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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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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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1-20
  • [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14
  • [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2-17
  • [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2
  • 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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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주가 쓰시는 사람
    본문 30절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이야기한다.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니 얼마나 부족해 보이는가. 아무 경험도 없어 어떻게 태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랴’라고 하면 가자는 것인지, ‘와’ 하면 서라는 것인지 사람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동물을 길들일 때 동물들은 답답해서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펄쩍펄쩍 뛴다. 참을성도 없다. 안타깝게도 나귀란 본디 그런 동물이다. 이런 나귀이니 예수님을 태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귀를 타셨다. 어린 나귀는 한 사람 태우기 힘들어 한다. 어리기에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몸도 작다. 경험도 없고 권위도 없어 사람들이 무시한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나귀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쓰셨다. 어리다고 낙심하고 반대로 나이 많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다윗도 어렸지만 쓰셨고 요셉도 어렸지만 쓰셨다. 사무엘과 디모데도 어렸지만 쓰셨다. 아무리 무능해 보이고 연약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작성하시면 어떻게든 그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의무를 성취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신다. 메어 있어도 풀어주셔서 쓰신다.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심, 무지 같은 잘못된 생각에 매여 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 매이고, 돈이 없으니 돈이 매이며 권력이 없어 권력에 매여 있으며 건강하지 않아 건강에 매이고 매여 있는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 가지고 일어나면 다 할 수 있다. 지금 여러 가지에 매여 있다 해도 하나님이 풀어서 쓰실 테니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만이 우리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이다.  나귀는 영어로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귀 같은 놈 그러면,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나귀는 가벼워도 태우고 무거워도 태우고 어떻게 보면 바보 같다. 하나님은 바보라도 쓰신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이 이를 증명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귀는 체구가 작고 못생겼다. 말과 나귀는 비교해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도 작고 못생겼다. 말을 보면 멋있고 잘 달리고 힘이 세보인다. 그러나 나귀는 너무 못 나고 어리숙해보인다. 말은 적토마니 천리마니 그런 이름은 있어도 나귀는 천리나귀라는 말은 없다. 나는 왜 못생겼는지 힘도 없어 보이며 축 처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사람을 쓰신다. 예수님께서는 말 타고 가지 않으시고 나귀 타고 가셨다. 수많은 나귀 가운데서 예수님께 선택 받은 나귀처럼 우리도 귀히 쓰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부족해도 쓰신다. 어려도 쓰신다. 매여도 쓰신다. 어리석어도 쓰신다. 한 사람은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면 무슨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다. 우리 모두 쓰임 받기 위해 왕 되신 예수를 태우고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란다.  /조기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10
  • [금주의 말씀] 삶은 고난이 있어 값지다
    ▲ 이재영목사 시냇물은 ‘졸졸졸’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시냇물이 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물속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속담 중에도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다. 시냇물 속에 들쑥날쑥한 돌멩이가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고난이라는 돌멩이가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곱고 성숙한 인격은 고난의 돌멩이와 함께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도 고난의 돌멩이가 있어서 저의 삶이 더 아름답고 성숙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삶은 고난이 있어서 값진 것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며 고난당한 것인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고백을 하기 전에 이런 고백을 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시편 저자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처음 고난을 당할 때는 시편 저자도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고난 자체는 분명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고난이 마음의 고난이든 몸의 고난이든 상황적인 고난이든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그 고난 가운데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 값지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소논문 〈질서〉에서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과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기에 보기에 나쁘다. 고난을 다만 괴로움과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혼란과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참 멋있는 비유이다. 수를 놓은 것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그 수놓은 뒷면을 보면 너무 지저분하고 보기가 싫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수놓은 뒷면처럼 고난과 고통으로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미래를 만드신다.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수를 놓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고난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값진 삶을 살게 될 모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고난도 우리의 믿음을 이길 수는 없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낼 때 우리의 삶은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삶이 된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다. 하나님은 그런 주님을 높여 주셨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값지게 됨을 알고 고난의 아름다운 수를 놓아가야 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4-03
  • [금주의 말씀] 다양성의 연결
    ▲ 강임명목사   스티브 잡스가 ‘와이어드’와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에 관한 말을 했다. ‘창의성은 단지 사물을 잇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그토록 굉장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면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눈에 띈 후에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다. 과거의 경험을 연결하여 새로운 것을 합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경험이 많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영성, 신영준, 「일취월장」, 235~236.)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도 다양성이 더 풍성 할수록 생산성은 높아진다. 다양성이 풍성 할수록 혁신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혁신을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취향이 같거나 또는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쉬울 뿐만 아니라 일의 진행 속도도 빠르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설득하고, 기다리며, 방향을 맞추어 가는 것은 어렵고, 속도도 느리고, 귀찮은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슷한 부류가 함께 하는 것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연결이 실제로는 훨씬 더 쉽고, 혁신을 만들며, 즐거울 수 있다. 그 예로 「일취월장」에서는 MIT의 ‘빌딩20’의 건물을 말한다. ‘빌딩20’은 방 번호가 일관성 없었고, E동이 A동과 D동 사이에 있는 무질서하고 비효율적인 건물이었다. 그러나 빌딩20은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고, 동시에 이 무질서한 공간은 우연한 연결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빌딩20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9명이 나왔고, 혁신을 일으키는 수많은 발명품들이 나왔다. 예수님은 3년 정도의 사역 기간 동안에 12명의 제자를 세우는 것에 집중했다.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아닌 겨우 12명이었다. 그 12명도 비슷한 부류가 아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제자들로 인해 세상은 심하게 움직였다.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은 변화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다스릴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던 사도 바울 역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다양성을 즐거이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는 그들과 같이 율법 아래 있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사람들에게는 그들과 같이 그것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았다. 가난한 자와는 가난한 자로, 부한 자와는 부한 자로, 그들과 동일한 마음과 자세로 살았다. 바울은 다양한 신분, 종교, 인종의 사람들과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또한 그 다양한 사람들과 동역자로 함께 사역했다. 바울은 다양성과 그것들의 연결로 복음 증거의 위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 다양한 부류들이 성령 안에서 연결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그분을 닮아간다.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아간다. 삶과 사역의 자리에서 ‘다양성의 연결’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제자순복음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27
  • [금주의 말씀] ‘도무지’에서 ‘도리어’로 바꾸라
    ▲ 김도인목사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은 ‘소득주도성장’이다. 이 정책은 저소득계층이 더 많은 소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2년이 지난 뒤 ‘소득주도성장’의 결과는 거꾸로 최하위 20%의 사람들의 소득이 6년 전으로 후퇴했다. 지난 1년간 소득이 월평균 30만 원 감소했다. 그런데도 정책입안자들은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이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고집 때문이다. 나 또한 고집이 세다. 나와 다른 견해에 일단은 내 생각이 옳다고 우겨본다. 특히, 아내와의 의견충돌에서는 일단 내 말이 정답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하나님도 고집을 피우신다. 인간들의 고집과 하나님의 고집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은 악한 고집이라면 하나님은 선한 고집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고집’이라면, 인간은 ‘세속적인 고집’이다. 인간의 고집은 ‘도무지’ 답이 없는 고집이라면 하나님의 고집은 답이 있는 ‘도리어’의 고집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고집을 부리셔야 한다. 인간의 고집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의 고집은 인간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똥고집이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반전이 있는 거룩한 고집이기 때문이다. 오늘 베드로는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도무지’의 삶이 아니라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의 의 축복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 고난은 하나님 안에서 ‘도리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성도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자(9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9절)” 베드로는 성도는 ‘도리어’의 삶을 사는 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남에게 받은 대로 행하지 말고 ‘도리어’로 행하라고 한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한다. 이는 성도는 ‘도무지’ 답이 없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답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기 때문이다(12절)” 그리고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기 때문이다(12절)” 성도는 ‘도무지’의 상황을 신앙으로 ‘도리어’로 바꾸며 살아아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도무지’의 신앙을 ‘도리어’의 신앙으로 바꿀 수 있는가? ‘딜레마’ 신앙을 ‘디딤돌’ 신앙으로 바꾸면 된다. 소득주도성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딜레마에 빠진다. 피운 고집이 잘못됨을 깨닫는 순간 딜레마에 빠진다. 신앙생활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신앙의 딜레마에 빠진다. 이럴 때 딜레마의 신앙이 반전을 이룰 수 있는 디딤돌이 필요하다. 디딤돌을 만들려면 반드시 ‘도리어’의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즉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죽을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마음이다. 사람마다 두 개의 보따리를 지고 산다. 바로 근심 보따리와 웃음보따리다. 근심 보따리로는 고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웃음보따리는 고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웃음보따리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다. ‘도무지’의 상황을 ‘도리어’의 상황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는 ‘도무지’의 상황을 ‘도리어’의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아트설교연구원 원장, 주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17
  • [금주의 말씀] 열매 맺는 포도나무
    ▲ 조영민목사 중세교회가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예수라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열매 맺지 못한 가지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사실 이 비유는 당시 예수께서 율법과 성전의 전통에 얽매여있던 유대사회를 비판하며 하신 말씀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의 형식과 성전의 권위에만 국한시키려 했던 유대교의 모습이 결국 열매 맺지 못한 가지나 다름 없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 8절의 말씀을 통해 이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의 모습을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견주어 설명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로 산다는 말은 한마디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한 것이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서 예수님은 계명을 지킬 때 주님의 사랑 가운데 머물 수 있다고 하셨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하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사랑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제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포도나무 안에 거하는 지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제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짓고, 율법에 아무리 능통하더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가지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유대의 형식적 율법주의처럼 중세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을 자신의 욕망과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남에게 큰 잘못을 범하거나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의미보다 더 강력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포도나무의 지체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무엇을 크게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교회는 반성과 참회를 해야한다는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도나무의 열매  맺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통일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약 10㎝밖에 되지 않는 경계를 두고 지난 65년의 시간을 반목과 갈등으로 보낸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전히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일단 평화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첫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감격적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남북한이 갈라져 반세기이상을 반목하며 살아온 남과 북도 이제는 너무나도 다른 체제와 환경, 그리고 생활방식을 갖게 되었다.  바라기는 남북한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통일의 노력도 이와 같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 길일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된 포도나무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급격하게 변해가는 환경과 정세 속에서 오늘 우리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모두가 열매 맺는 포도나무의 지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나눔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10
  • [금주의 말씀] 선한 열심
    ▲ 임상필목사 열심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열심이 있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열정적으로 일하지 않고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열정을 가진 사람, 예수님을 믿어도 열정을 갖고 믿는 성도만큼 귀한 사람도 없다. 예배와 기도, 봉사, 친교,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이 정말 필요하다. 열정이란 참 귀하다. 그래서 열정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맥이 빠지고 힘이 든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함께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만큼 열정은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여러 나라로 이민 가서 사는 한국인들은 국내에서 살 때와 같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다. 자신의 건강을 생각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해외에 가보면 길에서 얻어먹는 한국인 거지를 본 적이 없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서 아주 열심이시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머리카락이라도 세시면서 우리를 지키시느라고 열심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열심을 보이라고 촉구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11)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열심이 있다. 나쁜 열심은 나를 망하게 하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고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모두 망하게 한다. 잘못된 목적과 목표를 둔 열심은 수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은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한다.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보여주려는 잘못된 열심으로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는 악행을 자행했다. 또한, 구소련의 스탈린과 레닌은 자신들의 사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지도자가 사상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불의에 영합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는데 열심을 보여 일상생활을 최선을 다하여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열심히 보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알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의, 즉 공의를 성취하시고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아는데 힘을 기울이고 그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채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생명력이 있다.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로운 자리에 서게 하신다. 예수님만이 삶의 참 의미를 가져다준다. 우리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열심을 포기하자. 바울은 이렇게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는 성도를 찬미한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동안 앞만 향해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쉼 없이 달렸던 자신을 살피자.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부정의 한 구조에서 차별과 가난 그리고 병고로 죽음의 길로 치닫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자.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느 무엇보다 아름답고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을 위해 열심을 내지 말고 보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의미와 뜻이 담겨있는 오직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사랑의 일을 위해 최선의 열심을 보이자. 그래야 기쁘고 감격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하우스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3-03
  • [금주의 말씀] 어디서부터가 시작인가 - 김농주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5년 기독교인 수는 967만 명이라고 한다. 불교가 762만 명, 가톨릭이 390만 명 정도이다. 이는 통계가 이루어진 2005년도에 비해 불교는 250만 명이 줄었고, 가톨릭도 130만 명 정도가 줄어들었지만 기독교인 수는 100만 명이 증가하였다는 놀라운 통계 수치이다. 하지만 이 수치를 받아들고 기독교 내에서 축포를 터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수치가 현장에서 느껴지는 체감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결과라 그 진정성에 의문을 던진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 교단별로 계속되는 교인 수 감소로 인하여 교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실제적인 개신교인 수는 약 600만 명으로 보고 있다. 그 외의 숫자는 기독교를 빙자한 이단들이나 과거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는 일명 가나안 성도(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들의 숫자로 파악하고 있다. 현장에서 교회를 이끄는 목사 대부분 입에서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한다. 과연 한국교회는 위기인가?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세미나 등으로 교회의 부흥을 이끌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교회 대부분이 해볼 만한 프로그램은 거의 다 해보았고, 배울 만큼 배워서 무얼 배운다고 딱히 큰 효과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차라리 한국 기독교의 쇠락을 인정하고 이에 맞는 대책을 세우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책의 첫 출발은 바로 아이들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이효상원장은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40%를 넘었다’고 한다. 앞으로 10~20년 후면 지금의 교회가 반 토막이 날 확률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전사로 키우자. 하나님의 전사는 그냥 교회에 출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사는 오직 말씀 교육으로 키워진다. 종교개혁의 첫 출발이 Sola Scriptura(오직 성경)였던 것처럼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Return to the source).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 몇몇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성경책을 펴놓고 말씀 읽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휴대전화를 눈에서 떼게 하고 성경책을 읽게 만들 수만 있다면 정말 굉장한 성공이다. 누가복음 21장 26절부터 28절에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며 우리에게 일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한다면 주께서 오실 때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전사적으로 온 교회가 힘을 모으면 언젠가 말씀을 배운 우리 아이들에서부터 다시 부흥의 계절이 돌아올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 그곳을 바라봤듯 이제는 멀리 보자.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다. /생명나무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2-13
  • [금주의 말씀] 연약한 인생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다” 골리앗을 쓰러트렸던 다윗의 고백이다. 나라의 왕이며, 온전한 신앙인, 승승장구한 강한 용사였던 다윗은 “출생에서 죽는 과정을 보니 인간이 참으로 연약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연약함과 한계를 알기에 그는 신앙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이기에 신앙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야할까? 첫째, 결단을 지킬 수 있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찬송가 작시자도 고백하듯이 내 힘과 결심은 약하여 늘 깨어지기 잘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게 살기 원하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살기 원하지만, 의지가 약하여 너무 쉽게 무너진다. 1절을 보면 ‘내 행위와 혀로 범죄치 않기 위하여 내 입에 자갈을 먹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죄를 짓고 만다’고 했다. 범죄하지 않고 의롭게 살려고 때론 몸부림을 치지만 마음으로, 입술로, 행위로 범죄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본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7절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본문 12절에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소서”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이 신앙이다. 다윗처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필요하다. 둘째, 인생은 생명을 지키는데 연약하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인생이기에 죽음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떠나야 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연약함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본문 12절에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다. 질병에 약하고 늙음에 약하고 생명에 연약한 인간이 고백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연약한 인간에게 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셋째, 인생은 소유를 지키는 데 있어서 약하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다.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 어느 무엇 하나 지켜낼 수 없다. 본문 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사람은 권력, 명예, 재물을 얻으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지만 취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이처럼 연약한 인생이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본문 7절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연약한 인생이기에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깨닫고 의지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이다. 본문 12절에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소서”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신앙이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연약한 인생이기에 매일 매일 실패와 좌절과 낙망 속에 살아야 할까? 연약한 인생에게 찾아와 주시고 손을 내밀어 이끌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다윗처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길 소망한다.   /소망의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2-03
  • [금주의 말씀] 위기의 교회에서 극복할 문제들 - 박만배
      오늘날의 교회가 격변하는 시대변화를 깊이 성찰하고 새로운 부흥의 대안을 찾아 대응해야 한다. 지금 모든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고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축복이 가득하도록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교회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가져야 하고 희망을 품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지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종교적 양심을 주장하는 군 입대 거부, 인권을 가장한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동성애, 동성 결혼, 가나안 교인들, 안티기독교인들, 수많은 이단들의 발흥, 모호해진 선악의 기준, 권위의 무너짐의 문제 등으로 국민적 갈등, 이를 치유해야 할 교파도, 연합기관, 교회도 분열과 갈등으로 큰 어려움으로 명명백백한 해법이 밝히 보이지 않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우리들의 처지이다. 이제는 목회자와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지혜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의 목회자와 교회, 성도들을 이렇게 진단해 보자. 첫째, 오후 6시 퇴근 현상, 고원현상, 현실에 안주하고 순응해버리는 증세, 더 이상 개척, 모험, 도전정신을 갖지 않는 조로 현상이다. 일정한 성장과 높이에 다다르면 정체되는 현상인데 성도들과 목회자들, 교회 역시 성장의 정점을 찍고 현재는 이 상태에 현상에 빠져 있다. 끊임없이 성숙해지려는 몸부림이 없는 목회자와 성도와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고 결국은 책망 받고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몸은 늙어도 믿음은 늙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복음의 본질과 십자가의 능력보다는 사람의 감정과 내면을 어루만지는 비 복음과 축복주의로 성도들이 유약하여 유혹과 시험, 세상을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을 잃어가게 되는데 강단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데 귀에 듣기만 달콤한 솜사탕 같은 설교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여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무장시켜야 한다. 셋째로, 교회의 중직자들, 교회개척멤버, 교회 기득권을 가졌다고 하는 오래된 신자들, 자신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일하지 않으면 교회가 잘 되지 않는다고 자처하며 자행을 일삼는 세력들의 저항.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에 사람과 사람, 부서와 부서, 기관끼리 갈등,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러한 크고 작은 일들을 잘 상담하고 조정할 수 있는 조정자를 세워 지혜롭게, 은혜롭게 해결해 나가는 목회자의 리더십이 교회가 계속해서 주님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넷째로, 미래교회에 대한 계획을 지금 바로 철저하게 수립해야 하고 실천해 나아가야 한다. 내일의 교회세대를 세워나가는 교회가 되어야만 교회의 내일을 보장하고 이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나라와 교회마다 출산율 저하와 무관심으로 교회학교,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회가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모두가 절감하는 문제이다. 미래의 주역은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다음세대들이다. 이 문제를 간과하고 소홀히 하여 준비하지 않고 실기하면 내일의 교회는 위기에 봉착하고 결국은 모두가 외면하는 빈집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성도들,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더욱 붙잡고 교회의 충실한 내연화를 시급히 추진하여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는 실제적, 공동체적, 교회론적인 교회 세대를 세우고 이어가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장, 유향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19-01-22
  • [금주의 말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 임용택목사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것을 꽃에 비유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장미꽃처럼 아름답답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가서 2장 1절에서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했다. 솔로몬은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을 백합화에 비유했다. 중국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쟈스민 꽃에 비유한다. 꽃도 아름답지만 쟈스민 향기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그 꽃보다 더 아름답다. 사람은 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사람을 지으신 분이 아름답고 존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기에 아름답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가면 ‘황소머리’란 피카소 작품이 있다. 1942년에 피카소가 낡은 자전거로 만든 작품이다. 자전거의 안장은 황소의 얼굴이 되고, 자건거 핸들은 황소의 뿔이 되었다. 작품이 만들어진 지 50년 정도 지난 후에 한 경매장에서 이 작품이 약 300억 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금은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남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버린 낡은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에 닿자 보물로 변했다. 오래전에 러시아에서 다 망가진 탁자와 펜 하나가 발견됐다. 어떤 사람이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창고 세일을 했는데 무려 1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러시아 최고의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쓸 때 사용한 탁자와 펜이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건의 가치는 누구의 작품,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 달라진다. ‘황소머리’의 재료가 버려진 낡은 자전거이고, 별 볼품이 없어 보여도 피카소가 만들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작품을 피카소의 작품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꽃보다 귀한 이유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심을 잘 안다고 고백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인간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의 주인이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장육부를 지으셨다고 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우리를 빚으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공장에서 나오는 상품처럼 만드시지 않았다. 인간은 공장에서 똑같이 대량으로 출시된 상품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성을 다해 만드신 작품이다.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란 말이다. 몸속의 작은 뼈 하나, 세포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만드셨고 그 수를 아시는 분이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행복하지만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불행하다. 자신을 걸작품으로 보는 긍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하나만 제대로 깨달아도 인생이 달라진다.  /안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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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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