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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 16:13~20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교리를 만들어 그렇게 믿고 맹종한다든가, 억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추대하여 믿고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믿는 자입니다. 모든 종교는 교리가 기반을 이루고 교리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것을 믿음의 기초로 합니다. 이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고, 믿지 않으면 멸망 당합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3년 반의 공생애를 정리하시며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를 누구라고 아느냐에 따라 믿음이 달라집니다. 그때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분들은 유대에서 존경받는 이들이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예수를 최고로 존경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바른 고백은 아닙니다. 이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를 가장 바르게 알고 있는, 가장 정확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 구약의 선지자들이 먼저 예언했고,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처럼, 사람 몸에 나시고, 사람처럼 일하시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사람처럼 죽으셨다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더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나님같이 부활하시고, 하나님처럼 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놀랍고 확실한 사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를 믿고 고백할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교육을 통하여 받았다고 하면, 예수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실제 많은 이들이 예수 믿다가 포기하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체험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종교 생활하는 자란 말이 아닙니다. 구세주를 만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구세주(救世主)를 만나지 못하고 살다가, 마지막 때 심판주로 오시는 그분을 만난다면 이보다 큰 절망, 큰 불행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은 성경을 통해 알고 확신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이 사실을 체험한 성도는 누가 와서 죽인다고 협박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에 얽매이거나 상처받는다고 예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설교를 통해 그런가 보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형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성찬식도 살아 계신 주님의 명령이기에 매 주일 순종합니다. 십일조도, 주일성수도 축복하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교리나 제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를 믿는 믿음이 성령의 증거를 받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성령으로 체험한 신앙이면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철저히, 더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할 것입니다. 이 믿음 갖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충주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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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교회 (사도행전 2장 42~47절)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신약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신약 시대는 곧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 목적은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셨고, 수많은 사람이 회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이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요? 사도행전 2장 42절은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네 가지 요소가 살아 있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누리며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표현을 놓쳐선 안 됩니다. 바로 “힘썼다”는 단어입니다. 네 가지 사역은 모두 ‘힘써서’ 행한 것입니다. 첫째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힘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힘써’ 받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듣기 불편한 말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에도 순종할 때, 우리 영혼은 살아나고 변화됩니다. 두번째 서로 교제하는 데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교회는 한 몸, 한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즉, 교회는 한 몸으로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교회 안에서 살아갈 때, 죄 된 본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세번째 떡을 떼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표현은 성찬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먹고 마시는 은혜를 누리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은덕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또한 한 떡을 나누며 교회의 지체가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네 번째 기도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믿음의 고백이며, 또한 약속한 은혜를 누리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만큼 오해가 많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잘못된 기도를 금하시고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처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주기도의 정신을 담은 기도에 함께 힘쓰는 공동체입니다. 끝으로 성령의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꿈이 실현된 교회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함께 살아가며 성령 안에서 힘씁시다. 말씀을 받는 일에, 교제에, 성찬에, 기도에 힘쓰는 교회,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힘쓰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생을 온전케 하며 복되게 할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과 성령강림을 통해 회복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를 깊이 누릴 줄로 믿습니다/정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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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진정한 가정(마가복음 3장 31~35절)
우리가 꿈꾸는 가정은 무엇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적 가정관과 성경적 가정관의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적 가정관 중 첫째는, 정서적 안정과 위로의 공간입니다. 가정은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 “나를 무조건 이해해주는 곳”이라는 심리적 안정처로 여겨집니다. 핵심 가치는 감정적 만족과 무조건적 수용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가정관은 언약적 사랑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안에서 맺어지는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각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반영합니다(엡 5:22~33). 부모, 자녀 관계도 하나님의 권위 질서 속에서 주어진 책임과 훈련의 관계입니다(엡 6:1~4). 둘째는 경제적 협력 공동체로 맞벌이 부부, 자녀의 경제적 성공, 재산 축적 등 실질적 생계와 성취가 중요한 가정의 기능으로 간주 됩니다. 하지만 성경적 가정관은 경건한 자손을 낳기 위한 거룩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부부를 하나로 만드셨다고 하십니다(말 2:15). 가정은 단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계승할 세대 양육의 경건한 성공을 위한 공간입니다. 세 번째 현대적 가정관은 자기실현의 공간으로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 꿈을 추구하고, 서로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해주는 공간으로 이상화됩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되 응원해주는 가족”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적 가정관은 십자가를 지는 훈련의 장으로 가정은 자기중심적 본성을 내려놓고, 서로 복종하고 인내하는 성화의 현장입니다(골 3:18~21). 그래서 육신의 행복이 아닌 거룩이 더 본질적인 목표입니다. 네 번째 현대적 가정관은 행복의 터전입니다. 즉, 가정은 “행복을 주는 곳”, “불행이 없어야 하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갈등이나 고통은 비정상으로 간주 되어, 충돌이 생기면 이혼이나 단절이 쉽게 고려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가정관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을 세상에 증거 하는 가장 작은 교회로 기능해야 합니다(수 24:15; 딤후 1:5). 그래서 갈등과 고통을 비정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성화의 도구로 보고 더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의 터전으로 봅니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적 가정관과는 달리 거룩한 공동체로 부름 받은 것이 성경적 가정관입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때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거룩과 경건을 추구할 때 비로써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진정한 주님의 가족들이라고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정의 영적 개념입니다. 이 영적 비밀을 잊지 말고 작은 천국을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서울에스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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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순종의 실재 - 출애굽기 20장 12절
십계명 중 5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힘든 것도 바로 ‘순종’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장로와 목사가 성도들에게 존경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딤전 5:1-3절). 이런 차원에서 볼 때, 5계명에 대한 적용의 범위는 마땅히 교회로까지 확대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에서 실제로 섬기는 영역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들’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사는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수고를 하며 섬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오는 “목사와 교사”는 ‘목사의 역할이 곧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이라고도 볼 수 있고, 목사의 역할과 교사의 역할을 따로 구분하면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의 해석을 하든지 가장 핵심적인 것은 ‘목사의 역할에는 가르치는 교사의 의무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정보와 가르침을 제공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가족’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른’에 해당하는 ‘부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투, 행동을 통해서 다양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너무나 막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가정의 부모처럼 막중한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목사’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세상의 그 어떠한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유일의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성도들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수고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세상의 위정자들이 감당하는 역할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목사와 장로도 교회의 질서 가운데 성도들을 다스리는 역할까지 감당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5계명의 대상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므로써 육체의 부모를 비롯하여 국가 위정자들과 영적인 부모요 지도자인 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까지 순종하고자 애쓰며, 아래로는 육신의 자녀와 사회적 신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쪽에 있는 자들이나 교회 성도들 중 후배들에게까지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고자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기준과 질서의 근거는 인간이 마음대로 자기 편의에 따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러한 인정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며, 실천해보겠다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5계명에 근거하여 ‘질서’에 대한 ‘순종’을 실제적인 신앙 생활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적용하고자 정말 최선으로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인 자신이 진정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받은 자이며,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자라고 자신있게 고백하는 자라면, 5계명 속 순종의 실천은 당장 오늘부터 내 삶에 적용하도록 반복적으로 노력하며 애써야 할 주제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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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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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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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 16:13~20절)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교리를 만들어 그렇게 믿고 맹종한다든가, 억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추대하여 믿고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믿는 자입니다. 모든 종교는 교리가 기반을 이루고 교리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것을 믿음의 기초로 합니다. 이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고, 믿지 않으면 멸망 당합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3년 반의 공생애를 정리하시며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를 누구라고 아느냐에 따라 믿음이 달라집니다. 그때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분들은 유대에서 존경받는 이들이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예수를 최고로 존경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바른 고백은 아닙니다. 이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를 가장 바르게 알고 있는, 가장 정확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 구약의 선지자들이 먼저 예언했고,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처럼, 사람 몸에 나시고, 사람처럼 일하시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사람처럼 죽으셨다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더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나님같이 부활하시고, 하나님처럼 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놀랍고 확실한 사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를 믿고 고백할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교육을 통하여 받았다고 하면, 예수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실제 많은 이들이 예수 믿다가 포기하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체험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종교 생활하는 자란 말이 아닙니다. 구세주를 만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구세주(救世主)를 만나지 못하고 살다가, 마지막 때 심판주로 오시는 그분을 만난다면 이보다 큰 절망, 큰 불행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은 성경을 통해 알고 확신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이 사실을 체험한 성도는 누가 와서 죽인다고 협박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에 얽매이거나 상처받는다고 예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설교를 통해 그런가 보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형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성찬식도 살아 계신 주님의 명령이기에 매 주일 순종합니다. 십일조도, 주일성수도 축복하시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교리나 제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를 믿는 믿음이 성령의 증거를 받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성령으로 체험한 신앙이면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철저히, 더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할 것입니다. 이 믿음 갖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충주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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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 16:13~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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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교회 (사도행전 2장 42~47절)
-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신약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신약 시대는 곧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 목적은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셨고, 수많은 사람이 회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이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요? 사도행전 2장 42절은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네 가지 요소가 살아 있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누리며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표현을 놓쳐선 안 됩니다. 바로 “힘썼다”는 단어입니다. 네 가지 사역은 모두 ‘힘써서’ 행한 것입니다. 첫째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힘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힘써’ 받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듣기 불편한 말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에도 순종할 때, 우리 영혼은 살아나고 변화됩니다. 두번째 서로 교제하는 데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교회는 한 몸, 한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즉, 교회는 한 몸으로 교제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교회 안에서 살아갈 때, 죄 된 본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세번째 떡을 떼는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표현은 성찬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먹고 마시는 은혜를 누리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은덕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또한 한 떡을 나누며 교회의 지체가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네 번째 기도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믿음의 고백이며, 또한 약속한 은혜를 누리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도만큼 오해가 많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잘못된 기도를 금하시고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처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주기도의 정신을 담은 기도에 함께 힘쓰는 공동체입니다. 끝으로 성령의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꿈이 실현된 교회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함께 살아가며 성령 안에서 힘씁시다. 말씀을 받는 일에, 교제에, 성찬에, 기도에 힘쓰는 교회,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힘쓰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생을 온전케 하며 복되게 할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과 성령강림을 통해 회복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를 깊이 누릴 줄로 믿습니다/정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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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교회 (사도행전 2장 42~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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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진정한 가정(마가복음 3장 31~35절)
- 우리가 꿈꾸는 가정은 무엇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적 가정관과 성경적 가정관의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적 가정관 중 첫째는, 정서적 안정과 위로의 공간입니다. 가정은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 “나를 무조건 이해해주는 곳”이라는 심리적 안정처로 여겨집니다. 핵심 가치는 감정적 만족과 무조건적 수용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가정관은 언약적 사랑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안에서 맺어지는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각각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반영합니다(엡 5:22~33). 부모, 자녀 관계도 하나님의 권위 질서 속에서 주어진 책임과 훈련의 관계입니다(엡 6:1~4). 둘째는 경제적 협력 공동체로 맞벌이 부부, 자녀의 경제적 성공, 재산 축적 등 실질적 생계와 성취가 중요한 가정의 기능으로 간주 됩니다. 하지만 성경적 가정관은 경건한 자손을 낳기 위한 거룩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부부를 하나로 만드셨다고 하십니다(말 2:15). 가정은 단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계승할 세대 양육의 경건한 성공을 위한 공간입니다. 세 번째 현대적 가정관은 자기실현의 공간으로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 꿈을 추구하고, 서로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해주는 공간으로 이상화됩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되 응원해주는 가족”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적 가정관은 십자가를 지는 훈련의 장으로 가정은 자기중심적 본성을 내려놓고, 서로 복종하고 인내하는 성화의 현장입니다(골 3:18~21). 그래서 육신의 행복이 아닌 거룩이 더 본질적인 목표입니다. 네 번째 현대적 가정관은 행복의 터전입니다. 즉, 가정은 “행복을 주는 곳”, “불행이 없어야 하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갈등이나 고통은 비정상으로 간주 되어, 충돌이 생기면 이혼이나 단절이 쉽게 고려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가정관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전초기지로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을 세상에 증거 하는 가장 작은 교회로 기능해야 합니다(수 24:15; 딤후 1:5). 그래서 갈등과 고통을 비정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성화의 도구로 보고 더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의 터전으로 봅니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적 가정관과는 달리 거룩한 공동체로 부름 받은 것이 성경적 가정관입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때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거룩과 경건을 추구할 때 비로써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진정한 주님의 가족들이라고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정의 영적 개념입니다. 이 영적 비밀을 잊지 말고 작은 천국을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서울에스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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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진정한 가정(마가복음 3장 31~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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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순종의 실재 - 출애굽기 20장 12절
- 십계명 중 5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힘든 것도 바로 ‘순종’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장로와 목사가 성도들에게 존경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딤전 5:1-3절). 이런 차원에서 볼 때, 5계명에 대한 적용의 범위는 마땅히 교회로까지 확대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에서 실제로 섬기는 영역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들’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사는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수고를 하며 섬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오는 “목사와 교사”는 ‘목사의 역할이 곧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이라고도 볼 수 있고, 목사의 역할과 교사의 역할을 따로 구분하면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의 해석을 하든지 가장 핵심적인 것은 ‘목사의 역할에는 가르치는 교사의 의무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정보와 가르침을 제공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가족’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른’에 해당하는 ‘부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투, 행동을 통해서 다양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너무나 막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가정의 부모처럼 막중한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목사’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세상의 그 어떠한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유일의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성도들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수고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세상의 위정자들이 감당하는 역할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목사와 장로도 교회의 질서 가운데 성도들을 다스리는 역할까지 감당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5계명의 대상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므로써 육체의 부모를 비롯하여 국가 위정자들과 영적인 부모요 지도자인 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까지 순종하고자 애쓰며, 아래로는 육신의 자녀와 사회적 신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쪽에 있는 자들이나 교회 성도들 중 후배들에게까지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고자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기준과 질서의 근거는 인간이 마음대로 자기 편의에 따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러한 인정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며, 실천해보겠다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5계명에 근거하여 ‘질서’에 대한 ‘순종’을 실제적인 신앙 생활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적용하고자 정말 최선으로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인 자신이 진정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받은 자이며, 성삼위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자라고 자신있게 고백하는 자라면, 5계명 속 순종의 실천은 당장 오늘부터 내 삶에 적용하도록 반복적으로 노력하며 애써야 할 주제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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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순종의 실재 - 출애굽기 20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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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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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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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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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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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삶 (시27:1~6)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지혜로운 사람은 현상이나 결과가 아닌 이유를 깨닫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왜 그런지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는 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잘 해결하듯 신앙적으로 ‘왜’라고 하는 질문에 익숙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된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왜 구원하셨고 무엇을 위해 불러 주셨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를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 분명한 이유를 알 때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분명한 이유를 알고 결단함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분명한 이유 안에 살기를 축원한다. 첫째:태연할 수 있는 이유(1~3)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태연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빛이 되시고 구원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1절).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답은 언제나 하나님 한 뿐 밖에 없다. 다윗은 악인들, 대적들, 군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태연함을 유지하는 하며 평소에 훈련된 대로 행동하는 자가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된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면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는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태연하게 살 수 있는 분명한 약속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만이 어떤 순간에도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사모할 수 있는 이유(4)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거룩한 성전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에 “내가 여호와께 바른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려니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4절)을 가장 큰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간구하고 있다. 이런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자 솔로몬이 지을 수 있도록 성전에 들어갈 모든 것을 준비하는 열심을 보이게 된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고(요2:13~22), 공생애를 마무리 하시면서도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며(마21:12~13) 성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신다. 성전은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네가 건축한 이 성전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9:3)라는 약속이 있기에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머무는 곳을 향해 모두의 마음이 모아지고,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그곳에서 드리는 찬양이, 기도가, 예배가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지게 될 것이다. 셋째:찬송할 수 있는 이유(5~6)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환난 가운데 지키시고 숨겨 주시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아무 근심도 없이 피해서 숨을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여리고를 정탐하다가 쫓기게 된 두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숨은 것처럼, 부랑자라 손가락질 받던 자들이 다윗의 그늘을 의지했던 것처럼,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 머물게 되었던 것처럼 참 쉼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축복이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척박한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고 고백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는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고 권면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은 어느 순간이 되었든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하며 묵묵히 그 넓은 품을 언제나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항상 찬송하며 살아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분명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분명한 이유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이유 때문에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며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자신들이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 삶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 안에서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확실한 고백 안에 바로 서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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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삶 (시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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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어야 할 곳 (시24:1~6)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며 그 앞에 서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들이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마음으로 모세에게 하나님께 듣고 와서 말해 달라(출20:19)고 간청한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돼지떼에 들어가게 하셔서 모두 몰사하자 그 마을의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떠나달라고 부탁(눅8:37)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주님의 임재 앞에 서 있는 것은 원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의 앞이 아니라 떨림으로 긴장되며, 때로는 두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첫째:모든 만물(1~2)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어야 할 첫 번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 앞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사실을 본문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모든 것들’(1절)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는 존재들임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시는”(2절)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바다나 강들 위에 할 수 있는 것들은 배를 만들어 띄우는 일 뿐이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30)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때로는 작은 풀잎 하나,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나에게 미소 짓는 상대방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나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예배의 터전(3~4)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어야 할 두 번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터전이다.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이 거룩한 터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구별되어 있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4절)이다. 이 말씀대로라면 교회에서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며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해 숨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에게 “네가 건축한 이 성전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9:3)라고 약속하여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임재를 약속하신 터전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의 말씀처럼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열심 안에 살아야 한다. 셋째:찾고 구하는 자리(5~6)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어야 할 세 번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찾고 구하는 자리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라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4~5)고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도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구하라 그리하며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고 약속하여 주셨다. 이 말씀들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찾고, 그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간절함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쁨이 없을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며 찾고 구하는 자리에서 살기를 바란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8~9)고 선포하고 있다. 오늘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의 시선과 그 얼굴 앞에 머물기 보다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 앞에 서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한 주간 세상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에 취하여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면서 행복한 삶을 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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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어야 할 곳 (시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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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이유 (시23:1~6)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고 정말 아쉬운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나를 더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통해서 내게 부족한 것들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시선이 이제는 내게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면서 감사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첫째:인도하심(1~3)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 첫 번째는 바로 그 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살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시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3절)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며 그 이름의 영광과 찬송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며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는 자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고 있다면 사망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인도하심 가운데 머물며 사는 것이 매일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보호하심(4)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 두 번째는 바로 그 분의 보호하심을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생각하면 삶에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다가오는 순간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는’(4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분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을 맞이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사망의 골짜기라 할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를 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분명하게 나뉘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이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고 말씀하셨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절망과 슬픔의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닫는 곳이 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믿음 안에 사는 자의 가장 큰 축복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동행하심(5~6)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 세 번째는 바로 그 분의 동행하심을 확신하며 살기 때문이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라고 약속하셨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곁에서 입의 혀처럼 굴더니 드디어 권력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택하여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축복에 대해 다윗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어지게 될 것을 고백(6절)하고 있다. 영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동행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정말 부족함이 없는가? 세상의 많은 부족함에 대한 갈증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닌가?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 찬양할 수 있을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의지적인 고백이 아니라, 진정한 감사와 찬양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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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이유 (시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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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자랑하라 (시20:1~9)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세상의 무엇보다 자랑할 수 있는 이유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3~24)고 말씀하신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없는 것”을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내게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만큼 자랑할 것이 없음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첫째:예배 받으심(1~3) 하나님이 나의 자랑이 되시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나의 예배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붙들어 주시고(2절) 소제를 기억하고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는 것(3절)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드린 예물과 제사를 받지 않으심에 격분하여 동생 아벨을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만다(창4:3~8).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나의 삶에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참된 예배자로 서 있는지 점검해 보길 바란다. 둘째:기도 들으심(4~6) 하나님이 나의 자랑이 되시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6절)라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거하는 이를 의미한다. 기도라고 해서 무조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기반이 된 기도가 응답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셨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자들만이 가지는 축복이다. 이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길 위해 날마다 어느 곳이 되었든 기도의 자리를 세우고 지켜가길 축원한다. 셋째:힘이 되어 주심(7~9) 하나님이 나의 자랑이 되시는 세 번째 이유는 바로 환란 날에 그 어떤 것보다 나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절)고 고백하고 있다. 성경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 이름 자체가 바로 능력이고, 그 이름을 신뢰하는 자만이 그 이름이 주시는 힘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고 있지만 시편의 수많은 고백과 찬양은 환난 날에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시고, 위로가 되어 주심에 대한 것들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가장 귀한 열매로 인정받게 될 것을 기억하며 살자. 자랑거리가 온 천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 이름을 전하고 증거 하는 것이 절대 부끄러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목숨을 걸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무엇이었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 나의 자랑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기억하며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선포하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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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자랑하라 (시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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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피하라 (시16:1~11)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선성이시로다”(시18:2)라고 고백한다. 홍수나 화재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고 그 위기를 피하는 방법과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평소에 알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위기의 순간에 내가 피할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그에 따른 현상과 결과에 대해 말씀을 통해 배우고 준비하며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방법(1~4) 하나님께 피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한 마디로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2절)고 말씀하신다. 반대로 하나님께 피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4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6~7)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바로 고난 앞에 서 있을 때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둘째:현상(5~8) 하나님께 피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피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는 마음의 안식과 평안은 물론이고 모든 문제들의 실질적인 해결함을 얻게 된다. 본문을 보면 나의 재물을 지켜 주시며(5절), 삶의 울타리를 평안하게 하시며(6절), 양심의 교훈을 밤마다 얻게 되고(7절), 궁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된다(8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시33:12~14)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그 삶의 문제가 풀어지는 역사는 경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이 세상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처럼 평안함과 함께 찾아오게 된다(요14:27). 셋째:결과(9~11) 하나님께 피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누리는 결과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게 된다”(9절). 더 나아가 11절을 보면 “생명의 길”,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그저 그 날개 아래에 숨어서 소나기를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길을 힘 있게 걸어가면서 그 길에서 충만한 기쁨을 경험할 뿐 아니라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즐거움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당장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영생의 문제까지 해결함을 얻게 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존귀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약속받았지만 생명의 길로 가지 않으며 충만한 기쁨 보다는 근심과 걱정이 앞서고 영원한 즐거움보다는 두려움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게 된다. 아직도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어쩌면 내가 기대고 의지할만한 것이 내게 남아 있어서는 아닌지 돌아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 성경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125:1~2)고 약속해 주신다. 이번 한 주간도 인생의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피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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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피하라 (시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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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13:1~6)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는 고백처럼 아무리 치밀하고 빈틈없는 준비를 했어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이와 반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처럼 극도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무엇보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중요하다. 절망 속에 있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고 지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 명쾌한 해답을 찾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탄식(1~2) 고난과 절망의 순간 나의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탄식의 방향이 정확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삶의 절망과 고통의 문제를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찾으려고 애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다. 원수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얼마나 바로 서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 때문에 탄식하는 자가 해야 할 일이다. 이 올바른 방향을 바로 잡고 서 있을 때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첫 단추를 바로 끼우는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사42:3)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찾으며 탄식하는 자의 소리를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하셔서 그 눈을 밝혀 주를 보게 하실 것이다. 둘째:기도(3~4) 고난과 절망의 순간 나의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기도의 내용이 확실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 절망의 고통에서 건져 내어 주셔야 하는 이유가 원수들이 기뻐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기도한다(4절).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절망이 자신의 죄로부터 시작될 수 도 있다는 겸허한 자세를 가진 자만이 바로 다윗처럼 기도할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가운데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너무 의롭고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내가 당하는 모든 환란의 문제는 온전히 악한 상대방에게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한다. 겸손한 기도, 먼저 내 눈이 밝아져서 나의 모습을 보고, 상대를 보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온전한 기도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찬양(5~6) 고난과 절망의 순간 나의 눈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찬양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으로 변하는 축복을 경험한다.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고통과 절망의 순간, 탄식과 원망이 아니라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진 그 공간은 터가 움직이고, 굳게 닫힌 문들이 열려지며, 모두를 옮아 매고 있던 족쇄들을 풀어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곳으로 변화된다(행16:25~26). 찬양은 그저 내 마음에 위로나 받고, 감정 상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태산 같은 문제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현실의 상황과 문제를 넘어 행하실 놀라운 일들에 대해 찬양할 수 있는 자만이 그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는데 이를 위해 온 마음으로 찬양하는 자세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고난과 절망의 순간에 눈이 밝아질 수 있는 것은 그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다. 욥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고난을 다 겪고 나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고 고백한다. 세상의 것들을 쫓아 붉게 충혈된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밝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그 어떤 것보다 내 눈을 들어 주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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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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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깨어 있어야 할 이유 (시7:1~17)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시편 7편은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도망하던 시기에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심정을 쏟아 놓은 시로 특별히 사울왕의 옷깃만 베고도 찔림(삼상24장)을 받았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다윗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고난의 문제는 위로의 말이나 함께 아파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그 무게가 가벼워 질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절망의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 앞에 머물기 위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잠들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첫째:연약한 존재(1~5) 다윗은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 상황이나 사람을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자세를 가진다. 자신의 손에 죄악이 있거나(3절),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아 주거나 이유 없이 빼앗은 것(4절)이 있으면 자신이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5절)으로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다. 자신을 겸손한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받게 되는 은혜는 바로 영혼이 새롭게 소생되는 축복으로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겸손 안에 있는 연약함이 하나님이 나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통로가 됨을 기억하며 날마다 깨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에게 피하는 신실한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6~11)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살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11절)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재판은 다른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8절) 하실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9절) 하시며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의 지적처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서게 될 것인지 아니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방패삼아(10절) 참된 평안을 누리며 서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셋째:분명한 죄의 결과(12~17)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16절)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모자랄 것 없어 보이는 악인들에게도 없는 것 딱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해피앤딩이다.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사는지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악인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권면한다. 악에게 악으로 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는 명령대로 살 때에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는 말씀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5:8~9)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실 날마다 깨어 있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 능력 안에서 깨어 있고자 사모하는 자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깨어 있는 그 자체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함을 잊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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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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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깨어 있어야 할 이유 (시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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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위에 감사를 (시4:1~8)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면서 나의 삶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부족한 것이 감사임을 깨닫는다. 나병환자 열 명의 외침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셔서 고쳐 주시지만 사마인아 사람 한 명만 돌아와 감사한다. 그 때 예수님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고 물으신다. 문제가 해결되고, 삶의 한 고비를 잘 넘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그 무엇보다 감사위에 감사를 쌓아가는 한 사람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은혜 베푸심(1~2)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자는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심”(1절)을 경험하며 사는 자이다. 너그러움 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자세이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모든 힘과 능력을 쏟아 붓는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번번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삼상24:6, 26:11)이라 고백한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왕에게 이해할 수 없는 너그러움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런 선택을 내리며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환경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불합리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너그러움을 누리는 축복 주심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택하여 주심(3~4) 하나님이 경건한 자를 택하시는 이유는 바로 “자기를 위하여”(3절)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간구를 듣고 채워 주시는 것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둔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런 자들은 두려운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기억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사는 자들이 된다(4절).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얼굴을 대하심(5~8)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예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은 다른 어떤 것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그 얼굴을 향하시고 비추어 주심(6절)이라 고백하고 있다. 그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며 살 때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기쁨보다 더 큰 기쁨(7절)을 누리고 평안히 잠들 수 있는(8절) 축복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라 고백한다. 이 세상의 어떤 축복보다 하나님이 내게로 얼굴을 향하시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있어야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얼마나 더 채워 주셔야지 우리가 만족하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 희망이 안 보이는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22~23)라고 고백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감사할 것이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평안히 잠들고 아침에 눈을 떠서 새로운 마음과 결단으로 하나님에게 하루를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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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위에 감사를 (시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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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사는 인생 (시3:1~8)
-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시편 3편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순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들의 반란으로 왕궁을 떠나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감람산을 오르는 다윗의 심정(삼하15:30절)이 어떠했을까? 야고보 사도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며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것은 모든 문제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고난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첫째:듣기(1~2)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절)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절망과 위기의 순간일수록 사람은 들려지는 말에 영향을 받게 된다. 평안한 순간이라도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취하여 살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며, 절망과 고난의 순간에는 더더욱 부정적인 말들을 담아두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3:8,10)고 말씀하고 있다. 내게 들려오는 말을 내가 선택해서 들을 수 없기에 들려오는 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하다. 부정적인 말들과 나를 결려 넘어지게 하는 말들에 묶어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함께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기를 바란다. 둘째:말하기(3~4) 사람들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하는 순간에도 다윗은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절)고 고백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앞날이 달라진다. 다윗은 지금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고백과 찬양을 자신의 목소리로 올려 드리면 하나님의 그의 성산에서 듣고 계신다고 확신했다(4절). 우리 주 하나님은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에서 보듯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자녀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문제가 크고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에게 목소리를 들려 드리는 것이 바로 믿음 안에 사는 인생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바라보기(5~8) 믿음 안에 사는 인생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천만인(6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5절)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믿음의 기록들이 참으로 많다. 엘리사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람왕이 도단에 수많은 군사들을 보내 포위하였지만 엘리사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너무나도 담담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6~17)가 그 해답이다. 다윗처럼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8절)라는 고백은 내가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때 완전한 해결책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의 고백이다.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듣고, 말하고,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수 없이 반복되기에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지나칠 수 있지만 참된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참된 믿음의 고백이 쌓여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매일의 삶에서 믿음 안에 사는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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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사는 인생 (시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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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에서 기꺼이로 (막15:21)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 그 길을 오늘날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이라 한다.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십자가(수난)의 길’,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란 뜻으로 길을 의미하는 ‘비아(via)’와 슬픔, 고통(고난)을 의미하는 ‘돌로로사(dolorosa)’가 합쳐진 라틴어이다. 이 길을 순례하는 순례객들은 비아 돌로로사 거리에 특별히 의미 있는 열네 지점을 표시하고 각 지점마다 걸음을 멈추어 처형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며 기도를 드린다. 열 네 묵상 중에서 다섯 번째는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께서 십자가 옮기심을 돕다」이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길에서 쓰러지자, 로마 군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장까지 끌고 가야겠기에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한 사람을 징발한다. 그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아주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빌라도 법정에 모여 있던 그 많은 군중을 놔두고, 또 골고다 언덕길 좌우에서 구경하고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을 놔두고, 하필 시골에서 올라와 바삐 자기 길을 가던 그가 붙잡혔던 것이다. 시몬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구경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 것도 모른 채 붙잡혀 예수님과 함께 억지로 골고다 길을 오르게 됐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쳐 쓰러졌을 때 그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마지막 언덕길을 올랐다. 그리고는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성서 어디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간 후 투덜대며 바삐 자기 길을 갔는지,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것까지 보고 갔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보고 갔는지 알 길이 없다.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계란 장수였는데,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그가 집에 돌아가 보니 계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활절에 계란을 나누는 유래가 생겨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구레네 사람 시몬, 그는 결코 재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가던 길에서 붙잡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기는 했지만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으로 알렉산더와 루포를 꼽는다. 그 둘은 바로 시몬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처음 교회의 좋은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본문에서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는 것은 그들이 마가 공동체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붙잡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시몬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누구나 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해야 할 많은 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로 바꾸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능력이고 가능성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시몬이 처음에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더라도 그 길에서 예수님을 깨닫고 나중에는 기꺼이 예수 운동에 동참했다. 마가공동체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로마에 있는 교회에까지 그의 이름과 아들들이 알려져 있던 것이 그 증거이다. 억지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단 그 일이 옳은 일이라면 기꺼이 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몫이다. ‘억지로’를 ‘기꺼이’로 바꾸는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할 것이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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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에서 기꺼이로 (막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