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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장 20~21절)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절까지는 성도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하기를 위한 기도, 20절과 21절은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운동력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부활, 승천,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구속사적 사건뿐 아니라 우리 기도를 통해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능력이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큰 기쁨은 역사하시는 능력이 주를 믿고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는 기도를 빠짐없이 들어주신다. 한나가 드린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고(삼상 1:19~20, 27), 백성을 잘 돌보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에게 부와 명예까지 더하여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왕상 4:22~30). 또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할 때 구하면 넘치도록 넉넉히 주신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하나님은 아량이 넓고 포용이 크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더구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욱 그러하시다. 바울 기도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된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빛나는가? 우리가 그분의 자랑이 될 때다. 하나님의 하신 일과 그분 자신을 높일 때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때다. 그리고 그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해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공동체가 같이하고,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러면 거룩한 세대가 이어진다. 이어진 세대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여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한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현장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아브라함, 이삭, 한나, 사가랴와 엘리사벳 등. 그러나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그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 동기와 동력이 되었다. 고난이 축복으로 바뀐 거다. 그는 아이를 못 갖고 없어서 막힌 인생의 어둠을 뚫고 오히려 출산의 빛을 열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다. 아침교회도 그러하다. 하나를 구했는데, 둘을 주시는 하나님. 제주도 여행이면 족한데 일본에 가게 하시는 하나님!! 이사할 집이 전셋집이어도 감사한데, 걱정 없이 살 자기 집을 주시는 하나님!! 말썽만 안 부려도 OK인데, 공부까지 열심히 하게 된 자녀들, 남의 편만 아니어도 되는데, 나의 편이 되어준 남편, 예배만 와도 땡큐인데 와서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여러분 같은 성도!! 선교사들에게 헌금만 보내도 기쁜데, 현장까지 마을까지 들어가 영혼을 구원하고 일꾼을 세우고 그 나라 목회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아침교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여러분에게 능력대로 주신 믿음이 아닌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는 2006년도 5월 28일에 세워졌다. 아주 작고 힘겹게 출발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공간도 부족한 상태로 시작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께서 일하기 좋은 상태였다. 그런 황량한 들판 같던 교회가 19년이 지나 성전이 성도들로 가득하다. 보통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요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준비가 된 충직한 청지기들이다. 7개월 후면 아침교회는 어엿한 청년, 스무 살이 된다. 아침인 연령대로 보면 모든 연령대 중에 20대가 가장 늦게 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명의 청년이 출석하고, 얼마 전 청소년부가 생겨나 모든 부서를 갖춘 규모 있는 교회가 되었다. 현실은 냉혹하다. 한국교회 절반 이상이 교회학교가 없다. 아이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린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아침교회가 한국교회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응원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밖의 여행이 열흘간 있었다. 한 번도 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장소와 일정이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초대한 선교사님 부부는 그냥 편하게 오라고 하셨다. 빅아일랜드는 하와이의 시골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분한 영적, 정서적, 관계적, 육체적 리트릿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이번 여행은 계획단계부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사와 장남 혼인을 앞두고 엄두도 못 낼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특별하고 세미하게 이끌어주셨다. 마치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일한 것에 대한 존엄(dignity)을 지켜주고 돌려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선교사님 부부의 강한 권유가 계기였지만, 30년 전 청년 때 받았던 제자훈련학교(DTS)에 강사로 오셨던 분들이 말끝에 열방대학에 한 번 오라는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부부 목사 둘이 전부인 교회가 이런 계획을 하는 것은 모험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숙소, 만남, 일정, 날씨, 식사, 재정, 특별한 경험 등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선망했던 열방대학 방문. 특별한 숙소를 배정받았다. 상상할 수 없는 비용으로 숙박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선교사님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가는 비행기 좌석은 둘이 떨어져 앉는 자리였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도 되는 기회인데, 아쉬웠다. 하지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내 옆 좌석이 둘이나 비어있는 것을 봤다. 큰 비행기에 딱 두 자리만 비어있었다. 승무원에게 아내 자리를 옮겨도 되는지 묻자 쾌히 허락해줬다. 호놀룰루 국제공항까지 아주 편하게 대화하며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는 열방대학 숙소였다. 숙소 번호가 118호였다. “내가 너희 숙소를 특별히 준비했어.”라는 하나님 신호였다. 현재 사는 아파트 비밀번호였다.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고 간섭이다. 그 사건이 주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고 인정하며 교회를 기억하신다는 신호였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 제목을 생각하며 우린 감동어린 감사를 드린다. 열방대학 예배모습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열방대학 기도실을 가까이에 두셨고, 주일 밤 출발했으나 시차로 주일 낮에 도착하여,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천여 명의 세계에서 온 수많은 예배자와 함께 찬양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것이 하와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곳은 한적하고 쾌적한 날씨로, 기온이 22~26도, 밤에는 산바람 아침엔 바닷 바람으로 생활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선교사님들 덕분에 검소하고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깨어 기도하고 조깅하여 함께한 시간이 참 복되었다. 20대 시절 소속된 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때 오셨던 열방대학 강사님들이 여러분도 꼭 와서 보라고 했던 영적으로 충만한 세계선교의 요람이자 뿌리가 되는 열방대학을 방문하여, 예배할 수 있었다. 아내 박목사님은 20대 때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풋풋한 기억을 만날 수 있어 좋았고, 열방대학 여러 학생이 한국에 대해 묻고 Korean Prayer에 대해 물어봐 줘서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열방대학 청년들의 모습 나는 고교 시절부터 철야기도를 하며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해 오랜 기간 기도해왔는데, 평생을 헌신하여 선교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따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낸 YWAM의 로렌 커닝햄 목사님 부부와 거룩한 부르심을 잇는 수 많은 크리스천을 만나고 얼굴을 마주 대하며 서로 격려하고 얘기 할 수 행복하고 감사했다. 파도가 높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다를 찾아 가장 높은 파고를 향해 헤엄치는 사람들이 있다. 서퍼들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파도를 찾아온다. 높은 파도를 기다린다. 그런 파도에 매료되어 삶을 즐긴다. 고난이 고난 아닌 축복으로 바뀐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고난도 넘을 수 있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통이나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렇다. 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은 환상을 봤다. 높은 파고를 일으키며 온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것을 봤다. 두려움이 아닌 환희를 가지고, 1960년 청년선교단(YWAM)의 시작되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의 말씀이다. "저는 세계 지도에서 파도를 보았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의 파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꼭 필요한 예배, 좋은 안내자, 상쾌하고 적절한 쉼,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편히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나라 걱정, 교회와 외부 사역도 잠시나마 잊고 내려놓을 수 있어 잘 쉬었다. 6일간 머물렀던 제주도나 시골 같은 열방대학(Univisity of the Nations) 빅아일랜드 카일루아-코나지역은 정말 특별한 상급이었다. 세계 최대 천문대 마르나케어 한 날은 세계 최대의 천문대라고 하는 마우나케어를 찾았다. 그런데 근처에 도착하자 하필 비가 왔다. 먹구름으로 제법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방문자센터까지 가서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나이 든 가이드는 올라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입장료도 없었고 사륜구동 차량인지, 내려올 때 기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만 안내해줬다. 아주 높은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와도 왜 올라가도 괜찮은지 알았다. 비구름대는 아래쪽에 있었고 위쪽은 넓고 맑은 구름대가 펼쳐졌다. 정상에 이르니 추웠지만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렇구나!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 이와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우나케어에서 환상적인 노을을 목격했다. 경이로운 광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노래하기에 족했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도 곳곳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안석문목사는 중앙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쳤고, 정릉교회와 예능교회 부목사를 거쳐 2006년 아침교회를 창립했다.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일을 줄곧 해 오다가 현재는 YP클럽의 대장과 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한다연)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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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홍석영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해 갈등을 겪던 이들은 네델란드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의 삶 역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돈을 모아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의 삶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첫 겨울을 지내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44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듬해 현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1621년 가을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식사를 했던 것이 현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부터 미국과 동일하게 11월 셋째 주에 처음으로 지켜졌습니다. 이후 한국의 추수 시기에 맞추어 조정을 하게 되면서 현재는 많은 교회들이 10월 마지막 주 혹은 11월 셋째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세번의 시기는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었습니다(신16:16). 이중에 초막절은 한 해 수확의 첫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라 명령하신 세 절기 중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는 초막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고양시에 위치한 안디옥성결교회의 예배모습 첫째,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분주한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 가짐이 조심스러워 지는 곳을 선택하라면 가장 먼저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분주한 삶 가운데 구별된 곳입니다. 다른 곳 보다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각 사람이 빈 손으로 나오지 말고 감사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오는 자는‘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신16:17)’ 제물을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열매가 다를 것입니다. 각자, 그리고 우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내 삶의 열매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예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받으시고 큰 복을 더 하실 것입니다. 셋째,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아무 것도 없어 초막에 거주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한 주간 초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레23:43). 그리고 이 기간에는 ‘너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득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다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주의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자리가 주의 은혜로 채워 질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추수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얻은 소득으로 힘껏 드리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섬기십시오. 특히 교회 믿음의 형제 자매, 목회자들과 식사라도 한 끼 나누며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삶의 범사에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안디옥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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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병목의 은혜(마가복음 5장 25절에서 34절)
여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좋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언비천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과 같이 내 입술에서 좋은 말이 만들어져 나가길 소망합니다. 교회자랑, 목사님자랑, 성도자랑, 새가족이 믿음이 정착하는 자랑을 할 때 동서남북에서 많은 자랑의 소문을 듣고 병목의 은혜로 교회는 차고 넘칠 줄 믿습니다. 본문에 기적을 체험한 여인은 좋은 소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 혈루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31절) 학1:5-6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우리의 행위를 살피고 새어 나가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의 좋은 소문을 내는 성도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물질도 나가고 건강도 잃게 됩니다. 치료함의 방법은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씀처럼 여인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게으름, 기도를 쉬는 것,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면 신앙 회복과 육체와 물질의 혈루증이 깨끗이 나음을 얻습니다. 2. 믿음의 기적을 일으킵니다.(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회와 찬스를 놓치지 않고 무리를 뚫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전진할 때 믿음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옷자락을 붙잡기만 하자, 주의 전에 오기만 해도 주님은 날 만나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킴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의 믿음처럼 우리도 믿음이 커가므로 예수님의 보혈로 몸의 질병이 말라가는 기적이 이루어지길 예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3. 병목의 은혜가 임합니다. 동서남북에서 밀려오는 축복이 내 삶 속에서 임할 줄 믿습니다. 창세기 6장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120년 동안 배를 만드는 중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좌지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말씀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 나갈 때 의로운 자로 병목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손잡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영육의 질병 또한 나음을 믿고 강건함을 누리는 하나님자녀 되길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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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감사가 답이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감사를 발견하고 감사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최고봉을 붙잡은 사람입니다. 최고를 가진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작은 것을 감사합니다. 순간순간 감사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감사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동안 내가 누렸던 모든 축복들이 주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는 말했습니다. ‘감사라는 보석을 지닌 사람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행복하다.’ 어느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감사의 보석을 갖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된다면 무엇을 입든, 무엇을 먹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기적이 일어났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기적의 원천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움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없는 인생 없고, 기도 제목 없는 가정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예수님의 삶을 자세히 보시면, 그 말은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감사하라!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낭패한 상황,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니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선으로 바꾸실 것임을 믿는 믿음의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범사 감사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나침반의 바늘이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은 정북을 가리키듯,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감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고 다짐하고, 그렇게 결단하고, 매일 감사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우리 삶의 방향은 나침반처럼 감사라는 방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불행이고, 슬픔이고, 아픔이고, 실패이고, 좌절이고, 절망이지만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감사의 조건들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더 큰 축복의 도구인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라는 말이 점점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깨닫고 나면 감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철 들고 나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깨달은 만큼만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곤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평범하게 지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의 조건들인데,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뒤늦게 깨닫고는 감사드리는 ‘뒷북 감사 신앙’이 아닌가, 주님 앞에 머리 숙여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인생은 마이너스 인생이고, 감사하는 인생은 플러스 인생입니다. 감사는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하나를 감사하면 두 개의 감사 거리를 주십니다. 가시를 감사할 때 장미꽃도 감사하게 하십니다. 제로를 감사할 때 셀 수 없는 은혜들로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깊고 선하신 뜻에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범사에 ‘할렐루야’ 하는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감사가 인생의 답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능곡중앙교회 천세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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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감사와 화해로 드리는 명절(신명기 16장 11절)
이번 추석 명절 기간은 다른 어느때보다 날짜가 긴 것이 특징입니다. 주일을 포함해서 무려 10여일 가까운 날이 휴가처럼 긴 연휴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더 초조하고 불안하고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추석은 가족이 모이고, 조상을 기리며, 수확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명절이 스트레스, 갈등,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명절을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하는 날”로 소개합니다(신 16:11). 그러므로 우리의 추석은 단순히 세속적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화해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추석 명절은 최고의 감사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확 후 초막절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추석도 우리 삶의 열매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한해 농사를 추수하는 농부처럼 올 한해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 그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가을에 풍년을 맞고도 “비가 너무 왔으면 어쩔 뻔했나, 햇빛이 모자랐으면 어쩔 뻔했나” 하며 불평만 했습니다. 이웃 농부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손에 곡식을 주셨잖아. 감사가 없으면 풍년도 기쁨이 되지 못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속에서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추석 명절은 모든 이들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지만, 묵은 감정과 갈등으로 인해 즐겁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서로 화목하라”(롬 12:18), “서로 용서하라”(골 3:13) 권면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후, 전쟁터에 세워진 교회에 남군과 북군 신자가 한자리에 앉는 것을 꺼렸습니다. 목사가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라고 선포하자, 성도들이 서로 손을 잡고 화해했다고 합니다. 추석은 가정의 화해와 용서를 실천할 기회입니다. 셋째 추석 명절은 함께 나누고 섬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16장 11절은 명절의 기쁨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나누라고 합니다. 우리의 추석도 가족만이 아니라 주변 이웃, 어려운 자들과 나누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참된 경건이야말로 예배나 기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경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된 기쁨은 나눔에서 완성됩니다. 우리교회는 남양주에서 청소년사랑의 밥차를 11년째 매주 금요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부유하고 넉넉한 시대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밥을 굶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이 매주 적지 않게 찾아옵니다. 땅끝 선교지가 청소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배가 고픈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려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족과 형제들, 친지들과 이웃을 돌보고 고향 교회 목회자들에게 저 멀리 타향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섬기고 나누는 것이 귀한 믿음의 실천적 자세라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추석의 신앙적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추석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명절이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의 화해와 사랑의 회복의 기회입니다. 나아가 이웃과 나누는 기쁨의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힘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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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기준"(마태복음 1장 17-2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7절부터 21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기준”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온 세상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이십니다. 저는 여러분께 먼저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기준이십니다. 예수님은 세계의 기준이십니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연호 AD는 ‘Anno Domini’, 곧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기준일 뿐 아니라 온 세계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제가 어릴 적에 두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홍천강에서였고, 또 한 번은 캐리비안 다이빙 풀에서였습니다. 그때 낯선 청년과 구조원이 저를 건져주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러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예수님께 마땅히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은 단지 물속에서 건져주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참 구원자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죄인 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은 새로운 시대를 여십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족보의 첫머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의 시조이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아의 혈통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은 그 정통성을 가진 참된 왕으로 오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다섯 여인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그들의 삶은 율법적으로 보면 부정하거나 이방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족보 안에 포함시키심으로, 구원의 은혜가 특정한 민족이나 신분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마태는 족보를 세 구간으로 나누어 열네 대씩 배열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윗이라는 이름의 숫자값을 강조하며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참된 왕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으로 잉태된 기적이요, 선지자의 예언 성취이며,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한 왕이시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죄인 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 회개하며,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그분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기준으로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서울에스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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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 3장 20~21절)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9절까지는 성도가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하기를 위한 기도, 20절과 21절은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운동력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부활, 승천, 구원의 능력을 말한다. 구속사적 사건뿐 아니라 우리 기도를 통해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능력이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큰 기쁨은 역사하시는 능력이 주를 믿고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는 기도를 빠짐없이 들어주신다. 한나가 드린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고(삼상 1:19~20, 27), 백성을 잘 돌보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에게 부와 명예까지 더하여 넘치도록 응답해 주셨다(왕상 4:22~30). 또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할 때 구하면 넘치도록 넉넉히 주신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하나님은 아량이 넓고 포용이 크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더구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욱 그러하시다. 바울 기도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가 된 교회를 위한 것이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빛나는가? 우리가 그분의 자랑이 될 때다. 하나님의 하신 일과 그분 자신을 높일 때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때다. 그리고 그 일은 ‘모든 세대를 통해 영원히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공동체가 같이하고,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된다. 그러면 거룩한 세대가 이어진다. 이어진 세대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여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축복한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현장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아브라함, 이삭, 한나, 사가랴와 엘리사벳 등. 그러나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그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 동기와 동력이 되었다. 고난이 축복으로 바뀐 거다. 그는 아이를 못 갖고 없어서 막힌 인생의 어둠을 뚫고 오히려 출산의 빛을 열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났다. 아침교회도 그러하다. 하나를 구했는데, 둘을 주시는 하나님. 제주도 여행이면 족한데 일본에 가게 하시는 하나님!! 이사할 집이 전셋집이어도 감사한데, 걱정 없이 살 자기 집을 주시는 하나님!! 말썽만 안 부려도 OK인데, 공부까지 열심히 하게 된 자녀들, 남의 편만 아니어도 되는데, 나의 편이 되어준 남편, 예배만 와도 땡큐인데 와서 제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는 여러분 같은 성도!! 선교사들에게 헌금만 보내도 기쁜데, 현장까지 마을까지 들어가 영혼을 구원하고 일꾼을 세우고 그 나라 목회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아침교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고 여러분에게 능력대로 주신 믿음이 아닌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는 2006년도 5월 28일에 세워졌다. 아주 작고 힘겹게 출발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공간도 부족한 상태로 시작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께서 일하기 좋은 상태였다. 그런 황량한 들판 같던 교회가 19년이 지나 성전이 성도들로 가득하다. 보통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요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준비가 된 충직한 청지기들이다. 7개월 후면 아침교회는 어엿한 청년, 스무 살이 된다. 아침인 연령대로 보면 모든 연령대 중에 20대가 가장 늦게 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10여 명의 청년이 출석하고, 얼마 전 청소년부가 생겨나 모든 부서를 갖춘 규모 있는 교회가 되었다. 현실은 냉혹하다. 한국교회 절반 이상이 교회학교가 없다. 아이들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린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아침교회가 한국교회의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응원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밖의 여행이 열흘간 있었다. 한 번도 구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장소와 일정이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초대한 선교사님 부부는 그냥 편하게 오라고 하셨다. 빅아일랜드는 하와이의 시골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충분한 영적, 정서적, 관계적, 육체적 리트릿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이번 여행은 계획단계부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사와 장남 혼인을 앞두고 엄두도 못 낼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특별하고 세미하게 이끌어주셨다. 마치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일한 것에 대한 존엄(dignity)을 지켜주고 돌려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선교사님 부부의 강한 권유가 계기였지만, 30년 전 청년 때 받았던 제자훈련학교(DTS)에 강사로 오셨던 분들이 말끝에 열방대학에 한 번 오라는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부부 목사 둘이 전부인 교회가 이런 계획을 하는 것은 모험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숙소, 만남, 일정, 날씨, 식사, 재정, 특별한 경험 등 하나님의 세심한 인도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선망했던 열방대학 방문. 특별한 숙소를 배정받았다. 상상할 수 없는 비용으로 숙박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선교사님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가는 비행기 좌석은 둘이 떨어져 앉는 자리였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도 되는 기회인데, 아쉬웠다. 하지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내 옆 좌석이 둘이나 비어있는 것을 봤다. 큰 비행기에 딱 두 자리만 비어있었다. 승무원에게 아내 자리를 옮겨도 되는지 묻자 쾌히 허락해줬다. 호놀룰루 국제공항까지 아주 편하게 대화하며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는 열방대학 숙소였다. 숙소 번호가 118호였다. “내가 너희 숙소를 특별히 준비했어.”라는 하나님 신호였다. 현재 사는 아파트 비밀번호였다.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고 간섭이다. 그 사건이 주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릴 사랑하고 인정하며 교회를 기억하신다는 신호였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 제목을 생각하며 우린 감동어린 감사를 드린다. 열방대학 예배모습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도록 열방대학 기도실을 가까이에 두셨고, 주일 밤 출발했으나 시차로 주일 낮에 도착하여,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천여 명의 세계에서 온 수많은 예배자와 함께 찬양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것이 하와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곳은 한적하고 쾌적한 날씨로, 기온이 22~26도, 밤에는 산바람 아침엔 바닷 바람으로 생활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선교사님들 덕분에 검소하고 부지런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마다 깨어 기도하고 조깅하여 함께한 시간이 참 복되었다. 20대 시절 소속된 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을 때 오셨던 열방대학 강사님들이 여러분도 꼭 와서 보라고 했던 영적으로 충만한 세계선교의 요람이자 뿌리가 되는 열방대학을 방문하여, 예배할 수 있었다. 아내 박목사님은 20대 때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풋풋한 기억을 만날 수 있어 좋았고, 열방대학 여러 학생이 한국에 대해 묻고 Korean Prayer에 대해 물어봐 줘서 나눌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열방대학 청년들의 모습 나는 고교 시절부터 철야기도를 하며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해 오랜 기간 기도해왔는데, 평생을 헌신하여 선교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을 따라 믿음으로 삶을 살아낸 YWAM의 로렌 커닝햄 목사님 부부와 거룩한 부르심을 잇는 수 많은 크리스천을 만나고 얼굴을 마주 대하며 서로 격려하고 얘기 할 수 행복하고 감사했다. 파도가 높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다를 찾아 가장 높은 파고를 향해 헤엄치는 사람들이 있다. 서퍼들입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파도를 찾아온다. 높은 파도를 기다린다. 그런 파도에 매료되어 삶을 즐긴다. 고난이 고난 아닌 축복으로 바뀐다. 여러분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 고난도 넘을 수 있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통이나 짐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렇다. 예수전도단(YWAM)을 설립한 로렌 커닝햄은 환상을 봤다. 높은 파고를 일으키며 온 세계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것을 봤다. 두려움이 아닌 환희를 가지고, 1960년 청년선교단(YWAM)의 시작되었다. 로렌 커닝햄 목사님의 말씀이다. "저는 세계 지도에서 파도를 보았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의 파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꼭 필요한 예배, 좋은 안내자, 상쾌하고 적절한 쉼,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을 편히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나라 걱정, 교회와 외부 사역도 잠시나마 잊고 내려놓을 수 있어 잘 쉬었다. 6일간 머물렀던 제주도나 시골 같은 열방대학(Univisity of the Nations) 빅아일랜드 카일루아-코나지역은 정말 특별한 상급이었다. 세계 최대 천문대 마르나케어 한 날은 세계 최대의 천문대라고 하는 마우나케어를 찾았다. 그런데 근처에 도착하자 하필 비가 왔다. 먹구름으로 제법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방문자센터까지 가서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나이 든 가이드는 올라가도 괜찮다고 말했다. 입장료도 없었고 사륜구동 차량인지, 내려올 때 기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만 안내해줬다. 아주 높은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와도 왜 올라가도 괜찮은지 알았다. 비구름대는 아래쪽에 있었고 위쪽은 넓고 맑은 구름대가 펼쳐졌다. 정상에 이르니 추웠지만 아주 좋은 날씨였다. 그렇구나!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 이와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마우나케어에서 환상적인 노을을 목격했다. 경이로운 광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노래하기에 족했다. 뜻밖의 풍성한 감사도 곳곳에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안석문목사는 중앙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가르쳤고, 정릉교회와 예능교회 부목사를 거쳐 2006년 아침교회를 창립했다.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일을 줄곧 해 오다가 현재는 YP클럽의 대장과 한국교회 다음세대지킴이 연합(한다연) 상임총무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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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뜻밖의 풍성한 감사(에베소서 3장 20~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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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 홍석영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의 추수감사절은 1621년 가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국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해 갈등을 겪던 이들은 네델란드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네델란드에서의 삶 역시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돈을 모아 메이플라워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의 삶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도착했는데 첫 겨울을 지내면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44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듬해 현지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1621년 가을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식사를 했던 것이 현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부터 미국과 동일하게 11월 셋째 주에 처음으로 지켜졌습니다. 이후 한국의 추수 시기에 맞추어 조정을 하게 되면서 현재는 많은 교회들이 10월 마지막 주 혹은 11월 셋째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세번의 시기는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었습니다(신16:16). 이중에 초막절은 한 해 수확의 첫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키라 명령하신 세 절기 중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는 초막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고양시에 위치한 안디옥성결교회의 예배모습 첫째,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분주한 삶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 가짐이 조심스러워 지는 곳을 선택하라면 가장 먼저 교회를 꼽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분주한 삶 가운데 구별된 곳입니다. 다른 곳 보다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각 사람이 빈 손으로 나오지 말고 감사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나아오는 자는‘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신16:17)’ 제물을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열매가 다를 것입니다. 각자, 그리고 우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내 삶의 열매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예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받으시고 큰 복을 더 하실 것입니다. 셋째,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아무 것도 없어 초막에 거주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 한 주간 초막에 거하게 하셨습니다(레23:43). 그리고 이 기간에는 ‘너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부터 얻은 소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득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다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주의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십시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빈 자리가 주의 은혜로 채워 질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추수감사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추수감사절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얻은 소득으로 힘껏 드리기 위해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며 섬기십시오. 특히 교회 믿음의 형제 자매, 목회자들과 식사라도 한 끼 나누며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삶의 범사에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안디옥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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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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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병목의 은혜(마가복음 5장 25절에서 34절)
- 여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좋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언비천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과 같이 내 입술에서 좋은 말이 만들어져 나가길 소망합니다. 교회자랑, 목사님자랑, 성도자랑, 새가족이 믿음이 정착하는 자랑을 할 때 동서남북에서 많은 자랑의 소문을 듣고 병목의 은혜로 교회는 차고 넘칠 줄 믿습니다. 본문에 기적을 체험한 여인은 좋은 소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 혈루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31절) 학1:5-6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우리의 행위를 살피고 새어 나가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의 좋은 소문을 내는 성도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물질도 나가고 건강도 잃게 됩니다. 치료함의 방법은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씀처럼 여인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게으름, 기도를 쉬는 것,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면 신앙 회복과 육체와 물질의 혈루증이 깨끗이 나음을 얻습니다. 2. 믿음의 기적을 일으킵니다.(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회와 찬스를 놓치지 않고 무리를 뚫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전진할 때 믿음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옷자락을 붙잡기만 하자, 주의 전에 오기만 해도 주님은 날 만나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킴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인의 믿음처럼 우리도 믿음이 커가므로 예수님의 보혈로 몸의 질병이 말라가는 기적이 이루어지길 예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3. 병목의 은혜가 임합니다. 동서남북에서 밀려오는 축복이 내 삶 속에서 임할 줄 믿습니다. 창세기 6장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120년 동안 배를 만드는 중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좌지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말씀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 나갈 때 의로운 자로 병목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손잡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영육의 질병 또한 나음을 믿고 강건함을 누리는 하나님자녀 되길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광명대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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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병목의 은혜(마가복음 5장 25절에서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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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감사가 답이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 감사를 발견하고 감사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최고봉을 붙잡은 사람입니다. 최고를 가진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작은 것을 감사합니다. 순간순간 감사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감사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동안 내가 누렸던 모든 축복들이 주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는 말했습니다. ‘감사라는 보석을 지닌 사람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행복하다.’ 어느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감사의 보석을 갖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된다면 무엇을 입든, 무엇을 먹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기적이 일어났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기적의 원천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움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없는 인생 없고, 기도 제목 없는 가정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예수님의 삶을 자세히 보시면, 그 말은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감사하라!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낭패한 상황,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니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선으로 바꾸실 것임을 믿는 믿음의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범사 감사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나침반의 바늘이 아무리 흔들려도 결국은 정북을 가리키듯,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감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고 다짐하고, 그렇게 결단하고, 매일 감사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힘든 일을 만나도 우리 삶의 방향은 나침반처럼 감사라는 방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불행이고, 슬픔이고, 아픔이고, 실패이고, 좌절이고, 절망이지만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감사의 조건들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더 큰 축복의 도구인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라는 말이 점점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깨닫고 나면 감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철 들고 나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깨달은 만큼만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곤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평범하게 지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의 조건들인데,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어찌 보면 뒤늦게 깨닫고는 감사드리는 ‘뒷북 감사 신앙’이 아닌가, 주님 앞에 머리 숙여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인생은 마이너스 인생이고, 감사하는 인생은 플러스 인생입니다. 감사는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하나를 감사하면 두 개의 감사 거리를 주십니다. 가시를 감사할 때 장미꽃도 감사하게 하십니다. 제로를 감사할 때 셀 수 없는 은혜들로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깊고 선하신 뜻에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범사에 ‘할렐루야’ 하는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감사가 인생의 답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능곡중앙교회 천세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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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감사가 답이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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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감사와 화해로 드리는 명절(신명기 16장 11절)
- 이번 추석 명절 기간은 다른 어느때보다 날짜가 긴 것이 특징입니다. 주일을 포함해서 무려 10여일 가까운 날이 휴가처럼 긴 연휴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더 초조하고 불안하고 공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추석은 가족이 모이고, 조상을 기리며, 수확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명절이 스트레스, 갈등,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명절을 “하나님앞에서 즐거워하는 날”로 소개합니다(신 16:11). 그러므로 우리의 추석은 단순히 세속적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화해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추석 명절은 최고의 감사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확 후 초막절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추석도 우리 삶의 열매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한해 농사를 추수하는 농부처럼 올 한해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 그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가을에 풍년을 맞고도 “비가 너무 왔으면 어쩔 뻔했나, 햇빛이 모자랐으면 어쩔 뻔했나” 하며 불평만 했습니다. 이웃 농부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손에 곡식을 주셨잖아. 감사가 없으면 풍년도 기쁨이 되지 못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속에서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추석 명절은 모든 이들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지만, 묵은 감정과 갈등으로 인해 즐겁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서로 화목하라”(롬 12:18), “서로 용서하라”(골 3:13) 권면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후, 전쟁터에 세워진 교회에 남군과 북군 신자가 한자리에 앉는 것을 꺼렸습니다. 목사가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라고 선포하자, 성도들이 서로 손을 잡고 화해했다고 합니다. 추석은 가정의 화해와 용서를 실천할 기회입니다. 셋째 추석 명절은 함께 나누고 섬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16장 11절은 명절의 기쁨을 “레위인, 객, 고아, 과부와 함께” 나누라고 합니다. 우리의 추석도 가족만이 아니라 주변 이웃, 어려운 자들과 나누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참된 경건이야말로 예배나 기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경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된 기쁨은 나눔에서 완성됩니다. 우리교회는 남양주에서 청소년사랑의 밥차를 11년째 매주 금요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부유하고 넉넉한 시대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밥을 굶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이 매주 적지 않게 찾아옵니다. 땅끝 선교지가 청소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배가 고픈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려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족과 형제들, 친지들과 이웃을 돌보고 고향 교회 목회자들에게 저 멀리 타향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섬기고 나누는 것이 귀한 믿음의 실천적 자세라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추석의 신앙적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추석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명절이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의 화해와 사랑의 회복의 기회입니다. 나아가 이웃과 나누는 기쁨의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힘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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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감사와 화해로 드리는 명절(신명기 16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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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기준"(마태복음 1장 17-21절)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7절부터 21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기준”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온 세상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이십니다. 저는 여러분께 먼저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기준이십니다. 예수님은 세계의 기준이십니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연호 AD는 ‘Anno Domini’, 곧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기준일 뿐 아니라 온 세계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제가 어릴 적에 두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홍천강에서였고, 또 한 번은 캐리비안 다이빙 풀에서였습니다. 그때 낯선 청년과 구조원이 저를 건져주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러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예수님께 마땅히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은 단지 물속에서 건져주신 분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참 구원자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죄인 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은 새로운 시대를 여십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족보의 첫머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의 시조이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아의 혈통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은 그 정통성을 가진 참된 왕으로 오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다섯 여인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그들의 삶은 율법적으로 보면 부정하거나 이방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족보 안에 포함시키심으로, 구원의 은혜가 특정한 민족이나 신분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마태는 족보를 세 구간으로 나누어 열네 대씩 배열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윗이라는 이름의 숫자값을 강조하며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참된 왕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으로 잉태된 기적이요, 선지자의 예언 성취이며,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영원한 왕이시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죄인 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 회개하며,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그분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기준으로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서울에스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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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기준"(마태복음 1장 17-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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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자
-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 많이 배웠고 훌륭한 교양을 쌓고 옷을 잘 차려 입었어도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가 기독교인이라 해도 그의 속에는 아직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죄의 본성 때문에 하는 것 하나가 남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하게 수군수군하며 남을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그렇게 찬성하지 않는다. 도리어 말을 가급적 많이 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잠언 21장 23절은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했다. 잠언10장 19절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3가지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아야한다. 남을 비판하면서 우월감에 사로잡히거나 남다른 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비판하는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판은 비판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비판은 사람의 마음을 더 굳게 걸어 잠그게 한다. 마음을 냉랭하게 한다. 방어적으로 만들고 다시 공격적으로 만든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다 똑같다는 것이다. 다른 성품이나 기질이라고 해서 그 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다. 서로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마음은 교만하지 않는다. 도리어 겸손하다.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들보는 한옥과 같은 집에서 지붕을 떠받치는 굵고 긴 나무를 말한다. 남을 비판하는 그 사람의 눈에는 들보가 있고, 비판을 받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한 후에야 남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바꾸는 일부터 했더라면 이어서 가정을 바꾸고, 마을을 바꾸고, 더 나가서 나라를 변화시켰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누가 알겠느냐? 세상까지 변화시켰을지”맞는 말이고 성경적으로 봐도 옳다. 랍비는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 혹은 덕목이 몇 가지가 있다. 비전, 혹은 목표, 카리스마, 통찰력, 전문 지식, 열정 등등의 것들이 지도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다른 모든 자질을 갖추었더라도 모범이 되지 못하면 아무도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내 문제를 고치는 것이다. 내가 똑바르고 선명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눈 속에 들보와 같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먼저 치료받는 것이다. 혹은 나쁜 습관이나 행실을 고치는 것이다. 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그것들은 계속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많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을 때,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주님에게 내 보여 드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셔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덮고 닦아서 해결될 아픔과 상처가 있다. 또는 나의 망가진 마음의 한 구석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신림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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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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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차고 넘치게 - 시편 19편 1절~10절
- 1년 24절기 중에 지금은 열네번째 절기인 처서를 지나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로 한참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9월부터는 교회력으로 창조절이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이어지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성령강림절 절기가 너무 길고, 하나님과 관련된 절기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9월 첫 주부터 창조절 절기를 만들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모두 기리는 균형 잡힌 교회력을 지키고 있다. 한편 창조절기를 새롭게 만듦으로써 우리 신앙고백의 근원이 되는 창조신앙을 되돌아보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전 지구적 생태 위기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더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창조로 시작해서 창조로 끝난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창세기는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에서 새로운 질서와 빛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마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와 구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모든 구원의 메시지는 창조와 창조 사이에서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바라보고, 계속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때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자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며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그 영광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창조자의 숨결과 말씀이 온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고 노래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시인처럼 느끼고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모든 존재와 사건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존재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우리의 관심과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잠깐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몰아닥치는 일과 바쁜 일상에서도 우리는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추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또한 자연을 지그시 바라보시며 하늘의 뜻을 읽어 내셨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서 예수님의 삶과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느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통해 무조건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걱정 근심에서 해방되고 참 자유와 진정한 삶의 의미인 영생을 얻으셨던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시고 깨달으시기 바란다. /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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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차고 넘치게 - 시편 19편 1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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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십자가 - 마가복음 15장 21~39절
- 십자가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십자가가 조롱받는 이 시대에 우리는 힘써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노래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며 살자. 십자가는 상징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생명이고 영적 실체이다. 신앙생활의 비법이고 왕도이다. 그러나 오늘 무엇보다도 치유하시는 십자가를 전하고자 한다. 십자가는 치유하는 은혜이다. 주님께서 민수기 21장에 나타나는 놋뱀의 사건,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처음으로 직접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것을 말씀하시는 대목이다. 십자가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스스로 상처를 입으신 치료자이다. 주님은 우리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인생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고 맛보신 분이다. 그래서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다. 주님이 당하신 모진 고통과 아픔은 조목조목 우리의 치유와 연결된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무엇인가. 먼저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주님께서 채찍질 당하실 때 그의 온 살점은 찢어지고 뜯겼으며 가시관은 머리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고통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형 틀이었기 때문이다. 고통당하실 이유가 없는 그분이, 죄도 없는 주님이 말이다. 바로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우리가 치유 받게 하기 위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담대히 선언한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함을 얻는다. 둘째로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이 고통은 엄청난 내적인 고통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오히려 구체적으로 말한다. 공생에 사역 속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주님은 수없이 조롱받고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멸시의 눈초리 모욕과 수치심,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까지 조롱하는 마음의 상처를 너무나 심하게 받으셨다. 주님도 맘이 아프셨다. 죽을 만큼 아프셨고 쓰리셨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오르신 이유는 못나고 망가지고 병들고 상처받은 채로 정신적 공황과 무너짐 속에 아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 시간 누구든지 마음이 아픈 사람은,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치유되고 회복될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 말씀을 그대로 되뇌신 것이다. 왜 주님은 운명 직전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그 고통스러운 입술을 열어 외치셨을까. 바로 그때 주님은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고 아버지가 자기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신가 싶다. 내 인생에서 내 사업에서 내 자식들에게서 떠나셨는가. 진정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세상으로부터도 내팽개쳐진 것 같은 상한 감정, 두려움이 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영적인 고통이 올 때, 신앙의 회의가 생길 때, 마음이 메말라서 쩍쩍 갈라질 때,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믿음이 회복되고 예배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찬송이 터질 것이고 눈물이 회복될 것이다. 병이 치료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그 모진 고통들을 다 당하시고 그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치유의 십자가이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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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십자가 - 마가복음 15장 21~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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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맡겨야 할 근심, 해야 할 근심
- ▲ 이재영목사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에 이렇게 정의했다.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못하고 입고 싶은 옷을 가끔 못 입는 정도의 재산에, 한 사람한테는 이기고 두 사람한테는 지는 정도의 체력, 반만이 손뼉을 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현대인들 가운데 플라톤이 정의한 행복에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행복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갖추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실제로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세잎 클로버의 꽃도 ‘행복’이다. 많은 사람이 행운을 찾기 위해 일상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가 많다. 결국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주어진 행복을 밟아 버리고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불행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근심이다. 근심이 가득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는 근심은 다 똑같은 근심이 아니다. 맡겨야 할 근심이 있고 해야 할 근심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이 말씀하는 첫 번째 근심은 세상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육신적인 근심을 말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은 것이다. 생활하다 보면 쓰레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아무리 욕심쟁이, 구두쇠라도 쓰레기는 내다 버린다. 만약 쓰레기를 집에 그냥 두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게 된다. 우리가 계속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잠언 17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곧 세상 근심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육체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근심이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근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근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두 번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머리 싸매고 해야 한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어떤 근심을 말씀하는 것인가? 그것은“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생기는 거룩한 근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섬기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께 더더욱 헌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이런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세상근심은 우리를 죽이는 근심이기에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살리는 근심이기에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대구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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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맡겨야 할 근심, 해야 할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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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기도해야 하는 이유
- 기도는 말과 함께 시작되는 것 같지만 사실 감정이나 본능과 함께 시작된다. 본능은 살고 싶고, 먹고 싶고, 잘되고 싶은 거다. 목사인 나 자신도 기도하면서 ‘내 신앙은 왜 이렇게 유아적인가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아서 요구가 많은가?’ 종종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죽음에 사로잡힌 상태일 수 있다. 본능적인 욕구마저 없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드러내고 개방하고 자기의 현재를 모습을 인정하고 여는 것이다. ‘나 이런 문제 있어! 기도해줘!’ 때로 중보기도를 부탁할 때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 오늘 말씀 1절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고 한다.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먼저 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묶여 있는 그 문제에서, 눌려있던 어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조금은 부담스럽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용사로서 또는 믿음의 장수로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장수하면 우리는 마치 총 맞은 동료가 쓰러져서 신음할 때 총탄을 뚫고 동료를 부둥켜안고 총탄을 헤쳐 나올 수 있는 특수요원을 연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리더가 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이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영적 전투는 항상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수요원을 만들기 전에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를 원하신다. 게릴라를 훈련시킬 때 왁자지껄한 시장에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인적이 없는 산에도 풀어놓는다. 그러면 뱀 잡아먹고 나무뿌리 캐 먹고 살아남아야 한다. 산속에서는 훈련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이 구해주길 바랄 수는 없다. 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은 환자그룹에서 의사그룹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이런 연단을 통과하기 위해 기도는 필수다. 이렇게 기도는 생존본능으로 시작되지만, 이 연단은 내가 먼저 일어나는 훈련이다. 빛을 발하며 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과업이 먼저 성취되야 한다. 기도가 지속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자기를 살피게 된다. 기도를 통해 어둠에 눌려 패잔병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42:4)라고 자신을 탓하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기도를 했다. 기도는 입고 있는 누더기를 벗겨 내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축복의 자녀임을 알게 해 준다. 기도하면서 숨겨져 있는 것들이 드러난다. 숨겨져 있는 좋은 것, 나쁜 것들이 드러난다. 기도는 드러냄이다. 기도할 때 현재의 내가 누구인가를 말한다. 기도할 때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표현되어 나온다. 기도할 때 자신의 긍정적인 것 뿐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것도 본다. 기도할 때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기도할 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와 인도를 경험한다. 기도할 때 내가 떠밀리기보다 이끌려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없을까 궁금해 한다. 그러나 기도해 보면 기도가 정말 신앙생활하기 가장 편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이사야 60:2) 어둠이 땅을 덮었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렸다. 세상이 너무 어둡다.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거대한 계획 보다는 내가 먼저 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 신음하는 그 자리에서 나부터 일어나야 한다. 내가 일어나면 내 주위가 살아난다. 나부터 일어나야 한다. /양지평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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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기도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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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호미와 낫의 기호학
- ▲ 허태수목사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에 식물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식물을 가꾸기 위해 땡볕에서 호미를 든다. 또한 우리는 식물을 위해 낫을 든다. 모든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을 가꾸기 위해 우리는 낫을 들고 덤불을 벤다. 우리는 호미와 낫이 주는 ‘이형동질’의 기호학을 문화의 디엔에이로 축적하며 살아왔다. 일찍이 문맹자를 놓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했다. 낫은 곧 인간의 ‘질화’이다. 단순한 공산품이거나 혹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었던 것이다. 낫이 날카로운 칼날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없는 것은 그 모양이 ㄱ자처럼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낫을 잘못 휘두르다가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이나 정강이를 찍는다. 생김새만 안으로 구부러진 게 아니라 그 칼날 역시 안쪽으로 나 있어서 남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유목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는 서구사회의 농기구는 날이 밖으로 서 있고 그 모양새도 일자다. 창처럼 꼿꼿하다. 그러므로 서구의 농기구들은 금세 무기로 전환할 수 있는 공격 형태를 하고 있다. 유목이란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쟁기를 금방 무기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서양의 낫은 죽음의 신이 들고 다니는 상징물이자 사람의 목을 베는 흉기였다. 옛 소련의 깃발에 새겨진 낫과 망치처럼 생활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혁명수단인 무기로서의 공격성을 보이는 거다. 그러나 우리네 호미와 낫은 무기로서의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칼이나 창의 끝을 구부리고 밖으로 선 날을 안으로 세울 때 비로소 농부의 연장, 낫과 호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이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라! 서양 사람들은 보통 칼을 쓰듯이 안에서 밖으로 내미는 데 비해서 우리는 거꾸로 밖에서 안으로 감아 잡아당기지 않는가. 낫을 안으로 구부리고 그 날 끝을 덜 밀면 곧 호미의 모양이 된다. 자기 가슴으로 향해 있는 칼날, 이 철학적이고 기호학적인 것이 바로 낫이며 호미다. 그래서 호미질을 세게 하면 자신의 발을 찍게 된다.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호미의 생김새는 지평선으로 확산해가는 도발적 힘이 아니라 안으로, 뿌리로, 자기 자신으로 끝없이 응집해 들어오는 힘이다. 낫은 호미의 반대어가 아니다. 살생의 모든 무기가 곡식의 생명과 인간의 목숨을 공궤하는 도구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호다. 설령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래도, 그 낫이 파랗게 날이 서 있어도, 남을 해치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위험한, 그래서 남에게 사용하는 병장기가 아니라 나와 너의 목숨을 도모하는 상생의 도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식물, 곧 모든 생명을 보듬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인간적 능력들과 힘을 다른 생명을 위해 사용해야만 한다. 제 생명 보존하기 위해 감사히 대해야 마땅한 다른 생명들을 파괴하는데 우리의 ‘낫’을 휘두른다면 그 칼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는 엄중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보시기에 참 아름답다 하신 그 다른 생명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겸허히 자연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가 귀한 자녀이듯 하늘의 날고 기는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각성하고 회개함으로 교회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길 기도한다. /춘천 성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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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호미와 낫의 기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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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 이 세상의 문화를 주도하는 강력한 두 사조가 있다. 기독교사상이 바탕인 헤브라이즘이라는 신본주의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근간으로 하는 헬레니즘이라는 인본주의, 곧 구속사와 세속사라는 상충 되는 흐름이다. 그리고 인간 안에도 가인과 아벨로 대별되는 두 혈통이 존재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에덴동산의 발원지 중 하나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이 문명을 주도한 혈통이 가인의 후예들인데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높은 성을 구축한다. 대조적인 삶을 보여준 아벨의 혈통을 이은 셋의 후예들이 있다. 성경은 누가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뿐이지만, 이들 안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씨앗이 심겨 있었고 때가 되니 그 씨가 발아 되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장 26절)는 싹으로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 말을 건다”란 뜻인데 오늘날로 말하면 공적 신앙고백을 하면서 찬양과 기도가 곁들여진 형식을 갖춘 예배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담이 그토록 고대했던 여자의 후손은 민족적으로는 유대인으로, 혈통적으로는 셋 계통으로, 사상적으로는 헤브라이즘을 통해 세속화로부터 그들을 보존하신 후 마침내 성령잉태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구원과 함께 심판을 단행하심으로(창세기 6장 7절) 사랑과 공의도 보여주셨다. 이 홍수심판의 위기에 대해 창세기 6장 1~2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원인분석을 했다. 셋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가인의 후손들과 혼합되어 타락함으로 홍수심판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당시도 그렇고 오늘날의 위기 역시 타락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타락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진리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사사기 21장 25절) 살려는데 있다. 믿는 자들이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방기하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된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해야 하며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혀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착한 행실로 건덕을 이루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 경제, 외교적 위기도 의인 열 명이 없어서이다. 세상과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로마서 8장 19절)고 했다. ‘나타나기’가 영어성경엔 ‘manifestation’인데 이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 완전히 회복 된 의인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신령한 성도(로마서 8장 14절)들의 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2~28절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고,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회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예고한다. 당초 하나님의 섭리가 복원되는 카이로스의 때로서 이런 자격조건에 가장 부합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일본의 경제도발과 열강의 각축장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해방시켜줄 또 다른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기다렸던 여자의 후손,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했던 메시아,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 인류 역사의 분기점인 B.C와 A.D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섬길 의인 열 명이 필요하다. /예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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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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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50만분의 1이라고 한다. 850만 명 중에 한 사람밖에 당첨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경마나 다른 카지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 구조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사행사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미래가 불안전하니 한 번 대박을 터트려 인생 한번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탕주의요 요행 심리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쉽게 살아가려고 한다. 쉽게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냥 되는 것은 없다.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한탕주의와 요행 심리는 세상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요행 심리를 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 기도 잘해서 대박을 터트리려고 한다. 한번 헌금 잘해서, 한번 예배 잘 드리고 대박을 터트리려고 한다. 이런 심리는 신앙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일본 나라현에 가면 호류사라는 절이 있다. 이 호류사는 천 년 된 소나무로 지어졌다. 이 절을 1,400여 년 동안 대대로 지켜온 ‘궁목수’ 가문이 있다. 일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라고 한다.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궁목수 가문이다. 이 가문에서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 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 이는 나무의 자연적 생명으로서의 수명과 목재로 사용된 뒤부터의 생명 연수가 같다는 뜻이다. 곧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천년을 견딘 나무니까 천 년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의 강도를 나타내는 인생의 나이테이다. 견딤은 인생이라는 나무를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다. 소설가 박완서선생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넉 달 뒤에는 스물여섯 살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또 잃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한번은 잡지사 기자가 박완서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러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것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가 고통에 대해 저항할수록 고통스러워진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만큼 쓰임 받는 것이다. 욥은 견딘 만큼 쓰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이런 욥에게 갑작스러운 고난이 닥쳤다. 자녀들도 재산도 다 잃어버렸다. 건강도 잃어버렸다. 그의 아내마저 고통받는 욥을 보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친구들도 욥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욥을 비난했다. 그 무엇보다 욥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욥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연단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이 연단의 과정을 잘 견디어 놓게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다.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견딤을 통해서 쓰임 받았던 인물들이다.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쓰임 받고 싶은가? 견뎌라. /대구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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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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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는다면 도전하라
- ▲ 김현수목사 우리 집에는 머리카락을 소중히 기르는 딸이 있다. 딸의 꿈은 공주다. 공주 중에서도 ‘라푼젤’이 되는 것이다. 라푼젤은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머리카락이 긴 공주다. 그러니 머리카락을 더 소중히 여긴다. 머리를 오래 기르자 머리끝이 갈라지기 시작해 잘라야 할 때가 되었다. 아내가 딸에게 잘 설명하고 얼마나 자를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엄마가 정해주세요” 그래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카락이기에 나중에 후회가 안 되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딸이 대답했다. “나는 엄마를 믿어요” 이 대화 속에서 딸이 많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녀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때는 두려움을 잘 극복할 때다. 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제 그 두려움을 극복했다. 두려움을 극복했던 방법은 믿음이었다. 엄마에 대한 믿음이 두려움을 이기게 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저하고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끝은 뻔한 결말이다. 그러나 믿음은 뻔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은 도전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아브람은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그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편안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는다. 편안한 것만 찾아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뻔한 결말만이 있을 뿐이다. 2014년 미국에서 택시 업체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소송의 대상은 ‘우버’라는 라이드 셰어링 서비스였다. 100년 넘게 변화가 없던 택시 업계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택시를 타기보다 우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버를 사용하는 이유는 편안함보다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용자에게 우버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이유는 도전할 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믿음이 좋아지면 삶이 편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삶이 아니라 편안한 삶일 뿐이다. 믿음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그가 편안한 삶을 원했다면 뻔한 결말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음을 가지고 도전했다. 그 도전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도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전할 때 하나님을 경험한다. 도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를 통해 믿음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맹모삼천’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말이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도전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환경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지금 있는 환경이 나의 미래를 만든다. 예배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세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75년 동안 자녀 없이 희망이라고는 없었던 아브람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소망 없던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그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되게 하셨다. 두려움은 뻔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믿음은 도전하는 인생으로 살게 한다. 뻔한 인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전하는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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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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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는다면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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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우리가 살려면 악을 미워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외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언약과 계명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악은 인류 최초의 조상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 결과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그 죄악에 오염되고 말았으니 그 죗값으로 사망이 온 인류를 지배하게 됐다. 이처럼 악은 궁극적으로 사망을 가져오는 것이니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악을 미워하여 멀리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 모든 교인은 값없는 하나님의 구속, 구원의 은혜로 인해 과거 죄악의 종노릇을 하던 자리에서 건짐을 받아 영생의 자리로 옮김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악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다시금 죄악을 가까이한다면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베드로후서 2장 22절)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려면 선을 구해야 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고 외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착하고 올바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선이라고 말한다(시편 106편 1절).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좇아 사는 것을 가리켜 또한 선이라고 말한다(로마서 12장 9절).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창조주 되시며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허탄한 우상과 더러운 악령인 귀신을 숭배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탄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 든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요한계시록 21장 8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사망 가운데 처하도록 하실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려면 공의를 세워야 한다. 아모스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듯 인간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장 5~6절)고 했다. 따라서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그 어느 때고 제대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했던 적이 없었으니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께 매를 맞고 신음하는 수치로 얼룩졌다. 한편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다.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진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진정으로 살길을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시니(사사기 24장 16절) 그분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를 좇아 행함으로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24절) 세상에 흘려보내자. 하나님을 찾으면 살길이 열릴 것이다. /나돌섬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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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