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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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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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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4
  • [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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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4-12-17
  • [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2
  • 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1
  • [금주의 말씀]거룩이 사랑임을 삶의 예배로 드리며(레위기 19장 1~10절)
       모세오경인 레위기는 구약성경의 주제인 '제사장 나라'를 관통하며,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로 이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레위기 19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이자, 동시에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명령을 통해 자비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를 16번이나 강조하는 레위기 19장에서, 예수께서 구약 전체를 요약하며 인용하신 말씀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만나는데, 바로 이때 우리의 거룩은 일상의 차원이 됩니다.    레위기 19장은 룻기 2장과 함께 이어집니다. 레위기 19장에는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품위 있고 위로가 되는 법이 기록돼 있습니다.(레 19:9~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인데 장차 그들이 자기 밭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 추수를 할 때 밭모퉁이 일부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수준 높은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제사장 나라 법'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통해 주신 이 밭모퉁이 법을 베들레헴의 보아스가 그의 밭에서 실천하였기에 룻기에서 보아스는 타국인 룻을 위하여 네 가지 배려(룻 2:8-16)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제사장 나라 법을 실천했습니다. 이후에 보면 추수 때가 지나면서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는 과정에서도 제사장 나라 법인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을 지켜감으로 결국 그 가문에서 하나님의 종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마 1:1~6)이, 보아스가 제사장 나라 '밭모퉁이 법'을 지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에 밭모퉁이 일부를 남겨 두라는 준엄한 명령은 하나님의 무한하고도 거룩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고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미리 ‘가나안 그들의 밭에서’ 지켜야 할 법을 주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라 하는데 이는 “분리하여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 자신을 구별해 드리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 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9장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같습니다.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으로 품꾼의 삯을 당일에 주어야하며(레 19:13), 공의로 재판해야 하며(레 19:15), 공평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라(레 19:36)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다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부부의 영적인 하나 됨을 통해서 무너진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 거룩의 시작입니다. 거룩한 부부의 삶의 축복이 자녀에게 흘러가며, 거룩한 가정들이 세워져야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으며 거룩한 나라가 될 수 있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하며 ‘거룩은 사랑’입니다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읽어내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08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고난 속의 길잡이 (시119:105~11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고난과 환란의 문제들을 피할 수 없지만 그것에 빠져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잘 헤쳐 나가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네 인생의 길잡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산을 오르는 등반가와도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셰르파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잠언은 “교만은 패방의 선봉이요”(잠16:18)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통해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내 자신의 교만함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다시금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등과 빛(105~106)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에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이유 첫 번째는 칠흑 같은 고난 속에서 그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등과 빛이 되기 때문이다. 어둠속에서 한 걸음을 내 딛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멈추어서 꼼짝도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되어 그 한 걸음을 내 딛게 해 주신다.   그 고백이 바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절)이다. 큰 풍랑이 이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자신에게 명령하여 자기도 물위로 걷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물위를 걷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마14:28~30).   이 놀라운 기적도 배에서 그 발을 내려 물위에 딛는 그 첫걸음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첫 걸음을 내 딛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두려움과 문제들 앞에 서게 될 때, 그것을 향해 당당하게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이 되시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참 지혜(107~110)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에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이유 두 번째는 그 어떤 세상의 교훈과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109절),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0절)라는 자세로 살 때 고난 속에서 승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비결이다. 유라굴로라는 폭풍에 갇혀 로마로 향하던 바울과 그 일행들은 살 수 있겠다는 소망을 버리고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 바울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276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소망을 준다(행27:22~26).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삶에 밀려오지만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참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마음의 즐거움(111~112)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의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이유 세 번째는 절망적인 고난 속에 처할지라도 마음에 두려움이나 근심이 아닌 즐거움을 주셔서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112절)에서 보듯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것에 모든 힘을 기울일 때 말씀안의 즐거움에 거할 수 있게 된다.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리다”(시57:7절)라고 고백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고난의 문제도 능히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이 있는가?   혹시 세상의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말씀이 주시는 기쁨이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자신은 비록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웠던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 부르실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절)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약속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다.   영적인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란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 내 인생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길잡이가 되는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며 사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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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6-26
  • 내 삶의 근원 (시119:65~7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디에 뿌리는 내리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이 된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덩쿨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옥토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나의 마음이, 나의 삶이 옥토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유익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유익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말씀 안에 붙들리어 살기를 고백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지혜의 근원(65~66)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주는 유익의 첫 번째는 삶의 모든 명철과 지혜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지금까지 지내 온 모든 시간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하셨고, 그 선대해 주심의 결과임을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이 참된 지혜의 근원이시기에 그 분의 말씀 안에 사는 것만큼 지혜로운 것은 없다.   나를 가장 지혜롭게 빛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올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꼭 하나님의 이름이, 그 분이 하셨던 일들이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어 사는 자가 될 때 참된 지혜를 흘려보내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가 되길 바란다.  둘째:선의 근원(67~69)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주는 유익의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는 언제나 선한 길을 걸어가게 된다.   본문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가 선한 자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68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존재 자체가 선하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선함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는 선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셋째:즐거움의 근원(70~72)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주는 유익의 세 번째는 내가 즐거워하는 모든 일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가 누리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고난을 대하는 올바른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도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71절)고 말하고 있다. 사실 고난당하는 것이 무슨 유익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난이 없는 것이 진짜 유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그 고난이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깨닫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고 고백한다. 소망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영적싸움에서 승리해야 소망을 이루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무기력해져서는 안 된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물론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수 있다면 언제나 벅찬 환희와 감격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무 빨라서 날아가는 것 같은 우리네 인생을 어디에 뿌리박고 살 것인지 분명하게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참으로 많다. 믿고 의지할 만한 것도 쉽게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내세우거나 의지할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잊지 말라.   우리는 항상 멀리에 있을 것 같은 헛된 꿈을 찾아 방황하며 살고 있지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가까이에 있다. 그 가장 좋은 것 중의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명심하며 항상 가까이하며 그 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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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6-19
  • [금주의 말씀] 구원의 노래(눅23:39~43)
      성경이 말씀하는 율법에서 우리는 죄인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릴 대신해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다. 성경의 말씀을 여섯 글자로 말하면 ‘예수님 이야기’이고, 한 글자로 줄이면 ‘피’이다.   본문에서 두 강도는 과거의 연속적인 범죄의 습관적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범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됐다. 파스칼은 「습관은 제2의 인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옛 속담에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임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운명하셨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살아가면서 선행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주님 안에서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여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재물을 선행함으로 행하여야 한다. 성도의 선행은 이름없이 행하여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성도가 본받아야 내적인 기쁨과 행복이 있다(눅10:30-37). 성도의 행실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착한 일을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약2:26). 그러나 믿음없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이다(엡2:8).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입술의 고백은 중요하다. 입술을 통해서 인격이 나타나고, 입술의 고백이 믿음의 정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에 따라서 말로 표현하게 되고 말하는대로 이루아짐은 그만큼 말에 힘이 있다는 증거이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 행실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누추함과 더러움을 마주하게 된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라.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5:8).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그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사랑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다. 우릴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 십자가 사랑을 아는 성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는다.   본문에서 예수님 우편의 강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술로 고백함으로 낙원에 있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이고 교회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하며 서로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실을 든든히 하라. 이것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송학교회 목사·강진기독연 회장·호남제주침례연 사무총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12
  • 말씀 안에 살면 (시119:1~8)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분명하게 주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적인 지식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관심만 가지면 어떤 분야이든지 정보를 검색하고,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창조 이래로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하고,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점점 관심을 잃어버리고, 멀어지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온전한 존재로 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복이 있다(1~2)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바로 말씀 안에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119편의 시작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이 있음이여’(1절)로 시작하며,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절)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원칙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변함없이 고수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을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신30:15~16)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금수저이다. 출발점이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고, 말씀 앞에 깨어 있음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축복의 삶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말씀 안에 사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란다.  둘째:옳은 길이 있다(3~5)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의 두 번째는 말씀 안에 살 때 불의한 길이 아닌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사는 자들은 옳은 길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의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3절) 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내 길을 굳게 정하사‘(5절)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옳은 길을 제시해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의 고백은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욥23:11절)에서 완성 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어느 길에 서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셋째:부끄러움이 없다(6~8)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의 세 번째는 말씀 안에 살 때 내 자신에게는 물론 세상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리다“(6절)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할 때, 즉 집중하고 그것이 내 삶의 원칙이 될 때 부끄러움 없는 인생이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성령을 받고, 사도의 책임을 감당하였던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게 되는 모습은 누구라도 이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할 때 할례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됨으로 함께 있던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떠나고, 심지어 바나바도 흔들리게 된다(갈2:11~13).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부끄러움에 울부짖었던 베드로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다시금 부끄러움에 자리에 머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깨어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나도 매일 부끄러움에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에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깨어있는 자가 있을 때 그 능력이 드러나게 된다.   세상에는 말씀이 차고 넘치지만 나에게는 말씀의 가뭄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말씀 안에 사는 유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알지만 그 결단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 두려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로 결단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12
  • 선포해야 하는 이유 (시118:1~18)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선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막연하게 예수님의 지상 최대의 명령이니, 혹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한 대가 정도로만 인식하다 보니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에 소극적이며, 부끄러워함으로 살아가게 된다.     바울이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행17:18)라고 부른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여기던 이들과의 대화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는 그 모습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왜 하나님을 향한 말쟁이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 이름을 높이며 사는 자가 되길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의무이기 때문(1~5)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말하기를”(2절),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4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를 선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은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주어진 삶의 자리 자리에서 선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 하나이다,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렘20:7~8절)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이런 조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해 보지만 “그의 이름으로 다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는 심정을 토로한다.   오늘 나에게는 이런 열정과 마음이 있는가? 그저 마지못해, 흉내만 내고, 생색만 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둘째:신뢰하기 때문(6~13)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의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향한 뜻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사는 자는 안하무인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믿음의 담대함으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온전한 내 편이시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본문은 “여호와는 내 편”(6절, 7절)임을, “여호와께 피하는 것”(8절, 9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환란과 고난 중에 내가 정말로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절)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자가 그 이름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다.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는 사람들도 그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진짜를 소유한 우리가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에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구원이시기 때문(14~18)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의 세 번째는 하나님만이 내 인생이 유일한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오른손으로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자의 장막에는 기쁨이 넘치고, 구원이 흘러나온다(15절). 그 구원을 경험하며 사는 자는 생명을 주시는 동안에 그 이름을 선포하며 살아야 한다(17절).   아직 내게 남은 생이 있고,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다 마치지 않았기에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만류하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두려움 없이 선포하고 있다.   내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참 구원자이시다. 그 분이 영생을 위해서 내게 주신 사명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기쁨으로 감당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던 군중들과 그의 제자들이 소리 높여 찬양을 하고 그 이름을 높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들을 책망하여 그치게 하라고 말한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고 말씀하셨다. 묵상하며, 침묵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지만 오늘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목소리 높여 하나님의 은혜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 귀중한 책임을 돌들에게 양보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한 주간 어느 곳에 머물고, 무엇을 하며 사는가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세우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 이름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내며 기쁨과 축복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05
  • 동행하는 자의 모습 (시108:1~13)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을 내리시고, 그대로 잘 살고 있는지 가끔 사람을 보내거나 찾아오셔서 점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날마다 그 자녀의 삶에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는 것이 은혜가 될 것인지, 아니면 엄청난 저주가 될 것인지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점검해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마음을 다해 찬양하라(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은 나의 감정이나, 내 믿음의 고백을 담아내는 중요한 방식이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출발은 마음이다.   더욱이 “내 마음을 정하였으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절)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채워진 상태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에서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내 마음이 가득 채워져서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약1:8)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마음으로 가득한 자의 모습이다. 나의 마음에는 무엇이 채워져 있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현실적인 나의 삶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귀를 열어 들으라(6~9)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두 번째는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응답하시며(6절), 그의 성소에서 말씀해 주셨다(7절)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성소”(7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자세를 가지고 살았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께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귀를 열고 하나님 앞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과 방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심을 확신하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순종함이 동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라고 하시며 말씀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귀를 열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삶을 살려고 하는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길 바란다. 셋째:눈을 들어 선포하라(10~1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세 번째는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20:7~8)라는 고백 속에 살아간다.   믿음의 기도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그 문제를 만져 주실 때 완전한 승리가 주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문제를 만날 때 사람을 찾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그 역사를 믿고 구하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믿음의 선포를 하며 살고 있는가? 믿음의 선포는 나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축복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세상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 눈이 가려져 있으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 들어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7).   예루살렘에서 엠마오의 거리가 이십 오리(눅24:13) 정도의 거리인데 그 긴 시간을 걸어가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삶에도 함께 하고 계시지만 내가 그 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자신의 창조하신 피조물과 동행하신다. 그런 하나님과 나는 동행하고 있는가?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나의 신앙의 모습을 바로 세워가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31
  • [설교]흥왕케 하는 사람이 됩시다 ( 느헤미야 2장 10절)
      우리의 인생이 우리들이 있는 곳마다, 공동체마다 사람을 흥왕케 하고 기도를 흥왕케 하고, 말씀을 흥왕케 하는 인생 되시길 축복합니다. 흥왕케 하는 인생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더하리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흥왕케 하는 사람은 소원과 버킷리스트를 구분합니다.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면 좋겠지만, 안해도 아쉽지만 괜찮은 것입니다. 그것 안 한다고 죽을 만큼 괴롭거나 힘든 것은 아닙니다. 소원은 목숨 걸고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버킷리스트를 소원이라고 유혹합니다. 돈과 명예는 좋아 보이지만 인생의 목적이나 소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아가면서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소원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결이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임을 알아야 합니다.모든 인생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타락과 구속과 구원의 틀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각각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성공과 행복에 목숨 걸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병과 가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민감해지고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매일매일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주십니다.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입니다.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도 순간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를 직면할 때 문제를 문제삼지 말고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얼굴에도 근심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원수 마귀는 기도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마음을 집어넣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임하면 기도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근심 다 버리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쉬지 기도해야 합니다.(살전5:16-18)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해도 우리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고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다. 그때!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해결할 능력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 해결이 있고 정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으로 삶을 허비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빛 되신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주님 앞에 다섯 번 기도하고, 연합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은 같이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형식, 전심으로 예배 드리는 것은 내용입니다. 내 몸을 쳐서 하나님 앞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정규적인 경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말 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유호교회 담임·경상남도기독교총연합회 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23
  • 감사하며 찬양하라 (시107: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인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온전하게 고백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3~14)의 고백처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아는 자들은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는가?     본문은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혹여나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을 잃어 버렸다면 다시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첫째:구원해 주심(1~3)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속량’의 사전적 의미는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일반백성이 되게 함’의 뜻이 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과 출발을 할 수 있는 되는 것이 바로 ‘속량’을 받은 자의 모습이다.   시107편은 바벨론 포로시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배경으로 쓰여 진 것으로, 정치적이나 현실적으로 볼 때는 바사의 고레스의 명령(역대하36:22~23)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2절)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며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루심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비유처럼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음에도 백 데나리온을 갚지 못하는 이(마18:23~35)를 향해 불평과 원망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며, 그 감사와 찬양이 이 땅을 향해 흘러가기를 바란다. 둘째:부르짖음을 들으심(4~7)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이다.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5~6)라며 분명한 고백이 있는데,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에 차고 넘친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도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출3:7;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에게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말씀하시며 부르짖을 것을 명령하신다.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도움을 호소하며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가?  셋째:채워주심(8~9)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모든 것은 한 마디로 하자면 ‘기적’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8절)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매일이 기적의 순간들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기적의 출발점은 바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하며 찬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9절)이 되어야 한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것을 사모하고, 배고파 할 때에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 주린 영혼’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자세를 온전히 가지면 하늘의 것을 사용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축복을 경험하게 살게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내가 감사와 찬양으로 보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고, 원망과 불평으로 투덜거리며 지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다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사는 축복의 날이 될 줄 확신한다. 이 축복의 삶을 붙들고 누리시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22
  •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 비결 (시99:6~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을 보면 “그의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6절)며 세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있는가?  그 수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맡겨진 사역을 감당했던 셀 수 없는 이들 가운데 사무엘을 언급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영적 관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각자의 삶 속에서 나와 하나님은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올바른 기도(6)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비결은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모세와 아론, 사무엘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6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며 관계에 기반이 되어 기도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셨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큰 소리로 하셨던 기도의 내용이다. 과시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응답받는 기도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각자 기도 모습을 돌아보자. 나의 기도는 왜 응답받지 못할까?   다른 어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임은 아닌지 점검해 보고, 올바른 기도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둘째:말씀을 행함(7)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행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함께 하는 이들은 그 말씀을 귀로만 듣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지키며 사는 자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니라”(신30:11,14)고 말씀하셨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그 말씀을 존중하며 따르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용서를 받음(8~9)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세 번째 비결은 죄와 허물을 용서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이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8절)고 기록하고 있다.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질 수 있는 죄의 모습들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하나님께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실 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사야 선지지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2)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죄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못하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 죄는 나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심 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고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해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1~13)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살며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인생은 고난 중이라도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큰 축복을 누리며 사는 자임을 명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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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5-16
  • 잊지 말아야 할 것 (시95:1~11)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중요한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안타까워 눈물 흘리시면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었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고 말씀하셨다.   기억력의 문제나 습관처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믿음에서 멀어지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잊지 않으려고 더욱더 믿음 안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점검해 보고, 굳게 붙들고 살기를 결단하기를 축원한다.  첫째:왕 되신 하나님(1~3)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왕이시라는 사실이다.   본문에 보면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3절)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혼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영적인 존재들에 불과할 뿐이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신들을 위한 제단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행17:23)도 언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으로 어리석게 살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게 된다.  나의 삶이 매일 흔들리고, 확신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진정한 왕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심은 그 권위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저 입바른 말로 하나님이 나의 왕이 아니라 순종과 복종으로 왕이신 하나님 앞에 머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둘째:주의 백성과 양(4~7)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두 번째는 바로 우리 모두가 주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7절)으로 삼으셨다고 하신다. 그 어디에 속하는 것보다 가장 큰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손길 아래 머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5~16)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고 그의 손으로 돌보시는 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어떠한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셋째:은혜의 경험(8~11)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세 번째는 바로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녀들의 삶에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았던 40년의 시간들을 상시시키고 있다. 특별히 므리바 혹은 맛사라고 불리는 곳에서 있었던 일(출17:1~7)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모세와 다투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완악해지면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능력을 조사하게 된다(9절). 마음이 완악해지기 시작하면(8절), 그 마음이 미혹에 빠지게 되고(10절), 미혹된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느끼고 있는 당장의 결핍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믿음의 자리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부어 주신 은혜만 따져보아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매일 다가오는 일상의 부족함들이 나의 마음을 흔들고, 그 흔들림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어리석은 자리로 몰아간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그 땅에 들어가면 집에 거주하며, 소와 양이 번성하게 될 것이며, 네 소유가 풍부하게 될 것이라 하시며 그런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7~18)고 말이다.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쉽게 잊고 지낸다. 당연하게 여기며, 무덤덤하게 감사의 메마른 나의 모습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다른 건 다 잊어도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만큼은 잊지 않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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