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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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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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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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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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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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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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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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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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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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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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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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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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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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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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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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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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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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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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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화해의 선물
- ▲ 이재기목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였던 로렌스 반 데르 포스트가 들려주었던 두 형제의 이야기다. 형은 큰 키에 힘도 세고 똑똑하며 탁월한 운동선수였다. 가족들이 살고 있던 남아공의 어느 사립학교로 보내진 그는 훌륭한 학생회장이 되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 살쯤 아래였다. 동생은 잘 생기지도 않고 유능하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곱사등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출중한 재주가 있었는데 노래를 아주 잘한다는 것이었다. 동생도 형을 따라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 하루는 한패의 학생들이 우르르 다가와 동생을 괴롭히고 놀리며 그의 셔츠를 찢어 굽은 등을 드러냈다. 형은 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가혹한 학생들을 맞서서 그 이상하게 생긴 곱사등이가 자기 동생이라고 밝히면서 비참한 난장판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과제를 마칠 때까지 그냥 화학 실험실에 남아 있었다. 상황을 방관함으로써 동생을 배신했던 것이다. 그 뒤로 동생은 딴 사람이 되었다. 그는 농장이 있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형은 군인이 되어 팔레스타인에 주둔하게 되었다. 바깥에 누워 별빛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던 어느 밤에 그는 자신이 학창 시절에 동생에게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된다. 집에 가서 동생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평안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그의 마음이 속삭였다. 전쟁 중이어서 매우 힘겨웠지만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남아공까지 이동했다. 두 형제는 밤늦도록 오랜 대화를 나누었고 형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고백하는 가운데 동생의 용서를 구했다. 둘은 함께 울며 끌어안았고 둘 사이의 불화는 치유되었다. 그 날 밤, 놀라운 일이 생겼다. 잠들었던 형은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풍부하고 그윽하고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동생이 다시 노래 부르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관계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필요한 가를 잘 보여준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노래하는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 혹시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는가? 주고받은 깊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심지어 예배보다 그것을 먼저 행하라고 권면하신다. 물론 누군가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야곱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기 형이었던 에서를 속인 일로 인해 이 쌍둥이 형제의 관계는 심하게 틀어지게 되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20년간 형을 피해 외국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오던 때 형과의 숙명적인 만남을 앞두고 야곱은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다. 형이 400명의 부하와 함께 자기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에 몸서리를 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날 두 사람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화해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사역이며 선물임을 잘 보여준다. 야곱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화해의 은혜를 구하라. 잘못이 있다면 겸손히 고백하며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생각하며 베풀어야 한다. 야곱과 에서에게 화해라는 은혜의 선물을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켰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당신의 삶에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게 하실 것이다. /사랑빚는 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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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화해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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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인생의 여정
- ▲ 최성환목사 여행을 준비하면서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은 즐겁다. 새롭고 낮선 환경 속에 들어가면 내가 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며 감동을 받기도 한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지인들과 다르게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쉼을 얻고 있음에 감사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늦은 저녁 숙소에서는 낮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피곤함에도 새로운 것을 경험한 것에 대한 즐거움이 나에게 주는 여행의 즐거움이다. 살다보니 인생은 여행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여행을 보내주셨지만, 나만을 위한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이루어야 할 것을 기대하시는 여정이다. 그래서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났다. 최근에는 함께 여행을 계획했던 친구가 먼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 왜 주님은 그를 먼저 데리고 가셨나를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그 분이 주관하시기에 해답은 찾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먼저 떠난 친구도 나를 위해 보내주신 만남의 축복이었다. 그를 기억할 때마다 함께 더 많이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가장 큰 아쉬움은 늘 함께 했으나 그에게 예수를 알려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그에게 좋은 친구였지만 정작 그에게 해 주어야 했던 복음은 전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참 많다. 내가 그들을 만난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우연히 만났지만 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먼저 예수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최근에 여행 중 만난 사람에게 교회 갈 것을 권하고, 그의 연락처를 받아 매주 SNS을 통하여 예배 참석을 확인하고 있다. 내가 이 땅에서 여정은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만나며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제 곧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하는 인생인데,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또 다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마치 다음 여행지를 위하여 가방을 챙기듯이 나는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짧은 복음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여행을 다녀와서 가까운 사람에게 여행의 행복을 말하듯이, 우리 인생의 여정을 마치고 하나님을 만나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표현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은 분명하게 평가하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인데, 오늘 로마서 14장 11~12절에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는 말씀과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는 말씀은 나의 인생 여정에 가장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나는 과연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여행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고 있을까? 2018년을 마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의 모습이 어땠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의 삶에서 아쉬움 없이 그분께서 보내주신 목적에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해마다 반복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고 이제는 새로운 인생여정을 준비해야 할 때다. 누구를 만나서 예수를 전하려하는 목적으로 언제 어디로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겠는가? /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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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인생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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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요셉 이야기 - 이요한목사
-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탄생을 얘기하면서 주목하는 한 사람은 바로 요셉이다. 우리는 먼저 그의 이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마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요셉을 창세기의 요셉과 닮은 사람으로 그린다. 첫 번째는 이들이 꿈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창세기의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다. 그가 꾼 꿈이나 그가 해석해주는 꿈은 거의 확실하게 이루어졌고 그의 형제들이 그를 ‘꿈꾸는 자’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태복음의 요셉 역시도 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총 6번에 걸쳐서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4번은 모두 요셉이 꿈을 꾼 것이다. 두 요셉은 모두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두번째로 창세기의 요셉이 이스라엘의 수호자였던 것처럼 마태복음의 요셉 역시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아기와 그의 어머니의 생명을 살리고자 그들을 데리고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창세기의 요셉은 야곱의 가정 전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인도했으며, 자신의 사명이‘당신들의 후손’을 이 땅에 두시려고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요셉 사이에는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마태가 요셉을 창세기 요셉의 완성판으로 제시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요셉이 필요했듯, 예수님의 교회를 지키고 바르게 인도하는 데에 요셉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요셉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 번째로 말씀의 사람이어야 한다. 창세기의 요셉과 마태복음의 요셉 모두가 꿈과 계시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세상 지식과 경험들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지만 요셉과 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주목하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에 민감한 교인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의롭고 순결한 사람이어야 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은 안주인이었던 보디발의 아내에게 성적인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요셉은 유혹을 이겨낸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요셉은 고차원적인 순결과 의로움을 보여 준다. 마태복음의 요셉은 마리아에게 파혼을 요구할 수 있지만 아내로 맞이하였을 뿐 아니라 동침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던져준다. 이 시대는 성적 방종의 시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결한 요셉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 번째로 교회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이 죽는 상황 속에서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의 보호자가 되어 애굽으로 도망치고, 이스라엘로 왔다가 다시 갈릴리로 도망쳤다. 요셉은 당시 16~18세의 소년이었다. 한 소년에게 주어진 하늘의 음성이 그를 헌신자로 부르셨는데 그가 순종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교회의 보호자로서의 사명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며 도운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고 순결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마리아와 예수님의 보호자가 되어 여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이라는 한 청년의 말씀 순종과 성결한 삶과 희생을 통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말씀 순종과 성결한 삶과 희생을 통해 다시 이 땅에 오실 줄을 믿는다. /쉐이커스 미니스트리 대표, 기쁨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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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요셉 이야기 - 이요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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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대강절을 맞이 하며
- ▲ 서충원목사 오늘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차원과 말씀의 차원, 피조물의 차원과 창조주의 차원은 혼동될 수 없다. 그러나 육신은 말씀 없이 나타날 수 없고 말씀 없이는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다. 창조주의 말씀은 모든 육체를 넘어서면서 모든 육체의 근원이시며 목적이다.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고 그것을 가리킨다. 보이는 피조물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보고 그를 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제 말씀이 육체가 되셔서 영원한 영광을 계시함으로 육체도 이전의 육체가 아니게 된다. 말씀의 영광을 담은 육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다. 질그릇은 보배일 수 없고 보배의 영광을 지시하는 육체 자체를 보배와 동일시하는 것은 큰 착각이지만, 질그릇 육체를 떠나 그 보배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다. 육체는 말씀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다. 육체는 그 안에 담긴 말씀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 우리에게 이전에 주지 못한 기쁨을 준다. 우리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넘어 말씀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지향한다. 그러나 육체를 부정함 없이 오히려 육체를 매개로 하여 그 육체의 근원과 목적을 지향하고 육체 안에서 초월적 영광을 감지한다. 땅은 하늘을 지시하고 하늘의 영광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이 땅은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제 성육신하신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이 입맞추고 말씀과 육체가 동화되는 계시적 현실 앞에 선다. 성육신의 비전은 교회의 비전이다. 이것이 대강절의 참된 비전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듯, 우리 안의 영적인 생명이 육체에 빛나게 되는 비전이다. 육체를 넘어서 저 하늘의 계시를 보고 사나 육체 안에 그 계시적 경험이 반사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동료인간과 동료 피조물과의 만남의 새 근원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이웃사랑의 능력이 된다. 말씀은 육체가 썩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거울이면서 그래서 육체의 죽음을 촉진하면서 나아가 말씀이 모든 만물의 새 창조의 능력임을 알게 한다. 이제 더는 썩어질 육체로 살지 않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으로 육체를 죽음에서 건져낸다. 이제 육체 안에 사나 말씀의 능력 한 가운데서 육체의 한계를 돌파한다. 물론 여전히 육체는 육체이고 질그릇은 질그릇이지만 이제는 말씀의 능력을 담은 육체이고 보배를 드러내는 질그릇이다. 다른 이들과 동일한 한계 안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보이는 육체의 슬픔과 절망을 넘어 살게 한다. 우리는 성육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 말씀을 육체가 되게 하라! 말씀이 여기에 계시되게 하라. 제자들의 공동체는 말씀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동체이다. 성육신으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졌듯이 지금 교회 안에서 제자들의 죽음과 삶 안에서 하늘의 생명이 죽음의 그늘 아래 사는 이 땅에 비치고 있다. 단지 썩어질 육체를 넘어선 말씀의 능력 안에 들어간 새로운 육체, 그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육체가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험된다. 교회는 계시적 공동체이며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나사렛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듯 약하고 허물 많은 교회가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영광을 실제 삶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와 보라!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지 않은가? 여기에 어둠을 비추는 빛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절망인가? 주의 아름다움을 아는 제자들 안에 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빛이 있지 않은가? /샬롬영광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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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대강절을 맞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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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항상 감사할 은혜
- ▲ 함정호목사 중생구원은 사죄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대로 영원히 사망케 하는 독이요 지옥에 갈 밑천이다. “사죄”란 죄를 멸해서 무죄한 자가 되게 한 은혜다. 이는 인간의 대표이시며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신 죽으셔서 죄의 값인 사망을 지불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이 해주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사죄의 은혜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해주신 은혜요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능력의 은혜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자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라’(고후 5:15) 이 중생구원은 칭의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무죄한 예수님은 “대형”으로 사죄를 “대행”으로 칭의의 은혜를 입혀 의로운 자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하실 때부터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성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으시고 온전한 순종으로 의롭게 사셨는데 일생에 의롭게 사신 “의행”의 이력을 우리가 산 것처럼 우리에게 입혀 의롭게 하셨으니 이것이 칭의 구원이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로마서는 말한다. ‘칭의’는 하나님의 부요존귀, 권세, 영광의 은혜를 받는 자격이요. 이 칭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받음으로 이 순종의 줄은 하나님의 만복이 오는 줄이다. 칭의를 입은 자는 그 자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중생구원은 화친 공로의 태를 통해서 주신다. 첫 아담의 죄, 불의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사망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대형, 대행, 대화로서 친히 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으니 이것이 화친의 구원 은혜이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써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 하나님과 화친한 자되면 하나님은 내 안에 나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 된다. 화친 자로 살려면 사죄, 칭의, 화친 은혜로 자기 몸이 온전히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이같이 중생은 주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구속의 태에 진리와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구원의 은혜는 중생시키는 역사를 통해주신다. 중생은 ‘다시 나다, 거듭나다’라는 말인데 부모를 통해 허용창조를 통해 낳은 육의 사람이 주님의 구속, 피의 은혜를 입혀 진리와 성령으로 신령한 사람으로 두 번째 낳은 것이다. 첫 아담은 범죄로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어져 죽던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중생이다(엡 2:1~10). 하나님의 영생하는 새 생명을 받아 영생할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하나님의 후사로, 온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중생구원은 만인이 다 받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요, 인간에 의해서 받는 구원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 한해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 절대 주권적인 역사, 무조건적인 은혜의 역사로 받는다. ‘중생’은 일생중단 일회적이며, 모든 택자들에게 격차가 없이 주시는 구원이다. 중생은 신령한 사람이 출생한 것임으로 이 영의 사람이 자라 온전해가는 성화 구원의 기초이다. 이 중생은 성부 하나님의 예택 창조와 성자 하나님의 사죄, 칭의, 화친,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로 되었다. 중생은 온전하신 성 삼위 하나님의 주신 것임으로 절대 온전한 구원이다. /영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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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항상 감사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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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종속적 동역자
- ▲ 박만배목사 세상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지지만 동시에 종속적 동역자인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일꾼들을 불러 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불러 훈련시키시고 연단시켜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주의 일을 힘에 겹게 지치도록 하다가 탈진하고 원하는 만큼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헤아릴 수없이 경험하며 낙심, 원망할 때도 있었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우리를 교훈하시고 보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 두 번째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첫 번째 명령과 그 이후에 있었던 요나의 경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요나가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실패했으나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다시 찾으셨다. 행위언약에서 실패하고 숨어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어서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패자부활전?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 피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이방구원의 계획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지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요나 한 개인에 대한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지만 하나님은 기필코 ‘베드로’를 예수님을 통해 다시 찾아오시고 새 힘을 주시고 훈련시켜서 초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큰 일군으로 데 크게 사용하셨다. 불완전한 인생이 삶의 현장에서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는 것은 다반사가 아닌가? 일곱 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다(욘 3:1~4) 요나는 이미 풍랑(1:11~16)과 물고기 뱃속에서(1:17~ 2:10)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경험하였다. 자연을 통한 재앙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절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결코 살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욘 2:9)을 철저하게 실감하고 인정하게 하였다. 지금 시대가 상황이 분위기가 현상이 도덕적, 영적 수준이 앗수르의 니느웨성의 2,800여 년 전의 시대상황과 부도덕과 윤리, 우상숭배, 황금만능, 자신이 신의 자리에서 영광 받으려는 최악의 위기의 때가 아닌가? 영적 타락의 도가 넘은 죄악이 관영한 노아시대, 롯의 때가 아닌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요나의 생각으로는 될 것 같지 않은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살아나는 기적은 2,800여 년 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들이다. 악독하기 그지없던 니느웨 백성들과 왕, 그리고 짐승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는 역사를 하나님은 하시지 않았는가? 일어나 선포하라! 다시 한번 첫사랑의 뜨거웠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내 힘과 방법으로만 주의 일을 하려고 했던 나를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감각의 민감함을 회복하고 주님의 능력 앞에 마음 깊은 순종의 사명자가 되자! 나는 주님이 힘을 주시기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일어나 걸으라 내(主)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은 그대를 주님의 종속적 파트너로 선택하셨다. /합동개혁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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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
- ▲ 조동호목사 출애굽기 31장 14~15절과 35장 2절에는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하고 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와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가 또 다른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간주되고 있어서 충격적이다. 오늘날에는 엽기적 살인자조차도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사형제 폐지론이 지배적이어서 613개 토라계명들 가운데 사형시켜야 할 만큼 큰 죄로 간주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처하라는 계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또 토라에서 안식일을 더럽히거나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로 다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대교인들에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계명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인데, 특히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여 창조의 일을 중단하고 노예와 유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제2, 제3으로 이어지는 해방, 곧 이스라엘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유대교인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유가 사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는 상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만일 불복종할 시에는 사살시킬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전시법은 부대원들의 생존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시와 같은 비상사태에 자주 처해있었다. 그 원형이 출애굽 사건이며 이들의 땅과 나라를 얻기 위한 투쟁이 멈춘 적이 없다. 이처럼 모세오경은 백성이 한 사람처럼 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극심했던 상황들에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3천 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투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선포 이후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겪었던 이방인들의 핍박과 경제적 어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바벨론(페르시아)탈출 세대가 고토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이집트탈출 세대가 광야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뒤지지 않았고, 그로부터 2,500년 후에도 상황은 동일했다. 전시법과 같은 토라 모세오경과 613개의 계명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유대인들조차도 죽은 법으로 여기는 것들이 수백여 개나 되지만, 유대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원동력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수천 년에 걸쳐 험하게 살아온 만큼 칭송과 아울러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믿음과 신념이 강했고, 확신과 희망이 강했으며, 싸움닭처럼 거칠게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은 영원성의 상징이다… 유대인은 예언의 말씀을 아주 오랫동안 보존하고 그것을 인류에게 전달한 민족이다. 이 같은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송을 받는가 하면, 10억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최근 매일 평균 17건의 반유대주의 행위들이 보도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거나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빛과생명그리스도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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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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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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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더 큰 계명
- ▲ 임종훈목사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 없느니라” 오늘날 우리는 확실히 이웃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너와 내가 단절된 가운데 피차 낯익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금세기 기독교를 변증하는 최대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이퍼박사는 죄를 ‘분리’ 또는 ‘소외’로 보면서, 현대의 위기를 강변했다. 원초적인 분리로서 곧 하나님과 나와의 분리된 현실이고, 사회학적인 분리로 나와 너의 분열 또는 소외이며, 심리적인 분리로서 곧 나와 나의 분리이며, 마지막으로 생태학적인 분리로서 인간과 자연과의 소외현상이다. 베델성서 구약 편을 공부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의도는 가장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조화요 둘째는 타인과의 조화요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조화요 그리고 마지막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뜻은 분리되고 소외된 우리가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오늘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이 영적 질병에 걸려, 앓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도나도 진정한 만남과 대화의 장을 갖지 못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또는 소외지대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오해와 불신과 더 나아가서는 미움과 저주의 독버섯이 서식하고 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네 사람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산업화한 오늘의 도시 속에서 이웃 사랑의 아름다운 도리는 어디로 갔는가? 진정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기본적 사명이 단지 설교와 기도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봄볕보다 더 온유한 사랑으로 얼어붙은 이 사회를 녹여야 하겠건만 그 사랑이 식어가고 냉랭해져 가니 참으로 쓸쓸한 사회요 비정한 이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 없느니라”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랑을 사도 요한도 강조하여 말하기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했다. 주님은 또 사랑할 이웃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답하시면서 오히려 반문하셨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 곧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자(눅 10:33~34)라고 답했을 때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다. 이웃의 구심점이 내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내가 중심이 되었다. 내가 봉사하고 내가 도와주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주체는 강도 만난 자이다. 다만 나는 가서 도와주어야 할 객체에 불과하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우리의 이웃에게 내가 우선 이웃이 되는 삶이다.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의 문제를 내가 어찌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거나 그들의 문제로 성급히 해결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우선 ‘그들 이방인’이 아닌 ‘이웃’으로 함께 있도록 한다면 길은 열릴 것이다. /소명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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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더 큰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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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효를 실천하는 가정
- ▲ 한요한목사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효를 강조하고 있다. 유교에서 공자를 통하여 효를 가르치고 있지만 기독교는 공자가 오기 전 이미 1,000년 전에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제5계명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이신 마리아를 십자가상에서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며 네 어머니시다고 하셨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신의 부모님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효는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을 논함에 있어 부부의 윤리와 함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생존의 기본 조직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간의 질서를 세워 나갈 때 순종을 강조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순종의 본을 보이셨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다. 우리 성도들도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때에 가정에 질서가 세워지고 복된 가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부모에게 자식이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부모에게 순종하기 전 먼저 주께 대한 순종이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즉 부모에 대한 자녀들이 맹목적적인 순종이 아니고 불신앙에서부터 오는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는 순종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 안에서 해야 한다. 말씀 안에서 해야 약속있는 복의 계명이 된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불효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효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이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모공경은 단순히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께 효 하는 길은 첫째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을 심려를 끼치지 않게 해야 한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은 보이는 부모조차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에 대한 효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자녀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다. 가정은 지상낙원과도 같고 천국의 모형이기도 하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 아버지를 잘 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는 복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시작된다. 또한 효를 실천하는 가정은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잘 양육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내 욕심으로 내 고집으로 내 감정대로 하기 때문이다.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인격체이므로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나 대리만족을 위하여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된다. /원주 효문화원 원장·원주충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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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효를 실천하는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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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생사화복이 있습니다
- ▲ 장항희목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살고 죽고 행복하고 불행한 것 즉, 생사화복을 주었다고 했다. 본문이 기록된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말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다가 광야생활 40년이 다 끝날 무렵에 모세가 유언을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나간 역사를 다시 재론하는 내용이다. 1. 선택을 잘 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양면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양과 염소, 사랑과 미움, 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등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 1) 생명의 길을 선택하면 복을 누린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잠10:16), 의인의 길, 곧 의롭게 사는 삶 속에는 생명이 있다. 2) 사망의 길을 선택하면 화를 받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죽음이 오게 되고(창2:17), 말씀을 청종치 않으면 칼에 망하게 된다. 3) 성경은 선택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을 택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자손의 축복, 물질의 거부가 되었고, 롯은 소돔 고모라를 택해서 멸망을 받았다. 2.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1)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며(신6:5),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2)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의 길로 행하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해야 하고(신4:1),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3. 생명의 길을 택한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나? 1) 생존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창2:7),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출 12:29-30)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번성의 복을 약속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셨다.(창15: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3)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 을 주셨다. 4. 사망과 화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사망과 화를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때문이고(창 2:17) 둘째, 하나님 말씀을 청종치 않기 때문이며 셋째,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길을 택하고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의 진리를 따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화를 당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의욕적이고, 긍정적이며, 소망적으로, 적극적 사고를 갖고 영적인 생각으로 꽉 차게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복을 누리기를 축원 드린다. /경기도총연합회 총회장. 든든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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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생사화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