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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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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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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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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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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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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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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어린이는 인생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저물어 가는 시점은 “인생의 열매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이 주일은 꽃의 주일이라고 표현을 해봅니다. 어린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가지로 표현한다면 첫째 사회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 둘째 성경적으로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가 든든히 서갈 때 교회가 부흥 되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70년, 80년대 교회는 내면을 보면 교회학교가 급성장하여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줄 압니다.그러나 현 시대는 저출산과 독신주의와 더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망! 교회학교 어린이를 사랑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장성한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함으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본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이 수가 점점 더해가자 애굽에서는 불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출생할 당시에 남자아이가 출산하게 되면 죽이라고 왕이 명령을 내리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왕의 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뜻을 지켰던 믿음의 여인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교를 각오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둘째 지혜로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요게벳은 행동을 합니다. 아기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넣어서 크고 넓은 나일강가에 띄워 놓습니다. 아기가 죽을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군가 아기를 발견하여 키워주지 않는 이상 아이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살 수 없는 확률이 99%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요게벳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분명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게벳은 나일강가에서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는 시간대와 장면을 보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지혜와 믿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학교와 자녀들을 향하여 가르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말씀 안에서 순복하는 교회학교와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들 가정에 꽃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부흥되기를 예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낮추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으며 계산적이지 않는 착한 성도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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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린 아이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에서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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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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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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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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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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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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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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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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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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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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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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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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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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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50만분의 1이라고 한다. 850만 명 중에 한 사람밖에 당첨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경마나 다른 카지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사행사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미래가 불안전하니 한 번 대박을 터트려 인생 한번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탕주의요 요행 심리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쉽게 살아가려고 한다. 쉽게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냥 되는 것은 없다.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한탕주의와 요행 심리는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요행 심리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 기도 잘해서 대박을 터트리려고 한다. 한번 헌금 잘해서, 한번 예배 잘 드리고 대박을 터트리려고 한다. 이런 심리는 신앙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일본 나라현에 가면 호류사라는 절이 있다. 이 호류사는 천 년 된 소나무로 지어졌다. 이 절을 1,400여 년 동안 대대로 지켜온 ‘궁목수’ 가문이 있다. 일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라고 한다.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궁목수 가문이다. 이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 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 이는 나무의 자연적 생명으로서의 수명과 목재로 사용된 뒤부터의 생명 연수가 같다는 뜻이다. 곧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천년을 견딘 나무니까 천 년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의 강도를 나타내는 인생의 나이테이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를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다. 소설가 박완서선생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넉 달 뒤에는 스물여섯 살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또 잃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한번은 잡지사 기자가 박완서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것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가 고통에 대해 저항할수록 고통스러워진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만큼 쓰임 받는 것이다. 욥은 견딘 만큼 쓰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이런 욥에게 갑작스러운 고난이 닥쳤다. 자녀들도 재산도 다 잃어버렸다. 건강도 잃어버렸다. 그의 아내마저 고통받는 욥을 보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친구들도 욥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욥을 비난했다. 그 무엇보다 욥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욥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연단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이 연단의 과정을 잘 견디어 놓게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다.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견딤을 통해서 쓰임 받았던 인물들이다.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쓰임 받고 싶은가? 견뎌라. /대구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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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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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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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는다면 도전하라
- ▲ 김현수목사 우리 집에는 머리카락을 소중히 기르는 딸이 있다. 딸의 꿈은 공주다. 공주 중에서도 ‘라푼젤’이 되는 것이다. 라푼젤은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머리카락이 긴 공주다. 그러니 머리카락을 더 소중히 여긴다. 머리를 오래 기르자 머리끝이 갈라지기 시작해 잘라야 할 때가 되었다. 아내가 딸에게 잘 설명하고 얼마나 자를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엄마가 정해주세요” 그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카락이기에 나중에 후회가 안 되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나는 엄마를 믿어요” 이 대화 속에서 딸이 많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때는 두려움을 잘 극복할 때다. 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제 그 두려움을 극복했다. 두려움을 극복했던 방법은 믿음이었다. 엄마에 대한 믿음이 두려움을 이기게 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저하고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끝은 뻔한 결말이다. 그러나 믿음은 뻔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은 도전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아브람은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그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편안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는다. 편안한 것만 찾아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뻔한 결말만이 있을 뿐이다. 2014년 미국에서 택시 업체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소송의 대상은 ‘우버’라는 라이드 셰어링 서비스였다. 100년 넘게 변화가 없던 택시 업계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택시를 타기보다 우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버를 사용하는 이유는 편안함보다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용자에게 우버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이유는 도전할 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믿음이 좋아지면 삶이 편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삶이 아니라 편안한 삶일 뿐이다. 믿음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그가 편안한 삶을 원했다면 뻔한 결말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음을 가지고 도전했다. 그 도전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도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전할 때 하나님을 경험한다. 도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를 통해 믿음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말이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도전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환경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지금 있는 환경이 나의 미래를 만든다. 예배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세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75년 동안 자녀 없이 희망이라고는 없었던 아브람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소망 없던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그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되게 하셨다. 두려움은 뻔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믿음은 도전하는 인생으로 살게 한다. 뻔한 인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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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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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는다면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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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우리가 살려면 악을 미워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외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언약과 계명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악은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 결과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그 죄악에 오염되고 말았으니 그 죗값으로 사망이 온 인류를 지배하게 됐다. 이처럼 악은 궁극적으로 사망을 가져오는 것이니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악을 미워하여 멀리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 모든 교인은 값없는 하나님의 구속, 구원의 은혜로 인해 과거 죄악의 종노릇을 하던 자리에서 건짐을 받아 영생의 자리로 옮김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악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다시금 죄악을 가까이한다면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베드로후서 2장 22절)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려면 선을 구해야 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고 외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착하고 올바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선이라고 말한다(시편 106편 1절).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좇아 사는 것을 가리켜 또한 선이라고 말한다(로마서 12장 9절).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창조주 되시며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허탄한 우상과 더러운 악령인 귀신을 숭배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탄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 든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요한계시록 21장 8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사망 가운데 처하도록 하실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려면 공의를 세워야 한다. 아모스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듯 인간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장 5~6절)고 했다. 따라서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그 어느 때고 제대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했던 적이 없었으니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께 매를 맞고 신음하는 수치로 얼룩졌다. 한편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다.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진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진정으로 살길을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시니(사사기 24장 16절) 그분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를 좇아 행함으로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24절) 세상에 흘려보내자. 하나님을 찾으면 살길이 열릴 것이다. /나돌섬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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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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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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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자
- ▲ 이영희목사 사람이 살면서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진리 안에서 사는 자이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요한3서 1장 3절). 그렇다면 진리 안에서 삶이란 무엇일까? 첫째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므로 부르시고 이제부터 영원한 장막 천국에서까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란 또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말한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사십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도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앙과 기도의 생활은 짝퉁 신앙이요 혼적인 신앙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 속에 범죄하며 타락의 삶을 살았던 자들의 공통점은 진리이신 말씀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께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요즘에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아닌 인본주의적인 설교를 하며 사람 중심의 기복주의적인 설교자를 가끔 보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분과 함께하며 안식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했다. 둘째는 성령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이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다. 성령이 진리다. 분명한 것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으며 성령을 받지 않고는 참믿음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시키며 진리를 생각나게 하며 가르치며 진리 안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진리이신 성령을 받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느냐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쉬지 말고 기도 생활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화가 발달하면 할수록 점점 기도하는 소리가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작이 기도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교회는 기도의 붐을 일으켜야 한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보다 자신이 살고 죽을 나라 건설를 세우고자 기도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내 욕심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며 성령을 감독자로 삼고 살아야 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이다. 우리 모두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독교인이 되자. /생명나무제자훈련원 원장, 주영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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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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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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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기다리는 사람들
- ▲ 홍한석목사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라고 한다.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주인으로 오시는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은 어찌 보면 예배의 소비자이시다. 주님은 그러므로 교회가 자신을 위한 곳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듯이 주님은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그곳에 임재하셔서 그 예배를 음미하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늘 주님의 요구를 등한시한다. 교회는 그리고 예배의 자리는 나를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본질에 부합하게 100% 주님을 위한 곳이 될 때 비로소 예배하는 그곳도, 예배하는 자도 진실로 유익한 축복의 장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우리의 할 일은 그분이 오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공적 예배는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임에 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 주님께서 임재하셨는가의 문제이다.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예배하는가보다는 얼마나 모였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의 증언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오백여 명의 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성령세례와 땅끝 선교를 분부하시면서 올라가실 때 오백여 명의 형제들은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천사들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 누가복음 24장 말미에 누가도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증언한다. 그런데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또 다른 명령을 하신다. “내가 성령을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성령세례가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오백여 형제가 들은 것이 분명하고, 주님은 그들이 보시는 앞에서 영광 중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바람처럼 불처럼 부으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120명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간 것인가.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비록 주님의 놀라운 승천 사건을 목도하고 이 성에 머물라는 생생한 명령을 들었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보내실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영적인 사건의 중요성은 기다림의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는가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빠른 찬양, 느린 찬양, 틀에 박힌 기도, 진부한 설교, 헌금과 잠깐의 기도를 투자하고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우리들. 우리는 수술할 날짜를 잡듯이 부흥이나 기적의 스케줄을 잡고 내 시간표대로 움직이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빛들의 아버지시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그분은 결코 사람의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이런 주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삶의 축복과 부흥은, 기적조차도 우리 위에 있는 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나는 그저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배한다. 예배는 우리 위에 있는 세계와의 연결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며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예배자의 모습이다.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오시고 기름 부으신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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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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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투잡스 시대와 교회
- ▲ 이효상원장 투잡스 시대가 오고 있다. 아직 일반화되기엔 여러 사회적 어려움이 있으나 투잡스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구이자 흐름이다. ‘주5일제’라는 근무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IT산업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한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는 투잡스 시대를 필연적으로 불러오게 하였다. 세상의 환경이 변하고 있다. ‘한 우물만 파라!’, ‘두 마리 토끼를 좇지마라!’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있다. 한 사람이 이중의 직업을 소비하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과 한 우물 파기 정신을 성공의 미덕쯤으로 여기던 기존의 가치관 또한 이제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유럽에서는 투잡스를 준비하거나 혹은 이미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두가지 이상의 직업 소비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850만 명을 넘어 섰다. 이들 나라에 비하면 조금 늦게 형성된 감이 있으나 한국 역시 샐러리맨들의 퇴근 시간이 빨라지고 주 52시간 근무로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투잡스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여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른 일을 병행함으로써 부수입을 얻는 한편 제 2의 인생을 위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이미 투잡스가 우리 생활속에서 새로운 직업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투잡스 현상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일터사역의 미래를 보다 더 자세히 전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머지않아 찾아 올 본격적인 투잡스 세상에서 이를 철저히 대비하는 사람은 주류로서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회활동 측면에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직업적, 사역적 성공을 이루어가려면 투잡스 시대를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 제대로 준비하면 투잡스 환경은 기회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난관이 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일터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안의 성도 관리가 전부가 아니라 교회 밖 삶의 ‘일터’가 선교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텐트사역’은 그동안 일부에 한하여 적용되었지만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이중직 사역’은 자생적 선교라는 측면에서 확대와 함께 필수로 바뀌어가야만 한다. 이제는 직업과 근로를 돈 버는 수단쯤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중직이든 직업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사회를 움직이는 연료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본업에 충실해야 할 시간에 일하지 아니하고 부업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하나의 낭비가 될 수 있다.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한,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직업은 자신의 삶을 내걸고 진정한 사역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기자가 선교사로, 선교사가 기자로 일할 수 있는 것처럼 목회자의 이중직과 더불어 투잡스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투잡스의 구체적 개념에서부터, 투잡스의 흐름속 이면에 서린 현상, 개개인의 특성에 맞춘 투잡스 구상, 투잡스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적 전략을 가져야 한다. AI 인공지능으로 달라진 시대상황을 기회로 삼아 사역적이든, 직업적이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면, 먼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준비해야 한다.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이라는 시간을 임상적 시간을 통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시시각각 밀려오는 지구촌의 투잡스 구조를 파악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교회, 투잡스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체계적인 항해를 계속하자. 여기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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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투잡스 시대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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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설레면 아깝지 않다
- ▲ 박명수목사 바다가 파란 이유는 하늘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늘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많이 사랑하면 빠져든다. 어떤 부부들은 ‘이렇게 단점이 많은 사람과 어떻게 결혼했지’라고 말하며 깜짝 놀란다고 한다. 왜 그 사람과 결혼했는지 아는가? 많이 사랑해서 그렇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만큼 사랑했었다는 말이다. 내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으며 많을수록 그만큼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사랑해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사람 몸으로 오신 것은 어쩌면 당한 일이다. 너무 사랑하셔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늘을 버리고 우리 곁에 오셨다. 그 보좌도 아깝지 않으셨다. 너무 사랑하셔서 다른 것을 버릴 수 있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데 필요한 것도 사랑이다. 섬김과 도움은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가 진짜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해 말한다. 연보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이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생겼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물질을 모았고,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전달해 주었다. 그때마다 교회들은 자신들과 직접 상관도 없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동참했다. 바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필요하기에 도와주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도와주면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사랑이 없으면 주는 것이 아깝다. 사랑하면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진다. 사랑의 설렘이 있으면 아깝지 않다. 설레면 아깝지 않다. 사단은 항상 사랑을 공격한다. 교인이 헌신하지 못하게 상황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괴롭힌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게 한다. 지체들을 향한, 교회를 향한 마음이 달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헌신이 회복되는 데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교회를 향한 사랑이다. 더 깊이 사랑하기 시작하면 헌신의 삶이 아깝지 않다. 어떻게 하면 사랑이 깊어질 수 있을까. 바로 일상성이다.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야 사랑이 깊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매주 연보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한번 크게 하고 끝내는 연보가 아니라 매주 연보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잘 모으라는 말이다.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도 모으길 원하는 마음이다. 매주 하는 연보 속에 매주 담기는 사랑을 원했다. 헌금이 매주 쌓여 갈수록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마음도 쌓여 가길 원했다. 사랑은 만짐이다. 손길 따라 전해진다. 많이 닿고, 많이 만나야 합니다. 접촉면이 많아질수록 사랑이 깊어진다. 몸을 따라 마음도 가기 때문이다. 마음이 깊어지는 비결은 일상성이다. 일상에서 자주 접촉하는 것이다. 많이 닿을수록 사랑이 자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다림의 고수이다. 일상의 현장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자주 보고 싶어 하신다. 대화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성숙한 교인은 일상성을 점검한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점검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접촉점을 더 늘려가는 결정을 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회복되면 사랑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회복되면 짐 같이 힘든 섬김이 오히려 신앙생활의 힘이 되어준다. 접촉점이 늘어나면 사랑이 깊어진다. 비결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향한 설렘이다. 설레면 섬김이 지치지 않는다. 설레면 헌신이 아깝지 않는다. 설레면 아깝지 않다. /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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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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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설레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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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주님과 함께 역전하는 인생
- ▲ 김현수목사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요즘 제일 호황을 누리는 업종이 간판집이라고 한다. 어제 멀쩡히 있던 집도 오늘 간판을 내린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장사가 안되면 간판부터 바꾸라는 말이 있다. 새로움을 추구하라는 말이다.우리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은 간판 하나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명함에 직책 하나 추가하는 것은 삶을 바꾸지 못한다. 직업을 바꾼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변하기 위해서 스펙을 쌓고 이직을 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바꾸길 원하셨다. 그래서 어부들에게 찾아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다. 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세상을 따라가는 방법이 아닌 세상과는 다른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베드로의 지나간 삶은 세상을 따라가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남은 때를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베드로는 더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르게 살라고 이야기한다(2절). 우리도 인생의 역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경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끊임없이 혁신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기업이 있다. 미국의 아마존이다. 그런 아마존이 시장에서 실패할 때가 있었다. 경쟁사를 따라 하려고 할 때였다. 따라 하는 인생은 결코 1등이 될 수 없다. 앞 사람의 등을 보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게 사는 인생은 1등이 아니라 일류가 될 수 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혁신에는 늘 위험부담이 따른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두렵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식당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도 때론 눈치가 보인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위해 저녁시간 약속을 자제하는 것 자체가 튀는 행동으로 보인다. 이런 우리를 세상은 이상히 여긴다(4절).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도전 정신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도전해 온다. 다르게 사는 우리를 조롱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성공이 보장된 편안한 길을 보여준다. SNS에 대박 난 사람들을 보여 주며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십자가로 이기셨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1절).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도전할 차례다. 도전받는 인생이 아니라 도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기를 끌고 있는 네스카페의 캡슐머신이 있다. 이 제품은 실패한 작품이었다. 처음 이 제품을 카페나 식당에서 판매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바리스타들이 내리면 되는 것을 굳이 기계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계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다르게 하기로 했다. 카페가 아닌 가정집에 팔기로 한 것이다. 다르게 시도했던 도전 정신이 실패한 제품을 성공한 제품으로 역전시켰다. 도전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힘이다. 세상을 따라가며 실패를 맛 본 인생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르게 살아갈 때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도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역전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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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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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주님과 함께 역전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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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 우리 그리스도인은 국민배우다. ‘아브라함’이 대략 4,000년 전 인물이고 ‘모세’는 3,400년 전의 인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 바울’은 대략 1,800년 전, 1,900년 전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 이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경의 유명 인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본문에 나오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는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십자가 신앙, 순교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2천 년, 4천 년이라고 하는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어 연령과 계층,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국민배우다. 신데렐라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지만, 국민배우는 결코 하루아침에 될 수 없다. ‘외로움’, ‘상대적 빈곤’, ‘미래에 대한 불안’, 무명시절의 삼중고를 거쳐 마침내 국민배우, 국민가수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국민배우, 가수들이 그랬고, 아브라함, 모세, 사도 바울도 그랬다.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철저하게 무명한 자요 죽은 자다. 징계를 받은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다(고린도후서 6장 9~10절). 이 무명의 삼중고를 거쳐 국민배우, 천국스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십자가의 고독, 외로움, 불안, 고통의 과정을 거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다.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이 그렇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사니 ‘고독’하다. 로마제국의 주류가 될 수 없으니 ‘상대적 빈곤’에 시달린다. 주님 재림을 고대하며 인내하지만, 그날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런 그리스도인을 ‘나그네’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국민배우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성령님께서 현재의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외로움을 극복하고 주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나는 왕이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 앞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니까 본문의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대 사도 베드로와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민배우’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은 국민배우다’라는 팡파르를 울리며 막을 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관계다. 그리스도인 나그네 한 사람을 놓고, 대 사도 베드로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축복의 떼창’을 부르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를 보면, ‘그룹 퀸’이 10만 이상의 사람들 앞에서 콘서트를 하는데 전 관객이 떼창을 부른다. 감동이다. 그러니까 ‘그룹 퀸’ 혼자 국민배우가 될 수 없다. ‘떼창’을 부르는 팬들과의 관계가 국민가수, 세기의 가수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렇다. ‘그리스도인 나그네’ 한 사람을 놓고, 대 사도 베드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축복의 떼창’을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나그네 설움’을 부르지 않는다. ‘나그네 설움’은 나훈아, 주현미가 부른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혼자인 줄 알고 서러웠는데 아니다. 대 사도 베드로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축복의 떼창’을 부르고 있다. 이 관계의 축복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그리고 국민가수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신곡을 준비한다. 오늘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콧노래 부르며 달려간다. /용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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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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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음은 벽을 넘는 것이다
- ▲ 박병열목사 조선 선비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 절벽에 서 있는 소나무다. 절벽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소나무에서 강인한 생명과 선비의 절개를 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도전의 횟수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몇 번의 실패에는 일어서지만 수십 번의 실패나 고난을 만나면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벽을 만나도 그 벽을 넘어선다. 링컨은 27번이나 크고 작은 실패를 맛보았다. 그는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 시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일어나 미국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는 인생의 어떤 벽도 믿음으로 넘어설 수 있다. 중풍병자는 삼중 벽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벽은 죄책감이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책감은 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책감은 장발장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경감 자베르와 같다. 경감 자베르가 말했다. “한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야. 나는 너를 끝까지 쫓아 다닐 거야” 만일 장발장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살겠다고 하면 그의 죄책감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고 그냥 살아” 예수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니다. 용서하는 분이다. 믿음으로 이 죄책감의 벽을 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벽은 사람의 벽이다.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큰맘 먹고 교회 나올 때 사람들이 환영하고 손뼉 치면 얼마나 좋겠는가 때론 그 반대일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만나러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러 오기 때문이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마음을 다져 먹고 다른 길을 찾았다.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렸다. 그들은 삼중 벽을 믿음으로 넘었다. 불치병을 고침을 받았다. 믿음은 벽을 넘는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물은 멈추지 않는다. 벽 앞에 고인 물은 썩은 물이다. 죽음의 늪이 된다. 살아있는 물은 벽을 만났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간다. 살아있는 믿음은 벽을 넘어 주님이 계신 곳을 간다. 인생의 환란 고통이 그대의 희망의 가지를 자른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라. 나뭇가지가 잘린다고 끝난 게 아니다. 절망의 가지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난다. 믿음에는 절망이 없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왜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답을 찾기 때문이다. 중풍병자가 자신의 죄책감과 환경만 바라보았다면 절망이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았다. 인생에 시선의 방향이 중요하다. 바라보는 대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살길이 열린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처럼 하나의 벽을 넘어서면 또 다른 벽이 막아설 수 있다. 놀라거나 낙심해선 안 된다. 믿음의 시험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강의〉로 유명한 미국 카네기 멜론대학의 랜디 포시 교수는 말했다. “벽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 준다.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은 ‘스톱’이다” 그렇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벽은 절망이지만 믿음의 사람은 벽에서 희망을 본다. 벽을 넘는 믿음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나의 믿음을 인정하시면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된다. /장유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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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음은 벽을 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