마누엘이다(사7:14). 인간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마1:21)라는 이름에는 죄에서 구원할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상 어디에도 예수 이름만큼 존귀한 이름은 없다.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예수 그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다(행4:12). 그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그 이름 앞에 귀신들도 항복한다(눅10:17). 성경은 바로 그 예수님을 말한다(요5:39). 이 땅의 진정한 회복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높이는데서 출발한다.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찬송91장)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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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의 권세(사사기1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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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체험하는 삶 (시44:1~8)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기적이나 이적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많은 방법 중에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며, 삶의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체험의 본질이다. 신앙적인 체험은 믿음의 성장과 성숙에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 아래서 영적인 체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그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지 살펴보고, 온전히 결단함으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첫째:기뻐하시는 자(1~3) 매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이되기 위한 첫 번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살아야 한다. 본문은 자신의 조상들이 출애굽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이유는 바로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3절)라 고백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손길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창15:6)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되어 삶을 살 수 있을까?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제시하신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실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였다. 또한 베드로가 변화산상의 체험을 고백하면서 들은 소리는 무엇인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벧후1:17)였다.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영접하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의지하는 자(4~6) 매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이되기 위한 두 번째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없는 인생임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세례요한은 백성들의 죄악을 꾸짖으며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을 내려놓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직 내가 빼지 못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맡기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셋째:드러내는 자(7~8) 매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이되기 위한 세 번째는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떤지를 정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인생의 바닥을 치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으로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은 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는 것(8절)은 내게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믿음으로 행동하며 살아야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살 때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며 살게 된다. 나는 무엇을 드러내며 살고 있는가? 나의 자랑거리가 이 세상 떠나면 사라질 것들에 불과하다면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 체험적 신앙이 유익하고,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며, 우리가 달려가는 것도 이 세상의 성공이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힘을 얻고, 용기를 내어 삶의 문제들 가운데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마지막은 영원한 것을 향하여야 함을 명심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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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체험하는 삶 (시4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