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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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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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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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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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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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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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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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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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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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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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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나요?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군대 간 아들이 있는 집은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시험을 본 사람은 합격의 소식을, 장사하는 분은 손님이 오기를, 집을 산 분은 집값이 오르기를, 직장인은 월급이 오르기를, 물건을 주문한 분은 택배 아저씨를 기다릴 겁니다. 이런 육에 속한 것 말고 신앙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갈망으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취되기까지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역시 기다림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림을 선택한다면, 기다림을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되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밝은 빛을 사모하듯, 그 어느 때보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아가 달랐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정치적·군사적 메시아, 혹은 사회적 속박과 가난에서 건져줄 메시아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이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시대적 암흑기에 깨어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시므온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아기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아닌,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지시와 감동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고요하지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세상의 주관자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했습니다. 우리들도 경건한 시므온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따라 마지막 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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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무엇을 기다리나요? - 누가복음 2장 25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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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 공정범 목사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상황이나 재림 시기에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모습을 보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곳의 성탄의 분위기는 너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져서 구약의 율법의 예언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헤롯왕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의 예물 드림과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에 왜 두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하셨을까요? 민수기 35장 30절 ‘사람을죽인 모든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것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증인이 필요할 때 두명의 증인을 세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은 증언의 신실성을 말합니다. 동방박사, 목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이심이 분명히 입증되어 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방문으로 자신들이 확신했던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9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8절에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 은혜를 누렸습니다. 이목자들이 어디에 있을 때냐면 오늘 그 자리, 그 지역에(베들레헴) 있을 때입니다. 다른 먼 동네가 아닌 베들레헴지역에 있을 때입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베들레헴은 어제의 동네 베들레헴이 아니라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영광의 베들레헴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안에 거해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땅 위에 살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날은 성경 말씀의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온전한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굳게 잡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미국 LA 주님뜻교회 공정범목사는 성결대학과 서울신대(M.DIV) 를 마치고 도미하여 주님뜻교회를 세워,세계선교와 한인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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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말씀] 성탄을 보며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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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율법,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크리스천의 대헌장이자 핵심 윤리다. 산 위로 나아 온 제자들과 무리를 대상으로 들려주신 예수님 설교, 마태복음 5, 6, 7장이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복음 8, 9장은 열 개의 기적으로 연결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의 말씀처럼, 복음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역사하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제자가 어떠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을, 죄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주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자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청결한 자는 하나님 봄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음과 예수님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천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복되다. 복되다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다. 하나님 통치를 누리는 자만 경험하는 심오한 내적 기쁨이 아쉬레다. “엄청난 하늘 행복”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주어진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결과가 “아쉬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또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이 “소금과 빛”(마 5:13~16)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썩지 않게 한다. 맛을 내려면 녹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짠맛은 소금밖에 낼 수 없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의 독특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그러면 길에 버려지고 밟힌다. 이처럼 가치 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맛을 내야 한다. 그게 진짜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과 현저히 구별된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진가를 발휘한다. 제자의 “선한 행실”이 바로 빛이다. 선한 행실은 제자 안에 있던 하나님 성품이 드러난 결과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도의 영향력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선전되고 자랑이 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우리는 찬송이 된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성육신하신 분이 아니다. 율법 폐기론자와 율법주의자는 주님과 다르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 의가 준비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호한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100점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만이 요구하시는 간절함과 기대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 지키고 따르기가 쉽다. 사랑이 먼저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다. 완전함은 주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다. 무거운 순종이 아니라 가벼운 순종으로 주님이 이끄신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 천국이 경험되는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아침교회 목사·한국교회 다음세대 지킴이 연합 상임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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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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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왔으며 ‘나는 왜 사는가?.’ 나의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낳고 양육하였는가? 삶의 목적이 불분명할 때에 인간들은 쾌락을 탐닉하고, 소유에 집착하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살지만, 80~90년을 살고 최후에 남는 것은 아쉬움과 후회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삶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조되었기에 창조주를 통해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다. 삶에 의미가 부여되어 삶은 단순해지고 해야 할 일을 쉽게 결정하므로 초점에 맞춘 삶을 살게 되므로 결국 영원(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주의 영광을 위해 왔으며 창조주가 부여하신 제일의 목적은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토록 존재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위해 일하시지만(창조, 보존, 통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에게 주신 나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꼭 해야 할 일, 장차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심으로 내 인생의 내신 성적이 될 일이 사명이다. 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게 하고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하고 나로 인하여 구원(영생)받게 하는 일,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명을 망각할 때 방황하지만 사명을 바로알 때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게 된다. 웰빙이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 목적을 분명히 알고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곧 이웃과 주님께 기쁨을 주는 자로 섬기는 자의 삶임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이유는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힘들고 실패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고 살기 때문이며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기에,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의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하고도 정확한 삶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가라. 창조자만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르쳐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해주셨기에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1:26~28)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0: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하라” 골1: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안에서만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고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이 허둥대며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진화론, 유신진화론등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고 헛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나의 희망과 소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붙들려 내가 사용되자. 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허무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삶이 내 것임을 주장하는 혼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넘어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유한한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주시는 사명을 바로 발견하여 사명에 매여사는 삶을 살아 내 인생 특별한 성공작을 만들어 하나님께 잘 살았다 칭찬받는 인생이 되라./예장 합동개혁 대전광역노회장·유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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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라. (이사야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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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투잡스 시대와 교회
- ▲ 이효상원장 투잡스 시대가 오고 있다. 아직 일반화되기엔 여러 사회적 어려움이 있으나 투잡스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구이자 흐름이다. ‘주5일제’라는 근무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IT산업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한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는 투잡스 시대를 필연적으로 불러오게 하였다. 세상의 환경이 변하고 있다. ‘한 우물만 파라!’, ‘두 마리 토끼를 좇지마라!’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있다. 한 사람이 이중의 직업을 소비하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과 한 우물 파기 정신을 성공의 미덕쯤으로 여기던 기존의 가치관 또한 이제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유럽에서는 투잡스를 준비하거나 혹은 이미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두가지 이상의 직업 소비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850만 명을 넘어 섰다. 이들 나라에 비하면 조금 늦게 형성된 감이 있으나 한국 역시 샐러리맨들의 퇴근 시간이 빨라지고 주 52시간 근무로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투잡스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여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른 일을 병행함으로써 부수입을 얻는 한편 제 2의 인생을 위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이미 투잡스가 우리 생활속에서 새로운 직업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투잡스 현상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일터사역의 미래를 보다 더 자세히 전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머지않아 찾아 올 본격적인 투잡스 세상에서 이를 철저히 대비하는 사람은 주류로서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회활동 측면에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직업적, 사역적 성공을 이루어가려면 투잡스 시대를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 제대로 준비하면 투잡스 환경은 기회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난관이 될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일터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안의 성도 관리가 전부가 아니라 교회 밖 삶의 ‘일터’가 선교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텐트사역’은 그동안 일부에 한하여 적용되었지만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이중직 사역’은 자생적 선교라는 측면에서 확대와 함께 필수로 바뀌어가야만 한다. 이제는 직업과 근로를 돈 버는 수단쯤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중직이든 직업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사회를 움직이는 연료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본업에 충실해야 할 시간에 일하지 아니하고 부업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하나의 낭비가 될 수 있다.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한,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직업은 자신의 삶을 내걸고 진정한 사역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기자가 선교사로, 선교사가 기자로 일할 수 있는 것처럼 목회자의 이중직과 더불어 투잡스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투잡스의 구체적 개념에서부터, 투잡스의 흐름속 이면에 서린 현상, 개개인의 특성에 맞춘 투잡스 구상, 투잡스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적 전략을 가져야 한다. AI 인공지능으로 달라진 시대상황을 기회로 삼아 사역적이든, 직업적이든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면, 먼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준비해야 한다.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이라는 시간을 임상적 시간을 통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시시각각 밀려오는 지구촌의 투잡스 구조를 파악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교회, 투잡스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체계적인 항해를 계속하자. 여기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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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투잡스 시대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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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설레면 아깝지 않다
- ▲ 박명수목사 바다가 파란 이유는 하늘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늘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많이 사랑하면 빠져든다. 어떤 부부들은 ‘이렇게 단점이 많은 사람과 어떻게 결혼했지’라고 말하며 깜짝 놀란다고 한다. 왜 그 사람과 결혼했는지 아는가? 많이 사랑해서 그렇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만큼 사랑했었다는 말이다. 내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으며 많을수록 그만큼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사랑해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사람 몸으로 오신 것은 어쩌면 당한 일이다. 너무 사랑하셔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늘을 버리고 우리 곁에 오셨다. 그 보좌도 아깝지 않으셨다. 너무 사랑하셔서 다른 것을 버릴 수 있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데 필요한 것도 사랑이다. 섬김과 도움은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가 진짜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해 말한다. 연보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이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생겼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물질을 모았고,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전달해 주었다. 그때마다 교회들은 자신들과 직접 상관도 없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동참했다. 바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필요하기에 도와주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도와주면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사랑이 없으면 주는 것이 아깝다. 사랑하면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진다. 사랑의 설렘이 있으면 아깝지 않다. 설레면 아깝지 않다. 사단은 항상 사랑을 공격한다. 교인이 헌신하지 못하게 상황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괴롭힌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게 한다. 지체들을 향한, 교회를 향한 마음이 달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헌신이 회복되는 데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교회를 향한 사랑이다. 더 깊이 사랑하기 시작하면 헌신의 삶이 아깝지 않다. 어떻게 하면 사랑이 깊어질 수 있을까. 바로 일상성이다.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야 사랑이 깊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매주 연보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한번 크게 하고 끝내는 연보가 아니라 매주 연보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잘 모으라는 말이다.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도 모으길 원하는 마음이다. 매주 하는 연보 속에 매주 담기는 사랑을 원했다. 헌금이 매주 쌓여 갈수록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마음도 쌓여 가길 원했다. 사랑은 만짐이다. 손길 따라 전해진다. 많이 닿고, 많이 만나야 합니다. 접촉면이 많아질수록 사랑이 깊어진다. 몸을 따라 마음도 가기 때문이다. 마음이 깊어지는 비결은 일상성이다. 일상에서 자주 접촉하는 것이다. 많이 닿을수록 사랑이 자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다림의 고수이다. 일상의 현장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자주 보고 싶어 하신다. 대화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성숙한 교인은 일상성을 점검한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점검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접촉점을 더 늘려가는 결정을 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회복되면 사랑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회복되면 짐 같이 힘든 섬김이 오히려 신앙생활의 힘이 되어준다. 접촉점이 늘어나면 사랑이 깊어진다. 비결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향한 설렘이다. 설레면 섬김이 지치지 않는다. 설레면 헌신이 아깝지 않는다. 설레면 아깝지 않다. /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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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설레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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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주님과 함께 역전하는 인생
- ▲ 김현수목사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요즘 제일 호황을 누리는 업종이 간판집이라고 한다. 어제 멀쩡히 있던 집도 오늘 간판을 내린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장사가 안되면 간판부터 바꾸라는 말이 있다. 새로움을 추구하라는 말이다.우리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은 간판 하나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명함에 직책 하나 추가하는 것은 삶을 바꾸지 못한다. 직업을 바꾼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변하기 위해서 스펙을 쌓고 이직을 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바꾸길 원하셨다. 그래서 어부들에게 찾아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새로운 길을 알려주셨다. 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세상을 따라가는 방법이 아닌 세상과는 다른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베드로의 지나간 삶은 세상을 따라가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남은 때를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베드로는 더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르게 살라고 이야기한다(2절). 우리도 인생의 역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경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끊임없이 혁신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기업이 있다. 미국의 아마존이다. 그런 아마존이 시장에서 실패할 때가 있었다. 경쟁사를 따라 하려고 할 때였다. 따라 하는 인생은 결코 1등이 될 수 없다. 앞 사람의 등을 보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게 사는 인생은 1등이 아니라 일류가 될 수 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혁신에는 늘 위험부담이 따른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두렵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식당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도 때론 눈치가 보인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위해 저녁시간 약속을 자제하는 것 자체가 튀는 행동으로 보인다. 이런 우리를 세상은 이상히 여긴다(4절).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도전 정신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도전해 온다. 다르게 사는 우리를 조롱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성공이 보장된 편안한 길을 보여준다. SNS에 대박 난 사람들을 보여 주며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십자가로 이기셨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1절).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도전할 차례다. 도전받는 인생이 아니라 도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기를 끌고 있는 네스카페의 캡슐머신이 있다. 이 제품은 실패한 작품이었다. 처음 이 제품을 카페나 식당에서 판매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바리스타들이 내리면 되는 것을 굳이 기계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계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다르게 하기로 했다. 카페가 아닌 가정집에 팔기로 한 것이다. 다르게 시도했던 도전 정신이 실패한 제품을 성공한 제품으로 역전시켰다. 도전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힘이다. 세상을 따라가며 실패를 맛 본 인생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르게 살아갈 때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도전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역전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행복한나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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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주님과 함께 역전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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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 우리 그리스도인은 국민배우다. ‘아브라함’이 대략 4,000년 전 인물이고 ‘모세’는 3,400년 전의 인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 바울’은 대략 1,800년 전, 1,900년 전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 이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경의 유명 인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본문에 나오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는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십자가 신앙, 순교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2천 년, 4천 년이라고 하는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어 연령과 계층,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국민배우다. 신데렐라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지만, 국민배우는 결코 하루아침에 될 수 없다. ‘외로움’, ‘상대적 빈곤’, ‘미래에 대한 불안’, 무명시절의 삼중고를 거쳐 마침내 국민배우, 국민가수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국민배우, 가수들이 그랬고, 아브라함, 모세, 사도 바울도 그랬다.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철저하게 무명한 자요 죽은 자다. 징계를 받은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다(고린도후서 6장 9~10절). 이 무명의 삼중고를 거쳐 국민배우, 천국스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십자가의 고독, 외로움, 불안, 고통의 과정을 거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다.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이 그렇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사니 ‘고독’하다. 로마제국의 주류가 될 수 없으니 ‘상대적 빈곤’에 시달린다. 주님 재림을 고대하며 인내하지만, 그날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런 그리스도인을 ‘나그네’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국민배우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성령님께서 현재의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외로움을 극복하고 주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나는 왕이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 앞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니까 본문의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대 사도 베드로와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민배우’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은 국민배우다’라는 팡파르를 울리며 막을 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관계다. 그리스도인 나그네 한 사람을 놓고, 대 사도 베드로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축복의 떼창’을 부르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를 보면, ‘그룹 퀸’이 10만 이상의 사람들 앞에서 콘서트를 하는데 전 관객이 떼창을 부른다. 감동이다. 그러니까 ‘그룹 퀸’ 혼자 국민배우가 될 수 없다. ‘떼창’을 부르는 팬들과의 관계가 국민가수, 세기의 가수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렇다. ‘그리스도인 나그네’ 한 사람을 놓고, 대 사도 베드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축복의 떼창’을 부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나그네 설움’을 부르지 않는다. ‘나그네 설움’은 나훈아, 주현미가 부른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혼자인 줄 알고 서러웠는데 아니다. 대 사도 베드로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축복의 떼창’을 부르고 있다. 이 관계의 축복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그리고 국민가수 그리스도인 나그네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신곡을 준비한다. 오늘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콧노래 부르며 달려간다. /용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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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나그네 설레임’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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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음은 벽을 넘는 것이다
- ▲ 박병열목사 조선 선비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 절벽에 서 있는 소나무다. 절벽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소나무에서 강인한 생명과 선비의 절개를 보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도전의 횟수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몇 번의 실패에는 일어서지만 수십 번의 실패나 고난을 만나면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벽을 만나도 그 벽을 넘어선다. 링컨은 27번이나 크고 작은 실패를 맛보았다. 그는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 시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며 일어나 미국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는 인생의 어떤 벽도 믿음으로 넘어설 수 있다. 중풍병자는 삼중 벽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벽은 죄책감이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책감은 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책감은 장발장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경감 자베르와 같다. 경감 자베르가 말했다. “한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야. 나는 너를 끝까지 쫓아 다닐 거야” 만일 장발장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살겠다고 하면 그의 죄책감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고 그냥 살아” 예수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니다. 용서하는 분이다. 믿음으로 이 죄책감의 벽을 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벽은 사람의 벽이다.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큰맘 먹고 교회 나올 때 사람들이 환영하고 손뼉 치면 얼마나 좋겠는가 때론 그 반대일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만나러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러 오기 때문이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마음을 다져 먹고 다른 길을 찾았다.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렸다. 그들은 삼중 벽을 믿음으로 넘었다. 불치병을 고침을 받았다. 믿음은 벽을 넘는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물은 멈추지 않는다. 벽 앞에 고인 물은 썩은 물이다. 죽음의 늪이 된다. 살아있는 물은 벽을 만났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간다. 살아있는 믿음은 벽을 넘어 주님이 계신 곳을 간다. 인생의 환란 고통이 그대의 희망의 가지를 자른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라. 나뭇가지가 잘린다고 끝난 게 아니다. 절망의 가지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난다. 믿음에는 절망이 없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왜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답을 찾기 때문이다. 중풍병자가 자신의 죄책감과 환경만 바라보았다면 절망이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바라보았다. 인생에 시선의 방향이 중요하다. 바라보는 대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살길이 열린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처럼 하나의 벽을 넘어서면 또 다른 벽이 막아설 수 있다. 놀라거나 낙심해선 안 된다. 믿음의 시험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강의〉로 유명한 미국 카네기 멜론대학의 랜디 포시 교수는 말했다. “벽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 준다.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은 ‘스톱’이다” 그렇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벽은 절망이지만 믿음의 사람은 벽에서 희망을 본다. 벽을 넘는 믿음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나의 믿음을 인정하시면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된다. /장유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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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믿음은 벽을 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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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어버이는 위대하다
- ▲ 양재성목사 하나님은 이름 지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름을 짓는 순간 그 이름 속에 갇혀 버리게 되니 이름 지어진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많은 모순과 한계를 갖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우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존재를 이해할 수도 없고 자연 세계의 신비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존재를 존재 가능케 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땅을 지으시고 돌보시고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시고 지속하게 하신다. 인간도 그의 은총의 손길 안에 있다. 그분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분이 만물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형으로 어버이를 두셨다. 그리곤 어버이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심어 두셨다. 그러기에 어버이의 사랑은 세속의 잣대로 다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 오늘 요한이 전하는 말씀은 예수의 마지막 기도문이다. 17장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하시는 기도이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어 대제사장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과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게 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보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당신을 믿게 되었고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이 제자들에게도 있게 해 주시고 당신도 그들 속에 있기를 원하셨다. 이 가르침은 참 놀라운 가르침이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속성과 신성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는 사과 속에 사과 씨가 있고 사과 씨 속에 사과나무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의 씨는 하나님께서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버이라고 부른다. 우리 존재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기에 우린 거룩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 사실을 명확히 하면 우린 진정한 자유를 얻고 궁극적 행복에 이르게 된다. 어떤 고난과 고통도 이겨낼 힘을 가지게 된다. 세상이 이길 수 없는 거룩한 존재가 된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셨고 제자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다. 마침내 제자들도 알게 되었다. 결론지으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지으셨다. 그 창조성을 모든 생명체에게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닮은 존재를 낳게 되었고 사랑으로 그들을 기르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인류는 존속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이며 신앙의 신비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가장 잘 닮은 존재는 아버지요, 어머니이다. 그러기에 가장 위대한 이름 가장 위대한 존재는 어버이이다. 어버이를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어버이를 공경하자. 그러다보면 마침내 근원적인 어버이인 하나님을 공경하게 될 것이다. 아멘 /가재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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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어버이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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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성만찬의 의미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빵은 내 살이다. 이 잔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 전통을 수렴하여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셨다. ‘유대교 예식’과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찬식은 구약성서와 유대인들의 생활 전통을 통해서 고유한 성찬식을 거행하셨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항상 ‘먹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사를 통해서 허기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끼리의 일치를, 모르는 사람과의 친교를, 그리고 정치적 유대와 원수와 화해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식사의 개념은 인생의 문제를 넘어서 종교적인 의미를 강조하면서 육체적 양식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식사를 통해서 종교적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평화’, ‘화해’, ‘계약’, ‘일치’, ‘친교’ 등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범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다’와 ‘잊다’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은 구원을 의미하고 또한 ‘기억’은 인간이 그 계약(약속)을 통해서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억’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것으로서, ‘현재화’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 시대의 식탁 관습은 ‘최후의 만찬’을 이해하는데 필수이다. 주후 1세기경 유대인들의 식사는 ‘최후의 만찬’ 예식과 유사한 점을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제사 후의 함께 먹는 식사, 가족들의 식사, 유월절과 오순절에 축제의 식사, 또는 에세네, 쿰란, 바리새파 등 여러 단체들의 식사에서 초대교회의 성찬 양식에 가까운 외적 배경과 식사 이론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쿰란 공동체의 공동식사의 관습이 디다케를 보면 쿰란에서는 빵과 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외관으로 보아서 비슷하기 때문에 K.G.쿤은 최후만찬에 마태와 마가의 보도가 쿰란의 관습을 반영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한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빵과 잔에 대한 축복의 순서는 쿰란의 영향을 받아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쿰란 공동체에서 ‘감사의 제사’나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성찬의 제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행위에 대한 감사와 고백을 통하여서 쿰란 공동체의 식사 형태와 초대교회의 성찬 예식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과 의미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나 있으며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최후의 만찬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된다.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 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식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만찬은 새로운 의미의 성만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명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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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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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성만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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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영혼의 사냥꾼
- ▲ 오준환목사 현대인들은 마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과학과 문명이 고도화된 이 시대에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마귀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 분명하게 말한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장 7~9절)’. 이사야서 14장과 에스겔서 28장을 보면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 타락한 루시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를 보면 마귀와 그 졸개들인 더러운 귀신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귀는 쫓겨난 후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다. 마귀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귀는 계속 공격한다. 계속 유혹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마귀는 특히 고난 속에 있는 교인들을 노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난으로 인하여 약하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교인이 고난 속에서 약해지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절대로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버리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교회도 고난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절대 약해지지 말아야 한다. 자꾸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사사기 43장 19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깨어서 기도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든든히 서가게 될 것이다. 여러분 교회에 오시면 웃으시기 바란다. 우울한 표정을 짓지 말자. 다 잘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 주실 것을 믿고 웃자. 웃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웃으면 제일 먼저 여러분을 살릴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를 다시 살리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웃으면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마귀는 절대로 우리에게서 어떤 틈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물러가고 말 것다. 나는 목회자로서 많은 성도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본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 모두 마귀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전 삶에 치밀하고 아주 교활하게 비집고 들어와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이 영적 존재가 우리의 대적이요 원수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마귀의 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의 사냥꾼에게 맥없이 내 삶을 갖다 바치는 어리석고 미련한 삶을 버리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계획 속에 있다. /신림소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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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영혼의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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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여기서부터
- ▲ 홍한식목사 근거 있는 설은 아니지만 대개 이성적인 사람은 산을 좀 더 좋아하고 감성적인 사람은 바다를 좀 더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바다도 좋지만, 산에 가고, 산을 보면 좀 더 좋다. 부질없는 것에 코 빠트리고 사는 한심한 저 같은 사람에게 성경이 보여주시는 산에서의 여러 소명 사건은 흥미롭다.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신 곳도 호렙산이었고, 출애굽 후에 십계명을 주신 곳도 시내산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제자 몇을 대동하시고 오르셔서 영혼의 숨고르기를 하신 후에 세상과 잠시 격리하시고 신비한 변형의 사건을 보이신 곳도 산이었다. 사실 제자들과 산에 오르신 이 시점에서 주님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목전에 두시고, 이제 숨 가쁜 사건들을 맞이해야 하는 바로 그때, 한 템포 늦추어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들을 가꾸어 가신다. 우리들에게도 바쁘게 돌아가는 수레바퀴의 삶을 살다가도 문뜩 산으로 향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것은 거기서 휘황찬란하게 마술을 부리듯 변하셔서 다 무릎 꿇게 하시고 경배 받고 두려워하게 하심이 아니라, 나를 버려야만 갈 수 있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떠나시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 가지로 육신의 바쁜 삶 속에서 산에 못 올라가면, 이 시간 이곳에서 예배하며 영으로라도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 말의 숲과 계산적 행동의 반복이 일상인 삶에서 나를 떨어뜨려서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산 오름의 작업이 계속 있어야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비이성적인 복음서의 기사를 빼고 진짜 예수가 누구냐 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예수는 도덕적 선생, 지혜를 가르치는 성인, 정치적 선도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다 같이 믿는바 예수는 도덕적 선생도 정치적 지도자도 아니요, 가난하고 헐벗고 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주는 선동가도 아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선생이 아니라 그분이 없다면 나의 온 삶,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나의 생명이 없어져버리고 마는 그 허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야하는 우리의 구세주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고백 속에서 죽음과 죄와 그로 인한 허무를 이기는 참 생명의 기쁨과 용기가 솟아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관록도 중요하다. 삶을 송두리채 흔들고 바꾸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만난 지진과도 같은 신비한 주님의 임재체험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하다. 특별히 사순절기에 변화산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그 신비한 모습으로 나도 변화되는 은혜를 빈다. 그 성령의 체험으로 다시 구름 걷힌 산 아래로 내려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나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사순절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주께서 변화산에서 신비한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도덕적 선생이요 해방자로 알고, 또한 교회가 무슨 관공서나 친목단체처럼 가야한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회개하고 깨달으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우리가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십자가 빛 아래서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신 변화된 모습으로 교회를 다시 대할 때, 교회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는 몸이요, 그래서 사람을 살려내는 몸이란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 그 변화는 바로 여기부터이다. 산을 올라 변화하신 영광스런 주님을 만나 뵙고,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시는 주님과 같이 내려가자. 변화된 나의 모습은 바로 이곳 영적인 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모인 교회 이곳이 바로 변화산이다. /하늘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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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여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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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자의소리서 출판 간담회
- ▲ 한국순교자의소리는 공산국가 학생사역에 도움을 주고자 <마르크스와 사탄>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한국순교자의소리(이사장=에릭 폴리목사, 대표=현숙 폴리목사)는 지난 18일 순교자의소리 정릉 사무실에서 출판 간담회를 열고, 공산권 출신 유학생을 전도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동 단체는 공산주의가 진정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중국을 비롯해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복음으로 가르쳐 이들을 통해 공산국가 사역에 나서야 한다고 피력했다. 여러 캠퍼스 사역자들이 전도와 친교, 예배를 통해 공산권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밝힌 에릭 폴리목사는 “이 학생들은 조국에 시행하는 기독교 박해를 충분히 감당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돌아간다”며, “이에 리처드 웜브란트목사는 교회가 공산국가에서 온 학생에게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가르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감옥에 갇혔었던 웜브란트목사는 자유세계로 유학을 온 이들에게 친교를 맺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 이상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공산권 유학생들이 진심으로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를 변화하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간 <마르크스와 사탄>이란 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일종의 사탄주의 종교라고 피력한 폴리목사는 “공산주의 국가에 살면서 다양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웜브란트목사는 마르크스주의가 진정 원하는 바가 무산계급의 해방이 아닌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자 함에 있다고 전했다”며,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치·경제적 이념이 아니라 사탄주의 종교라는 사실을 밝히고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알려 공산권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공산주의는 지금 사라지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가 계속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며, “한국교회와 캠퍼스 선교단체가 이 책을 통해 공산권 유학생을 교육해 가족과 친구를 변화하는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키길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공산주의를 증오하지만, 공산주의자를 사랑했던 웜브란트목사처럼 우리 또한 그들을 품어야 한다”며,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이들을 훈련하고 세워 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사역을 해낼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고 전했다. 한국순교자의소리 관계자는 “<마르크스와 사탄> 한국어 번역본을 온라인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며, “현재 중국 유학생들을 위한 중국어 번역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베트남어 번역도 이른 시일 내에 진행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 리처드 웜브란트목사의 저서 <마르크스와 사탄>은 젊은 시절 마르크스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공산주의 이념이 추구하는 바를 파헤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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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자의소리서 출판 간담회