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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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하나님의 딜레마(호세아 6장 1~3절)
       몇해 전 바둑기사 이세돌와 AI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있은 후, 우리에게 이제 AI는 삶의 영역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이 AI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율주행차로 하여금 피할 수 없는 기로에 서도록 하여 운전자나 보행자 간에 희생자가 발생하도록 가상의 상황을 연출하여 결정케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이것을 ‘Trolley Dilemma’실험이라고 합니다. 성도분들께서는 이런 기로에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사실 ‘딜레마’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사용합니다. 딜레마의 뜻은 ‘진퇴양난에 빠지다’라는 뜻인데 조금 전 AI가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것처럼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결국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서는 것을 ‘딜레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딜레마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도 딜레마에 빠지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것은 딜레마의 해답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유난히도 호세아서에는 “벌하시겠다 용서하겠다, 죽이겠다 살리겠다, 심판하겠다 사랑하겠다”는 복잡한 심경의 변화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혹여나 변덕쟁이가 아니신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실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욥기 34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갈팔질팡 하실까요?   그것은 그분의 위치와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치상 판결하시는 분입니다. 호세아 4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논쟁’은 법정용어로 마치 검사가 피고의 죄를 나열하는 듯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상 그분의 목소리를 불호령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딜레미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위치는 공의이신데 마음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 러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 1절은 이러한 주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에게 매를 드시지만, 다시 낫게 하신다는 것은 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완곡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자주 표현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말고 그분의 마음을 다른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때리셨지만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것이 아닙니다. 찢으셨지만 함께 찢어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찢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싸매실까요? 2절은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를 부활의 예표로 보기도 합니다. 다시말해 무엇으로 싸매실까요? 아들을 내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내주신 은혜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등학교 시절 거짓말 안해본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되도않는 거짓말을 해서 담임선생님이 시말서와 함께 부모님을 데려오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떨려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때 어머니께서 함께 울어주시고 용서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말 없이 가장 귀한 존재를 주셔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이라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생명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른 태도는 그분을 더욱 알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러한 모습이 넘쳐나길 축원합니다./일산하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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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소망(고전15:1~58)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진리의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사망 권세에 영원히 갇혀서 소망을 잃어버린 모든 인류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부활이 GOOD NEWS인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기적,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또한 부활은, 세상을 장악한 마귀권세와 그의 하수인들의 힘과 계획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퀘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이 세상 神인 악한 영들에게 비참하게 모든 것을 강탈당한 것(질병, 불신앙, 우상섬기는 일, 미래의 소망까지 빼앗긴 인생들)을 다시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역전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힘과 질서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이를 응징한 大事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대사건이어서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이며,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영성을 갖춘 영적인 존재, 즉,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이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먼 미래의 그 종말적 재림의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께 연합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과 성도들이 부활의 큰 사건과 위대함을 너무 가벼운 일회성 행사로 전락시킨 면을 안타까워해야 할것이며 더 크고 위대하게 선포하며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안일하게 타협하며 내세지향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지켜져 온 것이 아닌가, 그저 나의 죽음 이후를 보장하고, 우리 성도들의 죽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는 단순한 일회성 절기로 소홀이 취급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그날의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다시 오늘 살아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성경적인 부활은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죄와 더불어 먹고 살았던 육적인 모습, 자신의 죄 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자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을 선하신 하나님께로 고정하고 나의 존재를 의의 도구로, 성품을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20~58)/유향교회 목사·예장 합동개혁측 대전광역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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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설교] 최고의 역전 드라마, 부활
    김 학겸 목사    극적인 드라마를 보면 그 안에 반전이 있습니다. 인류 최고의 역전 드라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보기 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요20:1).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요20:2). 그리고 두 제자도 달려가서 빈 무덤을 보고 시체가 도난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열린 무덤은 그저 놀라운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걱정이나 열정도 그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요20:16). 마리아는 눈으로 볼 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귀로 듣고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리아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요20:21).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다음 세대가 부활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받은 사명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말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요20:21-22). 우리의 능력과 가진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소유가 아닌 예수님의 성품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명 받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감과 죄책감 등으로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신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상처 입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명 감당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죽음 너머에 위대한 부활이 있었음을 믿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새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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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설교] 건축자들이 버린 돌
       성경 시편 기자는 시편118편 22부터 23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18편 22절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면서 자주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약의 성경구절의 예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은 교만한 지도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인 건축자들은 이 돌이 쓸모 없다고 버립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지을 성전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재료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은 성전을 짓는 최고의 기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보기에 성전은 튼튼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재료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절 2절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건축자들이 건축한 이 성전은 로마 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처럼 벽돌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만이 존재할 뿐 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옮겨 다닐 수 없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성전이 되어 어디든 옮겨 다닙니다. 여기도 저기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이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성전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축공사에서 제일 먼저 놓이는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이 돌은 건축하고자 하는 벽의 방향과 길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린 돌이 되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머릿돌 위에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따르고 믿고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다시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그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기적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인생이 풍요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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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3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형통한 자로 살자 (창39:1~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형통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어감’인데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형통의 의미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되어감’이 되어야 한다.   누구의 뜻이냐에 따라서 진정으로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내 뜻대로 형통한 것은 기쁨과 축복을 받는 것 같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죄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하는 벗어날 수 없는 덫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형통한 것은 당장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 궁극적으로 이루어가는 놀라운 축복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형통한 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지를 깨닫고 주어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통한 자로 살기로 결단하며, 그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첫째:형통의 시작(1~2)  내 삶이 형통한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첫 번째는 형통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성경 어디에도 요셉 노예로 팔려가는 처절한 심정이 그려진 곳은 없고 모든 과정을 너무나도 간단명료하게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라고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상황이나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있느냐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것이 형통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현재의 나의 모습이나 상황, 현실적인 문제들의 해결 방법이 형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형통을 경험하며 사는 원칙이며 비결이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고백하며 참된 형통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둘째:보여지는 형통(3~4)  내 삶이 형통한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모두에게 분명하게 보여 지고 인정되어야 한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다. 그의 형통함은 그 집의 주인인 보디발의 눈에 보여 진다(3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형통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형통함도 모든 사람의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형통이 사람들에게 숨겨 질리는 만무하다.   초대교회 당시 복음 안에 사는 이들은 서로의 물건을 나누어 쓰며, 모이기에 힘쓰며 살았다. 그 결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는 부흥의 역사가 쓰여 진다.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한 삶을 사는 자는 그 삶으로 형통함이 드러남을 깨닫고, 그 모든 과정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세상적인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형통함에 집중하며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셋째:흘러가는 형통(5~6)  내 삶이 형통한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세 번째는 형통한 자는 자기는 물론 함께 하는 자들에게 형통의 복을 흘려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을 보면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5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형통은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통함의 축복을 받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더불어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 제일 좋은 것은 내가 요셉처럼 하나님의 형통을 받고 사는 자가 되는 것이지만 보디발처럼 하나님의 형통함에 거하는 자와 화목하여 더불어 사는 것 또한 귀한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때로는 내가 요셉이 될 수도 있고, 보디발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도록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지 하나님이 더 많은 흘려보낼 수 있도록 채워 주신다. 움켜쥐고 나만을 위해서 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거두어 가심을 명심하고 살자.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을 위해 축복을 말씀을 주시고 그대로 행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는데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7)고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형통한 자로 살기를 너무나도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형통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나는 형통이 됨을 물론,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진짜 형통의 삶을 사는 한 주간이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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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7-10
  • 말씀이 주는 유익 (시119:145~15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세상은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소위 성공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살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세상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참된 유익을 얻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된다.     그저 입술로만 말씀이 주시는 유익을 사모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내 삶에 진정한 유익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부어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구원의 소망(145~146)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의 첫 번째는 구원받는 유일한 길에 대한 분명한 길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의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구원해 달라는 믿음의 간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전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잊고 사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원망의 부르짖음과 신뢰의 부르짖음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하나님이 말씀이,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향해 주셨던 약속의 언약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신뢰의 부르짖음이 있음은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며 살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부르짖음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 안에서 살기로 결단하는 부르짖음으로 살 때 내게 주신 구원의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승리하는 인생이 된다.  둘째:삶의 능력(147~149)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의 두 번째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신앙은 물론 일상의 순간들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 되시는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147절),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8절)라는 고백은 말씀에 잠기어 살기에 이른 새벽에 눈을 뜨는 것은 물론 밤새도록 그 말씀 안에 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을 보면서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말씀에 깊이 들어가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질 수 있음을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경험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은 나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에 힘이 되는 것과 동시에 일상의 삶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의 유익이, 그 빼앗아갈 수 없는 능력이 모두에게 충만하길 축원한다.  셋째:함께하는 힘(150~152)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의 세 번째는 나의 곁에 가까이 계셔서 항상 영원한 진리로 깨우쳐 주신다는 것이다.   이 땅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는 두 존재가 가까이에 있다.   하나는 “악을 따르는 자들”(150절)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151절)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악을 따르는 자들과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가까이 있다는 의미는 내가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를 매 순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고 권면한다. 인생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 만을 잘 알아도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에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길을 가야할지 헷갈리는 순간에 악인들의 속삭임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자가 되어 말씀이 주시는 진정한 유익을 경험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답지와 해설지를 받고 난 후에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다. 정답도 알고, 그 답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답지를 신뢰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문제를 풀어 오답을 적어내는 어리석은 인생이라 여겨진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보다 크고, 가치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컨대 단 하나도 없다. 그 말씀이 날마다 각자의 삶에 깊이 새겨지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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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7-03
  • 고난 속의 길잡이 (시119:105~11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고난과 환란의 문제들을 피할 수 없지만 그것에 빠져 절망하는 자가 아니라 잘 헤쳐 나가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네 인생의 길잡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산을 오르는 등반가와도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셰르파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잠언은 “교만은 패방의 선봉이요”(잠16:18)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통해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내 자신의 교만함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다시금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등과 빛(105~106)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에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이유 첫 번째는 칠흑 같은 고난 속에서 그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등과 빛이 되기 때문이다. 어둠속에서 한 걸음을 내 딛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멈추어서 꼼짝도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되어 그 한 걸음을 내 딛게 해 주신다.   그 고백이 바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절)이다. 큰 풍랑이 이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자신에게 명령하여 자기도 물위로 걷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물위를 걷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마14:28~30).   이 놀라운 기적도 배에서 그 발을 내려 물위에 딛는 그 첫걸음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첫 걸음을 내 딛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두려움과 문제들 앞에 서게 될 때, 그것을 향해 당당하게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이 되시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참 지혜(107~110)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에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이유 두 번째는 그 어떤 세상의 교훈과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109절),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0절)라는 자세로 살 때 고난 속에서 승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비결이다. 유라굴로라는 폭풍에 갇혀 로마로 향하던 바울과 그 일행들은 살 수 있겠다는 소망을 버리고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 바울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함으로 276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소망을 준다(행27:22~26).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삶에 밀려오지만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참 지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마음의 즐거움(111~112)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 속의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이유 세 번째는 절망적인 고난 속에 처할지라도 마음에 두려움이나 근심이 아닌 즐거움을 주셔서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112절)에서 보듯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것에 모든 힘을 기울일 때 말씀안의 즐거움에 거할 수 있게 된다.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리다”(시57:7절)라고 고백한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고난의 문제도 능히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이 있는가?   혹시 세상의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말씀이 주시는 기쁨이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자신은 비록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웠던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 부르실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절)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약속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다.   영적인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란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 내 인생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길잡이가 되는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며 사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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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3-06-26
  • 내 삶의 근원 (시119:65~7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디에 뿌리는 내리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이 된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덩쿨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옥토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나의 마음이, 나의 삶이 옥토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유익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유익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말씀 안에 붙들리어 살기를 고백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지혜의 근원(65~66)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주는 유익의 첫 번째는 삶의 모든 명철과 지혜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지금까지 지내 온 모든 시간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하셨고, 그 선대해 주심의 결과임을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이 참된 지혜의 근원이시기에 그 분의 말씀 안에 사는 것만큼 지혜로운 것은 없다.   나를 가장 지혜롭게 빛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올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꼭 하나님의 이름이, 그 분이 하셨던 일들이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붙들리어 사는 자가 될 때 참된 지혜를 흘려보내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가 되길 바란다.  둘째:선의 근원(67~69)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주는 유익의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는 언제나 선한 길을 걸어가게 된다.   본문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가 선한 자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68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존재 자체가 선하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선함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는 선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셋째:즐거움의 근원(70~72)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주는 유익의 세 번째는 내가 즐거워하는 모든 일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가 누리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고난을 대하는 올바른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도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71절)고 말하고 있다. 사실 고난당하는 것이 무슨 유익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난이 없는 것이 진짜 유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그 고난이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깨닫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고 고백한다. 소망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영적싸움에서 승리해야 소망을 이루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무기력해져서는 안 된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물론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수 있다면 언제나 벅찬 환희와 감격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무 빨라서 날아가는 것 같은 우리네 인생을 어디에 뿌리박고 살 것인지 분명하게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참으로 많다. 믿고 의지할 만한 것도 쉽게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내세우거나 의지할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잊지 말라.   우리는 항상 멀리에 있을 것 같은 헛된 꿈을 찾아 방황하며 살고 있지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가까이에 있다. 그 가장 좋은 것 중의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명심하며 항상 가까이하며 그 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19
  • [금주의 말씀] 구원의 노래(눅23:39~43)
      성경이 말씀하는 율법에서 우리는 죄인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릴 대신해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다. 성경의 말씀을 여섯 글자로 말하면 ‘예수님 이야기’이고, 한 글자로 줄이면 ‘피’이다.   본문에서 두 강도는 과거의 연속적인 범죄의 습관적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범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됐다. 파스칼은 「습관은 제2의 인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옛 속담에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임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운명하셨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살아가면서 선행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주님 안에서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여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재물을 선행함으로 행하여야 한다. 성도의 선행은 이름없이 행하여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성도가 본받아야 내적인 기쁨과 행복이 있다(눅10:30-37). 성도의 행실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착한 일을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약2:26). 그러나 믿음없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이다(엡2:8).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입술의 고백은 중요하다. 입술을 통해서 인격이 나타나고, 입술의 고백이 믿음의 정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에 따라서 말로 표현하게 되고 말하는대로 이루아짐은 그만큼 말에 힘이 있다는 증거이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 행실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누추함과 더러움을 마주하게 된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라.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5:8).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그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사랑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다. 우릴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 십자가 사랑을 아는 성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는다.   본문에서 예수님 우편의 강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술로 고백함으로 낙원에 있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이고 교회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하며 서로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실을 든든히 하라. 이것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송학교회 목사·강진기독연 회장·호남제주침례연 사무총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12
  • 말씀 안에 살면 (시119:1~8)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분명하게 주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적인 지식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관심만 가지면 어떤 분야이든지 정보를 검색하고,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창조 이래로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하고,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점점 관심을 잃어버리고, 멀어지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온전한 존재로 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복이 있다(1~2)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바로 말씀 안에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119편의 시작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이 있음이여’(1절)로 시작하며,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절)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원칙을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변함없이 고수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을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신30:15~16)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는 금수저이다. 출발점이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고, 말씀 앞에 깨어 있음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축복의 삶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말씀 안에 사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란다.  둘째:옳은 길이 있다(3~5)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의 두 번째는 말씀 안에 살 때 불의한 길이 아닌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사는 자들은 옳은 길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자의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3절) 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내 길을 굳게 정하사‘(5절)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옳은 길을 제시해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의 고백은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욥23:11절)에서 완성 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어느 길에 서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셋째:부끄러움이 없다(6~8)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이유의 세 번째는 말씀 안에 살 때 내 자신에게는 물론 세상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리다“(6절)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할 때, 즉 집중하고 그것이 내 삶의 원칙이 될 때 부끄러움 없는 인생이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성령을 받고, 사도의 책임을 감당하였던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게 되는 모습은 누구라도 이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할 때 할례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됨으로 함께 있던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떠나고, 심지어 바나바도 흔들리게 된다(갈2:11~13).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부끄러움에 울부짖었던 베드로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다시금 부끄러움에 자리에 머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깨어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나도 매일 부끄러움에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에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깨어있는 자가 있을 때 그 능력이 드러나게 된다.   세상에는 말씀이 차고 넘치지만 나에게는 말씀의 가뭄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말씀 안에 사는 유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알지만 그 결단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 두려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로 결단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12
  • 선포해야 하는 이유 (시118:1~18)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선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막연하게 예수님의 지상 최대의 명령이니, 혹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한 대가 정도로만 인식하다 보니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에 소극적이며, 부끄러워함으로 살아가게 된다.     바울이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행17:18)라고 부른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여기던 이들과의 대화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는 그 모습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왜 하나님을 향한 말쟁이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 이름을 높이며 사는 자가 되길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의무이기 때문(1~5)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말하기를”(2절),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4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를 선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존재들은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주어진 삶의 자리 자리에서 선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 하나이다,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렘20:7~8절)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이런 조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해 보지만 “그의 이름으로 다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는 심정을 토로한다.   오늘 나에게는 이런 열정과 마음이 있는가? 그저 마지못해, 흉내만 내고, 생색만 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둘째:신뢰하기 때문(6~13)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의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향한 뜻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사는 자는 안하무인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믿음의 담대함으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온전한 내 편이시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본문은 “여호와는 내 편”(6절, 7절)임을, “여호와께 피하는 것”(8절, 9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환란과 고난 중에 내가 정말로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절)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자가 그 이름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다.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는 사람들도 그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진짜를 소유한 우리가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에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구원이시기 때문(14~18)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의 세 번째는 하나님만이 내 인생이 유일한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오른손으로 구원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자의 장막에는 기쁨이 넘치고, 구원이 흘러나온다(15절). 그 구원을 경험하며 사는 자는 생명을 주시는 동안에 그 이름을 선포하며 살아야 한다(17절).   아직 내게 남은 생이 있고,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다 마치지 않았기에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만류하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두려움 없이 선포하고 있다.   내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참 구원자이시다. 그 분이 영생을 위해서 내게 주신 사명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기쁨으로 감당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던 군중들과 그의 제자들이 소리 높여 찬양을 하고 그 이름을 높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들을 책망하여 그치게 하라고 말한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고 말씀하셨다. 묵상하며, 침묵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지만 오늘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목소리 높여 하나님의 은혜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 귀중한 책임을 돌들에게 양보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한 주간 어느 곳에 머물고, 무엇을 하며 사는가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세우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 이름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내며 기쁨과 축복을 경험하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6-05
  • 동행하는 자의 모습 (시108:1~13)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을 내리시고, 그대로 잘 살고 있는지 가끔 사람을 보내거나 찾아오셔서 점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날마다 그 자녀의 삶에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는 것이 은혜가 될 것인지, 아니면 엄청난 저주가 될 것인지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점검해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마음을 다해 찬양하라(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은 나의 감정이나, 내 믿음의 고백을 담아내는 중요한 방식이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출발은 마음이다.   더욱이 “내 마음을 정하였으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절)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채워진 상태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에서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내 마음이 가득 채워져서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약1:8)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마음으로 가득한 자의 모습이다. 나의 마음에는 무엇이 채워져 있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현실적인 나의 삶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귀를 열어 들으라(6~9)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두 번째는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응답하시며(6절), 그의 성소에서 말씀해 주셨다(7절)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성소”(7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소로 가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자세를 가지고 살았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께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귀를 열고 하나님 앞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과 방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심을 확신하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순종함이 동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라고 하시며 말씀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귀를 열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삶을 살려고 하는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길 바란다. 셋째:눈을 들어 선포하라(10~13)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세 번째는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20:7~8)라는 고백 속에 살아간다.   믿음의 기도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그 문제를 만져 주실 때 완전한 승리가 주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문제를 만날 때 사람을 찾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며, 그 역사를 믿고 구하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믿음의 선포를 하며 살고 있는가? 믿음의 선포는 나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축복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세상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 눈이 가려져 있으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자신들의 대화에 끼어 들어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7).   예루살렘에서 엠마오의 거리가 이십 오리(눅24:13) 정도의 거리인데 그 긴 시간을 걸어가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삶에도 함께 하고 계시지만 내가 그 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자신의 창조하신 피조물과 동행하신다. 그런 하나님과 나는 동행하고 있는가?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나의 신앙의 모습을 바로 세워가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31
  • [설교]흥왕케 하는 사람이 됩시다 ( 느헤미야 2장 10절)
      우리의 인생이 우리들이 있는 곳마다, 공동체마다 사람을 흥왕케 하고 기도를 흥왕케 하고, 말씀을 흥왕케 하는 인생 되시길 축복합니다. 흥왕케 하는 인생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더하리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흥왕케 하는 사람은 소원과 버킷리스트를 구분합니다.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면 좋겠지만, 안해도 아쉽지만 괜찮은 것입니다. 그것 안 한다고 죽을 만큼 괴롭거나 힘든 것은 아닙니다. 소원은 목숨 걸고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버킷리스트를 소원이라고 유혹합니다. 돈과 명예는 좋아 보이지만 인생의 목적이나 소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아가면서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버킷리스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소원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결이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임을 알아야 합니다.모든 인생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타락과 구속과 구원의 틀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각각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성공과 행복에 목숨 걸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병과 가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민감해지고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매일매일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주십니다.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입니다.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도 순간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를 직면할 때 문제를 문제삼지 말고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얼굴에도 근심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원수 마귀는 기도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마음을 집어넣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임하면 기도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근심 다 버리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쉬지 기도해야 합니다.(살전5:16-18)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해도 우리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고 두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다. 그때!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해결할 능력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 해결이 있고 정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으로 삶을 허비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빛 되신 말씀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주님 앞에 다섯 번 기도하고, 연합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은 같이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형식, 전심으로 예배 드리는 것은 내용입니다. 내 몸을 쳐서 하나님 앞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정규적인 경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말 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유호교회 담임·경상남도기독교총연합회 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23
  • 감사하며 찬양하라 (시107: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인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온전하게 고백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3~14)의 고백처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아는 자들은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는가?     본문은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혹여나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을 잃어 버렸다면 다시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첫째:구원해 주심(1~3)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속량’의 사전적 의미는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일반백성이 되게 함’의 뜻이 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과 출발을 할 수 있는 되는 것이 바로 ‘속량’을 받은 자의 모습이다.   시107편은 바벨론 포로시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배경으로 쓰여 진 것으로, 정치적이나 현실적으로 볼 때는 바사의 고레스의 명령(역대하36:22~23)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2절)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며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루심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비유처럼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음에도 백 데나리온을 갚지 못하는 이(마18:23~35)를 향해 불평과 원망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며, 그 감사와 찬양이 이 땅을 향해 흘러가기를 바란다. 둘째:부르짖음을 들으심(4~7)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이다.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5~6)라며 분명한 고백이 있는데,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에 차고 넘친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도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출3:7;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에게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말씀하시며 부르짖을 것을 명령하신다.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도움을 호소하며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가?  셋째:채워주심(8~9)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모든 것은 한 마디로 하자면 ‘기적’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8절)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매일이 기적의 순간들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기적의 출발점은 바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하며 찬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9절)이 되어야 한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것을 사모하고, 배고파 할 때에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 주린 영혼’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자세를 온전히 가지면 하늘의 것을 사용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축복을 경험하게 살게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내가 감사와 찬양으로 보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고, 원망과 불평으로 투덜거리며 지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한 주간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다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사는 축복의 날이 될 줄 확신한다. 이 축복의 삶을 붙들고 누리시는 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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